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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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으면 나를 공격하는 모든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그 폭력에 맞서 싸우며 이길 것 같은데. 우리는 생각만큼 그 폭력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싸우고 이기고자 애쓰지만, 타인의 시선까지 감당해야 하는 일에 또 무너진다. 당사자가 겪은 아픔을 우리가 얼마나 알고 이해할 수 있다고... 타인이 보는 피해자의 삶은 또 다르다. 발버둥을 치다가 무력해지는 마음이 아픈 것을 보지 못하고, 그저 남의 일이니까 쉽게 말하는 것 또한 폭력이라는 걸 모른다. 어쨌든, 때로는 타인의 도움을 받기도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이 싸우고 이겨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좌천되듯 시골의 경찰서로 발령받은 형사 규민은 산에서 실족사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다. 한눈에 봐도 실족사였다. 여자였고, 팔과 다리는 뒤로 꺾여 있었다. 시신의 발견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죽은 여자의 구두와 유서도 발견되었다. “증오하면서 사랑한다. (25페이지)” 여자의 유서는 간결했다. 그 간결함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찾아내는 것 또한 형사의 일이었다. 곧 여자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죽은 여자는 오기현이었고, 며칠 전에 여자의 언니 윤의현이 실종 신고를 한 것도 확인되었다. 형사는 윤의현에게 오기현의 죽음을 알리고 사인을 말해주지만, 오기현의 아버지 오창기에게도 시신 확인을 했지만, 이상하게 실족사로 처리하기에는 미심쩍다. 더 확인을 해봐야겠다며 오기현 주변을 탐문하지만, 속 시원하게 드러나는 정황이 없다. 그러면서도 오기현이 자살이나 실족사는 아닐 거로 믿는다. 그 와중에 드러난 오기현의 가족사와 오창기 주변 인물들이 숨기는 그 마을의 분위기를 파악한다. 거기에 윤의현의 주변을 의심하는 것 역시 놓치지 않는다.


소설은 두 가지 시선에서 진행된다. 죽은 오기현을 중심으로 사건 해결에 나서는 형사의 시선이고, 오기현의 언니 윤의현의 일상을 비춘다. 얼핏 윤의현이 대학에서 강의하는 일이 전부일 것 같으면서도, 그녀의 학생이 담당 교수의 성추행 피해자로 등장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권력의 편에 서서 학생들의 목소리를 피해가려고 했던 강사가 왜 마음을 바꿔 학생의 편에 서서 도우려고 했는지 의아했다. 같은 여자여서 그런가, 아니면 학생들의 성추행 피해에 모른 척했던 태도를 반성하는 거였나. 그것도 아니면 학교를 떠날 생각에 이런저런 눈치를 볼 게 없어진 건가. 윤의현의 의도가 무엇이든 학생들 편에서 성추행 교수를 벌하려는 모습에 기운이 났다. 생각해보면 누구라도 나를 도와줄 수 있다면 의지하고 도움받고 싶으리라. 권력의 상하 관계에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려니 모른 척 넘어가기에는 상처가 너무 컸다. 그 상처를 드러내고 치료하기에는 앞으로의 삶이 고단해질 것을 알기에 괴로웠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어졌던 그때 윤의현이 힘을 보탠다. 학생들이 그 성추행의 근원을 뽑아낼 수 있도록.


한편으로 사망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시선은 묻어두려고 애쓰던 또 다른 폭력을 발견한다.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인생의 순간들에 쳐들어온 폭력은 기를 쓰고 벗어나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어린 오기현은 오창기의 딸로 살면서 아버지를 혐오했다. 이 가족의 역사를 살피던 형사는 오창기는 물론 마을 사람들이 숨기는 게 무엇인지 찾아내야 했다. 마을 유지이면서 마을 사람들의 생계를 쥐고 있는 오창기의 권력은 또 다른 희생자들을 만들고 있음에도, 누구도 선뜻 오창기의 폭력과 횡포를 말하지 못했다. 그들이 입을 열면 닥칠 불행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형사는 성이 다른 오기현과 윤의현 자매, 오창기와 마을 사람들의 비밀, 화원의 관리인 신명호와 오창기 가족, 윤의현과 성추행 피해 학생의 연대, 윤의현의 성공을 만들 영화사 관계자 등 얽히고설킨 이들의 모든 관계를 풀어야 했다.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고, 형사가 풀어가는 사건이 하나로 귀결되면서 마주하는 진실이 놀라울 뿐이다. , 이런 결말, 이런 끔찍함, 이런 상처, 이런 복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오히려 그 진실을 몰랐으면 덜 아팠을까 싶을 정도로 아프다.


