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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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떡하지?’

정말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영화 보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어 계속하던 것이, 영화 관람은 오랜 세월 나의 취미이자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영화 보기를 잠시나마 고민했던 적이 있다. 언제였던가, 기다리던 영화의 개봉 날짜를 기다리며 보러 가려고 계획했던 순간. 주연 배우의 스캔들이 터졌다. 그 배우의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한 개인의 사생활이려니 하면서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던 게 여러 번이었으니 뭐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도저히 못 들은 척하기가 어려운 스케일의 이야기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 영화를 볼까, 말까? 영화를 보면서 자꾸 그 스캔들이 배우의 얼굴에 겹쳐 보일 것 같아서 망설이다가, 결국은 보고야 말았다. 영화가 다 끝나고 상영관을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에이, 더럽게 연기 잘하네.’ 어쩔 수 없는 미움 앞에서도 배우의 연기를 훌륭했고, 캐릭터와 한 몸인 것처럼 보였으며, 영화도 재밌었다. 무엇 하나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도 그 배우를 떠올리면 지나간 시간의 모든 이야기가 생각날 것이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또 한 번 과거의 스캔들을 소환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믿고 보는 배우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제 그를 미워하면서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지 않는다. 미워할 때 미워하고, 영화는 영화로 본다. 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서 당황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궁금하다. 이 마음이 뭐란 말인가.

 

작가가 소설에 담아낸 벽수산장이 그랬다. 아름다운 건축물이지만, 적산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잊을 수 없게 하는 존재.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기억하게 하면서 아픔도 동시에 소환하는 그곳을 어떻게 해야 옳은 건지 언제나 고민하게 될 터였다. 한때 한양 아방궁이라 불렸던 벽수산장은 친일파 윤덕영이 3년여에 걸쳐 지었다. 친일파 중에서도 악명이 높았다고 하니, 그가 나라를 팔아서 번 돈으로 지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면적이 옥인동 일대의 거의 절반이라고 한다. 위치 또한 기가 막히고, 인왕산 중턱에 자리하며 경성을 내려다보는 프랑스식으로 호화로움까지 갖췄단다. 소설 속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상상해보는 순간에도 그려지는, 뻣뻣하게 목을 세우고 세상의 주인이고 중심인 것처럼 내려다보는 시선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해동이 윤원섭을 만나는 순간부터 솟아나던 그 갈증과 답답함을 문장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1966, 해방 후 20여 년이 지난 현재, 이십 대 청년 이해동은 언커크(유엔 산하 한국통일부흥위원회)에서 호주 대표 애커넌의 통역 비서로 일한다. 현재 벽수산장은 언커크의 사무실로 쓰인다. 어느 날 해동 앞에 나타난 윤원섭은 친일파 윤덕영의 막내딸로, 이제 막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했다. 그런 그녀가 애커넌을 만나러 벽수산장으로 돌아왔고, 그녀만 알던 벽수산장 비밀의 방을 보여주며 그곳의 신비로움을 피력한다. 마치 오래된 고성의 비밀의 방을 여는 것처럼, 누구도 몰랐지만 누구나 들어가 보고 싶은 공간으로 포장한다. 옛 주인은 자기만이 그 방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 벽수산장이 그냥 평범한 건물이 아니고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품고 있다고 말하며 그녀의 위치를 각인시킨다. 만약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었다면, 나는 이미 윤원섭의 모든 것을 알아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그곳에 발을 들인 순간, 벽수산장은 더는 언커크 사무실로 쓰이지 않을 것이며, 그녀가 돌아온 이유가 한 번에 보일 만큼 적나라했다. 그건 언커크 사무실로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들만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무언의 연대 같은 느낌일 것이다. 해동은 윤원섭의 말을 통역하면서도 구역질이 난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쩜 저렇게 뻔뻔하고 염치가 없을까. 밥벌이를 이어가자니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이것도 못 참고 뛰쳐나가자니 일상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이다. 해동의 갈등은 윤원섭과 함께하면서 계속된다.

 

윤 자작의 일족이 일본 지배 시절의 행적으로 비난받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의 대한민국과 그때의 조선은 다른 세상이 아닌가? 나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97페이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결정이나 판단이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인공 이해동의 갈등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친일파의 후손 윤원섭과 국제사회의 시선을 담은 애커넌의 말에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해동은 상사에게 윤원섭이 어떤 인물이고 그 가문이 대한민국에 저지른 죄를 말하지만, 애커넌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지금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윤원섭은 마치 그 시선을 이용하는 것처럼 당당하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은 과거 따위 무시하고 현재 벽수산장의 아름다움을 호소하며 문화적 가치를 앞세운다. 정말 그럴까? 지나간 시간의 일은 과거와 같이 묻어두고 현재의 것만 다루면 그만인 것일까? 해동의 혼란이 커질수록 독자의 마음도 같이 흔들린다. 무엇을 따라야 옳은 것인지 계속 고민해봐도 답을 알 수가 없다. 특히 해동의 마음은 더 복잡했으리라.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했지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발각되어 목숨을 잃은 아버지였다. 해동에게 고아라는 이름을 물려주게 했던 그 시절의 아픔은 친일파의 후손인 윤원섭에게도 책임이 있다. 단지 가해자의 후손이니까? 아니다. 피해자의 피와 눈물로 착취한 재산으로 배를 불리고 대대손손 그 부유함을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게 문제가 되는 거 아닐까? 해동이 윤원섭에게 느끼는 감정도 비슷할 거다. ‘당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들이 나를 고아로 만들었고, 성장하는 동안 힘들지 않은 순간이 없었는데, 당신은 왜 지금 이곳으로 돌아와 주인 행세를 하며 차지하려 드는가?’

