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 이야기 세트 - 전4권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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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엄마가 살던 집 마당에는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깨끗하고 시원한 물이 마른 적 없이 나오던 그 우물을 온 동네 사람들이 이용했단다. 마을 사람들은 물을 길으러 엄마의 집에 왔고, 외할머니는 사람들이 물을 길어갈 수 있게 종일 대문을 열어두고 사셨다고 한다. 별로 어려운 것 없이 넉넉하게 살았던 때였고, 외할머니는 사람들에게 뭐든 나눠주고 지내면서 인심 좋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랬구나, 외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엄마는 한 마디 곁들인다. 종종 외할머니의 음식 솜씨를 칭찬한다.

"우리 엄마가 손으로 뭐든 조물조물해서 밥상에 올려놓으면 다 맛있었어. 궁중 요리도 아닌데 다 맛있었다니까. 나는 그런 맛이 왜 안 나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그런 외할머니를 기억나게 하는 옛날이야기는 이모를 만날 때 배가 된다. 엄마보다 언니인 이모 두 분, 미국에서 거의 5년에 한 번씩 한국에 들어오는 막내 이모, 엄마와 동갑인 나의 이종사촌 언니. 이 네 명이 만나면 아주 오래전, 내가 알지 못하는 시절의 이야기는 보따리를 풀고 다시 묶일 줄 모른다.

'그때 우리 엄마가 이랬어, 우리 옆집에 살던 아무개가 아직도 거기 살아? 올케언니가 왜 그렇게 미웠는지 몰라, 엄마가 얼마나 부지런하셨는지 쉬지도 않고 일하셨어, 엄마가 해주는 김장김치가 진짜 맛있었는데, 시래기만 넣은 된장찌개가 끝내줬어, 말하고 보니 진짜 먹고 싶다.'

이런 자리도 미국에서 이모가 들어와야 생긴다. 각자 살기 바빠 한국 땅에 있으면서도 서로 얼굴 볼 일이 집안의 경조사 말고는 없다. 그렇게 만나도 몇 시간 앉아있지 못하고 제 갈 길을 서두른다. 이렇게라도 서로 모여 옛날이야기 하면서 그리워하는 시간이 얼마나 더 있을까. 지나간 시간, 부를 수 없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얘기들. 언젠가 내가 겪게 될 순간들.

 

9남매인 엄마의 형제는 네 분이 미국에서 사신지 거의 오십 년이 다 되어가고, 나머지 다섯 명이 한국에서 사는데 모두 돌아가시고 이제 엄마와 이모 두 분이 남아계신다. 칠순 팔순을 넘어선 이 세 여인은 이제 서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종종 안부를 물으며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하신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생긴 버릇이 있다. 내 기억에 없는 외할머니 얘기를 할 때마다, 궁금증보다는 어떤 의무감으로 엄마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식들 다 멀리 나가서 살고 유일하게 남은 엄마와 내가 동지처럼 지내는 관계이기도 해서 그렇지만, 언젠가 내가 그리워할 엄마를 떠올리면, 엄마도 엄마가 그립지 않겠는가. 종종 '외할머니는~, 예전에 아무개는~' 하고 시작하는 엄마의 이야기에 바쁜 일 잠시 내려놓고 엄마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때마다 나는 한 마디만으로 엄마의 말문을 열다.