누구나 상처를 앓고 산다. 크고 작게, 치유하거나 묻어두면서. 하지만 그 상처를 끝내 드러내지 못하고 아프게 살아가기만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 성폭력 등 다양한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외면당하는. 이 소설에서는 누군가의 폭력이 더 섬세하게 그려진다. 사건을 추적하고 서술하는 인물들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어서 더 섬세하게 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끔찍하고 더 고통스러웠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 꺼낼 수 있었던 건 한 발 떨어져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건 우리가 타인의 상처에 무관심할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닿지 않은 상태로 지켜보고 있기에, 내 일이 아니어서 모른 척하기 쉽고, 권력에 고개 숙이기도 하는 인생사에 비굴해지기도 하면서. 하지만 계속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진실의 대가 앞에서 다시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 마치 이 소설이 보여준 죄와 벌처럼 말이다.


서로 다른 시선과 방향에서 접근하는 전개가 무엇을 보여줄지 궁금했는데, 소설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조금씩 보이는 것들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예상한 게 전부 맞지는 않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와 닿았기에 차근차근 그 목소리에 다가갔다. 구석구석에 숨겨놓은 속임수가 진실을 찾아내는 단서가 되어 흥미롭기도 했다. 인간의 욕망이 일으키는 일들을 지켜봐야 했지만, 용기 낸 자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정의를 마주하는 일은 감동이었다. 세상의, 사람들의 인식이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마무리에 용기를 갖는다. 우리가 겪는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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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관들
조완선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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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맞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었으면 그 상처를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다. 괜찮다고, 잊으면 그만이라고, 곧 잊힐 거라는 믿음을 갖기도 하지만, 사실 쉽게 잊히지도 않는다. 잊힌 것 같다가도 무심결에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과 감정일 테다. 그러니 우리 마음은 안정되지도 않고, 울분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상처를 아물게 하려는 방법을 찾기도 하고, 사회적으로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모습에 절망하며 법을 의지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법은 우리가 바라는 공정과 정의를, 법칙에 따라 판결했음에도 법 감정을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법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대로 처단하고 싶은 바람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마음은 비슷한가 보다. 소설 속 주인공들 역시 사회 정의가 실현되지 않음에 분노하고 절망하며 집행관이 된다. 현실의 솜방망이 처벌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며 그들만의 심판을 계획한다.


저 세상에 보낼 인간쓰레기들의 명단은 차고 넘쳤다. (94페이지)

수천만 명 중에, 쓰레기를 전담 처리하는 청소부가 몇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회 정의를 이루지는 못해도 이 사회가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142페이지)


권력형 부패 사건을 다루는 사회부 기자, 부패 정치인과 비리 공직자를 공격하는 역사학 교수, 항명 사건으로 옷을 벗은 전직 특수부 검사 출신의 변호사, 국방부 비리 사건을 폭로한 퇴역 군인…… 하나같이 부패와 비리에 맞서는 인물들이다. (269페이지)


집행관들, 그들은 누구인가. 그 시작을 알리는 어느 초여름이었다. 역사학자 최주호에게 고등학교 동창 허동식이 찾아온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본 적 없는 동창생의 방문이 의아했지만, 최주호는 별 의심 없이 허동식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리고 며칠 뒤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하자 최주호는 거대한 사건에 휘말렸음을 인지한다. 일본으로 도망갔던 노령의 고문 경찰이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살해되었다는 뉴스에, 그 죽음의 모습이 처참했던 것에 온 국민이 놀란다. 동시에 국민은 그 죽음에 정의를 외친다. 나라가, 법이 처단하지 못했던 존재를 그들이 처단하며 국민의 울분을 감싸 안은 것이니까. 현장에 남은 증거는 없었다. 다만 특이한 방식으로 죽은 이에게 걸맞은 살해 도구가 있었을 뿐이다. 죽은 이가 살아생전에 했던 그대로, 희생자들의 원한이라도 풀어주듯이, 일제강점기의 고문 도구를 사용해서 그대로 보여줬다. 그리고 죽은 이의 등에 새겨진 의문의 숫자. 이쯤 되면 이 죽음은 온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안다. 나라가 해주지 못한 복수를 그들이 해주었으며, 죽은 이는 마땅히 죽어야 할 목숨이라는 여론이 들끓는다. 경찰과 검찰은 이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나서고, 국민은 적폐 척결이라며 환호한다.


