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층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그렇게, 자꾸 폭력이 대화의 수단이 되려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대화를 벗어난 혼자만의 악다구니라고 해야 하나. 며칠 전 뉴스에서 봤던 데이트 폭력 기사. 새벽 시간, 골목에서 남자는 여자를 폭행하고 있었다. 여자는 피를 흘리고 쓰러지면서도 남자에게 계속 맞았다. 지나가는 시민이 여자를 도왔고 경찰에 신고했으나, 남자는 오히려 그 시민들에게까지 위협을 가했다. 여자를 때리는 것도 모자라 술 취한 상태로 좁은 골목에서 트럭을 몰며 사람들을 쫓아갔다. 결국 경찰은 그 남자를 체포했다. 남자는 곧 법의 심판을 받겠지만, 애인이라는 사람에게 지독한 폭행을 당한 여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 낫겠지만, 안으로 곪아든 상처는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쉽게 낫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어디 넘어져서 다친 것도 아니고, 내가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그 무지막지한 폭행에 어느 정도의 상처인지 가늠할 수나 있을까? 뉴스에서 그 동영상을 몇 번이나 보다 보니 보는 내내 입이 다물어지지도 않았지만, 그 동영상을 보지 않는 지금도 끔찍한 공포가 남아 있다.

 

누군가 애인이나 배우자의 상식을 벗어난 행동, 맞지 않는 성향에 대해 토로할 때 사람들은 “왜 그런 사람을 만났어?”라는 질문을 종종 던지더라. 그때마다 그들 대부분의 대답은 이런 거였다. “만나기 전에는, 같이 살아보기 전엔 몰랐지.” (나는 이런 질문을 엄마에게 똑같이 한 적이 있고, 엄마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래, 그 말 말고는 딱히 맞는 대답이 없는 것 같다. 그게 진실이기도 할 테고. 사랑해서 만났지만, 상대와 함께하는 게 고통이라면 헤어진다는 것은 그 고통을 줄이거나 없앨 방법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 그런 결정을 했다면 그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쉽지 않은 결정인 거다. 어떤 놈은 자기 기분이 저조하면 잠수를 탔다. 또 다른 놈은 주변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같은 경우를 두고 저는 괜찮고 나는 안 되는 이유를 내놓으며 억지를 썼다. '만나고 보니 이래, 정말 몰랐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마다 그런 대답을 내놓을만한 경우가 있지 않을까. 그럴 때 할 방법은 한 가지다. 그 녀석을 내다 버려.

 

오사 게렌발이 자전적인 이야기로 데이트 폭력을 고발하는 걸 대면한 순간, 행복해지기 위한 그녀의 선택에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벗어나야만 했던, 있는 그대로의 일을 드러내야만 했던 그녀의 태도는 당연한 거다. 만나보기 전에는 몰랐을 테지, 그 멀쩡한 외모에 가려진 비인간적인 폭력성을. 왜 닐은 오사에게 그랬을까. 한 명의 인간이 아닌 취향에 맞게 골라 쓰는 소유물처럼 여겼을까. ‘네 헤어 색깔이 맘에 안 들어, 눈에 덕지덕지 칠한 그 화장은 또 뭐고? 키스할 때는 눈을 뜨란 말이야, 나를 봐야지,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낙태에 관한 책은 왜 가지고 있는 거야? 창녀 같아, 생각해봐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럼 생각날 때까지 더 생각해봐...’ 아, 욕 나온다. 말을 하든가 말든가 둘 중의 하나만 하란 말이야. 이게 잘못된 것 같아, 나는 이렇게 생각해, 듣고 보니 그건 오해였네, 그 말이 맞네, 뭐 등등. 넘어가고 싶으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고, 안 되겠다 싶으면 솔직하게 얘길 하고 상대의 얘기도 같이 들으란 말이야. 어떤 모양의 폭력이든 이해가 어렵지만, 특히 정신적인 폭력을 가할 때 따라오는 그 무너진 자존감과 피폐함은 엄청나다. 데이트 폭력의 시작과 과정, 결과까지 오롯이 드러낸 그녀의 이야기에 내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 욕 나와.

 

그녀는 대학에 들어가고 남자친구 닐을 만났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외모, 자상한 태도, 그녀만을 위한 눈빛까지. 얼마나 좋았을까. 처음엔 그저 자기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보이는 관심이고 기분 좋은 집착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는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범주로 그 집착을 넓혀간다. 그녀의 친구가 맘에 안 든다고 만나지 말라거나, 그녀의 까만 머리색이 맘에 안 든다고 바꾸라거나, 다른 남자가 그녀를 쳐다만 봐도 그녀의 태도를 추궁한다거나, 말도 안 되는 얘기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의 취향을 쓰레기 취급했고, 그녀에게 저속한 것을 보는 듯한 혐오의 눈길을 보냈다. 어디 눈길뿐인가, 그가 말로 하는 폭력은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는 그녀에게 육체적인 폭력도 행사하기 시작한다. 팔에 든 멍, 집어 던진 다리미, 그녀의 물건을 부숴놓기까지.

