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의 50가지 그림자
F. L. 파울러 지음, 이지연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갑자기, 치킨이 고급지게 보인다... 『치킨의 50가지 그림자』

 

가끔 요리 프로그램 볼 때, 진짜 배가 고프다. 아니, 방금 밥 먹고 포만감이 느껴지는데도 그런 방송 보고 있으면 자꾸 뭔가 더 먹고 싶어진다. 뱃속이 꽉 찼다고 아우성치는데 그런 소리는 무시하고 일단 입속에 뭐를 집어넣어야만 풀릴 것 같은 갈증. 그래서 웬만하면 밤에 요리 프로그램 안 보려고 하는데 그게 또 잘 안 되네. '야식'이란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거다. 낮이 아닌 밤에 입맛 돋우는 장면들이 더 찾아온다. 이 책도 밤에 보면 침이 질질 흐를 것 같다. 닭 한 마리로 온갖 요리를 해댄다. 제목처럼 50가지 요리법이 등장하는데, 기름기 줄줄 흐르는 장면에 느끼할 것 같으면서도 손이 저절로 책으로 뻗어진다. 하아... 또 배가 고프다. 치킨을 마지막으로 먹은 게 2월이다. 비닐장갑 하나 끼고 매콤한 소스가 발라진 닭 다리 하나 들고 와구와구 뜯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더 마음 아픈 건 치맥의 계절이 왔다는 거... 치맥을 즐기는데 계절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유독 여름날 치맥이 더 당기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한낮의 시원한 맥주 한 잔과 치킨... 흐엉...

 

그 유명한 그레이 시리즈를 패러디한 게 많이 나왔지만, 유독 이 책이 궁금했던 건 영상 때문이다. 거의 2년 전쯤에 온라인에서 닭을 묶고 요리하는 영상 하나를 보고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 책이었다. 먼저 말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 아니고 요리책이다. (내가 이 책을 요리가 가미된 소설인 줄 알았다는 건 안 비밀. ㅠㅠ 도서 분류에도 문학이라고 되어 있다.) 각각의 요리를 2페이지 정도의 짧은 소설처럼 서술하고, 바로 이어서 요리 레시피가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런 문장에 혹해서 읽었다가,

“이렇게는 처음이에요.”

“지금까지 아무도 당신을 바삭하게 구워 주지 않았다고?”

바삭하게 구워지는 닭요리 하나를 알게 되는 거다. ㅎㅎ 냉장고 신선실에서 뚝 떨어져 칼잡이 씨의 눈에 띈 영계 한 마리는 온갖 형태의 닭요리로 주인공이 된다. 요리사 칼잡이 씨는 자기 주방을 통제하는 걸 상당히 좋아하니, 그의 입맛에 맞게 행동을 취하면, 요리사님(그레이)의 애정을 듬뿍 받는 영계 아가씨(아나스타샤)가 되는 거다.

 

소설 형식을 빌린 닭 전문 요리책이다. 총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장마다 호기심 돋는 설명에 먹음직스럽고 보기 좋은 닭 요리가 채워졌다. 순진한 영계(처음 요리사님에게 발견된, 냉장고에 방치되었던 영계 한 마리), 산산이 조각나다(토막 친 닭 요리와 부분육 요리 소개), 거침없이 막 나가는 치킨(닭을 이용한 여러 가지 업그레이드 요리 고급 기술 편). 첫 번째 장에서는 닭을 통째로 이용한 요리가 대부분이고, 두 번째 장에서는 닭을 조각내서 하는 요리, 세 번째 장에서는 닭을 조각내거나 다져서 하는 요리(내가 보기에 손이 많이 가는 요리여서 고급 기술 편인 것 같다. ^^)가 등장한다. 요리가 하나씩 진행되는 과정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과정과 수량을 적어 넣은 기존의 요리책과 같은 구성이 아니라, 아무래도 유명한 소설을 패러디한 설명 때문에 웃으면서 볼 수 있다. 뭔가 야릇한 장면을 연상하듯 끌어가는 이야기가 알고 보니 닭의 몸매라던가, 통제 운운하면서 소유욕 쩔은 남자를 말하는 듯하지만 결국 요리사의 프로페셔널한 마인드를 읊는 거였다거나... 분명 닭 요리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들으면 그만인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게 한다. 왜냐고? 난 이미 그레이 씨를 다 읽어버린 몸이거든!!

