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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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작가, 익숙하지 않은 흐름이었다.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네 명의 시선으로 추리가 펼쳐지는데, 이게 참 웃기다. 같은 사건을 두고 각자의 생각을 얘기하다 보면 사건 해결에 다다를 것만 같다. 한 권의 책을 읽고 공감하고 공유하며, 내가 미처 다 알아채지 못한 행간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을 때, 이래서 독서 모임 해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 책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네 명의 추리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한 사람이 놓친 것을 다른 사람이 찾아내어 퍼즐을 꿰어맞추는 듯한. 게다가 사건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면서 그들이 감춘 속내가 슬슬 드러난다. 역시 인간이란, 자기 안위가 먼저가 아니겠는가.


특급호텔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의 사장 바이웨이둬가 사망한다. 총을 맞고 죽은 채로 산책로에서 발견되었다. CCTV도 다 확인했지만, 아무리 뒤져도 목격자나 용의자를 추릴 수 없다. 밀실 살인인 걸까? 드나드는 사람도 없었고, 단서도 없다. 경찰이 출동하고 검찰까지 나섰지만, 사건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푸얼타이 교수, 뤄밍싱 경관, 거레이 변호사, 인텔 선생이 한 명씩 나서서 이 사건을 추리한다. 물론 처음부터 이 사건 해결을 위해 머리 맞대고 모인 건 아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호텔에 모인 네 사람이었다. 각자의 이유로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로 향했고, 어쩌다 보니 이 사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진짜 기가 막힌다는 생각과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완벽할 것 같지만 한 가지씩 모자라고, 뒤통수를 치고 있지만 동시에 당하기도 하는 이들의 활약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호텔 사장의 사망 사건을 추리하는 것도 벅찬데, 이어지는 또 다른 살인. 푸얼타이 교수가 범인으로 지목한, 호텔 조경을 담당하던 황아투가 호텔 사장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황아투가 호텔 사장을 죽인 게 아닌가? 아니면 이들의 뒤에서 누군가 한 사람씩 제거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 걸까? 푸얼타이 교수가 풀어낸 추리가 뭔가 부족하다 싶을 때 등장한 뤄밍싱 경관은 사실 또 다른 살인사건을 찾아온 거였다. 그가 현재 경찰도 아니었으니 이 사건에 뛰어들 이유는 없지만, 호텔 사장 살인사건과 뭔가 연결된 것만 같다. 그렇게 사건을 지켜보던 뤄밍싱 경관은 푸얼타이 교수의 추리를 살짝 비틀고 그만의 추리를 내놓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거레이 변호사의 추리. 뤄밍싱과 거레이의 관계는 이혼한 부부였다. 죽은 호텔 사장 아내가 거레이와 친구였고, 호텔의 파티에 초대됐던 거레이는 이 사건을 모두 지켜본 이다. 그러면서도 푸얼타이 교수나 뤄밍싱이 보지 못한 또 다른 장면을 본 근거로 그녀만의 추리를 완성해간다. 이렇게 그들의 추리는 완벽해질 수 있을까?


각자의 자리에서 완벽한 추리를 하는 것 같은데, 막상 듣고 보면 마지막이 좀 모자라다. 그게 아쉽거나 미완성의 추리소설 같은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족함이 이 책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게 아이러니. 그들 모두 자기가 본 그대로 말하고, 그 근거로 이 살인사건을 풀어가려고 애쓰는데, 그들이 하는 말이 모두 다르다는 게 재밌다. 앞서 세 사람이 꺼내놓은 추리는 나름 완벽(?)했고, 조금씩 이 사건이 풀리는 건 같았다. 그런데도 모자란 하나가 뭘까 궁금하던 차에 등장한 인텔 선생. 한때 이름을 날리던 괴도 인텔 선생은 부유층을 주로 털었다. 경찰이 그를 잡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어느 날 그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게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런 인물을 거레이 변호사가 불러냈으니, 그 이름 인텔 선생은 이 호텔 살인사건에서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궁금할 테지.