 

 

 

 

 

 

 

 

얼마가 지나자 나는 더 이상 오사가 아니게 되었다. “블랙 오사”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 편이 훨씬 나았다. 나 또한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틀에 짜인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끊임없이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닐과 함께. (29페이지)

 

 

 

 

그녀가 반했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갔나? 정말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 대답밖에 할 수 없는 건가. 만나보기 전에는 몰랐네, 같이 지내보기 전에는 진정 난 몰랐었네... 그녀는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오사 게렌발을 나타내던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그녀의 존재감은 그 남자 옆에 있는 하나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의 상태에 따라 웃었다 울었다, 안아줬다 내팽개쳤다, 그냥 맘에 안 들면 마구 두들기는 것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 좋아하는 사람들, 모든 것을. 어느 순간 그녀까지 이상해지려고 한다. 내가 맞는 게 당연한 건가? 내가 화장이 너무 진했구나, 내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구나, 그가 싫어하는 건 하지 말아야지. 누군가에게 맞춰주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 비정상적인 요구를 하면서 상대의 자유를 박탈하고 자신의 입맛대로 쥐고 흔들려고 하는 게 잘못된 거다.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해주고 싶고, 이런 양보를 하고 싶고, 이런 기회를 주고 싶고,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건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을 때 하는 거다. 그게 진심을 담은, 상대를 향한 애정이다.

 

사랑이 변할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기에 그 남자의 행동은 병적으로 보인다. 처음 마음이 아니라고 해서 누군가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가정폭력이 가정폭력에만 머무는 게 아닌 것처럼, 데이트 폭력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인권이 보장받아야 함은 물론이고, 폭력에서 보호받기 위해 사회가 손을 뻗어줘야 하는 거였다. 무엇보다 이런 일을 드러내야 하는 걸 주저하는 분위기가 사라져야 한다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차별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감당해야 하는 게 부당한 건데, 그걸 공개하고 호소해야만 하는 게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 분위기. 폭력에 대해 스스로 얘기할 수 있는 게 당연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더라.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런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고 하던데, 데이트 폭력으로 죽는 여자가 한 해에 몇 십 명이라는데, 그 해결을 위해 침묵은 버려야 한다. 폭력의 함정에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될 수 없게 말이다. 저자는 주변의 가까운 이(아버지와 교수 등)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 모든 비정상적인 상황을 벗어나려 애쓴다. 상담 받고 치료받고, 원래 그녀 자신이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 좋아하는 사진, 옷, 화장, 사람들. 모두 그녀가 선택한 것들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시간. 가끔 왜 그런 시간을 보냈나 싶은 분노에 울음이 차올라도 이제는 괜찮을 거다. 그녀의 용기가 더 단단하게 치유해줄 터이니.

 

읽으면서 많이 공감하고 분노했다. 억압당하는 게 얼마나 인간을 무기력하게 하는지, 존재감을 잃게 하는지 보여주던 저자의 이야기에 소름이 끼쳤다. 한 사람이 보여주던 두려움과 절망이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게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 상태를 원하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거 아닐까. 가까운 사람들, 가족이나 이웃, 그리고 전문가의 이해와 절실한 도움이. 이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국가가 함께 도우며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하는 의미를 알겠다. 언젠가 TV를 보면서 눈에 들어왔던 건 폭력에 관한 캠페인 영상이 생각났다. 학교 왕따가 사회 왕따가 되고, 가정폭력으로 자란 아이가 가장이 되어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을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폭력의 확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폭력이란 게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그 인생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게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그대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폭력은, 그냥 폭력일 뿐이다.

 

제목이 7층인 이유. 그녀가 살던 곳이 7층이었는데,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면서 그 7층에서 자꾸 뛰어내리고 싶었다는 그녀의 불안과 공포를 그대로 드러내는 제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차 타고 싶다..."

늦은 저녁, 가끔 집 뒤로 산책하러 갈 때가 있다. 그 길을 기찻길과 나란해서 거의 30분 정도 걷다 보면 몇 번이나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보게 된다. 어떤 날은 기차 안이 텅 비어 있기도 하고, 어떤 기차는 입석까지 꽉 차서 지나가기도 하고... 이런 감정은 코 흘리며 놀던 어린 시절에나 생길 줄 알았는데, 그렇게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기차 타고 싶다고 말하면, 나도 덩달아 저 기차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엄마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기차 타고 통학했다고 한다. 집 근처 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리는 역 근처에 학교가 있어서 그랬다고. 그때는 버스보다 기차가 더 편한 통학 수단이었다고 했다. 요즘엔 시내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되는데, 기차는 장거리 이동에 타게 되는 수단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진짜 옛날 일이구나 싶다. 그러면서 생각이 이어진다. 통학하는 게 아닌 기차를 타고, 엄마는 어디로 가고 싶었던 걸까.

