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모모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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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우리를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가. 아니,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사랑해야 하는가. 아니, 이것도 아닌 것 같다. 사랑하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느냐고 묻는 게 맞겠다. 일부러 사랑의 자세를 정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어가는 이런 사람. 내가 사랑하는 상대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건 너무 당연했다. 내가 상대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된다는 것. 누군가에게 좋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게 사랑의 긍정 효과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웃으며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그 사람에게로 이어졌다.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바라 마지않던 힘찬 충동이었다. (179페이지)


이 아이들도 그런 사랑을 했다. 비록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사랑이 흘러가지 않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그게 최선이라고 믿고 행동했다. 오늘을 행복한 기억으로, 웃게 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각자에게 간절한 날들이었기에,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 사랑을 믿었다. 그것뿐이었다.


히노 마오리는 사고로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오늘의 일을 내일 기억하지 못한다. 자고 일어나면 기억이 리셋된다. 이런 병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히노의 기억 장애는 불행이었다. 그렇다고 오늘을 살 수 없지는 않은가. 그녀만의 방식대로 오늘을 기록하고 내일을 살아간다. 휴대전화와 수첩, 메모지에 오늘의 모든 일을 기록한다. 다음 날 아침 자고 일어나면 전날의 기록으로 기억을 복구한다. 매일 그녀의 일과다. 그러다 우연히 사귀게 된 가미야 도루와의 시간을 걱정한다. 그래서 조건부 연애를 시작했다. ‘학교 끝날 때까지 서로에게 말 걸지 않고, 연락은 짧게 하고, 정말 좋아하지는 말라는 조건으로 히노는 도루가 내민 손을 잡는다.


처음 히노의 연애 조건을 들었을 때는 뭐가 이렇게 수상한가 싶었다. 그녀가 감추는 게 무엇이기에 이렇게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상대를 수용하는지 모르겠다는 마음이었다. 알고 나니 그녀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고,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기억 상실이 그녀에게 끼칠 위험을 막기 위함이었다. 장난처럼, 다른 친구를 구하려고 히노에게 연애 제안을 한 도루에게도 이 연애가 순수한 시작은 아니었다. 학교폭력을 당하는 친구를 구하려고 나선 게 히노에게 연애를 하자고 말하는 거였다. 히노는 당황했겠지만, 바로 이 상황을 설명하면 되니까 일단 부딪혔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두 사람 앞에 놓인 거다. 히노는 도루의 연애 제안을 받아들였고, 도루는 장난과 임무였다는 처음 의도를 바로 털어놓지 못했다. 이 연애 어디로 갈까?


이렇게 시작한 연애였으니 두 사람의 연애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겠지. 거짓(?)으로 시작된 연애가 온전한 적이 없었으니 이 위태로움도 곧 터지고야 말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이미 한참 나이를 먹은 내가 불신으로 사랑을 바라보는 걸 지적하는 것처럼, 너무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게 오늘을 사랑했다. 방과 후 만나고, 이야기하고, 서로를 더 알기 위해 애썼다. 함께 벚꽃을 보고 같이 도서관에 가고 놀이공원을 걸었다. 뜨거운 여름날에 자전거를 탔다. 히노는 도루에 관한 걸 알아낼 때마다 기록했고, 도루는 히노의 웃음에 자꾸만 빠져들었다. 이제 이들의 연애 조건은 변경되어야 했다. 진짜 좋아해 버렸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씩 더 알게 되는 서로의 진짜 이야기들은 이 연애에 자양분이 된다. 상대를 더 깊게 알아간다는 건 연애의 기쁨이다. 사랑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각자의 불행과 상처에 자리한 것이 영역을 넓혀가기 전에, 행복하고 좋은 일을 더 많이 만들고 싶어졌다. 내일이면 지워질 오늘이 아니라, 내일 더 잘 지내고 싶은 오늘을 살아가고 싶어졌다. 이거 아닌가? 간절하게 기다릴 내일이 있고, 그런 내일을 위해 오늘 더 충실하고 값지게 살아가는 일. 사랑의 의미는 그렇게 또 쌓여간다. 이런 사랑이 틀릴 리가 없다.