이쯤 되니 예상되지 않는가? 호텔 사장 바이웨이둬의 사망으로 시작된 사건이지만, 그동안 각자가 수면 아래로 묻어놓았던 사실과 감정들이 하나씩 올라오는 게 기대된다. 가려진 정체와 진실, 숨겨진 관계와 고통, 혼자 음흉하게 계획한 미래의 일들까지. 네 명의 추리가 끝났을 때는 더 깊게 감춰둔 진실이 결국, 드러나게 된다. 어쨌든 추리소설의 재미와 결말이 사건 해결을 보는 거라면 이 소설은 성공한 셈이다. 그 성공이 너무 진지하지 않아서 독자의 눈길을 끈다. 결말 역시 상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끌어냈다. 골 때리고 뭔가 모자란 듯한 인물들 때문에 그 재미가 더해졌다는 건 안 비밀. 그들이 풀어낸 추리에 하나씩 더해져서 다음 인물이 다시 풀어내고 있기에, 챕터 하나씩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이 사건을 보고 있는지 더 궁금하게 한다. 코믹 액션 영화 한 편 본 기분이다.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기 마련이다. 거레이 변호사가 뤄밍싱과 이혼한 과정이나, 네 명의 인물이 각자 본 것을 근거로 추리하는 것이나 비슷했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가끔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조금은 생각해보는 것도, 다른 이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유쾌한 추리소설 한 편으로 마주한 진실 찾기가 볼만했다. 그나저나 다음번에 푸얼타이 교수 한 번 더 봤으면 좋겠다. 새를 미치게 사랑하는 이 교수 매력 쩔어. ㅎㅎ



#그랜드캉티뉴쓰호텔 #리보칭 #비채 #추리소설 #미스터리 #탐정

#대만소설 #소설 #문학 ##책추천 #도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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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4-07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재밌어 보이네요.
저도 기억했다 봐야겠습니다.
저는 어제부터 <그 해 우리는>이란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비슷한 형식 같기도 하네요.
로맨틱 코미딘데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을 나래이션 부분에 나오는데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공감이 가더군요.^^

구단씨 2022-04-23 14:25   좋아요 0 | URL
약간 코믹(?)스럽기도 하고요.
한 사람의 추리가 끝날 때마다 반전이 등장하는데, 재밌더라고요. ^^
 
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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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아침 풍경에 드리운, 피가 낭자한 칼 한 자루가 눈에 선하다. 내 눈은 문장으로 칼끝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한 남자의 손에 일본도가 들려있었고, 그가 입은 셔츠는 붉고 눈은 빨갰다. 그날 그의 칼에 사망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잔인한 사건에 사람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중에 아이를 안고 있던 젊은 부부 중 남편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훗날 이날의 장면은 어떻게 기록되었을지 궁금하기만 했다.


매년 칠석이 다가올 무렵, 나팔꽃 시장이 열리는 다이토 구 이리야. 부모님이 반드시 치러야 할 행사처럼 매년 나팔꽃 시장을 찾는 게 불만이었던 소타는 우연히 유카타 차림의 다카미를 만난다. 같은 학년에 같은 이유로 나팔꽃 시장을 찾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두 아이는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가끔 만난다. 이 설렘이 첫사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카미에게 빠져있던 소타는 아버지의 검열에 걸려 다카미와 이별한다. 사실 아버지에게 걸렸어도 소타는 다카미를 계속 만날 생각이었지만, 이상하게 다카미가 아버지보다 더 단칼에 소타를 잘라낸다. 이유가 뭐지?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소타는 집안의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며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한다.