 

김탁환의 『엄마의 골목』을 가방에 넣어서 다니면서 밖에 있는 시간에 천천히 읽었다. 분량이 길지도 않아서, 집중해서 읽으면 앉은 자리에서 한두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글인데도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아서 한참을 들고 다녔다.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했는지 처음부터 보여서다. 순간순간 울컥해지고, 미안해지고, 바로 옆에 있는데도 엄마가 그리워졌다. 오랜 시간 엄마와 함께 살아왔는데도,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다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일상의 틈틈이 비집고 들어왔다.

 

오래전부터 엄마에 관해 쓰고 싶었다.

내 나이 서른 살에도, 마흔 살에도, 엄마의 삶이 궁금했다.

그때는 써야 할 이야기가 넘쳤으므로, 엄마는 자꾸 밀렸다. 언제나 내 뒤에 서 계실 거니까. 이번이 아니라도, 곧 돌아와 쓰면 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한번 미루니 두서너 해가 휙휙 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장편작가가 되었고 등단 20년이 지났지만, 엄마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며 문장으로 옮기진 못했다.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옮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너무 늦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이. (엄마의 골목, 8페이지)

 

그랬다. 엄마는 자꾸, 언제나 뒤로 밀렸다. 친구나 애인이랑 놀러 다니느라, 공부한다는 핑계로, 귀찮다는 진심은 숨긴 채 '다음에'라는 변명으로. 그렇게 뒤로 미루다 보니 이제는 엄마가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다리가 아파서 어렵고, 멀미가 나서 힘들고, 병원에 다니느라 시간이 안 난다고. 작가도 그랬을까. (아마 그랬을 거로 생각해야 내 맘이 좀 편할 것 같다) 엄마와 함께 걷고,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일. 쉽지도 않지만 어렵지도 않은 그 일을 그가 미룬 것처럼 나도 그랬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는 동안 다가오는 감정은, 미안함이 제일 앞선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도 엄마가 몸과 마음 의지하고 지내왔을 그곳을 이제야 같이 걸으며 적는 작가의 마음을 계속 따라갔다. 작가는, 언제 가더라도 늘 따뜻한 밥상을 내놓는 엄마의 마음을, 번거로운 일을 왜 하느냐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늦게 배운 하모니카를 부르는 엄마의 표정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을 거다. 일찍 부재한 아버지 자리의 크기를 가늠이나 할 수 있었을까. 엄마가 살아온 그 시간을 걸으며 엄마의 표정을 담는 작가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지만, 아마 이 책을 몇 번을 읽어도 다 알지 못할 것 같다. 작가가 적어낸 글로는 그 마음이 다 표현되지 못했을 것을 안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 맘의 모든 것이 그대로 표현되지 않을 감정의 크기를 우리는 아니까 말이다. 그 감정의 크기를 재단해야 하는 대상이 엄마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아마도 작가는, 엄마와 진해를 걷기로 했을 그 순간 오직 한 가지만 떠올리지 않았을까.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것.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를 비껴갔던 엄마의 시간 듣는 일을 이렇게 시작한 거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뭔지 아니? 일흔 살을 넘기며 늙어간다는 게 뭔지 아느냐고."

"……"

"이야기가 많아진다는 거야. 차곡차곡 이 가슴에 쌓이지. 그렇다고 그걸 전부 누군가에게 말해야겠단 생각은 안 들어. 다만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찾아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야. 네가 와서 이렇게 함께 걸으니, 네게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 것이고." (엄마의 골목, 156페이지)

 

작가의 엄마는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찾아오는 것도 감사하다고 한다.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얼마나 듣고 있나? 엄마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고 쌓아두고 있을까. 아마도 엄마가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시간은, 할 얘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야기할 기회'가 너무도 찾아오지 않아서는 아닐까. 고작 내가 듣는 엄마의 이야기는 이런 건데. TV에서 나오는 신작 영화 예고편을 보면서 '저거 재밌겠다!' 하는 엄마의 혼잣말을 듣고 무슨 영화인지 기억해두었다가 예매하는 것, 피부과에서도 완치해주지 못하는 엄마의 머릿속 질병에 마사지를 해주는 것, 옷 사러 가서 직설적으로 말하며 엄마의 선택 장애를 완화해주는 것. 홈쇼핑을 보면서 사고 싶은 게 있는데 주문하지 못해서 밖에 있는 나에게 전화하는 엄마를 귀찮아하지 않는 것? 너무 사소하다. 사소해서 기억에서 잘 지워진다. 그냥 그랬던 일이 있는 하루로 지나가버린다. 엄마의 이야기는 대개 그런 거였다. 물론 우리가 자랄 때는, 가장인 엄마가 고민하고 꺼내야 할 이야기는 너무 거대했을지도 모른다. 어린 우리가 들어도 모를 일, 안다고 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일들이었을 거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늙어가는 이 순간에, 엄마에게서 나오는 말들은 사소했다. 뭔가 먹고 싶다던가, 쓰레기 분리수거를 잘하라던가, 처방받아온 약을 먹기 싫다던가, 하는 그런, 그냥 휙 지나가버리면 들었는지도 모를 말들. 아주 몰랐던 것도 아니 텐데, 작가의 글을 읽다 보니, 사소해서 부담 없는 게 아니라, 사소해서 슬퍼지는 말이 되고 말았다. 뭐가 그리 어려웠다고...