 

해동의 혼란은 사무실로만 쓰던 벽수산장이 아니라, 알지 못했던 그곳의 곳곳을 들여다보면서 커진다. 섬세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의 면면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 순간, 그는 적산이라 부르며 혐오하던 그곳에 마음을 빼앗긴다. 동시에 적산이니까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마음도 커진다. 상처와 고통을 주면서도 바라보고 싶은 아름다움에 흔들리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부끄럽고 죄스러웠으며, 저택이 그곳에 뿌리내리듯 존재하는 이상 그가 느낀 아름다움 역시 사라지지 않을 거로 여겼다. 누군가에게는 적산이고 누군가에게는 유산이 되는 그곳의 존재는 곧 사라진다. 벽수산장에 불길이 치솟고, 몇 년 후 철거된다.

 

작가는, 윤덕영의 옛 별장 벽수산장이 한때 언커크에서 사무실로 사용했으며 화재로 소실되어 몇 년 후 철거되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소설의 내용 대부분은 허구라고 말했다. 많은 부분을 자료 조사가 바탕이 된 상상이라고. 그런데도 상상으로 그려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마도 우리 마음속에 그 시대의 아픔과 고통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과거이지만 지워지지 않고, 지워서도 안 되는 그 시간의 흔적이라고 말이다. 거기에 적산과 유산의 구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일도 끝나지 않았다. 친일파의 적산가옥으로 생활 좀 편해지고 싶어 하는 소시민의 마음과 친일파의 흔적이니 사라져야 한다는 마음의 갈등은 계속된다. 독립운동에 가담해서 일찍 죽은 아버지를 원망하는 고아 인생을 이해하면서도, 그 아버지의 장한 행동으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는 일. 해동이 윤원섭을 보고 느끼며 변화하는 과정이 그가 원망하듯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지는 않았을까. 불타는 벽수산장을 뒤로 하고 그 언덕을 걸어 내려가는 그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적산이 사라지는 것을 기뻐할 수도 없고,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할 수도 없는 마음을 안고 돌아가는 그 길에서 이제 그는 무엇을 향해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어쩌면 해동의 마음은 이 소설을 읽는, 우리의 과거 속에서 마주하는 비슷한 상황들에서 공감하는 마음이고 질문이겠지.

 

해동이 가진 것은 온통 미미한 것들뿐이었다. 아버지가 돼지막에 숨겼던 인쇄기, 생전에 고모가 쌓은 덕과 인정, 애커넌 씨와 개인 간 고용으로 만들어진 언커크의 일자리.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 먼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덕영은, 벽수산장은, 언커크는 얼마나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가. (중략)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들리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 지난 석 달 동안 그것의 질긴 생명력을 경험하면서 해동은 그것이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힘들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입장에서는 분하고 고까울지언정 그것이 아예 없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248~249페이지)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들로 기억될 갈등은 이분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분하고 화가 나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감정을 알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모든 상황과 인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겪어온 상황과 혼란, 여러 가지 마음을 안다고 말하고 싶다. 씻은 듯이 모든 감정을 없앨 수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 우리 역사 속에서 이런 순간과 공간이 또 얼마나 많을까 싶다. 작가의 말처럼, ‘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이야기지만, 자기의 가치관과 삶을 지키려고 나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을 함께 지켜보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사라짐과 지킴의 묘한 겨루기를 주관하는 힘을 고민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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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엄마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9
스즈키 루리카 지음, 이소담 옮김 / 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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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의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정상이란 기준이 존재한다.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어떤 환경에서도 마찬가지. 보통 부모와 자녀가 있는 가족을 정상이라고 한다면, 부모 중 한 명이 없거나 하는 상황은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게 비정상일까? 아주 어렸을 적의 나라면 불편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라면서 보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떠올려보면, 이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아니라 그냥 다름의 시선이었다. 누구나 같을 수 없는 형태,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가족의 개념도 변화한다. 있는 그대로 보면서 인정해주면 될 일이다.


작가는 전작에서도 그 다양한 시선과 다름을 인정하게 하는 이야기로 모녀의 일상을 보여주더니, 이번에는 그동안 돌아가신 줄로 알던 할머니의 등장으로 이 가족의 새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마치 연작소설처럼 「태양은 외톨이」, 「신이시여, 헬프」, 「오 마이 브라더」 세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청소년기를 지나는 하나미의 또 다른 일상을 보여준다.


「태양은 외톨이」는 집에서 자기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다가, 이런 가족도 있구나 싶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하나미. 그 집에서 나올 시기를 보면서 돈을 마련하겠다는 친구의 말에 하나미는 현실적이지 못한 일로 생각한다. 그러다가 하나미 모녀에게 돈 때문에 생긴 일을 보고 친구의 의견에 동조한다. 하교하고 돌아오던 어느 날, 하나미는 집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던 노인을 본다. 엄마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던 노인은 하나미의 할머니,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였다. 돌아가신 줄 알던 할머니가 갑자기 등장하고, 엄마와 할머니는 데면데면, 게다가 할머니는 못 받은 돈을 받으러 왔다는 뻔뻔함까지 발휘한다. 알고 보니 엄마가 매달 얼마씩 할머니에게 송금하고 있었던 것. 하나미의 중학교 입학 때문에 돈이 많이 들어서 할머니에게 돈을 보내지 못하자 냉큼 돈 받으러 오신 할머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엇보다 엄마와 할머니는 보통의 모녀 사이 같지가 않았다. 서로 모른 척 원망의 눈빛으로, 세상 나 혼자 산다는 느낌으로.