소설은 세월이 흘러 이십 대를 살아가는 소타를 비춘다. 그리고 한때 수영선수였던 리노의 등장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리노의 할아버지가 타살되면서 등장한 형사 하야세와 그가 맡은 노인 살인 사건은 소타와 리노, 하야세 세 사람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어떻게 하나로 연결될까 궁금했다. 꽃을 키우며 사는 게 노년의 낙이었던 리노의 할아버지 죽음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과거 소년과 소녀가 만났던 나팔꽃 시장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서 이 살인 사건과 만나게 될까. 모든 것은 리노의 할아버지가 살짝 보여준 노란 나팔꽃 때문이었다. 우연히 꽃 피운 노란 나팔꽃이 놀라워서 리노에게만 보여준 할아버지. 이 신기한 꽃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도 좋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비밀에 두라고 말한다. 그리고 노랗게 꽃피운 나팔꽃 화분이 사라졌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이 노란 나팔꽃 때문일까? 이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도 찾을 수 없던 리노는 소타와 손을 잡고 이 사건을 추적한다. 물론 이들은 형사가 아니다. 형사 하야세는 그만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쫓고, 그 과정에서 여러 인물이 다시 등장하면서 오십여 년 전 일어났던 MM 사건과 맞물려 새로운 단서를 쏟아낸다.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궁금증은 나팔꽃이 노란색이 없었나 하는 거였다. 나팔꽃을 자주 보지도 못했지만, 꽃잎이 무슨 색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에도 시대에 존재했다는 이 꽃이 왜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지. 자연스럽게 퇴화하여 인간 지구에서 사라진 식물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이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건 자연스러운 소멸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 세상에서 사라진 꽃이라는 거다.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굳이 인간의 손으로 멸종시켜야 했다면 그 이유도 있을 터. 한 노인의 사망으로 확인하는 식물의 양면성이었다. 그동안 들어왔던 의학 이야기에서, 원래 독은 약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독을 적당히 쓰면 약이 되고 과하게 쓰면 그대로 독이 된다고. 오래전에 사라진 노란 나팔꽃의 존재도 비슷했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꽃, 하지만 그 씨앗은 새로운 꽃을 피우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약물로는 사용하면 안 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라진 꽃을, 씨앗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몽환(夢幻)의 꽃이라는 의미일세. 그 뒤를 쫓으면 자기가 멸하고 만다고, 그렇게 얘기했어.” (210페이지)


얼핏 이해가 되기도 할 것 같다. 몽환화. 말 그대로 꿈과 환상을 좇게 하는 꽃이 되겠지. 그 꽃을 쫓다 보면 자기가 멸한다는 경고를 깊게 새기지 않은 이의 잘못을 죽음으로 확인한다. 하지만 묻고 싶다. 자기가 멸한다는 경고를 듣고서도 그 꽃을 쫓을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간절함을 아예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두 주인공 소타와 리노를 보면서 어쩌면 인간은 자기 앞에 닥친 절망과 포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더 간절해지지 않을까 싶다. 원자력공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대지진과 탈원전 방향을 겪으면서 더는 자신의 공부가 의미 없다고 여기는 소타와 더는 수영을 할 수 없다고 여기며 겁에 질려 있는 리노는 미래를 고민하는 청년이다. 고민한다는 건, 현재 상황을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고 싶기에 하는 일이다. 동시에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타가 그동안 해온 공부를 그만둔다고 해서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건 아닐 테다. 리노 역시 오랜 세월 자신의 업이라고 여긴 수영을 다시는 못할지도 모른다는 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까. 더 나은 실력으로 현재의 모습을 발전시키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니 이 청년들이 공부든 수영이든, 미래를 생각하면서 고민하는 건 당연하다.


리노 할아버지의 죽음을 중심으로 소타 가족의 비밀을 파헤치면서 이야기는 완성된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의 오랜 노력을 엿보면서, 현재까지 대대로 이어진 그들의 임무를 생각해본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애써왔을까. 그 노력의 결실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내일의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할지. 무엇보다 주인공 두 사람이 고민하던 오늘의 문제가 긍정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 다행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 장래의 문제를 의외의 방향에서 접근하는 느낌도 있다. 작가가 들려주는 미스터리한 이야기에서 인간의 많은 고민이 들려와서 좋았다. 천재적으로 열정을 불태우고 싶은, 아름다운 꽃을 개발하는 기쁨, 오랜 세월 달려온 인생의 변화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고민이 하나의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에 다 녹아있다. 그 결말까지 만족스러워서, 마치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 아니라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작가의 많은 작품이 그랬듯이,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다독이는 것 역시 놓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인간의 도리라고 말해도 좋을, 그들이 찾은 빚이라는 유산을 앞으로 어떻게 청산해갈지 기대된다.



