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들이 식사할 시간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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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상력이라니. 강지영이라는 작가가 원래 이런 글을 썼나? 모르겠다. 다른 작품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는 않았으니, 이 작품으로 작가 강지영을 처음 만났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아홉 편의 단편이 담긴 이 소설집의 첫 단편을 만난 순간부터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의 소설이 작가 강지영의 색깔인 것만 같다. 강렬하면서도 공포였고, 이런 공포를 아무렇지도 않게 서술되는 장면들 속의 사람들이 저절로 그려진다. 마치 오랫동안 그런 일상을 영위한 사람들의 익숙함. 천연덕스럽게 공포를 소화하는 듯한...

 

어머니의 죽음으로 알게 된, 기억에서 희미해진 과거의 사건이 벌이 되어 돌아온 표제작 「개들이 식사할 시간」은 한편의 짧은 미스터리였다. 개에게 물린 ‘나’는 움직이지 못한 상태에서 개 주인의 말을 듣는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놀라웠고, ‘나’가 잊었던 시간을 불러온다. 그래, 그때 그랬었지. 하지만 그때 일어난 일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동안 잊었던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이 소설집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표제작과 다 비슷하다. 「눈물」이나 「스틸레토」처럼 판타지 같이 흐르기도 하다가, 「있던 자리」처럼 답답한 현실에 울부짖다가...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인간이 저지르고 있으니, 어디 다른 세상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디에 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비밀스러운 일들에 누군가의 욕심은 하늘을 뚫고, 그런 욕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균열을 만들기도 한다. 각 단편의 이야기는 주인공들이 가진 참혹한 현실이 결말로 드러난다. 하아, 이런 삶에서 무엇을 찾아 살아가고 있었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그런 비밀을 간직한 채로 살아가는 그들의 의지가 놀랍기도 하면서...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고통을 즐기거나 끝장을 낸다. 「사향나무 로맨스」의 노파에게 젊은 청년들이 옆에 있으려고 하는 이유가 아이러니했는데, 노파의 몸이 점점 나무가 되어 가는데도 사라지지 않은 사향나무 향기는 그녀만이 가질 수 매력을 선사한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놓아버려야 할 순간일지도 모를 때, 오히려 비밀은 향기는 낸다.

 

각 단편 모두 그들이 품은 비밀을 말하지만, 그 비밀은 의외의 결말로 독자를 충격에 빠뜨린다. 가장 충격적이고 아팠던 결말은 「눈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3개였던 소녀가 있다. 소녀의 이마에 자리한 작은 눈 하나에서, 눈물이 흐를 때마다 특이한 보석이 떨어진다. 한 방울, 두 방울. 소녀의 눈물을 쥐어짜면서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 부를 축적한다. 소녀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으면서 소녀의 눈에서 나오는 보석의 이익금을 분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소녀에게 눈물을 얻어내려고 감금하고 폭행한다. 소녀가 한번 눈물을 흘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부자가 된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소녀의 이야기를 들은 기자가 소녀를 탈출시키고, 소녀는 기자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자가 마치 소녀를 구해준 은인 같았는데...

 

「눈물」의 소녀가 말을 안 하고 있다고 해서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이 단편에서 보여준 결말은 그 누구의 침묵도 침묵이 아니었다는 거다. 기자와 함께 떠난 소녀가 새로 만난 세상에 적응하는 분투기가 이어지지 않을까 싶었던 나의 예상은 한참을 빗나갔다. 소녀는 누구도 느끼지 못했던 자기의 고통을 끝내는 방식을 스스로 결정한다. 비정한 세계를 직접 단죄했다.

