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약국
니나 게오르게 지음, 김인순 옮김 / 박하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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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좋아하는 책은 어떤 맛이 나죠? 어떤 책이 당신을 그 모든 악에서 구해주죠?"

(중략)

어떤 책이 나를 구해줄까?

그 대답이 생각났을 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책들이 많은 걸 할 수 있지만 모든 걸 할 수는 없어요. 중요한 일들은 직접 살아봐야 해요. 책으로 읽지 말고. 나는 내 책을…… 직접 체험해야 합니다." (373~374페이지)

 

책을 좋아하면서도, 습관처럼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맘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가끔은 거식증 걸린 것처럼 오랫동안 읽지 않기도 하고, 가끔은 폭식하는 것처럼 몰아서 읽고 싶을 때도 있다. 재밌고, 공감하고, 몰랐던 것을 알 때도 있지만, 책이 많은 순간 중에서 1순위가 되지는 않는다. 소설 『종이약국』 장의 말처럼, 책이 많은 걸 할 수 있지만 모든 걸 할 수 없음을 알아서일까. 그저 어느 '순간'의 만족이나 필요 때문에 책을 대할 때가 점점 더 많아진다. 한동안 그 부분을 고민하곤 했는데, 여전히 답은 없다. 그저 그래 왔듯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의미와 필요에 맞게 손을 뻗게 되면 다행인 거로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도, 앞으로도, 크게 변함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즈음, 마치 모든 것을 치유하고 해결해줄 것처럼 슬며시 다가온 책이 이 소설이다. 소란스러운 많은 것을 고요하고 잔잔하게 해줄 것만 같았다.

 

파리, 센 강 위에서 그 존재감을 뽐내며 자리한 선상 서점 '종이약국'이다. 서점주인 페르뒤 씨는 책을 사러 온 손님에게 아무 책이나 팔지 않는다. 어떤 마음으로 책을 사러왔는지 보면서 그에 어울리는, 타이밍 좋게 스며들 수 있는 책을 권한다. 손님이 그게 싫다면 그만이다. 그냥 나가거나, 그의 선택을 믿고 그 책을 손에 들고 나가거나 둘 중의 하나다. 많은 돈을 지불한다고 해서 그의 서점에서 책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서점은 그런 곳이다. 첫 작품을 성공하고 두 번째 작품을 쓰지 못하는 젊은 작가가 찾아오는 곳. 하고 싶은 말을 못해서 울분 하는 젊은 여자가 뛰어 들어오는 곳. 그가 몇 권의 책을 같은 아파트 사람들에게 들고 가게 만드는 곳. 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반창고를 붙여주는, 말 그대로 약국이다.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상처가 그의 손에서, 그가 건네는 책 한권으로 다 나을 것만 같다. 그때 문득, 궁금해진다. 그가 사람들의 상처를 그렇게 어루만지고 있을 때, 그의 상처는 누가 치유해주지? 그는 상처라는 게 아예 없는 사람인가?

 

페르뒤 씨는 책들 옆에 있으면 늘 피난처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배 안에서 온 세상을 발견했다. 온갖 감정, 모든 장소와 모든 시대. 결코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었으며 책들과의 대화로 충분했다. 때로는 사람들보다 책들을 더 높이 평가한 적도 있었다.

책들은 덜 위험했다. (323페이지)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편지 한 통이 침잠한 그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21년 전에 그를 떠난 여자 마농이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이제야 읽게 된 것. 그녀가 보낸 편지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떠난 자기를 이해해달라는 얘기겠지, 변명 같은 말이 한 가득하겠지, 싶은 불신으로 가득한 마음. 떠난 그녀를 향한 분노와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던 불안함이 21년 동안 봉인된 편지로 남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읽게 된 그녀의 편지는 그를 혼란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정박한 채로 배 위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기만 했던 그의 선상서점에 시동을 걸게 했다. 그가 향할 곳을 생각하면서, 단 한 권의 책과 저자를 간직하고서, 늦었지만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떠난 항해.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연들, 시간에 녹아들면서 그는 점점 자신의 마음을 읽는다. 상처로 검게 물든 마음이 씻어가고 있음을 본다.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 거친 목소리 속의 아픔을 읽는다. 그만의 방식으로 공감하고 동요하면서...