새롭고 즐거운 일상을 시작하자. 그게 바로 희망일 것이다.

안 그래, 히노?

계획이 있던 나는 평소라면 짓지 않을 표정으로 씩 웃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이 풍족해지는 일이라고 말하듯이. (128~129페이지)


누군가를 좋아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일을 본다는 건 그 자체로 설렌다. 게다가 이 아이들은 고등학생이다. 막연하게 누굴 좋아한다고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상태의 감정이 어떻게 스며들고 흘러가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히노는 히노대로 그녀가 기억을 잃고 복원하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불안했던 것이 도루와의 연애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호기심에 시작했다. 도루 역시 아버지와 둘이 사는 가정환경에, 학생이자 살림꾼으로 지내는 날들의 빈틈을 히노와의 시간으로 채웠다. 엉뚱하게 시작된 만남이지만, 이 아이들은 그 연애를 완전하게 이끌고 있었다. 그건 진심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못할 일이다. 시작이야 어땠든지, 함께하는 시간에 마음을 다한다는 건 사랑이 아니면 보여주지 못한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 아이들이 하는 건, 사랑이다.


이 소설이 단순히 히노와 도루의 사랑만으로 채워졌다면 이 복잡한 감정을 쉽게 설명하지는 못할 듯하다. 두 사람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했을 때 이 시간은 더 완벽해졌다. 히노의 기억 장애를 잘 아는 친구 와타야 이즈미는 도루의 접근에 히노를 걱정하면서도 두 사람의 진심을 알았을 때는 누구보다 응원했다. 어떻게 해야 이 두 사람이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지 지켜보고 도움을 주었다. 도루의 아버지는 아들의 연애를 응원했다. 그리고 지금은 따로 지내지만, 누구보다 도루의 삶을 염려하는 누나 역시 이 관계의 든든한 조력자다. 각자의 인생도 챙겨야 했기에 모든 시간을 같이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인생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히노와 도루에게는 든든한 힘이 된다. 성장한다는 것, 꿈을 찾아가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고 증명한 이들이었으니까.


나는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다가가면서 보여주는 연애의 풋풋함에 설렜는데, 거기에 이 소설이 보여주는 성장의 힘에 더 눈길이 갔다. 하루하루의 기록에 몰입하고 내일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히노에게 미래는 없어 보였다. 당연하다. 내일이면 기억에 없을 오늘을 사는 것도 벅찬 일인데, 감히 오늘보다 먼 시간을 계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 히노에게 도루는 제안한다. 히노가 잘하고 좋아하는 그림을 계속 그리기를. 어차피 내일이면 오늘 그린 것도 모를 텐데 뭐하러 시간 낭비를 하는가 싶겠지만, 인간의 기억이란 상실되면서도 몸이 기억하는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히노가 하루하루 쌓아갔던, 그리는 시간이 나중에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지 알게 되었을 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눈물이 날 뻔했다. 누군가 나의 불가능을, 좌절을, 불행을 걱정하고 나아지게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힘이 될까 싶었다. 나 혼자 일어서지 못하고 자꾸 그 자리에 서성거리면서, 불안을 느끼는 것보다 안주하는 것을 택할 때, 의견을 내주고 같이 고민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정말 행복하지 않아?


