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면 따져봐 - 논리로 배우는 인권 이야기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최훈 지음 / 창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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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닌 타인을 볼 때, 내가 아닌 타인의 사고나 행동을 볼 때, 틀린 것과 다른 것을 인지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억지 부리는 것에 심각한 거부반응이 인다. 좋게 말하면 배려, 나를 중심으로 말하면 남의 사생활이나 그만의 사고방식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생활 방식이다. 최훈의 『불편하면 따져봐』를 읽으면서 내가 가진 사고가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안심이 든다.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부리는 간섭과 차별, 속을 후벼 파는 공격일 수 있는 잔인함을 서슴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다시 한 번 인지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셀 수 없이 부딪히는 일들이 여기에 있었다.

 

이 책에서 하는 말들이 모두 맞는다고 하기는 어렵다. 저자의 이야기를 소화하는 독자의 사고가 다 다를 것이기에 무조건 이해하고 맞는다고 판단하기를 강요할 수는 없다. 다만 학력 차별이나 성차별, 지역 차별을 포함해 인권에 관계된 거의 모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가 범하는 오류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 오류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어떤 과정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겨지는지, 그로 인해 어떤 싸움과 상처가 남는지 말한다. 그렇기에 조금 다른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온갖 차별적인 것을 만들고, 그런 이유로 더 많은 차별을 양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당당하게 맞서야 하는 자신의 주장이 필요하다. ‘불편해요!’ 그래서 그 불편함을 해소해야만 하는 정당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 편견과 고정관념에 맞서 인권을 찾는 게 당연함을 인지하는 것. 따지스트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이렇게 설명된다. 그게 불편한 사회에서 불편하지 않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바람이자 당면과제 아닐까. 이 책은 그렇게 인권을 지키기 위해 갖추어야 할 논리도구에 대해 설명한다. 많은 문제의 물음을 제기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당연히 수반되어야 하는 인간의 능력과 의무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인권의 현주소를 보여주며 그에 필요한 처방전을 일방적인 제시가 아닌 논의의 분위기로 이어가게 하는 책이다. 어렵지 않고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편한 예와 설명으로 주의를 집중시킨다. 개인적으로는 화가 올랐다가 흥분했다가, 감정이 널을 뛰곤 했는데, 그만큼 공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편함을 인지해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건강한 사회와 인권을 위해 기꺼이 펼쳐 들어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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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블랙 장르의 재발견 1
오스카 와일드 지음, 서민아 옮김 / 예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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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근원은 삶의 방향성.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고등학교 때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버스 안에서 가끔 좌석에 앉아계신 어른들이 무거운 책가방을 받아줄 때가 있다. 그러면 어디 다른 자리로 옮기지도 못하고 내 가방을 받아준 어른 옆에 서서 가곤 했다. 그때마다 익숙하게 듣던 말. "아이고, 예쁘다." 화장 안 해도, 세수만 한 얼굴이 아주 예쁘다며 경로석에 앉은 어른들은 버스 안 모든 교복 입은 학생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새벽에 등교해서 밤에 하교하는 얼굴에는 피곤과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있었을 거다. 온갖 스트레스로 얼굴에는 여드름이 잔뜩 났을 텐데, 폭식하느라 교복 치마 단추가 터질 지경인데 이런 얼굴이 뭐가 예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빨리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면 좋겠다는, 스무 살이 되고 싶은 바람뿐이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그때 버스 안에서 어른들이 말하던 '예쁘다.'의 의미를 저절로 알게 되었다. 짜증스러운 얼굴에도 보이던 순수함, 아직은 세상 경험 부족한 아이의 모습이 남아있었을 거다. 거기에, 아마 그들보다 젊은 사람을 바라보는 아련한 시선까지 덧대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때 그 어른들의 눈빛은 눈가의 주름보다 여드름을, 세월의 무게보다 책가방의 무게를, 바짝 마른 피부보다 여고생의 통통하고 굵은 종아리를 그리워했던 시선일 듯하다. 시간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기에 체념한 듯하지만, 역시 자신의 젊음과 건강함을 기억에서 지우진 못했을 거다. 꽃 같은 시절을 그리워하고 추억하면서, 애틋함과 동시에 서글픔이 밀려왔을 것 같다. 며칠 전 문득, 내가 그때 그 버스 속 경로석에 앉아 있던 어른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고 있음을 자각했다. '너희, 참 예쁘구나.' 하는 말이 입속에서 맴돌며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지나가 버린 시간,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는 젊음, 나이 든 육체가 나에게 가져오는 슬픔이 두려워진다. 도리언 그레이가 영혼을 바쳐서라도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싶었던 간절한 바람을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래서 이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궁금했다. 장르문학의 고전이라는 타이틀만큼이나 그가 영원불멸의 젊음을 가지려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가 나를 대신해 경험한 다른 인생을 보고 싶었다.