낯선 할머니의 등장으로 혼란스럽던 하나미는 엄마에게 과거 이야기를 조금씩 듣는다.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 엄마가 할머니를 왜 원망하는지, 할머니는 또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 많은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하나미가 엄마나 할머니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역사가 있고 사정이 있다. 할머니를 외면하고 살아왔던 엄마에게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고,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니, 원망도 미움도 애정도 다 제각각일 테다. 어쨌든 엄마는 할머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힘들다. 하나미는 돈만 있다면 할머니한테 드리고 나가라고 하면 될 것 같아서 친구와 함께 돈을 벌기 위한 계획을 한다. 그게 잘될까 싶다만...


하나미를 좋아했던 미카미의 이야기인 「신이시여, 헬프」는 집안에서 머물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해서 신학교로 진학한 그가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면서 시작된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이제 신밖에 없으며, 신과 함께 살아가는 게 행복이라고 믿는다. 그러다가 다시 마주친 하나미 때문에 그의 의지는 순간적이지만 흔들린다. 신만 바라보겠다던 그는 하나미를 다시 만난 이후로도 여전히 신과 함께일까.


이어지는 「오 마이 브라더」는 의외의 내용에 조금 놀랐다. 하나미의 초등학교 담임이었던 기도 선생님의 이야기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던 형이 어느 날 사라지고, 오랜 세월 동안 가족들은 사라진 형을 찾으러 다닌다. 처음처럼 적극적으로 다니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형을 찾고 있으며 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형이 사라진 것을 두고 그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떠올리고 파고든다. 차원을 건너 어딘가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사라졌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있다고, 어떻게 사라졌든 형이 다시 돌아올 거로 믿으며 패러렐 월드에 심취한다. 병행해서 존재하는 여러 세계,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에 똑같이 존재하는 우리를 상상한다. 그런 상상으로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 꿈꾸기도 하고, 여기에서 불행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삶을 저기에서는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가 저기에서는 연예인을 하고 있을지도.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한 반전은 놀라웠지만, 사라진 형 역시 자기만의 자리를 찾아간 건지도 모르겠다.


세 작품 모두 가족과 자리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하나미의 가족은 가난하고 항상 돈에 쪼들리지만 그들의 자리가 있다. 마음 편히 몸 뉘고 잠들 수 있는 곳. 가족이라고는 엄마뿐이지만, 부족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엄마는 훌륭했다. 열심히 일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 역시 엄마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하나미의 친구도 여전히 자기만의 자리를 찾으려고 애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채로 성장해갈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지금부터 고민하는 여학생의 고민이 안타깝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지금 이 자리가 나의 몫이 아니라면 내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한 노력을 누구라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여건상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하지 못해도, 그 언젠가를 위한 고민과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질 테지. 기도 선생님의 사라진 형 역시 그만의 자리를 오랫동안 찾아다녔을 것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혼자서 많이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얼핏 들어보면 중학생 하나미와 하나미 주변 사람들 각각의 사연 같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곰곰 생각하면 결국 가족의 이야기다. 어떤 가족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 그 가족 구성원 안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고 어떤 생각으로 머물고 있는지 말이다. 어른으로 향하는 시간에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고 글을 써냈을까 궁금하고 기대되는 작가가 바로 스즈키 루리카다. 가끔은 빨리 철든다는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부모의 고충과 집안 상황에 따라 때로는 포기하고 다른 가족을 배려하는 선택을 하기도 하는 일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조금 더 빨리 어른이 되어가는 걸 보는 것 같은 일들이 떠오른다. 그런 걸 보면 어쩌면 환경이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렇게 빨리 철드는 상황을 이해하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어서 말이다. 나머지 두 작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이다. 누구나 어떤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그 시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쌓아왔는지도 중요하다. 저마다의 상처일 수도 있지만, 그 상처를 안고 성장해가는 모습이 대견하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가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은, 거울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부모와 자식이라면 사이가 좋으면 좋겠고, 부모와 자식이라면 언젠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싶다. (108페이지, 태양은 외톨이)


