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일, 지금만큼은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 테오, 180일 간의 사랑의 기록
테오 지음 / 예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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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는 건, 내가 많이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합니다. 위로받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나는 어색합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아픈(아팠던) 마음을 직접 듣는 건 불편합니다. 긴장됩니다. 어쩌면, 두렵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써 피하고 싶었던 것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지나간 시간 속에서 허우적대는 못난이를 수면 위로 떠올리기도 하는 것 같고... 아마도, 그래서였나 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마음 한 줄이 어떻게 다가올지 몰라 당황스럽고, 허둥대는 내 모습이 그려져서 두려운. 아마 그런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도.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 그 두려움을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180일, 지금만큼은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자신의 기억 속의 일들을, 사랑을, 시간의 흐름을...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런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그 순간의 우리는 행복합니다. 행복해야 한다고 주문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이 행복하지 않다면, 사랑이 아닐 것만 같아서요. 웃음의 색깔마저 달라지게 하는 그것이 사랑일 테니까요. 감히 '기적'이라 불러도 좋을 시간. 그 기적이 힘을 발휘하는 타이밍이니까요. 그 시간 오래 이어갈 수 있도록 꽉 붙잡아 두고 싶은 다짐은 필수. 서로에게 바라는 마음을 조금 숨겨도 좋은, 내가 할 수 있는 충분한 배려. 그가 가진 두려움 한쪽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 허밍과 가벼운 발걸음이 주는 봄날의 충만감. 옆에 있기에 저절로 든든해지는 위로...

 

 

그가 그녀와 함께했다는 사랑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비슷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봅니다. 모양이 조금 다를지언정, 그 사랑의 본질은 같지 않을까요? 그 마음을 다하고, 그 순간을 다 해서 해야만 하는 것을 품고 있었을 테니까요.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그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사랑은 끝날 테니까요. 떨어질 테니까요. 방심하면, 자동 탈락이니까요. 그래서 더 열심히 움직여 그 사랑을 지키고 싶은 건가 봅니다. 탈락의 순간을 가능한 한, 멀리 미뤄두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최선을 다해도, 언젠가 그 끝이 오기도 합니다. 사랑이 나에게 흘러오듯 이별도 나에게 흘러올 수 있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흐르게 되어 있거든요. 그에게도 사랑이 있었고, 이별이 있었고, 흐르는 시간이 있었네요. 그 이별을 덜 아프게, 조금은 완전하게 만들어갈 수 있었던 시간, 180일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준비한다고 해서, 이별이, 이별이 아닌 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 이별을 잘 맞이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서로에 대한 배려였네요. 감정의 선이 뚝 끊어내듯 잘릴 수는 없지만, 그 감정을 다독일 수 있게 하는 어떤 준비. 많이 아프겠지만, 그 시간이 꼭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 연애가 언젠가 끝날 것을 알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약간의 두려움. 그래서 준비하게 되는 차분한 이별...

 

 

끝이 올 거라는 것을, 온몸이 신호를 보냅니다. 눈빛이 먼저 알아채고, 손짓이 말하고 있음을 알면서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요. 제대로 된 이별을 하기 위해 다시 시작한 그의 연애의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들여다보게 됩니다. 반년여의 시간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이 그냥 이별이 아닌, 완전한 사랑의 끝에 오는 이별일 것임을...

 

 

사랑이 끝나고 나서 느끼는 편안함. 그게 뭘까 생각하다가 이런 느낌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사랑이 끝나고, 이별이 지나고 나서 비로소 찾아오는 그 마음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길게 늘어지는 이별이 아닌, 차분하고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는 이별을 만나는 거라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네요. 그렇군요...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언젠가 사랑의 끝에 찾아올, 그 이별을 감지하게 된다면, 그 준비를 해야겠다고 그에게 배우고 있어요. 이별이란 것이, 준비한다고 해서 완벽한 이별이 될 거라 확신하지는 않아요. 이미 알고 있거든요. 어떤 이별도 슬픔이 빠질 수는 없다는 것을. 아프지 않을 수도 없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 그 흐름을 느껴보려고요. 많은 것이 흘러가고 있음을 보고, 인정해보려고요. 흘러가다가, 마음이 희미해지다가, 그렇게 또 잊힐 수도 있음을... 그걸 인정하는 것. 그게 이별에 대한 준비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요.

 

 

 

 

 

 

 

 

 

 

 

 

 

나는 사는 일이 바람 같다고도 느낍니다.