 

인간은 착한가? 아니면, 인간은 악한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인간은 착하지만은 않다. 우리가 속한 현실이 인간을 악하게 만들기도 하겠지만, 그 현실 탓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인간이 내재한 욕망과 이기심에 그 악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다. 때로는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에 내몰리는 인생들이 있고, 저지른 죄를 잊고 살다가 복수를 당하기도 하는, 남의 고통에 빌붙어 먹고 사는 인간들도, 다 우리 사는 세상에 존재한다. 그들만의 비밀,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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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겔만 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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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요양소에서 지내느니 감옥이 낫겠어!

정말?

 

‘폐쇄되고 자유가 없는, 당당하게 내 돈 내고 들어간 게 아니라 벌을 받으려고 들어간 곳이 절대 요양소보다 좋을 리가 없어!’라는 생각에, 이 할머니의 엉뚱한 모험에 기대가 없었다. 무료하고 심심해서 재밌는 건수가 생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벌인 소란 정도로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읽을수록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무엇을 확인하게 된 잔인함 같은, 지금 내가 노인을 대하는 시선이 변해야 함을, 누구도 아닌 내 부모와 내가 겪고 있는 일이라는 게 쉽게 잊히지 않는다.

 

복지가 좋다는 스웨덴의 한 노인 요양소에서 다섯 명의 70대 노인이 사라진다. 편한 곳에서 요양하고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다면 틀렸다. 노인들은 규정과 규칙에 억눌린 생활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강제로 취침하고, 식사도 부실한 게 실상이다. 외출이나 산책이 자유롭지 못했고 쉽지 않았다. 요양소에서 내킬 때만 허락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잠잘 곳이 있고, 부족해도 때가 되면 식사가 나오고, 휴게실에서 장기라도 둘 수 있는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게 어디냐 싶었는데...

 

산다는 건 그게 전부가 아니잖아. 잘 알면서도 살면서 겪는 고민과 생각의 중심은 늘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어서... 막상 이 노인들의 삶을 경험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생각해보니 한 번도 그 마음을 듣고 싶어 한 적이 없다. 당장 내 문제가 아니어서 절실하게 보이지 않았다. 국가에서 노인들을 위해 여러모로 시행하는 정책이 많은데, 개인도 노인(부모)을 위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많은데 뭐가 부족하다고 그런 건가 싶었다. 내가 내는 세금과 돈으로 그 모든 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뭘 더 어쩌란 말이냐고 투정 어린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한 권의 소설을 읽고,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나를 대입해보니, 그 생각이 바뀌더라. 내가 들어가서 살아야 할 곳이 요양소라고 하더라도, 그게 가장 최상의 선택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의 생활이 이 정도라면 나는 싫을 것 같다. 노인들이 무모해 보이는 범죄를 저지르며 굳이 감옥에 가고 싶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민망해졌다. 물론, 아직 감옥 생활의 실체를 몰라서 막연한 기대로 감옥행을 원했던 거지만, 오죽했으면 요양소보다 감옥이 좋을 거라 여겼을까.

 

낙엽 지는 황혼기를 맞아 인생을 조금 즐겨 보고 싶은 노인들이 강도가 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그 사회는 분명 뭔가 잘못된 사회임에 틀림없다 (208~209페이지)

 

범죄영화와 탐정소설을 읽으며 범행을 준비하고, 무조건 훔치겠다는 것보다 잠깐 유괴하는 거라 여기며 되돌려줄 방안까지 생각하는 그 열정이 놀랍다. 실패해도 괜찮다. 이들의 목적은 범행의 성공이 아니라 범행을 들키고 감옥에 가는 거였으니까. 순박한 마음으로 시도한 절도가 어리바리해 보일 때마다, 내가 가서 머리 맞대고 같이 고민하고 싶었다. 어차피 잡혀가는 게 목적이라지만 그래도 범죄를 저지르고자 했다면 성공하는 게 더 그럴싸해 보이지 않을까? 멋지게 성공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그 당당함이 이 노인들에게 더 재밌는 외출로 남아야 하는 거니까.