숫자가 딱 떨어지는 계산이 아니라, 오직 서로를 봐주는 이런 이야기가 오랜만에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나아가게 하고, 마음껏 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게 행복할 것 같다. 매일 내 머릿속 기억이 지워져서 슬퍼도, 가슴이 아는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해도 같이 사랑을 했던 한 사람이 기억하면 되는 일. 우리는 같이 사랑했고, 같은 시간을 통과했으며,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니, 그거면 됐다. 정말 소중하고 간절한 것이 새겨진 기분이다. 이쯤 되면 소설의 결말도 궁금할 테다. 이런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지 확인해야 했다. 마지막의 반전을 확인하고 나면 또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글쎄, 이게 해피엔딩일까 새드엔딩일까. 사랑하는 시간은 행복했으며, 하루하루 쌓여가는 모든 시간에 그들은 성장했으니, 머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가슴에 남아버린 것을 소중히 아는 이가 되었는데 말이다.


어떤 슬픔도 사람은 언젠가 잊어버린다. 상처는 언제까지고 아픈 것은 아니다. (362페이지)


모두 언젠가는 잃을 것들이다. 없어질 것들이다.

그래도…… 온갖 것이 변해간다 해도. 인생을 삶으로써 과거가, 아름다운 것이 흐릿해진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있다.

마음이 그리는 세계는 언제까지고 빛바래지 않는다. (374페이지)


담백하고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묘사되는 풍경이 너무 예뻐서 봄날의 푸릇한 장면을 상상하며 읽기도 했다. 얼핏 어떤 장면에서는 두근거리기도 한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며, 같이 고민하는 순간들을 경험했다. 어쩌면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지나왔을 순간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별일 없는 오늘에 안도하며 기대 없는 내일을 다시 바라보기도 하는. 도루의 다정함에 사랑을 다시 보고 싶고, 히노의 노력에 인생의 달리기를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잔잔했지만 그 어느 날보다 뜨거웠던 오늘, 어느 여름밤을 식히는 이야기로 남을 듯하다.



#오늘밤세계에서이사랑이사라진다해도 #이치조미사키 #모모출판

#소설 #문학 #성장 #사랑 #청춘소설 #기억장애 ##책추천

#첫사랑 #선행성기억상실증 #계약연애 #벚꽃 #불꽃놀이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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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7-30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하루만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사람 처음 본 건 아니지만... 다른 데서도 하루만 기억하는 사람 봤어요 그런데도 아주 다 잊은 건 아니기도 하더군요 혼자가 아니고 곁에 누군가 있어서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좋게만 흘러가지 않는 듯하네요 그것보다 두 사람이 그리고 둘레 사람과 지내는 이야기를 보는 게 더 낫겠습니다


희선

구단씨 2021-08-03 00:50   좋아요 1 | URL
예전에 봤던 영화 메멘토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이런 상황에서 혼자였다면 견딜 수 없는 날들 아닐까요?
이 소설 읽고 그런 생각했어요. 님 말씀처럼, 곁에 있는 누군가가 이 불행도, 위기도 잘 건너갈 수 있도록 돕고 있었으니...
 
내향적인 사람 중 가장 외향적인 사람 - 까꿍TOON
최서연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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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읽다가 커피를 뿜기 일보 직전에 겨우 정신 차리니, 옆자리 사람이 나를 째려보고 있더라. , 나 정말 그렇게 진상이었어? 나도 모르게 첫 페이지에 등장한 지하철 빌런을 읽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옆자리에 앉은 모르는 아줌마가 내 거 이어폰 한쪽을 당당하게 끼고 있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막 화내도 되는데 순간 너무 당황해서 할 말을 잃은 듯한 느낌. 남의 이어폰을 마치 자기 것처럼 당당하게, ‘너 한쪽 이어폰 안 듣잖아?’ 하면서 자기 귀에 꽂는 사람은 뭐냐? 이것뿐만 아니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에피소드가 웃음 폭탄이다. 왜 까꿍의 일상은 이런 건가 싶으면서도, 까꿍에게 이런 재미난 일상을 끌어당기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했다.



