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정원 - 제15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7
시바사키 도모카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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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건조하게 살아서 그런 걸까. 그리움이란 단어 속에서 오래전 어떤 기억을 떠올려보려 하니 금방 떠오르는 게 없다. 오늘도 매일 다니는 거리, 자주 보는 사람들, 익숙한 건물.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채우는 평범한 모습으로만 보인다. 언젠가, 지금보다 시간이 더 흐르면 다르게 보일까? 선뜻 어떤 대답을 꺼낼 수가 없다. 그렇다는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는다. 곰곰 생각해보니, 항상 보는 곳들이라 특별함을 느낄 겨를이 없는 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그 장소 그 시간에 포함할 사람이 함께한다면, 그 대상이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무언가를 함께한 기억이 머문다면, 나는 지금의 건조함과는 다르게 오늘, 이 장소를 더 기억할 것 같다. 나의 일상을 채우는 배경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들을, 좀 더 소중하고 애틋한 기억으로, 그리움으로 저장해놓을 것 같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다가간 그 장소도 마찬가지겠지. 어떤 시간의 기억이 머물러 있는 곳, 그게 비록 호기심일지라도 확인하고 싶은 간절함으로 채워져 있다. 오래된 연립주택에 머무는 사람들. 전직 미용사 다로는 얼마 전에 이혼했다. 같은 연립에 사는 여자 니시가 이웃집 '물빛 집'을 몰래 들여다보는 걸 알게 된다. 니시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가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니시는 다로에게 '물빛 집'을 찍은 <봄의 정원>이라는 사진집, 20년 전에 그 집에 살던 광고감독과 여배우 부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사진집으로 니시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이사할 집을 찾던 니시가 '물빛 집'을 바라보고 싶어 그 옆의 연립으로 이사와 살게 된 것까지. 그렇게 물빛 집을 관찰하던 니시를 발견한 다로가 그녀의 계획에 동참한다.

 

별것 없어 보였다. 니시의 기억 속의 생각들과 현재 눈앞에 보이는 물빛 집을 향한 호기심이 전부인 것 같았다. 오늘을 사는 여자가 과거의 기억으로 이어져 온 집을 보고 싶은 간절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참 희한하지. 사진집 <봄의 정원>의 두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제 와 사진집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독자의 마음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한때 누군가 행복하게 살던 장면을 보는 기분은 어떠한지...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 이사하게 눈길이 더 머무는 건, 그 안에서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표정을 발견하기 때문이 아닐까. 광고업자와 여배우 부부는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거라는 흐뭇함이 우리가 바라는 삶을 비춘다. 물빛 집 정원의 나무들이 자라고 가꿔지는 시간 동안 그들의 시간도 함께 자랐을 거다. 변한 것 없어 보이는 욕실의 모습에서 그들의 일상을 엿본다. 니시가 손에 피를 보면서까지 그 집 욕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 그녀의 마음속에 그려놓은 젊은 부부의 시간을 새기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은 것 같지만, 지금은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의 한때를 그렇게 저장해놓고 싶었는지도...

 

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는 몰랐던, 생각나지도 않던 일들이, 소설이 끝나갈 무렵에는 하나씩 내 머릿속으로 찾아왔다. 책상에 줄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싸우던 짝은 어떤 아줌마가 되어있을지 궁금했다. 세상 그따위로 살지 말라며 싸우고 헤어진 옛 남자는 지금 어느 거리를 걸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갑자기, 10여 년 전 요리학원에서 만난 언니의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일들이었는데, 그날그날 살아가면서 겪고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움과 섞여 마음속의 풍경으로 그려진다. 지금 이 거리를, 이 시간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을 소설로 듣는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품고 있어도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어떤 모습일지 전혀 알 수 없는 일로 머물지 몰라도,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오늘 이 시간의 풍경이 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오늘이다. 주말의 낮에, 조금 늘어지게 늦잠을 잤고, 뒤늦은 아침을 먹고 다방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쌓여있던 잡지를 몇 권 뒤적거렸고, 읽고 싶은 책을 꺼내 놨다. 온 집안의 창을 열고 청소를 하고, 밀린 빨래를 넣고 세탁기를 돌렸다. 빨래가 다 되는 사이 오랜만에 친구랑 통화하면서 며칠 전 내린 비로 다 떨어져 버린 봄꽃 이야기를 했다. 짧은 봄이 가는 게 아쉽다며 곧 시간 내서 얼굴 보자는 말로 인사를 했다. 나의 이런 오늘 하루가 누구나 비슷하게 보낼 수 있는 평범한 주말의 하루인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이 보내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 오늘이 특별해지는 순간이 찾아올 거라고 미리 말해주는 소설이 시바사키 도모카의 『봄의 정원』이다.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소소한 일상이 우리의 소중한 시간으로 저장되는 순간이다. 바로 지금.

