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보더 Cross Border 국제인수합병 - 글로벌 M&A
CCTV(국제인수합병) 프로그램 팀 지음, 류정화 옮김 / 가나북스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중국의 국세(國勢)는 단지 싸구려 물품 시장을 뒤덮다시피 한 물량공세나, 축구 거대 리그의 주경기장 광고판을 도배하듯 점거한 그 다양한 디자인의 한자 물결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어제까지 세계 굴지의 상표와 브랜드로 빛나던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 오늘 갑자기 국적을 중국으로 갈아탄 채 머쓱한 모습을 내밀고 있는 미디어의 기사, 사진에서도 절감할 수 있어요. 세계 인구의 1/5이 거주해 왔고, 이 제 그 덩치값을 하느라 미국을 넘어 경제규모 1위, 그리고 동아시아의 패권자 위치를 향해 발돋움하는 모습이란, 개인적으로 달가워하든 그렇지 않든, 받아들여야 할 냉정한 현실입니다. 지록위마의 기만도 힘이 있을 때나 가능하겠죠. 우리 지척에서 거인의 키높이로 저만큼이나 솟아 오른, "진격해 오는" 실체를 애써 부인하는 일은 바르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못합니다.


오랜 기간 이른바 "도광양회"를 모토로 숨 죽이며 실리를 다져 왓던 중국은, 흔히 2008년 국제 금융 위기를 고비로 본격적인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들 말합니다. 그 러나 이 책에서 드라마틱하게 드러나듯, 중국은 이미 그보다 다소 앞선 시기부터 넉넉히 축적해 둔 외화를 밑천으로, 세계 금싸라기 기업을 "사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AS 좋고 디자인, 성능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IBM(국내에선 한때 LG와 파트너십을 맺었죠. 알짜 노하우를 잘 배워 나간 LG는 이후 엑스노트라는 고급 자체 브랜드를 만드는 데에 성공하고요)은, 놀랍게도 자사 간판 부문 중 하나인 노트북 사업을,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레노보"라는 회사에 넘깁니다. 아마 국내 마니아들도 당시 충격깨나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은, 일시적이거나 예외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책을 보면, 911 이후(미국이 본격 "중국"에 대한 무력 견제에 들어간 시점이 이 때라서, 기준으로 했습니다) 위기의식과 자신감을 동시에 갖게 된 중국이, 얼마나 글로벌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텃밭"을 넓혀 나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레노보의 예는 그저 드러난 일각에 불과합니다. 책을 보시면, 어지간히도 세계의 노른자를 이들이 탐욕스럽게(자본주의는 본디 탐욕을 그 추동력과 영혼으로 삼습니다) 잠식해 나갔는지, 다큐를 보듯 실감 가능합니다(본디 다큐 대본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제가 문장의 주어를 자꾸 "중국"이라는 추상명사(?)로 잡아서 오해가 있으실 수 있지만, 공산당 1당이 영도하는  폐쇄적 정치체제를 가진 이 나라의 일이라고 해서, 국가 주도로 모든 일이 일어나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나 있지만(이런 걸 배우려고 이 책을 읽는 거겠죠), 주인공들은 역동적 기업인들이고, 이들은 (물론 당국의 규제와 감시를 상대적으로 받는 편이지만, 탄탄한 인맥- 소위 "꽌시"-에 의해 비껴나갑니다. 그것도 사업 수완, 룰의 일부입니다) 대단히 탁월한 수완과 과단성, 속도감 있는 결단으로 세계를 놀라게 할 프로젝트를 실현해 나갑니다. 이 책은 주로 중국 굴지의 재벌들이 어떻게 글로벌 기업을 식성 좋게 꿀꺽해 나가는지 그 스토리를 담은 책입니다.


중 국 기업에 한(限)한 이야기들인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다임러-벤츠와 크라이슬러의 합병 비사, 그리고 그 뒷이야기(대실패로 끝난)도 실려 있죠, 이는 널리 알려진 스토리라 새로울 건 없지만, 이 사태를 "중국"이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는 소재가 됩니다. 같은 국적의 두 기업이 합병해도 기업간 문화 차이 때문에 트러블을 겪는데. 하물며 후진 중국이 세련된 유럽-미국 기업을 "먹는" 사례에 있어서 그 갈등과 알력이 어느 정도겠습니까. 말이 좋아 문화 차이로 얼버무리고 말죠. 제 경험으로, 아직 중국은 평등한 개인 사이의 계약 문화, 리걸 마인드가 정착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볼 보와 지리(吉利) 합병의 이야기가 재미있죠? 요즘 차를 몰다 보면 옆차선에 Volvo라는 트레이드마크가 새겨진 중장비가 지나가는 걸 종종 볼수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온 대로, 세단 부문(Volvo Personvagnar)은 이미 포드에게 넘어갔고 그 포드가 다시 지리(Geely)에 지분을 넘긴 거죠. 볼보 본사는 이 책에 나오는 대로, 현재는 상(商)용차 제조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따분한 이야기, 예컨대 미국은 스톡홀더의 이익을 중시하는 반면, 독일은 스테이크홀더의 입장을 중시한다 같은, 너무 자주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힐 것 같은 이야기도 박스로 쳐 두고 강조하고 있긴 합니다.


