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누가 듣는가 - 제1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이동효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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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그 순간.

책을 읽다 보면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별것 아닌 내용에 갑자기 울컥해지거나, 위로받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에 눈에 들어온 문장 하나로 감동이 쏟아지거나,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싶을 때 배꼽 잡게 하는 허무맹랑한 제스처에 깔깔대거나... 우리 일상에 그런 순간을 만들어주는 게 많이 있겠지만, 책과 비슷한 분위기로 다가오는 게 노래라고 생각한다. 내 기분에 맞춰, 상황에 어울리게 스리슬쩍 다가와 버리는 순간. 보통 이런 순간을 타이밍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 타이밍은 참 절묘하다. 진짜 별로라고 생각했던 책이나 노래가 그렇게 다가오면 당황스럽잖아. 진짜 듣기 싫은 노래였는데, 갑자기 좋아지는 그런 거, 적응하기 좀 그렇잖아. 아이러니하게도, 그 타이밍이란 건 대부분 이런 경우가 많았다. 어느 순간, 정말이지 그 찰나에 꽂혀버리는 것. 오래전 얘긴데, 진짜 별로라고 생각했던 선배가 듣고 있던 노래 한 곡에 반해 그 선배를 좋아하게 된 적도 있다. '어? 이 노래 너도 좋아해?' 하는 괜한 공감의 이유를 찾아낸 게 보물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제 와 기억해보면 그냥 웃을 일, 어렸을 적 얘기지만 그 의미는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 뭐든, 타이밍이 중요한 거였어.

 

왜 하필 지금 이런 노래가 나오는 것일까? 흘러나오는 저 노래야말로 그녀의 본질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문득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삶의 고비 고비마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노래, 의미심장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모든 우연은 신이 흘린 편지래요, 소곤대는 성은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185페이지)

 

아버지의 구타가 장난 아니다. 주인공 오광철은 아버지의 술과 폭력으로 말더듬을 갖게 되었다. 이 말더듬은 그냥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그의 첫 사회생활인 학교생활부터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그 말더듬은 어마무시한 장애가 된 거다. 학교생활, 직장생활, 군대생활, 연애까지 모두. 술을 마실 때, 노래를 부를 때 그의 말더듬은 잦아든다. 그가 찾은 말더듬의 치유법이다. 그래서 넘치게 술을 들이켠다. 술을 깨기 위해 노래방을 돌고, 다시 술을 마시고, 노래방, 술, 노래방, 술... 이 정도면 알코올중독 수준 아닌가? 금방 끊겨버리는 필름, 일어나보면 젖어있는 옷,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몸뚱이. '자신이 이렇게 된 게 다 그 인간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가 세상을 제대로 살지 못한 이유, 말더듬을 숨기려고 침묵을 택한 일상, 비겁하고 외로워지는 순간들은 덤. 세상에 섞이지 못하고 격리된 생활을 하게 된 것도 모두 그 인간 탓이다.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모든 걸 내보일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난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 음악을 좋아했던, 기타를 잘 쳤던, 말발로 사람들을 휘어잡았던 개둥이(개주둥이). 개둥이와의 우정은 광철이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해진다.

 