 

열아홉의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화가 바질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알게 된다. 도리언은 초상화를 보며 간절히 바란다. 이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월이 흘러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와 젊음을 유지하고, 초상화가 대신 늙어가며 자신의 추함까지 짊어질 수는 없을까? 정말 신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바람대로, 그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게 되었으니까. 그는 늙지 않는다. 그의 아름다움도 변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초상화가 늙어가고 추해지며, 그의 온갖 죄를 흡수한다. 도리언의 젊음은 계속되고 초상화는 계속 늙고 추하게 변하며 그의 인생, 세월을 채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 하나로 시작된 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소망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늙어가는 육체가 안타까워 젊음을 유지하고 싶다는 게 뜬금없는 말은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나이를 물었을 때, 실제 내 나이보다 어리게 나이를 말해주었을 때 괜히 기분이 좋다. 흔히 말하는 동안이라고 불린 거다. 시간이 채운 나이는 어쩔 수 없지만, 외모로 계산되는 나이는 어려지고 싶은 거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거다. 어디서부터 근원 했는지 모를 이 이론이 어느새 내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다. 조금 더 아름답게, 조금 더 젊게, 조금 더 즐겁게 사는 세상 속 주인공이 되고 싶은 바람. 화가가 그려준 초상화로 자기 외모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도리언은 그 아름다움의 영원성을 갖고 싶었다. 이 아름다움이 계속되길, 이 젊음이 영원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말했을 뿐인데 실제로 그렇게 되니 얼마나 놀라운가. 그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으니, 이젠 그 아름다움으로 앞으로의 시간을 사는 일만 남은 거다. 선하고 양심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며 남들과 똑같이 사는 것. 그에게 영원한 젊음이 있다는 특권을 준 것만 다를 뿐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변치 않는 외모를 선한 삶에 적용하지 않았다. 해리(헨리 경)와 한 권의 책이, 그를 아름다운 젊음이 아닌 쾌락의 길로 인도했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열아홉 청년 도리언은 서른여덟 남자가 되었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와 젊음은 여전하지만, 그의 초상화는 더는 추해질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변했다. 이십여 년의 시간 동안 그는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아주 잠깐 그의 양심이 끓어올라 선하게 살면 초상화가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믿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선한 양심보다 쾌락을 추구하던 힘이 더 셌다. 자신의 아름다운 젊음을 등에 업고 욕망에 빠져들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퇴폐적인 쾌락이 도리언을 장악하고 잔혹함이 그의 비밀을 지켜주었다. 그는 기억을 짓밟아 망각하며 죄를 잊었다. 그의 불안함도 계속된다. 그런 삶이 그에게 남겨준 건 무엇일까.

 

잔인하게도 도리언에게 남은 건 허무한 바람이 만든, 쾌락만을 좇던 사람에게 주어진 파멸뿐이었다. 인간의 육체가 늙어가는 당연함을 자연의 섭리라고 말해도 좋다면 그걸 거스르는 일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내가 생각하는 삶이란, 인간의 노력으로 변화할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아는 일이다. 그 안에서 시도 자체가 불가한 일도 있는 거다. 순리대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지켜져야 할 불문율 같은 것. 나이 듦을, 늙어가는 육체를 인정해야만 하는 거다. 그럼에도 궁금했다. 허황한 바람이라도 한 번쯤은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가능할까? 영혼을 팔아서라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단지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일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나는 내 영혼을 담보로 젊음의 영원을 부여받고 싶은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느 쪽으로도 선택하기 어려웠다. 이미 이치대로 흘러가는 시간을 눈앞에서 보고 있기에 나에게 주어질 수 없는 시간을 상상하며 그 결말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어쩌면 도리언 그레이가 그런 나의 고민을 대신 해결해주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선뜻 선택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마음속 바람을 입 밖으로 말하고, 기적(?)처럼 이루어진 현실을 자신이 살아감으로써 대신 보여준 것 같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 시간을 선택한 자의 말로를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눈에 담아야 할 것은 영원한 젊음 같은 불가능이 아닌 주어진 삶을 제대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시사했다.

