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엔딩 크레딧 이판사판
안도 유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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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을 읽다 보니 습관처럼 계속 읽게 되더라. 누군가는 어렸을 적부터 책을 손에 들었다고 하던데, 나는 서른이 다 되어가는 때 읽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이, 그냥 우연히 손에 잡힌 책 한 권 읽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졌다.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우리 집에는 제대로 된 책장도 없었고, 누가 책 읽기를 즐긴 적도 없어서 집에 책이 있던 것 자체가 신기하다. 어쨌든, 그렇게 책과 나는 이렇게까지 이어져 온 인연이 되었는데, 막상 책을 대하면서 궁금했던 것은 해결되지 않았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나만 궁금했던 건 아니지?


책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 가장 먼저 글을 써야 하는 작가도 궁금했나 보다. ^^ 어느 날 작가는 편집자와 대화하다가 깨달았다고 한다. 자기가 쓰고 세상에 나오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몰랐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3년여의 세월을 취재하면서 이 소설을 완성해냈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또 놀라고 만다. 며칠 인쇄소 견학하고 담당자 취재하면 다 아는 거 아니었어? 아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알게 된다. 단 며칠 만에 책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다 알 수도 없고, 결코 쉽게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을.


소설의 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인쇄소에 입사한다. 나름 책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다는 자부심도 있었을 테다. 출판사 편집 담당자를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책 제작 일정을 의논한다. 출판사에서 건네받은 자료로 제작 공정의 모든 과정을 담당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 상황에 부딪힌다. 내 맘 같지 않게 흘러가는 일을 몸으로 경험한다. 편집부에서 요구하는 방향과 인쇄 현장의 작업이 같지 않은 것은 비일비재하다. 내 작품을 내놓는 데 애정을 쏟는 건 당연한데 작가와 디자이너의 일방적인 무리한 요구에 좌절하기 일쑤. 무엇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면서 고민도 많아진다. 책이라는 대상이, 책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작업 환경이 사양 산업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가고, 꼭 종이책이 아니어도 되는 전자책이 활발하게 보급되고 있으니, 처음 책을 대하던 마음과는 별개로 생계를 생각하면 암울한 게 이 시장의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책을 향한 애정을 놓지 않는 주인공이다. 상사와 동료에게 핀잔을 들어도, 수시로 변경되는 작업 상황에 당황하더라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분야라고 해도, 여전히 그의 마음속 책은 처음과 같다. 아니, 오히려 더 단단하게 책의 정의에 이르게 된다. ‘책은 필수품이라고 말이다.


읽다가 문득 작은 방 하나를 채운 책장을 둘러봤다. 줄이고 줄였는데도 여전히 벽 한 면을 차지하는 책장에 꽂힌 책들, 그걸로도 부족해서 바닥 여기저기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 한숨부터 쉬어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선뜻 정리하고 버리지 못하겠다. 방문을 열면 훅 끼치는 책 냄새, 한여름의 장마 때는 꿉꿉한 냄새까지 피어오른다. 추워서가 아니라 책 때문에 집안의 난방을 켠 적도 여러 번이다. 환기가 중요한 것 같아서 책이 있는 방의 창문을 일부러 조금 열어두고 지낸다. 한번 읽고 꽂아두기만 했지,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을 생각한 적은 거의 없다. 판권을 표시하는 부분을 한번 휙 훑어보는 정도로 페이지를 넘기곤 했다. 작가가 글을 쓰면 출판사에서 그 글을 받아 교정하거나 다른 부분 확인하고 인쇄소에 넘기겠지. 인쇄소에서는 그 파일 그대로 기계 설정하고 책으로 만들어내면 끝. 이렇게 말하고 보니 참 단순해 보이는데, 이 소설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단순함의 디테일을 보여주었다.


작가, 출판사 담당자, 인쇄소. 크게 보면 책을 완성하는 구성은 이 정도일 텐데, 나는 단순해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각자의 영역, 역할이 분명 있지만, 책을 대하는 자세나 책의 완성을 향한 마음은 구분이 없었다. 누군가 책을 만드는 것을 보고 출산과 비교하던데, 딱 그거 아닐까. 애정을 담고 아껴주고 쓰다듬으면서, 별일 없이 세상에 나오기를 바라는 일. 책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그랬다. 모두가 고생해서 만들고 있지만, 특히 인쇄소 베테랑들의 자세를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아무리 기계가 발달하고 정확하게 잉크를 배합한다고 해도, 사람 손이 하는 정교함은 따라올 수 없을 듯하다. 오랜 시간 같이 일해온 기계를 동료 대하듯 하는 것만 봐도 일하는 자세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 책의 엔딩 크레딧에 기록되어야 할, 단순히 인쇄소의 이름만 적힌 것을 보면서도 느끼게 된다. 그 인쇄소의 이름에 수많은 사람과 가족의 이름이 담겨 있다고, 이 책이 그들의 노력과 애정으로 만들어졌다고, 바로 책의 뒤편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을 이제는 안다고 말이다. 책 제목 그대로, 책의 엔딩 크레딧에 올려질 이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겼다.


