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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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았는데 읽다 보니 재밌다. 저자의 전작 『동사의 맛』은 크게 관심도 없었기에 도서관에서 초반부를 읽다가 만 것을 보면, 이번 책이 내 눈에 들어올 만한 이유가 없었는데도 쉽게 잘 읽힌다. 문장을 쓸 때 자주 실수하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기본이고, 차근차근 설명하는 듯한 말투가 듣기 좋다.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들리지 않아서 좋다는 거다. 이런 책이 처음 나온 것도 아니고, 저자가 하는 말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니어서 특별할 게 없는데도, 이런 이야기를 또다시 듣게 되는 이유는 그 실수를 반복해서 하는 나를 알고 있어서다. 특히 예시로 든 문장들이 너무 흔한 문장들이어서 그런 걸까.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부터 계속 뜨끔거려 혼났다. 아, 이런 고질병.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건 익숙해서라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자주 쓰는 단어이고 익숙하게 사용하는 문장들이서, 그게 ‘이상’하다고 느낄 이유가 사라지는 거다. 이게 왜? 뭐가? 어디가 이상해? 이런 말이 부끄럽지만,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 무시할 때도 많았다. 나는 게으른 독자이기도 하지만, 게으른 리뷰어니까. ㅠㅠ 귀에 딱지가 앉게 듣는 말도 자주 까먹고, 몇 번을 들어도 ‘그런 말이 있었나?’ 싶게 집중해서 듣지 못할 때가 많고, 알아도 귀찮아서 손대지 않을 때도 있다. 저자는 문장을 손보는 여러 가지 이유와 방법을 말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우선 필요한 건 게으름을 탈피하는 거다. 두 번 세 번, 그것도 부족하다면 열 번이라도 보고 무엇이 이상한지 계속 살펴보는 반복이 필요하다. 그래야 저자가 하는 말에 온전한 이해가 가능할 듯하다.

 

문제는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쓰는 데 있다. 어떤 표현은 한번 쓰면 그 편리함에 중독되어 자꾸 쓰게 된다. (22페이지)

 

이십 년 넘게 남의 문장을 다듬어온 저자다. 문장을 다듬는 일에 법칙이나 원칙이 분명하진 않지만, 문장 안에 반복해서 등장하고 문장을 어색하게 만드는 표현은 주의해야 할 표현목록으로 만들어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목록이 바로 이 책이라고. 뭘 자꾸 더해서가 아니라, 내가 써놓은 문장에서 어색한 표현들을 발견하고, 그걸 빼거나 대체해서 깔끔한 문장을 만든다. ‘좋은 문장은 주로 빼기를 통해 만들어진다.(33페이지)’는 말을 오랫동안 들어왔다. 그 단어(문장)를 빼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뺄 건 빼고 간결하게 만든다. ‘-적’, ‘-의’, ‘것’, ‘들’과 같은 말만 빼도 문장이 훨씬 좋아진다고, 필요 없는 요소를 가능하면 덜어내는 게 좋은 문장을 만드는 기본이라고 한다. (많이 들어봤쥬?) 아, 이렇게 다시 강조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기본 중의 기본을 왜 자꾸 잊는 건지. 게다가 ‘있다’로 어색해지는 문장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이렇게 눈을 가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외국어에서 온 표현이라도 필요하다면 쓸 수 있지만, 한국어 표현을 어색하게 만들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문장을 쓸 때 특히 더 주의해야 할 동사와 명사 등을 언급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좀 더 명확하고 잘 전달하게 한다.

 