제목 때문에라도 눈치를 챘겠지만, 다양한 노래가 등장한다. 1980년대의 음악이 주를 이루고 팝송과 가요가 계속 언급된다. 솔직히 내가 모르는 음악도 많았고, 흥얼거리던 기억이 있는 오래된 노래도 있었다. 가사의 정확한 의미를 몰라도 멜로디가 기억나 나도 모르게 알게 된 노래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삶을 성장의 과정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음악으로 인해 이들의 인생이 어느 정도 흔들리는, 혹은 포기한 꿈이 만들어낸 격한 감정들을 풀어낸다. 거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광철이 처음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던 순간이 어떻게 시작된 건지 나올 때는, 음악이 한 인생을 어떻게 주관할 수 있는지 놀랍게 한다. 그 안에 한 사람의 집착 같은 사랑이 어떻게 폭력을 감당하게 하는지 보여준다. 사람이, 절실해지면, 간절해지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구나 싶은 절망, 체념, 혹은 기대가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광철의 엄마가 선택한 인생, 광철의 아버지가 포기한 삶, 광철이 알지 못하는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게 한다. 그가 선택한 인생의 찰나들이 그에게 남겨준 게 뭐였는지, 그 고리의 시작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또 어떤 것들을 포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게 했다. 그 길에서 함께한 노래들이 구성지다. 피식 웃음도 났는데, 사실 그 절절한 마음들이 노랫가락에 들려오는 것 같아서 아픈 마음이 더 컸다. 노래라는 게, 음악이라는 게 위로나 즐거움이 되면 더없이 좋겠지만, 때로는 그 음악이 거부와 분노의 몸부림이 될 때는 안타까움이 흘러내린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모든 것들에 음악도 있을 텐데, 그 음악이 미움으로 변해버린 순간 바로 버려질 것만 같아서 말이다.

 

노래는 내게 휴식이었고, 삶을 버팅기게 하는 피난처였다. 그건 내가 처음 음악을 접하게 된 계기부터가 그랬다. 구타 뒤에 나오는 아비의 그 흥얼거림.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이 싫어서도 나는 곧잘 내 방에 처박히곤 했다. 처음엔 이불을 뒤집어썼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헤드폰을 꼈다. 헤드폰을 끼는 순간, 나는 외부로부터 완벽히 단절되었다. 헤드폰만 끼면 원하는 소리를 언제고 들을 수가 있었고, 혼자서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었기에 아비의 노랫가락이 들려오지 않아도 나는 자주 헤드폰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FM 라디오를 듣다가 금방 팝송에 빠져들었고, 중1 때 처음 스모키 판을 사들이는 걸 시작으로 그때부터 과도한 열정으로 레코드판을 모아댔다. (47페이지)

 

『노래는 누가 듣는가』의 주인공 오광철의 인생 안으로 다가온 노래가 참 굴곡지다. 화자인 '나' 오광철의 연대기적 서술로 이어가는 이 소설 속에서, 틈틈이 그에게 다가온 노래가 그의 역사를 함께했다. 그의 삶에 숨겨진 것들이라고 말해도 되려는지 모르겠지만, 지나고 보면 다 그의 시간을 채워준 것들이지만, 그 당시에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 고스란히 보여서 감정을 이입하게 한다. 외롭고 고독하고, 상처가 깊고, 죄의식을 만드는, 열정을 품었던 음악과 인생들. 좋아서 좋았고, 싫어서 싫은, 귀로 파고드는 그 음악들이 그에게 온갖 감정을 만들고, 분노게이지를 상승시켰으리라. 알 것도 같다. 어쩌지 못하는 그 몸부림을, 발악을, 회피를, 그의 인생을 이렇게 만든 원인으로의 화풀이를, 결국, 어떻게든 이루어질 것 같은 화해의 멜로디를...

 