"응,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 이야기를 해보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저자의 엄마는 일본군 위안부 징집을 피하려고 아버지와 결혼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그렇게 싫었다고, 그러니 그 결혼을 얼마나 피하고 싶었을까. 그런데 말이다. 인생이 참 아이러니해서일까, 아버지와 결혼하고 5일 만에 해방이 되었다고 하니 이렇게 슬픈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아이고야, 땅을 치면서 후회했을 것 같다. 5일만 더 버틸 것을... ㅠㅠ) 이어지는 한국 전쟁으로 엄마의 가족 일부는 남한으로 피난으로 오고 정착한다. 남은 형제와 부모가 이북에 살고, 오빠와 남한에 살게 된 엄마의 삶은 그 시대의 분위기처럼 평탄하지 않았다. 전쟁 후의 나라는 혼란스러웠을 것이고, 사람들의 생활은 팍팍했을 것이다. 건축 일을 하는 오빠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지만, 노름과 술을 즐기던 아버지의 무책임까지 대신하느라 엄마는 뭐든 하면서 자식들을 키워야 했다. 식당, 문방구, 신발 장사, 떡도 팔았다. 그런 고생에 어쩌다 한번 나갔던 꽃놀이가 일상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는 삶을 보낸 엄마였다. 사는 게 힘들고 어려웠지만,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던 엄마의 성격은 정이 넘쳤다. 어려운 형편에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먹기를 즐겼던 푸근함이 엄마에게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인심도 잃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어려운 살림에 많은 자식을 다 키워내고 가정을 이끌 수 있었겠지. 그런 엄마와 저자가 오십 여년의 세월을 함께해온 이야기다. 저자가 엄마와 함께했던 기억을 소환하고, 기억에 없는 부분은 엄마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읽으면서 자꾸만 옆에 있는 엄마를 쳐다보게 되는 그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저자의 엄마와 비슷한 나이를 지나는 우리 엄마도 이렇게 살아왔겠구나 싶어서 안쓰럽고, 여전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사는 게 미안하기도 하다. 엄마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내가 채워주는 게 분명 있겠지만, 엄마가 나를 채워주는 게 더 많다는 게 사실이니까. 한편으로는 언제 또 이렇게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생길까 싶기도 해서 울컥해진다. 아마 저자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엄마와 이렇게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면서 기록하고, 몰랐던 엄마의 시간을 듣고 지금의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세월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삶을 알듯 말듯 다가오는 감정 때문에 말이다. 그런 엄마의 삶은 지금 저자의 인생과 연결되어 있다.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엄마의 성장기와 엄마의 결혼 후 생활이 대부분이다. 4권 중반 이후로 저자의 이야기가 들려오긴 하지만, 엄마의 이야기에 자연스레 이어지는 자식(딸)의 이야기다. 엄마의 엄마가, 엄마가 없었다면 시작되지 못했을, 엄마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드러나지 않을 감정을 담은 이야기다. 세상 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엄마이지만, 모든 자식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겠지. 부모와 자식 간에 항상 좋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싸우고, 멀어지고, 원망하는 대상이 되기도 했던 엄마가 이제는 힘을 잃고 자식에게 마음을 의지한다. 자식의 아픈 일을 더 슬퍼한다. 그런 엄마의 기억이 사라져간다. 이 책이 완성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그렇게 사라져가는 엄마의 기억을 붙잡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내 고향집이 한번 가보깁다.

만약 고향이 간다면 모(묘)를 파헤쳐 뼈를 만지보면 좋겠어.

우리 나고(낳고) 키운 어머니...

 

입소문으로만 듣던 이 책을 직접 만나는 게, 기쁜 일이라기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제목에서부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가늠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 어떤 엄마의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들려올까 싶기도 하고, 마흔이 넘어 엄마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야겠다는 저자의 다짐 같은 게 느껴져서이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엄마와 아들 사이에서도 그렇겠지만, 엄마와 딸은 그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겪어갈 감정이기도 하고, 저자가 나보다 앞서 겪어온 것이어서 더 무게감 있는 이야기로 들렸다. 엄마가 세상 더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가, 가장 미워하고 증오하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가. 그러면서도 엄마와 함께하고 싶고 엄마를 이해하는 일을 멈추고 싶지는 않기에, 이런 이야기를 멀리할 수는 없었다. 이 책 속의 엄마 이야기는 한 여자의 생애이기도 하고, 그 개인의 삶 속에 녹아든 한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친가와 외가 구분 없이 사용하던 호칭이 애매하게 들리고, 낯선 함경도 사투리나 풍습들이 백여 년의 시차를 느끼게 하면서도 생생하게 들린다. 듣기 어려운 북녘의 삶이 이렇게 그려지면서, 어김없이 그 안에는 엄마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워할 대상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바로 옆의 엄마를 다시 보게 한다. 그 무엇이든, 이 책은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사는 모든 이에게 엄마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이야기라는 건 분명하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의 역사가 된다. 그러니 그 사람을 가장 잘 아는 방법은, 그 사람을 직접 경험하거나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듣는 것이다. 그 상대가 가족이든 친구든 애인이든, 그 누가 되었든 그 사람을 잘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사십 여년을 함께 살아온 엄마를 내가 지켜보고 겪어왔지만,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나니 알겠다. 저자가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며 이 만화를 완성해낸 것처럼, 내가 모르는 시간의 엄마를 이해하는 방법 역시 엄마가 지나간 시간을 듣는 일이다. 엄마가 가끔 꺼내는 외할머니 이야기나 이모들을 만났을 때 꺼내는 이야기들, 예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하게 들려오는 건 내가 엄마를 더 많이 알고 싶고 계속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엄마가 궁금해질 때마다 묻는다. 엄마의 처녀 시절부터 아끼던 재봉틀은 어디로 갔는지, 왜 큰 외삼촌을 따라 미국에 가지 않았는지, 어쩌다 아버지와 결혼했는지, 힘들었던 그때 우리를 버리고 나갔는데 왜 돌아왔는지 같은 이야기를 꺼내며 엄마의 기억을 자꾸만 소환한다. 단순히 기억을 읊는 게 아니라 감정까지 실어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에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난 게 미안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쩌랴. 이미 엄마와 딸로 운명 지어진 것을 거스를 수가 없으니...