#몽환화 #히가시노게이고 #비채 #일본소설 #추리소설 #미스터리소설

##책추천 #문학 #리뷰 #노란나팔꽃 #빚이라는유산 #인간의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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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 Vol.1 - 인류의 탄생 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 1
다니엘 카사나브 그림, 김명주 옮김, 유발 하라리 원작, 다비드 반데르묄렝 각색 / 김영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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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못한 사실로 기억할 1권이 될 것 같다. 사피엔스의 등장은 대륙의 토착민과 동물의 멸종을 불러왔다. (이건 신대륙 발견으로 원주민이 당했던 일과 흡사하군) 사피엔스의 협력은 대륙을 정복해가는 굉장한 수단(?)이 된다. 더 적게 노동하고 더 건강하게 살았던 시절을 경험하고 싶구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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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5
헤르만 헤세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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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방법은 많겠지만, 선과 악 그 사이에서 서성이다가 어느 길로 가는지 알 수 없어서 방황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우고,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며 태어난다. 얼마나 많이 깨뜨려야 완전한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 노력의 끝이 없다는 말인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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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의 직원은 당연히 여성이어야 한다는 건 무슨 선입견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콜센터에 전화하면 남성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상하게도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한 마디면 될 것을 여러 번 물을 때마다 왜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지 짜증이 났다. , 이래서 고객센터는 여성이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더랬다. 이런 오류는 여성인 내가 여성의 감정노동을 말이 통한다는 이유로 가볍게 생각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콜센터 상담원에 관한 이야기를 이 책으로 처음 만난 것도 아닌데, 이 책이 유독 더 깊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순히 감정노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흡연에서 접근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악질 진상에 감정이 병들어가는 존재이기에 앞서 콜센터 근무환경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그동안에는 잘 몰랐던, 그저 감정노동자로 알았던 콜센터 상담원이 겪는 열악한 근무환경을 이 기회로 듣게 되었다.


구로공단의 공순이가 콜순이가 되기까지의 세월은 어떻게 흘러왔나. 가성비 높은 인력이었던 거다.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 가능한 대상, 여성이었다. 구로공단의 여성 노동자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골에서 입 하나 덜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어린 여성은 공단의 노동자가 되어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은 미미하게 자기 위안으로 삼는 데 쓰기도 했고, 고향의 가족에게 보내기도 했다. 대부분 집에 돈을 보내기 위해 일했던 경우가 많을 테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가정에 조금이라도 보내기 위해 일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처지에서, 배운 게 없어서, 남대문 시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공장의 생산 라인에 섰다. 그렇게 일하면서 폐가 망가져도 누가 치료해주지 않았다. 여성으로 태어나서 집안에서부터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살아온 생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구로공단의 공순이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콜순이로 변모하며 그 자리를 지킨다.


어느 순간 업체들은 콜센터가 필요했고, 대부분 하청에 콜센터를 유지하다 보니, 콜센터 상담원의 노동력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특별한 교육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되는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로 통했다. 그렇게 인식하다 보니 걸려오는 전화의 감정노동에, 일하는 시간에 비하면 임금은 턱없이 낮았고, 그마저도 비정규직 신세였다. 그런데도 일을 놓을 수가 없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쌓인 피로와 한숨은 담배 연기로 쏟아내고 있었다. 모든 상담원이 흡연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콜센터 상담원의 흡연율이 높은 이유를 저자는 주시했다. 왜 그녀들은 몸에 좋지도 않은 담배를 놓지 못하는가. 그건 고객에게 받는 감정의 피폐함뿐만 아니라 업체의 분위기도 한몫한다.


한숨들의 무덤!’