 

일반인이 하기에는 좀 더 전문적인 닭 요리 레시피가 아닐까 싶긴 한데, 닭 요리를 좋아하거나 요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뭐든 관심 두면 잘할 가능성이 열려 있으니까. 푸드포르노라는 소개 글에 어울리는 요리책이기도 하지만 특히 한국식 닭 요리가 아닌 서양식 닭 요리여서 그런지 색다른 입맛을 돋운다. 닭이 간식이나 메인 요리로 나오는 여러 가지 레시피가 흥미롭기도 하다. 곁들일 수 있는 샐러드나 사이드 메뉴도 알 수 있고, 일단 사진부터 먹음직스러운 건 당연하고... 누드 상태의 영계와 그 영계를 어떤 식으로든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버리고야 마는 요리사님의 썸과 밀당의 연애 요리다. 후훗~

 

 

"눈썰미가 좋은 닭이로군. 그가 말한다. 또 그 표정이 된다. "이 주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내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지. 내가 쓰는 재료들은 정확해야 해." (15페이지)

 

 

"당신을 요리하고 싶어." 그가 속삭인다. "통째로."

아, 어쩌면 좋아. 내 몸이 속에서부터 뜨거워진다.

그는 내 몸 너머로 손을 뻗어 향신료 병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커다란 조미료장을 연다.

"말해 봐, 어떻게 해줄까? 골라 봐."

(중략)

"전 밑간은 처음 당해 봐요." 내가 풀이 죽어 중얼거린다. "아니, 아예 재료 밑손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의 입이 한일자로 꾹 다물어진다. 그가 받은 충격을, 크나큰 실망감을 느낄 수 있다.

"한 번도?" 그가 속삭여 묻는다.

"이렇게는 처음이에요." 내가 고백한다.

"지금까지 아무도 당신을 바삭하게 구워 주지 않았다고?"

"그런 적 없어요……, 하여튼 양념을 한다는 거 괜찮은 건지 전 잘 모르겠어요." (21페이지)

 

그렇게 밑간을 당하고, 묶이고 해서 완성된 귤과 세이지를 곁들인 로스트 치킨

 

 

그는 내 양발목을 합쳐 단단히 묶는다. 노끈은 꽉 묶여 있지만 살갗에 파고들 정도는 아니다. 나는 구속감고 함께 기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내 등골을 타고 전기가 오르듯 위험한 전율이 찌릿찌릿 치민다.

"당신은 매혹적인 꽁지를 가졌군. 완벽해, 암탉 아가씨. 요걸 물어뜯을 게 기대 되는 걸." (47페이지)

 

 

"당신을 오로지 나를 위해 담금액에 밑간 된 거야." 그가 음험하게 말한다. "오직 나만을 위해."

그래요. 나는 신음한다. 나를 먹어 주세요. 당신 혼자서. 그리고 바로 그때에야 나는 그가 뭔가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래디시인 것 같다. 그 빨간 래디시가 심장처럼 박동하기 시작한다. 내가 보는 광경이 흐릿해져 가고, 나는 미칠 것 같아진다.

"일어나, 베이비."

신선실 문을 열면서 그가 말한다. 우쭐하게 멋 부린 말투. 나는 현실로 돌아온다.

"브로일러에 들어갈 시간이야."

빌어먹을. (92페이지)

 

 

허브와 아몬드 페스토를 바른 나비 모양으로 벌린 통닭

 

 

"이제부터 당신을 납작하게 펴 놓을 거야. 활짝 벌려 놓을 거야. 있는 줄도 몰랐던 경지에 이르게 해 주지."

그의 미치광이 같은 기대와 흥분이 느껴진다.