까꿍의 주변에는 웃음유발자가 가득하다. 친구, 가족, 그 밖의 사람들. 아르바이트하면서 만난 진상들은 왜 그렇게 다 특이한지, 멀쩡하게 잘 신고 가던 구두는 왜 하수구에 끼어서 그녀를 절름발이로 만드는지, 학원 수강하는 초등생에게 나눠 먹으라던 비타민은 왜 발치한 이가 되어야만 했는지. 독서실의 불청객 비둘기를 쫓지 못하는 사장님 대신에 그녀가 나서야만 했던 일, 버스에 탄 커플의 셀카에 당당하게 중심을 차지한 그녀의 얼굴은 어쩔. 레이어드 커트로 세련미를 폭발시키겠다는 계획은 시간을 거스르는 자가 되어 인생 역주행하고 있었다. 인생 사진은커녕 기본 사진에서조차 대충 찍으면서 자기와 다른 얼굴로 의심의 도가니를 만들고, 뷔스티에 원피스의 수명을 한방에 꺾어놓는다. 돼지껍데기집사장님의 서비스는 공포 그 자체였고, 음식을 남기고 뛰쳐나가게 만드는 일상의 특별한 기억이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는 않는다.



, 생각만 해도 웃기다.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웃기고, 어이가 없어서 웃긴 이야기들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이 여름의 더위는 생각나지도 않는다. 가만히 듣다 보면 까꿍의 이런 천연덕스러운 긍정 마인드와 당황할 순간에도 무던하게 넘기는 자세는 이 가족에서 물려받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LA 여행에서 살아남으려고 중국인 여행객 속에 뛰어든 모녀는 너무 기발했다. 자전거 도둑이 극성일 때 꽁꽁 묶어둔 까꿍 엄마의 자전거는 안심되었다. 이 정도로 꽉 묶어놨는데 누가 훔쳐 갈 수 있으리. 하지만 웬걸. 자전거를 못 훔친다면 안장이라도 가져가 보겠다는 도둑의 집념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런 도둑 따위 별거 아니라는 듯이 엄마는 또 그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어떻게? 뒷자리에 타고 허리를 바짝 수그리며 두 팔을 쭉 뻗어 자전거 손잡이를 잡고 괴상한 자세로 힘껏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도둑이 아니라 이 가족의 집념을 이길 수 없다는 게 맞는 말. 오호, 까꿍 어머님 최고!



어디 가족뿐이겠는가. 그녀의 옆에 있는 친구들은 이 웃음에 절대 빠질 수 없었다. 비밀 생일 파티를 망쳐버리는 것은 기본이고, 같이 공부하자면 카페에서 만나면 책의 표지에 빠져들다가 헤어지기 일쑤였다. 만나기로 찰떡같이 약속해도 귀찮음과 게으름, 추위가 뭉개버린 약속은 너무 쉽게 취소되었다. 누구도 이 약속 취소에 딴지를 걸지 않았고, 오히려 기쁨의 안도를 만끽했다. 역시, 비슷한 사람은 통하는 게 있는가 보다. 비슷하지 않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어? 기가 막힌 상황은 언제나, 계속 펼쳐진다. 친구의 남친을 만나러 갔다가 못 볼 꼴을 보고야 말았으니, 친구는 남친의 웃기지도 않은 얘기에 격하게 리액션 해주다가 사레가 들었고, 급기야 콧구멍으로 쫄면을 내쏟는 마법을 펼쳤다는. @@ 절대 안 먹겠다고 서로 다짐하면 헤어졌는데, 야식 배달을 잘못 받고 아무렇지도 않게 건너온 친구. 민망할 것 같은데 민망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지우고 천진난만한 표정을 쏘아내는 이 친구들이 어쩌면 좋으냐.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까꿍은 내향인 49% + 외향인 51%’ 성향의 소유자라고 하는데, 이 책에서만 보자면 까꿍은 그저 완벽한 외향인이 아닐까 싶다. 아무렇지도 않게 드립의 끝을 보여주는 그 표정과 몸짓 발짓 손짓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이 만화가 재밌는 이유는 간결하게 그려진 한 컷에 그 많은 말을 충분히 담고 있다는 것(몇 마디 말에서 모든 상황 파악하고 결론까지 다 보게 해주지 않나?). 거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멘트가 이 만화를 더욱 몰입하게 한다. 즐겁지 않을 수가 없다. 굳이 더 찾아보고 싶게 하는 이 마성의 매력은 뭐냐고 대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게 아쉬울 정도로 실컷 웃고 유쾌함의 끝을 보게 했다.