 

소박한(?) 바람으로 시도한 노인들의 범죄 행각에 시종일관 웃음과 눈물이 따라온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끼어들 때마다 이들의 범행은 점점 산으로 간다. 그런데도 이상하지. 여기저기 샛길로 빠지는 듯한 계획이 잠깐 한눈을 팔기도 하면서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하늘도 이 노인들을 돕고 싶었나 보다. 메르타 할머니의 다양하고 치밀한 계획이 튀어나오고, 천재 할아버지의 손놀림이 기지를 발휘하고, 갈퀴 할아버지의 연기가 빛을 내고, 스티나 할머니의 제안이 먹혀들고, 안나그레타 할머니의 통장 잔액이 힘을 낼 때마다, 이들의 범행을 응원하는 나를 봤다. 처음, 노인들이 요양소를 나가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이유를 찾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노인이라는 나이를 잊고 원하는 삶을 누려보기를 말이다.

 

내가 생각했던 노인의 삶이나, 보호자나 방문객으로 드나들었던 노인 요양소의 모습을 다시 보게 하는 이야기다. 상황에 따라 나이 든 사람들을 돌봐줄 곳이 필요하고, 지금도 많은 시설이 있지만, 그런 곳이 가져야 할 자세에 경고한다.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전부가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보낼 공간이 우선이라는 것. 그걸 이루기 위해 어떤 변화와 시도가 필요한지 고민을 남긴다.

 

말을 마친 페테르손은 잠시 먼 산을 보며 노인네들 생각을 하다가 늙는다는 것이 저런 것인가 싶어 우울하기만 했다. 늙으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자신에게도 그때가 올 텐데, 그때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192페이지)

 

자주 잊고 살아서 그런 걸까. 나도 늙어가고 있는데, 육체가 늙어 거동이 쉽지 않은 순간이 올 텐데, 아직은 아니라는 이유로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다. 아픈 엄마를 모시고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고, 아버지의 병원 생활 몇 년을 옆에서 함께했는데도, 병원에 있는 그 대상이 내가 될 거란 생각이 잘 안 드는 거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노인들이 보내는 그 노후의 모습이, 평소 익숙하게 보는 이 동네 노인들로 보였다. 요양소에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잘 지낼 수 있게 보호한다고 여겼기에, 막상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진심은 들어볼 생각조차 안 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냐?’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빠진 게 있었다. 그 ‘좋은’ 것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 이 노인들의 행보에서 내가 찾게 되었던 게 그 진실을 아는 거였다. 내 눈에 가려졌던 게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을 인지한 순간, 바로 옆에서 밥맛이 없다면서 억지로 저녁을 먹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아침저녁으로 한 움큼의 약을 먹어야 하는 일상이 지겹다고 하면서도, 약을 먹어야 하니 식사도 챙겨야 한다고, 귀찮은 일이지만 이렇게 늙어가는 게 자기 일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까. 그런데도 참 오랫동안 눈과 귀를 닫고 살아온 듯하다. 미안하게시리.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도 있었지만, 이 노인들이 보내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해지곤 했다. 그저 나이라는 숫자가 늘고 오래 사용한 육체가 늙었다는 것 말고, 이분들이 나와 우리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나와 같은 사람, 몇 년 후 만날 내 모습이라는 걸 이 노인들의 자신만만한 시도와 모험에 자꾸 상기하게 된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삶에서 이들에게 제외된 많은 부분을 적나라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읽는 동안의 재미보다 여운이 더 크게 남는다.

