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 - 기억, 시간 그리고 나이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권세훈 옮김 / 에코리브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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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우리 뇌와 기억력의 진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억력에 대해 다른 의미와 시각을 갖게 해주는 책이 아닐까 한다. 일반적으로 노인의 기억력은 급격하게 퇴화한다고 쉽게 말하고는 했는데, 기억력 연구 전문가인 이 책의 저자는 그 말이 모두 맞는 거라고 하지는 않는다.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의 기억에 관련된 몇몇 기능이 나빠지는 것은 맞지만, 그 전에 제대로 작용하지 못했던 다른 기능들은 그때(노인이 되어)서야 작동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노인들의 기억력이 정말 나빠지는 것인지 다를 뿐인 것인지 사례를 통해 들려주면서 우리가 가진 기억의 존재와 의미, 흐르는 시간, 나이에 관하여 들려주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기억에 대한 능력은 점점 사라지기에 이르는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는 기억이 있다. 이는 노인의 기억력이 모두 퇴화되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심리학에서 ‘망각의 역현상’이라 부르는 이 증상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오래된 일이 더 잘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런 현상은 기억력이 감퇴하는 나이(노인이라 부를 수 있는)에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하여 시간과 나이, 기억에 관한 이론이나 정의를 만날 때마다 가졌던 원칙 같은 이론 보다는 저자의 연구와 다른 전문가들의 이론들을 통해 들려주었던 내용들에 더 신뢰가 가게 한다.

 

<인생의 계단>이란(24페이지) 그림을 참고하면서는 그 시대(1660년)의 사람들이 노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가파른 산 하나를 넘는 듯한 인생의 계단은 오를 때와 내려올 때의 분위기를 사뭇 다른 느낌으로 그려주어 우리의 사고를 끌어내고 있다. 우리 인생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을 때 앞부분은 빛나고 힘찬 걸음을 걷는 느낌을 준다면, 정상을 찍고 하산하는 듯 보이는 뒷부분은 조금은 어두운 분위기로, 우울하거나 끝을 향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만 같다. 어쩌면 우리의 삶을 단 한 장의 그림으로 지켜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안에서 우리가 봐야할 것은 노인이라 부르는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다. 인생의 계단 안에서 우리가 지금 정상을 향해 살아가는 시간을 걷고 있다면, 곧 내려가는 시간도 만난다는 것일 테다. 그 시간 속에서 겪어가는 시간과 기억에 관한 생각, 나이와 향수를 갖고 살아가는 순간들을 만나게 하는 책이다.

 

그러한 기억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많은 것들에 대한 향수 역시 불러오기도 한다. 향수병은 누구에게나 다 다가올 수 있는 병이지만, 특정 상황의 사람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병이라고 한다. 입대한 병사나 이민자 가족 같은, 집(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상황에 또 한 번 만나게 되는 것이 과거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이다. 그게 향수병을 깊게도 하고 치유하기도 하겠지만, 향수병이란 것은 금방 치유되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맞물려 언제든 다시 이들(우리들)에게 다가올 수도 있다. 향수병이란 이름 앞에서는 완치라는 게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갈수록 노령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노인에 대한 연구도 같이 늘어가고 있음이다. 저자는 기억력 감퇴나 건망증을 치매로 속단하지 말라고, 기억력 훈련은 기억 능력이 아닌 기억의 전략을 이용하는 능력의 향상일 뿐이라고 조언한다. 즉, 기억에 관한 많은 것들이 항상 한 가지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들이 여러 가지, 또는 순간적인 연상으로도 즉시 떠오를 수도 있다.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서, 갑자기 귀로 흘러들어온 이십년 전의 음악을 통해서도, 스스로가 기억해내고 기록할 수도 있는 자서전적인 수단을 통해서도 우리의 기억력은 자신의 자리를 찾는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삶이 지속되는 한 우리 모두 노년을 만난다. 아직은 노년이라 부를 수 없는 나도 그 시간과 조우하는 운명이란 거다. 피해갈 수도 없을뿐더러 그저 즐겁게만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아닐 것이다. 저자가 그 노년의 시간을 만날(혹은 이미 만난) 우리들에게 다양한 사례와 함께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은 나이와 시간, 그리고 기억이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의 육체와 함께 흘러간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들이 도미노처럼 가져오는 사회적 문제들이나 심리학적 증상들을 같이 듣게 하여 어느 한 사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공유하게 한다. 그리고 그동안 알고 있었던 나이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깨뜨리면서, 우리의 늙어가는 뇌의 진실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즐거움이 준다. 저자의 전작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와 같이 읽으면 더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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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
박후기 글.사진 / 문학세계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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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밖으로 꺼내어 하는 말(소리) 대신에 글(문장)로 그 말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실시간 생중계처럼 전해지는 말보다 한 번 더 생각하고 정리되어 글로 써지는 시간이 만들어지면 조금 더 다른,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이유로, 가끔은 일부러 급한 마음 상태의 전화보다는 조금 생각하다가 문자를, 문자보다는 메일로 상대에게 전달할 때가 있다. 설명이 필요하다거나 내 마음을 조금 더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바람이 있을 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올곧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의미의 언어가 여기 하나 더 있다. 말과 글만큼이나 더 전달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 사진이다. 딱 그때, 그 순간의 기록처럼 보이는 한 장의 사진이 많은 말을 대신하고 있다. 종군기자의 사진 한 장이 전장의 실상을 그대로 전했던 것처럼, 사진이 말을 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그 사진의 말을 알아듣는 나는, 또 한 번 공감의 언어로 소통한다. 사진이라는 언어...