 

 

"엄마! 웅우우"

"왜, 너무 이뻐서리 꼬집어주고 싶니야?"

"어릴 때 엄마가 이렇기 궁둥이 두드려주고 그랬는데 이제 내가 그러네."

"이제 내가 엄마네. 내가 엄마야." 

 

엄마와의 남은 시간을 같이, 더 잘 보내야겠다는 막연한 다짐을 계속하면서 4월을 기다린다. 추위를 많이 타는 엄마가 기다리는 봄이기도 하고, 4월에 엄마와 함께 제주도에 가자고 작년 12월에 여동생 네와 미리 예매해 두었다. 귀찮다고, 괜히 너희 돈 쓴다고 싫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하시더니, 막상 가고 싶기는 하신 것 같다. 제주도 가면 많이 걷고 많이 봐야 하니까 힘들면 안 된다고 요즘 저녁마다 동네를 걸으시며 운동하신다. ^^ 생각해보면 엄마와 여행다운 여행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식구들 다 모이기도 힘들지만, 꼭 움직여야 하는 일이 아니면 엄마가 선뜻 길을 나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할 기회를 너무 많이 미루기만 한 것 같아서 아쉽고 속상하지만, 그런 후회는 잠시 넣어두기로 한다. 이번 여행이 엄마와의 마지막 여행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금씩 여행준비를 하는 즐거움으로 엄마가 많이 설레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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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9-02-1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의 ‘내 어머니 이야기‘도 재미있어요. 여행기도 기다려집니다. 어머니! 건강하셔서 펄펄 즐겁게 걷고 오셔요~

구단씨 2019-02-14 20:47   좋아요 0 | URL
걱정하면서도 설레면서 기다리시는 것 같아요. ^^
 
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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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 박완서 선생님이 계시는 듯했다. 세상을 뜨고 나서도 그렇게 생생한, 계속 읽히는 작가가 있다는 게 좋은 가늠이 되었다. (229페이지, 「아라의 소설」 정세랑)

 

한 작가를 위해 29명의 작가가 모였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지만, 기리기 위한 그 대상이 박완서였기에 당연한 듯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한다. 읽을수록 더 놀랐던 건, 마치 시대를 거슬러 온 박완서의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거다. 같이 출간된 『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먼저 읽어서일까. 앞선 세대의 속마음을 들추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 요즘 우리 삶의 속마음을 마주한 것처럼, 너무도 닮은 이야기에 피식 웃음이 나더라는. 이 스물아홉 편의 이야기가 세월을 담아 다시 우리 앞에 섰을 때 어떤 분위기일지 시험이라도 하듯 평범하게 사는 우리 모습 그대로를 담았다.

 

특히 기억나는 작품이 이기호의 「다시 봄」이었는데, 술김에 아들을 위한 고가 장난감을 사서 들어갔다가 아내한테 혼나고 환불하러 가는 장면이었다. 아들의 눈길을 보면 애정이 묻어는 그 장난감을 환불할 수가 없다. 하지만 형편이라는 건 가끔 아들의 그런 눈길을 무시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조카 아이가 생각났다. 미술을 배우고 싶다는 녀석에게 여동생은 그럼 다른 학원을 하나 끊어야 한다고 하면서 선택하라고 했다. 녀석은 수학 학원을 그만 다니겠다고 하면서 미술 학원으로 향했다. 그 아이의 미래가 미술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를 선택하면서 하나를 버려야 할 때 고민하게 되는 일을 일찍 배우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시간의 문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가 우리의 모든 바람을 다 채워주지 못하는 게 된다. 레고 박스 위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모른 척해야 하는 아빠의 마음에 공감하게 되는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 눈물은 포근해지는 봄밤의 바람에 금방 마를 것 같다. 그들 가족에게 언제나 겨울만 있을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똑뚝, 눈물방울이 레고 박스 위로 떨어졌다. 아들은 레고박스 위에 떨어진 눈물방울을 계속 훔쳐내며, 그러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그러면서도 또 한편, 어쩐지 이 풍경 자체가 낯익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 또한 그렇게 울었던 봄밤이 있었다. (183페이지, 「다시 봄」 이기호)