이 책은 이렇더라, 하는 것보다 직접 펼쳐보고 자기 경험에 맞춰 골라내어 활용해도 좋겠다. 저자가 제시한 방법들에서 어디 하나 틀린 게 없는 듯하나, 자기가 고수하는 방식과 다를 수 있으니 굳이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경험한 것에 비춰보면 나 같은 경우 저자의 지적이 반복되어 들려와도 괜찮다는 거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 알고 있는 것들을 이렇게 다시 들으며 한 번 더 따끔해지는 기분이 들어서다. 어색한 문장을 다듬는 방법 중간에 작가와 교정자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들이 주고받는 메일에서 보게 되는 것도 교정 교열에 관한 내용이어서 볼만하다. 빨간 펜으로 그어지고 삭제되는 자리에 채워지는 문장들과 그 기준점을 살짝 엿볼 수도 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적인 문제까지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어떤 책의 문장이 저자 혼자 만들어낸 것은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전문가의 교정으로 문장이 어떻게 변해 내 앞에 놓여있는지 알게 되는 부분도 있다. 새삼 몰랐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비교해서 보니 더 확실하게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한 번 읽고 끝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잊을 때마다 한 번씩 꺼내서 살펴보고 싶은 책이다. (‘나’라는 인간을 내가 아니까...) 앞에서 나의 게으름에 반복하는 실수를 언급한 것처럼, 몇 번씩 보고 또 보는 노력을 해야만 좋은 문장을 만들어낸다는 결론이 뻔히 보이므로, 그 방법밖에는 없으므로. 분명 내가 썼는데 이게 맞는 건지 어떤 건지도 모르겠고, 한국 사람이라 한국말을 쓰고 있는데 이게 어색한지 어떤지도 모르겠는 때 펼쳐보면 좋겠다. 물론, 한 번에 완벽하게 배우고 적용하면서 실수를 없앨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별수 있나. 반복해서 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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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김밥을 못 싼다. 초등학교 소풍 때부터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 간 적이 없다. 지금에야 드는 의문인데, 분명 유치원 때도 소풍을 갔고, 엄마도 같이 따라갔는데, 그때는 어떤 도시락을 싸갔던 걸까? 이상하게도 그때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 속 소풍 도시락은 초등학교 때부터다. 그런 기억에서 엄마가 김밥을 싸주지 않은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슬픈 일이지만, 사실인데 어쩌랴. 가까이 사는 친구 엄마가 내 것 김밥까지 싸주시곤 했다. 중학교 때부터는 소풍 도시락을 거의 안 가지고 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가방도 안 들고 소풍을 다녔으니 뭐, 도시락이 문제였겠나. 그런데도 유독 초등학교 소풍 도시락이 생각나는 건, 누구나 다 싸서 왔던 그 '김밥'이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데 있다. 그 나이의 소풍 도시락에 김밥이 없다는 건 큰 슬픔이었고, 창피함이었고, 엄마를 원망할 만한 일이었던 거다. 지금에는 가까운 사람에게 '싸는 김에 우리 딸 것도 하나 싸줘.'라고 부탁할 수도 있는 일이고, 친구 엄마가 도시락을 싸줄 수도 있고, 무엇보다 김밥을 못 싼다는 게 무슨 큰일인가 싶지만, 그땐 그랬다. 지금은, 가끔 밥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동네 분식점에서 김밥 두세 줄로 한 끼 때우는 엄마와 나를 떠올려보면 정말 별거 아닌 일인데 말이다. (여기서 살짝 투정을 더 부려보자면, 우리 엄마는 김밥도 못 싸지만, 떡볶이도 못 만들고, 카레도 못 한다.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ㅠㅠ) 나를 슬프게 했던 김밥이 이제는 그저 그런, 한 끼를 채우는 음식이 되어버렸다는 게 웃음 날 뿐.

 

 

 

 

 

 

 

 

 

<바나나 우유>저자 김주현의 기억 속, 세월 속 음식들도 그런 걸까. 어떤 간절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들이다. 좋아서 같이 먹고 싶었던, 따뜻해서 포근했던,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서 생각나는 맛. 오늘을 사는 모든 순간에, 그렇게 한 번씩 치고 올라오는 감정이 동시에 따라오는 음식이 있던 거다. 가족, 사랑, 일상, 여행. 삶을 채우는 어떤 테마를 떠올려도 따라오는 음식이 있다. 오늘의 절망을 목으로 넘기며 진한 한숨의 캬아~ 소리 내고 싶은 소주 한 잔, 너무 짧게 왔다 가는 벚꽃이 아쉬워 차로 마시는 봄날의 시간, 기어코 나오려고 하는 그 울음을 참아야만 했던 날 마시는 아포가토, 청춘의 사랑이 상큼하게 혀끝에 닿는 아이스티, 어려운 시절 최고의 음식이었던 탕수육과 비프가스, 늦은 밤 퇴근길 부모님이 품에 안고 왔을 뜨끈한 만두, 그리고 빨간 소시지 달걀말이. 아, 나도 잊을 수가 없다. 분홍 소시지...