주둥이만 살아있던 개둥이와의 추억, 미친 듯이 패대기치던 아버지의 폭력 뒤에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던 노래, 어머니가 중독되듯 빠져들었던 교회의 찬송가.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를 카페 풍차의 주인 정희. 순간순간 어둠이 온몸을 장식하지만, 햇빛 아래로 돌아온다. 누구나가 바라는 결말 아닌가? 읽으면서, 대물림하듯 술판을 벌이는 광철에게 매번 분노했지만, 그 이유를 찾고 싶어 거슬러 올라갈 때마다 그를 향한 분노는 동정으로 변한다. 내가 알 것 같은 느낌들, 그냥 놔두는 수밖에 없는 성격의 일들, 그래서 보는 이가 좌절하게 하는 순간들이 답답했지만 읽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을 봐야만 안심할 것 같아서... 참으로 광철스러운 행보에 웃음이 나지만 어쩌랴. 그가 그런 모습인 것을. 됐다, 그 정도면. 지금쯤 어디 시골 다방에서 주방을 책임지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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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엄마
신현림 지음 / 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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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의 글귀를 보는 일은 인생에서 굉장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엄마와 함께 책을 읽는 일은 삶의 지혜와 철학을 만나게 해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영혼을 느끼고 영혼이 풍요로워짐을 깨달으리라. 참으로 멋진 일이다. 지금 당장 엄마가 좋아하실 글이나 시를 전해보기를. 그러면 그 순간 추억이 만들어진다는 것. (206페이지)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아니, 그런 순간이 필요하다. 어떤 문장 하나, 어떤 음악 하나가 눈과 귀에 들어와서 힘든 한순간의 위로가 되는 때. 무심코 들었던 멜로디에서 눈물이 주룩 흐르기도 하고, 시의 한 구절이 가슴을 파고 들어와 이 순간을 건너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에도 벅찬 게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하나를 지탱하는 것도 어려운 순간마다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엄마'라는 존재감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무게일까?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감정의 거대한 숫자이리라. 그 무게가 나를 꼿꼿하게 설 수 있게 묶어주면 좋겠지만, 또 그러지 못해서 에너지의 기복을 그리는 게 인간이고 엄마일 것 같다. 시인이자 작가이자 선생인 저자가 엄마로 살면서 그런 순간이 없었으랴. 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순간이 이 사람에 없을 수는 없다. 그때마다 그녀를 위로하고 힘이 되게 하는 시의 구절들을 그대로 담아온 책이다.

 

매번 흔들리고 좌절할 때마다 엄마라는 이름의 그녀가 사는 의미를 얻게 한 문장들이 가득하다. 그녀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힘을 내게 했던, 이 세상의 모든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38편이 담겼다. 거기에 저자가 엄마로 살면서 겪은 온갖 감정을 쏟아내는 에세이가 함께 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 겪는 육아의 고충, 아이가 커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세상의 시선에 상처받았던 일. 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된 딸의 엄마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옆에서 위로가 되었던 문장들이다. 두렵고 막막한 날들에 겁이 나면서도 나아갈 수 있었던 건 그녀가 품은 시 때문이었다. 시인들의 시가 묵묵히 그녀를 지켜주었고, 그녀 자신이 써 내려간 시 구절들은 그녀의 삶이 오롯이 담겼다.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글귀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도달해야 할 어떤 곳이 있을 것 같다

그 비로소는 어떤 곳이며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

비로소까지 도달하려면 어떤 일과 어떤 현상, 말미암을 지나고

또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할 것인가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저의 한계를 놓아버린 그곳