 

현실을 그대로 담은 이야기들에 웃다 보면, 참 씁쓸해지기도 한다. 조남주의 「어떤 전형」은 대학 입시의 뒷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이의 대학 입학 문제는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엄마가 써주는 자기소개서, 잠깐 몸담았던 종교라는 근거로 종교 전형을 찾아다니는 딸의 간절한 발버둥에 웃음이 나더라. 대학 입시와 동떨어진 생활이다 보니 잘 모르겠는데, 실제로 종교 전형이라는 게 있나? 이야기 속 모녀는 그 종교 전형에 대학 입시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정도로 필사적이다. 한때 세례를 받았던 목사를 찾아다니고, 엄마가 다니는 절의 구원을 바라야 하는 몸짓이라니. 대한민국에서 대학에 가려는 일이 이렇게 코미디 같은 준비를 거쳐야 하는 게 되어버린 건지 하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휴전을 청하고 그도 응한다. 오페라적이고 바로크적인 오전에 비하면 너무 간단한 화해. 싸우는 데는 만 가지 언어가 동원되지만 화해하는 데는 '미안해', '나도'라는 다섯 글자만 사용될 뿐이다. 그들은 피곤하다. 싸움의 긴장감을 유지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조용하고 건조한 오후와 밤을 원하기 때문에 '이쯤에서 물러서는' 외교 감각이 작동하는 것이다. (51페이지, 「등신, 안심」 김성중)

 

민주는 스무 살 이후 자신이 살았던 삶이란 꿈꾸어왔던 것들을 조금씩 하향 조절하는 날들의 연속인 것처럼 느꼈다. 그러니까 상하이의 전도유망한 글로벌 기업에 다니는 커리어우먼에서, 국내 대기업의 정규직 사원으로, 그러다 결국엔 사립대학의 비정규직 행정 직원으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빵을 떼어 길가에 버리며 걸었다는 동화 속의 남매처럼, 민주는 자신의 꿈의 디테일들을 하나씩 버리며 걸어왔지만, 자신이 삶의 어디쯤 도착해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떤 끝으로 향하는지는 더욱 알지 못했다. (115~116페이지, 「언제나 해피엔딩」 백수린)

 

백수린의 「언제나 해피엔딩」은 감당해야 하는 현실과 바라는 미래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춘의 모습도 담아낸다. 마음은 저기 멀리 바라는 이상향에 머물러 있고 눈앞의 현실은 지켜내야 하고, 그러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현실이 또 멀어질까 봐 불안해하는 상황. 영화가 끝나고 엔딩이 어떻듯 다시 영화가 시작한다는 말에 어느 순간 안도가 되기도 하는 위로가 힘이 되어 다시 미래를 바라보는 오늘을 살아가는 일. 우리 살아가는 순간 대부분은 이런 위로 한마디 때문에 힘이 되는 것 같다. 괜찮다고 그대로 말하지 않아도 '나는 이런 시기를 이렇게 지나왔어'라는, 흘러가는 듯한 한마디에 우리의 오늘도 그렇게 소박한 힘을 얻고 흘러가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위안이 되곤 했다. 김성중의 「등신, 안심」처럼 돈가스 일곱 장은 부부싸움의 화해 수단이 되기도 하는 일상에 미소가 떠오르는, 우리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싶은 공감의 상황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살아가는 게 그렇지. 그렇게 또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면서 말이지. 당신이 살아왔던 그 순간처럼 우리 인생의 순간들도 그렇게 흘러가겠지...