 

 

시인이 쓴 산문이다. 나는 아마 이런 느낌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시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시 같은 글을 통해 어떤 마음을 전달받고 싶었던 거라고. 읽고 보니 그 기대감이 틀리지는 않았다. 다만 순서가 조금 다른 듯했다. 글이 가득한 느낌 속에 사진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구성이 아니라, 사진이 먼저 자리를 잡고 시인의 글이 따라오고 있다. 사진이 걷고 발자국을 남기면 이야기가 그림자처럼 그 발자국을 밟는다. 그 사진을 찍었을 순간의 마음, 그 장면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함께한다. 뻔한 얘기 같지만, 그 안에 일상을 풀어놓고 싶은 나의 바람까지 함께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에 반했던 듯하다.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이라니, 뭔가 가벼워지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을 들킨 것만 같잖아. 양쪽 어깨를 무겁게 누르는 감정의 벽돌 하나를 내려놓고 싶기도 했다. 비까지 내리는 이 가을, 그냥 지나치고 갈 리 없는 익숙한 감기가 버거웠고, 한 살 더 먹어가는 나이의 무게가 심란했다. 마음을 흔드는 많은 일이 제자리를 찾아주었으면 싶은 바람에, 종교가 없음에도 수신자가 없는 그 어딘가를 향해 기도하고 싶기도 했다.

 

 

기도는 변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르다. 또한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중략)

언제나 사람이 먼저 기도를 떠나왔던 것이다.

처음에 품은 그 절심함을 잊고, 사람이 먼저 사랑을 떠나왔던 것이다.

기도는, 어쩌면 잊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는지도 모른다. (149페이지)

 

그런데 저자는 손바닥 뒤집듯, 기도에 대한 나의 마음에 너무나도 간단히 직구를 날렸다. 기도가, 잊고 싶다는 마음의 말이었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랬나 보다. 나의 진심은 ‘이런 소원을 들어주세요.’ 하는 플러스(+)의 요청이 아니라, ‘이런 마음을 사라지게 해주세요.’ 하는 마이너스(-)의 잘라냄을 바라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려오라고 나에게 말한다. 살다가 하루쯤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그런 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가 시(詩)에서 내려오고 싶은 날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무엇인가로부터 내려오고 싶고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 날, 저자가 어떤 찰나를 담은 사진 한 장과 그 순간을 기록한 마음처럼 눈과 귀를 열게 한다. 가을이 깊어가고 눈이 내리는 계절의 흐름, 누군가의 구부정한 어깨, 버릴 줄 아는 마음을 가르쳐주는 사람, 모여서 함께 흔들리는 갈대, 오늘을 살게 하는 많은 법칙, 혼자 흔들리지 말라는 위로, 기울어지는 그리움에 기대어도 된다는 말, 깊어지는 맛을 내는 것들의 의미, 비는 내가 우는 소리라는 듯, 서로가 서로에게 지나가는 길목의 마주침, 감정이 살아있음에 붉어지는 얼굴의 아름다움... 그 이상의 것들이 품고 있는 말들을 풀어낸다. 시처럼, 음이 낮은 노래처럼, 마시기 좋게 적당히 식은 차 한 잔처럼.

 

누가 내 마음을 읽어주는 날이 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내 마음의 행간(行間)까지도 읽어버린 것이다.