싱거운 개울이 기어이 만나고 만

짠물의 그 어리둥절한 곳일까

비로소는 지도도 없고

물어물어 갈 수도 없는 그런 방향 같은 것일까

우리는 흘러가는 중이어서

알고 보면 모두 비로소,

그곳 비로소에 이미 와 있거나

무심히 지나쳤던 봄꽃,

그 봄꽃이 자라 안 할의 사과 속 벌레가 되고

풀숲에 버린 한 알의 사과는 아니었을까

비로소 사람을 거치거나

사람을 잃거나 했던

그 비로소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아득함의 위안을

또 떠올리는 것이다 (「비로소」, 이서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부터, 너무 유명해서 귀에 익숙한 시인들까지. 그들의 시를 저자와 같이 듣고 있는 느낌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계속된다. 누군가의 일상을 듣는 것도 같고, 힘든 순간을 잘 건너고 싶은 주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부정의 감각들이 온몸을 감싸고 주저앉고 싶게 할 때마다, '그래, 사는 거 뭐 별거 있나, 다시 일어서는 거지, 이 정도도 건너지 못하면 뭘 할 수 있다고, 계속 가보는 거야.' 많은 의미와 감동을 담은 메시지로 전해오는 시 구절들이 힘이 된다. 그때마다 보이는 건 바로 옆의, 저자의 딸이다. 딸을 키우면서 알게 되는 감정이 또 다른 문장들로 함께 녹아 있다.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다. 이제는 딸과 함께, 친구처럼 동료처럼 가족처럼, 서로 의지가 되고 무한의 응원을 보내는 사이가 되어 있다는 거. 힘든 시간 같이 겪어간다는 건 그런 건가 보다. 저자의 상황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 내가 엄마와 함께 지내면서 겪고 느끼는 시간의 감정은 저자와 비슷하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이지만, 그 이상의 많은 관계로 정의할 수도 있는, 엄마와 내가 공유한 같은 경험들이 만든 관계의 끈끈함이 있다. 지금도 서로 싸우면서 감정도 상하고 그러지만, 언제 그렇게 싸우고 그랬냐는 듯이 새로 개봉한 영화를 같이 보고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웃는 시간이 있다.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떤 순간들을 같이 건너온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다. 저자와 딸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엄마의 아픔을, 엄마의 노력이 얼마나 힘에 부치는지... 그런데도 딸과 함께하는 시간을 계속 이어가는 엄마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괜히 뭉클해진다.

 

물 냄새를 맡고 싶어

좁은 계단으로 강가에 내려간 적이 있다

 

휘어진 모래톱

부드러운 변방에 서서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았지만

 

물가에선 또 다른 냄새가 그리워

어디로 더 가야 하지

 

다리도 계단도 없을 곳이라면,

아득히 귀를 열고 선 내게

 

흘러드는 물은 멀어지는 물살은

날더러 기슭이라고 그토록

 

어디든 닿고 싶어서 (「강가에 내려간 적이 있다」, 조원규)

 

여름을 느끼게 하는 한낮의 더위가 아니라 아직은 봄이 다 가지 않았다고 느끼게 하는 선선한 바람을 맞는 기분으로 읽고 싶은 글이다. 부채질하면서 밀어내고 싶은 않은, 가슴으로 스며드는 바람으로 느끼고 싶어서... 아무리 이해를 한다고 해도 엄마의 모든 것, 모든 시간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이는 것 이상으로 건네져 오는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저자의 글이 낯설지 않다. 읽는 순간순간 어떤 감동이 느껴질 때마다, '한 번도 좋은 딸인 적 없다'는 저자의 고백이 내 얘기를 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끔해진다. 엄마의 마음을, 엄마의 힘든 시간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저 습관처럼 '엄마니까'라는 생각으로 지나쳤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쉽지 않았겠구나. 우리 엄마도, 세상 모든 엄마도...

 

'엄마라는 무게를 견디고 있는 당신에게'라고 말하지만, 늘 삶의 무게를 이겨내야 하는 숙제로 오늘을 버티는 우리 모두와 공유하고 싶은 글이다. 엄마라는 책임이 절대 가볍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또 각자의 무게를 안고 사는 게 우리니까 말이다. 삶이 언제나 편하게 지나갈까 싶은 투정이 가슴 속에서 뛰쳐나오려고 하면서도, 이렇게 살아가며 울고 웃는 게 우리 인생인가 싶은 마음에 또 한 번 자신을 토닥이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위로가 없다면 우리가 오늘을 사는 일은 더 힘들 것만 같다. 저자가 전하는, 위로와 힘이 되었던 시 구절들이 이 책을 읽는 모두에게 그대로 가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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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의 서 -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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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막연하게 죽음을 생각하면서 읽는 것과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지켜보고 읽는 것은 매우 다르다. 소설로 읽으면서 대비하듯 죽음을 대하는 건 전자에 가깝고, 현실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공감하며 읽는 건 후자에 가깝다. 분명 둘 중 한 가지만의 공감이 따라올 것 같았는데, 나에게 『위안의 서』는 두 가지 경우를 모두 느끼게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겪은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갑작스레 몇 번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도, 아직 다 모르겠는 죽음을 생각하게 하면서도, 경황없이 겪은 죽음이 실재라는 걸 각인시킨다. 누구에게든 죽음은 가까이 있으며, 매 순간 죽음과 협상하듯 오늘을 버티는 기분이 든다. 그건 아마도 소설 속 두 주인공 정안과 오상아가 감추려 애쓰는 것이 보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속도가 너무 빠르게 다가와 더는 미뤄두지 못하는 시간을 사는 정안과 죽음을 경험한 이들에게 위로를 보내며 자기의 죽음을 미뤄두는 상은의 진심 때문에...