 

사람들이 왜 '펑예' 글을 쓰는지 알게 됐다. 모르는 300만 명을 대상으로 상황 요약을 한 후 조언을 구하는 심리를. 원하는 답을 그 300만 명 중의 누군가 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것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154페이지, 「첫눈 마중」 윤고은)

 

그런가 하면 상상력으로 이뤄낸 소설도 있고, 박완서 작가를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일화나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한 작가와의 인연이 그냥 한 번으로 머물지 않을 수 있다는 게,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게 정겹다. 그런 대상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작가의 말 한마디에 공감하면서 세상을 봤던 여러 작가의 사색이 읽는 내내 그려진다.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어떤 글이든 문학 안에서 피어오를 수 있다며 편견을 지우게 하는 일들이 작가가 후배들에게 전한 메시지 같기도 하다. 동료 작가이기도 하지만, 먼저 많은 것을 열어준 존재이기도 한 고 박완서 작가의 흔적을 29명의 작가에게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살아가는 일의 맛이기도 하고, 문학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기도 하는, 일상의 순간들을 들추면서, 인간과 삶의 의미를 되새김하는 이야기들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게 된다. 마침표 안에 내장한 물음표를 찾아가게 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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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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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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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 글이 쓰인 시절을 이미 한참 지나왔지만, 이미 보고 듣고 겪어서 알고 있는 일들에, 여전히 변하지 않은 생활환경의 어떤 부분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조금 달라지기도 했지만 아주 사라지지 않은 관습이 보이기도 하고, 한 시대를 채웠던 사회 분위기를 만나기도 한다.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겪지 못한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고, 우리네 부모님이 젊은 시절을 겪어온 시간이기도 하다. 문학으로 만나는 또 하나의 역사인 것이다. 48편의 짧은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그 시대를 읽는 것만으로 채워지는 게 있다. 평범한 소시민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 우리가 겪어온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적어낸다. 작가가 세상을 보는 그대로를 옮겨 놓은 것만 같다. 그 글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세상을 본다.

 

아파트가 붐을 이루던 시절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짧은 글에서 많은 이야기가 들려오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아파트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어쩌면 작가는 그 편한 세상으로의 변화가 불러오는 사라지는 것들을 더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열쇠 하나로 통과할 수 있는 아파트 현관문 너머의 무엇이 우리 가슴을 채우는지 묻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열쇠 하나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다니던 아이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부모의 부재로 초인종을 누르는 게 아닌 내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아이의 일상, 새 아파트가 올라갈 때마다 이사하는 부부에게 새집의 환경보다는 그 지역을 채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보라고 따끔하게 충고하는 부모, 같은 구조의 집에서 지내면서 일상과 삶마저도 비슷해져 가는 사람들. 편해서 좋은 것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 좋은 것들 안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내온 시간이었다. 그리워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건 새롭고 편한 것들을 하나씩 선택할 때마다 비례적으로 늘어나는 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알아채게 되는 것 같다. 작가가 전하는 이야기들에서 오늘의 모습을 같이 볼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철이는 아파트 열쇠만 있으면 그만이다. 학교 갔다 와서 열쇠로 열고 들어와서 점심도 혼자서 차려 먹고 그게 귀찮으면 전화로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서 먹는다. 아내는 철이를 위해 늘 풍부한 과일, 우유, 과자 등을 준비해놓고 있기 때문에 친구들을 불러다 그런 것을 먹으면서 놀기도 한다. 철이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다. 집에서 노는 것에 싫증이 나면 아파트를 잠그고 나가면 아파트 단지 곳곳엔 별의별 놀이틀들이 다 갖추어진 놀이터가 있다. 거기서 얼마든지 놀 수가 있다. 집에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조바심할 필요가 없다. 나도 아내도 제가끔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61~162페이지, 열쇠 소년)

 

낯설다. 오십여 년 전의 시절이 내게 어떻게 다가올까 궁금하기도 했다. 공감은커녕 이해라도 할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앞선 글들이었다. 하지만 웬걸. 그 시대의 모든 생활 모습이 이 짧은 글들에 채워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작가의 전작들을 떠올렸다면 충분히 예상했을 수도 있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작가의 글에 지난 글의 분위기를 연상할 겨를도 없었던 거다. 대한민국의 오십여 년이 어떻게 변화하고 개발되어 왔는지 그대로 지켜볼 수 있다. 여자의 삶, 대학이라는 곳, 결혼이라는 현실, 고부갈등, 아파트 열풍으로 변화하는 이웃 관계 같은 일들이 웃음과 함께 고스란히 들려온다. 물론 웃을 수만은 없는 일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지금의 삭막함보다는 덜한 느낌에 다행이다 싶기도 하면서, 어쩌면 개발과 발전이 우리 삶을 이렇게 건조하게 만든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울타리의 구분 없이 방문만 열면 밖이 내다보이던 시절, 옆집 누구를 부르면 바로 대답이 돌아오기도 하는, 땅 밟고 살면서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소소하게 묻는 안부, 대가족의 구성이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불편한 것도 많았겠지만, 사람 사이에 피어나는 정이 더 귀하고 익숙해서 불편함은 잠시 밀어두어도 좋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음식 냄새야말로 그립고 그리운 인간의 체취다 싶은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봉례는 무인도에 유배되어 사람 그리듯이 절절히 이웃의 음식 냄새를 그리워하게 됐다. (382페이지, 성공 물려줘)