 

한 권의 책을 품에 안고 떠나는 그 마음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앞부분에서 그는 마치 세상 모든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누구라도, 그 어떤 문제를 안고 그를 찾아가도 아무 어려움 없이 서가에 쭉 꽂힌 책 한 권을 금세 꺼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이 책으로 어서 펼치세요.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약은 이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준 약을 꼭꼭 씹어 삼키면서 아픈 몸이 낫기를 기다린다. 약을 넘기는 물이 너무 뜨거워 호호 불어가면서 마시느라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겠지. 아니면 의심의 눈으로 약을 바라보다가 입안으로 넣기를 주저하기도 하겠지. 어떤 식으로든, 결국은 한번 믿어보라는 말일까. 그가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는 무슨 근거인지 몰라도 당당했다. 이 책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에 사람들은 그가 건넨 책을 손에 들고 종이약국을 나간다. 그리고 다시 찾는다. 다시 한 번 처방을 내려달라고.

 

사랑하는 그녀가 떠난 후로 그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로 살아온 시간 동안 그 깊이만 더해갔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배에 시동을 걸 때,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그가 자신의 약을 찾으러 떠날 때, 이제 곧 그의 상처에 약이 발라지고 아물어질 거란 믿음이 생긴다. 남을 치료하느라 정작 자신의 상처를 꺼내지 않았던 그가 한 발 내딛는 순간이었으니 얼마나 큰 용기였을까. 방문 하나를 닫아두고 열지 못하는 그 공포를, 그는 이십 년 동안 계속해왔으니 늦어도 너무 늦은 치유의 길이었으리라. 유독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빛났다. 잘려나간 머리카락, 사라진 한쪽 가슴의 여인에게서도 빛이 났다. 많은 시간을 그렇게 흘려보내고 돌아온 그가 빛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그의 여정은 의미 있었다. 그가 가슴에 담고 돌아온 거대한 감정들이 앞으로 살아갈 그의 시간에 가득할 거로 생각하니 좀 부럽기도 하고, 그의 모습이 멋져 보이기도 한다. 쉰이 넘은 나이에 자박자박 걷듯이 시작하는 그의 인생이 어떤 그림으로 그려질지 눈에 선해서 말이다.

 

치유소설이라고 불러도 될까, 아니면 로맨스소설이라고 불러야 할까. 키워드는 '후회남' 정도? ^^ 그의 선상서점 종이약국이 세계 일주 하듯 온 나라에 정박했으면 좋겠다. 언젠가 내가 사는 가까운 곳에 정박한다면 한 번 찾아가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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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다이어리의 첫 장에 올해 하고 싶은 일들을 적었다.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들. 그래도 한 번은 꼭 해보고 싶은 일들. 어쩌면 불가능할 확률이 높기에 조금은 모험 같은 바람을 담아 소박한 소망을 적었다. 남자는 우연히 여자의 다이어리의 그 페이지를 보게 된다. 여자를 만나러 가는 어느 날, 남자는 다짐하며 집을 나선다. 여자가 다이어리에 적은 그 많은 바람 중의 하나는 이뤄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여자의 목록 중 한 가지를 이뤄주려 어딘가를 향한다. 여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가능’으로 바꿔놓는다. 여자는 놀랐다. 이렇게도 이룰 수 있는 일이었구나, 하는 마음에.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이 별것 아닌 것처럼, 이 남자로 이뤄지는 순간 때문에... 남자는 천기누설을 알려주겠다며 말한다. 다음 생이라는 건 없다고, 설령 다음 생이 있다고 해도 그때 다시 태어나면 전생을 기억이나 할 수 있겠느냐고, 기억도 못 하는 전생에서 바라던 것을 그때 이룰 수 있겠느냐고. 그러니 이번 생에서 하고 싶은 건 지금, 이번 생에서, 지금, 해야 한다고...