 

나는 그걸 분홍 소시지라고 부르는데, 어렸을 적 항상 도시락 반찬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음식이다. 지금이야 몇 천원이면 큰 거 하나 사놓고 몇 날 며칠을 먹을 수 있는 양인데, 그땐 그거 한 조각이 왜 그렇게 간절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아무 날에도 생각나지만, 특히 명절날 더 생각이 난다. 핑계 삼아 큰 거 하나 사두려고. 일 년에 두 번 명절에 전 부친다고 엄마가 장 볼 때, 나는 꼭 분홍 소시지 하나를 카트에 넣는다. 엄마는, 입안에서 달라붙고 밀가루 범벅이라 맛도 없는데 뭐하러 그걸 사냐고, 먹을 사람도 없다면서 잔소리를 한다. 그렇다고 안 살 나도 아닌지라, 내가 혼자 다 먹겠다며 기어코 하나 사서 명절 전 부칠 때 같이 부쳤다. 그러고 나서, 명절날 식구들이 모두 모여 식사하는데, 제부가 분홍 소시지를 엄청 맛있게, 많이 먹는 거였다. 엄마가 놀라 제부에게 물었다. “아무개야, 그 소시지가 그렇게 맛있냐?”, “어머니, 저 이거 학교 다닐 때 도시락 반찬으로 싸가고 싶었는데 못 했어요. 저희 형편이 어려웠거든요. 엄마가 이걸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신 적이 거의 없어요. 너무 맛있네요. (쩝쩝~)” 와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분홍 소시지를 보고 나만 그런 기억이 있는 게 아니었던 거다. 내 눈은 찌릿~ 엄마를 한 번 향했고 엄마는 의외라는 듯 웃고 말았다. 그 후로 엄마는 명절이 되면 꼭 분홍 소시지 하나를 장바구니에 넣는다. 늙어서도 말 안 듣는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뭘 먹어도 예쁘기만 한 막내 사위를 위해서... 엄마의 예쁜 막내 사위가 좋아하는 분홍 소시지의 발견 내가 했거든?!

 

먹는 것에 관심 없어 하면서도 가끔 허기질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배고파...’ 하고 혼잣말을 할 때, 그럴 때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더라. 평소 먹던 양의 몇 배를 먹어도 배부름을 느낄 수가 없다. 늘 그렇듯,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때는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픈 거다. 그 허기진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유명 맛집의 소문난 음식도 아니다. 그때 그 순간, 내가 기억하는, 나를 데워줄 음식이다.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추억’이라 불러도 좋을 것들. 저자도 마찬가지였겠지. 웃고 울던 시절의 그리움에 음식을 부른다. 서글펐던 사랑이 끝나고도 어김없이 위로의 음식을 떠올린다. 뒤늦게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채곤 미안함에 후회도 한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고 눈물 나려고 할 때, 뜨거운 국물 한 모금에 오늘을 견뎌내기도 하는, 그런 일상. 특별할 건 없지만 어느 순간 특별해지고야 마는 마법을 일으킨다. 저자가 이야기를 시작하던 그때, 저자만의 특별함이 시작되었을 때, 공감을 일으키며 읽는 이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세월이 흘러서 뒤를 돌아보면,

아, 그때, 그 시각, 그 1초가 생각나.

그때 그 말을 할 걸, 그때 시원하게 화를 낼 걸, 그때 웃어줄걸…….

타이밍을 놓친 파스타는 형편없지. (111페이지)

 

2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꺼내며 노란 표지와 바나나 우유를 지긋이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와 사뭇 다른 느낌에 잠깐 당황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냥 흐르는 시간 속 맛있는 음식들로 다가와서 웃음 나고 재밌었고,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며 눈과 입이 행복하기만 했다. 이번에 다시 만나는 이 글에서는 담담하지만 조금 더 깊어진 울림이 있더라. 지금 내 마음이 그때보다 더 고요해져서 그런지 왜인지... 그냥, 막연하게 떠올리는 음식이 아니라, 나에게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 지금보다 시간이 더 흘러서 되돌아보면 오늘을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음식이 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우리가 과거의 한 때를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또 생길 텐데, 그 매개가 음식이라니 글이 더 맛있어진다.