 

정안은 박물과의 보존과학자다. 모든 죽은 것의 시간을 복원한다. 죽은 사람의 흔적으로 생존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내고, 사라지고 부서진 유물의 처음 모습을 찾아준다. 시간과 자연으로 빛을 잃고 원래의 생태를 잃은 것을 복원하는 일이 그의 업무다. 그에게는 안성맞춤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도 싫어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나누는 감정도 불편한 그가 찾은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에게 주어진 또 한 번의 일, 미라 보존처리를 하게 된 그는 미라 특별전에서 관람객을 상대로 설명까지 하게 된다. 거기서 본 어떤 여자, 오상아. 오상아는 정부에서 비밀리에 파견한 공무원이다. 자살을 방지하거나, 가족의 자살로 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게 그녀의 업무다. 타인의 죽음을 막는 일이라니, 그녀 자신이 생의 의지가 거의 없는데, 타인의 죽음을 막으며 그들이 겪은 죽음으로 더는 나아가지 못할 삶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일을 한다니... 그녀의 삶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쳐있는 듯하다. 그러다 우연히 찾아간 박물관의 미라 특별전에서 여자 미라의 악수(幄手)를 간절히 바라보던 오상아는, 그 미라에게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순간을 느낀다. 그때 정안의 목소리를 듣는다.

 

“유리에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그 순간 정안은 무엇을 보았기에 오상아가 미라의 악수에 다가가려 했던 것을 저지했을까. 단순히 관람객이 전시물의 유리에 손을 대는 걸 막기 위함은 아니었던 듯하다.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어떤 것이 그녀를 부르게 했던 거다. 아마도, 비슷한 듯 다른 두 사람 사이에 부유하는 공기만이 설명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가 소리 내어 타인을 부른 순간, 그녀가 미라의 악수에 다가가려 했지만 저지된 순간, 무언가가 깨졌다. 각자가 단단한 성벽처럼 세웠던 원칙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본 것만 같고, 그녀는 감추고 싶은 것을 들킨 것만 같다. 그리고 며칠 후 박물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죽음을 사이에 둔 채로 진심을 듣는다. 여자 미라가 입고 있던 수놓아진 저고리에 이야기를 부여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킨 그의 설명에 반박하듯 그녀는 소리친다. 그녀가 매일 겪는 죽음의 모습은 그의 설명처럼 전혀 아름답지 않음을 진하게 새긴다. 그녀가 본 죽음은 얼마나 잔인하게 현실을 보게 하는지 그는 모른다는 것처럼 외친다. “죽음은 우리 인간을 어느 순간 냉정하고 잔인하게 덮쳐올 뿐이라는 거예요.”

 

그녀의 성장 기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가 매일 겪는 죽음의 양상들 때문이었을까. 그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시간에 아름다운 기억을 부여한 것으로 여겨도 좋을 미라의 사연에 그녀는 현재 자기가 보는 죽음을 대입시켜 그들의 사연을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말한다. 죽은 여자에게 입혀진 남자의 옷에 아름다운 상상 따윈 집어치우라는 듯이, 수놓아진 그림 속의 새와 벌레의 생존에 그녀의 시선을 새긴다. “삶은 그래요. 새가 생존을 위해 벌레를 잡아먹은 것, 그렇게 벌레의 생이 끝난 것, 그렇게 하나의 죽음이 완성된 것. 그것뿐이에요.”라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은 그렇다는 것을 새삼 증명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아름답게 포장하려 애써도 결국 포장지도 낡고 찢어지기 마련이라는 듯이, 그 안의 내용물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을 거라는 걸 강조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꺼져가는 그의 삶이 그대로 보인다. ‘그거 봐, 당신이 누군가의 죽은 시간을 복원하려고 해도,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한 의복이어도, 잘 맞춰진 뼛조각이어도, 그뿐이잖아. 그들의 시간은 거기서 멈췄잖아.’