내 몸은 전적으로 숙련된 그의 손 아래 맡겨져 있다. 그가 나를 옆으로 활짝 벌려 놓을 때 충격이 내 몸을 관통하여 흐른다. 그리고 그건 감미롭고 낯설고 관능적인 감각이다. 그가 나를 가슴이 위로 오도록 팬에 놓는다. 가금육이 이렇게 납작해도 될까. 이건 부자연스럽다. 이토록 쾌감이 밀려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팬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열기가 이렇게나 균일하게 내 몸을 관류하는데. 나는 녹아 버릴 듯 육즙으로 가득 차 말할 수 없이 맛있어진 느낌이다. (164페이지)

 

 

베이컨에 묶인 날개 - 메이플 시럽으로 윤이 나게 구운 닭날개 베이컨 말이

 

 

버터를 가져와 가슴살 - 향기롭게 갈색으로 만든 버터와 헤이즐넛으로 요리한 닭가슴살 소테

(이거 정말 먹고 싶게 생겼다. 침이 질질~~)

 

치킨 서브 - 모차렐라를 올린 치킨 서브마린 샌드위치

(샌드위치라는데, 위에 듬뿍 올려진 모차렐라에도 느끼함이 아닌 침샘이 먼저 고인다.)

 

 

꼿꼿이 일어선 치킨 - 매콤한 토마토 감자를 곁들인 직립 로스트 치킨

(요리가 보여야 하는데, 다른 게 먼저 보인다.

요리할 때는 꼭 상의 탈의 상태로 앞치마를 착용해야 눈에 들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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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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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산다는 것 자체가 배우는 것이겠지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성인이 되어 어릴 적 만났던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다시 읽고 싶은 때가 생기곤 했다. 가장 먼저는 『키다리 아저씨』였고, 드디어 몇 년 전 저비스 씨의 두드러진 활약(?)을 재밌게 읽었다. 아마 어렸을 적에 봤으면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더 와 닿았던 듯하다. 『빨강머리 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추측했다. 추측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건, 아직 『빨강머리 앤』을 원작으로 읽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궁금증과 갈증을 풀어줄 거란 생각에 백영옥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읽고 싶었다.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그 의도가 확실히 드러난다. 앤의 모습에서, 앤의 그 문장들을 통해 다가오는 감각을 새롭게 느낄 수도 있다는 걸 말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예상과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다. 다만, 이 글을 쓴 이가 백영옥이라는데 사실에 반가움이 크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그냥, 나는 그녀의 에세이보다 소설을 더 좋아하니까... ^^

 

원작 『빨강머리 앤』을 읽지 않고 드라마로 방영되던 걸 봤을 때, 나는 앤이 싫었다. 드라마 속에서 보이는 앤은 내 취향이 아니다. 말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서 나는 오히려 다소곳하고 조용한 다이애나를 눈여겨보곤 했다. 이 드라마를 집중해서 봤던 건, 어린 나이에도 궁금했던 앤과 길버트의 사랑이 이루어지느냐 하는 결말을 궁금해서였다. 소설에서, 설레게 하면서도 뻔한 설정이 오해인데, 그걸 참 맛있게 살려내는 게 관건인 것 같다. 어릴 적의 나는 그런 감정이 뭔지도 잘 몰랐으면서, 앤에게서 그런 걸 찾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앤의 시끄러운 말투도 제쳐놓고 볼 수 있을 만큼 두 사람의 관계 변화를 내 머릿속에서 내내 그리며 봤던 거다. 알다시피 앤과 길버트는 다시 만났고, 오해에 관해 화해도 했고, 연인이 되었다. 그게 끝. 아주 오래전 앤의 이야기를 보고 내가 생각한 건 그게 전부였다.

 

저자가 들려주는 앤의 문장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이였을 때 본 앤의 모습과 몇십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보는 앤의 이야기는 너무 달랐다. 그때도 느꼈지만 앤은 참 긍정적인 아이다.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다시 고아원으로 가야 하는데도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아이라니 이보다 더한 무한긍정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의 나는 앤의 마인드 하나하나를 다 소화하지 못한다.

 

 

 

앞으로 알아낼 것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 같아요!

만약 이것저것 다 알고 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럼 상상할 일도 없잖아요! (18페이지)

 

이런 말들에서 앤의 성격이 그대로 보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앤은 이런 자세로 살아간다. 누가 봐도 화가 나고 절망의 순간인데, 그때그때 긍정의 상상력이 발휘되어 오늘을 참 재밌고 웃음 나게 한다. 빨강 머리가 싫어서 염색했는데 초록 머리가 되었을 때, 그동안 빨강머리가 최악인 줄 알고 살았다며 자기 머리카락 색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앤. 그렇게 앤은 변한다. 성장한다. 꿈을 위해 도시로 떠나고, 매튜의 죽음을 슬퍼하며 앞으로 견딜 일들의 워밍업을 하는 것처럼, 마릴라의 간호를 하면서 진심을 듣게 되는 순간 가족의 사랑을 좀 더 배우게 된 것처럼.