또 한 가지, 이 소설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에 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앞으로 책은 어떻게 우리 곁에 남을 것인지 묻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책에서 찾으려던 정보는 검색 하나로 간단하게 해결되기도 한다. 이미 들어왔지만, 책을 읽는 사람이 줄었다고 한다. 사실 이 말은 어떤 수치로 보고 듣지만, 실감 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은근 느끼는 건 나부터도 책을 사거나 읽는 게 줄었다는 거다. 작년과 올해가 다르다. 현실적으로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진 것도 있고, 책을 앞에 두고도 집중해서 읽는 게 점점 어렵다. 굳이 종이책이 아니어도 디지털 시대에 이제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전자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곤 한다. 자려고 누워서 잠깐 읽거나, 밖에서 자투리 시간에 읽거나. 휴대폰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쉽게 읽을 수단이 있는데, 굳이 종이책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역시 종이책의 매력과 만족감은 분명 다르다. 디자인으로 표현하는 책의 내용, 손으로 만져지는 촉감, 이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만족감 등 종이책을 갖고 싶은 이유는 다양하다. 그 다양함 속에서 책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인쇄기는 활기차게 움직이며 오늘도 새로운 책을 세상에 내보낸다. 책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스러져 갈 것이다. (477페이지)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책 제작은 계속될 것이다. 우라모토의 눈앞에서 확실하게 계속되고 있다.

완성을 기다리는 책이 끊이지 않는 한 책이 없어진다는 공포에 떨고 있을 틈이 없다. 스스로 선택한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앞으로도 책을 만들어갈 것이다. (478페이지)


주인공과 인쇄소 사람들은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책이 필수품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피난처에서도 책의 공급을 반가워했다는 말에 괜히 울컥해지기도 했다. 코로나 상황에 책의 판매량이 늘었다는 말도 들었다. 본의 아니게 감금(?)당하다시피 생활하다 보니, 굳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심심하거나 무료해서 책을 구매했다고 하더라도, 책은 아직 우리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가까이하는 대상이다. 그러니 책을 쓰는 사람도, 그 책을 발견해서 출판으로 이으려는 사람도, 세상에 내놓으려 열심히 인쇄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우리 곁에 존재해야 한다. 책을 중심으로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프로의 자부심이 그대로 느껴진다. 책을 읽는다고 우리 삶이 갑자기 바뀌지 않겠지만, 우리가 책으로 얻는 무언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안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의 여행이든, 타인과의 소통이든, 지식이든, 무언가는 각자 다르겠지. 상관없다. 각자의 가슴에서 원하는 책을 만날 수 있다면야, 그 어떤 책이든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니까 말이다.


책과 사람은 일대일로 만난다.

독자는 설사 재미없네하며 던져 버리는 책에서도 뭔가를 건진다. 때로는 한 권의 책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여 인생을 바꿔 놓기도 한다.

책은 그런 것이다. (62페이지)


잉크 냄새를 사랑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책이다. 책이 더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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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인문학 - 슈퍼리치의 서재에서 찾아낸 부자의 길
브라운스톤 지음 / 오픈마인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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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서 발견한 부의 원리를 성공적인 투자로 연결한 이의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성공 역시 오랜 공부와 실전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역사 속 살아있는 경제학을 자기의 방식으로 활용하는 노하우와 지혜로 모두 성공에 이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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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오쓰카 이치오 그림, 고향옥 옮김 / 베틀북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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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아이가 숲을 걷다가 발견한 빨간 모자. 이게 모자인가 싶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모자를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 쿠나의 것이라는 걸. 쿠나는 숲속에 사는 난쟁이인데, 북쪽에 살다가 남쪽으로 내려왔단다. 그러니까 우리 근처에서도 어쩌면 쿠나를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 도대체 쿠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쿠나를 알려줄 수 있는 조그맣고 삼각형 모양의 빨간 모자뿐이라고 생각했어. 쿠나의 목소리는 찌르 찌르 찌르라고 들리는데, 혹시라도 어딘가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면 꼭 한번 뒤를 돌아봐봐. 쿠나가 바로 뒤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어디선가 찌르 찌르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


