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수영 대회가 열릴 거야! - 우리 아이 첫 성교육 그림책 스콜라 창작 그림책 22
니콜라스 앨런 지음, 김세실 옮김, 손경이 감수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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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나는 정말 이런 책인 줄 모르고 읽었는데, (물론 아이의 성교육에 관한 그림책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풀어갈 줄 몰랐다는 얘기) 몇 개의 그림과 몇 문장이 전부인 이 책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나도 모르게 낄낄낄 웃어댔더니, 재미있는 웹툰 보는 줄 알았다고 옆에서 슬쩍 고개를 들이민다. 며칠 전 여동생이 했던 말이 생각나서 말이지. 둘째가 초등 고학년인데, 아직도 성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잘 못 해주겠다면서 성교육에 관한 책을 같이 골라보자는 거였다. 나라고 이걸 잘 고를 수가 있었을까? 난감해서 여동생과 둘이 머리 맞대고 몇 권 골라서 구매했는데, 그때 이 책 알았더라면 차라리 학년 구분 없이 이 책으로 성교육의 포문을 열어주라고 했더라면 좋았겠다!


성교육에 관한 책은 많이 있지만, 나름의 연령대를 고려하여 채워진 내용이지만, 그 설명의 처음을 어떻게 시작하느냐 하는 고충은 언제나 있었다. 어떻게 태어났느냐는 아이들의 질문에 배꼽으로 태어났다, 엄마 아빠가 사랑해서 태어났다, 하나님이 보내주셨다 등등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답변만 내놓았을 우리. ㅎㅎㅎ 이 책으로 어떻게 하면 쉽고 즐겁게 아이와 성교육을 함께할 수 있는지 알게 될 터였다.


 


윌리는 브라운 아저씨의 몸 안에 사는 3억 마리의 정자 중의 하나. 브라운 아저씨의 몸에 3억 마리의 정자가 어떻게 복작대며 살고 있을까 싶지만, 그 장소가 엄청나서 3억 마리 수용이 가능하다. 그중의 하나인 윌리. 윌리는 수학은 못 했지만, 수영 하나는 끝내준단다. 곧 있을 중요한 수영 대회를 준비하며 3억 마리의 정자 모두 열심히 수영 연습을 했지. 윌리는 매일매일 정말 열심히 수영 연습을 했어. 왜냐고? 일등을 한 정자만이 소피아 아주머니의 몸 안에 있는 난자 조이를 만날 수 있거든. 그럼 도대체 경쟁률이 얼마야? 윌리는 계산을 못 했어. 수학을 못 했거든. ㅠㅠ 하지만 수영은 아주 많이 잘했어. 엄청나게 잘했지.



드디어 수영 대회가 열리는 날. 선생님이 물안경과 등 번호, 지도를 나눠줬어. 조이에게 가는 길을 잘 찾아야 할 텐데. 브라운 아저씨와 소피아 아주머니가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그 밤, 선생님의 출발 소리와 함께 수영 대회는 시작되었어. 브라운 아저씨의 몸을 통과해 소피아 아주머니의 몸으로 들어가는 길은 지도를 보고 외웠지. 윌리는 꼬물꼬물 즐겁게 헤엄치면서, 뽀글뽀글 열심히 헤엄쳤어. 수학을 못 하는 윌리는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수영했어. 드디어 도착 지점! 윌리는 수학을 못 했어도 수영은 진짜 잘했나 봐. 드디어 조이를 만나고, 조이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윌리. 조이도 윌리가 마음에 들었나 봐. 조이는 살며시 문을 열고 윌리를 맞이했지.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진짜 경이로웠어. 아주 놀랍고, 신비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지. 무언가가 쑥쑥 자라나기 시작하고, 계속 자라고 커졌어. 소피아 아주머니의 배 속에 꽉 찼지. 마침내, 아기가 태어났어. 작은 여자아이, 이름은 에드나야.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이렇게 막힘없이, 이렇게 재밌게 할 수 있던 거야? 이 얇은 그림책에 그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니 놀랍다. 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마냥 어렵고 난감하기만 했던 내용을 이렇게 쉽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뛰어난 능력 같았다. 사실 유아기에 이미 성에 관한 질문은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어떻게 설명해줘야 좋은지 몰라서 여기저기서 도움을 찾곤 하지만, 항상 부족했다. 이상하게 말하게 되기도 하고, 그러다가 점점 궁지에 몰리듯 말문이 막히기도 하는. 성교육 전문가들은 솔직하게 대답해 주는 게 좋다고 하지만, 솔직하게 어떻게? 19금 수준으로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해롭지 않게, 가장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성 가치관을 만들어갈 수 있는 설명에 가까운 성교육이 가장 필요한데 말이다.