 

작년에 접했던 어떤 글에서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열광하느냐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맞다. 사람이 자꾸 뒤를 되돌아보기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데, 이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구나.’ 싶어서 긴장했었다. 여전히 지나간 시간만 떠올리고 그리워한다면 좋을 건 없을 거다. 내일을 살기 위해 우선 앞을 봐야 하는 게 현실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어쩌면 오늘을 조금 더 버티게 하고, 어제의 추억으로 오늘이 웃는 날이 된다면 가끔은 이런 그리움을 불러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여전히 앞을 보고 살아가고 달려야 하는 게 우리 삶이지만, 우리 추억 속에 이런 음식 하나 없다면 사는 게 너무 서늘하잖아. 맛있는 위로가 뭔지 모른 채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건 별로다. ^^ 저자를 위로해준 게 팔 할이 음식이었다는 게 나와는 좀 다르지만, 그 위로의 지분이 좀 다를 뿐이지 음식이 그 위로에 들어와 있는 건 마찬가지다. 지나간 사랑도, 울고 웃으며 묶여있는 가족도, 힘들어서 잘라내고 싶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힘든 세 세상살이에서도, 음식이 불러오는 화해와 뜨끈함, 개운함, 쫀득함, 쌉싸래함이 있어서 다행이다. 삶을 아우르는 다양한 맛을 이렇게 알아간다...

 

아쉬워서 그리운 것들,

혹여 한번 다시 찾을 날이 있겠거니, 그렇게 그리워하며

사진 한 장 품고 사는 거. 심장에 그런 아쉽고 그리운 순간들을

진 한 장처럼 품고 사는 거. 그게 꼭 바보 같기만 한 일은 아닌 듯하다. (248페이지)

 

노트를 펴고 먹고 싶은 목록을 하나씩 채우는 요즘이다. 얼마 전부터 치과 진료를 받고 있다. 이 치료가 다 끝나려면 빠르면 1년, 길게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 걸릴 거라는 말에 ‘음, 그렇구나.’ 하며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는 삼겹살까지 먹고 싶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전에 엄마가 삼겹살 먹고 싶다고 할 때 못 이기는 척 먹으러 갈 것을. 엄마와 나는 식성이 달라서 같이 외식하기가 쉽지 않은데, 삼겹살도 그중 하나다.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상황이 되고 보니 엄마가 먹고 싶다던 음식부터 평소에 내가 좋아하지도 않던 음식들까지 떠오르곤 한다. 거기에 보태져 항상 맛있게 먹던 음식까지 덩달아 머릿속에서 춤을 춘다. 바삭한 튀김에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셔야지. 절반쯤 익힌 스테이크도 먹고 싶은데. 엄마가 맛있게 담근 총각김치도 손으로 집어 먹어야겠고. 아주 진~한 초콜릿무스 케이크도 목록에 올렸다. 아, 김밥도 꼭 먹을 거다. 이번엔 사 먹지 않고 내가 직접 싸서 엄마에게도 줘야지. 하아, 슬프게도,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배고픔도 커진다.

 

시간이 많이 흘러 오늘을 떠올릴 때, 나는 무슨 음식을 소환하고 있을까.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웃음 나게 했던 음식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은데, 꼭 그게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 시간을 불러오는 것만으로도 그 음식은 충분히 맛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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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두께의 분량이 부담스러웠는데, 궁금증이 그 부담을 이긴 듯하다.

끔찍한 괴물이 되어버린 한 사람.

그리고 그의 동생이 전하는 말에서 찾을 수 있는 건

그 폭력과 광기의 근원이 아닐까 싶다.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이,

환경을 무시 못한다는 말인데...

이 책으로 그 생각이 더 짙어질 듯하다.

 

어떤 이유로든 그 생각이 많아지게 할 작품.

 

 

 

 

 

김신회의 글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저자의 글을 다시 만날 기회가 온 것 같아 골라본다.

 

뭔가를 하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그 즐거움이 오기 전의 설렘을 말하려나 보다.

기다림 뒤에 올 두근거림을 전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늦게 그림을 만난 저자의 솜씨에 포근한 웃음이 난다.

포근한 냄새가 나는 듯하다.

 

드로잉과 에세이를 꾸린 그림책이란다.

따뜻함이 가득한 이야기로 끌어줄 것 같아서 궁금한 책.

사계절 Dear 그림책이어서 더 기대되는 책.