 

"죄는 사람의 얼굴에 저절로 드러나는 법이지. 감출 수가 없어. 사람들은 간혹 비밀스러운 악덕에 대해 말하지만, 세상에 그런 건 없네. 어떤 비열한 인간이 부도덕한 짓을 저질렀다면, 입가의 주름에서, 축 늘어진 눈꺼풀에서, 심지어 손의 생김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어 있어." (273페이지, 해리의 말)

 

도리언을 대신해 그의 인생을 담은 초상화는 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늘어갈수록 초상화는 변한다. 그가 쾌락을 추구하고 사랑을 무시하며 저지르는 죄악이 거듭될수록, 망각과 최면과 아편으로 잔인한 기억을 버릴수록 초상화는 불미해졌다. 심장이 없는 얼굴로 살아가는 그의 잔혹한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었던 거다. 그의 외모에 가려진 온갖 추악함과 비열함을 초상화가 내내 비추고 있었는데, 애써 피하기만 하다가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마주한 격이다. 영원한 젊음을 가지고 싶어 대신했던 게 얼굴 너머의 마음까지 비추는 거울이 된 것을 그는 몰랐다. 외면했다. 현실을 거스르는 욕망으로 파멸에 이른, 이런 결말이라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해리의 말처럼 사람 얼굴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게 있다. 아무리 감추고 가리려고 발버둥 쳐도 덮어지지 않는 게 있다. 세월의 흔적처럼 새겨진 주름, 험한 일로 거칠어진 손, 표정에 드러나는 마음. 사람이 겪는 자연스러움이 마음과 육체에 녹아들어 함께 가는 게 오늘을 살아가는 진정한 모습이다. 가끔은 흘러간 시간과 늙어가는 육체가 서글퍼지더라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행복한 삶의 자세가 아닐까.

 

며칠 전, 오랜만에 대청소하면서 작은 사진첩 하나를 발견했다. 그동안 어디 있는지 몰라 한참 찾았던, 대학 시절 사진을 모아둔 앨범이었다. 한 장씩 넘겨보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참 촌스럽다'는 거다. 스무 살, 이십 대 초반을 즐기고 있었던 때다. 온갖 멋을 부리고 치장에 몰두하며 즐거워했을 텐데 지금 보니 정말 촌스러웠다. 그런데 사진을 보며 웃다 보니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사진 속 내 모습, 지금은 연락도 되지 않는 친구들 얼굴이 예뻐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예뻤다. 촌스러움과 예쁘다는 게 동의어는 아닐진대, 어떻게 동시에 다가오는 말이 되었는지 의아하지만 정말 그랬다. 아름다웠다. 가만히, 한참 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외모의 촌스러움마저 아름다움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살아있는 표정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화장, 어린애가 입은 듯한 어른스러운 옷, 어설프게 어깨에 멘 백, 불편해 보이는 구두. 그런 것들이 사진 속에서 다 사라지고 오직 우리의 얼굴만이 있었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활짝 웃고 있는 표정, 햇빛에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린 자연스러움, 같이 머리 맞대고 뭔가 열심히 하고 있던 뒷모습, 공강 시간에 나무 그늘 밑에 누워있던 나른한 오후의 풍경. 좋아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사진을 바라보던 부러운 시선이, 내 삶에서 지나가 버린 청춘의 시간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시간을 보내며 행복했던, 즐거웠던 표정 때문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이라 불리던 젊음이 부러워서가 아니라 그때의 장면을 그리워했던 거다. 다시 찾고 싶은 그 시간이 아니라, 행복했던 그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였다. 이제 분명히 알겠다. 살면서 추구해야 할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오늘뿐이라는 것을...