이 책은 어른의 눈으로 봐도 아이에게 잘 설명할 수 있는 눈높이에 최적이라고 느껴진다. 유아의 눈높이에 맞춘 그림책이면서, 어쩌면 곤란해질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접근하는 방식이 유쾌하다. 사실에 가깝지만, 상상력을 더한 이야기에 그동안 비밀에 싸여있던 탄생의 순간을 보여준다. 어른인 내가 봐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는데, 아이에게도 흥미로운 상상으로 모험하듯 읽어갈 수 있을 듯하다. 어떻게 아이가 만들어지고 태어나는지, 나의 존재감과 이성을 존중하는 태도까지 함께 알아가는 이야기다. 소중한 존재이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자세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웃음을 놓치지 않는 이야기가 이 책의 재미를 더한다. 책의 끝부분에 퀴즈처럼 등장하는 한 문장.

그런데 꼬마 윌리는 어디로 갔을까? 누구 아는 사람?”

아무도 손들지 않아도, 누구도 윌리의 행방을 알 수 없어도 저절로 보이는 윌리의 모습이 어쩌면 좋을까. ㅋㅋㅋ 수학은 정말 못 하고, 수영은 끝내주게 잘하는 에드나를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 유전자의 힘이란, 놀랍고 놀랍다.



마지막에 손경이 박사가 알려주는 성교육 팁까지, 이 책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은지 새겨 읽으면 더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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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는 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3
최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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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고 싶던 상처와 마주하며 오늘을 치유한다. 과거에서 시작된 현재의 나를 되짚어야만 온전히 화해하고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되는 과정을 걷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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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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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외부에서 기인한 폭력이라는 말에,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치열하게 싸우는 삶이구나 싶다. 한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복잡한 인생사인지 복기한다. 문장의 묘사가 눈앞에 그리는 장면과 일치해서 더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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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여백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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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가족이었던 딸이 자살했다. 아버지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고, 그 슬픔은 끝도 없었다. 수업 중에 울린 전화를 받았더라면 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그때의 선택을 계속 후회했지만, 이제는 소용없다. 딸은 없으니까. 몰랐을 테지. 절박한 순간에 딸이 걸어온 전화일 줄은. 더 힘들었던 건 딸이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다. 무엇이 딸을 자살로 이끌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오래전 아내가 죽고, 애지중지 키운 딸이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딸의 성장 시간에 함께하고 싶어서 노력했다. 항상 유쾌하고 건강했던 딸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 아버지다.


안도의 딸 가나에게는 친구가 두 명 있다. 사키와 마호. 서로의 스타일을 봐주고, 같이 어울리며 밥도 먹고, 거의 모든 일상에 두 친구가 있다. 물론 학교생활 내내 그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건 당연했다. 나는 이 설정을 보면서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가나는 사키와 마호와의 관계에 너무 의존하고 있었다. 꼭 두 아이와 같이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싶었는데, 이 교실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조금씩 느끼게 됐다. , 이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그들만의 무리가 형성되고, 마치 각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모임처럼 구분되는 어떤 게 있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짙어질 무렵, 나의 청소년 시절을 떠올려 봤다. 똑같지는 않았지만, 그때도 절친이 있었다. 반 아이들 두루두루 알고 지내면서도 유독 더 가까이 지내는 몇몇이 있기 마련이다. 일상을 나누기도 했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가까이해야만 하는 몇몇은 필요하다. 그 관계가 학교 밖에서도 이어지고, 혹은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관계 역시 마음이 끌리고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유독 가나와 마호가 말하는 관계는 위태롭게만 보인다. 너무 일방적으로 한 사람에게 끌려가는 느낌? 그 사람이 아니면 학교생활을 할 수 없는 불안감 같은 거 말이다. 가나와 마호 그 중심에 사키가 있었다.