 

일기 같은, 어떤 날들의 기록 같은 느낌의 글이다. 박완서의 전작을 만났던 때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게 익숙해서 편안했다. 아마도 작가의 글에서 묻어나는 그 소탈한 이야기들 때문일 것이다. 옆집 영희네 이야기 같은, 오늘 아침 우리 집 밥상 위에서 일어난 일 같은 이야기들이 작가의 문장으로 옮겨온 것만 같다. 게다가 이 짧은 글들을 읽은 후 다가오는 작가 특유의 괜한 웃음의 분위기를 알아서이기도 하다. 피식 소리를 내는 웃음이기도 하고, 한동안 생각했던 일들을 끄집어낸 것 같은 토로의 말들이기도 하다. 소박한 이야기들에 묻어난 우리네 인생을 들추는 시간이어서, 가슴을 치면서 꺼내놓고 싶은 답답한 세상살이에 공감해서이기도 하다.

 

"겉으론 다 행복해 보여도 근심 없는 집이 없구려." (300페이지, 서른아홉 살, 가을)

 

세상이 발전하고 편한 게 많은 일상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가장 귀한 것을 놓치고 사는 건 아닐까. 밤 11시까지 주문 완료하고 다음 날 새벽에 현관문을 열면 주문한 물건이 얌전히 놓여있는 세상이다. 클릭 한 번에 필요한 것이 몇 시간 후에 배송되어 오고, 현관문을 열어놓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에어컨을 틀며 바람을 맞는 일상이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옆집이나 아랫집 윗집의 초인종을 누를 일도 없다. 그런 세상을 사는 우리가 이 글에서 마주한 것은 낯설지만 따뜻한 것들이었다. 이웃 주민의 건강을 염려하고, 혼기를 놓친 조카나 이웃의 자녀를 짝지어주고 싶어 안달하는, 때로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착한 남편의 답답한 모습에, 기혼 여성의 사회 진출이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의 현실에 속이 상할 일 많은 시절이었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우리가 스며들 틈이 있었다. 쑥스럽지만 낭만을 꿈꾸는 사랑에, 주변의 인간미 넘치는 애정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그대로 비춘다. 우리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의 장면을 옮겨놓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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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흘렀다.

세상은 변했다.

이제는 시골 어디에도 친구들끼리 주머니를 털어 갈 색싯집 하나 없다.

달이 환한 마찻길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앞으로 또 30년이 흐르면?

마찻길이라는 말을 잊어버렸듯이 그때 가서 우리는 장터라는 말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장터의 모습을 기억해 내기 위해 이 사진집을 열심히 뒤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258페이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오늘 팔아야 할 물건을 싼 보자기를 버스에 싣고 오르느라 애쓰는 사람의 뒷모습 혹은 앞모습 말이다. 자기 몸보다 큰 짐을 버스에 올리느라 힘들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한 사람분의 차비를 내고 사람이 타야 할 자리에 자기 짐으로 영역을 차지하느라 운전기사의 눈치를 보면서 버스에 오르는 표정이 더 기억난다. 우리 집은 시내와 시골의 중간쯤(시내 쪽에 조금 더 가깝게)에 있다. 나갈 때는 시골에서 나오는 버스를, 들어갈 때는 시골로 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러니 이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게 된다. 아침에 나갈 때는 엄청나게 컸던 보따리가 오후에 들어갈 때는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들고 나간 물건을 다 팔았다는 거겠지. 아니면 들고 나간 물건을 팔았던 돈으로 다른 것을 사 오느라 다시 양손이 무거워지거나. 사람 사는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시내 반대 방향의, 우리 집 너머의 어디쯤을 가본 적도 거의 없다. 버스의 종점 이름이 쓰여 있어도 그게 어딘지 잘 모른다. 어렸을 적에는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친다는 게 두려움이었고, 지금은 그저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니 나오는 사람 들어가는 사람이 있겠지 하는 정도일 뿐이다. 가끔 보는 20세기의 흔적들 같은 느낌으로...