그렇다고 웃음만 남긴 건 아니다. 코로나 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도 공감을 더 한다. 마스크 속에서 움직이던 입술의 흔적은 또 다른 자국을 남기고, 어느새 비대면 수업은 익숙해졌다. 오랜만에 시험을 치르러 학교에 가는 게 일상이 되었다. 늦잠으로 잠결에 비몽사몽 온라인 수업 듣는다고 카메라를 켜기도 한다. 초등학교 조카 아이 온라인 수업 듣는 거 보니까, 상의 티셔츠만 갈아입고 하의는 여전히 잠옷인 채로 책상 의자에 앉아 있더라. 이제 온라인 수업이 편하고 익숙해서 오히려 일주일에 한두 번 학교 가는 날이 귀찮단다. 집에서 뒹굴뒹굴하다 보니 살이 쪄서 고무줄 바지밖에 안 맞는다고. ㅠㅠ 까꿍의 코로나 일상도 다르지 않았다는 게 너무 공감된다. 히잉.


평범한 2000년생 대학생인 저자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려서 SNS에 올리면서 시작된 까꿍TOON은 인기 인스타툰이라고 한다. 미술을 전공하거나 만화를 배운 것도 아니라니 더 놀랍다. 캐릭터 표정 하나에 많은 말이 담겼고, 특유의 유머 감각은 짧은 멘트로 발휘한다. 왜 이걸 아직 몰랐는지 아쉬울 정도로 일상의 웃음유발자였다. 남의 이야기라 웃긴 건가 싶다가도, 이거 내 얘기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보면서 이렇게 웃을 수 있다니, 오랜만에 실컷 웃고 얼굴 주름살 늘리는 일이 행복했다.



#내향적인사람중가장외향적인사람 #최서연 #까꿍툰 #까꿍TOON

#일상만화 #코믹 #긍정의최고봉 #까꿍 #비채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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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7-30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이 코미디라니, 무슨 일이든 재미있게 봐설지도 모르겠네요 저라면 안 좋게 여길 일도 이걸 그린 사람은 재미있게 여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그런 친구가 있는가 봅니다


희선

구단씨 2021-08-03 00:51   좋아요 1 | URL
재밌어요. 웃음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저와 웃음 코드가 다른 사람도 분명 있더라고요. ㅎㅎㅎ
 
우리는 안녕 - 박준 시 그림책
박준 지음, 김한나 그림 / 난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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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그리움을 쌓고 이별을 누른다. 볼 수 없어도 그리면서,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기며 다정하게 안녕을 말한다.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이렇게 또 안부를 묻는다. ˝안녕, 사랑하는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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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린 가이드
김정연 지음 / 코난북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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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코트 메뉴 앞에서 서성이던 기억, 메뉴판 앞에서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시간만 보내던 일. 나만 있는 거 아니지? 선뜻 메뉴 선택이 어려울 때 도움을 받는 건 메뉴의 설명도 있지만, 눈으로 보이는 음식 모형이다. ‘, 내가 이 음식을 주문하면 이렇게 나오겠군!’ 이런 기대를 하고 주문하곤 하는데, 언제나 역시나 늘 그렇듯 음식 모형과 똑같이 나오는 법은 없었다. 게다가 기대감 때문인지 맛으로 만족하는 때도 드물었다. 그저 배고픔을 좀 달래준다는 정도면 되겠지 싶은 포기? 가짜인 걸 알면서도 음식 모형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 모형의 맛에 기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나는 정말 아직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워낙 입소문을 탄 작가의 전작 때문인지, 이 책은 읽기도 전에 기대감에 부풀었다. 소개 글 따위 읽지 않았다. 표지와 제목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거 아녀? , 아냐, 아니었어. 미슐랭 가이드의 한국판으로 생각했다. 이세린 가이드로 우리에게 맛의 천국을 열어줄 거로 믿었지 뭐야. (, 나는 작가의 이름을 알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 이름이 이세린이라고 계속 생각했다. 대체 뭐야?) 작가는 맛의 천국을 열어주긴 했다. 맛집 투어 같은 소개가 아니라, 음식점에 진열될 음식 모형을 만들면서 이야기를 담았다. 그 음식에 관한 기억, 슬쩍 과거로의 여행, 먹는 일의 고됨과 의미까지. 그러고 보니 음식을 만드는 우리 엄마의 이야기이면서, 음식 모형을 만드는 직업으로 가기까지의 성장 과정, 인생사에 끼어드는 온갖 웃음과 눈물까지 담았네그려.