 

소설이 가진 허구임을 알면서도 이런 주제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누구나 한번은 바랐을지 모를 내면의 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세상의 이치를 역행하는 일이기에 이야기로 구성될 수 있다. '만약에'라는 단서를 붙여 가지 못하는 길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 결말은 다양하게 그려질 수 있다. 영원한 젊음을 가진 채로 삶을 누리는 도리언의 판타지로, 자신의 모습을 속일 수 없는 잔혹한 삶을 마주하는 도리언의 현실로. 읽으면서도 내 눈이 자꾸만 후자로 기우는 걸 보면,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모습이 어떤 건지 이미 알고 있기에 그런 게 아닐까. 알면서도 한눈팔고, 몰라서 비켜가는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건 삶의 진정성뿐이므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진심으로 살아가는 이 순간만이 나를 만들고, 나에게 행복을 부여한다는 걸 거듭 확인해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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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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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이 비범함이 되는 순간, 삶은 문학이 된다. 『스토너』

 

 

이렇게 평범한 한 인생이 문학이 되고, 공감을 부르며, 가슴에 남을 수 있다는 게, 애틋하다. 스토너의 삶이 너무 익숙한 모습이어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그의 삶에 대해 뭔가 더 극적이고 놀라운 어떤 말을 풀어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읽는 내내 답답했다. '아, 이게 아닌데...' 이거 말고 더 진실 되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찾아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눈에 힘만 주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을 보면서 '우리는 또, 이렇게 왔다가 가는 모습인가.' 싶은 안타까움과 아련함, 담담함, 받아들임, 이었다.

 

처음부터 말했지만, 『스토너』는 너무 평범한 삶을 살아간 한 남자의 이야기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란 스토너. 그는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의지로 농업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입학한다. 처음 예정대로라면 그는 대학에서 농업을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평생 해왔던 농업을 계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문학개론 수업에서 운명처럼 만난 셰익스피어의 일흔세 번째 소네트가 그의 인생에 없던 길로 인도한다. 이 남자, 문학과의 사랑에 빠진 거다. 혹시 아버지에게 반항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뜻밖에 그의 결정은 고요하게 합의된 것처럼,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대학에 남아 영문학도가 된다. 그 이후의 삶도 평범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모교의 교수가 되어 문학을 가르친다. 출세보다는 학문을 사랑했고, 아내와의 관계가 어색해도 가정을 의지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그냥 '평범하게' 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스토너만의 삶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보편적이라 부르는 인생의 모습이다. 태어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어른이 되어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제 일을 하며 가족과 함께 늙어가는 것. 겉으로 보면 아름다운 아내와 딸을 가진 존경받는 가장의 모습, 명함 내밀기 좋은 교수라는 직함이 그를 대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 평범함 한편에 늘 자리하고 있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우리의 삶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나 항상 그럴 수만은 없다는 거, 나의 선택으로 진행되는 삶이라도 때론 다른 이의 시선이나 가치관이 나를 나로 살지 못하게 한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자라면서, 세상을 겪으면서 저절로 배우고 알게 된다. 스토너가 그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마지막까지 그 자신으로 살아가던 모습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겠지만 온전한 평화와 고요는 아니었을 것 같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겪은 것처럼 그의 몸은 피곤해지고 쇠약해지고 망가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아픈 거다. 보편적으로 보이는 그 삶에 눈물이 나는 거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살아갈 수 없는 많은 삶을 떠올리게 하니까.

 

그가 태어나서 그의 의지대로 했던 건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자 마음먹었던 순간부터다. 그마저도 온전히 그의 마음 가볍게 계속되었던 건 아닌 듯하지만, 뭐 괜찮다. 그게 시작이었다고 보면 그는 그 순간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이었던 거니까. 두 번의 세계대전과 대공황 속에서도 그는 굳건했다. 모두가 입영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학문 곁에 있었다. 누군가 그를 음해하듯 자꾸 찔러대도 상관없었다. 가정이 위태로웠어도, 딸이 망가져가고 있어도 지켜보면 견뎠다. 늦게야 만난 사랑을 놓았을 때도 참아냈다. 그만의 방식으로 참고 견디고,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을 비췄다. 문득, 한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게 뭘까 생각했다. 일이든 취미든, 연인과의 사랑이든, 자녀를 향한 맹목적 헌신이든. 살아가면서 무엇 하나쯤 자신을 지탱하는 게 있을 것 같다. 저마다 다른 선택과 눈으로 그걸 찾아낼 수도 있겠다. 스토너에게 그건 학문을 향한 열정, 문학으로 가는 길 아니었을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 온갖 구린 냄새를 맡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버티면서 걸어가게 하는 것. 그건 그가 평생에 있어서 처음 선택한 일이자 애정을 품었던 문학이었다. 그 순간에 그는 빛났고, 아름다웠다. 강의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그만이 문학과 대화하는 것처럼 보인 장면들에서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마치 환희가 그를 둘러싼 듯, 오직 그 순간만 존재하는 듯. 마지막 눈감는 순간까지 그를 이끌어 왔던 건 오직 그 한가지였다.