 

 

 

 

 

 

 

 

 

좋아하는 소설의 한 장면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남자가 저 말을 하는 건 여자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애를 쓰면서도 쑥스러워서 핑계 대는 말일 거로 생각한 적이 있다. 이 소설을 몇 번 재독 했는데, 그때마다 저 장면에서 한참을 멈추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남자가 마음 표현하는데 어색해서 하는 말일 거로 생각했던 게, 두 번째 세 번째 읽는데 점점 남자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된다. 정말 다음 생이라는 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러니 이번 생에서 다음 생으로 미루는 일을, 다음 생에서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짙어지곤 했다. 종교적인 의미로도 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굳이 그걸 믿는다거나 믿지 않는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게 더 맞겠다. 그 정도로 나에게 크게 와 닿지 않는 말이었는데, 요즘은 가끔 궁금해진다. 남자의 말처럼, 정말 다음 생이 없을까. 이번 생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위로하는 마음에서라도 하게 되는 다짐을, 정말 다음 생에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걸까.

 

‘만약’이라는 가정을 좋아하지도 않고, ‘다음에’라는 약속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굳이 다음 생이 아니어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냥 하면 되고, 할 수 없는 건 포기하기 마련이라 크게 의미를 두는 단어가 아니었다. 만족도 아니고 포기도 아닌 것들에 대해 ‘만약’이라는 가정은, 지금의 불안을 잠재우려는, 몇 분 동안만 지속할 ‘순간의 처방전’ 같았다. ‘다음에’라는 약속 역시 내가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에 누군가에게 쉽게 하지 않게 되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 소설 속 남자의 말에 종종 공감했다. 진짜 원하는 건 이번 생에서 해야 하고, 기억도 못 하는 다음 생에 대한 기대나 약속 같은 건 의미 없어 보였다. 그게 맞는 거로 여겼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만약에’라는 가정을 떠올리고, ‘다음 생’이라는 부질없는 기대를 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의미 없는 바람을 자꾸 하게 된다. 다시 태어나서 하고 싶은 게 많은 것도 아니다. 무조건 돈이 많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지금 못하고 살았던 모든 것을 다 싸가서 이루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단 하나, 딱 하나, 오직 하나.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딸 바보 아빠’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 아니, ‘딸 바보’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가족이 소중한 줄 알고, 자기가 만든 가정에 책임감을 느끼며, 자식을 사랑하면서 키워야 한다는 그 뻔하고 당연한 진리를 아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 불가능할까? 정말 다음 생의 나는 이런 바람을 기억조차 못 할까? 이게 그렇게 거창한 바람인 건가? 분명한 건, 나의 이번 생에 아주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고 해도 결코 이룰 수 있는 바람이 아니라는 거다. 이미 이번 생에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아주 오래전에 확인한 것이니,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절대 바랄 수 있는 소망이 아닌 거잖아. 그러니 자꾸 기대고 싶은 가정일 수밖에. 정말 다음 생이 있다면, 이라는 가정을 자꾸 바라게 되는 걸 어쩔 수가 없잖아...

 

12월 한 달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다. 매일 저녁에 병원으로 가서 아침 찬바람을 맞으면서 집으로 온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잘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친구가 보낸 문자 한 통에 크리스마스인 걸 알았다. 병실 입구 보호자 휴게실에서 사람들이 케이크를 먹고 있기에 누구 생일파티를 병원에서 하는 줄 알았는데,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던 거다. 1년 반 사이에 아버지의 병원행이 벌써 세 번째. 기간으로 따지면 두 달을 넘기고 있다. 중환자실에서 열흘을 보내고 겨우 일반실로 옮기니 간병이 문제가 된다. 24시간 보호자 대기해야 가능한 일반실행이 처음부터 꼬이고 삐걱댔다. 작년에는 전화 한 통에 바로 구해지던 간병인이 이번에는 왜 그렇게 구하기 힘든 건지, 이대로라면 그냥 중환자실에 있어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했다. 업체 서너 군데를 알아봐도 지금 바로 올 수 있는 사람이 없단다. 연말이라 그런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지인께 부탁해서 건너건너 겨우 한 명 구했는데, 그나마도 계약된 시간보다 40분씩 늦는다고 미리 말한다. 병원까지 오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린다면서 아침 시간 40분 늦는 것에 이해를 구한다. 아쉬운 입장이라 바로 오케이 하고 시작했는데, 며칠 지켜보니 생각보다 간병인이 잘 봐주고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면서 슬슬 사적인 것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어 궁금한가 보다. 왜 다른 가족들은 찾아오지 않느냐고 묻는다. 다들 멀리 살고 있고 연말이라 바빠서요, 라고 둘러댔다. ‘아무도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라고, ‘나도 여기서 도망가고 싶어요.’라고 사실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진짜 그러고 싶은데, 도망가고 싶은데...