 

되풀이하는 후회와 부끄러운 반성으로 『엄마의 골목』을 읽다 보면, 저절로 생각나는 책이 있다. 한설희의 『엄마, 사라지지 마』다. 처음 『엄마의 골목』을 펼쳐 들었던 날, 집에 들어와 『엄마, 사라지지 마』를 찾았다. 출간 때 읽었으니 몇 년 만에 꺼낸 거다. 그동안 다시 꺼내어 볼 만큼 별로였던 책이 아니다. 두 번은 읽기 힘들어서다. 그런데도 그 순간에는 꺼내지 않을 수가 없더라. 밖에 있는데 계속 생각이 났다. 엄마의 길을 걷고, 엄마의 모습을 찍는 두 책이 닮았다.

 

노모를 찍는 늙어가는 딸. 지금은 좀 더 나이가 들었을 테지만, 그 당시의 두 사람은 69세와 93세였다. 69세의 딸이 93세의 노모의 모습을 카메라의 뷰파인더 속에 담는 순간 어떤 감정이었을 지가 고스란히 전해져와 한 컷 한 컷에 담긴 그 모습을 독자와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주인공인 엄마의 표정을 계속 보게 되는데,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노모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을 쉽게 찾을만한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이 없는 게 아니라 그 표정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고 해야 하나. 곧 사라질 것만 같은 분위기에 뭐라도 하나 붙잡고 싶었다. 아마 작가도 비슷한 바람이지 않았을까. '늦든 빠르든 우리는 언젠가 고아가 된다.'는 작가의 말이 사실이니까, 그 순간이 빨리 오지 않게 간절하게 붙잡고 싶은 뭔가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작가는 엄마를 찍는 모든 순간에 아파하고 있었는지도.

 

 

 

 

엄마는 찍으면 찍을수록 쓸쓸해진다.

엄마의 고요한 적요가 사진에 남겨질수록 두려워진다. (엄마 사라지지 마, 215페이지)

 

엄마가 나를 두고 멀리 떠나버릴 것 같아서

나는 이 사진을 보면 조금 슬퍼진다.

하지만 그 일이 곧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엄마도, 나도. (엄마 사라지지 마, 47페이지)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안다. '찰칵'하는 순간 손이라도 떨렸는지, 작가가 찍어놓은 사진이 흐리다. 종이에 눈물이 떨어져서 번진 것처럼 선명하지 않은 페이지가 됐다. 그런데도 그 감정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엄마의 뒷모습이 하는 많은 말을 그대로 듣게 된다. 김탁환 작가가 엄마와 같이 걸으며 보았던 엄마의 많은 표정과 말을 한설희 작가도 엄마를 찍는 매 순간 그대로 들었을 거다. 그러면서 이별의 순간을 연습하는지도 모르겠다. 연습한다고 해서 이별이 이별이 아닌 게 되지도 않고, 이별이 슬프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폭풍을 만난 것처럼 이별이 거대해질 것 같아서 무서워서,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두 작가가 그려낸, 언젠가 마침표가 되어도 끝나지 않을 엄마의 기록들이 뜨거운 이 여름에 서늘하게 다가온다. 봄날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고 또 후회했다. 얼마 전에야 알았는데, 내가 사는 이곳 시에서 하루 코스 투어버스가 있더라. 작은 동네에서 '투어'라는 말이 우스웠지만 궁금해서 찾아봤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지명들이었는데,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몰랐나? 마침 그중에 몇 곳이 엄마가 궁금해 하던 곳이라 투어 신청하려고 했더니, 더워서 싫단다. 이 더위에는 그 어디도 가고 싶지 않다고. 엄마와 나는 입맛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데, 더위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건 또 닮아서, 이 작은 투어 버스를 타는 건 가을로 미뤄졌다. 여름보다는 걷기 좋은 계절일 거다, 가을은... 덥다 덥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이 여름도 금방 가겠지. 조금이라도 바람의 느낌이 달라지는 그때가 되면 작정하고 걸어야겠다. 살 게 없는데도 저녁에 산책 삼아 가는 동네 마트도, 무서워서 미루고만 싶은 병원도,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그 길도, 같이 걸어야겠다, 엄마랑...