자기도 모르게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된 최주호는 놀랄 수밖에. 그들이 최주호의 칼럼과 저서를 그대로 인용하여 사람을 죽였다. 최주호가 일제강점기 고문 방식과 친일파 척결을 하지 않는 정부를 비판하며 쓴 글이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찾아온 허동식의 부탁한 자료는 그대로 누군가의 죽음에 쓰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거대한 사건에 연루된 최주호는 혼란스럽다. 한편 검찰 수사팀의 우경준 검사는 이 사건에 목숨을 건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다른 희생자가 생길 것을 예감한다. 죽은 이의 몸에 새겨진 숫자는 살인자들의 메시지였으며, 단순한 숫자에 머물지 않음을 알게 된다. 법이, 나라가 처단하지 못하고 희생자들이 무혐의나 무죄로 벗어난 법률 조항이었다. 어디 그런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그러니 살인자들은 국민의 분노를 대신하여, 정의와 공정이 사라진 세상에 외치는 목소리로 한 몸이 된다.


그들은 형벌을 집행하는 데 어느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았지. 힘이 세든 나이가 많든 부자든 간에 똑같이 집행했던 거야. 죄를 지으면 누구나 법대로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389페이지)


안다. 아무리 국민의 법 감정에서 벗어난다고 하여 이 살인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국민이 환호하는 현상을 무시할 수도 없다. 오죽했으면, 얼마나 속이 들끓었으면 이 살인을 환호하며 박수를 쳤겠는가. 합당하게 법의 처벌을 받지도 않고 누구 보다 호의호식하며 지내는 부패 공직자, 정치인, 기업인이 많았으면 그러겠는가 말이다. 살인자들은 자신을 집행자라 부르며 그들의 임무(?)를 계속한다. 인간쓰레기를 치우는 일에 사명을 가진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는 건 당연하므로. 국민을 기만한 죄를 지은 자들을 응징한다. 그들이 지은 죄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그에 딱 맞는 집행의식을 치른다. 공정이 무엇인지 보여주며 정의를 찾으려고 애쓴다.


들여다보면 집행관들 역시 살인함으로써 법을 어기며 죄를 저지르는 자들이지만, 이들의 죄를 있는 그대로 묻고 싶지 않아지는 게 인간의 감정인 듯하다. 현실에서 채워주지 못하는 법의 심판이 어느 순간 우리의 가슴에 묻히면서 쌓여가는 분노와 울분은 어디로든 터져나가지 못한다. 그저 말로 분노하고, 뉴스를 보면서 한숨이 커지는 일이기에. 그래서일까. 열 명의 집행관이 우리 마음을 대신해주듯 사회악을 처단하는 모습을 보면 은근한 희열까지 느껴진다. 아무나 골라잡지도 않는다. 탄탄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집행의 대상자를 추린다. 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지금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 법이 그들을 어떻게 풀어주었는지 정리하면서 후보군에 올린다. 연쇄살인을 기획하면서 검찰의 추적에 웅크리기도 하지만, 집행관들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는다. 듣다 보면 소설 속 이야기에 멈추지 않을 일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느끼고 겪는 부조리와 정의가 사라진 세상을 다시 보면서, 상상력과 가슴을 쪼이는 전율을 느끼며 읽게 되는 소설이지만, 묘한 통쾌함에 집행관들의 계속된 심판을 기대하게 된다. 어쩌면, 권력의 면죄부를 뺏는 건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가 아닐까 싶기도 하면서 말이다.


검찰에게 집행관들은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저지르는 살인에 손톱만큼의 공감도 없었을까? 수사를 지휘하는 우경준을 제외하고 다른 수사관들은 이 사건을 추적하는 게 임무이면서도 이 사건을 사건으로만 볼 수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들의 혼란을 조금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사건 해결을 위해 뛰어야 하지만, 집행관들의 살인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럴만한 동기가 있기도 하다는, 아이러니한 공감을 찾는다. 국민을 대신한 복수이면서, 법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심판의 모습이 바로 집행관들의 살인 아니었을까. 물론 집행관들 개개인의 의미는 제각각이지만, 큰 의미 없이 그들만의 이유로 집행관으로 참여했을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이들의 살인이 그냥 살인으로만 머물지 않을 거로 느껴지는 건 나만의 감정이 아닐 것 같다.


소설은 집행관들의 청소 작업과 검찰 수사대의 임무를 지켜보는 재미도 주었지만, 이 집행관들의 실체를 찾아가는 즐거움도 있었다. 이들이 왜,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저지르는지 보면서도, 혹시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더 있을까 하면서 찾는 긴장감도 있다.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소설로 즐기면서도 소설 속 주인공들과 사건들이 보여주는 메시지도 놓칠 수 없다. 씁쓸하면서도, 소설에서라도 맛보고 싶은 짜릿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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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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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가 없는 여행. 얼핏 낭만적으로 보이는 여행이기도 하다. 목적지가 없이 떠나고 발길 닿는 곳에 머물 수 있다는 건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그만한 여유가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말이다.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사람을 느긋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매우 급하게 쫓기던 일도 잠시 잊을 수 있을 만큼, 어쩌면 안식년을 맞이하듯 긴 호흡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주인공 질버만이 떠난 여행도 그랬으면 부러웠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에게 이 여행은 원하지 않은 여정이었다. 여행이 아니라 도망이었고, 독일을 떠도는 난민이었다. 외워두었던 기차 시간을 잊지 못하는, 자유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여행자가 되었다.