작지만 어엿한 요정인 쿠나. 다친 곳을 치료해 주고, 일도 거들어주고. 가끔은 묘지에 나타나 죽은 사람도 만나게 해준대. 혹시 누군가 이 세상에서 먼저 떠난 사람 중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럼 쿠나에게 부탁해봐. 간절한 그 마음을 쿠나가 알고 만나게 해줄지도 몰라. , 상상만 해도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보고 싶은 사람도 만나게 해준다니,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 요정 쿠나를 꼭 한번은 만나고 싶은 이유가 여기 있었네. 내 마음속 간절하게 만나고 싶은 사람 떠올릴 때마다 쿠나가 저절로 생각날 것 같아.



주인공은 부모님 몰래 방안에 쿠나의 공간까지 만들어놓고 쿠나를 기다려. 그리고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지. 쿠나에게는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다고.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많다고 말이지. 들은 말이 많아질 때마다 더 궁금해진다. 쿠나를 어떻게 만날 수 있지? 사실 쿠나는 겁을 먹고 숲에서 잘 나오지 못하는데, 그건 쿠나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 때문이야. 마을에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무서운 것이 많대. 그게 뭘까. 근데 생각해보면, 눈에 보이는 것도 무서운 게 많잖아. 그러니 우리는 못 보는 걸 보는 쿠나에게는 얼마나 더 많이 보일까 싶기도 해. 그래도 용기를 내서 쿠나가 숲에서 내려왔으면 좋겠다. 무섭고 두려운 것 말고, 이곳에 즐겁고 행복한 일도 많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런 책을 썼다고?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했는데, 다 읽고 보니 딱 감독의 분위기와 맞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은은하게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이야기, 작은 요정 쿠나가 지금 숲속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러다가 곧 마을로 내려와 아이의 눈에 보이게 되겠지? 사실 쿠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가 생각하는 쿠나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테지만, 여전히 쿠나의 존재를 믿고 기다리고 있겠지. 쿠나가 보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중에는 무서운 것 말고, 두려움을 이겨내는 희망도 있을 테다. 잘 될 거라는, 어려워도 이겨낼 거라는 믿음 같은 주문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 같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잊고 지내기 쉬운데, 사실 그 잊힘은 아직 완전하지 않아서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실에서는 없을, 하지만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상상 같은 이야기에 마음을 얹어놓아도 좋을 것만 같다. 보이지 않지만, 가슴속에 항상 머물러 있던 그 믿음과 기대의 한 자락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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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아이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 내로라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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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겪는 상실이라고 여겼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겪는 그런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닥치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안다. 받아들여야지. 감당해야지. 그런데도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마음의 문제가 그러하다. 머리로는, 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겠는데,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겁기만 하다. 감당하지 못해서 마음의 병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을 나눈 존재에게 더욱 그러하리라.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데이비드와 조세핀은 따스한 봄날에 결혼하고 세 번의 봄을 맞이했을 때 아들을 낳았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고 믿던 그때, 20개월을 함께한 아들이 부부의 곁을 떠났다.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모가 있더냐. 조세핀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일상이 무너진다. 마음이 무너진 것은 물론이고, 몸도 마음을 따라간다. 그런 아내를 보는 남편의 마음은 오죽할까. 어떻게 해야 아내가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전전긍긍한다. 조세핀이 자리에 누워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날을 이어갈 무렵,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내에게만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 저 멀리서 파도 소리처럼 엄마를 찾는 소리. 아내는 밤마다 간절한 그 울음소리를 쫓아 바닷가를 배회한다. 아이를 찾아서,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걷다가 들어온다.