무덤덤하게 혼자 복도를 걷고, 체육시간에는 짝이 없는 다른 아이와 조를 짜고, 점심시간에는 혼자 점심을 먹고 조용히 책을 읽는다. 그런 아이가 반에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마호는 그러는 게 죽도록 싫었다. 창피했다. 혼자라는 것도, 혼자임을 남들에게 들키는 것도. (125페이지)


살다 보면 관계가 어그러질 수도 있다. 모든 관계에는 권태기도 있으니까, 잘 지내다가 뭔가 하나 미워 보이면서 거슬릴 수도 있다.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면 그 관계는 끝나기도 한다. 우리 사는 세상이 그렇다. 하지만 10대의 아이에게, 학교생활의 모든 것이 친구 관계에 좌지우지된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루의 절반 가까이 학교에서 보내는데, 그 안에서 불편한 관계가 계속된다면 그 상처와 불안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미 어른이 된 우리가 겪는, 가족 사이에서도 그렇고 사회생활에서도 그렇다. 그 축소판 같은 학교생활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인간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듯 이 아이들의 관계도 그렇게 흘러가면서 어긋났다면 참 다행이었을 텐데, 인간의 본성이 저지르는 일을 누가 막을 수도 없었을 테다. 가나는 스스로 뛰어내렸지만, 그 죽음을 가나가 선택한 건 아니었다. 떠밀리듯, 불안한 마음으로, 관계회복의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던 유일한 선택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야생이었다면 진 쪽이 도망치면 되겠지만, 수조에는 달아날 곳이 없어요.” (199페이지)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가나였다면 이 아이들의 은밀한 폭력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선뜻 한 가지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저 괴로워만 하다가 시간이 흐르고 있었겠지. 그 무리에서 벗어나자니 이제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지도 못한다. 이미 학기 초에 형성된 아이들 각각의 그룹에 가나가 낄 자리는 없었다. 설령 가나가 다른 그룹에 들어갔다고 해도 마호와 사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겠지. 그러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을 감당하기만 하다가 뛰어내린 거다. 자기가 속한 그룹에서 배제되어 계속 힘들어하느니 이제는 좀 편해지고 싶다는 바람이 아니었을까.


어렵게 찾은 가나의 일기에서 시작된 충격은 이 소설의 결말까지 이어진다. 딸의 죽음 원인을 알아낸 아버지의 결심, 그 사실을 알게 된 악랄한 아이의 꼼수는 자기만 살겠다는, 자기 미래만 챙기겠다는 또 다른 이기심이었다. 이런 아이가 있을까 싶지만, 요즘 뉴스에서 보는 사건들만 봐도 이제는 아이가 아이로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니까 그동안 내가 알던 아이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상황도 많아서일까. 무엇이든 고정관념을 버리고 봐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학교라는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는, 아이들 세계에서 형성된 스쿨 카스트가 무엇인지, 그 관계가 어떤 폭력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학교 폭력의 현장이 얼마나 교묘하고 위험한지 증명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만이 답은 아닐 거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의 해결책이 모두 맞지는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결말이 인상적이다. 딸의 일기를 발견한 아버지가 딸을 괴롭힌 아이들을 죽이고 자기가 그 벌을 달게 받겠다는 다짐인 줄 알았다. 어차피 상처는 받을 대로 받았고, 그 트라우마는 지워지지 않을 테다.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의 방식대로, 다 죽여버리는 것 이상으로 딸의 죽음을 새겼다.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고 반성을 한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 피해자를 위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사과하고 반성했으니 이제 그 죄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벌을 주겠다는 아버지의 선택도 벌로 끝나는 건 아니다. 그 역시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죄와 벌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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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6-30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를 마치면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학교에 다닐 때는 그래야 한다고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쩐지 혼자 있으면 안 좋을 것 같고, 어디에 잘 끼지도 못하고... 저는 그렇게 애매하게 지냈네요 그때 왜 책 몰랐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책이 다는 아니지만... 친구 사이도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아이도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런 건 소설에서 봤지만, 실제로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구단씨 2021-07-02 12:17   좋아요 1 | URL
지나고 나서야 좀 알겠더라고요.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들.
그리고 저도 님과 비슷하네요. 학교 다닐 때 책을 전혀 몰랐어요. 그때 책을 알았더라면 좀 다른 인생을 살아왔을까요? ㅡ.ㅡ;; 많이 아쉬운 부분이네요.
 