가고 오는 걸 정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여행이 좋았습니다.

여행은 내가 원하는 대로 떠날 수 있으니까.

머물 수 있으니까.

그런 방식으로 당신을 찾아 안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구름 저쪽으로 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 232

 

 

 

 

금요일 밤이라고 착각을 했던 목요일, 오늘, 밤입니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문자를 한 통 보냅니다.

특별한 내용은 없습니다. 잘 지내느냐는 안부 한 줄에, 봄이 지나가고 있다는 평범한 계절의 인사가 전부입니다. 한참이 지난 후 그녀의 답장이 옵니다. 가끔 내가 보내주는 문자 한 통에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바쁜 건 아닌데 바쁜 것 같고, 숨이 쉬어지는데 답답한 것 같다고... 뭐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상태. 아마도 그런 건가 봅니다. 나도 그 마음을 아주 모르지 않기에 조용히 듣고 있습니다.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그녀에게 전하는 나의 안부가 그녀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안심합니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 사람의 안부가 물으며,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직, 내 안에 남아있어서...

 

 

나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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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
리즈 무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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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무게가 2kg이 늘었다. 평소에 3kg 정도만 더 줄여야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는데, 오히려 2kg이 더 늘었으니 이제는 5kg을 더 줄여야 한다. 몸무게가 늘어가는 것을 굳이 체중계에 올라가지 않아도 알고 있다. 거의 한달 가까이 폭식을 하고 있었고 평소에 먹는 양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체중계보다 내 몸이 더 잘 알고 있다.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 보통 잠을 자려고 했던 것에 비추어보면, 이번의 폭식은 예외의 일이다. 한때 폭식으로 평균 몸무게의 10kg 정도를 늘여본 적이 있던 터라, 다시 그때의 몸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 한 번의 경험으로 그 기억은 충분하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음식으로 뱃속을 채우는 그 많은 이유들 중의 하나가 허기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음속에 채워 넣을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음식으로 뱃속을 채워 넣는다. 마치 음식이 그 모든 허기짐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말 그대로 착각이다. 뱃속에 채워진 음식이 순간적인 포만감은 줄 지언즉, 영원성을 주지는 않는다.

 

무엇이 시작이었을까. 이 남자, 아서 오프. 몸무게가 250kg에 육박한다. 그마저도 넘을지 모른다. 체중계에 올라간 지가 몇 년은 되었으니 아마도 그 정도일 거라 추측할 뿐이다. 한때 대학교수였고 불미스러운 소문으로 학교를 그만둔 뒤, 그는 은둔자가 된다. 집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세상과는 철저히 고립된 생활을 한다. 움직이지 않았고, 우편물을 수거할 때 말고는 현관문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고, 대량의 음식을 흡입했다. 그리고 초고도 비만의 거구가 되었다. 그런 아서에게 유일한 소통의 대상은 20여 년 전에 알고 지냈던, 사랑했던 제자 샬린뿐이다. 둘은 그사이에 서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편지가 오고갔을 뿐이다. 그마저도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어느 날 샬린에게 전화가 온다. 자신의 아들의 대학 진로 문제에 대해 도움을 청하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몇 번의 전화가 왔지만 그게 끝이다. 이야기는 거기서 멈춘다. 잠깐 아서를 설레게 했던 샬린 소식은 다시 끊어졌고 아서는 평소의 삶으로 돌아온다.

 

샬린의 아들 켈 켈러. 열아홉의 고등학생이다. 공부는 못하지만 야구는 잘한다. 대학이 아닌 야구로 진로를 정하고자 하지만 엄마는 대학을 원한다. 하지만 켈에게는 자신의 진로만큼이나 엄마의 상태가 걱정이다. 술과 약에 취해 거의 정신을 놓고 사는 엄마. 맨 정신일 때는 오직 자신의 대학 진로 문제만이 전부인 엄마. 엄마는 언제부터 술에 중독이 되었고, 엄마를 이 지경까지 만들어놓은 것은 무엇일까. 열아홉 소년이 짊어지기에는 이 환경이 상당히 무겁다.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켈에게는 야구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할 텐데...