 

 

잠든 엄마 얼굴을 머리맡에서 가만히 내려다봤다. 죽은 엄마 얼굴도 이러할까. 잠든 얼굴과 죽은 얼굴은 어떻게 차이가 날까. 질문 두 개가 연이어 떠올랐을 때, 엄마가 눈을 떴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자, 엄마는 처녀처럼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죽음이란 단어를 걷어내기라도 하듯. (엄마의 골목, 171페이지)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reeze 2017-07-24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장만 하고 아직 펴보지도 못한 책인데..... ^^

구단씨 2017-07-24 15:05   좋아요 0 | URL
엄마의 골목 읽으면 엄마랑 어디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예요.
저희 엄마가 귀찮다고 하시면서도 남동생 오면 잘 따라나서시거든요. 귀찮은 게 아니라 아들이랑 같이 가고 싶은 거였어요... OTL

노란장미 2017-07-24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기만해도 힘드네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게 된 저는.
한번도 엄마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후회로 남아요.
멀건히 방바닥을 바라보던 엄마의 눈빛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프네요.
기억은 시시때때로 기억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기억들까지 어디서 찾아들고 나타나네요.

구단씨 2017-07-26 15:50   좋아요 0 | URL
그쵸?
엄마가 화두가 되는 이야기는, 늘 그래요...
말이 없어지는...

나와같다면 2017-07-25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엄마도 새벽 별보고 기차타고 통학했다고 했는데..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네..
그리고 내가 엄마의 어린 시절을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도.. ㅠㅠ

구단씨 2017-07-26 15:52   좋아요 0 | URL
지금과 많이 다른 시대가 아니었나 싶어요. 추측하자면요...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들어도, 다 알 수 없는 대상이 아닐까 싶어요.
 
단델라이언 데드맨 시리즈
가와이 간지 지음, 신유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면서 많은 선택의 순간을 가진다. 매번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만족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만족도 후회도, 오롯이 자신이 받아들여야 하고 책임져야 할 몫으로 남기도 한다. 히나타 에미가 하늘을 나는 꿈을 꾼 것도, 그 꿈으로 대학을 생각했던 것도, 대학에서 민들레 모임이 참여하게 된 것도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 모임이 나아가는 방향의 기대와 후회도 자기 몫이었다. 에미의 그 기대가, 들리는 그대로 믿고 따라가며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것이 그녀의 잘못이었을까?

 

현재, 2014년. 폐목장의 사일로에서 발견된 시신으로 가부라기 특수반은 바빠진다. 사건 현장에 가보니 시신은 미라화 된 상태로 공중을 날고 있다. 날고 있다? 아니다. 끝이 뾰족한 파이프가 시신의 몸을 통과하여 양쪽 창 사이에 걸려 있는,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신이 날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시신은 16년 전에 이미 살해되었고, 16년 후에 발견됐다.

 

1998년 봄. 어렸을 적부터 허약해서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한 히나타 에미는 노력 끝에 대학생이 된다. 어렸을 적 엄마에게 들은 동화 ‘하늘을 나는 소녀’처럼 민담을 연구하고 싶어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만난 노부세의 권유로 ‘민들레 모임’이라는 동아리에 들어간다. 그 동아리는 세계 환경을 위한 취지로 운영되는데, 폐용기를 모아서 분리수거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백신을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에미를 포함한 동아리 회원 네 명은 적은 돈이지만 순수하게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세계 환경을 위한다는 의미로 열심히 활동한다.

 

1998년의 에미와 2014년 현재의 히메노 히로미(가부라기 특수반의 형사)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된다. 이 시리즈의 타이틀처럼 가부라기가 주인공이 되어 사건 해결을 위해 활약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히메노와 죽은 에미의 인연이 들려올 때 달리 보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현재와 과거로 풀어갈 것 같았는데, 굳이 둘의 접점을 만든 이유를 찾으면서 페이지를 넘기다가 보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둘 사이의 인연과 과거, 알듯 모를듯한 인물의 묘사가 이 소설을 어디로 흐르게 하는지 알 수 없게 한다. 특히, 추리소설인 이 이야기가 풀어내는 건 굉장히 다양하고 넓은 소재였다. 환경 문제 개선을 위해 작은 손 하나를 얹는다는 의미를 부여한 민들레 모임,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순수한 의도를 배신하고 조종할 틈을 노리는 사람들,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관계가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필요하다는 신념, 결국은 모든 순간이 다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의 기준이었다는 것. 각자의 이런 이기주의는 또 한 번의 살인 사건으로 더 큰 그림을 그린다. 가부라기 팀이 죽은 에미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호텔 옥상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죽은 사람은 가와호리 데쓰지. 조사해 보니 그는 16년 전 에미와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가와호리의 죽음으로 사건은 점점 더 미궁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가와호리와 에미의 연결 고리를 찾아야 하는 숙제가 더해진 거다.