 

그런 내게도 그곳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궁금해질 때가 장날이다. 집 앞 시장 상가에는 평소에도 문을 열고 장사하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이곳에는 아직도 유명한 5일 장이 있다. 엄마는 지금도 고추나 마늘을 살 때면, 약초를 살 때도 그 재래시장에 간다. 요즘은 재래시장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그곳은 장터다. 참 정겹게 들린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곳, 세상 온갖 물건이 펼쳐져 있는 곳, 시골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유일하게 즐기는 외출이 아닐까 싶은 곳. 백화점과 대형 마트가 익숙하고, 24시간 문을 연 편의점에서 시간 구애받지 않고 필요한 물건 대부분을 구매할 수 있는 오늘을 떠올리면, 장터의 풍경은 상상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저자가 보여주는 사진이 아니었다면, 시인들의 기억 속 시간을 불러오는 게 아니었다면 공감은커녕 어디 별나라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시골에 살아서 불편한 게 많다고 투덜거릴 때가 많았는데, 막상 이런 공감이 가능하다는 것에는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백화점이나 마트가 장터의 업그레이드 버전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다르다. 같은 맥락으로 흐르고 있는 매매의 장소일 테지만, 분명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같지 않다. 보이지 않는 것이 채워지는 곳, 그곳이 장터다. 요즘의 편리한 구매 방식이 절대 채워줄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

 

시골의 오일장은 그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가 발생하고 생성되어 완성되는 곳이었다.

각 마을에서 수공업으로 만들어진 모든 물건들이 상품이 되어 팔려 나갔다.

짚으로 만든 망태나 짚신에서부터, 산에서 난 나물들과 강에서 잡힌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품들이 모여들었다.

농촌 마을의 모든 것들이 상품이 되어 세상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건강한 경제적 활동이었다. (122페이지)

 

갈담장(현재의 강진장)은 이 근방 사람들의 세상을 향한 출구였다.

갈담장에는 모든 것들이 다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정보가 모두 갈담장을 통해 동네마다 퍼져 갔다.

혼담이 오고가고, 무르익어 가는 곳도 그곳이었으며,

농사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도 그곳이었다.

정치에 대한 모든 정보도 그곳에서 밝혀지고 여론이 조성되었다.

갈담장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들끓는 장소였다. (79페이지)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장터 사진가, 두 명의 시인. 이들이 하나가 되어 들려주는 장터는 그 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리움이다. 엄마나 아빠 손을 잡고 나들이 가듯 따라가던 곳, 별다른 고명도 없이 멸치 육수로 끓여낸 잔치 국수 한 그릇의 기가 막히는 맛, 장사는 뒷전이고 끼리끼리 모여 화투판을 벌이기도 하는,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잔칫날 같다. 그러니까. 지금과는 다른 환경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었다는, 하나의 역사로 보면 이해가 될까? 놀이공원에 가고,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뷔페에서 여러 종류의 음식을 맛보고, 여건만 되면 국내든 해외든 다닐 수 있는, 문자나 전화 한 통에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이 되기 전에 있었던 삶의 방식이었다고 받아들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장날에 장터에나 가야 얼굴 보는 사람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소식들을 들으며 눈물과 웃음을 나누고, 장터 한쪽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윷놀이라도 즐기는 게 유일한 놀이이고 외출이었던 시절을 보게 되는 거였다. 그 시절의 장날, 장터는 사람들에게 온 세상을 모아놓은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을 사진가와 시인의 이야기로 새삼 다시 보게 된다.

 

 

 

그런 장터의 풍경이 이제는 사라져간다는 게 매우 아쉽다. 무형문화재처럼 장터도 하나의 역사와 기록으로 남길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 명맥을 이어갈 환경을 만든다는 게 쉬울 리도 없고 말이다. 누군가의 생계가 달린 문제이니 그냥 유지만 한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고... 그 옛날 우리에게 소통하고 교류하는 장소였던,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사고팔고 하던 그곳은 이제 생기를 잃고 시들어간다. 엄마 아빠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을 그곳은 이제 추억으로만 머물려고 한다. 그런 아쉬움을 채워주려는 듯 작가는 장터의 사진으로 그 시간을 공유한다.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 생기를 넣어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들이 그 시간 속에서 주고받았던 온기를 작가의 진심으로 채운다. 그들 각각의 사연이 이야기되어 들려온다. 장터의 바닥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 사람들, 소박한 국밥집에서 데이트(?)하는 듯한 노부부, 뻥튀기 계를 잠시 쉬면서 담배 한 대 물고 있는 아저씨, 늘어놓은 옷들 사이에서 물건을 고르는 아주머니...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흔적 그대로였다. 우리 엄마가 물건을 사러 가서 보인 행동일 것이고, 아버지가 사람들을 만나서 교류하던 순간이었을 테지.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가서 먹었던 1000원짜리 장터 짜장면의 맛이었다.

