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노보노 시리즈를 두 편 정도 읽은 게 전부다. 그 정도만으로도 이 만화의 분위기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지만, 그걸 알면서도 꾸준히 보고 싶은 만화이기도 하다. 특이 이번 베스트 컬렉션은 '베스트'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녀석들의 모험 같은 일상이 재밌고 감동으로 다가온다. 얘네들 원래 이랬나 싶게 각 캐릭터를 좀 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한꺼번에 모아놓고 보니, 그 특징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각자 해결하는 자세가 다르다. 각자의 개성이 더 묻어난다고 해야 할까. 그만큼 매력이 달라서 다가오는 색이 다르기 때문에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무엇보다, 이 녀석들의 일상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이 우리와 너무 닮았다는 거다. '어라? 이거 나도 궁금했는데, 왜 그런 걸까? 어떻게 해야 하지?' 싶은 문제들을 풀어가는 방식이 가슴으로 한 번에 들어온다. 때로는 고민도 해야 하지만,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 대부분은 의외로 쉬운 답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보노보노의 엉뚱함은 그가 하는 고민에 그대로 드러난다. 아빠의 보물창고에 새긴 구멍 때문에 사라진 귀한 것들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발을 동동 구른다. 너부리, 포로리와 머리 맞대고 고민하지만 찾을 방법이 없다. 여기저기 다 뒤져봐도 마찬가지. 길을 떠난 아빠가 돌아올 때는 다 되었고, 사라진 아빠의 보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러다 누군가의 한 마디에 귀가 번쩍 뜨인다. "혹시 아빠가 길을 떠날 때 그 보물들을 가지고 간 건 아닐까?" 그러네.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처음부터 아빠의 보물창고에 생긴 구멍으로 사라진 보물을 걱정할 게 아니라,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어봐도 좋았을 것을...

 

왜 우리는 아닐지도 모를 일에 걱정부터 하는 걸까 생각해보게 한다. 나처럼 작은 일 하나에도 마음을 계속 쓰고 고민하는 사람이 보면 좋은 안내서 같은 부분이었다. 보노보노가 아빠의 사라진 보물을 걱정할 때 누군가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말해주었다면, 아마도 보노보노는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아빠가 들고 간 게 아니었는지 묻고, 그게 아니라면 다 같이 찾아보면 되는 일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하는 걱정 대부분이 처음부터 할 필요 없는 고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일상적으로 뱉는 쉬운 말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는데, 이 녀석들이 아빠의 보물을 찾아다닌 시간을 보고 있자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언제 해도 해야 할 걱정이라면, 확인해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꼬리를 떼어버리겠다는 너부리의 다짐으로 궁금해졌다. 너부리의 꼬리는 정말 필요 없는 것일까? 처음부터 있던 꼬리의 쓰임새가 분명 있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꼬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붙어 있는 거겠지. 그런데도 너부리는 그 꼬리가 거추장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은가 보다. 떼어버리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 떼어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도 그렇고, 웬만한 다짐은 아닌 듯하다. 꼬리가 없어도 죽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이참에 확 떼어버리고, 예쁜 너부리로 거듭나고 싶었나... 포로리와 보노보노는 너부리의 꼬리에 마음을 두고 너부리의 마음을 바꾸려고, 그동안 그 꼬리가 너부리의 몸에 붙어 있으면서 했던 활약(?)을 하나하나 짚어준다. 혹시나 너부리의 떼어낸 꼬리로 동물 친구들이 놀리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둥, 처음부터 한 몸이었으니 당연하다는 둥, 결론은 같다. 꼬리를 떼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 그때 현명하게 답을 준 족제비 아저씨가 너부리의 다짐을 바꿔놓았는데, 이상하게도 매일 거울을 보면서 내 얼굴을 품평했던 나 자신이 떠오르더라. '나이 먹으면서 눈이 자꾸 처지는데 어떻게 좀 해야 하나? 조금 더 예쁜 외모를 만들고 싶은데 좋은 방법 없을까?' 하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생각하던 것을 고민해본다. 떼어내도 죽지 않으니 거추장스러운 꼬리를 떼고 싶다던 너부리처럼, 조금 더 나아지고 싶은 외모를 만든다고 죽지 않으니까. 하지만 굳이 떼어내지 않아도 너부리인 것처럼, 지금보다 더 예쁜 외모가 아니어도 나인 것이라고. 목숨에 지장을 줄 문제가 아니라면, 이대로 사는 게 불편한 게 아니라면, 처음 주어진 상태로 오늘을 살아가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담아본다. 이대로도 나쁘지 않잖아?