콜센터에 비치된 재떨이를 보고 어느 상담사가 한 말이다. 상담 중에는 한숨 소리조차 고객에게 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 꾹꾹 눌러둔 뒤 흡연실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비로소 그 한숨을 내뿜는다. 과연 이런 제한된 한숨만이 보장되는 곳을 천국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콜센터 밖 세상이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하기에 겨우 흡연할 권리가 이렇게 큰 보상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입니다, 고객님 91페이지)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전화 받고 클레임을 처리하면 되는 단순 노동이 아니었다. 콜센터는 고객의 전화 이전에 업체의 횡포와 관리자의 지독한 채찍질이 있었다. 콜 수가 곧 돈이 되는 상황이었고, 누구보다 콜을 많이 받는 상담원이 인기가 있었다. 그중에 경주마(콜 수 많이 받는 누군가)를 키워 다른 상담원에게 자극이 되게 만들기도 한다. 처음 경주마가 된 상담원은 능력을 인정받는 것 같으면서 수입에서도 차이가 조금 생기다 보니 기분도 좋았을 테다. 하지만 그게 곧 자신을 병들게 하고 다른 상담원과의 경쟁을 부추기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콜 수 많이 받으려고 팀장에게 빵이며 간식 셔틀을 하는 것도 불사한다. 좋은 거래가 될 고객 정보를 받는 상담원은 상담을 성사시키면서 점수를 높게 받는다. 성사율 높은 고객의 정보를 받는 것조차 경쟁이다. 팀장에게 잘 보여야 하고, 그렇게 받은 고객 정보를 성사시킴으로써 또 한 번 능력을 인정받는 게 되는, 이상한 쳇바퀴가 돈다.


공순이가 콜순이가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변한 게 없다. 낮은 임금,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열악한 근무환경, 그로 인해 높아지는 흡연율은 반복된다. 상담하다 지치면 휴게실에 가서 담배를 피우는 이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내뱉지 못한 한숨을 담배 연기로 쏟아내느냐, 아니면 휴게실 테라스 아래로 뛰어내리느냐 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흡연이 몸에 좋을 리 없다. 그런데도 멈출 수 없는 이유도 분명히 있다. 이 정도면 일의 강도나 콜센터 환경의 문제를 찾아야 하는데, 이 와중에도 상담사는 여성의 몸이라는 이유로 자궁을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취급되며, ‘아이를 낳아야 하는대상으로 몸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니까, 고객의 진상 짓에도 한숨은 삼켜야 하며(이로 인해 화병은 생기고), 한숨의 배출구로 흡연을 선택해도 여성의 몸을 지키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된다. 여성이 아니라 노동을 위한 몸으로만 여겨지며, 흡연은 개인이 지키지 못한 도덕으로 판단된다는 게 아이러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콜센터 상담원의 흡연에서 시작해 콜센터 내의 문제 안으로 들어간다. 민간기업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의 고객센터를 생각해보면, 콜센터의 수요와 공급은 어마어마하다. 업주나 팀장의 횡포는 민간기업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공공기관의 콜센터 역시 상담원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어차피 하청이고, 노동의 강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민원인에게 해결해주지 못하는 문제를 상담원은 본사 직원에게 연결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 상담원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간주한다. 능력 부족으로, 평가 점수 감점으로 말이다. 콜 수, 민원 상담 해결 횟수, 고객과의 한마디에 매겨지는 점수, 화장실에 가는 시간마저 감시당하는 이들이 어떻게 일해왔는지 기가 막힐 지경이다. 상담원들 사이의 경쟁 역시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이들이 병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감정노동을 하는 이들이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동료이기에 앞서 경쟁자였고 무자비한 상사였고 회사였다.


디지털단지 안에서 콜센터 상담사들은 과거의 여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닭장과도 같은 공간에서 감시를 받으며 몸을 통제당하고, 고객의 갑질은 물론 팀장, 매니저들의 횡포와 동료들 간의 따돌림 등 여러 문제가 겹겹이 쌓여 있다. (사람입니다, 고객님 180페이지)