잔인한 밤이었다. 1938, 수정의 밤 사건. 나치 돌격대와 지지자들은 유대인을 공격한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약탈한다. 이게 다 합법이라는 게 더 놀랍다. 성공한 유대인 사업가 오토 질버만에게도 약탈의 밤은 찾아왔다. 나치 당원들은 질버만의 집에 쳐들어오고 부순다. 다행히 질버만은 그 위기를 피하고 도망쳤지만, 그날 이후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아내는 오빠 집으로 피신했고, 그의 집은 다 부서진 상태로 방치됐다. 그가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도 체포되고 자유를 잃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그는 한순간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한곳에 계속 머물 수도 없었다. 기차를 타고 독일을 떠돌며 매 순간 긴장하며 지냈다. 아니, 이건 지냈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그는 어느 곳이든 발을 내디뎠지만, 그 어느 곳이든 머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부유했던 그의 삶은 이제 독일을 떠도는 도망자로 전락했고, 기차에서 내리지 못한다. 어디로도 갈 수 없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기차를 타고 있으면 안전할 거로 믿고 끝없이 티켓을 끊고 기차를 배회한다.


독일인의 외모를 가진 그가 유대인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그나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계속 떠도는 거였다. 그의 인생에서 이런 시간을 상상이나 했을까? 부유한 사업가로 살던 그가 급히 재산을 처분해 도주해야만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계속 도망가면서도 긍정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 자신이 유대인으로 사는 건 선택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곧 아내도 만나고, 파리에 있는 아들이 그의 망명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불행이 길지 않을 거로 여겼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유대인을 보면서 나치 당원의 시선을 가지기도 했다. 자기 여권에 빨간색 ‘J’가 크게 쓰여있음에도 말이다.


질버만의 여행이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위태로웠던 건, 그의 외모와 여권의 ‘J’ 때문이다. 일단 그에게는 여행을 계속할 돈이 있었다. 가진 재산 전부를 처분했지만, 그 돈은 그에게 행운이기도 하고 부담이기도 하다. 이 여행을 계속할 자금이 되었지만, 언젠가 그게 잡힌다면 그 돈은 모두 몰수당할 테니까. 그의 외모가 아무리 유대인 같지 않다고 해도 그의 여권에 표시된 글자는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그는 여행하면서도 여행자로 불리지 못했다. 도망자이거나 난민이거나. 그가 기차표를 끊고 계속 다른 기차를 옮겨 타고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역시 둘 중 하나였다. 나치의 열성 당원이거나 독일군 장교이거나 그처럼 불안에 떨며 도망을 다니는 유대인이거나. 나치 당원은 아니어도 목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하는 시민이거나,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수단가이거나. 그가 독일의 도시를 떠돌며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그의 안에 머물던 분노를 표출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는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지만, 그 어디로도 떠나거나 머물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독일에 갇힌 채로 여행하는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


베를린에서 함부르크, 함부르크에서 베를린, 베를린에서 도르트문트, 도르트문트에서 아헨, 아헨에서 도르트문트,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제 여행자다. 끝없이 계속 움직이는 여행자. 나는 이미 이주했어. 독일 철도로 이주한 거지. 난 지금 독일에 있는 게 아니야. 이건 아주 큰 차이라고. 그의 여행 음악과 같은 바퀴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안전해. 지금 움직이고 있잖아. (214페이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여행하는 질버만의 모습을 비추는 이 소설은 그의 여정 이상을 보여준다.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나치 당원들을 피해 도망치기는 했지만, 그의 모든 순간을 비굴하거나 희생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의 지금 위치는 탄압을 받는 유대인이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본가였다. 기차의 일등칸을 이용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가 도망치는 중에도 의아했던 것은 그가 유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혹시 그가 마주친 유대인들과 연대라도 하지 않을까 했던 나의 예상은 빗나가고, 그는 다른 유대인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여기기까지 했다. 이 상황이 되기 전까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독일어판 발행인의 설명을 보면, 작가 보슈비츠의 배경에서 비롯된 시선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아버지 역시 부유한 사업가였고, 그 자신도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건 질버만과 같다. 그래서인지 유대인이어서 낙인이 찍히기 전까지 유대인이라는 게 그의 가족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상기하면서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소설에서 유대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행동은 다양하게 담겨 있다. 나치 당원이 보는 유대인, 독일인 장교가 보는 유대인, 일반 시민이 보는 유대인, 유대인이 보는 유대인. 반대로 모든 독일인이 열성적인 나치 당원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바로 앞에 앉아서 대화하고 있지만, 그들이 자기를 신고할 거로 여기며 불안하지만, 실제 그들은 질버만을 신고할 생각도 없고 그의 여정을 안타깝게 여기기까지 하는 걸 보면 모두 같은 시선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다.