 

철저하게 자기만의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세 사람이다. 샬린, 켈, 아서. 술과 약에 중독된 샬린, 운동이 살길인 것처럼 보이는 켈, 음식만이 전부일 것 같은 아서. 고립된 하나의 세상에서 유일한 생존자들 같았다. 각자의 세상에서 혼자인 것 같은 사람들. 이들에게 뭔가 하나가 주어져야 한다면 오직 그것을 택하겠다는 마음처럼 보이는 한가지씩이었다. 이들에게 공통된 질문은 ‘왜?’였다.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 하지만 이미 알고 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이들의 하루하루 모습이 계속될수록 비춰지는 것은 결핍으로 인한 그 빈 공간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게 각자에게 술이나 운동이나 음식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들 모두 혼자였다. 가족이 있으나 없는 것과 같은 아서, 켈과 샬린은 모자사이지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가족관계다. 모든 것은 처음 시작점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처럼, 처음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대로 완성되지 못했던 가족은 그 결핍의 모습을 계속 이어간다. 결핍은 외로움을 가져오고 그 외로움을 채워줄 것들로 가득한 중독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계속되는 허기짐.

 

켈과 아서, 두 사람의 고백 같은 독백으로 계속되는 이야기 속에서 그 처음을 찾아낸다. 아서에게는 비만의 엄마가 있었고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지금까지도 아버지를 만나지는 않는다. 켈의 아버지는 켈이 4살 때 집을 나갔고 엄마인 샬린은 빈곤의 마을이 아닌 좋은 환경의 고등학교에 켈을 입학시킨다. 뭔가 점점 아귀가 맞지 않는 삶이 이어졌고, 지금 두 사람의 모습에 이르게 된 것이다. 쓰레기장 같은 집, 푹 꺼진 소파, 울리지 않는 전화벨, 집안에서 몇 발자국만 걸어도 숨이 차는 아서. 분위기가 어두운 집, 늘 TV 앞에서 술에 취한 채로 앉아있는 엄마, 자신과는 전혀 다른 환경의 동급생들을 바라봐야 하는 켈. 전혀 접점이 없는 아서와 켈이 서로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사이에 샬린이 있었다. 샬린이 아서와 주고받는 편지들, 켈의 진로문제를 꺼내면서 시작된 통화 사이에 뭔가가 있다.

 

이야기는 점점 환기되는 듯, 조금씩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아서의 집에 찾아온 청소용역인 욜란다의 등장은 고립된 삶을 즐기는 듯 보였던 아서에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한다. 어쩌면 그 전에 아서를 방문하겠다고 말한 샬린이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소망하는 것을 채우지 못한 결핍이 만들어낸 샬린의 허황된 망상, 그런 샬린을 맞을 준비를 하는 아서.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두 마음은 외로움으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던 한 사람을 집밖으로 걸음하게 하는 계기를 만든다. 누군가의 등장을 받아들이고, 진심을 담은 이야기를 하고, 십몇 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걸음을 내딛게 만들고 있다. 각자가 만들어낸 중독을 하나하나 떨쳐내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정말 혼자가 된 켈은 동급생들과의 다른 관계를 만들어갈 시선이 생긴 듯하다. 여자친구인 린지와의 관계가 어긋나고 멈출 것 같았는데, 의외의 전개에 희망적이 내일을 기대하게 한다. 소통의 좋은 예를 그대로 보여준 듯하다. 모든 것을 꺼내어놓고 이야기했을 때 형성되는 관계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일지 모를 이에 대한 기대감이 사그라졌을 때 실망이 아닌, 세상을 배우는 시선이 채워졌다. 테스트에서 좋은 결과를 받지 못할 것을 예상하면서 차선의 선택을 준비한다. 자신이 가진 삶의 무게가 가늠이 되어졌을까. 온전하지 못한 가족이 만들어낸 삶의 공허와 결핍, 외로움이 이들 각자에게 준 것은 그리 반길만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까지 안겨주었으니, 결국은 버려야 할 것들만 안겨준 것이다. 아픔과 고통이 함께였지만, 많은 경험이 지나갔다. 아서의 비만은 점점 가벼워질 것 같고, 진짜 혼자가 된 켈은 단단한 심장으로 세상과 소통할 것 같다. 결국은 결핍이나 외로움, 삶의 무게,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고 자기 자신이 뛰어 넘어야 할 벽이라는 것.