 

 

 

 

 

 

 

 

 

삶과 먹는다는 행위를 같이 얘기하는 걸 요즘 종종 듣는다.

이런 이야기가 낯설지 않으면서도 가끔씩 귀에 담긴다.

 

황석영의 글을 소설이 아닌 산문으로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많이 궁금해지는 글이다.

 

 

 

 

 

 

 

 

 

 

한 가정의학과 의사의 일상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힘.

나는 여전히 의사에 대한 호감이 없지만,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꺼내는 의사들의 말은 듣고 싶어진다.

 

진료실 안의 일상사가 전해줄 울고 웃을 이야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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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틸유아마인 언틸유아마인 시리즈
사만다 헤이즈 지음, 박미경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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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지지 못한 것에 더 마음 두기 마련이다. 번번이 실패할 때마다 내 몫이 아닌 건 아닐까 포기하고 싶다가도, ‘아직은’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계속 손을 뻗는다. 내 것이다, (언젠가는) 내 것이 될 거다, 간절히 바라는 게 이루어지지 않을 리 없다, 는 마음으로. 그게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간다. 그러다 보면 인간으로 지녀야 할 이성이 점점 그 자리를 잃는 경우도 생긴다. 이성보다 내 안의 욕심이 감정을 휘두르며 판단을 잃는다. 이 소설 속의 범인처럼, 스스로 의사라도 되는 양 수술도 불사할지 모른다. 인간이 그런 마음과 자세를 갖는 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쉬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만삭의 임산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범인은 잔인하게도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려 했다. 무엇 때문에? 누가? 한 번, 두 번. 연쇄살인은 아닐 거로 생각하지만 알 수 없다. 수사관 로레인과 아담은 이 사건을 하나씩 파헤치기 시작한다.

쌍둥이 아들과 곧 태어날 딸을 돌봐줄 유모 구인광고를 낸 클라우디아. 그에 딱 맞는 유모 조가 고용된다. 클리우디아의 남편 제임스는 몇 달씩 바다에 나가 있는 해군이다. 곧 태어날 아기와 쌍둥이를 돌봐줄 이가 필요했다. 조는 그 일에 아주 적합했다. 아이들을 잘 돌봐주고 음식도 맛있게 한다. 거슬릴 게 없다. 하지만 낯선 이를 집안에 들인 클라우디아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고 이제야 품에 안게 될 아기다. 이번에는 꼭 이 아기를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했다. 모든 건 곧 이루어질 거라 간절히 믿는 클라우디아는 불안하지만 조와 잘 지내며 아기가 태어날 날을 기다린다.

 

아이를 키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내가 직접 낳은 아이를 통해 엄마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아기를 갖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공식이 성립될 수 있나?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 손만 뻗으면 내 손에 들어오는 물건이 아니지 않나. 소설 속 누군가의 아이가 갖고 싶었다는 독백에, 반드시 아이를 갖게 될 거라는 믿음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다는 게 얼마나 신성한 영역인지는 안다. 그런데도,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나도 아는 걸 그 누군가는 자기의 욕심에 망각한 듯하다. 이런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고 마지막까지도 그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걸 보고 있자니 분노가 인다. (마지막 에필로그의 심문 부분이 감정을 격하게 한다) 그릇된 판단이 가져온 건 누군가의 죽음뿐만 아니라, 엄마의 고귀한 영역까지 함부로 여기는 건 아닐까 싶은 안타까움까지 불러왔다.

 

이 소설은 범죄로 사건의 시작을 알리고, 여러 명의 주인공을 등장시키면서 각자의 숨겨진 사연을 조금씩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엄마, 아기다. 클라우디아의 유산과 사산은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큰 위험을 안고 있는지 보게 한다. 그래서 만삭인 그녀의 민감함을 공감한다. 이번에는 제발, 내 아기가 무사히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 것 같아서다. 미혼이지만 조가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 역시 평범하지 않다. 어떤 목적으로 클라우디아의 집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집의 쌍둥이를 대하는 태도나 그 목적이라 추측되는 클라우디아의 출산일을 기다리는 마음 역시 짐작된다. 아이를 원하는 마음을 그렇게 확인하게 된다. 거기에 예상 밖의 인물이 드러내는 엄마의 길은 세상 어디에서건 엄마일 수밖에 없는 여자를 떠올리게 한다. 수사관 로레인은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열심히 뛰지만, 그녀에게도 사생활이 있다. 십 대의 딸이 집을 나가겠다고, 결혼하겠다는 말에 혼란스럽다. 달래도 보고 협박 비슷한 것도 해보지만, 딸은 집을 나간다. 그녀 역시 수사관이기 전에 엄마였다. 사건을 추적할수록 그녀와 딸 사이의 문제도 점점 고조된다. 미혼의 만삭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려다 실패한 사건들은 클라우디아와 조, 로레인까지, 전혀 다른 입장의 사람들(여자, 엄마)을 한 지점으로 모은다. 이 사건이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머물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전혀 다른 엄마의 모습을, 동시에 엄마일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매개가 된다.