끝나지 않을 고민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 같지만, 어떤 상처도 한 번에 쉽게 치유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거로도 충분하다. 여전히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어떤 일이 생겨도 살아갈 것이고, 또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삶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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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클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
강영숙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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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처럼 책을 읽고 그 기록을 남긴다. 단순한 내용 정리가 되기도 하고 너무 와 닿아서 내 감정과 이야기가 많이 섞이기도 한다. 책을 읽어온 시간이 길어지면서 소박한 바람은 점점 커졌다. 그저 후기를 남겨야겠다는 다짐은 후기를 잘 쓰고 싶다는 바람으로 남았다. 작가가 될 것도 아니면서, 책을 읽었다고 누가 후기를 남기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언젠가부터 그런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잘 쓴 글에 눈길이 가는 건 당연하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그대로 잘 표현되면 기분도 좋다. 어쩌면 책을 읽고 그 후기를 잘 쓰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잘 표현되었는지 하는 만족의 문제인 듯하다. 이 소설의 모녀, 계동의 글쓰기 모임의 사람들, 해컨색의 라이팅 클럽 사람들은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책을 쓰느냐 아니냐,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에 앞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영인의 엄마 '김 작가'는 작가 지망생이면서 동네 글쓰기 교실을 운영한다. 좀 거창하게 들리는 글쓰기 교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딸 영인이 보기에 그냥 동네 수다방이다. 그런데도 그곳에 모인 여성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내면서 세상 진지하다. 영인이라는 이름보다 화자인 '나'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계동의 이 글쓰기 교실에서 태어난 글들을 쓰레기로 여겼다. 기껏해야 남편과 아이들 이야기에 일상을 푸념하는 글로 채워진 문장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모임의 대표 격인 김 작가를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영인은 또래 아이들보다 좀 더 빨리 자란다. 김 작가는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엄마의 모습이 없는 엄마였기에 영인은 그에 대한 분노로 글쓰기에 치열해진다. 어린 나이부터 책을 손에 들고 뭔가 그럴싸하게 보일 이미지를 만들며, 정말 필요한 문장을 찾으려 계속 읽고 쓴다. 점점 그녀의 글쓰기는 분노의 쏟아냄은 물론이고 자기 삶에 화해하는 글쓰기에 이른다. 이는 그녀의 오랜 세월이 만든, 어찌 보면 치열하고 파란만장한 생을 거쳐 온 그녀만의 재산이 되는 과정 같다. 만년 작가 지망생인 엄마에게 대항하고자 진짜 작가가 되겠다며 열심히 써댄 그녀 노력의 결과 말이다. 이렇게 쓰는데, 안 써지면 안 되는 거지.


생각해 보면 나는 김 작가와 떨어져 살았던 어린 시절에도 쓰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혼자 놀기 위한 대본이 필요했던 것 같다.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등장인물, 혼자만의 날씨, 그래서, 그런데, 그랬거든, 그건 아니고 등으로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했었다. 이야기만이 시간을 이길 수 있었다. (257~258페이지)


참 특이한 소설이다. 처음에는 저렇게 자식을 방치하는 엄마가 있을까 싶다가도, 누군가 아이를 키우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작가가 되고 싶은 엄마의 갈증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싱글맘으로 아이를 키우는 일상과 본인의 미래가 불안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현재의 자기 삶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건 아닐까. 보통의 삶이라고 하기 어려운 김 작가의 현실은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더는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바랐을 글 쓰는 삶을 계동의 평범한 주부들과 이룬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쓰자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고, 생각만 하지 말고 일단 쓰라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모여 글을 쓰는 여성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저마다 옆구리에 노트 한 권 끼고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을 그려본다. 남편과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꾸리는 일상을 운명처럼 여긴 그녀들의 오늘이 무엇을 만들어낼지 기대되는 건 당연하다.


김 작가와 대조적이면서도 비슷하게 흐르는 영인의 인생은 또 어떠한가. 글쓰기가 전부라고 해도 좋을 이 모녀는 각자의 삶에 치열하다. 문인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는 것 같으면서도 계속 뭔가를 쓰는 김 작가, 아무 배경도 없고 부모의 사랑도 없이 세상에 소리치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하는 영인. 처음에는 읽는 것으로 가슴을 채우고 계속 쓰면서 분노를 잠재웠다면 점점 글쓰기의 욕심은 진짜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은 거였다. 영인의 글쓰기는 결국, 이 소설은 영인의 글쓰기 성장 과정이다. 영인이 작가가 되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글쓰기의 진짜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보는 것들, 그런 영인의 시선을 우리가 따라가면서 같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게 중요하다. 혹시 글쓰기는 경험으로 채워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경험한 게 많은 사람이 쓰고 싶은 게 많은 거로 여겼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하게 보고 겪는 사람이 아는 것도 많은 거 아니겠나. 보이는 게 많을수록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거로 생각한다. 그러니 영인의 경험은 쓸 수 있는 무궁무진하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성장이 글쓰기의 길을 열어준다. 동성애를 겪고, 외모와 환경에 주눅 들고, 무작정 고백하는 짝사랑에 거절당하는 게 쉬운 인생일 수 없다. 성인이 되었다고 그녀의 인생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친구의 죽음이나 사회생활, 이상하게 시작된 결혼과 이혼을 겪으며 내면의 경험까지 꽉꽉 채워간다. 영인은 그 모든 순간에 글을 썼다. 그녀가 처음부터 글쓰기의 의미를 찾았던 건 아니다. 삶이 혹독해질수록 글쓰기는 치열해졌고, 그렇게 자기와의 싸움처럼 이어진 글쓰기가 습관처럼, 당연한 일상처럼 된다. 이제는 무엇을 쓰는가 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 그 자체에 삶의 의미가 생긴 거다. 그렇다고 그녀가 글쓰기의 의미를 모른 채 아무거나 쓰지는 않는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작가 J의 가르침대로 묘사를 위한 관찰을 습득한다. 사람과 사물의 모습, 표정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들여다보는 시선을 가다듬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동안에는 관심 없고 몰랐던, 무시하기까지 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엄마인 김 작가의 인생에도 관심이 생긴다. 자기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무엇이든 써왔던 엄마,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로만 보였던 계동 글쓰기 교실 사람들의 이야기가 글이 되고 인생이 되는 거였다. 그들이 글을 쓰는 목표가 등단이나 출판이 아니라, 쓰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 문장에 담긴 삶을 보는 거라는 걸 이제야 안다. 보통의 사람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게 전부일지 모른다. 그냥 쓰고, 그냥 읽고, 소박한 서로의 문장 속 이야기를 듣는 것. 글쓰기의 즐거움,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그때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것,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탐구하는 것이 글을 쓰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공간을 제대로 설정하라, 그러면 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써지고 훨씬 더 힘 있게 진행된다! (216페이지)


"학생은 왜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해?"