 

앤은 원하는 직업을 얻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랑하는 아줌마, 아저씨와 익숙했던 고향을 떠나는 슬픔을 겪을 것이다. 다이애나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연애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망설이는 이유는 그 결정으로 지불해야 하는 몫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의 우리이며,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몫이다. (171~172페이지)

 

이런 거였다. 내가 그때는 알지 못했던 앤의 이야기는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게... 내가 설렜던 길버트와의 일화는 그저 앤의 모든 시간 중의 일부였을 뿐이다. 앤의 인생이란 커다란 그림의 한 조각의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앤이 그곳에서 자라면서, 사람을 겪으며 채운 시간의 축적은 5년이란 시간이 흘러 길버트와 오해를 풀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의 성장을 가져왔던 거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아니었으면 갖지 못할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길버트의 놀림을 영영 용서하지 못할 화로 기억했을 것이고, 한 번의 사랑을 놓쳤을 것이다. 헤어지는 것을 배우며 이별을 감당하는 방법을 알아갔을 거고, 어떤 선택을 함으로써 놓아야 할 것도 있음을 배웠을 거다. 그렇게 하나씩 잃어가면서 채워지는 것들을, 앤은 알았을 거다. 노력해도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 누군가와 죽음으로 헤어질 수 있다는 것, 오롯이 내 몫으로 존재하며 내 판단과 선택을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걸...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인제 와서 앤이 하는 말이 뭐 그리 특별하다고, 라는 생각을 했었다. 재미로 보던 이야기에서 뭘 또다시 발견하겠다고, 하는 비꼬임 비슷한 감정을 가졌더랬다. 저자가 풀어내는 자기의 에피소드와 연결된 앤의 문장들은 위로를 건넨다. 앤의 실수담, 시행착오가 불러오는 공감이 있다. 그건 몇십 년 전 앤이 처음 소설로 태어났을 때와 2016년을 사는 우리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참 닮은꼴이었다. “인간이 언제 위로받는 줄 알아? 쟤도 나처럼 힘들구나! 바로 비극의 보편성을 느낄 때야.(156페이지)” 라고 소리치듯 말하는 저자 지인의 말이 생생하게 들린다. 앤을 통해 느낀 것도 그 비슷한 맥락이다. 좋은 일에는 진심을 담아 축하를 건네면 되지만, 슬픈 일에는 좋은 일을 축하했을 때보다 더한 감정을 동반한 한 마디가 건네진다. 앤이 고아가 아니었다면,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고아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니었다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순탄하기만 했다면, 이런저런 이별을 겪지 않았다면... 수도 없는 ‘만약’을 불러보지만, 그 ‘만약’의 순간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앤이다. 앤이 이런 모습이라서, 이런 아픔을 가진 아이라서,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자란 씩씩함이라서 공감하는 거다. 거기에 보태어지는, 긍정이 아닌 상황의 배움마저 공감이 되는 거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알게 되는, 누군가를 좋아하려고 노력해도 좋아할 수 없다는 걸 배우는 앤이어서 다행이다.

 

“앤, 내가 살아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328)”라고 말하고 싶었다던 저자의 생각을 바뀌게 한 건, 아마도 이런 바람이 있어서일 테다. ‘살아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너의 마음을 듣던 그 바람대로 살아가고 싶은 거라고.’ 

 

 

 

지금도 어디선가 그린 게이블 그 집의 다락방에서 세상을 보던 것처럼 무한 긍정 에너지를 뿜어대는 자세로 살아가는 앤이겠지만, 그 긍정 에너지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님을 알아서인지 앤이 바보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간의 경험들로 세상 살아가는 노하우를 참 많이도 배웠을 듯하다. 책임감과 융통성을 가진 현명한 사람으로 오늘도 어딘가를 씩씩하게 달리고 있을 앤을 그려보게 하는 이야기다. 여전히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하면서도 잘 견디고 있을 것이라고 바라는 마음도 어쩔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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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염둥이 조카들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책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7월 말부터 지난주까지, 무슨 순서 정해놓은 듯 언니네랑 동생네가 다녀갔는데

그때마다 아이들과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몰라서 고민이 된다.