각 장의 제목도 따분하게 붙여진 것도 있지만, 예를 들어 5장을 보시면 Capital Vehicle이라고 붙여져 있네요. 한국어 번역(중국어?)은 "자본의 동맹"이랍니다. 영어 제목은 저게 CVM이라는 유명한 회사 고유명칭이기도 해서, 묘한 레토릭의 즐거움을 줍니다.  여기보면 치파(이탈리아 기업이므로 "치"라고 읽어야겠죠)의 CEO로 페라리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페라리라고 했다가 페라레라고 오타를 냈다가 해서 헷갈릴 수 있지만, Maurizio Ferrari라는 인물이 지금도 (직위만 바뀐 채) 재직 중입니다. (자동차 이름과 철자는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할 건, "아 중국이 이탈리아 콘크리트 제조사도 사 들이는구나. 돈 많군." 정도가 아닙니다. 미국은 몰라도, 특히 이탈리아 세습 귀족 특권층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 지분은, 미국 사업가들에게도 잘 팔지 않습니다. 하물며 중국인이라면, 비드만 쎄게 제시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그간 중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알 수 있죠.


인수합병의 사례, 실례만 재미있게 풀어 주고, 이론화한 정식을 제공하지는 않는가? 깊이 있는 이론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내용은 교과서를 찾아 봐야겠죠. 그런데, 보통 documentary book이 그렇지만(제가 두 달 전에 쓴 <퍼펙트 베이비>도 그런 구성이었는데요), 방송 회분이 종료되면 한 장(章)도 끝나는데, 각 장의 말미에 <심층 분석>섹션이 꼭 부록으로 붙어 있다는 게 특징입니다. 요건 볼만합니다. 학자와 연구원, 정책 결정 고위층의 논문, 르포를 전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방송 스크립트다 보니 좀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부분은 서플먼트라서 그럭저럭 깊이가 있습니다.


<심층분석>이 라고 해서 다 읽을만하다는 건 아닙니다. 어떤 건 중국 저작 특유의, 유아적 인상 비평으로 가득해서 또 한번 실소가 나오는 것도 있었죠. 보고서라든가 실용 문건은 자신의 주관이나 감성을 최대한 자제하고, 수치나 통계 등 객관적 지표를 우선해야 하는데, 마치 무협지에서 절대 선(善)으로 설정된 주인공이 악당을 향해 장엄한 단죄, 선고나 내리듯 평가어 일변으로 일방을 옹호, 타방을 매도하는 품이 우스웠습니다. 미숙한 정신의 고유한 특징이고, 이런 점에서 아직도 중국은 멀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다 중국인 저자 일변인가? 그렇지는 또 않아서, 교세라 회장 이나모리의 회고담을 옮겨 놓은 것도 있고, 책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인 잭 웰치의 인터뷰를 실어 둔 것도 있습니다. 후자는 <21世紀 經濟報導>의 인터뷰를 재인용한 것입니다. 원문은 http://www.21cbh.com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이 아직 유치한 걸음마를 떼지는 못 했지만, 나름 치열한 고민도 적잖게 하고 있는 중임을 엿볼 수 있어요.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이 있다면, 번역이 너무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제가 보기에 원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의 문제입니다. 문장 교열이 부실하고, 개념어의 번역도 대단히 어지럽습니다. 역자는 중국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옮겼다고 하는데, 이런 책을 옮기려면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확립된 용어가 무엇인지나 파악하고 나서 작업에 손을 대어도 대어야 할 겁니다.


p83:7 스티글라츠 → 스티글리츠. 이 줄에서는 띄어쓰기도 엉망입니다.


p120에서, 1988년이 아니라 1998년입니다.