 

삶이 문학이 될 수 있다고, 문학이 삶을 구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학으로 어느 한 순간을 위로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삶을 온전하게 주관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토너의 삶의 여정을 그린 이 이야기를 보면서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든다. 일상의 보통날을 살아가기 바쁜 오늘, 문학의 한 페이지를 들추며 삶의 한 장면을 그리며 빠져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남들이 보기에 실패로 보이는 삶을 관조하며 자신이 걸어온 시간을 읊조리는 스토너. 인생의 성공과 실패, 딱 두 가지의 길이 아니라 그냥 유유히 흘러가는 삶도 문학이 될 수 있음을 스토너를 통해 보여준다. 그저 한 남자의 인생이었다. 태어나고 자라 평범한 길을 걸으며 죽음에 이른 한 사람. 이런 삶이 문학이 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문학은 늘 비범한 사람이 주인공이었고, 그들의 인생은 높은 파도가 일렁이는 시간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스토너의 삶을 같이 걸어오면서 느꼈던 그 소소함, 참고 묵묵히 건너가는 길이, 마치 길 걷다 돌부리에 넘어져 까진 무릎을 털어내는 것 같았다. 말싸움에 지쳐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하며 무시하고 넘어가는 일들, 나를 괴롭히는 작은 공격에서 이겼다는 쾌감에도 인간적인 공감을 만든다.

 

뭔가 얻은 것 같은데, 성공한 것 같은데도 허전하고 고독한 시간은 멀어지지 않고 쓸쓸함을 부르곤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뒤돌아보니 삶의 끝에 서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밀려드는 외로움까지도 익숙하다. 그럴 때 발견하고 싶은 건 단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두고 내가 열정으로 품었던 것 단 하나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 평범함이 차곡차곡 쌓여 만든 인생이 특별해 보일 것 같다. 스토너에게 그 특별함을 부여했던 건 아마도 문학이었으리라. 그 순간이 그의 마지막이 되어버릴지라도, 그의 평범한 삶이 문학이 된 순간에 고독과 쓸쓸함, 외로움마저 그의 곁을 떠나갔을 것 같다. "세월이 정말이지, 날 듯이 흐르고 있어.(355페이지)"라고 말하는 그의 표현에서 결국 그가 종착역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 문학의 정점에 다다른 사람이 했던 말.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고 자신에게 계속 물으며 삶을 반추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와 다르지만 닮았고, 닮았지만 다른 그의 이야기를 금방 잊지는 못하겠다. 한 사람의 서사가, 그것도 너무 평범해서 익숙한 삶이 소설이 된 건, 우연이 아니었을 거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마지막 책이 보여준 건 책(문학)과 그의 인생이 운명이라는 정의였을지도...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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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체브라시카 시리즈 세트 - 전3권 - 체브라시카와 새 친구 + 체브라시카의 첫 여행 + 체브라시카와 서커스 안녕, 체브라시카
예두아르트 우스펜스키 원작, 야마치 카즈히로 엮음, 김지현 옮김 / 어린이작가정신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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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들에게 보내주려고 종종 아이들 책을 관심 있게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에 발견한 체브라시카는 아주 귀여운 캐릭터다. 시리즈의 첫 번째인 <체브라시카와 새 친구>의 캐릭터 소개에 의하면, 체브라시카는 곰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닌, 그냥 체브라시카. 얼핏 귀여운 아기 원숭이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네. ^^ 처음 만날 때부터 콱 꼬꾸라지는 모습이어서 그랬는지 이름이 러시아 어로 ‘쓰러지다’, ‘푹 고꾸라지다’라는 뜻의 ‘체브라시카’가 되었다. 곰 같은 색으로 털옷을 입었지만, 덩치로 보니 곰도 아닌 것 같고. 말 그대로 그냥, 체브라시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 같은 것을 배제한 채로 인정하면 되는 것을 말하려는 걸까 생각해 보게 된다.