콜센터의 열악한 환경은 코로나 19로 수면 위로 드러난다. 집단 감염으로 콜센터 근무환경이 언급되기 시작했고, 닭장 같은 구조로 그들이 작은 칸막이 안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알려진다. 사실 코로나 19 때문이 아니더라고 콜센터 내부 구조는 이미 알려져 있었다. 깔끔한 사무실, 정해진 자기 자리, 그 안에서 상담하고 있는 모습이 뭔가 전문적이고 단정해 보이기도 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보여준 사건이 된 거다. 코로나 19는 이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들의 일을 가중하는 계기가 된다. 비대면 민원 상담으로 업무가 늘기도 했고, ·오프라인 상담원의 감염으로 근무하는 이들의 일이 늘었다. 갈수록 비대면 상담은 늘겠지만, 상담원을 힘들게 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원하청 계약의 문제와 낮은 임금, 악성 민원의 대처를 위한 보호 방법은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관리자들은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상담원들은 그들이 던지는 문제를 고스란히 감당하면서 오늘도 헤드셋을 쓰고 보이지 않는 상대를 마주하고 있다.



저자는 영국과 인도의 콜센터 상황을 들려주면서 한국의 콜센터와 얼마나 비슷하고 다른지 말한다. 콜 수에 민감하고 화장실조차 제대로 갈 수 없는 상황은 영국과 비슷했다. 영국은 점점 외주 업체를 이용하듯 인도의 콜센터를 이용한다. 의외로 인도의 콜센터는 여성 상담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건 아니었다. 고위 학력의 사람들이 상담사로 일하기도 한다. 하지만 업무나 처우는 비슷했다. 이들 역시 내용은 달라도 차별을 겪고 있으며 하청 노동자였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나라의 콜센터 상담원을 콜키퍼라고 칭한다. 시대가 변하고 여성의 인권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성은 집안에서 남편이나 아버지가 정한 규정대로 살아왔던 시대와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때의 여성이 집안을 돌보는 하우스키퍼였다면, 콜센터 상담원은 콜키퍼로 업무 변경을 한 것 같다. 가정의 남자의 지시에 따르고 소속된 것처럼 살아왔다면, 콜센터에서는 팀장이나 다른 상사의 감시와 차별, 악성 고객에 시달리며 일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닮았다는 거다.


그래도 조금씩 달라지려는 노력에 이들이 오늘도 버티는 게 아닐까 싶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그들의 노동환경을 변화시키려 한다. 몸펴기 생활운동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 굳어진 몸을 풀 시간을 만든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변화였다. 근무환경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일을 계속해야 하고, 이제 우리 사회의 필수가 된 콜센터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일할 수도 있는 공간이다. 여기에서 변화의 노력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경제적인 이유로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이 일에 만족감과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저자의 이 취재가 콜센터 상담원을 보는 뿌리 깊은 편견과 열악한 근무환경을 변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책을 읽은 나부터도 말도 안 되는 선입견에 빠져있던 걸 반성하게 된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존중하고, 그들이 하는 죄송합니다한 마디가 절대 당연하지 않았으며, 나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대화로 여겨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요즘 내가 하는 일과 많이 닮아서 그런지 많이 공감하면서 읽게 되는 주제였다. 감정노동이면서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힘든지 알게 된 날들이다. 남편은 사람 꼴 보기 싫어하는 내가 하루에도 몇백 명을 상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놀라울 지경이라고 말한다. 웬만한 진상은 놀랍지도 않다고 여겼는데, 한 번씩 겪을 때마다 단련이 되었다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건 막을 수가 없다. 놀라운 건, 진상들은 매일 업그레이드하여 찾아온다는 것. 여러 현장에서 벌어지는 감정싸움의 승자는 언제나 고객이다. 그럴 때 나를 보호해주는 배경이 없다면 더 힘들 것 같다. 콜센터 상담원의 상사나 회사나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할 때 얼마나 좌절하고 고통스러운지 듣고 보니, 이들의 인권과 노동환경 개선의 필요에 더 관심 두게 된다. 그들이 노력하는 만큼, 개선을 위해 뛰는 만큼 결실이 보이길 바란다. 많은 이의 관심 역시 그 노력에 힘을 보내는 일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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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4-09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구단씨 2022-04-23 14:0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날씨가 너무 좋은 주말이네요.

이하라 2022-04-09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2-04-23 14: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 책 너무 생생하게 듣고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추천해요.

새파랑 2022-04-09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을 진심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2-04-23 14: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책 만난 귀한 시간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