[세트] 죄의 궤적 1~2 - 전2권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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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섬 레분토에서 어설픈 어부로 살아가던 우노 간지는 사람들에게 바보라고 불린다. 아이들이 놀려도 그냥 웃고 마는, 부당한 대우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는 정말 바보일까? 돈이 없으면 서슴없이 빈집털이하는 걸 보면 바보라고 하기에는 너무 똑똑하고, 남들이 험한 말을 해도 그냥 웃고 마는 걸 보면 정말 바보 같고. 우노 간지. 그는 누구인가.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더불어 그가 저지른 죄를 어떻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에 푹 빠져 읽고 있었지만, 한 번씩 어떤 느낌이 차올라서 답답했다. 그는 이렇게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왜 한 번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거지? 머리를 다쳐서? 바보여서? 이게 죄라는 걸 몰라서? 그는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궁금증은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형사와 함께 달리면서 놀라움으로 변해갔다. 경악했다.


소설은 세 명의 시선이 교차로 진행된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여러 범죄의 용의자인 우노 간지. 이 사건에 뛰어들어 온몸을 불사르는 형사 오치아이 마사오.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이는 산야의 여관 딸 마치이 미키코. 처음 돈이 필요해서 소소하게 저지르는 간지의 빈집털이는 금방 멈출 줄 알았다. 그는 바보 소리를 들으면서도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가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니까. 그가 유흥을 즐기며 흥청망청하는 스타일도 아니었으니, 그의 범죄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그에게도 부족한 뭔가를 채워주는 수단이 되었겠지.


그의 재능이자 장기인 빈집털이를 계속하면서도 그는 사람을 헤치지는 않았다. 레분토를 떠나면서 사기를 당한 그는 위기도 잘 넘겼다. 물론 남의 것을 훔쳐서. 계속되는 범죄는 경찰의 추적을 받기 시작하지만, 간지는 쉽게 잡히지도 않는다. 더 의아한 건 간지의 태도다. 주변에 경찰이 깔려있고, 계속되는 사건에 간지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하고 여자와 여행을 가다니. 이 무슨 강심장인가. 흔히 잘못을 저지르고, 언제 잡힐지 몰라서 숨어있는 처지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막 뛰지 않나? 두려움과 불안으로 심장이 두근거릴 것 같은데? 간지는 보통의 이런 감정을 넘어선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정말 생각이 없는 건지 뭔지, 도통 모르겠다.


처음 레분토의 다시마 사업가의 집에서 불이 난 사건, 도쿄의 은퇴한 사업가가 살해된 사건, 6살 아이의 유괴사건. 별도의 사건으로 보이는 이 범죄들이 우노 간지라는 한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러면서도 긴가민가. 형사들은 여러 가지 증거를 확인하면서 간지를 용의자로 추적하지만, 평소 간지의 행동으로 보면 도저히 이런 범죄를 저지를만한 인물이 아닌 거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를 아는 사람 모두 간지가 그 정도의 일을 저지를 거로 여기지 않는다. 그 바보가? 설마. 그래도 그가 했을지도 모를 범죄를 떠올리면 어떻게 해서든 간지를 붙잡아야만 했다. 그에게 물어보기라도 하려면 일단 그를 마주해야 하지 않겠는가. 간지는 도망치고, 형사들은 그를 잡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린다. 그리고 간지는, 붙잡힌다.