 

어느 날 아침, 켈이 친구 디의 집에서 아침의 빛을 차단한 검은 커튼을 열었을 때, 알았다. 아, 이제 다시 시작이겠구나. 좋은 않은 결과를 받는 일에도 다시 어두워진 커튼을 열겠구나 싶었다. 혼자가 아닌 사람들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으니, 같이 호흡하고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지 않겠는가. 반면, 아서가 호스트가 될 디너파티도 궁금해진다. 욜란다와 함께 준비하는 음식들, 처음으로 찾아오는 손님들,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는 집, 모두가. 사람과 함께 어우러지는, 자신이 예전에 살았던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아서를 그리게 된다. 문 하나만 열면 되는 것이었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닫힌 문 너머의 것들을 안 보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당히 잘,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었으나 쉽지만은 않은 책이기도 했다. 켈과 아서.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의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접점을 찾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너무 다른 두 사람의 환경과 모습들이 두 사람의 공통점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쉬울 리가 없다. 그렇게 다른 모습 안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것들이 내가 봐야할 것들이었다. 서로 다른 듯한 모습, 하지만 품고 있는 마음속의 허기짐, 그걸 채우는 방식들. 결국은 내가 나를 뛰어 넘어 그 시간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 무언가를 극복하고 회복해야 하는 순간에 만나기에는 더없이 좋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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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의 꿈들 - 길에서 만난 세상, 인권 르포르타주
정지아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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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기사들의 이직률이 높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자주 택배를 받다 보니 몇 번 택배 기사가 방문을 하면 인사를 주고받기도 하는데, 그런 시간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 며칠 사이-혹은 몇 달 만에라도- 택배 기사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방문하시는 어느 택배 기사님은 한 가정의 가장이다. 어느 날, 엄마와 택배 기사가 주고받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한 달에 자동차 기름값이 100만원도 넘게 들어가고, 물량은 많고 택배비는 많이 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한 달 힘들게 배달해도 자기 손에 들어오는 돈은 100만원 남짓. 그 돈으로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운다고 했다. 아이들 학원도 변변히 보내줄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는 말을 할 때는 고개 숙인 가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참 자랄 나이의 아이들을 보면서 뭔들 해주고 싶지 않을까마는, 현실은 그런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날 배송이 안 되면 불같이 화를 내를 고객, 혹시라도 물건이 상하거나 망가져서 오면 핏대 세워가면서 변상을 요구하는 목소리, 배송기한을 어기면 안 되기에 그날 배송 안 해도 배송완료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우리 집에 오시는 택배기사님 중 한분은 종종 이렇게 처리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나도 화를 내긴 했으나 지금은 이해하는 편이다. 썩는 물건 아니니-보통은 책이 대부분이라- 그냥 배송해달라고만 한다. 그들의 하루를 듣고 나니 나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생긴다. 100만원 남짓의 한 달 생활비를 손에 쥐고도 택배기사를 그만둘 수 없는 그들의 모습을 『벼랑 위의 꿈들』이 다시 한 번 들려주고 있다.

 

저자가 만난 19명의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아직은 사라지지 않았을 꿈을 꾸고 있다. 하루 3교대로 불면증과 불임, 유산의 아픔을 경험하면서도 간호사의 일에 기쁨을 찾는다. 이름 대신 ‘야 인마’로 불리는 외국인 선원은 불평등과 불이익을 고스란히 참아내야 고향으로 돈을 보낼 수가 있다. 최소한의 임금도 기대할 수 없는 택시운전사에게는 아이들의 웃음이 희망이다. 월 60만원의 급여로 꿈을 키우고 있는 드라마 보조작가는 1%의 꿈을 찾아 지금도 글을 쓰고 있다. 영화가 관객에게 전해주는 꿈이 자신에게도 보여주기를 바라는 영화 미술감독은 현실 속에서 자신의 꿈이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갓길에 세워놓고 새우잠을 청해야만 하는 화물트럭 운전사는 정해진 운임이 만들어지는 시스템을 희망한다. 한 칸의 책상 안에서 호흡하는 텔레마케터, 감정노동자라 불리는 이들 역시 기본적인 노동자의 대우를 원한다. 학자금 대출로 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엄청난 빚을 진 채무자가 되었다. 제대로 취업도 하기 전에 대출이자와 원금 상환에 대한 걱정을 한숨으로 채운다.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노동자라 불리는 우리들의 삶을 고스란히 마주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란 땅, 그 길 위에서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다. 나와 상관없는, 그저 남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래서 더 생생하게 들리는 것일 테다. 학자금 대출로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 이십대 청춘의 현실이며, 타향살이의 외로움에 떨며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 현장에서 월급을 부쳐오던 우리네 아버지들의 과거다. 하교 후에도 교복을 입은 채로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는, 보호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청소년의 모습이다. 비정규직이라도 이력서를 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면 감사해야 하고, 매년 재계약 시기에 위장병이 도지는 우리의 현주소다. 거창한 꿈도 아닌데, 일상의 소박한 꿈마저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잔잔한 파도만 일어도 헤엄치기 힘들 텐데, 매번 거친 파도가 인생을 감싸고 몰아친다. 달리고, 오르고, 오토바이의 페달을 밟고, 빙판이 목숨을 위협하는 커브길을 돌고 있는 오늘이다.