 

그냥, 추리소설일 거로 생각했다. 맞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다. 잔혹한 장면에 섬뜩해지고, 피가 난무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살인이 그려진다. 그 잔인함에 속이 울렁거리기도 여러 번이다. 범인이 누굴까, 왜 미혼의 임산부만 골라 잔인하게 살해했을까, 아기에게 어떤 목적이기에 이런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는 건가, 하는 추리의 맛도 있다. 무엇보다 여러 명의 등장인물을 서술하면서 이들이 한데 모이게 하는 지점과 그 이유가 무엇이 될까,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 그 궁금증에 가독성은 배가 되고 한번 손에 들고 끝까지 읽었다. 그런데, 추리소설의 많은 부분을 흥미롭게 읽게 하면서도 저마다 자기 자리의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을 보고 있자니, 소설로만 대하기에는 감정이 조금 앞서게 되더라.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엄마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며, 엄마로 살아가는 고충이 로레인을 통해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걸 보면서,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추리소설에서 이런 기분 맛보는 건 오랜만이다. 아기와 여자와 엄마의 모습을 한 자리에서 마주하기가 낯설면서도 경건해지는 기분이다. 여전히 이 소설이 내게 선사한 잔인함은 머릿속에 남아있지만, 그 잔인함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이면에 어떤 생각들이 있는지 읽어갈 수 있다.

 

화자인 ‘나’로 서술되는 이 소설은 한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나’가 누구인지 확인하면서 읽어야 한다. ‘나’는 클라우디아일 수도, 조일 수도 있다. 혹은 그 이상의 누구이거나... 소설의 제목처럼 ‘내 것’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뭔가를 유추하면서 읽게 된다. 그게 무엇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가독성을 선사한다. 끝까지 읽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결말에 조금 놀랍기도 하지만, 범인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곳곳에 있었다는 걸 간과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앞부분으로 잠깐 되감기를 해보기도 했다. ‘아, 여기서, 이 지점에서 좀 더 잘 봐두어야 했던 것을...’하는 아쉬움을 찾아낸다. 읽는 재미와 여운을 같이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시리즈의 시작을 이렇게 알렸으니, 아담과 로레인 부부의 다음 사건 해결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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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지음, 강수정 옮김 / 열화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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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잘 모르겠다. 죽음으로 이별한 사람들과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과 나의 공감을 이룬 시간을 꺼내게 되지 않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그 시간이 아니고서는 서로를 기억하는 일이 없을 것 같다. 죽은 사람들과 나. 그 접점을 찾을 수도 없었거니와 이런 일 - 죽은 사람과 만나는 일 -을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아서인지 낯설다. 그런데 존 버거는 그걸 좀 다른 분위기로 불러온다. 낯선듯하지만 필연으로 만나게 되는 느낌으로 그들의 여행 같은 흐름에 끌어들인다.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불러와 우리가 그들과 공유했던 것들을 끄집어낸다. 계산되지 않은, 변하지 않은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 마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게 가능할까?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들은 죽기 전 모습으로 남아 우리를 마주할 테니. 그들은 떠났고, 시간도 흘렀지만, 사람과 세상이 변하는 그 간격이 사라진 채로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을 거니까.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닌 것처럼 읽힌다. 그의 자전적인 시간이지 않을까 추측하면서 읽게 되는데, 존 버거의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시간으로 들어간 것처럼 들리는 걸 무시할 수가 없다. 리스본과 제네바, 아이링턴, 그리고 더 많은 곳. 그렇게 유럽 곳곳을 다니면서 그의 기억 속 사람들을 소환하고 이야기하고 같이 걷는다. 눈치를 챘겠지만, 그들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 어머니, 딸, 지인들. 첫 페이지에서부터 등장하는 그와 어머니의 조우는 반가운 그림이면서 한동안 상황 파악을 해야 할 정도로 숨소리가 낮아지곤 했다. 그의 어머니? 어디서 오셨나? 아, 오래전 그의 곁에서 떠나간 사람을 이렇게 만나는구나. 너무 자연스럽게, 어제도 만난 것처럼,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소소하고 자잘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나누면서... 죽은 이에게서 배우고 가져갈 것들을 말하는 어머니란, 뭐랄까, 아낌없이 더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처럼 들리더라. 죽기 전에 알 수 없던 것들을 죽은 후에 알게 되었는데, 뭐든 나에게 물어보렴, 내가 알게 된 것을 다 말해줄게, 라고 말하는 것처럼.