 

 

꿈을 꾸는 이유를 궁금해하면서도 왜 꿈은 이상한 걸까 고민한다. 꿈이 이상한 건 현실이랑 구분하기 위해서라는 답을 내놓는 너부리의 말에 공감도 된다. 꿈은 그냥 꿈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래서일까. 현실에서 이루기 어려운 상황들이 꿈에 나타나는 걸 보면, 정말 현실과 구분하기 위해 꿈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꿈에서라도 간절한 바람을 이뤄보는 거, 잠깐이지만 행복해지는 순간이 될 것 같다. ^^

 

읽다 보면 이 녀석들이 모여서 일으키는 문제들만 보는 것 같다. 나쁘지 않게 웃음을 주면서 그들만의 엉뚱함을 뽐내는 것 같아서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에피소드에 이 만화가 더 가까이 다가온다. 걷는 게 좋은데 걷는 게 왜 좋을까 자문하는, 혼자 있다는 것을 외로움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보노보노의 모습에 사색적으로 된다. 심심하니까 걸을 수도 있고, 풍경을 보면서 걸으니까 좋고, 좋아하는 곳에 갈 수도 있으니까 걷는 게 좋다고 말하면서도, 아주 쿨하고 정확한 답을 내놓는다. 걷는 게 좋으니까 좋은 거라고. 걷는 순간에만 보이는 것들을 소환하면서 천천히 가는 순간의 미학을 담는다. 어떤 의미도 답도 더는 필요 없다는 듯 '좋아하는 것' 자체에 모든 의미가 있다는 거. 생각해보니 그러네.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잖아?! 좋으니까 좋은 거, 그 사람이 좋으니까 좋아하는 것. 같은 의미잖아. 좋은 건 그냥 좋은 대로 놔두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다. 흐뭇하게 마음에 두고 그냥 생각하면 되는 거였네.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이렇게 쉬웠는데, 왜 우리는 자주 그 쉬운 일을 어렵게 해야만 했던 것일까 되묻고 싶어진다. '외로움'이라는 화두, 계속 머릿속에 남을 질문이 되었다.

 

 

그렇게 포근해지는 답을 듣다가도,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꺼낸 이 녀석들을 보면 진지해진다. 혼자 있는 아빠의 모습이 외로워 보였던 보노보노의 고민에 동물 친구들의 답이 가지각색이지만, 다 맞더라. 원래 모두가 외로운 거라고 말하는 포로리는 모두 쓸쓸하니까 시시한 얘기라도 하고 싶은 거라고 말한다. 그렇게라도 외로움을 달래고 싶다는 말일까? 그러다가 듣게 된 홰내기의 말. '우리는 보통 누군가와 같이 있으니까 혼자 있으면 외로워 보이는 건 당연하다'고. 반대로 혼자 있다가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외로워 보이지 않는 걸까? 행복하기만 한 걸까? 홰내기의 말에 시선을 멈추고 한참 생각했다. 타인의 시선에 외로워 보인다는 말이지 외롭다는 건 아니지 않을까? 그 사람이 외로운지 아닌지 누가 정해주는 걸까 궁금하다. 그래서 자꾸만 사람들은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어 하고, 연애나 결혼으로 짝을 만들고 싶어 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이 녀석들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어느 순간 인생 철학을 말하는 것 같은 퀄리티가 되어 새겨진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마음이 힘든 하루에서, 보노보노와 친구들이 찾아내는 보물 같은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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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지 마... 제발...