 

고공의 크레인 위에서 아찔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노동자의 삶이 되어버렸다. 최소한의 생계와 인권, 존엄성을 보장해달라는 목소리를 내야만 협상이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사회다. 억대의 이익을 창출하면서도, 임원들의 연봉을 ‘억’소리 나게 올리면서도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거대 자본이 만들어낸 피눈물이다.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만나는 게 꿈인 사람들이다. 해고나 재계약의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시간, 주말이나 휴일의 여유로움을 가족들과 보내는 소소한 행복, 몸은 고단해도 꿈이 사라지지 않는 삶을 희망하는 것. 우리들이 바란 소박한 꿈은 그런 것이다. 그런 우리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현실을 저자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우리가 있다. 저임금에라도 출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행복해하고, 비정규직의 불평등에라도 위안을 삼아야 하는, 학자금대출이라도 받아서 대학을 졸업해야 하는, 불편한 한손으로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우리, 우리 가족, 우리 친구들의 모습이 있다. 슬프게도, 이런 우리의 꿈이 조만간 이루어진다거나 세상이 금방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저자의 말도 같다. 저자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시간을 금방 만날 것 같은 희망은 보지 못했던 듯하다. 말 그대로 그건 우리의 희망이고 꿈이다. 평등하게 주어지는 기회와 말 그대로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꿈이 되어버렸으니…….

 

그럼에도, 그 꿈을 놓을 수 없어서 오늘도 치열하게 삶을 이어간다. 나아지기를, 보장되기를, 빛을 만날 수 있는 꿈을 꾸면서. 그 꿈이 이루어져야 우리가 바라는 일상의 소박한 꿈이 동시에 이루어질 것임을 알기에 더욱 간절해진다. 『벼랑 위의 꿈들』이란 이 책의 제목처럼, 저자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한발만 내딛으면 바로 떨어져버리는 벼랑 끝에 우리 꿈이 매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이제는 그 꿈을 벼랑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희망을 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저자가 만났던 성훈 씨의 말처럼, 연대는 그런 의미로 더욱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꿈꾸어야 하며, 꿈꾸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살아갈 날을 만날 수 있는 희망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와 함께 같은 뜻을, 같은 마음을 가진 목소리가 똘똘 뭉치는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게 지금 우리 앞에 주어진 과제라고 본다. 그래야 힘을 낸다. 그런 모습, 희망을 품고 오늘을 살아가고 같은 마음을 위해 연대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또 다른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우리의 모습이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그 희망은 또 다른 누군가의 희망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끝이 없음이다. 그 끝없는 희망과 연대를 바라면서 오늘도 우리의 인권을 위해, 소박한 꿈을 위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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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전날
호즈미 지음 / 애니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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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큰 의미 없는 질문을 하나씩 던지고 싶어진다. 홀수가 좋아 짝수가 좋아? 음, 글쎄... 정말, ‘글쎄’다. 그다지 의미 없는 질문에 별 의미 없는 답이다. 하지만 홀수 짝수에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각각 홀수의 시작인 ‘하나’, 짝수의 시작인 ‘둘’이란 숫자의 의미는 확인하고 싶어진다. 하나와 둘. 하나를 가질 수도 있고 둘을 가질 수도 있지만, 하나만 남는다는 것과 둘이 남는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호즈미의 단편만화집 『결혼식 전날』은 그 ‘둘’에 관한, 그리고 ‘하나’에 관한 이야기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성장이 있고 이별이 있다. 사랑이 있고 그리움이 있다. 눈물 나게 슬프기도 하지만 애틋하게 남겨진 감정이 있다. 그런 사람, 우리의 이야기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 만화다. 누군가의 하루를 듣는 듯한, 일상이 흘러가는 듯한 느낌으로 읽어가고 있는데 거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면 반전이 일어난다. 정말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 많은 감정을 담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작은 반전이 그 이야기 끝에 눈물을 매달게 하거나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준다. ‘이걸 어떡하지?’ 싶은 눈물을 만든다. ‘뭐야 이거?’ 싶은 미소를 만든다. 슬픔과 기쁨, 그리고 또 다른 그 이상의 감정을 주인공들이 만들어내고 있다.