 

그는 문화재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에 매달리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금속이나 돌처럼 물성이 본래 차갑고 단단한 것들은 그만큼 시간이 파고들 틈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을 지녔던 닥나무를 원료로 한 종이나 비단, 모시, 삼베 등의 부드러운 것들은 너무나 쉽사리 자신의 틈새를 열고 시간을 흡수한다. 결과는 처참하다. 본래의 치열하고 매혹적이었던 빛깔은 빠르게 제 빛을 잃고 퇴색해버린다. 뿐만 아니라 부후균이나 벌레에 의한 공격까지 받는다. (59~60페이지)

 

매일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그와 매일 타인의 죽음을 보는 그녀가 사는 오늘을 떠올려본다. 누구의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삶이었다.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유전적인 병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맞서 싸울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담담하게, 혹시 내일 내가 돌아오지 못할 순간을 맞이한다면 누군가가 자기 삶을 깨끗하게 정리해주길 바라는 부탁을 할 뿐이다. 생존을 위해 타인의 죽음을 보고 들으며 위로를 업으로 삼는 그녀는 그들의 죽음을 저지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형식적인 위로를 건넨다. 그게 그녀의 일이다. 그녀가 진심을 담아 건네도 아무것도 나아질 게 없는 그들의 삶에서 죽음을 배제하라고 강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녀는 안다. 다행이라며 살아남은 그들은 곧 다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 거라는 것을. 그런 두 사람의 만남이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한 사람은 타인의 죽음을 관조하는 진심을 숨긴 채로 건네는 위로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는데?

 

소설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문자에 그가 답하면서, 그가 유물 발굴 현장으로 그녀를 이끌면서 분위기를 전환한다. 죽음에 끌려가는 것처럼, 자조적인 웃음으로 죽음을 마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의 시선에 빛을 비춘다.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이 고개를 들고 바라본 환한 달빛, 온몸으로 건네는 위안이 보여준 동트는 아침. 그는 죽어가는 시간을 잊은 듯 그 순간을 보내고, 그녀는 관조하듯 타인의 죽음에 위로를 건네는 것을 그만두겠다는 듯이 눈빛을 빛낸다. 그녀는 처음으로 전화벨이 울리길 기다린다. 새벽에 울리는 그 죽음의 전화벨 소리가 아니라, 그녀가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게 사랑과 위안이 될 타인의 시선을... 여자 미라에게 입혀진 남자의 저고리가 말하는 의미를 이제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 그녀다. 혼자가 아닌, 시간을 공유하는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유대감, 이제야 비로소 내 삶에 타인을 들일 수 있게 된 순간의 희열.

 

누군가의 죽음을 유기하기 위해 파놓은 깊은 구덩이 같은 발굴 현장에 내리고 있는 눈송이들이 그는 죽음처럼 보였다. 죽음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언제나 우리 머리 위로 일정하게 떨어져 내려 삶의 윤곽을 뒤덮어버리는 선뜩한 비늘들인 것이었다. (115페이지)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삶의 모든 순간이 풍성한 안도로 채워져 있지는 않을 테니까. 가까이서 멀리서 겪는 죽음에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시간에 공존하는 죽음이다. 정안과 상아가 비슷한 상처로 고통받고 비슷한 바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 그들의 두려움이 옅어졌던 것처럼,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위안도 비슷할 것이다. 계획하지 않았지만 찾아오고야 말았던 위로의 순간은 서로를 보듬는 손길로 온도를 가진다. 죽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죽음이 삶을 갉아먹지 않도록 죽음으로부터의 공격을 막는 일은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그게 사랑이라면 더없이 아름답겠지. 상아가 기다리는 전화벨 소리는 울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그녀는 이제 죽음이 삶을 잠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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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시댁을 본 적이 있다(사실 너무 많이 봤지만...) 아들과 결혼한 며느리를 무임금 노예 한 명 들인 것으로 여기고 함부로 대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아들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혹은 시댁의 많은 일을 처리하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아니, 사람으로 생각하면 그런 짓(?) 못 하는 건데, 왜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지 모르겠는 상황들. 하아...