그런 날엔 한없이 서럽고, 또한 알 수 없는 떨림이 등피를 두드린다. (87페이지)

 

몰랐으면 싶은데 간혹 눈치 빠른 누군가는 내가 아무런 말이 없어도 마음을 알아챈다. 내 숨소리가 거기까지 날아갔나 싶게 정확히 짚어낸다. 무슨 말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냥, 누군가가 내 마음을 읽었구나 싶은 눈치를 나도 알아채는 것이다. 서로가 말이 없어도, 딱히 어떤 손짓을 건네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지고야 마는 것. 그건 불어오는 바람 때문일 수도 있고, 커피가 아닌 술을 마시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미 하나 달리한 단어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또 한 번 감정을 건드리고 흔들리게 한다. 빗물이든 눈물이든 흐르게 한다. 때로는 그런 마음을 집어내는 것이 이런 책이 되기도 한다는 게 당황스러울 때가 있지만, 그러면 또 어떠리. 그대로 다가오는 그 공감을 담고 싶은 것을...

 

 

마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쉽게 닫힐 수도 열릴 수도 있다. 문틈, 그 미세한 자리를 비집고 굳이 들어오려 애쓰는 게 마음일지도 모른다. 알면서 모른 척하기도 했고, 일부러 그 틈을 안 보이려고도 했다. 그래서 지나친 많은 것들을 이 책이 다시 불러온다. 지나가 버린 한때의 시간을, 하루살이가 비우게 하는 오늘을. 이 밤에 조용히 비추는 가로등마저 다시 보이게 한다. 그 대상이 삶이든 사람이든, 한순간이나마 한발 떨어져서 바라보게 한다. 그 관조의 시선이 가져올 어떤 여유, 저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조금 쉬어가는 길, 돌아서 가는 길을 이런 식으로 들려준다.

 

 

저자 박후기를 시집으로 먼저 만났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비극이 넘치는 우리 삶을 색다른 시선으로 시를 통해 얘기하는 듯했다. 시를 통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듣고는 했는데, 이번 책은 그가 찍은 사진과 그 시간의 말을 함께 담고 있다. 잡지사에 취직해서 본의 아니게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일을 동시에 했다던 그의 이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사진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창한 소개가 아니라, 그가 뷰파인더를 통해 본 그 순간, 그 마음의 소리를 기록한 것이다. 그 사진 한 장과 그 장면을 통해 그가 사유한 마음 한 자락을 담았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감정의 한순간이 있다는 것을, 다른 이에게는 평범하게 지나는 한 장면이 오직 자신에게만은 특별한 한 컷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순간에 하고 싶은 한 마디가 그 한 장의 사진에 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봄날의 햇볕처럼 내리쬐던 며칠 전의 하늘을 쉬지 않고 내리는 빗소리가 가득한 지금, 기억한다. 많은 게 흔들릴 정도로 불어대는 바람이나 거세게 비가 퍼부어대는 지금의 서늘함보다, 환하게 비추던 햇볕 아래서 더욱 추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던 그 날을, 내 마음이 기억한다. 비록 사진으로 담아두지 못했지만 아마 그날을 찍었다면 분명 사진에서 보였을 것이다. 너무도 맑았던 하늘, 봄으로 착각할 정도로 포근했던 햇살, 그 안에 자리한 내 서늘한 시선이.

 

 

한 장의 사진이 열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침묵의 언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싶을 만큼 소통하고 싶어지는 언어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의 많은 여건 때문에 때로 달리 보이기도 하겠지만, 분명한 건 사진이 감정과 표정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읽어내는 사람은 그 사진과 교감하는 것일 테고. 누군가의 마음과 시선을 담은 사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 나에게 저자의 시선(사진)과 마음(문장)은 타이밍 좋게 다가온, 위로다. 내 마음이 지금 내리는 비만큼 더 서늘해지기 전에, 다시 찾아올 봄날처럼 풀어지기를 바라는 위로. 내리고 싶은 날이 있다고 말했으니, 그런 날 하루쯤은 내려도 괜찮겠지.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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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친 8주간의 기록
에바 로만 지음, 김진아 옮김 / 박하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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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3년 전까지, 나는 잠잘 때도 손목시계를 차고 잤다. 그런 나를 보고 조카가 답답하지 않으냐고 물었는데, 오히려 나는 시계를 풀어놓고 자면 불안하다고 말했다. 손목에 시계가 없으면 무슨 큰일이 날 것처럼 불안하다고. 내가 손목시계를 차고 잠을 잤던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제법 오랜 시간을 그렇게, 시계를 차고 잠이 들었다. 일상을 지내고, 저녁에 씻고, 다시 시계를 차고, 잠을 자고... 이런 것,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한 상태를 강박증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나는 상당히 많은 강박증을 갖고 있다. 그중 하나가 시계에 관한 것이었다. 다행인지 그 손목시계에 대한 강박증은 없어졌다. 지금은 손목에 시계가 없어도 불안하지 않다. 그 불안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강박증이 사라진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 원인을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은 개운하지 않다. 어떤 심리적인 문제로 보이는 것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고 들어왔던 터라, 오랫동안 나와 함께 했던 강박증이 이렇게 갑자기, 완전히 사라진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언제 어느 때 튀어나와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을지 알 수 없다. 가끔 그런 불안감이 나를 잠식하기도 한다. 『내가 미친 8주간의 기록』을 읽어보고 싶었던 이유도 비슷하다. 주인공이 가진 어떤 불안감이 그 8주의 시간을 보내게 하였을까 싶은, 그 시작점은 어디였으며 어떤 결과로 그 8주의 시간을 정리했을까 하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몸의 감각. 사람들은 밀라(Mila)를 의사에게 데려갔고, 곧 정신병원으로 데려갔다. 무슨 일로 그렇게 되었는지 그녀에게는 기억에 없다. 그녀는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 그리고 그녀는 안심했다.