 

표제작 「결혼식 전날」은 제목 그대로다. 결혼식 바로 전날의 남자와 여자가 있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내일을 위한 웨딩드레스를 또 한 번 미리 입어본다. (여자는 며칠 전에도 웨딩드레스를 몇 번 입어봤다.) 초대 손님들의 자리 배치를 걱정한다. 내일 하루를 위해 그동안 준비해왔던 것을 이야기하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마지막 인사. 눈물 나게 애틋한 그 인사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는 순간, 이별이지만 이별이 아닌 순간이 그렇게 찾아온다.

「아즈사 2호로 재회」는 아주 슬픈 이야기다. 그런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누군가의 뒷모습을 저절로 그리게 한다. 집에 혼자 있던 꼬맹이 아즈사에게 일 년에 한 번씩 아빠가 찾아온다. 오늘이 그날이다. 아즈사는 아빠와 함께 아이스크림도 먹고 빨래도 한다. 담배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던 아빠를 엄마는 원망한다. 그렇게 아빠는 떠났고 오늘처럼 아즈사를 한 번씩 만나러 온다. 아즈사와 함께 하루를 보낸 아빠는 다시 떠난다. 아즈사는 또 기다리겠지. 일 년 후에 찾아올 아빠를...

인간 남자와 고양이가 함께 사는 공간을 그린 「그 후」는 살짝 허망한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배려하고 싶지만 귀찮아서 내버려둔 고양이의 마음이 오해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를 보고 있는 듯해서 웃음이 난다. ‘아’라고 말했는데 ‘아~아~아~’라고 들리는 순간이 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빼고 말했더니 전혀 다른 내용의 메시지가 된다. 그런 순간이 일상에 무수히 많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재미있는 일상이다. 고양이의 황당한 표정에 미소 지어진다.

「10월의 모형 정원」은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된 이야기다. 은둔하듯 사는 소설가 남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14살 소녀. 남자는 소녀에게 가라고 말했지만, 소녀는 가지 않고 계속 남자의 집으로 찾아온다. 잔소리도 하고 음식도 만들면서 남자의 집에 드나든다. 어느 날 전단 한 장을 보게 된 소설가는 놀란다. 자기 집에 찾아든 이 소녀는 누구란 말인가. 창문을 통해서 매일처럼 보이던 까마귀는 어디로 날아갔기에 갑자기 보이지 않는 건지. 그리고 이 둘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재탄생되는지 보여주는 새로운 소설의 탄생.

그리움을 담은 「모노크롬 형제」다. 오래전 학창시절에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던 쌍둥이형제의 이야기다. 그 여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형제는 장례식장을 찾아왔고, 둘이 술을 마신다. 이미 할아버지가 되는 나이의 두 사람인데 과거의 기억은 참 또렷하다. 동생은 그녀가 형과 사귀었다고 생각하고, 형은 그녀와 그런 사이였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생은 그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오래 전 그때 그 시간의 이야기를 하면서 둘은 술잔을 기울인다. 그리고...

