결혼식 전날
호즈미 지음 / 애니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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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큰 의미 없는 질문을 하나씩 던지고 싶어진다. 홀수가 좋아 짝수가 좋아? 음, 글쎄... 정말, ‘글쎄’다. 그다지 의미 없는 질문에 별 의미 없는 답이다. 하지만 홀수 짝수에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각각 홀수의 시작인 ‘하나’, 짝수의 시작인 ‘둘’이란 숫자의 의미는 확인하고 싶어진다. 하나와 둘. 하나를 가질 수도 있고 둘을 가질 수도 있지만, 하나만 남는다는 것과 둘이 남는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호즈미의 단편만화집 『결혼식 전날』은 그 ‘둘’에 관한, 그리고 ‘하나’에 관한 이야기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성장이 있고 이별이 있다. 사랑이 있고 그리움이 있다. 눈물 나게 슬프기도 하지만 애틋하게 남겨진 감정이 있다. 그런 사람, 우리의 이야기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 만화다. 누군가의 하루를 듣는 듯한, 일상이 흘러가는 듯한 느낌으로 읽어가고 있는데 거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면 반전이 일어난다. 정말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 많은 감정을 담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작은 반전이 그 이야기 끝에 눈물을 매달게 하거나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준다. ‘이걸 어떡하지?’ 싶은 눈물을 만든다. ‘뭐야 이거?’ 싶은 미소를 만든다. 슬픔과 기쁨, 그리고 또 다른 그 이상의 감정을 주인공들이 만들어내고 있다.

 

표제작 「결혼식 전날」은 제목 그대로다. 결혼식 바로 전날의 남자와 여자가 있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내일을 위한 웨딩드레스를 또 한 번 미리 입어본다. (여자는 며칠 전에도 웨딩드레스를 몇 번 입어봤다.) 초대 손님들의 자리 배치를 걱정한다. 내일 하루를 위해 그동안 준비해왔던 것을 이야기하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마지막 인사. 눈물 나게 애틋한 그 인사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는 순간, 이별이지만 이별이 아닌 순간이 그렇게 찾아온다.

「아즈사 2호로 재회」는 아주 슬픈 이야기다. 그런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누군가의 뒷모습을 저절로 그리게 한다. 집에 혼자 있던 꼬맹이 아즈사에게 일 년에 한 번씩 아빠가 찾아온다. 오늘이 그날이다. 아즈사는 아빠와 함께 아이스크림도 먹고 빨래도 한다. 담배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던 아빠를 엄마는 원망한다. 그렇게 아빠는 떠났고 오늘처럼 아즈사를 한 번씩 만나러 온다. 아즈사와 함께 하루를 보낸 아빠는 다시 떠난다. 아즈사는 또 기다리겠지. 일 년 후에 찾아올 아빠를...

인간 남자와 고양이가 함께 사는 공간을 그린 「그 후」는 살짝 허망한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배려하고 싶지만 귀찮아서 내버려둔 고양이의 마음이 오해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를 보고 있는 듯해서 웃음이 난다. ‘아’라고 말했는데 ‘아~아~아~’라고 들리는 순간이 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빼고 말했더니 전혀 다른 내용의 메시지가 된다. 그런 순간이 일상에 무수히 많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재미있는 일상이다. 고양이의 황당한 표정에 미소 지어진다.

「10월의 모형 정원」은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된 이야기다. 은둔하듯 사는 소설가 남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14살 소녀. 남자는 소녀에게 가라고 말했지만, 소녀는 가지 않고 계속 남자의 집으로 찾아온다. 잔소리도 하고 음식도 만들면서 남자의 집에 드나든다. 어느 날 전단 한 장을 보게 된 소설가는 놀란다. 자기 집에 찾아든 이 소녀는 누구란 말인가. 창문을 통해서 매일처럼 보이던 까마귀는 어디로 날아갔기에 갑자기 보이지 않는 건지. 그리고 이 둘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재탄생되는지 보여주는 새로운 소설의 탄생.

