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고양이

 

 

 

 

 

 

 

 

 

순대는 먹지만 순댓국은 먹지 않는다. - 92페이지

 

나도 그렇다.

순대는 먹지만 순댓국은 (가능하면) 먹지 않는다.

저자와 이유는 다르지만 순댓국을 먹는 자리라면 애써 피하게 된다.

부득이하게 가야만 하는 자리면 어쩔 수 없이 순댓국 한 그릇을 앞에 두고 고사를 지내는 수준...

결국 꾸역꾸역 먹기는 하는데 그날은 소화제 필수다.

별 이유 없다.

그냥 오래전 어느 날 처음으로 순댓국을 한 그릇 먹었는데 심하게 체했다는 거...

그래서 꼭 먹어야 하는 자리가 아니면 굳이 순댓국은 안 먹고 싶다는 간절함이 남았다는 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컨드핸드 타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든 어느 나라든, 안과 밖의 모습이 다를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20여 년의 시간 동안 들어온 목소리를 그대로 전하는 저자의 마음이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다. 또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역시나...

 

이제는 낯선 이름이다. 소련. 분명 내가 자랄 때 들어왔던 이름인데, 지금은 사라진 단어처럼 들린다. 소련이 무너지고 변할 거라 믿었던 사람들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생한 증언으로 가득 채운 이야기다. 그 긴 시간 저자가 들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막상 그들의 삶을 듣고 있노라니 이상하다. 혼란 그 자체였다. 겉으로는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인데 그들 내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분명하지 않지만, 또 강한 어떤 목소리. 그 혼란의 시간을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증언으로 풀어간다. 무너진 소비에트 연방. 그렇게 공산주의는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바로 열릴 거로 생각했지만, 그들의 생각처럼 세상은 쉽게, 금방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이 살아온 세상은 그랬다. 이도 저도 아닌,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으로 볼 수 있는 건 풀어야 할 많은 숙제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저자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은 그들만이 겪은 사회, 감정, 그들만의 생각을 말한다. 붕괴한 공산주의, 밀려든 자본주의와 돈, 아직 남아 있는 공산주의의 향수. 뭔가 아귀가 잘 들어맞지 않은 듯하지만, 그 시간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모르지도 않을 것 같다. 생활에 직접 영향은 크지 않겠으나, 그 크지 않음이 서서히 쌓여가고 있음을 감지하는 건 가능하니까. 그게 한꺼번에 작용하는 순간이 오면 그 무너짐은 더 크게 다가올 것일 테니.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은 끄덕이면서, 잘 모르겠는 내용은 조금 더 읽어보려 애쓰면서 머리와 마음에 담으려 애썼다. 공산주의 국가를 살면서 공평하지 못했던 삶이 아이러니였고, 그 계급의 차이에 물음표도 던져본다. 자본주의 사회와 다를 게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그들이 지향했던 세상은 도대체 뭐였을까.

 

1990년대 그 세상이 붕괴하면서 드러나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비치던 것은 욕망의 연장선이었다. 바뀐 세상에서도 큰 변화가 없을 바탕이었다. 희망을 품고 살아가려는 세상 그 기저에 깔린 고통이라고 해도 좋을까. 그에 희생자가 늘어날 뿐이다. 저자가 만나고 인터뷰한 사람들은 다양했다. 공산당 간부부터 평범한 일반인까지, 그들이 겪은 다양한 목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그 시간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증언을 듣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나같은 목소리로 하는 얘기는 결국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소비에트 시대의 마지막 증언들이라고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들의 증언이 품고 있는 건, 그들이 바라는 세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처 적응하지 못한 사회에 스며들지 못하고 향수를 불러오는 감정이 남았다. 과거로의 회귀가 답인 것처럼 여기는 순간들이 존재하는 것. 뒤로 돌아가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시대에 발 묶인 사람들의 마음을 듣는 순간이다.

 

모든 변화의 목적은 인간답게 살기 위한 것이어야 할 텐데,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한 세상에서 여전히 혼란을 겪는 목소리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인터뷰를 조금씩 들으면서 아직 찾지 못한 답을 구해야 할 것이 남은 듯하다.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종말이 하고 싶은 말은 비단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기에.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려는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기에.

 

많이 무거운 이야기였다. 이해가 쉽지도 않았다. 내가 여전히 그 이해에 다다르지 못한 부분이 많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혼란의 시간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서, 그 이해에 가까이 가고자 노력할 뿐이었다. 그 노력은 여전히 남아있는 숙제이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
모린 코리건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하아, 영화가 아니라 원작부터 읽었어야 했다. 유감이지만, 나는 아직 《위대한 개츠비》를 읽지 않았다. 오랜 시간 읽고 싶은 도서 목록에 올려놓고도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아쉬운 대로 몇 년 전에 영화로 《위대한 개츠비》의 목마름을 대신 했다. 책을 읽지도 않고 오랜 시간 들어왔던 개츠비 이야기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보는 눈요기까지, 뭐 이 정도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이 책을 읽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개츠비를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 거다. 도대체 한 작품, 한 작가를 어느 정도 좋아해야 이 정도의 열정을 뿜어낼 수 있는지 궁금해서다. 저자가 뿜어대는 개츠비 사랑에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잖나.