「꿈꾸는 허수아비」는 사람이 사물이라 여기는 것과 교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오빠와 여동생, 남매만 남은 상황에서 큰아버지 댁으로 옮겨가게 된다. 남의 집에서 생활하는 게 눈칫밥이 장난이 아닐 텐데, 어리기까지 한 여동생에게는 더했겠지. 어린 여동생은 집 앞 밀밭에 있는 허수아비를 엄마라 부르기 시작한다. 여동생은 하고 싶은 말, 풀어놓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마다 허수아비에게 가서 이야기를 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오빠는 캔자스를 떠나 뉴욕에서 생활하던 중 보내는 이의 이름이 없는 엽서를 받는다. 엽서에는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않던 여동생의 결혼 소식이 적혀 있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이 짧은 이야기의 어디까지를 얘기해야할지 조심스럽다. 얼핏 보면 그냥 그런 이야기일 것 같은데... 맞다. 그냥 평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로 많은 것들과 이별을 한다. 부모와 형제자매와 연인과 또, 더 많은 것들과. 그렇게 혼자가 되고 또 혼자 살아가게 된다. 그 과정이 쉬울까? 그 마음이 괜찮을까? 이 단편들이 유독 내 눈에 보여주고 있던 것은 주인공 두 사람 사이의 끈끈함이었다. 잘린 듯하지만 이어져 있고, 못 본 것 같지만 다 보고 있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 알 것 같은 감정들이 우리가 호흡하는 공중에 부유하고 있다. 그렇게 부유하고 있다가 곧 소멸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지금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여섯 편의 단편 속에 있는 이들은 모두 둘이다. 남매, 아빠와 딸, 형제, 동물과 사람, 사물과 사람. 모두 평범한 일상 속에서 주고받는 대화, 감정, 상황을 담고 있다. 특별할 것 없다고 보이는 이들의 이야기가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이유는 뭘까. 너무 평범해서 이야기의 소재로 사용될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하는 매력이 있다. 둘 사이의 관계와 그 흐름이 두 눈과 귀가 따라가게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가 더 나올까, 이들의 마음이 무엇일까, 그 일상을 품어내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싶은 기대감이 생기게 한다. 너무 잔잔하게 흘러가서 언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도 모르게 페이지를 덮고 있게 한다. 그 이야기들의 가운데에 반전이 있다. 울컥거리게 하면서 묵직한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게 한다. 읽는 순간, 그 마음을 듣는 순간의 진심이 그렇게 나오고 있다. 마주치고 싶지 않지만 결국은 마주하게 되는 타이밍. 삶에서 그런 순간 참 많이도 만나게 되지만 이렇게 한 번씩 만날 때마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매번 깊어지는 듯하다.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단편소설이 아닌 단편만화의 맛을 이렇게 만날 수도 있다는 게 즐겁다. 기뻐도 눈물이 나고 슬퍼도 웃음이 난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어떤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나 진심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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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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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거리며 사막을 걷는 낙타를 본다. 인영은 낙타를 타고 싶어 한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낙타를 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다. 인영의 꿈속의 낙타는 코뚜레를 하고 있었다. 왜 미리 못 봤지? 낙타를 타는 꿈을 꾸며, 아니, 어쩌면 낙타 자체가 되기를 꿈꾸었을지 모를 인영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다. 낙타를 구속하고 있는 코뚜레. 벗어나고자 했으나 구속이 익숙해지는 것처럼 만든 그 무엇, 아직 그게 남아 있었다.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를 일은 아니다. 사람을 등급으로 매길 수도 있다는 것을. 미친 듯이 스펙을 쌓으려는 이유도 같이 설명된다. 주인공인 열여덟 소녀이자 고3인 방인영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5등급이다. 방인영이라는 존재 자체가 5등급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외모, 내신 모두 5등급. 혹시 모르지. 성격까지도 5등급일지도. 일요일에는 교회의 열혈 신자인 엄마를 따라 구원교회에 나간다. 특권층을 대변하면서 잘 나가는 ‘방 변호사’인 아빠는 물질과 부를 축적한다. 가끔 분을 못 이기는 일이 생기면 교회에 나가 기도를 빙자한 울부짖음으로 포효한다. 교회의 친목모임은 계급을 구분 짓는 간 보는 모임이고 위선적인 가면을 하나씩 쓰고 대화에 동참한다. 신앙고백이나 기도를 통해 신앙심을 상승시킨다고 하지만, 돈 자랑이나 사기성 농후한 멍석 위에 앉아 있는 것과 뭐가 다른지를 모르겠다. 뒤돌아서서는 ‘좆도, 자식 농사 죽 쒔다...’라고 말하는 인격의 방 변호사 같은 사람들. 인간 내비게이션이 된 듯한 엄마의 추적 역시나 인영의 숨통을 조이는 존재일 뿐이다. 할머니 제사는 안 챙겨도 돈 많은 방 변호사의 생일을 챙기는 고모가 있다. 유치원 교사를 하면서 연상의 유치원 원장과 결혼하려는 삼촌도 있다. 그 안에서 자기 목을 조이는 것들을 처리하고자 마음먹은 방인영이 있다.

 

고3. 혼란스럽고 스트레스 많이 받을 시기의 치기 어린 반항 정도로 여겼다. 방인영이 어른들에게 쏟는 말들은 그 안의 스트레스를 날리기 위한 하나의 처방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야기의 흐름이 어디로 흐를지 몰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읽어가고 있는데, 이거, 색다르다. 물론 사회적 문제인 ‘존속살해’라는 모티브를 배제할 수는 없다.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설로 만나는, 이 완전범죄를 꿈꾸는 소녀의 이상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할지 궁금해지는 많은 물음표로 내 머릿속을 채운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들을 해치우고 개운하게 살아가는 삶.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준 것이다. 거기에 청부살인의 모양을 만드는 ‘모래의 남자’의 존재는 인간의 심리를 들여다보게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듯한 모래의 남자. 인영은 그 남자를 조종하듯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인다. 나이 마흔의 남자와 열여덟 소녀. 얼핏 강자의 모습을 한 쪽이 남자일 것 같으나 오히려 남자를 조종하는 것은 인영이다. 그럴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 무렵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끄덕임의 생각을 끌어온다.