 

나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가족, 친구와 수없이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그들과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가까운 이들에게 느껴본 적이 없는 동질감을 막 알게 된 낯선 사슴에게서 느끼다니! (29페이지)

 

이상했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감각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도, 어쩌면 더욱더 큰 불안을 가져올 것만 같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안심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생각했다. 그녀가 진정 바라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오랜 시간 무기력함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고, 문득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녀를 슬픔에 빠지게 한 듯하다. 규칙적으로 먹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쯤 되면 그녀의 건강을 해치게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안심했던 게 아니었을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이유로부터 도망갈 기회가 생긴 듯하다. 출근하고, 직장에서 시달리고, 누적되는 피로에 지치는 하루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상을 살아가는 주체가 자신이라면, 그런 생활을 선택하고 이어가는 목적이 자신이 정한 거라면 이런 상황까지 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을 그녀가 입원한 그 8주의 시간이 들려주고 있다. 그녀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의 주인공이, 때로는 견디기 힘든 시간을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자신이 아니었던 거다.

 

그녀가 처음 입원했을 때부터 퇴원하기까지, 그 안에서 생활하는 과정이 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그 자체인 듯하다. 많은 것들로부터 피곤해진 그녀가 놓아버린 육체가 표현했다. 그 이상의 것, 즉 육체가 보낸 신호는 영혼의 소리가 보낸 신호였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들려온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원인과 증상들, 거식증, 폭식, 여자의 정체성을 가진 남자, 다중인격, 실연, 등등 많은 이유로 그곳을 찾은 사람들이 내는 고통의 소리를 밀라를 통해 듣게 한다. 그녀의 시선으로 그들의 모습까지 함께 보게 한다. 그 안에서 그녀의 원인 역시 그 많은 증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 치료의 과정에서 함께 하는 전문가의 상담을 눈여겨보게 한다. 그저 환자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은, 그렇게 듣다가 시간만 보내고 다음 상담을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닌 듯하다. 그곳에서의 생활 자체가 그녀를 나아지게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원인은 달라도 비슷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같은 고통을 나누면서, 전문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하나하나 그 원인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냥 행복해지라고요? 그게 얼마나 큰 요구인지 아세요? 행복해지라고요? 삶에 만족하는 균형 잡힌 인간이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220~221페이지)

 

그래서 그녀는 그 원인을 찾았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찾았다. 그리고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하게 했다. 원인을 찾았으니 이제 필요한 건 그녀의 변화와 용기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생기는 문제가 그녀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찾아오는 무기력함이 움직임을 멈추게 하고, 끝없는 피곤함을 가져왔고, 행복하지 않은 시간을 만들고 있었다.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들려주는 밀라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 같았다. 우울증이라는 간단하게 들리는 병명이 얼마나 많은 원인을 숨긴 채로 우리를 잠식해가고 있는지 보게 한다. 사회에서 보내는 관계와 시간, 자신의 인생에서 부모님이 차지하는 비중과 존재감, 인정받고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 그 안의 많은 원인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대부분 하나로 귀결되는 듯하다. 그 시간, 그 관계, 그 미래, 한 사람의 인생을 차지하는 중요한 많은 순간에 있어서 주인공이 빠져 있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이어야 하는데, 지금 살아가는 우리 생활, 환경 대부분에서 그런 갈등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내가 해야만 하는 일, 나에게 좀 더 안정된 삶을 허락하는 일, 나보다 부모님이 더 기뻐할 일, 나보다 타인에게 더 괜찮아 보이는 일이 우선시 되는 것. 그래서 자꾸만 자기 자신에게 엄격해진다. 내가 그러면 안 되는 일들이 더 많아진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안달하고 몰아친다. 그럼, 그게 다 이루어질까? 행복할까? 웃을 수 있을까?