윤태호의 로망스를 이제야 알고 구매하려 했더니 절판...
생각보다 중고 가격도 좀 쎄더라.
찾아보니 다행히도 도서관에 딱 두권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래된 책이다 보니 책 상태가 다 지지하더라는...
그나마 깨끗한 책으로 골라서 빌려왔는데,
한참 재밌게 읽고 있는데...
누가 이렇게 찢었어!!!!!
여덟쪽이나...
없으니까 사라진 페이지가 더 궁금해... ㅠㅠ
너무 재있는 이야기라 찢어간 거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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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3-11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의 책을 누가 감히 찢으셨나요!!!???^^

구단씨 2019-03-13 14:34   좋아요 1 | URL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ㅠㅠ
딱 한 챕터 찢어간 것 같은데, 없어지니까 그 부분 내용이 더 궁금합니다. ^^
 

 

휴대하기 편하고,

내용도 괜찮은 한국 문학 시리즈.

벌써 세번째 도서가 나왔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봄이 오려는 길목에서 만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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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흘렀다.

세상은 변했다.

이제는 시골 어디에도 친구들끼리 주머니를 털어 갈 색싯집 하나 없다.

달이 환한 마찻길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앞으로 또 30년이 흐르면?

마찻길이라는 말을 잊어버렸듯이 그때 가서 우리는 장터라는 말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장터의 모습을 기억해 내기 위해 이 사진집을 열심히 뒤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258페이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오늘 팔아야 할 물건을 싼 보자기를 버스에 싣고 오르느라 애쓰는 사람의 뒷모습 혹은 앞모습 말이다. 자기 몸보다 큰 짐을 버스에 올리느라 힘들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한 사람분의 차비를 내고 사람이 타야 할 자리에 자기 짐으로 영역을 차지하느라 운전기사의 눈치를 보면서 버스에 오르는 표정이 더 기억난다. 우리 집은 시내와 시골의 중간쯤(시내 쪽에 조금 더 가깝게)에 있다. 나갈 때는 시골에서 나오는 버스를, 들어갈 때는 시골로 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러니 이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게 된다. 아침에 나갈 때는 엄청나게 컸던 보따리가 오후에 들어갈 때는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들고 나간 물건을 다 팔았다는 거겠지. 아니면 들고 나간 물건을 팔았던 돈으로 다른 것을 사 오느라 다시 양손이 무거워지거나. 사람 사는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시내 반대 방향의, 우리 집 너머의 어디쯤을 가본 적도 거의 없다. 버스의 종점 이름이 쓰여 있어도 그게 어딘지 잘 모른다. 어렸을 적에는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친다는 게 두려움이었고, 지금은 그저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니 나오는 사람 들어가는 사람이 있겠지 하는 정도일 뿐이다. 가끔 보는 20세기의 흔적들 같은 느낌으로...

 

그런 내게도 그곳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궁금해질 때가 장날이다. 집 앞 시장 상가에는 평소에도 문을 열고 장사하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이곳에는 아직도 유명한 5일 장이 있다. 엄마는 지금도 고추나 마늘을 살 때면, 약초를 살 때도 그 재래시장에 간다. 요즘은 재래시장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그곳은 장터다. 참 정겹게 들린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곳, 세상 온갖 물건이 펼쳐져 있는 곳, 시골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유일하게 즐기는 외출이 아닐까 싶은 곳. 백화점과 대형 마트가 익숙하고, 24시간 문을 연 편의점에서 시간 구애받지 않고 필요한 물건 대부분을 구매할 수 있는 오늘을 떠올리면, 장터의 풍경은 상상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저자가 보여주는 사진이 아니었다면, 시인들의 기억 속 시간을 불러오는 게 아니었다면 공감은커녕 어디 별나라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시골에 살아서 불편한 게 많다고 투덜거릴 때가 많았는데, 막상 이런 공감이 가능하다는 것에는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백화점이나 마트가 장터의 업그레이드 버전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다르다. 같은 맥락으로 흐르고 있는 매매의 장소일 테지만, 분명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같지 않다. 보이지 않는 것이 채워지는 곳, 그곳이 장터다. 요즘의 편리한 구매 방식이 절대 채워줄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

 

시골의 오일장은 그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가 발생하고 생성되어 완성되는 곳이었다.