따라갔는데, 따라잡을 수가 없는 거 있죠. 최선을 다했는데, 그렇게 서둘렀는데, 아주 약간만 더 가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말 그랬는데. 놓치고 말았어요. 그래서 돌아왔어요. 그렇지만 나, 최선을 다했어요. 정말로요. 그리고, 너무 힘이 드네요.” (꿈의 아이 33페이지)


남편이라고 아내의 마음을 모를까. 갑자기 떠난 아이가 마치 품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남편이라고 그 상실감을 모를 바 아닌데, 아내에게만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두렵기만 하다. 어디에서 오는 소리일까 궁금해하는 것도 사치였다. 소리를 따라 바닷가를 헤매는 아내를 찾아서 데려오는 일상이 이어진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태풍이 불어도 아내는 바닷가로 나가는 걸 멈추지 않는다.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아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아내를 지켜보라고, 곧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는 말로 남편을 위로하지만 답답하기만 하다. 남편이 할 일은 아내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아내는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바닷가를 헤매기 시작하고,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남편은 더욱더 아내에게 집중한다.


어쩌면 나 혼자서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만큼 강력하니까. 분명한 것은, 어떤 상황에도 아내를 어디론가 보내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가련한 아내의 행동을 제재하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손이 유일해야 했다. (49페이지)


아내가 절망에 빠지고 상실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남편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그 마음, 옆에서 아무리 위로하고 일상으로 돌아오길 바라도, 정작 당사자가 감당하는 슬픔의 무게는 아무도 모른다. 똑같은 경험을 하기 전까지 누구도 섣불리 이해한다고, 다 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조세핀과 데이비드에게는 아이를 잃었다는 공통의 슬픔이 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이 같을 거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내는 남편과 다르다고 여긴다. 낳고 젖을 먹이고 품 안에서 기른 마음을 따라올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 말도 맞지만, 슬픔에 빠진 아내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 남편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아내의 치료를 위해 다그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바닷가를 헤매는 아내가 다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켜보고 손잡아줄 뿐이다.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상대의 슬픔을 인정해주고 지켜보는 일이 이렇게 대단해 보이다니...


너무 간절해서, 아내를 낫게 해주고픈 남편의 바람이 신에게 닿기라도 한 걸까. 기적처럼 이 부부에게 꿈의 아이가 찾아온다. 그들의 아이가 떠난 자리에 딱 들어맞는 것처럼 채워질, 이 부부에게 다시 봄날의 따스함을 안겨줄 아이가 찾아온 거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기적이 아니고서는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여기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간절함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 부부가 미쳤다고, 태풍이 불어도 바닷가를 헤매던 것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이 부부에게는 오랜만에 다시 찾은 봄날이었다. 어쩌면 신이 남편의 사랑에 감동하여 이 부부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기적이 이런 사람들에게 찾아오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무엇이 되든 일단 따스함을 불어넣어 주자고, 설령 이게 하룻밤의 꿈으로 끝날지라도 지금은 이 기적을 누리게 해주자고 누가 빌기라도 한 것만 같다.


이야기니까, 상상하면 그대로 써질 소설이니까 가능했다고 단정할 수도 있다. <빨간 머리 앤>으로 유명한 루시 몽고메리가 경험한 상실을 바탕으로 써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저자의 성장과 닿아 있는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재혼으로 외조부에게 맡겨진 채로 자랐던 몽고메리. 이 정도 환경이면 외로웠을 거로 여기기 쉽지만, 정작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이야기의 세계에 빠졌다.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는 저자의 친구가 되었고, 그런 친구와 대화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되어 고아 아이를 유명한 작가로 만들었다. 물론 그 작가가 되기까지도 간단하진 않았지만, 저자에게 기적이 찾아온 거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빨간 머리 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놀랄지도 모르지만, 앤의 성장을 우리가 응원하고 지켜봤듯이, 조세핀과 데이비드 부부의 기쁨과 상실과 슬픔의 과정이 고스란히 들려오는 것 또한 많이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다. 깊은 고통을 마주하고 지내온 이들이 마지막에 만난 기적 같은 날은 잊을 수 없을 듯하다. 우리가 살면서 바라는, 힘들 때마다 찾아와주길 바라는 순간이었으니까 말이다.


꿈같은 이야기에 빠져있는 시간은 짧았다. 알다시피, ‘월간 내로라시리즈는 짧은 이야기다. 하지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짧은 이야기에 반해 여운에 빠져있는 시간은 길다는 것. 충분히 즐기고 여유 있게 곱씹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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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루나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 옛날 옛적 판교에서 + 책이 된 남자 + 신께서는 아이들 + 후루룩 쩝접 맛있는
서윤빈 외 지음 / 허블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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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부터 가작까지, SF를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보여준다. 취향이 아니라면 낯설 수도 있지만, 그 낯섦 속에서 취향 발견의 맛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다양한 소재로 미래를 즐기는 한국식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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