J 작가가 물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냥 재미있어서 보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내가 J 작가에게 되물었다.

"그래, 재미있어서 그래. 재미라는 게 뭘까. 아마 사람들이 소설을 재미있어하는 건 사람들 사는 모습이랑 소설이 제일 비슷하기 때문일 거야. 안 그래?"

"네 맞아요."

생각을 안 해 봐도 J 작가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았다. (101페이지)


이쯤 되니 독자인 나는 소설을 왜 읽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쓰는 존재 이전에 읽는 존재였던 영인처럼, 나도 소설을 즐긴다. 그 이야기 속 세상에 빠져 허우적대다가도, 허구의 세상에서 틈새로 끼어든 현실의 한 자락을 마주할 때면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야기에서는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한다. 이야기가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는 고통을 마주한다.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을 온갖 세상, 많은 사람의 삶, 세상 구석구석의 감정을 읽는다. 혹자는 그런 소설을 읽으면서 무슨 발전을 하겠느냐고, 뭐가 변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소설이 없다면 우리는 또 어디서 세상의 다른 시선을 보고 누군가의 인생에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세상을 경험하고 가끔은 너무 알 것 같아서 우울한 기억을 꺼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또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쓰기 위해 모이고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읽기 위한 의미를 계속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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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와 모라
김선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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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매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굉장히 친한 사이인 두 여자의 이야기일까. 나의 예상은 이 정도였다. 제목에서 풍기는 이름이 너무 닮아있지 않은가. 소설을 펼치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했다, 어느 정도는.


노라와 모라는 7년을 같이 살았다. 곤륜산에서만 자란다는 돌배나무의 뜻을 가진 이름, 노라. 어느 날 갑자기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삶이 팍팍한 이유가 노라 때문이라고 입에 달고 살았다. 어느 날 엄마가 만든 자리에 따라간 노라 앞에는 가지런한 그물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모라와 그녀의 아빠가 앉아 있었다. 사실 모라의 엄마는 오래전 집을 나갔고, 아빠는 먼 친척에게 맡겨둔 모라를 가끔 보러 올 뿐이었다. 그런 모라에게 엄마를 만들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아빠는 노라의 엄마와 재혼했다. 그렇게 노라와 모라는 7년을 자매로 같이 살고, 이 부부가 다시 이혼함으로써 남남이 된다. 한때 가족이었다가 남이 된 사이, 하지만 두 사람이 가족이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설은 고백처럼 읊조리는 노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자기 이름의 뜻을 말하는 삼십 대 여자의 일상이 평범하다 못해 무료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살아왔을까. 가끔 들리는 엄마의 근황과 과거, 그녀가 기억하는 어느 순간의 이야기와 모라. 무엇보다 노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참 담백하다. 아니, 이건 건조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혹시 감정이 없는 사람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일상의 모든 것이 무심하다. 타인의 감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그럴까 싶은 궁금증이 생길 무렵, 어쩌면 노라의 그런 성격은 엄마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노라의 엄마는 노라가 자기 딸이 맞는가 싶게 냉정하게 대했다. 엄마의 가시 돋친 말 한마디로 수도 없이 상처받았던 노라. 하도 찔리기만 해서 그 부분이 단단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읽으면서도 노라의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노라의 지금 모습이, 자기만의 감정과 생각에 빠져 살면서 타인에게 영향 받지않는 모습이 엄마 때문에 만들어질 것으로 확신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노라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는 주는 사람이 되고 만다.


교차로 진행되는 방식인데, 소설의 앞부분이 노라의 이야기였다면 후반부는 모라의 이야기다. 마치 그동안의 세월이 아무렇지도 않게 모라는 노라에게 전화를 건다. 아버지의 부고를 알리면서 장례에 와달라는 말을 꺼내는 모라. 문득 노라가 되어 모라의 전화를 받는 나를 상상했다. 한때 자매였지만 이제는 남이 된 사이에서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나는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까. 모라 아버지의 장례에 내가 참석해야 할 의무나 이유가 있을까? 이제 나에게 없는 존재들에게 나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 걸까. 수많은 물음표로 이들의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애쓰지만, 이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나는 아직 이들의 마음과 의도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같은 상황과 사건을 두고 경험한 시간 속 기억에서 상대와 내가 전혀 다른 이미지를 꺼내고 있다면 그 감정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남는다. 그러니까 이런 거 말이다.


노라에게 엄마는 자기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이다. 엄마라는 존재의 개념을 새롭게 쓴 존재 같지만, 모라가 바라본 노라의 엄마는 그냥 엄마다. 똑같은 딸로 대하지만, 노라의 엄마는 모라보다 노라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주곤 했다. 모라가 어린 나이에도 생존의 법칙을 알게 된 건 이런 소소한 장면들 때문일 것이다. 아빠가 결혼한 여자와 그 여자의 딸에게 미움 받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것을 몸이 먼저 배웠다. 이들에게 잘못보이면 또 아빠가 맡겨놓은 시골의 먼 친척 할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모여 사는 게 지금도 앞으로도 좋을 거라는 어린 마음의 계산 같은 게 모라를 휘어 감고 있었을 테지. 엄마에게 상처만 받았다고 기억되는 시간의 노라와 그런 엄마마저도 부러웠을 모라의 마음이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들려오는 게 참 아프기만 하다. 부모는 부모대로 바쁘고 그들만의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어린아이의 마음과 생각 따윈 알려고도 하지 않은 순간들이 이기적인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비춘다.