 

 

첫 번째 이야기 <체브라시카와 새 친구>

오렌지 상자에 같이 실려 낯선 나라로 온 체브라시카는 새로운 환경을 접한다. 정말 낯설고, 친구 한 명도 없다.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 같은 걸 품고 있는 동그란 눈이 안쓰럽고 귀여워서 지켜보던 중, 악어 게나의 친구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간다. 그곳에서 악어 게나, 여자 어린이 가랴와 마을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그중 심술궂은 할머니 샤포클라크는 백발의 악동 같다. ^^ 욕심쟁이에 장난도 도가 지나치고. 어딜 가나 꼭 한 명 있는 못된 친구 같은 역할을 샤포클라크 할머니가 표현하는 듯하다. 이들 모두 하나가 되어 '친구의 집'을 짓기로 한다. 누구나 망설이지 않고 찾아올 수 있는 곳, 수줍게 주춤거리지 않고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곳, 마음 놓고 어울려 즐길 수 있는 곳을 만들고자 동물 친구들이 힘을 합쳐 친구의 집을 만들고 행복과 우정의 함박웃음을 짓는다.

 

 

두 번째 이야기 <체브라시카와 첫 여행>

악어 친구 게나와 함께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게 된 체브라시카. 기차를 타고 가던 중 기차표를 분실한 것을 알게 되고, 기차에서 내리게 된다. 알고 보니 기차표를 샤포클라크 할머니가 숨긴 것. 기차표를 되찾지 못한 게나와 체브라시카는 기차에서 내려 철길을 따라 걷다가 어느 숲을 발견한다. 아름다운 꽃, 싱싱한 버섯, 나무 열매 같은 자연을 처음 접하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보고 신기해하면서도 손으로 꺾거나 망가뜨리지 않는 예쁜 손. 그렇게 걷다가 발견한 어느 강에서 보게 된 오염물질. 그 오염된 물이 공장에서 흘러나와 강으로 흐르는 것을 봤지만, 공장 주인은 딱 잡아뗀다. 게나만의 재치로 응징해주고 공장에서 더 이상 폐수와 매연을 내보내지 못하게 혼쭐을 낸다. 게다가 숲에서 만난 나쁜 사람들의 악행에 도 서슴없이 복수한다. 동물을 잡으려 놓은 덫으로 혼내주고, 물고기를 몽땅 잡으려고 쳐놓은 그물을 건져 올렸을 때 나타난 악어 게나가 겁을 주고. 아주 통쾌한 한방으로 인간의 욕심을 지적한다. 그리고 다시 떠나는 기차 여행. ^^

 

 

세 번째 이야기 <체브라시카와 서커스>

마을에 서커스단이 왔다. 체브라시카와 친구들이 처음 구경하게 된 서커스가 마냥 신기하다. 온갖 재능을 뽐내고 서커스단에 들어가고 싶지만 탈락한 친구들. 그 중에 외줄타기에 도전하고 싶은 소녀 마랴가 불합격하고 우는 모습을 본 게나와 체브라시카는 마랴와 함께 외줄타기 연습을 하며 도와준다. 줄에서 자꾸 떨어져도 다시 올라가 도전하고 성공할 수 있도록 마랴를 응원하고 서커스단에 도전하게 한다. 단장은 마랴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서커스 공연에 오르도록 한다. 동물들의 친구 마랴는 공연에 성공해서 서커스단에 입단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체브라시카는 어떤 동물일까 상당히 궁금했다. 어디서 왔는지 어떤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인지... 그런데 이 책은 처음부터 그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듯, 그런 고정관념을 배제한다. 어디서 왔든, 어떤 종류의 동물이든, 아무런 상관없이 체브라시카라는 이름만으로 존재하게 한다. 정글에서 와서 낯선 동물들과의 첫 만남이 두려울 수도 있는데, 악어 게나의 친구 모집 공고는 어떤 기회를 만드는, 먼저 손 내미는 제스처였다. '우리, 이렇게 친구가 될 수 있잖아.' 하는 의미였다. 이 책을 만나게 될 연령대가 4~7세라고 나온다. 취학 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닐 나이의 아이들이다. 엄마 품에서, 집에서 익숙한 얼굴과 생활하다가 처음 가게 된 곳의 단체생활이 얼마나 두려울지... 조카들이나 주변의 아이들을 봐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처음 유치원 등원 차량에 아이가 타는데 우는 경우가 많다. 엄마와 떨어진다는 두려움, 모두 새로운 얼굴, 낯선 환경 속에서 보낼 시간이 공포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듯이, 자꾸 넓은 공간, 다른 사람들을 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듯이, 체브라시카 첫 번째 시리즈는 처음 만나는 친구들과 어우러져 가는 과정을 말한다. 친구를 사귀게 되고, 서로 함께 하는 공감을 만들어가고, 우정을 쌓아가는 방법을 그렸다. 아이가 낯선 친구와 환경에 점점 적응해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듯하다. 그 적응과정이 앞으로 어떤 시간을 이어가게 할지, 어떤 아이로 성장하게 할지 긍정적으로 기대하게 한다.