 

겨울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어서 다음 생을 만나고 싶은 건, 정말, 아이 같은, 철없는 바람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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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쟁탈기 보름달문고 63
천효정 지음, 한승임 그림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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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효정의 글을 좋아한다. 나는 이미 아이가 아니지만, 작가의 글로 공감하고 웃던 시간을 경험했던지라 매번 천효정의 신간이 나왔다고 하면 궁금하다. 삼백이의 엉뚱함으로 깔깔거리게 하더니, 이번에는 열세 살 소녀의 성장기로 두근거리게 한다. 아, 여기서 이 단어를 써야겠다. 설렘설렘. 그냥 설레는 것도 아니고 그 강도가 굉장히 센 어감이다. 설렘설렘. 두 볼에 홍조를 띠고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과 누군가를 향해 귀가 쫑긋 열리는 두근거림이다. 살면서 이런 순간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유독 그 떨림에 두근대게 하는 건 ‘처음’일 때다. 이 책의 제목처럼 ‘첫사랑’이어서다. 입을 열고 이 단어를 말하는 순간부터 떨림이 오고 있잖아. 안 그래?

 

앙큼한 깍쟁이 같은 열세 살의 세라가 사립 명문 학전초등학교로 전학을 온다. 세라의 모든 행동은 계획적이다. (이런 아이가 있을 수 있다는 데서 정말 놀랐음. 요즘 아이들 다 이런가?)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지 않는지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으로 처세술을 발휘한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게 잘 되어가나 싶더니 이 학교의 킹카가 세라에게 눈독 들인다. 아직은 안 되는데,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자리매김을 확고히 한 다음에 일이 터져도 안심인데... 계획과 어긋난 복병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면서 세라의 새 학교생활에 위기가 온다. 거기에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명구의 등장은 이야기가 점점 흥미롭게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명구는 정신지체 장애우다. 근처의 보육원에서 사는 명구는 학전초등학교의 특별한 학생이다. 아이들은 명구를 바보라고 부르지만 세라의 눈에 들어오는 명구의 행동은 특이하면서도 매력적이다. 어라? 명구 좀 멋진걸?!

 

자기가 예쁘다는 것을 아는 아이, 그 외모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더 잘 아는 아이, 아이들 세계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하고 그 세계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방법을 터득한 아이가 세라다. 세라의 모든 행동은 계산되고 계획된 거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보여야 할 모습을 취하면서 자신만의 자리를 확고히 다진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자랄 때도 이랬나? 나는 좀(아니, 많이) 순진했던 것 같은데... 세라의 행동을 보면서, 세상살이에 치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어른들의 찌든 삶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게 지금 열세 살 아이가 살아가는 방식인가 싶어 무섭기도 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내가 자랄 때와 다른 그 시간의 적나라함을 확인하게 하더니, 이야기가 봄날의 꽃가루 날리는 장면으로 바뀐다. 갑자기 세라의 눈에 들어온 명구 때문이다. 아이들이 바보라고 불리는 명구의 다른 모습을 본 순간 세라의 마음은 철렁한다.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한다. 내 마음이 내 것인데 왜 내 맘대로 안 되는 건지 모르는 사이에도 두근두근. 왜 명구를 보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거냐고! 명구는 내 취향 아닌데, 왜 하고많은 매력남들 놔두고 명구가 눈에 들어올 게 뭐야? 세라의 이런 고민을 알 리 없는 명구의 천진난만함이 대조적이다. 한쪽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꾸 눈길이 가는 걸 붙잡지도 못해 동동거리는데, 한쪽에서는 유유자적 느릿느릿 기어가는 거북이의 모습이 연상된다. 난 내 갈 길만 가면 된다는 것처럼. 어쩌면 좋아?!