 

매번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때마다 그들은 더 젊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극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전만큼 도움이 되는 것이 따로 없는 것이다. 조만간 노인 강도단, 아니 <힘을 얻은 노인들>이라는 예술가 단체가 크게 한탕을 할 것이다. (49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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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롭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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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기분. 이 소설을 어느 정도 읽고 나서 내가 느낀 분위기는 나른하고 무료한 거였다. 삐뚜름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귀찮은 일이 생기면 '그래, 그냥 한 방 쏘고 탈탈 털어버릴까?' 하는 무신경한 시선 같은. 물론 이 소설은 무료하고 나른한,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르면서 감각이 없는 느낌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냥 내가 어느 페이지를 넘기며 순간적으로 느꼈던 기분을 말하는 거다. 데니스 루헤인의 초기 작품(우리나라 출간 기준)을 몇 편 읽었다. 상당히 몰입이 잘되고,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어떤 시선 하나만을 담을 수도 없게 진지하고 묵직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오랜만에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을 읽으려다 보니, 그동안의 작품과 사뭇 다른 느낌을 나는 '나른한 시선을 던지는 어떤 남자'를 계속 머릿속에 그리게 된 듯하다. 나른한 시선을 던지는 그 남자는 물론, 주인공 밥이다.

 

상당한 거구에 타인과의 소통이 어려워 보이는 남자, 밥. 사촌 마브와 함께 드롭 바를 운영하지만 그 화려했던 명성도 다 옛말이다. 지금은 그저 파견 나온 직원처럼 바의 일꾼일 뿐이다. 뭔가 감추는 듯한 분위기의 마브와 밥의 과거와 전적들. 새벽 두 시마다 수금하러 들르는 갱단의 무리. 외상값을 갚지도 않으면서 밤늦도록 바를 지키는 노파가 드롭 바의 일상이다. 어느 날 우연히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개 한 마리를 발견한 밥은 자신이 데려와 돌보기 시작한다. 그 우연 같은 사건으로 뭔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별것 아닐 것 같은, 하지만 뭔가 거대하게 밥의 인생을 쥐고 흔드는 회오리 같은 어떤 것. 사회의 부조리, 돈과 권력이 목숨을 쥐고 흔드는 세상, 자신도 믿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병, 그래서 더욱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야만은 인간이 만난 첫 여름부터 힘을 과시하고 그 이후로도 쉬는 날이 없었단다. 최악의 인간은 일상적이나 지고의 선인은 귀하고도 귀하지. (85페이지)

 

그 모든 이야기가 밥을 중심으로 뿌연 안개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이런 건가?' 싶으면 다시 저런 모습으로 이야기를 틀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밥의 말, 행동, 시선에 주목하게 된다. 뭔가가 있을 것만 같은, 결국 안개 속에서 길을 열어주는 것은 밥일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이야기를 기대하며 읽게 된다. 등장인물들의 과거, 혹은 비밀이 하나씩 펼쳐지면서 마지막에 다다르면 결국 우리가 봐야 할 진짜 모습이 나타난다. 보통, 사람을 보면 좋은 놈 나쁜 놈 가리게 되기 마련인데, 밥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도 그가 좋다, 정의롭다, 나쁘다, 하는 어떤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그건 아마도 이 소설의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괜히 아닌 것도 맞는 것처럼,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지나가게 하는 의연함을 담고 있어서일지도. 스릴러 소설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뒷골목 범죄 세상의 현실이 담담하게 들려오는 의아함이 더 컸다. 범죄소설이 잔인함보다 마음속 서늘함을 더 크게 남겨준 느낌이다.

 