 

체브라시카 두 번째 시리즈인 여행은, 좀 더 큰 세상 속으로 뛰어든 모습을 그린다. 그 여행에서서 만나게 되는 세상의 부조리와 부패, 자연의 망가짐을 지켜보게 한다. 아이에게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이야기로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렇지도 않게 공장의 매연과 폐수를 내뿜는 게 비일비재한 세상, 오염되는 자연을 방치하면서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는 사람들. 자연의 번식과 유지가 필요하고 당연한 건데, 그것을 자신의 뱃속에만 채워 넣으려는 몰지각한 사람들의 횡포를 알려주면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스스로 깨닫게 한다. 자연은 어느 한 가지로만 설명되고 포함되는 게 아니다. 여러 가지가 함께 어우러져 자연을 만들고 유지해왔다. 그걸 한 번에 망가뜨리려는 사람에게 보내는 귀여운 경고를 동물 친구들이 대신하고 있다. 악어 게나가 폐수의 출구를 엉덩이로 막아 공장으로 폐수가 역류하게 만들었던 건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난다. 독한 말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표현해도 되지만 그것 보다는 재치 있게 상황을 되짚어가게 하는 모험 같은 전개가 아이들의 눈높이에 제법 잘 어울린다. 자연을 훼손하는 것 자체가 해서는 안 될 일임과 동시에,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식으로 아이를 가르쳐야 하는지 또 한 번 배운 셈이다.

 

세 번째 시리즈 서커스는, 자신감과 우정이 아이의 어떤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지 보게 한다. 서커스 단원이 되고 싶었던 마랴에게 매번 실패하는 줄타기는 절망일 것이다. 잘되지도 않고, 줄에서 계속 떨어지고, 하지만 서커스 단원은 꼭 되고 싶은 마랴의 간절한 마음. 그때 옆에서 응원해주고 도와주는 게나와 체브라시카의 모습이 훈훈했다. 아이들끼리의 공감대 같은 거라고 생각해도 되지만 그 바탕에는 되고 싶은, 바라는 일에 어떤 마음으로 도전해야 하는지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주저앉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 넘어질 때마다 포기하고 싶지만 간절한 바람을 항상 상기하게 되는 것, 그 옆에서 응원가를 불러주고 같이 손잡아주는 친구가 고마워서 더욱 노력하게 되는 시간. 마랴의 줄타기 연습 시간은 그런 온기로 행복했을 것 같다.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더욱 최선을 다하게 되어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림이 상당히 부드럽게 그려지고 동물들의 모습이 예쁘게 표현되었다. 체브라시카의 처음 모습은 지금 같지 않았다던데, 몇 번의 변화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큰 귀, 크고 둥근 눈, 밤색 털을 가진 동물. 상상만 해도 귀여움 그 자체다. 순진무구한 큰 눈을 반짝이며 많은 것을 보고, 큰 귀로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은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캐릭터이자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아 네 차례의 올림픽에서 공식 마스코트로 선정되어 활약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러 형태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하고... 꾸준히 재생산되어 많은 아이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게 자연스럽다.