 

소박하다면 소박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넉넉하지 못한 시절의 흔적 같다. 부족한 게 더 많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사는 게 여유롭지 못하지만, 지금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의 생활환경이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부족함보다는 다른 것을 더 느끼면서 살아간 시절이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채워진 것들로 만족하고 웃으면서 지냈을 시절. 작가의 말처럼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많은 것이 우리를 채우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힘들다고, 외롭다고 말한다고 한다. 추위를 막아줄 집과 뜨뜻한 보일러 온기가 있고, 삼시 세끼 밥을 먹고 한겨울에도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구멍이 난 양말을 기워 신지 않아도 되는 세상인데 힘들고 외롭다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까지 한다고. 아침을 서울에서 먹고 점심을 일본에서 저녁을 중국에서 먹을 수 있는 세상인데도 외롭다고 말한다고... 작가는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이렇게 전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힘들고 외로운 이유는

신이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163페이지)

어쩌면,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도시의 삭막함 때문이 아닐까?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게 현관문 꼭꼭 닫고 사는 세상. 도시는 인간에게 육체적인 편리함을 주는 공간으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까지는 다독여주지 못한 공간으로 남아있는 건 아닐까 하고. 오래전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했던 시골의, 장날의 그 모습처럼 사람 사는 냄새가 북적거리던 세상이 사라져서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장터의 매매 형태가 00 상회라는 작은 구멍가게로, 00 상회가 슈퍼로, 슈퍼가 대형할인마트나 백화점으로 변화하면서 도시가 장터를 빼앗아가서, 흥정이 사라진 자리에 정찰제의 거래가 채워지는... 장날만 되면 보이던 세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괜히 뭉클해지기도 하고, 내 기억 속 희미한 흔적을 선명하게 다시 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사진가의 사진과 시인들이 들려주는 문장은 하나의 영상처럼 흐른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화려하고 예쁜 배우들이 출연하는 게 아닌, 손끝의 굳은살이 더 먼저 보이는 장터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어 흑백의 사진으로 기록되었다. 물건을 파는 사람 사는 사람, 국수 국물 한 국자 더 떠주며 마음도 덤으로 얹어주는 온기가 그대로 보인다. 이들의 모습이 내 기억에도 어렴풋이 남을 걸 보면 내 나이가 참 많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도 들지만, 이 책에 담긴 사진과 시인의 경험담이 낯설지 않게 들리는 걸 보면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박물관이나 역사관의 어디쯤에서 마주했다면, 설명해주는 몇 줄의 문장으로만 기억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네 살아온 시간의 한 부분을 그렇게 들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의 생생한 온도까지는 들을 수 없었을 것 같다. 다행인 건 사진가의 사진에 얹어진 시인의 이야기가 그 온도를 전하면서, 우리에게 건너오는 그 시간의 기록이 완전해졌다는 거다. 사진가가 포착한 순간에 시인의 추억이 보태어져 장날의 기록이 완벽해진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건너와서 또 하나의 기록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이 사진들에서는 누가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는 모습들,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삶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모습들이 발견된다. 작가는 사진을 위한 이미지를 채집하거나 포획하려 한다기보다는,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찰의 시선은 차갑고 냉정한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리라. (289페이지)

 

'옛것'과 '지금 것'은 항상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유리창의 안과 밖처럼 '옛것'과 '지금 것'의 이분법적 분할은 있을 수 없고 또한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옛것'의 따스한 온기와 '지금 것'의 현재성이 함께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울 수 있지 않겠는가. (318페이지, 사진가 이흥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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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설연휴동안 늘 평온하고 복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

구단씨 2019-02-07 23:38   좋아요 1 | URL
설 연휴 잘 지내셨나요? ^^
월요일 같은 목요일이었습니다.
하루만 더 지나면 맞이할 주말을 생각하면서
유쾌하게 지내세요~ ^^

재는재로 2019-02-0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좋은 시간 보내세요

구단씨 2019-02-07 23:39   좋아요 0 | URL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일교차 심하면서도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요즘입니다.
감기까지 오면 더 힘드실 텐데, 몸조심 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