부모의 정서적 학대와 방치로 유년기를 보냈던 두 소녀의 만남은 세월이 흘러서도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로 가슴에 묻고 산다. 헤어진 후로 서로 잊고 산 듯하지만, 사실은 문득 한 번씩 찾아왔던 사람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노라와 모라는 서로를 보면서 자기에게 비어 있는 것들을 찾는다. 노라가 보는 모라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 것은 물론이다. 모라의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노라는 부러워했다. 자기에게 없는 성격이 저 아이를 빛나게 해주고 있다고 믿었을까. 사실 모라는 타인의 시선에 반응하고 맞춰주며 사는 것을 배워야 했던 건데. 모라에게 노라는 새침한 아이였다, 정작 노라 자신은 상처받았다고 여기며 외톨이처럼, 타인과 섞이지 못하는 하루를 지낸다고 생각했을 텐데.


울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말해 본 적은 없다. 그 마음이 뭔지는 나도 잘 몰랐으니까. 다만 입술을 깨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뻣뻣해지면 덩달아 목이 아파져서 울고 싶어진다는 걸 알 뿐이었다. (68페이지)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모라의 시선과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무심하게 살아가는 노라의 시선이 겹쳐지고 얽히면서, 이제는 다른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만든다. 다시 만난 노라의 무심하지만 담담한 말들로 모라는 이제 자기 자신으로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려고,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아가기보다는 이제는 스스로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다짐 같은 거. 노라 역시 타인에게 무심해지는 게 상처받지 않는 방법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시간을 뒤로하고,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조금씩 배운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이 두 여성의 미래가 희미하게나마 그려지기 시작한다.


왜? 왜요?

나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묻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마음이 있듯이,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들이 있다. 나는 모르고 그들은 아는 마음과 나는 알고 그들은 모르는 마음. 그 사이에 우리가 있다. 이유를 묻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마음들. 그건 아주 오래되고 사적인, 비밀들이고 그 비밀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덧붙이고, 이어갈 거다. 내가 묻고, 또 묻는 이유다. (186페이지)


아마 각자의 시선대로 느끼면서 생각하고 살아왔을 그녀들일 것이다. ‘나 때문에, 나만 아니면’이라는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며 생존의 순간을 버텨왔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아이였을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생각하면 아프기만 하다. 가족이기에 감당해야 했던 감정과 상처가 더는 계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소설이다. 결국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들의 삶은 다시 시작되는 셈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기억으로 존재하는 많은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같은 기억으로 남은 어느 날 밤. 태풍이 지나가던 그 밤의 기억은 두 사람에게 비슷하게 남았다. 모라가 노라의 이불 속으로 기어서 들어갔던 그 밤, 혼자가 아니라는 고요하고 따뜻함을 실감했던, 혼자라는 걸 깨달을 때마다 떠올렸던 그날의 기억.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을 그 순간이 그대로 전해진다. 힘들었을 모든 순간에, 나만 아픈 건 아니었을 거라는 위안이 되는 단 한 장면이 새겨진다. 어쩔 수 없이, 언제나, 우리는 모두 혼자인 시간을 살아갈 테지만, 그때마다 ‘함께’였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위로가 될까.


노라와모라,김선재,다산북스,다산책방,소설,성장,치유,위로,위안,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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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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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이 좋은 집인가요?"

"잘 팔리는 집이요."

일 년 전,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닐 때 주변에서도 부동산에서도 똑같이 말했다. 잘 팔리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집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에게 집을 팔고 나갈 때를 먼저 생각하고 하는 말이 우습기도 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진지하게 새겨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 손으로 처음 집을 구하러 다닌 때였다. 아는 것도 없었고, 안다고 해도 눈 뜨고 코 베이는 시대이니 무섭기만 했다. 한참을 더 보러 다니면서는 귀찮고 힘들기까지 했다. 집값을 예상했음에도 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가격에 심란하던 때였다. 이사할 때 필요한 이런저런 비용까지 생각하면 집값을 매매 가격 그대로만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었다. 큰돈이 오고가야 했으니, 결정도 신중해야 했다. 먼저 예산을 정하고 가고 싶은 동네를 몇 군데 추렸다. 그 동네의 거의 모든 집(아파트)을 보러 다닌 것 같다. 석 달의 주말을 집을 보러 다니면서 보냈다. 집을 보러 다닌 지 석 달 만에 겨우 집을 계약하고, 계약 후 거의 넉 달 만에 이사를 했다. 나에게는 첫 이사였다.


나는 한 존재를, 한 시절을 잃고 이 집에 왔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슬픔과 상실을 안고 시작되었지만 그조차 이 공간에서 만들어갈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이제는 여기가 내 삶의 새로운 배경이 될 것이다. (181페이지)


사실 집에 관해서라면, 나는 거의 할 말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사하기 전 엄마와 살던 집이 내가 살던 집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이사를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던 그 집에서, 나는 나왔고 엄마는 아직 살고 계신다. 작고 오래된 집이다. 여기를 고치고 저기를 조금씩 넓히면서 여덟 식구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던 엄마의 공간이자 지금 엄마에게 남은 전부다. 집도 사람처럼 나이를 먹으니, 이제 더는 손댈 수 없는 낡은 집이 되었다. 길게는 1년이라는 시간을 잡고 이제는 엄마가 이사할 집을 생각하는 중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당연히 엄마였다. 울컥해지는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듣기만 했던 엄마의 시간을 상상했다. 나는 기억도 못 하던 시절, 엄마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이사 다녔다고 했다. 어떤 날을 한밤중 리어카에 이삿짐을 싣고 옮긴 적도 있단다. 내 기억에 없는 엄마의 그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여전히 우리는 부자도 아니고, 가끔 생기는 큰일에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해야 하는 생활이지만, 지금은 쫓기듯 이사하는 상황을 모면했으니 다행인 건가. 아니면, 저자의 말처럼 부자인 걸까.