그리움을 담은 「모노크롬 형제」다. 오래전 학창시절에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던 쌍둥이형제의 이야기다. 그 여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형제는 장례식장을 찾아왔고, 둘이 술을 마신다. 이미 할아버지가 되는 나이의 두 사람인데 과거의 기억은 참 또렷하다. 동생은 그녀가 형과 사귀었다고 생각하고, 형은 그녀와 그런 사이였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생은 그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오래 전 그때 그 시간의 이야기를 하면서 둘은 술잔을 기울인다. 그리고...

「꿈꾸는 허수아비」는 사람이 사물이라 여기는 것과 교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오빠와 여동생, 남매만 남은 상황에서 큰아버지 댁으로 옮겨가게 된다. 남의 집에서 생활하는 게 눈칫밥이 장난이 아닐 텐데, 어리기까지 한 여동생에게는 더했겠지. 어린 여동생은 집 앞 밀밭에 있는 허수아비를 엄마라 부르기 시작한다. 여동생은 하고 싶은 말, 풀어놓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마다 허수아비에게 가서 이야기를 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오빠는 캔자스를 떠나 뉴욕에서 생활하던 중 보내는 이의 이름이 없는 엽서를 받는다. 엽서에는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않던 여동생의 결혼 소식이 적혀 있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이 짧은 이야기의 어디까지를 얘기해야할지 조심스럽다. 얼핏 보면 그냥 그런 이야기일 것 같은데... 맞다. 그냥 평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로 많은 것들과 이별을 한다. 부모와 형제자매와 연인과 또, 더 많은 것들과. 그렇게 혼자가 되고 또 혼자 살아가게 된다. 그 과정이 쉬울까? 그 마음이 괜찮을까? 이 단편들이 유독 내 눈에 보여주고 있던 것은 주인공 두 사람 사이의 끈끈함이었다. 잘린 듯하지만 이어져 있고, 못 본 것 같지만 다 보고 있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 알 것 같은 감정들이 우리가 호흡하는 공중에 부유하고 있다. 그렇게 부유하고 있다가 곧 소멸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지금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여섯 편의 단편 속에 있는 이들은 모두 둘이다. 남매, 아빠와 딸, 형제, 동물과 사람, 사물과 사람. 모두 평범한 일상 속에서 주고받는 대화, 감정, 상황을 담고 있다. 특별할 것 없다고 보이는 이들의 이야기가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이유는 뭘까. 너무 평범해서 이야기의 소재로 사용될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하는 매력이 있다. 둘 사이의 관계와 그 흐름이 두 눈과 귀가 따라가게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가 더 나올까, 이들의 마음이 무엇일까, 그 일상을 품어내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싶은 기대감이 생기게 한다. 너무 잔잔하게 흘러가서 언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도 모르게 페이지를 덮고 있게 한다. 그 이야기들의 가운데에 반전이 있다. 울컥거리게 하면서 묵직한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게 한다. 읽는 순간, 그 마음을 듣는 순간의 진심이 그렇게 나오고 있다. 마주치고 싶지 않지만 결국은 마주하게 되는 타이밍. 삶에서 그런 순간 참 많이도 만나게 되지만 이렇게 한 번씩 만날 때마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매번 깊어지는 듯하다.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단편소설이 아닌 단편만화의 맛을 이렇게 만날 수도 있다는 게 즐겁다. 기뻐도 눈물이 나고 슬퍼도 웃음이 난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어떤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나 진심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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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넘게 사용하던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것이다. 굳이 바꿀 이유가 내게는 없었다. 그냥 그대로 익숙하고 편하게 사용해왔던 것인데, 자의로든 타의로든 일단 바꾸고 났더니, 낯설다. 겨우 숫자 두 개 바뀌었을 뿐인데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자꾸만 입에 붙게 기억해내려 해도 어색하다. 온라인 몇 곳에 로그인을 하고 변경 가능한 곳은 다 변경해서 적어 넣었다. 나머지는 사용할 때 생각나면 그때 다시 하면 되는데 그것 역시나 미지수다. 언제 생각날지 알게 뭐람. 자꾸 생각하면 마음만 불안해질 것 같아서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잊으려고 한다. 바뀐 번호쯤이야,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니 뭐 별건가.

