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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어서 무뎌지기 쉬웠다. 불편한 마음을 느끼면서도 안으로 숨기고 아닌 척 표정 관리를 했다. 상대에게 다가올 언짢은 말을 듣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해질 것 같아서였다. 내가 느끼는 불합리한 대우를 나 스스로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해야만 편해진다고 생각했다. 그 편해지는 주체가 누구인지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아닌 상대가 편해지는 일이었겠지?
너무 익숙하게 보아왔던 장면들이 ‘별일’이 되어버린 건 왜일까. 저자는 전작 『82년생 김지영』의 의미를 이어가기라도 하듯이 이 ‘별일’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자 애쓰는 듯 보였다. 아니, 저자는 굳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자연스레 전작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나 역시도 저자의 전작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받아들이기로 하곤 했던 김지영 씨 인생의 모든 순간이 우리의 이야기였기에 잊을 수 없다.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KTX 해고 여승무원 이야기인 「다시 빛날 우리」는 지금도 뉴스에서 보는 장면들이 소설에 녹아 있다. 그녀들이 외치는 현재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부정부패로 저지른 일 때문에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오랜 시간 외치던 목소리들은 법원의 로비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들의 목소리는 힘을 낼 수 있을까? 다양한 이름의 그녀들이 부딪히고 겪은 별일들은 다양하지 않았다.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여러 개의 강이 모여서 바다로 연결되는 어떤 지점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저자가 불러낸 이름들은 각자가 좁은 강줄기였다. 그 강줄기들이 모여 바다를 이루는 길목에서 들려온 목소리다.
소진 씨는 직장 내 성희롱을 고발했다.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올바르게 처리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되돌아온 건 그녀를 향한 수많은 화살이었다. 정신적 스트레스로 위장병과 탈모를 얻은 그녀는 거기서 멈춰야만 하는 걸까? 학교 급식 조리사의 단체 파업 때문에 오늘도 엄마의 도시락을 들고 등교하는 수빈은 엄마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아이들 급식을 볼모로 잡고 파업을 한다고 서운한 눈빛을 보낼까? 아니면 엄마가 되찾으려고 하는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응원할까? 국회 청소노동자 진순 씨는 열심히 일했다. 비정규직, 하청 같은 수식어가 그녀의 노동을 더 힘들게 했지만 주어진 업무를 충실히 해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업무를 더는 열심히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돌아가야 할 노동의 대가는 어이없는 수준이었다. 같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힘을 냈다. 직장으로의 출근길이 행복이었으면 싶었다. 매우 어려운 싸움을 하면서 얻어낸 결과로 그녀는 더 열심히 일하고 싶은 노동자가 되었다. 국회에 직접 고용된 청소노동자. 더 열심히 일하고 싶게 만드는 근무 환경이 일의 능률을 높여준다는 걸 증명하는 사례다.
다양한 나이대 여성의 목소리가 담긴 이 소설이 결코 소설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걸 안다. 사회 초년생으로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달리기와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얼마나 어렵고 불편한 시간을 만드는지, 가사와 노동의 영역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잃어가는 중년 여성의 고충 같은, 오늘 대한민국에 사는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눈물만 흘리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싸우기만 하자니 통하는 말이 없고, 두 손을 내려놓고 있자니 해결될 게 하나도 없는 상황. 답답하고 힘들지만 계속 나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에, 그대로 꿋꿋하게 묵묵히 걸어가야만 하는 그녀들의 일상이, 인생이 말을 하는 거다. 우리 여기 이렇게 있다, 더 나아가지 않고서는 현실의 불합리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으니, 인간다운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이 목소리는 힘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그녀들의 많은 이야기가 각자의 색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이혼일기」와 「결혼일기」, 「엄마일기」는 한 가정의 세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정 안에서 각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시선을 볼 수 있다. 동시에 같은 어려움을 가진 여성의 마음을 엿볼 수도 있었다. 큰딸의 이혼과 작은딸의 결혼이 동시에 이뤄진다. 언니의 이혼으로 여동생은 결혼에 관해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아직 겪지 못한 일들에 언니의 이혼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곧 언니와 동생은 공감의 시간을 가질 거로 생각한다. 두 딸의 이혼과 결혼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심란하지만, 큰딸의 이혼을 반대하기는 싫다. 당신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혼이란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편은 큰딸의 이혼이 곧 가정으로 돌아가기 위한 발악쯤으로 여기는 것 같은데, 여자의 이혼이 주홍 글씨로 여기던 시대는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이혼이 주홍 글씨가 될 이유는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다)
"언니, 나 프러포즈 받았어. 오월에는 상견례를 하려고 해."