대구 북성로의 첫 집은 저자의 가족이 모두 모여 살던 곳이다. 조부모와 부모, 부모의 형제들, 저자의 자매까지. 지금은 드문 구성의 가족이 그 집에 살았다. 오래전 우리가 익숙하게 생활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남편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이었고, 아내는 아이와 시부모를 돌보는 게 역할이라고 여겼던 시절. 시어머니는 아들 가진 존재로, 여자가 아닌 '시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집안의 가장 큰 방을 차지하고, 자매는 한 방을 나누어 썼으며, 삼촌들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게 저자의 부모였다. 아버지에게는 서재가 있었지만, 엄마에게는 집안의 어느 곳도 엄마의 공간이 되지 못했다. 엄마의 방을 묻던 딸에게 집안 모든 곳이 엄마의 방이라고 말하는 표정이 저절로 읽혔다고 말하면 내가 오버일까. 유난히 책을 좋아했던, 틈틈이 책을 읽던 저자 엄마의 시간 어디에도 엄마의 방은 없었다. 역할을 구분하고 존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읽히는 문장 앞에서 수시로 울컥했다. 엄마, 아내라는 이름으로 감당했을 상처의 무게가 보여서다. 어쩌면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 공간이 바로 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역할의 구분은 물론이고 방공호도 있던 집이라고, 중국 요릿집 회전판이 놓인 식탁이 있는 북성로의 집은 그들이 곧 이사하게 되는 수성구의 명문 빌라와 대조적이었다.


수성구의 명문 빌라는 갑자기 시대가 확 바뀐 느낌이었다. 대구의 강남이라 불리는 곳, 학군 따지면서 "어디에 살아?" 하는 물음에 우쭐하며 대답할 수 있던 시절의 저자가 본의 아니게 세상을 한번 배운 때였다. 그전까지는 집이라는 공간이 가족들 모여 살면서 부대끼고 같이 먹고 잠자는 곳이 전부였다고 생각했다면, 명문빌라에서의 시간은 집의 개념을 새로 배운 곳이 아니었을까. 집의 브랜드로 경제력을 따져가면서 사람을 판단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게 슬픈 건지 현명한 건지 모르겠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흔하게 보던 내용인 것도 같다. 민간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를 사이에 둔 학교의 아이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차단벽, 옆 아파트의 놀이터 출입금지를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다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또다시 여러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보냈던 20대의 저자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았던 여러 방과 원룸, 다세대주택을 거친다. 그때 봤던 가난의 흔적들, 상대적 시선의 부와 가난 그 경계를 서성이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을 쓰고 14인치 TV로 세상을 읽으며 자발적 감금 상태였던 시간은 불안의 나날이었고, 누군가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내가 그 피해자가 되지 않은 순간에 안도하는 나날이었다. 어쩌면 가난은 불안과 동의어로 다가왔던 시절인지도, 저자가 바랐던 품위 있는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던 거다.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월세 30만 원짜리 쪽방이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거리로 내몰린 노숙인의 삶이었다. 가난을 가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 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마포의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58~59페이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이 집이 온전한 나의 집이 되리라 믿었다. 내가 바꾼 공간이 이곳에서 보낼 나의 시간을 바꾸리라 기대했다. 그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아등바등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절박하게 애쓰지 않으면 나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집을 고치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04페이지)


여러 방을 거치며 동생과 함께 살던 집을 뒤로 하고, 다시 혼자임을 맞이하며 구했던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집에서의 시간은 가장 의미 있어 보였다. 읽는 나에게도 뭉클한 순간이었다. 비로소 독립적인 존재로 바로 서는 어느 공간의 입구에 있는 기분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셀프 인테리어를 하며 '아등바등' 몸부림치던 순간이 만든 건, 우리가 온전히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거다. 자기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집을 고치는 일이 왜 필요했을까. 다시 혼자인 공간을 만들면서 혼자여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그러니 무엇이든 해도 괜찮은 삶을 시도했는지도 모르지. 그전까지의 시간이, 몇 년 동안 여러 방(집)을 거치면서 보여주고 싶은 시절이었다면, 행신동의 집은 부끄러운 기억을 묻어두고 성장하듯 발을 디딘 곳이라고 보인다. 요가와 수영을 배우고, 유럽을 여행하고 유기견을 임시 보호했다. 그전에는 시도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일상을 이곳에서 채웠다. 보호하던 유기견은 반려견이 되었고, 유럽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인연은 애인이, 남편이 되었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니 짝사랑의 고백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저자는 자기만의 삶을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듣다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는 것들이 사실은 꽤 어려운 시도였다는 것을 안다. 혼자서 해외여행을 꿈꾸지만 쉽지 않다는 현실을 마주친 적이 여러 번이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쉽지도 않은 일이 되고야 마는 걸까. 몸의 불편함을 느껴서 요가나 수영을 생각한 적도 있지만, 선뜻 등록하지 못하고 학원 앞에서까지 망설이게 되는 서성임.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일이 이렇게 가벼운 발걸음일 수 있을까? 무심코 드는 의문에 답을 주는 건 저자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자산이라고 여기는 집의 의미를 다르게 겪어온 저자의 경험이 삶의 다른 방향을 열어준 거라고 말이다. 내가 집을 구하면서 들은 조언처럼 잘 팔리기 위한 집이 아니라,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채워가는 시간이 준 것은 거대했다. 수많은 이사로 만들어진 집에 대한 생각이 현재 저자가 머무는 집을 채우고 있다. 번잡하지 않고 조용한, 조금만 걸으면 숲길이 보이는(이른바 숲세권? ^^) 곳에 터를 잡고, 일상을 보낸다. 저자가 경험한 집들이 곧 저자의 역사가 된다. 그 집들을 거치며 성장한 한 사람의 내면에 무언가 차곡차곡 쌓여있을 것을 생각하니, 당시에는 힘들다고 여겼을 순간들이 다르게 보인다.