 

8주라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입원해있던 8주라는 시간은 워밍업이었을 뿐이다. 이제 시작이니까. 그녀의 그 시간을 동행하면서 느꼈던 건,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그녀의 증상이나 원인이 정상인과 정신병자 사이의 차이점을 크게 느끼게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동시에 그런 내면의 이야기를(이 책에서는 영혼의 목소리라는 표현을 했다.) 아무에게나 쉽게 하지 못하는 현실 역시나 공감했다.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겨버리거나, 제대로 된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거나, 그 증상의 해결방법도 모른다거나... 대부분의 일에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는 것처럼 내 안의 문제도 그 시작점을 찾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걸 간과해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 정신을 얼마나 갉아먹고 있는지 보게 한다. 저자가 밀라를 통해 보여준 병원의 풍경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아닐까 한다. 잘해야 한다는, 자녀로서 해야 할 역할도, 연애도, 사회적 지위도, 어쩌면 삶 자체를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었을지도 모른다. 사회가 그걸 원하니까, 부모님이 바라니까, 그게 당연하니까, 라고 생각했던 것이 문제로 쌓여갔던 것.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현실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과 삶에 대해 자신을 닦달할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먼저 보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이다. 겉으로 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지금 웃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행복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으니까.

 

알게 모르게 내가 만들어가는 강박증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다. 아직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은, 언제 생겨날지 모를 그 불안이 얼마나 많은 강박증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보게 한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의 모습을 다르게 보는 시선을 만들어주는 듯하다. 불안하게, 초라하게, 안달하면서 볼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아직 내 곁을 떠나지 않은 강박증들을 천천히 살펴봐야겠다. 그 시작점을 찾아서,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는 그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

 

'삶이란 둘 중 하나다. 신나는 모험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렇다. 내 삶은 신나는 모험이 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내가 다리 밑에서 잠을 자야 할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을 일도 없을 것이고 머리 위에 언제나 비 피할 지붕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머리로 내 살 길을 찾아낼 것이다. (23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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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19 2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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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맥주 캔 한 개만~~"

“한 개면 되겠냐?”

“응. 딱 한 개만 사다주면 고맙겠어~.”

늦은 오후, 마트에 가신다는 엄마에게 나는 캔맥주 한 개를 주문한다. 다 늙은 딸내미 술까지 마시면 얼굴이 더 늙는다고 구박하시면서도 잊지 않고 장바구니 속에 챙겨다 주신다. 잔소리를 하는 엄마에게 또 한 번 이렇게 대꾸하면서 모른 척 안들은 척 나는 또 딴소리를 한다. “에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잔소리 좀 그만 하시지~?!” 그럴 때면 또 한 번 눈을 흘기고 만다. 그리고는 장바구니에서 과자 한 봉지를 조용히 꺼내주신다. “빈속에 마시지 말고 안주라도 챙겨 먹어라.” 하시면서.

장난처럼 웃으면서, 과자 한 봉지에 나도 모르게 울컥 해지면서, 문득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와 서로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본다. ‘부모는 뭐든 다 저렇게 이해하고 봐주게 되는 것인가?’, ‘자식은 이렇게 철이 없이 마냥 자식으로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일까?’ 하면서. 부모는 부모라서 어른이고, 어른이라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라던 이 책 속의 한 구절이 동시에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 부모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어서(부모가 아니니 어른이 아니므로) 잔소리를 하면서도 안주까지 챙겨다주는 그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모양이라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갖다 붙인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뒤로 한 채.

 

흔히 철이 없다는 열일곱 나이에 자식을 낳은 부모가 여기 있다, 지금 서른네 살이 된, 아름이의 부모. 그리고 지금 자신을 낳았던 부모의 나이인 열일곱 살이 된 아름이. 거의 누워 살다시피 하는 아름이는 조로증 환자다. 아름이의 지금 신체나이는 여든의 노인. 이가 빠지고 주름이 생기고 머리숱이 적어지고 점점 눈이 안 보인다. 아름이가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움직이는 손으로 책을 읽고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것 밖에 없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조금 더 의미 있게 보내고 두 눈으로 봐두고 싶은 것뿐이다. 아름이는 어느 날부터 아빠와 엄마에게 들어오던 부모님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자신의 열여덟 번째 생일에 부모에게 선물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아름이 자신은 몰랐던, 부모보다도 더 빨리 늙어가서 그 시절의 부모를 알아갈 수 없었던, 아름이가 경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면서 아름이는 알아간다. 마음보다 몸이 더 빨리 늙어가는 자신이 그래도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음을, 부모보다 더 빨리 늙어가는 자신을 부모는 역시 사랑한다는 것을, 자신이 부모의 기쁨이고 슬픔이란 것을. “니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이라던 아빠의 말이 진심이었음을, 자신으로 인해 부모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라고 마지막까지 행복의 순간을 놓지 않는다. 트램벌린 위에서 하늘을 향해 뛰어 올랐던 그때처럼.