 

순수하게 시작했던 일이, 서서히 그 순수함에 가려진 목적을 드러냄으로써 빛을 잃는다. 민담을 연구하고 싶다며 대학에 입학했던, 꿈이 가득했던 소녀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을 맞닥뜨리며 실망했다. 꿈. 저마다 모양은 다르겠지만 자기가 바라는 이상향을 찾아가는 길, 유토피아. 그 길의 험난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소설이었다. 각자의 목적을 두고 사는 모든 순간에 이어지는 선택들 앞에서 최선이라 믿고 따랐을 텐데, 결국은 나의 최선이 누군가에게는 끝이 되어버리는 일들. 가부라기 팀의 사와다는 동화 속 ‘행복한 마을’을 온전한 행복으로 보지 않았다. “‘행복한 마을’에는 온갖 것들이 갖춰져 있고, 게다가 공짜로 얻을 수 있어. 그야말로 행복한 상태지. 하지만 그건 일 년에 한 번 누군가가 큰 뱀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는 공포스러운 조건 아래 성립된 행복이야.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성립된 행복을 과연 참다운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리고 현실 사회도 마찬가지 아닌가, 라는 대단히 냉소적인 문제 제기를 하고 있어.”(274~275페이지) 에미가 엄마에게 듣던 동화로 꿈꾸던 나라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누군가의 희생을 배제한 행복이었다는 의미다. ‘모두’가 행복한 나라는 없다는 말. 누군가의 희생으로 존재하는 행복이 행복한 나라일까 하는 의문을 던진다. 토머스 모어의 작품을 예로 들며 유토피아를 정의하던 히메노의 말을 듣고 가부라기가 떠올린 불길함도 이 행복의 기준과 통한다. 유토피아란, 사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 이상향이 아니라, 사실은 비인간적인 반이상향, 더구나 지배계급을 위한 나라…….(194페이지)라는 현실을 에미가 깨달은 순간 그녀의 이상향은 사라졌다. 그리고 죽음. 유토피아를 꿈꾸며 자기 선택을 믿고 따르던 그녀에게 남은 것은 실망과 배신, 죽음이었던 거다. 그녀가 꿈꾸던 유토피아에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전제는 없었다. 결국, 그녀의 유토피아는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꿈으로만 머문 채로 끝났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상황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영어로 단델라이언(dandelion)이라 불리는 민들레. 이파리의 뾰족뾰족한 모양이 사자의 이빨과 닮았기 때문에 ‘사자의 송곳니’라 부리기도 한다는데, 소설 곳곳에서 뾰족하게 드러나는 날카로운 이빨을 연상하면 어울리는 이름이다. 바람이 불면 씨가 날아가 아무 데서나 자리 잡고 피는 걸 보았기에 흔하게만 여겼다. 그런 민들레를 왜 굳이 소설의 곳곳에 넣어두었을까. 에미가 유토피아를 언급하면서 보여주었던 민들레 나라는 행복을 꿈꾸게 한다. 기형이 된 민들레는 방사능 오염의 증거가 되어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기형 민들레의 진짜 의미는 뒷부분에 자세히 나온다). 소설 전체적으로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라는 꽃말을 심어놓는다. 사실 끝부분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이들의 퍼즐이 맞춰지는 걸 보면, 풀기 쉬운 수수께끼는 아니잖아?

 

가부라기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다. 앞선 두 작품 『데드맨』과 『드래곤플라이』의 입소문은 익히 들어왔으나 막상 읽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가부라기 특수반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를 먼저 읽게 되어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들의 활약을 하나도 모른 채로 이번 이야기를 읽어도 될까 하는 염려가 앞섰는데, 기우였다. 오히려 이 소설로 놓친 두 소설을 읽고 싶어졌으니까. 개방형 밀실이라는 모순된 상황에 수수께끼는 더 꼬이는 듯했고, 등장인물이 한 명씩 늘어날 때마다 미스터리는 더 탄탄해졌다. 기형적인 민들레가 하나둘씩 자리를 비키고 온전하게 예쁜 노란 꽃이 보일 무렵, 각자가 이루려던 꿈이 완성되지 못해 시작된 사건은 16년의 세월을 넘어 투명해졌다. 가독성 좋은 소설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이제 막 이 시리즈의 즐거움을 찾았는데 마지막 이야기라니, 그래서 나머지 두 편을 더 읽어보고 싶은 간절함을 놓칠 수 없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쁜 표지여서 고민에 고민을...

책장을 뒤져보니 박준의 시집만 가지고 있더라.

나머지 두 권의 시집도 읽었는데, 집에 없는 걸 보니 아마도 도서관에서 읽었나 보다.