몸을 움직이는 건 내가 귀찮고 더워서 안 되겠고

그래봤자 늘 해준 것처럼 책으로 더위를 날리게 해주어야겠다고...

아낌없이 에어컨 틀어놓고 늘어져 있는 시간을 보낸 게 전부지만,

시원한 극장에서 영화 보고 먹고 쇼핑한 게 전부지만,

그래도 좋다는 얘들이 아직은 귀엽다. 아직은... (좀 더 크면 늙어서 안 귀여움 >.<)

 

확실히 아이들 방학이 되면 신간이 많이 나오기는 하는가 보다.

좋은 책들로 여름을 잘 보냈으니, 곧 다가올 명절 연휴 선물을 또 고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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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게 안아줘
김선민(하니로) 지음 / 청어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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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충분하다... 『따뜻하게 안아줘』

 

3년 정도 같이 살아줄 남자가 필요했다. 엄마에게 남은 시한부 인생이 조금 더 밝고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남자를 찾았다. 빨리 결혼할 수 있는 사람, 이왕이면 엄마에게 다정하게 대해줄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리는 결혼을 준비했다. 근데 뭐, 그게 쉽나. 마음처럼 그런 상대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은 남자는 마리의 구역에서 바람이 났고, 마리는 다음 남자를 찾아 나섰다. 그때 마리의 앞에 맞선 상대로 나타난 남자는 기승언. 어렸을 적 같은 동네에서 오가다 얼굴 보면 인사하는 정도였고, 동창인 정언의 형이었다. 그런 그가 왜 맞선남으로 자기 앞에 앉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엄마를 위해 결혼을 해야 한다고, 그냥 한 번 만나볼 사람이 아니라 결혼할 사람이 필요한 거라고. 그에 승언은 답할 수 없다며 거절했고, 마리는 다른 사람을 찾기 위해 맞선 자리에 또 나간다. 거기서 다시 승언을 만난다. 이번에는 승언도 어느 정도 결심을 하고 나왔다. 같은 자리, 두 번째 만남. 상대의 요구를 알아듣고 나온 자리이니, 그냥 한 번 맞선보다는 생각은 아닐 터. 그의 제안은 하나였다. 어차피 결혼을 목적으로 만난 사이, 이제 연애를 하자고.

 

김선민의 글을 좋아한다. 모든 작품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취향 맞고 분위기 좋아서 좀 심심한 글이었어도 다른 작품 보이면 읽어볼 수 있는 마음이 드는 호감. 그런 작가의 19금 소설이라니. 그 전에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접한 김선민의 19금 소설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 궁금했던 듯하다. 말랑하면서도 담백하고, 큰 악역 없이도 지루하지 않게 읽었던 기존의 글에서 더해진 19금의 조화는 어떨까 하고. ^^

 

처음에는 맞선이란 소재에 결혼과 연애가 바뀐 이야기일 거로 생각했는데, 결혼 전에 이미 마음을 풀어놓은 상태로 연애하는 두 사람을 보니 괜히 실실 웃음이 쪼개진다. 거칠 것 없어 보이는 마리가 품고 있는 약한 면을 보면서, 누구나 앓이 하나쯤 갖고 산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엄마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할머니를 인간적으로, 어른으로 존경할 수 없었다. 강해지고 싶었던 건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였고, 그렇게 지키고 싶은 사람이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시한부라니. 더 사랑해도 부족할 시간에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니 뭐라도 해야 했다. 잘 사는 모습, 행복한 모습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게 결혼이다. 좋은 사람 만나서 이렇게 잘살고 있다, 태어난 아기들의 예쁘고 싱그러운 모습 보면서 엄마도 기운을 냈으면 좋겠다, 싶은 바람으로 살아가던 즈음 승언을 만났다. 그를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인 건지, 심성이 반듯한, 좋은 사람에게 좋은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번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하고 진심으로 대할 줄 아는 사람. 내 사람의 마음을 당연하게 우선하는 사람인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거 아냐?