각 마을에서 수공업으로 만들어진 모든 물건들이 상품이 되어 팔려 나갔다.

짚으로 만든 망태나 짚신에서부터, 산에서 난 나물들과 강에서 잡힌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품들이 모여들었다.

농촌 마을의 모든 것들이 상품이 되어 세상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건강한 경제적 활동이었다. (122페이지)

 

갈담장(현재의 강진장)은 이 근방 사람들의 세상을 향한 출구였다.

갈담장에는 모든 것들이 다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정보가 모두 갈담장을 통해 동네마다 퍼져 갔다.

혼담이 오고가고, 무르익어 가는 곳도 그곳이었으며,

농사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도 그곳이었다.

정치에 대한 모든 정보도 그곳에서 밝혀지고 여론이 조성되었다.

갈담장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들끓는 장소였다. (79페이지)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장터 사진가, 두 명의 시인. 이들이 하나가 되어 들려주는 장터는 그 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리움이다. 엄마나 아빠 손을 잡고 나들이 가듯 따라가던 곳, 별다른 고명도 없이 멸치 육수로 끓여낸 잔치 국수 한 그릇의 기가 막히는 맛, 장사는 뒷전이고 끼리끼리 모여 화투판을 벌이기도 하는,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잔칫날 같다. 그러니까. 지금과는 다른 환경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었다는, 하나의 역사로 보면 이해가 될까? 놀이공원에 가고,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뷔페에서 여러 종류의 음식을 맛보고, 여건만 되면 국내든 해외든 다닐 수 있는, 문자나 전화 한 통에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이 되기 전에 있었던 삶의 방식이었다고 받아들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장날에 장터에나 가야 얼굴 보는 사람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소식들을 들으며 눈물과 웃음을 나누고, 장터 한쪽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윷놀이라도 즐기는 게 유일한 놀이이고 외출이었던 시절을 보게 되는 거였다. 그 시절의 장날, 장터는 사람들에게 온 세상을 모아놓은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을 사진가와 시인의 이야기로 새삼 다시 보게 된다.

 

 

 

그런 장터의 풍경이 이제는 사라져간다는 게 매우 아쉽다. 무형문화재처럼 장터도 하나의 역사와 기록으로 남길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 명맥을 이어갈 환경을 만든다는 게 쉬울 리도 없고 말이다. 누군가의 생계가 달린 문제이니 그냥 유지만 한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고... 그 옛날 우리에게 소통하고 교류하는 장소였던,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사고팔고 하던 그곳은 이제 생기를 잃고 시들어간다. 엄마 아빠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을 그곳은 이제 추억으로만 머물려고 한다. 그런 아쉬움을 채워주려는 듯 작가는 장터의 사진으로 그 시간을 공유한다.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 생기를 넣어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들이 그 시간 속에서 주고받았던 온기를 작가의 진심으로 채운다. 그들 각각의 사연이 이야기되어 들려온다. 장터의 바닥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 사람들, 소박한 국밥집에서 데이트(?)하는 듯한 노부부, 뻥튀기 계를 잠시 쉬면서 담배 한 대 물고 있는 아저씨, 늘어놓은 옷들 사이에서 물건을 고르는 아주머니...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흔적 그대로였다. 우리 엄마가 물건을 사러 가서 보인 행동일 것이고, 아버지가 사람들을 만나서 교류하던 순간이었을 테지.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가서 먹었던 1000원짜리 장터 짜장면의 맛이었다.