 

어느 무리에서나 있을 법한 캐릭터가 하나씩 있다. 여자아이들의 리더 격인 예린이, 모든 여자아이들의 로망 같은 대상 다니엘, 눈치 없이 둔해 보이는 반장 대호. 이 아이들 때문에 세라의 계획이 자꾸 한 발짝씩 빗나가는 것만 같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분위기로 이야기는 흐른다. 세라가 계획한 대로 새 학교에서의 적응과 처세술을 발휘했다면 완벽한 모습의 학생으로 자리했을 텐데,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될 텐가. 원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관심과 대호의 순박함이 빚어내는 갈등, 그에 예린이가 희생양이 되는 계획에 없던 복병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세라는 당황한다. 그 당황의 최고봉은 역시 명구에 대한 마음이다. 처음 세라가 등장했을 때부터 파악할 수 있는 건, 세라가 어떤 아이로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세라는 냉정하고 잔인한 세상에서도 거뜬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캐릭터로 등장했다. 새 학교에서 기죽지 않고 자리 지키면서 살아남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고, 그에 마음 단단히 먹고 교실 문을 연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명구는 절대 눈에 들어오지 못할 대상이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거다. 세련되고 공주님 같은 세라와 어딘지 좀 다르고 많이 느린 아이 명구라니. 아마 세라가 생각했던 첫사랑의 그림은 이게 아니었을 텐데. ㅎㅎ 그래서 웃음이 많이 난다. 이 설정이 세라에게 가져올 변화가 어떨지, 이 과정에서 보여주고 싶은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서다. 전혀 관심 두지 않은 아이 명구를 향한 세라 만의 시선, 그 시선을 통해 세라가 보게 될 난생처음의 것들, 그리고 성장해야만 하는 그 시간에 새롭게 쌓이게 될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얼 봤느냐고? 봤지. 보긴 봤지. 열세 살 아이의 설레는 맘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공부나 집안 배경이나 눈에 보이는 계산이 아닌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명구의 순수함, 그런 명구에게 관심 두면서 점점 세상을 보는 시선을 넓혀가는 세라의 표정을 함께 보게 되는 거였지. 저절로... 어때? 이 정도면 이 아이의 첫사랑이 얼마나 큰 알을 낳았는지 보이지 않아? 세상을 살면서 계산도 해야 하고, 사람도 가려야 하고, 피해가야 할 것도 있게 마련이지만, 아직 그 모든 것을 경험하기도 전에 그런 세상을 선입견처럼 듣고 배우며 자라는 아이들이 있다는 게 씁쓸했다. 나는 그런 걸 가르치지 않는 어른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아이, 부끄러워...) 세라가 변하는 모습이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그 변화에 응원하게 된다. 정말 봐야 할 것을 보고, 해야 할 말을 하는 아이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위태로운 세라의 가족과 학교생활에 좀 더 웃음이 많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은 나만 드는 걸까? 아니면 그냥 바람인 걸까.

 

세라가 명구와 어떻게 발전하게 될지 궁금하다. 사실 웃음이 더 많이 난다. 열세 살 아이의 마음이 새삼스럽기도 하고,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해서. 어른들 세상의 축소판 같은 아이들 세상에서 보게 되는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다른 점도 있고 비슷한 점도 있어서 새롭게 보게 되는 세상을 만나기도 하고 공감을 담아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라의 시간을 살고 있을 아이들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초등학교 5학년 여자 조카가 있다. 이 아이가 내년에 그 시간을 살아갈 거로 생각하니 긴장이 된다. 지금도 그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은데 내년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그러네. 이 작은 이야기로 공감하고 품게 될 것들. 설렘과 두근거림, 긴장감과 기대감, 쓸쓸함과 안도감까지, 많은 감정을 불러올 이야기를 또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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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된 병원 생활이 익숙할 것 같은데,

아무리 해도 이건 익숙해지지 않을 듯하다.