끝이 없는, 목적지가 없는 여행이 즐거울까? 아닐 것이다. 여행은 어딘가로 향하는 목적지가 있어야 하고, 돌아올 곳이 있어야 즐겁다. 돌아올 곳이 없다면 끝없이 부유하는 삶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질버만의 여행이 고단하고 불행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그 스스로 여행을 끝내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마음이 읽힌다. 끝도 없는 여행을 멈춰야만 그가 살 수 있었을 테지. 그의 터전인 독일 안에서 머물 곳이 없고 끝날 수 없는 여행은 그를 미치게 했다.


질버만은 저녁 식사를 하려고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슈타인을 초대했어야 하는데. 그는 메뉴판을 살피며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그의 유대식 코가 두려웠어. (63페이지)


소설은 끝났지만 지금도 끝나지 않은 수많은 여행자(질버만)가 남았다.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는 전쟁, 싸움, 여러 가지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오늘도 세계를 떠도는 난민. 오늘 봤던 뉴스에서는 미국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난민의 예외에 어린이는 받아준다는 규정을 이용하는 이들을 봤다. 이걸 이용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느 부모의 간절함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만이라도 살리겠다고, 높은 국경의 담장 너머로 아이를 떨어뜨리는 그 손끝의 바람이 보인다. 누군가를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낙인을 찍는 과정이 그대로 이어지는 세상이다. 소설 속 세상과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내가 견디기 위해 생각하는 습관을 버리겠다는 질버만의 말은, 한편으로는 나와 타인을 구분하며 이 불행에 나를 포함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바라지 않았던가. 질버만의 체포되지 않기를, 누군가 그를 숨겨주기를, 그의 불행이 어서 끝나기를. 그러면서도 내밀지 못한 손이 부끄러워지는 건, 누군가의 절망에 용기 내지 못한 마음이아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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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5-07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작 2관王
추카!추카~
구단님 리뷰 페이퍼 좋아하는 1人
주말 멋지게 보내세요 ^ㅅ^

구단씨 2021-05-07 17:33   좋아요 1 | URL
와아~! 감사합니다. ^^
주말부터 다시 더워질 듯해요. 다음주 예보는 완전 여름의 시작 느낌입니다.
주말 즐겁게 지내시고 일교차 심한 날들 건강 조심하세요.

초딩 2021-05-08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책도 장바구니 담았습니다.

서니데이 2021-05-08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이완의 자세 소설Q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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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이 울기 좋은 곳이라는 건 목욕탕에서 울어본 사람만이 안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가 긴장하지 않고 살아갈 시간은 없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부딪히고 저기서 치이고, 그나마 알몸으로 들어간 곳에서나마 속이 시원하게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는 거겠지. 이유는 다르겠지만, 나도 목욕탕에서 울어봤다. 눈이 빨개지도록 울면서 샤워 물줄기로 흘러내렸다. 가끔 집에서도 그럴 때가 있다.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 살면서 울고 싶은 순간이 없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 울고 싶지도 않고, 왜 우는지 다 설명할 수도 없다. 나만의 공간에서 흘리고 싶은 눈물이라면, 집의 목욕탕이나 조금은 시끄러운 공중목욕탕은 울기에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종종 공중목욕탕에서 우는 여자들은 본다라는 첫 문장 때문에라도 이 소설은 저절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엄마 오혜자는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서 딸 유라를 키웠다. 타고난 외모와 피부, 입담으로 동네에서 화장품을 팔며 제법 여유로운 삶이었다. 엄마가 남자를 만나고 사기를 당하면서 모녀의 삶을 바닥으로 내려왔다. 어린 딸을 데리고 공중목욕탕 선녀탕으로 입성한 엄마는 선녀탕에서 자고 먹고 때밀이로 일하며 악착같이 살았다. 유라는 선녀탕이 만수불가마사우나로 변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그곳에서 지냈다. 우연히 무용을 배우면서 유라는 상도 타고 대학 진학까지 한다. 엄마의 고된 삶의 힘은 딸 유라였다. 무용가로 이름을 날리고, 남자나 결혼도 의미 없으니 딸의 성공한 삶을 바랐다. 엄마뿐만이 아니다. 유라 역시 무용가로 살면서 성공하고 싶었다. 여탕을 탈출할 유일한 기회였다.