"아, 그래? 잘 됐네."
그리고 잠시 침묵.
"언니, 나 결혼 할까 말까? 결혼이라는 거 어떤 거야? 할 만한 거야? 언니가 하지 말라면 그냥 여기서 멈출게. 이유 같은 거 묻지 않을게."
결혼이라는 게 어떤 걸까. 나는 남편과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려보았다. 의외로 여러 장면들이 기억났다. 오랜 상의 끝에 선택한 식탁 위 액자, 같은 영화를 보고 나누었던 너무 다른 의견들, 밤 산책 중 사먹은 삼각김밥과 컵라면, 내 승진 축하파티…… 나는 동생에게 결혼하라고 말했다.
"결혼해. 좋은 일이 더 많아. 그런데 결혼해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가 되려고 하지 말고 너로 살아."
그게 쉽지 않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대로 나는 내 이혼을 진행했고 동생은 결혼을 준비했고 나와 동생의 일 모두 잘 마무리됐다. 이게 엔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다. (90페이지, 이혼일기)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당신이 윤 서방한테 전화 넣어봐."
"내가? 내가 왜?"
"잘 달래서 데려가라고 해야지."
"쟤들이 어린애들이야? 왜 우리가 끼어들어?"
"그래서 이혼하게 둘 거야?"
"이혼하라고 안 하지. 근데 절대 이혼만은 안 된다고도 안할 거야. 우리 정은이 똑똑하고 정확한 애야. 알아서 잘 판단하고 선택하고 잘 살 거야."
남편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어쩌자고 딸들을 다 저렇게 키워놨어? 여자애들이 좀 숙이고 들어가는 법이 없어. 다들 나 잘났다고 저러고 있으니. 당신은 정은이 걱정되지도 않아? 여자 혼자 사는 게 어떤 건지 당신이 알기나 해?" (187페이지, 엄마일기)
이혼하는 큰딸, 결혼하는 작은딸, 그런 두 딸을 바라보는 엄마. 세 사람의 마음을 듣는 동안, 여자라는 존재가 다양한 자리를 갖고 있구나 싶었다. 거기에 사회에서 또 차지하는 역할들까지. 그렇게 많은 위치에서 존재하는 대상인데, 왜 적정 대우를 받지 못하고,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살아가야만 했나... 아프고 아픈 이야기들이다.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에 익숙하고 당연시하게 되는 습관까지 붙었는지도 모른다.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인 건 맞다. 하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건 틀리다. 이 소설은 그렇게 일어나는 ‘별일’이 익숙해지지 않을 시간을 꿈꾸게 하는 이야기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넘기고 나니, 가만히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저자가 이 기록을 남겨야만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이유가 저절로 알게 될 수밖에 없다. 특별히 별일도 아니라고 말문을 여는 그녀들에게는,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때로는 투쟁이 되는 일들이었던 거다. 르포 기사로 연재되어 다시 소설로 태어난 이 이야기들이 내는 목소리는 부조리의 폭로이면서, 힘든 싸움에서 다른 방법이 없기에 계속할 수밖에 없는 그녀들의 투쟁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들의 용기에,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연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독자로 그녀들의 싸움에 동참하는 나의 힘도 보태고 싶다.
그녀들의 짧은 이야기들은 절대 가볍지 않다. 오히려 묵직한 무게감을 느낀다. 결혼과 이혼, 오랜 고심 끝에 선택한 비혼, 억울하게 당한 해고, 버스 기사를 하면서 추행에 대처하는 방법을 습득한 여성 버스 기사, 아내에서 엄마로 손주를 돌보는 외할머니로 이어지는 여성의 삶이 육아 문제를 인식하게 하고, 국정농단 폭로의 문을 연 여학생들의 시위가 어떤 세상을 만들었는지... ‘책임지는 어른이 되기 위해 기록해낸 결과물’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 인생의 품위를 만드는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온몸으로 묻고 답하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끝은 없다. 이야기는 다시 시작될 것이고, 계속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