 

 

조울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어젯밤부터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어젯밤에는 우르르쾅쾅 천둥번개가 소란을 피우더니 오늘 낮에는 해가 뜨고 맑았다가 바람이 불었다가 비가 내렸다가 다시 또 흐렸다가, 지금은 또 비가 내린다. 추워질 거라는 일기예보가 맞아떨어지는가 보다. 춥다. 이렇게 추운 날에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한 생맥주 한잔이 생각나는 밤. 책은 읽지 싫지만 읽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잠을 자고 싶지만 잠들지 못하는 시간은 또 한 번 이어지기도 하고, 뜬금없이 배가 고파지는 이상한 시간이다.

 

 

날짜별로 구매해야 할 책을 정리해놓다가 바로 옆에 있는 책탑을 잠깐 쳐다봤다. 도서관에서 대출해온 책, 서평도서로 받은 책, 읽고 싶어서 꺼내놓은 책이 나란히 쌓여있다. 그런데 뭘 먼저 읽어야할지 몰라서 이 책 뒤적이다가 저 책 뒤적이다가 시간만 보냈다. 제대로 한권을 읽지도 못하고. 그러다 자꾸 또 신간에 눈 돌리고 있다. 읽고 싶은 책, 사고 싶은 책은 너무 많으니까...

 

 

 

 

더글라스 케네디의 신간이 나왔다. 그의 작품을 정독한 게 없다. 그저 휘리릭 넘겨보다가 말다가, 그렇게 멈춘 게 전부다. 빅피쳐만한 게 없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맞는가보다 하고 끄덕이는 중이다. 그런데 책이 참 자주 나오는 작가...

어쿠스틱 라이프는 ㅎㅎㅎ 일단 웃음이 좀 난다. 이 책 역시라 계속되는 시리즈를 보다 말다 하니까. 연재는 안 보니까 넘기고, 책으로라도 챙겨보고 싶은데 잘 되지는 않고... 그래도 6권이 나왔다는 건 반가운 거니까. 혀끝의 남자는 표지가 매력적. ^^ 백민석의 소설집인데, 단편을 맛보고 싶을 때 골라잡으면 좋을 듯해서 넣어본다. 김소연의 시집. 와우~ 반가움. 조근조근 풀어내는 에세이만큼이나 구절들이 마음을 녹이는 그녀의 시.

 

 

 

국방부 출입기자가 썼다는 한국군 코멘터리가 궁금하다. ^^

요즘 진짜사나이 보면서 군인, 군대에 대해서 조금은 다른 시선을 갖게 되기도 하는데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닐 테니까. 하지만 어떤 벽 하나 크게 세워놓고 아주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 듯하다. 듣고 싶은 이야기다.

다나베 세이코의 신간이 나왔다. 고독한 밤의 코코아. 제목은 좋으나... 실제로 내가 즐기면서 자주 만나고 싶은 작품은 아니다. 비슷한 시리즈처럼 보이는 표지 디자인과 다나베 세이코라는 이름으로 한번은 보고 넘어가고 싶게 하지만... 뭐, 거기까지.

 

 

 

김두식의 다른 길이 있다... 김두식의 이야기를 오랜만에 다시 만난다.  이번에는 인터뷰집이다. 전작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일지 모르겠으나, 그가 하는 이야기의 분위기는 비슷하지 않을까? ^^ 낯설지 않게 만나볼 수 있을 듯.

로지 프로젝트는 책 구매하면서 샘플북으로 받았는데 앞부분 펼쳐보니 흥미롭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샘플북을 끝까지 읽어볼 예정이다. 그 후에도 마음이 동한다면 정식 출간책으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예판기간이 거의 다 끝나간다.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동영의 잘 지내라는 말도 없이.

유홍준의 명작순례.

가장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다...

 

 

 

 

 

 

주말에 조카들이 다녀갔다.