보지 못한 시간만큼 달라지는 사람들.

그렇더라도

오랜만이다.”

함께하는 식사라서 생기는 관계의 빈틈에

음식은 고맙게도 늘 할 것이 되어준다.

내가 너희의 갈 길 잃은 눈과 손을 구해줄게! 빈틈을 메꿔줄게!’ (272페이지)


이세린은 음식 모형 만드는 일을 하는데, 조직에서 나와서 혼자서 일한다. 이른바 자영업자. 따로 작업실에서 일하고 집으로 퇴근한다. 제법 오래 이쪽 일을 해서 그런지 꾸준한 재주문도 있고, 섬세한 작업도 있다. 우리가 음식점에서, 혹은 어디 박물관이나 전시관에서 봤던 음식 모형을 생각하면 금방 이세린이 떠오를 것 같다.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든다. 먹음직스럽게, 사실과 거의 흡사하게 만드는 작업이 쉽지는 않다.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들어내듯, 이세린의 음식 모형도 그러하다. 집중하고 또 집중해서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 집중력에도 틈틈이 끼어드는 게 있다. 그녀의 이야기다. 오빠들 밑에서 딸이라는 이유로 존중받지 못하던 시절, 너무 마른 체형에 엄마도 본인도 괴로웠던 순간들, 유전처럼 아버지에게 모형 만드는 일을 물려받은 남매들. 왜 하필 그녀는 음식 모형일까?


자연사박물관 쪽으로 모형의 꿈을 키웠던 그녀가 직장에서 음식 모형으로 처음 시작했던 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모형이지만 그녀가 음식 만드는 장면을 보면 온 마음을 다한다. 음식에 이어진 먹는다는 일에 생각한다. 프로 정신으로 모형을 만들면서, 누구보다 따뜻하고 애틋한 음식의 기억이 있다. 더불어 그 음식을 먹고 성장하는 그녀에게 눈물과 웃음이 배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당연히 음식 모형이다. 음식 모형 제작자의 삶을 처음 봤다. 음식점에서 흔하게 보던 게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진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을 반성했다. (아마도 내가 그걸 보고 음식 주문하고 먹은 후의 배신감을 너무 자주 느껴서 그런 건지도. ㅠㅠ) 모형이지만 그 음식에도 나름대로 역사와 사연이 있다. 누구와 먹었는지, 그 음식 먹으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개인이 아닌 풍습처럼 계속된 음식의 역사가 줄줄 들려온다. 그렇게 듣는 음식의 역사는 사실인 듯 풍문인 듯, 믿거나 말거나 하는 식이기도 하지만, 낯설지 않다. 이세린의 상상이든 아니든, 음식으로 엮어낸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맛있다. 내가 지금 입으로 넣는 이 작은 조각 하나에도 역사가 있다고 생각하면 다시 보이지 않나? 맛도 달라질지 모른다. , 어쨌거나 맛있으면 그만. ^^