 

이야기의 모든 순간들이 페이지가 계속 넘어가는 것을 멈추게 만든다.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시간을 만들어낸다. 내 가슴 속 어디선가 잠자고 있었던 감정들과 기억들을 끄집어내느라 분주하다. 묻어두고 싶고 그냥 모른 척 지나가고 싶었던 마음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언제 살고 싶으냐?'는 질문에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게 자신을 두근대게 한다는 아름이의 말은 충격이자 공포였고 나 자신을 너무나 부끄럽게 만들었다. 하루하루가 무료하다고 투정부리고, 시간 죽이기 놀이에 익숙하고, 지루하다는 말을 하는 게 일상이었던 지난 시간들이 아름이의 저 한마디로 다시 보이게 한다.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부모님께 대꾸하던 그 많은 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부모가 하는 말들이 ‘알지도 못하면서’가 아니라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안다. 부모는 부모의 자식이었고, 지금은 자식의 부모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부모는,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내가 알 수 없었던 것을 알고 있는 분명한 입장이었는데 나만 그걸 모르고 투정을 부리고 억지를 부렸나보다.

 

영화에서 한번 봤던 소재가 이 책 속에 등장하던 그 순간 나는 이 조로증이라는 병이 흔치 않으면서도 동시에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도 있는 병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가가 소개하고 써내려간, 아름이를 통해 표현했던 조로증의 증상들 역시 단순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특히나 마음보다 몸이 더 빨리 늙어가서, 몸의 속도에 맞추려면 마음도 빨리 어른이 되고 늙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아름이의 말이 기억에서 잊히지가 않는다. 나이라는 숫자가 늘어가고 겉모습이 늙어가도 마음은 언제나 청춘인 것처럼 살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생각했는데, 아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그게 또 마음만큼 자연스럽다거나 쉬운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누구보다도 더 빨리 늙어갔던 아름이는 그만큼 더 성숙한 아이이면서 동시에 어른이었다. 부모가 되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름이는 어른으로 그 생을 마감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결코 만나거나 느낄 수 없었던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아름이는 그 누구 못지않은 성숙한 인격체였던 것이라고. 문제는 조로증이라는 병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삶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던 건데 말이다.

 

인생의 속도, 나이를 먹어가는 속도와 늙어가는 몸과 마음의 속도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무언가 간절히 되고 싶었던 아름이의 바람도 어느 정도 이루어주고, 슬픔이어서 기쁘다는 부모의 사랑도 좀 더 받아보고, 거짓으로 끝났지만 자신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대상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좀 더 아름이에게 만들어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름이에게 두근두근 뛰고 있었던 심장의 울림을 더 들려주고 싶었는데 마냥 아쉬운 것 투성이다.

 

어쩌면 시간이 삶과 죽음의 그 모호한 경계에 걸쳐지면 느낄 수 있을지 모를 감정들을 나는 300여 페이지 분량의 이 책 한권에서 다 느낀 듯하다. 공중에 그려진 오선지 위에 둥둥 떠다니는 음표를 보는 듯한 즐거운 웃음이 설렌다. 허를 찌르는 진심이 담긴 농담 같은 아름이와 부모의 대화, 그들의 생각과 말 한마디마다 들려오던 그 재치가 귀엽다. 아름이의 가슴 속 말들을 들을 때마다 흘릴 수밖에 없었던 눈물이 슬프다. 아프다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고 고개 숙일 일도 아니고 슬픔은 더더욱 아니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 누군가에게 슬픔과 동시에 기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던 아름이의 이야기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될 것 같다. 부모가 될 때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시간들, 부모가 되어서만이 볼 수 있는 모습들, 부모와 자식이기에 당연히 이해가 되는 순간들이 있다. 아름이를 통해서,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배우게 된다.

 

아름아, 사랑스러운 그 이름 아름아.