목욕탕은 계급장을 떼고 사람과 사람이 알몸으로 만나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엄연히 서열과 위계가 존재했다. 여탕에서는 피부와 몸매 관리, 재테크, 자식 교육에 능한 여자들의 입김이 세고 서열이 높았다. 예쁘고 날씬한 데다 재개발이 예정된 지역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고, 자식 대학까지 잘 보낸 엄마를 사람들이 대놓고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때밀이 아줌마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때밀이인데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돈을 잘 벌고, 자식을 잘 키운 여자. 엄마의 모든 행위 앞에는 불구하고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것은 아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엄마가 때를 밀어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무용을 전공하고 있는 내게도 마찬가지로 따라다니는 수식어였다. ‘불구하고라는 수식어는 어쩌면 불과하다와 같은 말인지도 모른다. 때밀이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엄마를 추켜세우는 목소리는 역설적으로 그녀가 때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 모녀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106~107페이지)


엄마와 딸의 인생 대부분은 여탕에서였다. 오랜 세월 세신사로 일하며 삶을 꾸려온 엄마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어도 여탕을 떠나지 않았다. 딸은 성인이 되고 더는 여탕에서 살지도 않지만, 여탕에 드나들며 여자들을 봤다. 사실 누구나 비슷하게 생각할 것 같다. 알몸으로 들어가는 곳, 다 벗고 들어가서 몸뚱이만 있으니 다 똑같다고. 계급장 떼고 알몸으로, 오직 사람으로 만나는 곳이지만 이곳에서도 위계는 있다.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식 얘기, 돈 얘기, 정보력으로 서열을 만든다. 사람들은 오혜자의 몸매와 명문여대에 다니는 딸을 부러워하지만, 실상 그들이 보는 오혜자는 남편도 없이 딸 하나 키우는 목욕탕 때밀이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하는 정상 가족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 정상에 포함되지 않는 건 목욕탕에 드나드는 오회장도 마찬가지다. 상당한 카리스마로 수입품 취급하며 부자였고, 회장님으로 불리며 우러러보는 것 같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저 정상의 삶이 아닌 무시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혜자에게는 몸을 맡기는 모든 이가 그저 똑같은 고객이다. ‘도둑년 돈이든 갈보년 돈이든자기에게 돈이 들어오게 하는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쩌면 오혜자의 태도가 가장 살기 좋은 삶의 자세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목욕탕에 드나드는 여자들을 보면 알게 모르게 보이는 계급이 아니라, 그저 때를 밀러 오는 삶이 고단한 사람들이다. 몸의 고단함을 풀기 위해 오혜자를 찾고 목욕탕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다. 노동으로 쌓인 피로를 풀고 팍팍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반복이 거듭되는 와중에 세상의 기준을 놓지도 않는다. 오혜자에게 딸의 성공은 자신의 성공이기도 하기에, 딸을 무용으로 성공시키기 위한 의지를 놓지 못한다. 그건 목욕탕에 모인 여자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파악되는 서열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고 유명해지고 성공하는 일이 자기의 일이 되어 자랑이 되는 일들. 낯설지 않다. 우리 주변 곳곳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장면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들에게 이게 삶의 전부일까. 남들에게 보여주고 비교하며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을 만들려고 애쓰는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몸은 긴장한다. 느긋하게 몸을 쉬고 삶의 긴장을 놓으려고 찾아드는 곳에서 오히려 몸의 긴장을 더 보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런 내용은 엄마 오혜자와 딸 유라의 일상에서 더 잘 보인다.


분홍색 가방에 담긴 키티 도시락과 보온병 세트를 생각하면 지금도 배가 고파진다. 그것은 내 허기가 아니라 엄마의 허영을 채우기 위한 도시락이었다. 엄마가 내게 무용을 가르쳤던 것도 그런 종류의 허영이었다는 것을 안다. (76페이지)


엄마는 사람들의 긴장된 몸을 풀어주는 일을 한다. 힘을 쭉 빼고 누운 사람들의 때를 밀며 그들의 피로를 풀어준다. 손님으로 오는 사람들이 밖에서 긴장하고 보냈던 시간에 보상이라도 받듯이 몸의 이완을 만드는 시간이다. 오혜자의 역할은 그런 것이다. 반면 딸 유라의 삶은 몸의 긴장으로 가득한 시간이다. 무용하는 딸은 긴장을 놓치지 않고 아름다운 몸을 만들어야만 한다. 엄마와 딸의 이런 삶이 운명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딸이 긴장을 풀려고 엄마에게 몸을 맡기지도 않는다. 같은 삶을 공유하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긴장과 이완의 삶을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이완을 또 찾아내는 일이 기적 같다. 이 기적은 몸의 불편함과 불완전함으로 긴장하던 사람들에게도 찾아왔다.