 

행복은 외계에나 있는 거다. 행복을 찾아 떠난 사람 중 돌아온 사람은 모두 행복을 찾지 못했고 행복을 찾은 사람은 모두 돌아오지 않았다. (233페이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나를 귀찮게 해서, 나를 공격해서, 혹은 상대만 아니면 내가 더 가질 수 있을 어떤 것을 위해서... 결론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어떤 존재를 사라지게 한다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판단이 들기에 살인을 꿈꾸고 계획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생각은 생각으로 끝나는 게 보통이다. 안 그랬으면 세상의 많은 사람이 살인자라는 죄명을 하나씩 달고 있지 않을까? 겁쟁이라 불러도 좋다. 살인을 꿈꾸었으나 비겁함이 살인을 중단하게 했으니, 적어도 아직은 윤리적 ․ 도덕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주인공 인영의 모습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있는지 모르겠다.

 

인영이 살아가는 세상은 소설 속의 세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하나 다른 것 없이 똑같다. 신을 부르짖으며 또 하나의 계급사회를 형성하는 종교,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건지도 모를 등급을 확인하는 시간일 뿐인 진로상담, 외모가 자신의 등급인 엄마가 매일 피트니스센터로 출근하는 이유, 가진 자들의 뒤를 닦아주면서 부와 명예를 축적하는 아빠. 돈을 향해 절이라도 하겠다는 듯 부모보다 돈을 가진 형제에게 굽실거리는 삼촌이나 고모. 그들의 모습은 곧 만날 인영의 모습이었다. 인영이 꿈속에서나 만날 낙타를 현실 세계에서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게 싫었던 인영이 꿈꾸는 것을 실행에 옮긴 것뿐이다. 당돌하게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한참을 망설이게 된다. 개운한 느낌이 들면 나는 사악한 것인가. 죽은 이들을 안타까워해야 하고, 범죄자를 응징해야 하는가. 잘 모르겠다. 자신을 옥죄는 많은 것들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인영의 마음을 알 것도 같고, 그런 인영에게 앞으로의 삶을 제시해주는 부모나 어른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나는 양가감정을 가지고 양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 한쪽에게 ‘옳다’는 의견을 던질 수 없다. 잔혹하리만치 폭력적인 한 여고생의 무자비함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게 우리의 마음-비록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감정일지라도-을 잠깐 보여준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터지기 일보 직전인 폭탄을 보고 싶다면 인영을 보라고 말해주고도 싶다. 폭탄이 터지면 인영이처럼 행동할 지도 모르니까. 자신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부모님을 통해 보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빠를 아빠가 아닌 ‘방 변호사’라고 부르는 인영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온갖 부조리를 처리해주는 아빠가 가진 부나 명예가 옳거나 좋아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급을 나눈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외모나 성적이 5등급인 자신을 끌어올리려는 엄마의 몸부림이 버거웠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쌓여서 해서는 안 될 존속살인이라는 것을 끌어냈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이 불러온 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심판 같았다. 살인, 자수, 누명. 여러 가지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지만 무엇 하나 완결된 것이 없어 보인다. 이는 우리 살아가는 세상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해결되기 어려운 숙제처럼 남아 있다는 것이 아닐까. 살인을 저지른 자도, 누명을 쓴 자도, 살인을 사주한 자도,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어떤 시선으로든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것인지도...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인 인영의 등장은 처음부터 이야기에 홀딱 빠지게 한다. 말장난처럼 보였던 신랄한 말대꾸는 블랙유머처럼 보이기도 했다. 뻔뻔한 인간들에게 나 대신 퍼부어주는 속사포 욕처럼 개운하게 들린다. 모의고사나 학원, 과외에 신경 쓰면서 성적을 올려야 하는 인생은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짊어지고 가야할 숙명처럼 보이기도 했다. 목이 졸리고 있던 고양이는 이들을 대변하는 모습인 것만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살인(존속살인)에 면죄부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살인을 불러오는 그 심리를 알 수도 있게 만든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한명으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 살인사건을 세상에 던져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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