 

바쁠 때도, 시간 여유가 있을 때도, 빠르다는 이유로 KTX를 선호하곤 했다. 기차 좌석에 오래 앉아있으면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어디를 가든 빨리 출발하고 일찍 도착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은 KTX가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모든 기차역에 정차하던 완행열차가 떠오른다. 천천히 가면서 창밖 풍경을 놓치지 않게 하고, 모든 역에 정차하면서 내리고 타는 사람들을 보고,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느긋하게 앉아있던 그 불편한 좌석이 그리워진다. 다시 만나지 못할 기억과 시간이어서, 오래된 앨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사진처럼, 마음속에만 머물 수 있어서 더 그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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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 절대 뽑지 마라 - 치과의사가 말할 수 없었던 치아 관리법
기노 코지.사이토 히로시 지음, 요시타케 신스케 그림, 황미숙 옮김, 이승종 감수 / 예문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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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소개글 보고 많이 궁금해졌다. 요즘 치과를 자주 다녀서 그런지 낯설지 않은 설명에 눈길이 간다. 그동안 양치를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양치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올바른 양치법과 치아 관리법, 적절한 치료법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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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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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자주 생각하는 게 있다. '모든 일에는 전조가 있다'는 말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갑자기'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몸이 아픈 것도, 어떤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대개 전조를 보이지만 그 전조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그럴 리가 없어, 아직은 아닐 거야, 하는 마음의 안심이 그 위험을 감지하는 걸 막는다. 나에게도 그렇게 전조를 무시하다 일어난 일들이 몇 가지 있지만, 여기서 그 얘기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마이클 길모어가 전하는, 사형수 가족의 이야기는 그 전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의 형 게리가 살인자가 된 건 이미 예견되어 있던 게 아닐까 싶은 위험스러운 생각이 들면서도, 그 전조가 마이클에게 적용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기도 하다.

 

길모어 집안에서 폭력과 학대가 시작된 이야기를 편하게 들을 수 없었다. 한 살인자의 가족으로, 동생으로 살면서 그가 파헤쳐간 그의 가족의 역사는 평범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지속한 길모어 집안의 폭력과 학대의 역사는 게리가 그런 괴물이 된 이유를 비춘다. 잠깐의 기간이 아닌, 그의 부모와 조부모, 증조 부모까지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지속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자비와 용서를 모르는 모르몬 교도 부모 밑에서 자랐다. 저자가 그 시간에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았던 게 행운이었을까. 혹시 저자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계속 자랐다면 또 한 명의 범죄자가 되지는 않았을까?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저자의 길모어 가족 역사는 끔찍했다. 게리가 괴물이 되었던 배경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한 가정의 이런 모습이 그 안에서 자란 아이를 모두 범죄자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모, 환경이 아이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치는 건 어느 정도 맞는 말 같다. 비단 저자가 들려주는 길모어 가정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들은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어서다.

 