여탕에 자주 오던 오회장은 엄마에게 자주 몸을 맡겼다. 엄마가 자존감을 세우며 당당하게 일의 규칙을 정하며 살 수 있던 것도 오회장의 힘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다. 그런 오회장은 유방암 수술을 하고 한쪽 가슴이 없음에도 여탕에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여자들이 그런 오회장의 알몸을 흘긋거렸는데, 점점 한쪽 가슴이 없는 오회장의 몸은 아무 일도 아닌 게 됐다. 무슨 영험한 장소라도 되는 것처럼 만수불가마사우나 여탕에는 유방암 수술을 받은 여자들의 출입이 늘었다. 다른 곳이 아픈, 아팠던 사람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들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한쪽이 사라진 가슴 따위로 긴장하지 않았다. 감추고 움츠러들면서 여탕의 출입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계급장 떼고 알몸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동등한 곳이었다. 가슴 속 말이나 등급을 매기는 시선을 살짝 숨기고 있지만, 그건 누구라도 비슷할 테니까. 여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각자의 몸을 씻으면서 어디서 한 번쯤 봤을 사연의 주인공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알몸이지만 알몸 같지 않은 태도를 가진 속내를 엿보는 기분이 들면서도, 내 몸이 가장 편하게 다가오길 바라는 갈증을 담은 이야기다. 충분히 나로 살아가기에 괜찮은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해준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도 지나고 나면 전부 아무것도 아니더라.” (163페이지)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허공에 대고 읊조렸다.

오늘 못하면 다음에 하면 돼. 인생은 지겹도록 기니까.” (165페이지)


그동안의 삶이 만든 관조적 시선일까, 아니면 그것 말고는 다른 답을 찾을 수 없었다는 유일한 답이었을까. 굳어진 몸으로 목욕탕에 왔던 딸에게 알몸으로 누워있던 엄마가 했던 말은, 오늘 못하면 다음에 하면 된다고, 인생은 지겹도록 길다는 거였다. 여탕에 드나드는 여자들의 고단한 삶을 보면서 엄마가 배운 인생이었는지도, 항상 긴장하던 딸의 삶에 누그러짐을 알게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성공한 삶은 아니었지만 실패하지도 않은 삶이 나쁘지는 않더라고 말이다. 고달프고 쓸쓸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만족할 때까지는 못 갔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한다. 바라는 곳을 향해 아등바등 살아가다가 나를 누르는 고단함이 쌓여가는 줄도 모르고 있던 순간을 지적해주는 것만 같다. 굳어진 내 몸이 조금은 풀어지기를, 내 몸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서 나를 옥죄는 것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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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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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사연을 안고 패키지여행에 모여든다. 단돈 8만 원에 대마도행 배를 탄다. 가이드의 여자친구는 그런 여행을 누가 가느냐고 비웃었지만, 그 여행에 스무 명이나 참가했다니 놀랍기도 하다. 쉬운 여정은 아닐 터, 그러기에 저마다의 사연에 의미가 있다. 암 환자, 늦은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 거기에 김석일 부자가 있다.


아무리 싸구려 여행이라지만 그래도 여행인데, 조금은 설레지 않을까? 어떤 이유로 이 여행을 선택했더라도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 특유의 설렘이 있었다. 약간의 들뜸, 가이드가 상술로 내려놓은 특산물 시장에서도 의심하지 않고 그 순간을 즐겼다. 그러다가 버스의 짐칸에서 발견된 토막 난 시체로 이들의 여행은 멈춘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고, 경찰이 출동하면서 그들의 관광버스는 범죄의 장소가 된다. 사람들은 형사와 마주하며 진술을 한다. 도대체 이 살인은 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처음부터 범인과 피해자를 드러내고 시작한다. 토막 난 시체는 김석일과 함께 버스에 올랐던, 김석일의 아들 김도현이었다. 당연히 유력한 용의자는 김석일이다. 그는 휴게소에서 아들과 내린 후 사라졌다. 휴게소에 남은 가이드는 김석일의 행방을 찾지만 실패했고, 그다음 장소인 특산물 시장에서 사건이 터진 거였다. 김석일의 행방을 찾던 경찰은 곧 또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르는 김석일을 찾았고 체포했다. 자백은 없었지만, 김석일이 범인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도대체 아들이 얼마나 미웠으면 죽이고 토막을 내기까지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조사해도 김석일은 자백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정에서 불리하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던 중 나타난 김석일의 전 아내 정지원의 등장에 그는 흥분한다. 차분하게 보이는 피해자 정지원, 그녀는 김석일에게 무슨 할 말이 있기에 그와 만남을 요청한단 말인가. 어찌 되었든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거로 믿고 형사는 김석일과 정지원의 대면을 허락하고, 사건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기를 바란다.