모두가 간지를 쫓는다. 그가 정말 범인일까 궁금하면서,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범죄의 자백은 차치하고, 그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의 현재는 어떻게 흘러오게 되었는지 들어야만 했다. 이야기의 중심은 간지가 저지른 범죄의 시작과 과정과 결말이었지만, 점점 또 다른 방향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간지가 범죄를 저지르면서 보인 행동이 내내 이상했던 거다. 그는 타인의 감정에 신경 쓰지 않는다. 죽음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는다. 그냥 어떤 일이 일어난 상황 그대로만 받아들인다. 게다가 순간적으로 그는 그 자신을 버린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위험에 빠질 때마다 그의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여행을 간다. 바로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잊는다.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려보면 일을 다 끝났다. 누가 죽어 있거나, 앞의 사람이 화가 잔뜩 났거나, 내내 상대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거나. 간지의 처지에서 보면 참 좋은 방식인데, 그가 언제부터 이런 태도로 세상을 살아왔는지 추적해야 했다.


그렇다. 어릴 적 삿포로에서 살던 때 어머니의 결혼 상대에게 매일 야단을 맞았다. 젓가락을 쥐는 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욕을 먹고, 법을 흘린다고 엄한 꾸지람을 들었다. 어느 날 자신은 감정의 스위치를 내리는 기술을 익혔다. 그 이후로 무서운 것이 없어졌고 긴장하는 일도 없어졌다. 설사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2, 99페이지)


작가는 1963년 일본에서 실제로 발생한 유괴사건을 모티브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소설의 내용으로 추측하자면, 이 시기는 전쟁이 끝나고, 사는 것은 넉넉하지 못했을 테고, 여기저기 노동자의 모습이 많이 보였던 시절인 듯하다. 각 가정에 전화가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 시절이기도 했단다. 유괴사건은 그 전화가 중요 단서가 되어 실마리를 잡는다. 간지를 붙잡고 보니 그의 성장 과정의 흑역사가 현재의 간지를 만들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지금까지 간지가 빈집털이를 놀이처럼 해왔고, 유괴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으로 만들어진 건 시작이 있었다는 거다. 그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의 욕망에 집중하고,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기억을 잊으면서 살아왔던 건 누구의 책임일까. 소설은 그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내왔고, 그 과정에서 그에게 일어난 일들 때문에 현재의 그가 만들어졌다는 걸 설명한다. 그에게 죄를 물어야 하는데, 그의 인생을 만든 환경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우리는 이제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범죄자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여기에 적용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좋은 흐름을 가까이하면 그 흐름에 섞인다. 자라나는 시기에 보고 듣고 배운 것들로 어른의 바탕이 된다. 이 소설이 그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간지의 시간을 보여준다. 죄의 근원을 물으면서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가 저지른 일은 범죄이며, 살인이고, 용서받을 수 없다. 단숨에 읽히면서도, 이야기에 푹 빠져들면서도, 소설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독자만의 결말을 아직 내리지 못하게 한다. 어렵고 또 어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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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6-25 0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잡힐지도 모른다 생각하기도 할 텐데, 우노 간지는 그런 모습이 아예 보이지 않다니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볼 듯합니다 범죄자는 만들어지기도 하죠 어릴 때 좋은 어른을 하나라도 만났다면 좀 나았을 텐데, 그런 일은 없어서 감정의 스위치를 아예 내려버리게 됐군요 그런 거 안되기도 했지만, 저지른 죄가 있으니 안됐다고만 생각할 수도 없겠습니다


희선

scott 2021-06-25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고 싶었는데 구단님 리뷰 읽고 바로 7월용 책으로 쟁여둠요 ^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