사형제도가 거의 사라지던 때 부활한 사형제도의 첫 번째 사형수가 된 게리 길모어. 이미 게리의 이야기가 한번 나왔음에도 저자는 형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어떤 근원을 찾아내어 정리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이 모든 저주 같은 흐름을 끊어내고 싶은 걸까? 저자의 형들은 변해간다. 그들 중 게리의 살인은 그들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드러낸 위험의 경고처럼 보였다. 사형대에 오름을 선택한 게리의 마음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궁금했지만,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든 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듯하다. 이렇게 한 번 다 쏟아내고, 자기가 속한 가족의 역사를 풀어내고 나면 게리의 잘못도, 자기 가족의 어둠도 조금은 걷히지 않을까 싶은...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저자가 이 책으로 건넨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가졌을지는 저자 자신만이 알 테니까. 다만, 이 이야기로 우리가 듣고 느끼게 되는 게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어떤 범죄자의 탄생 이면에 상당히 다양한 배경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가족, 그 부모의 영향으로 기인하는 경우, 남겨진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일. 거기에 저자 자신의 인생에서 실패했다고 여기는 부분의 답을 찾는 일까지. 아프지만 꼭 한 번은 확인하고 싶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책이다. 동시에 여러 가지 말로 대신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죽음이 끝일 것 같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이쯤에서 끝이었을 것 같은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물고 늘어졌다. 읽는 중간 중간, 나의 어떤 이야기도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선뜻 말문이 트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으로 읽기도 했다.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적나라한 그들의 가족사가 분명 어떤 답을 줄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분노가 일기도 했다가, 시무룩 절망하기도 하면서 기분이 널을 뛰고 있었다. 결국, 끊어낼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된 게 우리 운명인 건지,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시작된 운명을 거둬낼 수 없다는 건지... 저자의 글은 끝났는데, 나는 이제부터 이 글이 시작하는 것만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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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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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여행을 꿈꾼 적이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흔적을 따라 걷는다거나, 좋아하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추적하듯 찾아가는 길. 오래전 어느 블로거의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이미 어떤 소설 속 장소들을 밟아갔더라. 그것도 내가 참 좋아하는 소설이어서 더 관심 두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바랐던 일을 그 블로거는 상상으로만 멈추는 게 아니라, 그 바람을 실행으로 옮겨 이미 이뤄낸 여행이었다. 그냥 발을 내디디면 되는 거였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을 일이었는데, 나의 게으름은 그걸 이루기 어려운 꿈으로만 새겼던 듯하다. 근데 정말 괜찮지 않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의 흔적을 따라 걷는다는 게 멋져 보이지 않나? 이 책의 저자 서정이 들려줄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방을 걸었다』도, 나는 그런 흔적을 밟는 거로 생각했다. 유럽의 어느 곳을 따라 걷는 길. 어떤 작가의 흔적을 찾아 차곡차곡 밟아가는 시간. 낯설지만 친숙하게 새겨지는 글귀들을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뭐, 나의 바람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조금 더 어려운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러시아에 거주하는 저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유럽과 러시아 문학, 예술을 가까이할 수 있었나 보다. 푸시킨, 톨스토이, 카잔차키스, 고흐, 샤갈, 쇼팽 등 다양한 작가와 예술가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각 작가와 예술가의 고뇌를 풀어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의 흔적까지 들춰낸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아는 독자도 많겠지만, 나처럼 평소에 즐기지 않은 분야의 독자라면 이런 이야기가 생소하면서도 흥미롭게 들린다. 앞에서 내가 말했던, 작가나 작품 속을 따라가는 여행을, 저자는 두 가지 다 이뤄내고 보여준다. 예술가의 삶을 좇다가, 소설 속 주인공을 비추는 여행도 풀어낸다. 거기에 저자 자신의 여정까지 보탠다. 뭐랄까, 저자가 그곳에 사는 분위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느껴진다고 말해도 되려나. 고전 속 주인공의 모습이나, 평범하지 않았던 예술가들의 삶의 흔적에 저자의 발자취까지 같은 흐름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건 아마도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문 저자에게서 저절로 뿜어져 나오는 비슷한 향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좋았지만, 그리 편하게만 읽히지는 않았다는 거다. 내가 너무 무지해서인지 공부하는 마음으로 따라가야 하는 부분이 많았고, 이것저것 찾아가면서 읽기에는 에세이라는 분야의 편안함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뭔가를 좀 덜어내고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로 풀어내던지, 아니면 뭔가를 더 보태 전문적인 장르로 엮어내든지 했다면 좀 더 분명한 책으로 남았을 것을... 어쩌랴, 내가 이 책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하는 건 그저 나의 무지함이 첫 번째 원인인 것을.

 

저자가 언급한 작가, 예술가의 흔적들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만 본다면, 거장이라 불리던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회가 자주 오는 건 아니기에 조금 더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느리게 페이지를 넘길 시간이 있다면 좋을 듯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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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를 잠깐 들춰봤다. 말 그대로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며 읽으면 될 책 같았는데, 오히려 나는 저자의 말 몇 마디로 늙는다는 생각에 집중하게 됐다. 병 앞에서 죽어가는 시간에도 제대로 사는 일에 대해 말하는 듯한데, 그런 말보다, 죽음보다는 늙어간다는 것에 더 많은 부분을 떠올리다가 그 책을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나왔다. 그날, 종일 늙음에 관한 책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너선 실버타운의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까지 구매목록에 넣게 되었는데, 제목에서부터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진리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게다가 소개 글에 써진 이 말 때문에 늙어간다는 것을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다짐했다. ‘노화와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비통한 심정을 25편의 시를 통해 보여주며,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유머로 승화시킨다’는 소개 글. 주제 자체가 어두워질 수 있음이 뻔했는데, 그 주제로 사람을 얼마나 부담 없고 편하게 해줄 수 있는지 기대하고 싶어져서다.