지금까지 거쳐 온 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집에서 보낸 시간의 힘을 말하고 있다는 게 저절로 느껴진다. 세월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세상의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그 공간들을 거치지 않았다면 다 알지 못할 지금의 다짐이나 생각 같은 거.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삶의 배경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집 자체보다는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때면,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오랜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아이, 아빠, 엄마, 모두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주방이나 거실처럼 공동의 공간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 혼자 존재하고 싶을 때 거침없이 문을 열 수 있는 공간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곳, 쏟아지는 눈물을 펑펑 쏟아낼 수 있는 곳. 그런 공간을 가진 집을 생각하면 또 경제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좋은, 좀 더 넓은 집을 꿈꾸며 그 집에 존재할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지니까. 그런데도 저자의 이야기에 소박한 공간을 더 떠올리게 되는 건, 물리적인 부유함이 아니라 비좁은 곳에서 부대끼며 걸어온 시간이 만들어준 '나'라는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형제자매가 많아서 단 한 번도 나만의 방을 가져보지 못한 나였는데, 언젠가 나만의 공간을 꿈꾸던 그 오랜 세월을 뒤로하고, 이제 비로소 나만의 공간이 생겼는데도 그리워지는 어떤 것들 때문에. 그러니 '나만의 방'의 문제는 물리적인 '방' 자체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지금 집으로 이사하면서 두 가지 감정에 힘들었다. 그 오래되고 낡은 집에 엄마를 버려두고 온 것 같은 죄책감과 오랫동안 벗어나고 싶은 그 집에서 나온 홀가분함 때문에.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 먼저 생각나는 집이었다. 나의 몇십 년을 책임지기도 했지만, 사는 내내 힘들다는 생각에 우울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저자의 명문빌라 시절의 대조적인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지방 소도시의 작은 마을, 오밀조밀 모여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정겹게 느낄 수만은 없었던 시선을 먼저 배웠다. 그 집에서 우리 형제자매는 울고 웃으며, 부대끼고 싸우면서 자랐다. 어느새 성인이 되어 각자의 자리를 찾아 하나둘 집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떠났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엄마만이 그 공간에 남았다. 자랄 때는 어쩔 수 없이 당연하게, 커서는 잠시 머물고자 했던 선택으로 물리적인 공간이었던 집은 이제 우리에게 무엇일까.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 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 (198페이지)


저자의 문장 곳곳에서 마주했던 가족, 여자, 엄마의 공간을 생각한다. 이제 나에게 집은, 내가 새로 꾸린 이 공간에서 만들어갈 내일을 고민하는 곳이고, 엄마에게 새로 만들어줄 공간을 그리고 상상하는 곳이다. 이 집에서 당연하게 나에게 내어준 방 한 칸을 채우는 시간을 그리고 있다. 아직은 달랑 책상 하나만 놓여 있는, 방 구석구석에 정리되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는 공간이 어떻게 변화할지, 나에게 또 무엇을 채워줄지 궁금하다. 여전히 게으르고 미흡한 것투성이지만, 어제와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볼 나를 그리는 일은 즐겁다. 동시에 단 한 번도 자기만의 방을 가진 적 없던 엄마의 공간을 같이 만들어가고 싶은 욕심을 맘껏 부린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 시간은 기다림과 간절함, 설렘으로 채워지겠지.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간을 상상하는 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그렇게 만들어갈 엄마와 나의 또 다른 역사를 기대한다. 엄마와 나 각자의, 엄마와 나 우리 모녀의 삶을 만들어줄 집, 방, 공간, 자리를. 너무 늦게 독립한 나의 미안함을 고백하면서, 나의 성장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엄마의 고생에 보답하기 위한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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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0-12-18 2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다 한 번 이상 울 거 같은 예감이 드네요~ 벌써 찡...ㅠㅠ

구단씨 2020-12-21 21:33   좋아요 2 | URL
어떻게 집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나 싶었어요.
순간순간 뭉클해지고, 가슴이 서걱거렸네요.
추천합니다. ^^

scott 2020-12-24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구단님,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 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이구절은 나한테 하는말 마음을 들킨것 같네요 집이라는공간 가족 그리고 시절 ,,,뭉클해지는 이야기

구단씨 2020-12-25 00:50   좋아요 1 | URL
문장이 너무 좋죠? ^^
진짜 뭉클한 부분이 많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