 

읽다 보니 개츠비가 전부는 아니었다. 한 작품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듯했다. 작품 속 배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대상은 기본이고, 작품 속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으로 사람을 읽는다. 그런 것을 넘어서서 작가의 모든 것을 파헤치는 기분이 들게 한다. 피츠제럴드에게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작품 속 문장들은 현실 속 그와 어떤 교감을 나누는지, 그의 아내와 딸에게 어떤 삶을 허락했는지 하는 것들. 출간 당시에는 별로 드러나지 못했던 작품인데 왜 오랜 시간이 흘러 기다렸다는 듯이 개츠비 붐이 일었는지, 이 책을 쓰기까지 개츠비를 몇 번이나 정독했는지 하는 그림이 저절로 그려진다. 읽는 것에 머물 수 없는 저자의 마음을 한껏 듣는 재미는 《위대한 개츠비》를 쓴 피츠제럴드의 삶을 언급할 때다. 한 작품이 탄생하기 위해 글을 쓴 작가의 삶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한다. 피츠제럴드의 삶, 가난과 가족과 글에 관한 이야기는 개츠비의 삶과 닮았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떼려야 뗄 수 없게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에 자신을 투영한 듯하다.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사랑으로 비치기 쉬운 《위대한 개츠비》가 ‘계급을 다룬 미국의 소설 중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보인 문장들의 해석 같은 부분은 읽을 때마다 고개를 절래 흔들게 한다. 애정이 넘쳐 매력이라 발견한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감정을 담은 것처럼 골라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라고 생각했는데, 부지런해야 덕후질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이다. 연애도 부지런한 사람이 잘하는 것처럼, 책을 사랑하고 작가를 사랑하는 것 역시 그 부지런함과 호기심, 열정에서 비롯된다. 《위대한 개츠비》를 쉰 번도 넘게 읽었다는, 개츠비 사랑의 끝판왕으로 등극한 저자의 말은 이 책 한 권으로도 증명되고 남는다. 저자 스스로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굳이 몇 번 읽었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이 책만으로 충분히 그 열정을 느낄 수가 있다. 참으로 덕후다운 모습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것에서 끝내지 않은, 그의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그걸 파헤치기 위해 전국 어디든 향했던 저자의 열정은 ‘나는 이렇게, 이 정도로 개츠비를, 피츠제럴드를 사랑한다오~’ 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한 작품과 한 작가에서 머무르지 않고 곧 넓은 시선을 갖게 한다. 그건 이 책의 부제처럼 고전을 읽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저 책 한 권 읽는 것에서 끝내지 못할, 그 책에 대한 무한한 발견이 이어지는 책 읽기를 고전 읽는 방법으로 직접 보여준다.

 

피츠제럴드의 글쓰기(와 그의 인생)에 흐르는 위대한 주제는,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물 밖으로 머리를 계속 내밀고 있기 위해 노력하는 일의 고귀함이다. 피츠제럴드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소설의 주인공 ‘딕 다이버’(이름은 비록 만화책에 나오는 바보 같지만)는 그의 작품이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가 창조한 최고의 인물들은 들뜬 채로 인생이라는 물에 대책 없이 뛰어들고, 그다음엔 떠 있기 위해 싸워야 한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그들은 대부분 바닥에 완전히 잠기지는 않더라도, 밑으로 가라앉는다. 돈 문제로 인한 걱정, 그들을 집어삼키는 욕망, 과거의 무게 등이 물귀신처럼 그들을 아래로 잡아당긴다. (49~50페이지)

 

지극히 사적인 독서 양상을 보는 듯하지만, 그렇게 사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들린다. 첫 페이지에서부터 보이는 저자의 행동이 귀엽다고 여겨질 정도다. 그때 꼭 그걸 보려고 그렇게 추운데도 기다려야 했어? 아, 질문이 어리석다. 불필요한 질문이다. 저자에게는 그게 당연한 일일 테니. 그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개츠비 사랑을 마구 뿜어대는 저자의 발걸음은 그때 극장을 향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을, 그게 진리라는 것을. ^^ 그 열정으로 찾게 된 책과 자신의 삶 역시도 포함된다.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으로 비로소 한 사람의 인생을 제대로 본 것 같이 느꼈던 듯하다. 그건 ‘개츠비’라는 한 남자뿐만 아니라 그 작품 속 여러 인물들, 피츠제럴드, 그리고 개츠비를 읽는 독자를 포함해서 해당한다. 몇 초의 시간이라도 저마다 그 안에서 녹아든 자신의 모습과 인생을 반추하는 시간을 만날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충분히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보고 더 빈틈없이 읽고 싶기 때문에, 1년쯤의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두고, 다시금 피할 수 없이 《개츠비》를 뽑아들게 될 것이다.” (376페이지)

 