 

미혼인 내가 결혼도 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다. 누군가를 만나서 좋아하면 되고, 혹시 헤어지지 않는다면 결혼도 할 수 있지, 라고만 생각했던 어린 나이를 지나고 나니 많은 것이 보인다. 나의 자매들, 친구들, 지인들의 평균 결혼생활은 15년 정도 된다. 그러다 보니 옆에서 직접 보게 되는 상황들도 있고, 속상하다면서 하는 얘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TV 일일 드라마의 막장 스토리가 단지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며느리를 내 아들과 똑같은 인격으로 대하지 않는 시댁 사람들을 보면, 그럴 거면 죽을 때까지 아들 끼고 살지 왜 결혼하게 내버려 두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화가 날 때가 많다. 신수지의 <며느라기>를 보면서도 한숨만 푹푹 나왔다. 며느라기. '시댁 식구에게 예쁨 받고 칭찬받고 싶은 시기'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실제 그런 단어가 있고 정의가 있는 건지, 이 웹툰에서 만든 신조어인지는 모르겠다. 어디서 만들어진 말인지 중요하지는 않다. 그 시기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공감이 먼저 다가오니 '며느라기'라는 단어가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큰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을 보니 다들 그런 시기를 겪었다는 것만 알겠더라.

 

주인공 민사린은 동갑내기 무구영과 결혼했다. 이 사람과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했겠지. 사랑하는 남편과 같이 눈 뜨는 아침이 행복이라고 여겼다. 동시에 아내이자 며느리가 된 그녀가 해야 할 역할도 같이 추가된 거다. 잘하고 싶었다.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무리하게 잘하려 애쓴다. 시간이 안 되는데도 회사 일에 지장을 주면서 시댁 일을 챙기고, 시어머니의 첫 생일 아침상을 차려주겠다고 전날부터 시댁으로 향한다. 시누이는 미리 전화해서 자기 엄마가 좋아하는 미역국 스타일도 말해주고 말이다. 어쨌든, 시작은 잘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고 싶기는 하다.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 서로 잘하고 싶은 마음 모르지 않는다. 문제는 그 '잘하고 싶은' 마음이 쌍방인가 아닌가 하는 거다.

 