 

그게 불과 지난 주말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죽는다는 거나 늙는다는 것을 떠올리는 게 생각처럼 긍정적이게 되지 않았다. 어제오늘, 늙음에 대해 밀려오는 서글픔 때문에 도저히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에 우울해졌다.

 

 

엄마 나이 쉰이었을 때, 엄마가 노래 부르듯 하던 말이 있다. ‘내 나이가 마흔이었으면 좋겠다...’ 그땐 나도 어렸을 때여서 그냥 어른들이 하는 말로 가볍게 생각했다. 항상 지나간 시간에 마음 두기 마련이니까, 그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정도로만 여겼다. 엄마가 쉰다섯이 되었을 때도 비슷했다. ‘내 나인 쉰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때는 느끼는 게 좀 달랐다. 여전히 지나간 시간에서 아쉬움을 찾고 있지만, 우리에게 더 해주지 것들에 미안함을 담은 말로 들렸다. 엄마로, 가장으로 사는 게 힘들었을 텐데, 부족한 많은 것에 계속 마음을 두었던 듯하다.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그때 기억에 엄마는 우리를 더 잘 키우기 위해서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말을 했었는데... 아직 키워야 할 자식들이 많은데,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든데 나이만 먹은 것 같아 마음이 아주 아프지 않았을까.

 

나도 점점 엄마의 나이를 따라가고 있다. 나이라는 숫자가 그렇고, 외모와 육체의 나이 듦이 그렇다. 엄마의 자식으로 살면서 의지했던 마음을, 이제는 엄마가 나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드러내곤 한다. 그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그래서도 안 될 일이고. 여전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사는 내가, 여전히 엄마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더 큰 것도 사실이니까. 그냥, 엄마의 뒤를 조용히 밟으며 가는 느낌이 들어서 요즘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가장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건, 동안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다. 우리 형제들이 나이보다 어려 보이던 동안 외모는 엄마를 닮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이 부를 때 “학생~” 이렇게 부른 적이 많았다. 병원에 가서 진료받는 것만 아니면(병원은 접수할 때 이미 실제 나이가 그대로 기록되니까) 아무도 내 나이를 그대로 보진 않았다. 친구랑 같이 다녀도 한참 동생처럼 보여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곤 했는데, 올해 시작하면서 나의 외모는 내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내가 봐도, 다른 사람이 봐도 내 나이로 보인다. 언제까지 동안으로 살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게 불과 며칠 사이에 눈에 확 보일 정도일까. 엄마 나이 일흔이 넘었는데, 사람들은 이제 환갑이 지났느냐고 묻곤 했다. 엄마의 실제 나이보다 평균 열 살은 어리게 보였다. 남들이 봐도 내가 봐도 엄마의 실제 나이만큼 보이는 외모는 아니었다. 이제껏 늘 그랬는데, 이제는 남들이 아니라 우리 형제가 봐도 엄마가 나이 들어 보인다. 어제는, 내가 “엄마, 갑자기 왜 이렇게 늙었어?” 라고 물었더니, 안 그래도 언니랑 동생이 전화할 때마다 요즘 그 얘기를 한단다. “엄마, 지난번에 가서 보니까 많이 늙었더라...” 막내 남동생이 어렸을 적부터 엄마에게 그랬다. “엄마, 나 장가갈 때까지는 늙지 마. 결혼사진 찍을 때 엄마가 늙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가 늦은 나이에 남동생을 낳았고, 아무래도 자기가 자라는 동안 같이 나이 들어가는 엄마의 모습이 조금 더 일찍 보였나 보다. 친구들의 엄마보다 한참 나이를 더 드신 엄마를 보는 게 슬펐을까. 다행히도 남동생이 결혼할 때 엄마는 젊어 보였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이 참 예뻤다. 그런데 그때보다 몇 년이나 흘렀다고, 이제 엄마가 늙어 보인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엄마의 얼굴이 그 나이의 노인으로 보인다. 하아...