기존에 전자책으로 출간된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Animal Rescue)」를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단편으로 먼저 만나지 못했기에 어떤 비교의 맛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밥의 매력과 드롭 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뒷골목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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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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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은 안 태우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 탓에 어지러웠다. 엄마네 집도 서울도 아닌 낯선 도시에서 혼자 1박을 하는 기분이 이상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하루 같았다. 홀가분해야 하는데 되레 너무도 많은 것들이 출렁이고 있었다. 비로소 한국에서의 첫날을 맞이하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219페이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반소매를 입고 1시간 정도 등산을 했다.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한낮의 등산은 역시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실컷 땀을 흘리고 나니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시리더라. 점점 해는 기울고 캄캄해지기 시작하니 그 시림은 체온으로만이 아니라 온몸에 느껴졌다. 이럴 때를 잘 견뎌야 한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더 크고 서럽게 다가오기 쉬울 때니까. 돌아갈 곳이 있다던가, 돌아가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그 추위를 덜 느낄지도 모르지만, 이도 저도 아닌 부유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온몸으로 맞이하는 시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 건지 한국인만의 정서인 건지 모르겠지만, 유독 그 소속감의 무게를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어디에 속해야만 안심이 되는, 그 소속이 없으면 버려진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특히 누구의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아닌 경우 어디에 소속되지 못하는, 어쩌면 상실감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를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뭔가, 아주 큰 뭔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기분.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살아갈 수 있다. 반드시 어디에 속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속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야 할 때 느끼는 감정도 안고 가야 한다. 임재희의 소설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는 그렇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경계인이자 주변인으로 느끼는 고독을 그렸다. 어떤 분명한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감정이었다. 법이 규정한 범위 안에서 그 신분을 드러내야 할 때 종종 찾아오는 느낌들. 어디의 누구입니다, 라고 말하지 못할 때 당황하기도 하는. 단편들 속의 주인공들 모두가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는 감정처럼 들렸다.

 

엄마를 만나러 한국에 온 폴은 정해진 일정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려고 하지만, 스탠바이 티켓으로 공항 근처에 머문다. 자기를 호텔에 내려준 택시 기사, 호텔에서 만난 다른 손님과의 대화로 자신과 그들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또 완전히 비슷하지도 않다는 걸 느낀다. 같은 것을 느낄 때는 안심을 했다가도, 다른 것을 느낄 때면 따라오는 이질감. 잠깐 다니러 온 그의 이런 느낌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곳을 떠나와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이나, 이곳을 떠나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의 크기는 또 다르다. 「히어 앤 데어」의 동희는 미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국적 재취득의 선택을 해야 한다. 동희는 왜 돌아왔을까. 동희가 한국을 떠날 때도 다시 돌아왔을 때도 분명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때마다 이유는 있었을 테지만,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없는 분명함은 없었던 거다. 동희가 만난 어떤 여자의 말처럼, 어디에 사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 죽느냐의 문제가 더 큰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문제를 내세우기에 앞서 여전히 어느 선에서 서성이는 삶을 이어가는 게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한다. 이민자든 아니든, 여기에 살았든 아니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민자의 삶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여자의 말이 맞았다. 동희는 미국에 살아도 한국에 나와 있는 지금도, 뭐가 하나는 쑥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뭘까. 그 커다란 빈 구멍은. 한국 국적을 재취득하면 좀 나아지려나. 동희는 자신도 모르게 상념에 빠져들었다. (30페이지, 「히어 앤 데어」)

 

「라스트 북스토어」의 ‘나’는 미국에 간다. 엄마를 모시고 동생 부부를 만나러 간 거다. 남동생과 올케의 미국 생활이 안정적이지 못하다.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하루하루가 안쓰럽지만, 그곳을 쉽게 떠나지도 못할 것이다. 이국에서 보내는 며칠 동안 ‘나’가 느끼는 불안감은 의외의 곳에서 해소된다. 헌책방에서 만난 한국어를 쓰는 여자. 그녀의 몇 마디에 다가온 위로는 무엇이었을까. 그곳이 한국이 아니어서 그 몇 마디가 위로의 모습을 하고 다가온 건 아닐까? 「천천히 초록」의 ‘나’도 혼란스럽다. 미국에서 살았던 시간도 한국에 다시 돌아온 계기도 어정쩡하다. 다시 돌아온 이민자에게 한국에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묻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았다.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 단편의 ‘나’를 통해 헤아리게 됐다. 무엇을 위해 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온다는 게 실패의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들에게 떠남과 돌아옴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그게 실패의 원인일지라도 말이다.