미묘하게 던지는 말에 담긴 감정들이 가슴에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까? 웃긴 건 시어머니도 시누이도 며느리였다는 거다. 웹툰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감춰진 상황이 드러나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에게 공감과 동지애를 느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잘되지 않았다. 아직은 며느리인 사린에게만 감정 이입이 되는가 보다. 한편으로는 같은 여자인 입장에서,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모습까지 보니까, 이건 '며느라기'의 시기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서 여자가 겪는 문제까지 아우르는 것 같다. 명절 끝에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의 아내를 배려하지 않고, '간단하게 집에서 밥을 먹자'는 시아버지의 말을 보면 한마디 하고 싶다. 그 '간단한 밥상'을 당신이 한번 차려보고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이 책 읽다가 TV 파일럿 프로그램인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를 같이 보게 되었는데, 하아, 한숨과 답답함이 밀려와서 죽을 뻔했다. 일인다역을 하는 며느리에게 왜 빨리 식당으로 출근하지 않으냐며 전화로 닦달하는 시어머니, 아이가 방바닥에 엎지른 것을 보면서도 느긋하게 다가오는 남편, 결혼 후 처음 시댁 방문에 안절부절못하는 며느리, 그런 아내를 방치(?)하고 거실에서 시댁 어른들과 다과 하며 앉아있는 남편, 명절에 만삭의 몸으로 혼자 아이를 데리고 시댁을 향하는 며느리, 마치 며느리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용량의 명절 음식 준비물을 내놓는 시어머니, 주방에서 두 여자가 열심히 차례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도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시는 시아버지, 명절 전날부터 몰려오는 시댁 식구들, 차례 지내고도 바로 친정에 가지 못하는 며느리, 며느리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데 굳이 손주 아이큐 운운하며 자연분만을 언급하는 시아버지... 말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눈물과 어이없음으로 공감하면서도 보던 이 프로그램에서 그나마 건진 건, 남자 MC의 한마디였다. 평소에는 그 안에 섞여 있느라 몰랐는데, 명절의 모습을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보고 있으니까 안 보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정말 미묘하다. 말 한마디가 건네져 오는데 그 미묘함 때문에 감정이 상한다. 이제 한 가족이 되었다고, 며느리도 자식이라고 쉽게 말하기도 하면서 하는 말이나 행동은 아들과 다르게 대한다. 분명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바뀌지 않은 것들이 아프게 한다. 남자와 여자, 시댁과 친정,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을 구분해서 편 가르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가족이라고 하면서 가족이 되지 못하는 사람, 자기가 편하다고 아내도 편할 거로 생각하는 착각, 내 아들 좋아하는 것을 차려놓고 며느리도 좋아할 거라고 단정하는 일... 웹툰 <며느라기>에서 나오는 사린의 동서가 차라리 현명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싫고 좋고 분명히 표현하는 일이 자기 안위를 위해서 필요하다. 정이 없다고, 냉정하다고, 며느리인데 왜 안 하느냐고 욕먹기도 하겠지만, '걔는 원래 그래' 하는 인식이 장착되니 더는 그 며느리에게 뭔가 요구하거나 희생하는 일을 강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린의 동서 같은 며느리가 되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며느라기>나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를 보면 공통으로 드는 생각이 있다. 바로 남편의 역할. 시댁과 아내의 중간에서 남편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바로 보인다. 내 아내가 시댁에서 어떻게 지낼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남편에게는 '자기 집'이었겠지만, 아내에게는 쉽게 다리도 뻗을 수 없는 '아직은 남의 집'일 거라는 것을. 악의가 없다고 하지만 시댁 사람들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하는 집안 일들에 여성들은 힘들어한다는 것을. '간단하게 먹자'는 상차림의 준비는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나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계속 생각한다. 어른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어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거슬리면 그만하시라는 말도 한다. 그래서 저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느낌의 상황들을 가만히 참고 지켜보기만 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아마 가만히 있지는 못할 것 같다. 요즘 많이 하는 연습이 거절하는 거니까. 싫으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싫다고 말하지 못해서 끙끙 가슴앓이하면서 위경련을 앓는 것보다 한번 싫다고 말하고 상대에게 나쁜 사람 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내가 누군가와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과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나는 '며느라기'의 시기를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선에서, 새로운 가족과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만 내 손을 내밀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에는 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그 거리를 너무 가까이 만들려고 노력하다가 부작용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그 거리를 너무 멀리하려고 해도 서운해지는 일이 생기겠지만...) 사린이, 대한민국의 며느리가 시댁 식구들에게 예쁨 받으려고 칭찬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능한 정도만 하면 된다. 때로는 싫다고 말하는 게, 솔직한 거절이, 서로가 잘 지낼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 웹툰이 계속 연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른 남편들, 남자들이 같이 봐주었으면 더 좋겠다. 내 아내가, 내 어머니가 어떤 일상과 시댁이라는 관계 속에서 있는지 보면서 이해와 공감의 시선을 보내주기를. 일방적으로 여자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결정으로 만난 인연들이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한 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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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지음 / 귤프레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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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의 평균 결혼생활이 15년 이상이다 보니, 아직 미혼이면서도 200% 공감되는 책이다. 마치 내가 사린이 된 것만 같았다. 며느리라면 누구나 겪는다는 그 ‘며느라기‘라는 시기를 나는 겪지 않기 위해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은 책이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다가 먼저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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