 

 

 

 

 

 

 

 

 

아직 구입하지 않은 시집을 예쁜 표지로 득템하기 위한 좋은 기회인데,

여기서 문득 드는 생각...

분명 읽었는데 굳이 사지 않았다면, 나는 그 시집을 왜 사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의 답을 찾아야

이번 시집을 살까말까 고민하지 않을 텐데...

그냥 책장에 없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그때 왜 안 샀는지 모르겠네...

 

봄날 같은 표지에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이러다 곧 사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다가, 기어코 울음을 터트린 여자는 이제 눈물을 멈출 수 없다.(「입동」) 아이가 쓰다가 만 이름을 보는 순간 견디고 있던 슬픔은 폭발했다.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아이지만, 다들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지만, 아니다. 그 무엇도 해결해주지 않을 상실의 고통이라는 것을, 같은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그 순간, 슬픔을 견디는 이에게 해줄 말은 없다. 그냥 울게 내버려 두는 게 해줄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오래전에 산 도배지를 입동이 되어서야 꺼낼 수밖에 없는 마음을 아는 사람, 누구일까?
 
뜻밖이었다. 그동안 읽은 김애란의 소설에서 서늘함과 추움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이번 소설도 역시 우리 인생의 꼬질꼬질함을 유쾌함으로 들려줄 거로 생각했다. 착각이었지. 예상하지 못했던 쓸쓸함이 밀려왔다. 안쓰러웠다. 저절로 알게 되며 스미는 슬픔에 공감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고통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 그게,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좀 울어보니 어때? 이제 그 슬픔은 좀 덜어졌니?'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차마 묻지 못한 말이 되어 가슴에 남았다. 작가의 말처럼 '하지 못한 말과 할 수 없는 말, 하면 안 되는 말과 해야 할 말이 인물이 되어 나타난' 순간을 지켜볼 뿐이다. 그렇게 작가가 전하는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여전히, 우리의 고통과 슬픔에 희망을 대입시키는 건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고.
 
소설 속에서 마주하는 희망은 우리가 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희망이 없다면, 오늘을 살아갈 의미도, 내일을 기다릴 이유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런 까닭으로 받아들이자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지만, 간혹 이야기에서 강요된(?) 희망이 현재의 삶과 괴리를 느끼게 한다면, 소설 속에서 외치는 희망은 공감하지 못한 불편으로 남을 뿐이다. 김애란의 이번 작품이 담백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렇게 강요된 희망으로 섣불리 위로를 꺼내지 않아서다. 슬픔 뒤에 바로 희망을 놓지 않고 현재의 상태 그대로를 전할 뿐이다. 슬프면 슬픈 채로, 아프면 아픈 채로. 나의 오늘이 타인의 삶과 동떨어진 것 같이 보여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수밖에, 뭘 더 하겠냐고 묻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의 절망과 고통을 들려주며 우리의 오늘을 보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듯,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이국의 열기 속에서 교수 임용 소식을 기다리는 화자의 서늘함과 분노로 여름을 느끼는 듯했다.(「풍경의 쓸모」) 타국의 더위 속에서 보는 핸드폰 문자의 한글은, 마치 스노우볼 속의 눈 내리는 풍경 같다. 지금 그와는 아무 상관 없이 흘러가는 계절을 눈앞에서 마주한 것처럼, 쓸모없는 풍경만이 그의 문자함을 계속 채운다. 기다리던 소식은 오지 않고, 피하고 싶은 소식이 도착한다. 이런 게 인생인가, 라고 묻고 싶은 표정을 그린다.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창밖으로 아스라이 멀어지는 이국의 불빛이 보였다. 비행기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다 유대용 안대를 쓰고 의자를 뒤로 젖혔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여섯 시간 동안 일단 아무 생각도 안 할 작정이었다. 잠을 청하려 천천히 숨을 고르는데 속에서 기체인지 액체인지 모를 무언가가 뜨겁게 치밀어올랐다. 마른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그것을 내려보냈다. (182~183페이지, 「풍경의 쓸모」)
 
여기에서 우리가 슬픔을 감당하는 하나의 방법이 전해진다. 그는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마른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내려보내는' 것으로 그 순간을 통과한다. 임용에서 탈락했다고,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았다는 걸 안 순간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 순간을 참아낼 뿐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고통을 건너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이, 작가는 어떤 대책을 남겨 두지 않는다. 그런 모습은 「건너편」과 「가리는 손」에서 현재 상황이 무엇을 선택하게 하는지 보여주며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어떻게 할래? 다른 선택이 있어?’라고 묻는 것처럼. 「건너편」의 여자는 매번 남자와 헤어질 타이밍을 놓치지만, 결국 헤어진다. 그를 생각나게 하는 '노량진'이라는 한 단어에 시선이 머물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오늘 남자 없이 지나가야 내일이 열 수 있다. 「가리는 손」의 엄마는 '설마 내 아들이?'라는 의문을 품지만 확인할 수 없다. 아니, 믿고 싶지 않을 거다. 내 아이가 그럴 리 없어, 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보내지만, CCTV 속 아이의 표정에 의문을 품는다.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으니까. '이대로 조용히 지나가면 안 되나?' 하는 불안을 남긴 채로 머문다. 그렇게 오늘만 모른 척하면 다 지나가게 될 거야. 그러다가 불안은 죽음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듯, 마지막 순간으로 이어진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할머니는 집에 늙은 개를 들여 그 과정을 나날이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50페이지, 「노찬성과 에반」)
 