아직 나는 그런 책을 만나지 못했다. 가끔 생각나면 한 번씩 다시 꺼내보는 책은 있지만, 저자처럼 오직 한 작품을 쉰 번도 넘게 읽을 만큼 애정을 줄 책이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뭐, 평생 그런 책이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겠지만, 저자의 열정을 보고 있노라니 살아가면서 그런 책 한 권쯤 나에게도 있었으면 싶다. 책을 좋아하고 계속 읽게 되겠지만, 그 안에서 이렇게 내 마음을 몽땅 퍼부어도 될 만한 한 권을 만난다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아서, 책을 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기다려본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 순간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책 부록 한정으로 증정한다니께,

귀가 팔랑거리잖아... 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는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다. 타인과 연결된 관계의 어려움이나 앞날의 걱정이 주는 공포, 내가 겪는 가족과의 갈등, 세상일의 많은 것이 누구에게나 어려웠을 거다. 그 모든 일 역시 내려놓음으로 달라질 것을 안다. 그 '내려놓음'의 다양한 의미와 형태도 잘 알겠는데, 한 번도 쉽지 않았다. 말로는 가능한데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는 건 스님의 말씀처럼 욕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것만큼 채워지지 않아서 더 무거워진다는 결론을 얻게 하는 책이다. 정말 가능할까? 매번 의심의 눈초리로 이런 글을 대하면서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는 바람으로.

 

3주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간다. 한번 가면 5~6시간을 검사와 진료로, 치료받고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진다. 갈 때마다 지친다. 병원 가기 며칠 전부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부모한테 그걸 못하나,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 그 부모와 어떤 관계이냐 하는 게 문제다. 우리집의 가장은 엄마였고, 부모도 엄마였다. 우리 형제들은 한 번도 가장이고 부모였던 적이 없던, 존재 이유를 몰랐던 아버지에게 분노하며 자랐다. 이제 와 몸이 병들어 힘들어지니 가족들에게 뒤처리를 던져놓고 아버지 대우받으려 한다. 항상 화가 났다. 특히 남겨진 가족인 엄마와 나는, 오래된 집의 한겨울 웃풍에도 방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야 할 정도의 열을 품고 산다. 그런 화를 끌어안고 매번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는 건 나다. 갈 때마다 생각한다. 왜 내가 해야 하지? 죽을 것처럼 하기 싫은데, 미칠 것 같은데... 웃긴 건,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이 상황의 답이 없다는 거다. 아무리 화가 나고 욕이 나와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계속 이렇게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 안의 화를 끌어안고 이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아버지와 나는, 병원 대기실에서도 누가 보면 일행인지 모를 정도로 떨어져 앉는다. 유독 대기 시간이 길었던 어제, 멀찍이 떨어져 앉은 아버지를 보니 꾸벅꾸벅 졸고 계시더라. 갑자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는데 기분이 이상해졌다. 시한부로 죽어가는 몸, 제대로 걸을 수 없어 지팡이에 의지하고, 부실한 치아로 죽을 넘기고,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가슴이 싸해졌다. 싸움도 복수도 되지 않을 상대를 앞에 놓고 지금 내가 무얼 하는 건가 싶었다. 순간, 미움과 분노로 가득 채운 지금 내 마음이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한번 웃어보지도 못하고 좋은 시간 흘려보내고 있다는 두려움까지. 변하지 않을 아버지의 모습과 이 상황에 나의 불행과 화가 겹쳐 보였다. 이대로라면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순간도 행복해지지 않겠지. 내 안의 화가 사라질 날이 없겠지.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이 화가 수그러들지 장담할 수 없을 듯하다. 그때는 또 그때의 분노와 후회가 나를 갉아먹을 것만 같다. 결국, 행복을 위해서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바꿀 일만 남았다는 건가?

 

결국 모든 상처는 그 기억을 붙들고 있는 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누가 상처를 줘서가 아니에요. 상처받을 일이 아닌데 상처받고, 그 상처를 내면에 품고 있다가 때때로 꺼내보면서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85페이지)

 

그때 자꾸만 생각나는 말. 작년에 만났던 신경과 선생님도 그랬고, 지난달에 만난 친구도 그랬다. 조금만 내려놓으라고. '내려놓으면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지만, 현실회피는 재발한다'며 이제는 스님까지 내려놓으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쉽지도 않기에 반복해서 듣는 말이다. 그 내려놓음이 누구에게나 같은 모양으로 적용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렵다는 것일 테고. 어제 하루 내가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했던 생각을 떠올려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풀리지 않은 상태로 계속 기다리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안쓰러워진다는 것을. 내가 내려놓은 것들로 내 위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쉽지 않을 것도 안다. 그동안 많이 겪어봤으니까. 다만, 그 과정의 어려움이 조금씩 옅어지기를 바라면서 믿고 싶은 거다. 불가능이 아닌 가능이라는 말로 나를 채우고 싶어져서다. 가까이서 악다구니 써가며 싸울 때는 안 보이던 것이, 지금처럼 한 발 떨어져서 보니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이렇게라도 하나씩 배워가며 조금씩 내 안의 불행을 걷어내는 일. 그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걷어낸 불행의 자리에, 행복이 조금씩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