 

결국 누군가가 선택하는 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떠나거나 돌아와야만 하는 상황을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 안의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건너다니는 사람인 경우 계속 떠도는 느낌이 아닐까? 실제로도 그런 삶일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언제나 크고 작게 떠도는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생 한곳에 정착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멀게 든 가깝게 든 옮겨 다닌다. 그 대상이 물리적인 지역이든 사람과의 관계이든. 소설 속 주인공들이 주변인이든 경계인이든, 이민자이든 아니든, 자기 삶을 이어간다는 건 똑같다. 누구나 겪는 상실에 우리는 서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다. 그저, 언제나, 자신의 근원을 찾으려고 애쓰며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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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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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랑은 완전했던가? 아니.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세상 그 어떤 사랑도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세상 그 모든 사랑이 완전했다면, 우리는 평생 한 번의 사랑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완전한 그 사랑 하나만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 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 (13페이지)

 

누군가의 사랑을,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듣게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노 작가가 기억을 소환해 써 내려간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인생의 회한이 차지하는 게 많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의 이야기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때쯤 되면 그때의 사랑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쌓인 그의 인생도 같이 들려올 것이다. 그의 평생을 통틀어 그때의 사랑이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테지만, 처음 사랑을 겪었던 그 순간만큼의 크기나 무게는 아니리라. 18세의 소년이 이제는 죽음과 가까워진 나이가 되었을 텐데, 몇십 년 전에 겪은 사랑을 온전하게 기억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우리는 기억이란 것이 때로 희미해지고, 항상 온전하게 불려오지 않는다. 삭제되고 첨가되어 새로운 기억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기억을 불러오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가 변형되었다고 해도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당사자 양쪽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확인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폴은 부모님의 권유로 테니스클럽에 참가한다. 혼합 복식의 상대로 수전을 만난다. 18세의 폴과 48세의 수전은 그렇게 테니스 파트너가 되고, 운동 이상의 감정을 나누는 상대가 된다.

 

생각해보자, 서른 살의 나이 차이 커플의 모습을. 어머니라고 불려도 좋을 여자와 누가 봐도 아들이라고 생각할 관계의 연인이 상상되는가? 아니다. 내가 너무 과한 참견을 하는 것 같다. 누구나의 사랑은 지극히 사적이고 그들만이 아는 감정을 나누는 것일 텐데, 겉으로 보이는 연인이란 관계는 다 비슷비슷할지 모르지만, 개개인의 사랑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의 모습을 다시 보며 읽게 된다. 폴과 수전이 어떻게 사랑을 해나가는지 지켜보고 싶어진다. 누가 봐도 위태로워 보이는, 도덕적으로 고운 시선을 보낼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을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그 어떤 비난도 할 수 없다.

 

사랑에 빠진 이들의 모습 대부분과 비슷했다. 폴은 수전을 만나고 속절없이 빠져든다. 그가 하는 처음 사랑의 모든 것을 수전과 함께한다. 이제 좀 세상을 알아도 좋을 나이의 순수한 폴, 스스로 닳아버린 세대에 속한다고 믿는 수전.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부터 불안해 보였다. 이 사랑이 정말 사랑일까? 사랑이라면 이 사랑은 얼마나 지속할까? 생각해보면 나는 이 모든 상황에 불안과 의심부터 생겼다. 어쩌면 나는 폴이 아니라 지금 수전의 세상과 같은 느낌으로 사랑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내가 마흔여덟에 열여덟의 남자를 만날까?’라는 가정을 해보고, 혹여 만나더라도 ‘이 사랑에 모든 것을 걸을 수 있을까?’라는 의심을 할 테지. 결국, 나는 이 상황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 이건 사랑이 아니며, 사랑으로 보일지 모를 이 선택을 나는 하지 않을 것이며, 타인이 이 사랑을 선택한다고 해도 모른 척하며 한 발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한 마디로, 나는 이 사랑의 주체도 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타인이 하는 이 사랑을 사랑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니 아닌 척하려고 해도 잘 안 된다. 이들의 사랑을 처음부터 불안하게 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디를 봐도, 이들의 사랑은 세상의 눈으로 보는 ‘보편적인’ ‘평범한’ 사랑으로 보이지 않으니까. 그 보편적이고 평범한 사랑의 기준을 누가 어떻게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과 세상은 그런 시선을 고정해버렸으니까.