덕분에 어린이책을 몇권 털리고, 온라인 주문도 털렸다. 내일쯤이면 배송되고 좋아라 하겠지. 덕분에 나도 어린이책을 좀 읽어보게 된다. 생각보다 재밌는 어린이책이 은근히 많다. ^^

 

 

 

비가 제법 오려나보다. 빗소리 점점 커지고,

쉬었다 가듯이 멈췄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다.

겨울이 추운 건 당연한데, 조금은 덜 추웠으면 하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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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니까 춥고, 따뜻한 방바닥이 그립고...

노란 고구마가 땡기는 시간...

 

얼마 전에 읽은 폭탄의 기운이 사라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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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전날
호즈미 지음 / 애니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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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만화의 맛, 이런 것인가 보다.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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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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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거리며 사막을 걷는 낙타를 본다. 인영은 낙타를 타고 싶어 한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낙타를 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다. 인영의 꿈속의 낙타는 코뚜레를 하고 있었다. 왜 미리 못 봤지? 낙타를 타는 꿈을 꾸며, 아니, 어쩌면 낙타 자체가 되기를 꿈꾸었을지 모를 인영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다. 낙타를 구속하고 있는 코뚜레. 벗어나고자 했으나 구속이 익숙해지는 것처럼 만든 그 무엇, 아직 그게 남아 있었다.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를 일은 아니다. 사람을 등급으로 매길 수도 있다는 것을. 미친 듯이 스펙을 쌓으려는 이유도 같이 설명된다. 주인공인 열여덟 소녀이자 고3인 방인영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5등급이다. 방인영이라는 존재 자체가 5등급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외모, 내신 모두 5등급. 혹시 모르지. 성격까지도 5등급일지도. 일요일에는 교회의 열혈 신자인 엄마를 따라 구원교회에 나간다. 특권층을 대변하면서 잘 나가는 ‘방 변호사’인 아빠는 물질과 부를 축적한다. 가끔 분을 못 이기는 일이 생기면 교회에 나가 기도를 빙자한 울부짖음으로 포효한다. 교회의 친목모임은 계급을 구분 짓는 간 보는 모임이고 위선적인 가면을 하나씩 쓰고 대화에 동참한다. 신앙고백이나 기도를 통해 신앙심을 상승시킨다고 하지만, 돈 자랑이나 사기성 농후한 멍석 위에 앉아 있는 것과 뭐가 다른지를 모르겠다. 뒤돌아서서는 ‘좆도, 자식 농사 죽 쒔다...’라고 말하는 인격의 방 변호사 같은 사람들. 인간 내비게이션이 된 듯한 엄마의 추적 역시나 인영의 숨통을 조이는 존재일 뿐이다. 할머니 제사는 안 챙겨도 돈 많은 방 변호사의 생일을 챙기는 고모가 있다. 유치원 교사를 하면서 연상의 유치원 원장과 결혼하려는 삼촌도 있다. 그 안에서 자기 목을 조이는 것들을 처리하고자 마음먹은 방인영이 있다.

 

고3. 혼란스럽고 스트레스 많이 받을 시기의 치기 어린 반항 정도로 여겼다. 방인영이 어른들에게 쏟는 말들은 그 안의 스트레스를 날리기 위한 하나의 처방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야기의 흐름이 어디로 흐를지 몰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읽어가고 있는데, 이거, 색다르다. 물론 사회적 문제인 ‘존속살해’라는 모티브를 배제할 수는 없다.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설로 만나는, 이 완전범죄를 꿈꾸는 소녀의 이상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할지 궁금해지는 많은 물음표로 내 머릿속을 채운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들을 해치우고 개운하게 살아가는 삶.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준 것이다. 거기에 청부살인의 모양을 만드는 ‘모래의 남자’의 존재는 인간의 심리를 들여다보게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듯한 모래의 남자. 인영은 그 남자를 조종하듯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인다. 나이 마흔의 남자와 열여덟 소녀. 얼핏 강자의 모습을 한 쪽이 남자일 것 같으나 오히려 남자를 조종하는 것은 인영이다. 그럴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 무렵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끄덕임의 생각을 끌어온다.