 

 

오늘, 생각지도 못한 일에 나이 먹어가는 시간을 아파하고, 나이 든 사람을 이해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2년 넘게 치과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별일 없으면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치과에 간다. 지난주 진료 때 입안에 다른 장치 하나를 더 붙여야 한다고 해서 본을 뜨고 오늘 병원 가서 입안에 새로운 장치 하나를 붙였다. 최소 석 달은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말을 할 때나 뭔가를 입에 물고 있으면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았다. 발음이 정확하지도 않고 웅얼웅얼하는 것처럼 들렸다. 자칫 방심하면 입 옆으로 침이 줄줄 흐르고... 이걸 못해도 석 달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한숨이 쉬어지면서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장치를 붙였다 떼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치위생사가 와서 괜찮은지 묻는다. 그에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고 오히려 이런 질문이 나오더라. “어른들 틀니 하는 게 이런 원리인가요?” 그렇단다. 똑같단다. 이제야 틀니 하는 사람들 불편할 게 이해가 된다고, 지금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고 말했다. 나는 틀니를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고 괜히 속상한 마음인데. 이런 거였구나.

 

치과에서 다음 진료를 예약하고 나와서 바로 안과로 갔다. 며칠 전부터 눈이 무겁고 답답하고, 책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진료도 받아야겠고, 안경도 새로 해야겠기에 겸사겸사 진료받으러 간 건데, 눈에 무슨 질병이 있는 건 아닌데, 시력이 회복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나이를 먹어가고, 현대인의 생활 습관이 그러하고... 우리 몸은 늙어가고 있으니 눈도 마찬가지라고. 우리 몸이 천 냥이라면 눈은 구백 냥이라고 했는데, 평균 수명의 절반쯤 살아온 나는 이미 구백 냥을 모두 써버린 것 같았다. 회복이 불가능하고 다시 채워지지 않는, 말 그대로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게, 우리 한 생애의 시간인 건가... 안과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설마 내가? 내 눈이? 말도 안 돼. 좋은 눈은 아니었어도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을 단 한 번도 예상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아니겠지. 시력검사표를 들고 안경점으로 가서 다시 검사에 30여 분을 소요했다. 이런 시력에, 이런 상태에, 이런 렌즈를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에게 노안이 온 건가요?”

“중년안이 시작되는 거죠. 요즘엔 70대까지는 중년안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이왕이면 듣기 좋은 말로 중년안이라고 할게요.”

“아아... 선생님...”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서 죄송하다고 말하며 계속 울었다. 그 큰 안경점에, 직원이 열 명도 넘게 있었는데,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건 말건 내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다. 한참을 꺽꺽대다 고개를 들고 보니 나를 담당했던 안경사 아저씨가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요즘엔 삼십 대 초반에 중년안이 오기도 하고, 이런 렌즈는 초등학생이 끼기도 합니다.”

“아, 그래도... 지금은 아니에요.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지금 제 안경 보이시나요? 제 안경 렌즈가 바로 그런 렌즈입니다. 하나도 표가 안 나죠?”

그 안경사 아저씨의 실제 나이는 모르겠으나 겉으로 보면오십 대로 보였다. 나를 위로하려고 그런 건지 몰라도, 그냥 다 이해하겠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그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진정되고 나니, 다시 몇 가지 검사를 더 하고 안경 주문서를 넣었다. 기존에 사던 안경 가격의 두 배에 가까운 돈을 내면서 손이 후덜덜 떨렸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라는 생각에 더 슬퍼졌다. 나빠지는 몸을 유지라도 하려면 이래야 하는구나 싶어서...

안경은 일주일 후에 찾으러 오라면서, 안경사 아저씨가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면서 그제야 말을 꺼낸다. “고객님이 갑자기 우셔서 아까는 제가 너무 당황했어요. 감수성이 예민하신가 봐요.” 감수성이고 뭐고, 하나도 귀에 안 들린다. 그냥 내 눈이 너무 늙어버렸다는 진실만 깊게 새겨졌다. 언젠가, 노안은 예방할 순 없지만, 진행을 늦출 수는 있다고 들었다. 눈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 몸에 찾아오는 대부분 병에서 들어온 말과 같다. 우리 몸은 그렇게 늙어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거였다. 예방도 불가능하고, 진행도 막을 수 없고, 다만, 그 진행을 늦추는 게 최선인 처방으로...

 

 

 

 

 

 

 

 

 

 

 

도리언 그레이가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나이 먹지 않는다면, 늙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건 몰라도 눈이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는데, 결국 내 몸에서 그 눈이 가장 먼저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다. 나이를 아주 많이 먹어도 책을 읽으며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내 눈은 점점 책을 거부하는 눈이 되어 간다. 눈물이 안경점에서 멈춘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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