 

죽은 다음에 많은 것을 배웠단다. 그러니까 너도 여기 있는 동안 나를 잘 이용해. 죽은 사람은 사전 같아서 모르는 것을 찾아볼 수 있어. (39페이지)

 

얼굴을 제대로 보기 전에 걸음걸이로 알 수 있는 사람. 그렇게 금방 알아챌 수 있는 상대와 함께 보내고 싶은 좋은 시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머니에게서 듣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에도 집중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내 눈에는 죽음으로 이별한 모자의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숨이 가쁘다. 이 만남이 지속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아서일까, 아니면 꿈을 꾸는 듯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서일까. 너무 현실적인 장면들만 눈에 담고 살아가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애틋하면서도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살면서 공유했던 많은 시간을 읊조리듯 풀어내는 시간 속에서도 자꾸만 그 끝이 먼저 보이곤 해서, 슬픈 장면이 아님에도 자꾸만, 순간적으로, 뭔가가 울컥거리는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가 여러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뭔가가 내 안에서 자꾸 쌓여갔다. 풀어내지 못할 지독한 어떤 감정, 마음에서 느끼는 건 분명하지만 표현하기에 불분명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던. 좋아했던 과일 하나마저도 그만의 사전에 의미를 다시 새기듯 그려진다. 그럴 수도 있겠다. 뭐든, 누군가로 인해 다시 보이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가 머물렀던 도시들이 그냥 이름으로만 불리지는 않을 듯하다. 그 도시와 공간, 시간이 마치 그를 기다렸던 것처럼 스르륵 다가오곤 했다. 곳곳에서 사람들을 기억해 낸다. 아니지. 그들이 찾아와준 거니까 기억이 아니라 만난 거다. 그가 발 디디는 곳에서 그의 과거 한때를 함께 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그때를 추억하고, 살아오고 살아갈 시간에 대해 조언하듯 따뜻한 말이 오간다. 죽은 이들과의 대화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잊은 것처럼 이 소설은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현재형으로 보이게 한다. 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상상조차 안 했던 장면들을 사실처럼 그리고 있다. 마치 그게 진짜인 것처럼 생생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과거와 현재라는 구분이 없이, 그냥 그들의 삶에 대해 계속되는 이야기로 머문다.

 

그렇게 구분 없이 읽어서일까. (그가 그렇게 썼으니 읽는 나도 그렇게 읽어지는 거겠지만) 읽다가 문득 한 번씩 생각하게 된다. 내가 죽으면 어디서 누구를 기다리고 싶을까. 누군가 죽은 후에 나는 그(그녀)를 어떻게 어떤 자리에서 만나고 싶어질까. 이 책의 첫 페이지에서 그가 언급한 어머니처럼, 나도 엄마를 만나고 싶어지지 않을까. 가장 애틋하고, 가장 고맙고, 가장 미안하고, 아직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으로, 지금 하지 못한 말까지 한꺼번에 꺼내놓고 싶어지지 않을까.

 

어디나 아픔은 있다. 그리고 어디나, 아픔보다 더 끈질기고 예리한, 소망이 담긴 기다림이 있다. (224페이지)

 

죽은 이들과의 만남이라고 하면 슬플 것 같은데, 뜻밖에 슬픈 내용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쾌한 기억들을 꺼내고 즐기는 시간으로 남았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이상하게도 눈물이 자꾸 나려고 하는 건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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