어제는 집으로 돌아와 잠깐 잠이 들었는데 엄마 말로는 7시간을 꿈쩍도 않고 잠을 자더라고...

몇달동안 하루에 2~3시간 자던 것을 생각하면 꿀잠이어야 하는데

어째 피곤은 더 쌓이기만 하는 건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서평도서 신청도 신중하게 생각하는 거였는데

갑작스러운 일에 집에 다녀갈 때마다 보이는 책이 참 무겁게 느껴진다.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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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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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옳은 일이라고, 그때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라고 믿으며 그 순간을 견딘다. 여러 경우를 떠올리며 계산을 한다. 뭔가를 더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면 덜 잃을 것을 생각한다. 어느 쪽으로든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의 위험을 감수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므로 그쪽으로 손을 뻗는다. 잘했어. 잘한 거야. 토닥토닥. 그리고 안도한다. 이제는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더 중요한 걸 지킬 수 있다면. 내가 조금만 참으면 다 좋은 거야. 하지만 괜찮지 않다. 좋은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게 되는 거다. 참아야 할 게 있고, 참아서는 안 될 게 있다. 셀레스트가 용기를 내고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할 때, "이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631페이지)라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누구에게도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던 거다.

 

자신이 처한 진실을 숨기기 위해 시작한 거짓말은 점점 몸을 불리고, 표정을 가리기 위해 쓴 가면의 화장은 점점 두꺼워진다. 읽다 보니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이들의 사연에서는 좀 불편하다. 그저 마음속 말들을 표현하지 않은 거라고 해 두자.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은 게 거짓말인 건 아니니까. 피리위 반도에서 만나게 된 세 여자 매들린, 셀레스트, 제인의 숨겨진 마음을 듣는 게 독자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서로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품은 사이지만, 그녀들은 정작 마음 깊숙이 자리한 고통을 서로에게 드러내지 못했다. 아마 그 세 사람만의 처세술은 아닐 거다. (나도,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 사람도 그런 경우가 있으니까) 예비학교에 다니는 다섯 살 아이를 둔 학부모들, 자기 아이가 세상의 유일한 천사인 것처럼, 가정이 이룬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학교 안에서도 적용된다고 믿는 개념 없는 부모들의 태도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권력을 정한다. 시쳇말로 엄마들의 치맛바람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 안에서 세상의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마흔의 여자 매들린,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며 부유한 삶 이면의 것을 감당하는 셀레스트, 우연히 찾아든 해변의 매력에 빠져 아들과 함께 피리위 반도에 스며든 싱글맘 제인. 세 여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예비학교의 학부모들과 각자의 인생이 들려줄 소소하고 큰 이야기들이 이 소설을 끌고 간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고 그 죽음을 파헤치는 수사의 과정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다양한 인물을 한 명씩 배치해놓고, 그들의 말을 잠깐씩 끼워 넣으며 독자가 사건을 추리하게 한다. 도대체 누가 죽은 거야? 왜? 범인이 누구기에 이 사람들의 진술을 다 듣는 거지? 근데 모두 엇갈리는 진술뿐이잖아?

 

폭력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난폭해진다. (451페이지)

 

예비 학교 학부모들의 퀴즈대회가 있던 밤, 누군가 죽었다. 소설은 퀴즈대회가 있기 6개월 전의 이야기부터 들려준다. 매들린과 셀리스트, 제인의 개인적인 일들을 하나씩 드러내면서 세 여자의 삶을 독자의 눈에 각인시킨다. 학교에서 전남편의 새로운 가족과 아이를 봐야 하는 매들린은 쿨한 전처이자 엄마가 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사람의 감정이란 게 이성이 이끄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매들린의 상황이다. 이런 희한한 상황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견디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려 애쓴다. (이런 관계가 뭐 어때서? 나,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면서 그녀 안에 자리한 용감무쌍함을 매 순간 발휘한다. 자상한 남편과 쌍둥이 아들, 부유한 환경이 우아한 삶을 부여한다고 존재 자체로 증명하는 셀레스트는 많은 여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다. 부족한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사는 게 지극히 정상적이고 잘 사는 거라고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여자라서 행복해요. 나를 위한 모든 게 최상이에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그런 만족이 셀레스트의 행복을 얼마나 지속하게 해줄지 궁금해질 무렵, 이 소설의 분위기가 전환된다. 가난한 싱글맘에게 세상은 녹록지 않다는 것을 언제까지 알게 하려고 하는지, 제인과 그녀의 아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첫날부터 호의적이지 않다. '카더라 통신'의 중심에 선 학부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선입견으로 이방인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제인은 포기할 수 없다, 아직은. (이런 아름다운 풍광이 자리한 곳에서 정녕 내가 발붙일 곳은 없는 건가요? 내 아들과 행복해질 권리가, 나에게도 있어요...)