 

승언의 매력을 참 예쁘게 그려놨는데, 특히 태도 분명하게 보이며 거절을 잘하는 이 남자가 너무 맘에 든다. 나는 말을 직선적으로 하는 사람이 좀 부담스러울 때가 많은데, 그에 반해 어떤 일을 앞에 두고 분명한 결정-그게 거절이라 할지라도-을 하는 사람이 좋다.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지지부진하게 끄는 한 마디는, 결국 어장관리밖에 안 된다. 그의 곁에서 후배랍시고, 같은 아픔을 가진 동지라고 해도, 그 선을 넘는 경우를 받아들일 수 없던 그가 뱉은 한 마디, "짐 싸서 나가라"고 했을 때는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아, 거절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군더더기 없이 간단명료하게, 한 마디로, 내가 아닌 마음을 강요당하지 않게, 더는 오해의 여지 없이. 아닌 걸 알았을 때 분명하게 말하는 법을 이 남자에게 사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 없이, 어떤 상황에서 거절하기 미안해서 우물쭈물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니 결과가 좋은 적이 없었다. 결국은 그 미안함이 또 다른 상황, 오해, 상처를 남기던 걸 보면, 미안함에 단호하지 못했던 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었던 거다. 이렇게 또 하나를 배운다. 내 것을 지켜야 할 때는 그것만 볼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을 것, 옳다고 여기는 일, 내 마음을 전하고 싶은 일에는 온 힘을 다하면 될 것.

 

거기에 당찬 마리의 성격도 매력적이다. 거칠기만 할 것 같은 그녀가 마음을 전하는 상대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부드러워지는 모습이 선해 보인다. 어떤 조건으로 사람을 선택해야만 했던 그녀의 의도가 불순해 보이지만은 않는 게 그런 것 같다. 그 진심이 통했으니 승언 같은 남자 만나서 보듬고 안아주는 포근함을 알게 되는 거고. 따뜻함이란 이런 거구나, 싶은 거 제대로 배웠을 그녀의 마음을 열어보고 싶다. 얼마나 따뜻해졌는지 그 온도 한 번 재보게 말이야.

 

세상이, 사람이, 마음이 따뜻해지는 건 순식간인 듯하다. 어느 순간 통해버리고야 마는 진심이 부리는 힘이 대단하다는 것도 증명하는 것 같고. 착하게 살아서 그런가 보다. 착하게 사는 게 바보처럼 보이기 쉬운 세상에서, 착하게 살다 보니 인간미 넘치는 남자 만나서 제대로 따뜻함을 알아가며 사는 이야기가 이렇게 훈훈할 수가 없다. 등장인물 대부분 선해서 그런가, 이런 결과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걸 보면...

 

큰 거부감 없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 너무 술술 풀려가는 이야기에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겠다. 큰 사건이나 별다른 기복 없이 흐르면 또 심심함 느낄 독자가 있을지도 몰라서... 중반부터 두 사람의 스킨십이 제대로 드러나는데, 개인적인 생각은 그 씬의 절반을 줄이고 다른 에피소드로 극의 긴장감을 더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앞뒤 맥락 없이 등장하는 씬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더 단단하게 쌓이는 일들이 등장했으면 싶었다는 개인적인 바람 같은 거. ^^ 사람이 좀 웃긴 게, 누군가를 눈에 담는 순간, 상대가 궁금해지는 순간 이미 마음을 돌리기에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이대로 직행하는 게 진심일까 싶은 의심과 검열이 생긴다는 거다. 아니라고 한마디 보태면서 주춤거리고 싶은, 그렇게 해야 마음이 안심된다 싶은 거. 그래서 처음에 아니라고 말했던 승언의 태도가 2주 만에 변한 모습이, 그 후로 계속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마음 드러내는 게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데, 그건 그냥 그런대로, 그의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더는 문제가 아닌 게 된다. 그래서 단호박 같은 승언의 진심이 더 빛나 보였던 시간.

 

크게 취향 타지는 않을 듯하다. 무난하게, 적당하게 잘 읽히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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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실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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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을 소설화했다는 소식에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된다. 내가 몰랐던 시대의 한 삶이 이렇게 재조명되면 관심 두지 않을 수 없다. 여류소설가 김명순의 인생을 이렇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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