 

소박하다면 소박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넉넉하지 못한 시절의 흔적 같다. 부족한 게 더 많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사는 게 여유롭지 못하지만, 지금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의 생활환경이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부족함보다는 다른 것을 더 느끼면서 살아간 시절이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채워진 것들로 만족하고 웃으면서 지냈을 시절. 작가의 말처럼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많은 것이 우리를 채우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힘들다고, 외롭다고 말한다고 한다. 추위를 막아줄 집과 뜨뜻한 보일러 온기가 있고, 삼시 세끼 밥을 먹고 한겨울에도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구멍이 난 양말을 기워 신지 않아도 되는 세상인데 힘들고 외롭다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까지 한다고. 아침을 서울에서 먹고 점심을 일본에서 저녁을 중국에서 먹을 수 있는 세상인데도 외롭다고 말한다고... 작가는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이렇게 전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힘들고 외로운 이유는

신이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163페이지)

어쩌면,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도시의 삭막함 때문이 아닐까?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게 현관문 꼭꼭 닫고 사는 세상. 도시는 인간에게 육체적인 편리함을 주는 공간으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까지는 다독여주지 못한 공간으로 남아있는 건 아닐까 하고. 오래전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했던 시골의, 장날의 그 모습처럼 사람 사는 냄새가 북적거리던 세상이 사라져서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장터의 매매 형태가 00 상회라는 작은 구멍가게로, 00 상회가 슈퍼로, 슈퍼가 대형할인마트나 백화점으로 변화하면서 도시가 장터를 빼앗아가서, 흥정이 사라진 자리에 정찰제의 거래가 채워지는... 장날만 되면 보이던 세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괜히 뭉클해지기도 하고, 내 기억 속 희미한 흔적을 선명하게 다시 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사진가의 사진과 시인들이 들려주는 문장은 하나의 영상처럼 흐른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화려하고 예쁜 배우들이 출연하는 게 아닌, 손끝의 굳은살이 더 먼저 보이는 장터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어 흑백의 사진으로 기록되었다. 물건을 파는 사람 사는 사람, 국수 국물 한 국자 더 떠주며 마음도 덤으로 얹어주는 온기가 그대로 보인다. 이들의 모습이 내 기억에도 어렴풋이 남을 걸 보면 내 나이가 참 많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도 들지만, 이 책에 담긴 사진과 시인의 경험담이 낯설지 않게 들리는 걸 보면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박물관이나 역사관의 어디쯤에서 마주했다면, 설명해주는 몇 줄의 문장으로만 기억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네 살아온 시간의 한 부분을 그렇게 들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의 생생한 온도까지는 들을 수 없었을 것 같다. 다행인 건 사진가의 사진에 얹어진 시인의 이야기가 그 온도를 전하면서, 우리에게 건너오는 그 시간의 기록이 완전해졌다는 거다. 사진가가 포착한 순간에 시인의 추억이 보태어져 장날의 기록이 완벽해진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건너와서 또 하나의 기록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이 사진들에서는 누가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는 모습들,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삶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모습들이 발견된다. 작가는 사진을 위한 이미지를 채집하거나 포획하려 한다기보다는,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찰의 시선은 차갑고 냉정한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리라. (289페이지)

 

'옛것'과 '지금 것'은 항상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유리창의 안과 밖처럼 '옛것'과 '지금 것'의 이분법적 분할은 있을 수 없고 또한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옛것'의 따스한 온기와 '지금 것'의 현재성이 함께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울 수 있지 않겠는가. (318페이지, 사진가 이흥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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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설연휴동안 늘 평온하고 복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

구단씨 2019-02-07 23:38   좋아요 1 | URL
설 연휴 잘 지내셨나요? ^^
월요일 같은 목요일이었습니다.
하루만 더 지나면 맞이할 주말을 생각하면서
유쾌하게 지내세요~ ^^

재는재로 2019-02-0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좋은 시간 보내세요

구단씨 2019-02-07 23:39   좋아요 0 | URL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일교차 심하면서도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요즘입니다.
감기까지 오면 더 힘드실 텐데, 몸조심 하셔요.
 

골든아워 양장 합본

표지만 봐서는 무슨 고전 같은 느낌...
엄마가 유일하게 보시는 성경책 느낌도...
어울린다...

근데,
두권짜리 반양장 도서가
한권짜리 양장 합본으로 이제 나오면 우짜라고...

여기서 또 한번 느끼게 되는 게,
신간은 빨리 사면 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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