 

행복은 외계에나 있는 거다. 행복을 찾아 떠난 사람 중 돌아온 사람은 모두 행복을 찾지 못했고 행복을 찾은 사람은 모두 돌아오지 않았다. (233페이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나를 귀찮게 해서, 나를 공격해서, 혹은 상대만 아니면 내가 더 가질 수 있을 어떤 것을 위해서... 결론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어떤 존재를 사라지게 한다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판단이 들기에 살인을 꿈꾸고 계획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생각은 생각으로 끝나는 게 보통이다. 안 그랬으면 세상의 많은 사람이 살인자라는 죄명을 하나씩 달고 있지 않을까? 겁쟁이라 불러도 좋다. 살인을 꿈꾸었으나 비겁함이 살인을 중단하게 했으니, 적어도 아직은 윤리적 ․ 도덕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주인공 인영의 모습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있는지 모르겠다.

 

인영이 살아가는 세상은 소설 속의 세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하나 다른 것 없이 똑같다. 신을 부르짖으며 또 하나의 계급사회를 형성하는 종교,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건지도 모를 등급을 확인하는 시간일 뿐인 진로상담, 외모가 자신의 등급인 엄마가 매일 피트니스센터로 출근하는 이유, 가진 자들의 뒤를 닦아주면서 부와 명예를 축적하는 아빠. 돈을 향해 절이라도 하겠다는 듯 부모보다 돈을 가진 형제에게 굽실거리는 삼촌이나 고모. 그들의 모습은 곧 만날 인영의 모습이었다. 인영이 꿈속에서나 만날 낙타를 현실 세계에서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게 싫었던 인영이 꿈꾸는 것을 실행에 옮긴 것뿐이다. 당돌하게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한참을 망설이게 된다. 개운한 느낌이 들면 나는 사악한 것인가. 죽은 이들을 안타까워해야 하고, 범죄자를 응징해야 하는가. 잘 모르겠다. 자신을 옥죄는 많은 것들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인영의 마음을 알 것도 같고, 그런 인영에게 앞으로의 삶을 제시해주는 부모나 어른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나는 양가감정을 가지고 양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 한쪽에게 ‘옳다’는 의견을 던질 수 없다. 잔혹하리만치 폭력적인 한 여고생의 무자비함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게 우리의 마음-비록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감정일지라도-을 잠깐 보여준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터지기 일보 직전인 폭탄을 보고 싶다면 인영을 보라고 말해주고도 싶다. 폭탄이 터지면 인영이처럼 행동할 지도 모르니까. 자신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부모님을 통해 보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빠를 아빠가 아닌 ‘방 변호사’라고 부르는 인영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온갖 부조리를 처리해주는 아빠가 가진 부나 명예가 옳거나 좋아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급을 나눈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외모나 성적이 5등급인 자신을 끌어올리려는 엄마의 몸부림이 버거웠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쌓여서 해서는 안 될 존속살인이라는 것을 끌어냈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이 불러온 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심판 같았다. 살인, 자수, 누명. 여러 가지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지만 무엇 하나 완결된 것이 없어 보인다. 이는 우리 살아가는 세상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해결되기 어려운 숙제처럼 남아 있다는 것이 아닐까. 살인을 저지른 자도, 누명을 쓴 자도, 살인을 사주한 자도,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어떤 시선으로든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것인지도...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인 인영의 등장은 처음부터 이야기에 홀딱 빠지게 한다. 말장난처럼 보였던 신랄한 말대꾸는 블랙유머처럼 보이기도 했다. 뻔뻔한 인간들에게 나 대신 퍼부어주는 속사포 욕처럼 개운하게 들린다. 모의고사나 학원, 과외에 신경 쓰면서 성적을 올려야 하는 인생은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짊어지고 가야할 숙명처럼 보이기도 했다. 목이 졸리고 있던 고양이는 이들을 대변하는 모습인 것만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살인(존속살인)에 면죄부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살인을 불러오는 그 심리를 알 수도 있게 만든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한명으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 살인사건을 세상에 던져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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