 

충분히 사랑받을만한 캐릭터다.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의 전개와 활약, 마음을 담은 이야기가 다정하다. 그 시간을 통과하고 자라면서 꼭 한 번은 마주하고 겪게 되는 에피소드에, 아이에게 직접 닿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된다. 처음 경험하는 것들, 배우면서 봐야 하는 것들, 호기심을 채우며 즐길 수 있지만 결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으로 자리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배우는 시간이다. 감동과 재미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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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 에세이
허은실 글.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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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눈을 맞추는 시간.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읽으며 <빨간책방>의 문을 여는 이동진의 목소리를 저절로 떠올린다.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동진의 얼굴을 본 게 훨씬 더 오래전이지만, 이동진은 귀로 듣는데 제법 잘 어울리는 목소리와 말투를 가졌다. 고요하고 다정한 목소리, 차분한 말투. <빨간책방>의 청취자가 많은 이유 중에 그게 한몫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나처럼 게으른 독자도 생각나면 챙겨 듣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팟캐스트다. 그 방송의 오프닝 에세이를 이렇게 만났다.

 

새 신발을 신었을 때

발가락이나 뒤꿈치에 생긴 물집 때문에 고생한 일,

누구나 있을 겁니다.

 

기타를 처음 배울 땐 어떤가요.

어느 순간 손가락 끝의 껍질이 벗겨지고 굳은살이 박이지요.

 

사람과 사귈 때도 그런 물집과 굳은살의 시간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면

당연히 부딪치는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고요.

그 마찰 때문에 마음에도 물집이 생기죠.

 

하지만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타든, 신발이든, 사람이든,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는 건 그런 시간을 통과한 다음이니까요. - 43페이지. 물집과 굳은살

 

에세이인데 시 같다. 짧은 글이 어떤 운율에 맞춰 읊조리는 느낌이 나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다섯 개의 키워드로 나뉜 이야기다. 사이, 마음, 책, 독서, 삶. 각 키워드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만 결국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일상과 생각을 그대로 연결한 것처럼 자연스럽다. 세상 속 우리 시선, 고민, 바람 같은 게 그대로 묻어있어서 친근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이 어려워 겪게 되는 일들을 ‘사이’라는 필연적 조건이라 표현하며 이해하게 한다. 관계 맺음과 이어감의 어려움을 굳은살로 만들어야 한다고 에둘러 말한다. 처음부터 익숙해지는 건 없는 법, 찢어지고 물집이 생겨가면서 굳어지는 살이 만드는 게 관계임을 풀어낸다. 환절기가 한 번씩 지날 때마다 설명하기 힘든 그 마음의 출렁임이 부담스러웠는데, 저자는 그걸 계절과의 연애처럼 표현한다. 한 계절이 끝나가고 있음이, 한 번의 연애가 끝나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 아, 계절의 흐름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이 계절을 이렇게 흘려보낼 수도 있는 거였구나, 싶은 안도감 같은... 살면서 겪는 많은 감정을 한 가지씩, 살짝, 조용할 목소리로 건네는 속삭임 같다.

 

긴 외출 후에 돌아와 우편함을 열 땐

조금 들뜬 기분이 듭니다.

숫자들만 가득한 공과금 고지서 속에

어쩌면 다른 게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죠.

우표가 붙은 엽서, 누군가의 지문이 묻은 손 편지.

그런 것들 말이지요.

 

마음의 근황을 물어오는 뜻밖의 편지를 기다리는 일.

삶이란 그런 게 아닐까요.

그렇게 혹시나, 어쩌면, 하고 기대를 품고

스팸 메일이나 납세고지서 같은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릅니다. - 196페이지. 어쩌면 오늘 우리는 편지를

 

 

페이지를 계속 넘기면서 만나는 책 이야기는 ‘그래서 책 이야기를 하는 방송의 문을 여는 것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통해 들여다보는 세상이 낯설지 않아서 더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독서가 사람 살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말하는 저자. 단어와 문장과 페이지에 눈을 맞추며 느끼는 것들. 사람, 시간, 세상, 그리고 더 많은 것. 살면서 여러 가지를 ‘지어가는’ 일이 소소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과정이 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풀고 있다. 본방송을 듣기 전의 애피타이저 같은, 본방송을 다 듣고 난 후 맛보는 후식 같은 글.

 

(비밀을 하나 말하자면) <빨간책방> 초기를 제외하면, 사실 나는 오프닝 원고를 미리 읽어보지 않는다. 그 글을 처음 대하자마자 눈과 뇌를 거쳐 의미와 리듬을 한꺼번에 굴리면서 입 밖으로 내미는 짧은 순간의 신선한 긴장감에서 출발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글을 온전히 믿고 순전히 즐긴다. - 이동진

 

이동진의 추천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저자의 글이, 아직 남은 겨울에 온기를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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