그런 다양한 음식 모형을 만들면서 이세린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릴까? 알맹이는 없고 보이는 부분만 채워 넣어서 보기 좋게 만드는 걸 보면 모형과 이야기의 진심 사이는 멀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음식 자체에는 모든 게 담긴 듯하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열다섯 가지 메뉴는 흔하면서도 특별하다. 캘리포니아 롤, 와플과 번데기, 비빔밥, 배추김치, 곶감과 굴비, 떡국과 미역국, 매운라면, 녹차크림 바움쿠헨, , 한상차림, 모둠 튀김, 청주와 탁주, 인절미빙수와 팥빙수, 불고기 도시락, 주말 전골. 이 음식들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했는데, 우리집에서 보고 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은 이야기와 세상의 이런 사연도 있구나 싶은 이야기가 겹쳐진다. 비슷한 듯 다른 듯,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은 이야기들이 가슴속으로 들어온다.



몇 가지만 떠올려보자면, 맨 위에 올려지는 양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것 같은 인절미빙수와 팥빙수. 잘 만들다가 재채기 한 번에 콩가루가 다 날려버리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인상을 썼다. 이거 치우려면 힘들겠군, 다시 만들려면 괴롭겠어. 똑같은 거로 여겼던 가래떡과 떡국 떡의 차이를 이제야 알았다. 장수를 기원하는 가래떡, 잘리는 모양으로 엽전을 연결했다던 떡국 떡은 재물을 의미한다지. 새해에 장수와 재물을 기원하는 마음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시작은 몰라도 계속하게 되는 습관처럼, 우리는 내년 설날에도 가래떡을 뽑고 그 가래떡을 잘라서 떡국을 끓여 먹고 있겠지. 곡물에 곰팡이를 번식시킨 누룩으로 술을 만드는 일. 발효가 끝난 술독에 용수를 박아 거르면, 맑은 부분은 청주 탁한 부분은 탁주가 된단다. 두 가지 술이 한꺼번에 만들어지네? 교도소에서까지 수감자들이 술을 만들어 먹을 정도라고 하던데, 술이 그렇게 간절한 게 되어버리는구나.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작품은 배추김치가 아닐까. 주문받은 일 때문에 대용량으로 배추김치 모형을 만들면서 엄마를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힘드니까 김치 담그지 말아라, 조금씩만 하셔라, 안 먹으니까 안 보내주셔도 된다, 그러다가 툭 배송된 김장김치 택배. 안 먹는다, 싫다, 보내지 말라 하면서도, 막상 일 끝나고 동료와 먹겠다고 선택한 저녁 메뉴가 묵은지 김치찜이다. 김포족(김장을 포기한 사람들)들도 김치를 먹기는 한다. 김장을 안 할 뿐이지. 암만. 해마다 엄마랑 둘이 김장을 하는 나는 이제 둘만의 김장을 당연하게 여긴다. 딱 먹을 만큼만, 식구들 조금씩 보내줄 만큼만, 무리하지 않게 적당히. 그러다가 어느 해는 김장을 안 하기도 했다. 하기 싫으면, 못하겠으면 안 하면 되지. 그해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준 김장김치 몇 포기로, 온라인으로 주문한 김치를 먹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 아직도 나는 김장에 목숨 걸듯이 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김장 안 하면, 작년보다 조금만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아는 사람들. 김장김치,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먹고 살아집니다. 큰일 나지 않아요.