이제는 멜로디가 되고, 하늘이 되고, 바람이 되고, 바다가 되렴.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네 안에 가득 쌓아두었던 부모의 정을 나누어주렴. 너의 부모님이 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온전한 기쁨과 슬픔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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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집짓기 - 마흔 넘은 딸과 예순 넘은 엄마의 난생처음 인문학적 집짓기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작아도, 누추해도 자신의 존재를 기댈 수 있는 곳이 진정 집이다. (216페이지)

 

막연하게 엄마와 집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엄마는 땅 밟고 살아야 한다면서 마당 있는 집을 원하고(사람은 흙을 밟으며 살아야 건강하다고 했다.), 구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보조 주방을 원하고(김장 때 불편하다고 바닥에 물을 버릴 수 있는 구조의 주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 울타리 안에서 약간의 채소를 길러 먹을 수 있는 텃밭을 원한다. 마트에 가면 금방 사서 올 고추장 된장도 굳이 담가 먹어야 한다면서 장독 놓을 공간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좁은 마당 한 귀퉁이에 엄마가 어설프게 만들어놓은 작은 밭이 있고 장독대가 있다. 정말 손바닥만 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작은 공간이다. 시기에 따라 기분에 따라 상추나 시금치, 파, 열무, 부추, 고추, 토마토 같은 것을 심는다. 어느 정도 자라 수확(?)할 때가 되면 딱 한 끼 식사할 수 있는 채소가 나온다. ^^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일 년 동안의 큰 농사지어서 엄청나게 수확한 사람의 표정을 보는 듯하다. 집 앞의 시장에 가면 아무 때나 사서 먹을 수 있는 것을 굳이 본인의 손으로 길러 먹는 맛을 열변한다. 나는 그런 말을 흘려듣고 말지만,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그냥 웃는다. 엄마와 나는 집에 대한 개념이나 바라는 양상이 정반대일 정도로 다르지만, 굳이 토 달지 않는다. 집이라는 것이 겉모양이나 구조, 쓰임새 등등 많은 것이 다 다르겠지만, 본인이 좋으면 그만이다. 그건 집과 사람, 그 두 가지가 함께 한 시간에 대한 기억이 각자에게 다르게 새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를 한귀은의 『엄마와 집짓기』를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되고 있다.

 

『엄마와 집짓기』 제목에서 풍기는 내용 그대로다. 저자가 집을 짓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물론 거기에는 당연하게 엄마가 함께한다. 30여 년을 살아온 동네와 집을 뒤로하고 새로운 터전에 새집을 짓는다. 엄마와 아빠가 노후를 함께 할 집, 성장해서 따로 나가 사는 자녀들이 부모가 그리워 찾아올 집, 가족들에게 평안과 행복을 만들어줄 집. 그런 집을 짓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기초공사부터 여러 가지를 직접 보고 선택하고 관리해야 하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만들어진 물건 하나 사듯이 뚝딱 지어지는 게 아니어서, 건축주(저자와 어머니)가 원하는 방향으로 제대로 가고 있는지 관리·감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서, 처음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안타까움마저 안고 가야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정말이지 처음 집을 짓는 사람들에게 같은 초보의 입장에서 이미 경험한 시행착오를 그대로 들려주는 지침서 같기도 하다. 혹여나 집을 짓고자 하는 미래의 초보 건축주가 이 책을 본다면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듯하다. 동시에, 이 책은 집짓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저자와 엄마가 집을 짓기로 마음먹으면서 시작된 어려운 과정을 담은 초보 건축주에 관한 이야기 같지만,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다. 집짓기 과정을 통해 시작된 시간 여행이자 저자와 엄마, 가족이 함께해온 시간만큼 함께 해온 아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면서 집(집짓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쓰게 한다. 집이 인생(사람)과 같고 시간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집짓기를 통해서 엄마(나)의 마음을 알게 된다.