 

이 소설의 제목만 보고, 처음부터 등장하는 학부모의 말을 듣고,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의 주인공은 아이일 거로 생각했다.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읽어가면서 내내 느꼈다. 이 거짓말의 주인공은 아이일 수도 어른일 수도 있지만, 그 대상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이미 커져 있는 상태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게, 그게 인생을 얼마나 휘두르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게 이들의 실수라면 실수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겠지만,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린 순간의 안도가 모든 것의 끝은 아니라는 거다. 그저 한 번, 두 번, 그냥 지나가고 말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쓴 약을 삼킨 뒤 달콤한 사탕 한 알 입에 넣는 것과는 다르다. 전혀 다른 무게다. 너무 늦게 알게 되는 일들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그 답을 줄 수도 있음을 소설은 말한다. 무엇보다, 친밀하다고 여기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지만, 정작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이자 반전으로 흥분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동시에, 서로 다른 삶을 걸어온 이들이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을 시사한다. 새로울 게 없는 말이지만, 어쩌면 나 아닌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서로에게 시종일관 가면무도회장에 초대받은 것처럼 행동한다. 상대를 향한 진심을 가린 채로, 앙숙처럼 지내다가도 순간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기도 하는, 다른 엄마에게 질 수 없어 소리 없는 발악을 내지르는 일밖에 할 수 없는, 표정과 감정을 눌러 담는 것에 익숙하다. 그래서 알 수 없고, 알리고 싶지도 않다. 그 표정 너머의 진심을 말하고 싶지 않은 거다.

 

다른 사람 문제는 항상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고, 다른 사람 아이는 항상 고분고분해 보이는 거야. 재빨리 걸어가는 지기를 보면서 매들린은 생각했다. 제인이 가족사진을 가지러 간 사이에 매들린은 제인의 작고 깔끔한 아파트를 둘러보면서 언제나 그렇듯 애비게일과만 함께했던 방 하나짜리 아파트를 떠올렸다. (260페이지)

 

제발, 그러지 마. 참지 마... 나도 모르게 그녀들에게 주문을 걸면서 읽고 있었다. 더는 그러지 말라고, 가리지 말라고. 그렇게 나의 시선은 그녀들이 언제쯤 터트릴 것인가 하는 기대감으로 문장을 쫓았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과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개운함이 밀려왔다. 등장인물들의 엇갈린 진술 속에서 진실을 찾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서야 마주하는 진실은 뜻밖의 감정을 불러왔다. 이렇게 풀릴 수도 있다는 걸 보면서, 누군가를 향한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긍정의 기대를 품게 한다. 아줌마들의 가벼운 수다 한판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 안의 뿌리 깊은 진심을 전혀 가볍지 않았다. 인간의 겉모습 뒤로 가린 삶이 얼마나 많고 다양할 수 있는지, 어떤 고통으로 끌어안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 사소한 거짓말이 결코 '사소한' 것으로 머물지 않음을 풀어낸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겪는 오해와 진실에 관해 이만큼 재밌게 읽게 하는 소설이 있을까 싶다. 동시에, 읽는 재미는 더없이 좋았지만 온전하지 않은 우리 삶을 그대로 마주하는 것 같아서 아팠던 소설이기도 하다. 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 달콤한 초코파이에서나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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