하루 세끼 먹고 사는 일은 고단하다. 그저 먹기만 하면 되는 것 같지만, 단순하지 않다. 그러니 음식이 음식으로만 기억되지 않고 좋고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거겠지. 삐쩍 마른 딸이 잘 먹지 않는다고 오히려 엄마를 나무라는 일이 빈번하고, 밥상머리 교육이라고 먹는 데 자꾸만 잔소리하고 혼내고. 먹는 일이 왜 먹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을까. 하나하나 더듬어보면 참 많은 이야기가 음식에 쌓이고 쌓였을 것 같다. 이세린은 그런 일들, 그런 마음을 음식 모형을 만들면서 독백한다. 마치 누가 옆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읽으면서 나도 옆에서 끄덕이고 있었다. ㅎㅎㅎ 같이 이야기하듯 들으면서 웃고 욕하고 그랬다. 허를 찌르는듯한 말에는 더 쓰라리고, 아픈 기억도 꺼내 봤다. 명절 음식 남은 거로 비빔밥을 질리도록 먹었다는 이야기에는 괜히 밥상을 엎고 싶기도 했다. , 정말 싫다. 당연하게 차별하던 시절의 이야기에 울컥하고 원망스럽고. 소개된 음식이 열다섯 가지가 아니라 더 많았더라면, 더 많은 이야기가 푹푹 녹아 있겠네. 할 말이 더 많아졌겠어. 음식으로 천일야화 한번 쓰는 거 아녀?


참고로 우리 집은 더 이상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엄마가 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시작하게 되면서

일할 사람이 없어지자 가족회의가 있었고

"흐음."

"뭐 어쩔 수 없지."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 할 만큼 했으니 우리도 이제 그만해도 될 거야."

남자들의 차례가 되면 세상은 바뀐다. (180페이지)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먹는 일에 관해 생각한다. 단순히 먹는 행위에 비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담긴 게 음식일 테다. 이야기가 담긴 음식이 앞으로의 시간에 더 쌓이겠지. 앞으로 어떤 음식에 어떤 이야기가 더 쌓여갈지 기대된다. 눈물이나 분노보다는 웃음이나 행복이 쌓이는 음식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음식 앞에서는 맛있게 먹는 게 가장 먼저라고 본다. 아님?


그러고 보니 나는 내일 엄마 집에 김치 담그러 간다. 전라도에서만 먹는다는(근데 요즘에는 다른 지역에서도 종종 보이던데?) 고구마순(고구마 줄기) 김치. 여름의 별미지. 예전에는 정말 많이 먹었는데, 언젠가부터 잘 안 먹게 되더라. 일단 더운 여름에 김치 담그는 게 귀찮기도 하지만, 고구마순 그거 껍질 벗기는 거 장난 아니거든. 손끝이 까매지니까 일단 손에 짝 붙는 비닐장갑 하나 끼고 까야 한다. 허리 아프게 그 단순노동에 푹 빠져 있어야 일의 끝이 보인다. 그렇게 힘들게 까고 김치 담그고 나면 양이 얼마 안 된다. 이런 슬픈 일이. 그래도 그거 맛 좀 보겠다고 그 힘든 노동을 시작하는 게 참 아이러니. 먹고 싶은 걸 어쩌겠어. 맛있게 먹을 그 순간을 기대하며 기합 한번 넣고 작업 시작해야지. 나중에 엄마 안 계시면 고구마순 김치 어디서 구해 먹냐. 에이, 아무래도 나중에 나의 음식 역사에는 고구마순 김치가 슬픔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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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1-07-2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구마 순 김치... 정말 별미죠.ㅎ 생각만으로 군침 도네요.^^
김치로 볶음 나물로 다양하게 먹을 수 있는 식재료 같아요.^^

구단씨 2021-07-24 11:25   좋아요 1 | URL
여름에만 맛 볼 수 있어서 정말 별미네요.
껍질 까는 작업은 힘들지만, 다 하고 나면 만족감이... ^^
 
이세린 가이드
김정연 지음 / 코난북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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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에 담긴 진짜 삶을 생각하느라, 모형으로 변신한 음식이란 걸 잊고 자꾸 먹고 싶었다. 음식 만화인 줄 알았는데, 사람 이야기였네. 마음의 허기를 이렇게 채우다니. 다 읽고나면 포만감에 배를 두드리게 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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