형사 박상하는 정지원을 보면서 죽은 아내와 병원에 있는 아이를 떠올린다. 이유가 다를지라도 비슷한 환경에 처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정지원에게 더 눈길이 가고 그녀의 행보에 더 집중하게 되는 건. 자기가 봤던 불행을 정지원이 똑같이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박상하는 사건에 다가갈수록 이 불행의 시작과 과정, 끝을 생각한다. 어쩌면 조금만 관심을 보였다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사건. 죽은 김도현은 평소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던 아이였다. 아버지의 분노가 아이를 향했고, 아이는 이유도 모른 채로 그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동학대 사건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왜 어른의 분노를 아이에게 푸는 걸까 싶어서.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행동으로 아이를 고통스럽게 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아이는 모르는 어른들의 문제를 왜 아이에게 풀려고 하느냔 말이다.


죽은 아이 김도현의 불행은 아버지 김석일과 어머니 정지원에게서 시작됐다. 아내에게 집착했던 남편, 분명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편을 선택한 아내, 그 집착을 이기지 못해서 술과 폭력으로 아내를 다스리려 했던 남편, 참으면 괜찮아질까 싶었지만 결국 가해지는 폭력의 강도를 이기지 못하고 떠난 아내. 그리고 남편은 남은 아이들을 맡았다. 아이들보다 자신의 불행이 더 컸던 엄마는 아이들을 두고 떠났다. 아빠는 남은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었을까? 아니다. 평소 강한 집착과 폭력, 술에 의존하던 아빠가 하루아침에 변할 리는 없으니까. 그 폭력의 한가운데에 놓인 아이는 결국 아빠의 손에 살해되었다. 이 사건의 개요는 그러하다. 하지만...


아쉬운 장면들이 많다. 아동학대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볼 수 있는데, 그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 살릴 수 있는 아이가 죽는 경우를 떠올리게 된다. 어른들이 선택하는 자기 안위, 자기가 감당하기 어렵다며 이 관심의 당사자에서 발을 빼는 경우, 다가오는 분노의 분풀이로 아이를 향하는 시선.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는 일은 자연스럽고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면서 큰 노력이 필요하다. 자식을 향한 사랑은 본능이라고 믿었지만, 그 역시 당연하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불행을 감당하다 보면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감싸고 나를 보듬는 일이 먼저였다. 작가는 소설 속 두 가정에서 비롯한 아동학대를 보여주면서, 부모의 자식 사랑이 당연한 것도 아니고 본능도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육아 우울증이 만든 아동학대,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며 시작된 아동학대. 두 가정의 끝은 참혹했다. 물론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였다. 아이를 낳으면 당연하게 주어지는 모성애, 부성애는 없다. 사랑과 노력이 아니고서는 만들어지지 못할, 부모의 자세였다.


"우리 가족 말이에요. 남의 눈에는 가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싸구려 패키지 같은 그런 가족이었다고요." (304페이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가정 안의 일. 가정 폭력이나 아동학대는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관심 두지 않으면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체면과 두려움, 그거 한 대 맞았다고 뭐 별일이냐는 시어머니의 시선 같은 것을 감당하기가 어렵기도 해서다. 무엇보다 흔히 말하는 남의 가정사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고민에 빠지는 일도 생긴다. 그렇다고 계속 모른 척하고만 있어야 할까? 정지원이 싸구려 패키지 같은 가족이었다고 말하는 의미를 알 것 같다. 남들 눈에 그럴싸해 보이는 가족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있으면 화목해 보이는 가정. 사건이 일어나고서야 보이는 가정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여전히 어렵다. 아마도 작가는 이 상황을 마주하면서 겪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만드는 이 고통의 순간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감춰지고 어떻게 마무리되어가는지를. 어떻게 그 불안과 고통을 막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을 독자와 나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향해가면서 정지원이 구치소에 있는 김석일을 만난다. 줄곧 차분하게 있던 정지원이 김석일에게 한마디 하는데, 그때 눈치챘다. 이 사건의 진상을, 누가 웃게 되는지를. 반전이라면 반전인 그 부분에서 추리소설의 묘미를 느낀다. 정해연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동안 만나왔던 작품에 비하면 긴장감이나 재미는 좀 덜하다.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준 건 좋았지만, 푹 빠져 읽고 싶었던 기대를 생각하면 김이 빠진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가독성은 좋아서 금방 읽힌다. 등장인물의 사연 하나하나 듣는 것도 괜찮았다. 아들을 만나러 가는 형사 박상하의 다짐이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담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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