 

삶의 슬픔. 그것은 그가 가끔 생각에 잠기게 되는 또 다른 난제였다. 어느 것이 올바른-또는 더 올바른-공식이었을까. ‘인생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아니면 ‘인생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둘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진실이지만, 어느 것이라고는 결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368페이지)

 

하나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나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감정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닿으면 폴이 이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나오는데, 그 부분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쓰라렸다. 그건, 비단 폴만의 경험이, 폴의 나이에 사랑해서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하는 사랑의 과정이 그대로 닮은 채로 서술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수전과 멀리 떠날 정도로 폴의 사랑은 열정적이었지만, 현실이 주는 불안과 결핍은 두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할 것이고,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감정이 결국은 우리의 온몸을 갉아먹을 것이다. 술을 싫어하는 수전이 술에 위로받으려고 했던 게, 수전의 머릿속에 잠식한 몹쓸 것들이, 결국은 수전에게 소홀한 일상을 보내는 폴을 나무랄 수 없는 이해를 품는 내가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저 그렇게,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어떤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판단해야 할 것 같다. 상대의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게 이 사랑의 이해를 방해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폴의 입장에서 듣는 그의 사랑은 특별했던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일흔 즈음의 그가 굳이 기억해내고 싶은 느낌을 알 것도 같다. ‘그때, 나는 이런 사랑을 했었지.’ 수전 이후로 그가 다른 사랑을 안 한 건 아닐 것이다. 때로는 현실에 맞는 사랑을, 어쩌면 수전과 같은 상대로 미친듯한 사랑을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처음 수전과 나누었던 사랑만큼 특별한 것은 없다고 믿어오지 않았을까? 느지막한 나이까지 그가 혼자인 삶을 이어온 것을 보면, 굳이 다른 사랑을 결혼으로까지 만들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다. 뭐,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지만 그가 기억하는 수전과의 사랑만으로도 그는 평생 담아두며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추억을 충분히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 소설은 장마다 시점이 다른데, 첫 번째 장에서는 폴의 1인칭 시점으로 그가 행복했던 순간을 그리며 그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다. 그의 열정적인 사랑과 그의 진실한 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두 번째 장에서는 사랑이 시들고 그가 느낀 행복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면 찾아오는 고통을 2인칭 시점으로 들려준다. 가장 읽기 괴로웠던 부분이기도 하다. 마치 남의 일처럼 지켜보는 시선에 서늘함이 느껴진다. 세 번째 장에서는 모든 것이 고통이다. 누가 봐도 그들의 사랑이 끝난 것 같지만 마무리되지 않은 분위기가 더 씁쓸했다. 심지어 3인칭(‘그들’이라고까지 했다)으로 표현하면서 ‘이제 완벽한 이별만 남았군!’ 싶은, 마치 할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은 상태. 사랑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기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그가 이 사랑을 다르게 기억하는 건 아닐까? 그 어떤 질문을 더 한다고 해도, 우리는 완벽한 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들려주는 누군가의 기억이 맞고 틀림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 다만, 그가 들려준 그만의 사랑이 맞지 않는다고 틀렸다고 생각되더라도 미워하거나 오해하지는 말자고 말하고 싶다, 아직은. 이제까지 우리가 들은 건 ‘폴’의 사랑이지, ‘폴과 수전’의 사랑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아직 수전의 사랑까지 듣지 못했음으로, 폴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들었으니까, 그저 폴의 사랑은 이렇게 흘러갔구나 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이고 싶다. 그 사랑을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사랑을 들었을 뿐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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