마흔이 넘은 딸과 예순이 넘은 엄마. 서로가 함께해온 40여 년의 시간 동안 터놓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이 집 짓는 시간 동안 여러 가지 과정을 지켜보면서 살며시 고개를 든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한다. 그동안 알아채지 못한 욕망이면서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서로가 바라는, 좋아하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이런 집이면 좋겠다, 이런 공간이면 좋겠다, 싶은 바람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정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삶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얼마만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지 고민하게 한다. 나는 지금, 내가 바라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싶은 내면의 물음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생에서 자꾸 채워 넣으려 하는 것보다 비워야 할 것들에 관해 얘기한다. 집짓기 과정의 시작인 설계에서부터 그 비움의 마음이 보인다. 이것저것 필요한 공간이라 생각해서 그려 넣고 설계한 집의 구조가 오히려 삭제되어 시작된다. 같은 크기의 면적에서 꼭 필요한 공간을 만드는 것, 자신이 기거할 그 장소에서 가장 바라는 것 우선으로 그려지고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게 기본일 텐데, 그동안 내가 바라본 삶을 떠올려 보면 가장 최소한이 아니라 가장 보편적인 것, 사람들의 눈을 따라가는 것이 우선시 되어온 것들이 많았다. 저자 엄마의 집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집과 사람이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닥을 만드는 기초공사부터, 골조를 세우고 살을 입혀 기둥과 면을 만들고 숨을 트이게 할 창을 내고, 제법 집 모양을 갖추었을 때 이어지는 내부공사나 인테리어를 보고 있자면 사람도 집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스무 살의 사람 한 명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천천히 자라고 성장해가면서 만들어지는 스무 살, 서른 살의 인생이 만들어지는 것이 집을 통해 보인다. 사람의 손길을 타고 온기를 받아 애정이 불어넣어 졌을 때, 집은 편안하고 아늑하고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한다. 사람과 다를 게 없다.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인 건지, 집짓기의 험난한 과정을 함께 하면서 공통으로 경험하는 모습 때문인 건지 그 시간은 종종 과거를 불러오는 역할을 했다. ‘이런 집을 지어야겠다.’, ‘이런 공간이 필요하다.’ 싶은 바람을 불러올 때 과거도 동시에 불려 오게 된다.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것들이 지금 이 순간 바라는 것이 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전 한때 소망하던 일은 지금 이루어야 하는 바람으로 남아있다. 그 시간에 이루지 못한 것은 상처가 되고, 그 상처는 누군가와 함께 남겨진 경우가 많다. 저자와 엄마 사이, 그 굴곡진 시간이 차마 드러나지 못했던 때를 지금 이렇게 화해의 순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는 아픔이었고 눈물이었을 일들을 웃음으로 꺼내는 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것. 지금까지 살아오지 못했다면, 지금 엄마와 집짓기를 함께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이렇게라도 꺼내어보는 것, 이렇게 한번 풀어내는 것이 얼마나 큰 치유가 되는지 알 것도 같다. 집짓기는 저자와 엄마에게, 이 책을 읽을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남겨진 숙제 같은, 그 화해와 치유의 계기가 된 것이다.

 

집짓기를 통해 사람과 삶을 알아간다는 것, 새롭다면 새로울 수 있는 시선이었다. 그 주체가 엄마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라는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가 생긴 셈이다. 집이, 집이 아니라 삶이라는 이름으로 써질 수 있다는 것도 신비롭다. 화려하고 웅장하고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집의 외양이 아니라 소박한 집 한 채가 한 사람과 같음을 알게 한다. 그 안에서 살아갈 누군가의 삶이 그대로 보이는 자서전 같은 공간이 집이라고, 앞으로 써 갈 일기 같은 공간이 집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상처투성이의 이해 못 할 시간에 대해 기억이 재구성될 수도 있는, 어느 날 불쑥 찾아올 불안을 잠재울 수도 있는, 내 마음 쉬이 뉘일 수 있는 안심의 장소가, 바로 집이 되지 아닐까.

 

집에 관한, 집짓기에 관한 이야기지만 집을 짓는 구체적인 과정이나 비용 같은 부분에 대해 세세한 내용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다. 그 집과 함께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면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삶의 의미 있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다.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행복에 관한 이야기다. 집을 잘 짓고, 평범하고 소박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시간을 꿈꾸는 이들에게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들려오는 책이다.

 

책 속에 집 짓는 과정이나 다 지은 후의 여러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었지만 유독 내 눈에 들어온 사진이다. 선명하게 나오지 않아서 더 마음에 들기도 한다. 저자 엄마의 집은 담이 없고 대문이 없다. 그래서 집까지 가는 그 트인 길에서부터 집안에서 켜놓은 불빛이 그대로 보인다. 엄마와 집짓기라는 제목이 그대로 다가오는 사진이 아닐까 싶다. 온종일 밖에서 꽁꽁 얼어붙은 몸을 쉬고 싶게 만드는 불빛이다. 저렇게 환히 비추는 불빛만 봐도 엄마가 빨리 들어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빨리 들어와서 방금 끓여놓은 뜨거운 찌개에 밥 먹으라고. 여전히 나는 빌라나 아파트 같은 관리가 편한 집을 원하지만, 저기서 비추는 저 불빛만큼은 그대로 가져오고 싶어진다. 저 불빛 하나 때문에 원하는 집에 대한 굳은 의지가 살짝 흔들리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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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하늘사랑해 2014-09-18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완전 제 스타일이네요,,ㅎㅎ
안그래도 저두 집 짓는책 관렪서 하나 사고싶어서 기웃기웃 하고 있거든요
언젠가 멀지 않은 훗날에 저도 전원주택을 지어서 살고싶어서요
미리미리 공부해두어야할거같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구단씨 2014-09-18 14:07   좋아요 0 | URL
집 짓는 전문성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다른 책을 골라보셔야 할 것 같아요. ^^
이 책은 에세이에 가까운, 편하게 읽기 좋은 마음 나눔이었어요.
그런데 초보자의 마음으로 다가서기에는 괜찮을 것도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