「노찬성과 에반」으로 늙어감과 죽음을 적나라하게 들려주며, 결국에는 「침묵의 미래」의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게 된 사어(死語)로 우리의 미래를 보게 한다. 늙어가다, 죽는 게 우리의 미래이자 순리라는 듯. 할머니가 찬성이 데리고 온 유기견 에반을 보기 싫어했던 것은, 에반을 보는 게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서다. 늙고 병들고, 살리려 애를 써도 결국 죽고야 마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그렇게 마주한 사어로 마지막을 확인한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매번 찾아오는 슬픔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상실을 심는다. 창밖 저들의 행복이 왜 나에게는 찾아오지 않는지 서글퍼 하면서도 용기를 내지만, 그 용기는 행복이라는 답으로 돌려주지 않는다. 잃은 자의 아픔은 아픔으로 남아있고, 절망을 느끼면서도 감당하는 게 답인 것처럼 또 다른 아침의 눈을 뜬다. 이렇게 살아지겠지, 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오늘을 또 한 번 견뎌야 하는 걸까? 마치 일 년 내내 추운 겨울인 것처럼?
 
그 겨울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작가는, 바깥은 뜨거운 여름인데 안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계절을 멈췄다. 상당한 시차로 더는 흐르지 않는 계절을 이 순간에 고이게 했다. 웅덩이가 더 깊게 파고 들어가 겨울의 폭설이 얼어붙은 듯이, 지금 계절이 여름이라는 것을 아주 잊은 듯이.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소설집의 처음과 끝에 배치된 작품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다른 듯하지만 닮은 두 작품에서 작은 틈을 본다. 아이를 잃은 부부가 이제 겨우 감정을 추스를까 하는 순간에 처음 슬픔을 마주한 그때로 돌려놓는다.(「입동」) 그들의 눈물이 아직은 멈추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상실감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다가 벽의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글 자음과 모음으로 위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만든다. 어쩌면 부부는, 그렇게 한 번씩 예상하지 못한 순간을 겪으며 치유의 자리를 넓힐 것이다. 가슴 속 서늘함은 그렇게, 조금씩 온도를 높여갈 것이다. 그리고 마치 잊은 것이 지금 생각났다는 듯,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마지막에 놓아 그 위로의 틈을 조금 더 만들고 글을 닫는다. 학생을 구하려다 죽은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명지는 죽은 학생의 누나가 보낸 편지에서 밖의 계절을 본다. 이해할 수 없던 남편의 선택을 원망하면서 보낸 안의 풍경 너머, 비로소 밖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겨울 속으로 여름의 열기가 뛰어들 것을 보여준다. 차가움 속으로 뛰어든 뜨거움 때문에 어느 정도 미지근해진 온도. 이제 어느 쪽으로든 가능해졌다. 더 추워질 수도, 더 더워질 수도 있다. 계절을 잊은 듯 살아온 시간이 변할 문을 살짝 열어놓는다. 바깥에 흐르는 계절을 이렇게 보기 시작했으니, 더 열든 아예 꽁꽁 걸어 닫든, 그건 오롯이 각자의 몫이니 어느 쪽으로든 알아서 가보라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중략) 그러니까 거기 사 인용 식탁에서. 식탁과 맞붙은 산뜻한 올리브색 벽지 아래서. (20페이지, 「입동」)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266페이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여전히, 우리의 계절은 흐르겠지. 때로는 겨울의 추위에 움츠러들었다가, 가끔은 봄과 가을의 바람에 몸을 맡겼다가, 여름의 햇볕에 검게 그을렸다가. 내가 체감하는 계절은 매번 다를 수 있다. 겨울 속 여름을 살거나, 여름 속 겨울을 지내거나. 어쩌면, 그때마다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소한 것들로 현재의 계절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불편한 손으로 꼭꼭 눌러쓴 편지의, 위로와 안부의 몇 글자가 미움과 분노를 그리움으로 변하게 한 것처럼... 소설 속 주인공들은, 밖으로 나가 현재의 계절에 뛰어드는 방법을 몰라 허우적대던 사람들에게 온기가 스미는 방향을 가르쳐 준다. 답이 아니라, 여전히 질문을 남긴 채로 돌아선다. ‘자, 이제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