이 때는 리 아이아코카가 크라이슬러 리빌딩을 막 끝낼 무렵인데, 다임러와의 합병 같은 걸 꿈이나 꿀 수 있었겠습니까. M&A 관행이 아직 성숙기도 아니었음은 당연하구요. 단순한 오타가 아니라, 국제 M&A  역사에 대한 기본 인식이 안 되어 있는 소치입니다.


p110 64억이 맞습니다. $85억은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 모르겠네요.

p38 일본인은 한때 더없이 풍경이 아름다웠다..... → 말도 안되는 문장의 개입입니다. 아마 "더없이 낙관적인 장밋빛 전망을 가졌다." 정도로 오역한 것 같습니다.


p39 미국 뉴스워크 지 → 뉴스위크 지

p56 에 보면, 1915년 독일인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법을 두고, "적과의 조례 교섭"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이건 사람이 한 번역이 아니라, 기계의 솜씨 같다는 느낌마저 줍니다. Trading with the Enemy Act of 1917를 두고 한 말 같은데, 불특정 독자들이 읽는 책에는 최소한의 성의가 들어가야 합니다. 저술이란 장난이 아닙니다. 이런 건 학부생 레포트라 해도 F 맞습니다.


p122에 보면 "감사위원회" 가 나옵니다. 이는 독일어 Aufsichtstrat를 번역한 것으로 보이지만 적절치 않습니다.  한국어 위키에 보면 '감독위원회'가 나오는데 이게 그나마 무난합니다.  참고로 저 위키 페이지는
Aufsichstrat라고 오타를 냈는데, 이것 역시도 틀린 겁니다. Aufsicht가 "감사, 감독"의 의미이고, Rat가 "의회, 회의"의 뜻입니다. Bundesrat 같은 단어에서 흔히 보는 거죠.


독일의 Aufsichtstrat는 우리나 미국, 일본의 감사하고는 다릅니다. 노동자의 참여Mitbestimmung 가 보장된 점에서이죠(주주 아닌 채권자도 들어갑니다. 그래서 스테이크 홀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한, 미, 일의 감사는, 물론 이사나 주주도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한 제 3자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Aufsichtstrat 를 감사역회라고 번역하는 곳도 있는데, 정확하지도 못할 뿐더러 일제 잔재 용어를 의식 없이 쓰고 있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입니다. "~역"은 대개가 다, 순화되지 못한 일본식 용어입니다. ("취체역"이라고 할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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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의 경제학
헨리 조지 지음, 전강수 옮김 / 돌베개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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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주님, 언제 대체 저희가 주님께서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게 되신 걸 보고도 주님을 돌보아 드리지 않은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잘 들어 두어라.

너희 중에 가장 힘없고, 가난하며, 미천한 자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대목은 물론 기독교 성경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나오는 말입니다만, 이 헨리 조지의 불멸의 고전 그 맨 앞의 발문으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헨리 조지라고 하면, 과격하기 그지없는 토지 단일세의 도입으로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들어 놓으려 했던 과격분자로 당대에 매도당하곤 했으며, 심지어 지금에 이르러서도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 "marx의 뒤에 출현했으나 만약 앞 시대의 사람이었으면 그로부터 '공상적 사회주의자' 정도로 비판 받았을, 치밀하지 못한 문학적 성향의 이론가" 정도로 인식하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이름을 처음에 접한 것이, 고등학교 때 읽은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이 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 책 제목은 내용을 오도하는 면까지 있는데요. 비록 초급 단계의 경제사상사를 다루고 있어 다양한 사상가들의 주장과 이력을 소개하는 책이었다고는 하나,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해법과 진실을 찾아 나가야 할 학문의 과제가, 얕은 상대주의의 장벽에 의해 영원한 분단이라도 겪어야 하는 것이 운명이나 되는 듯 착시를 유발하는 점에서요. 읽어 보면 내용도, 이런 예단과는 정반대의 논지에 가깝다는 사실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아무튼, 이 책의 후반부에서, 한 챕터를 할애하여 헨리 조지를 설 명하고는 있었으나, 당시의 저는 그다지 강렬한 인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토지단일세라는 한 가지 수단으로 어떻게 일거에 사회 모순과 불의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방법이 단순한 것도 문제고(복잡한 문제가 단순한 해법으로 해결되길 기대하는 건 무모하고, 요행 심리에 가까울 수 있다는 점에서요), 세제의 개편은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근본의 방책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 책을 읽고 그간의 오해를 완전히 바로잡게 된 건 신선한 쾌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른바 진보 진영의 입장에 서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때도, 계급 일반을 목적어로 들거나("자본가 타도!" 등), 주체로 띄우는 편("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 등)이 부담이 덜합니다. 계층(막스 베버적 의미) 아니라 계급(marx적 의미)이라고 해도, 여전히 그 개념의 공명은 추상적입니다. 반면, 세제(tax system) 지엽 부문을 건드리는 지적이나 논변은, 이에 해당하는 직접 영향권의 이해당사자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구체적인 반발, 반격을 예상하고 전략을 짜야 하는 행동가에게 더 구체적이고 어려운 과제를 주기 마련입니다. "폼이 나"지는 않으면서도, 실천에 옮기기는 또 어려우니, 행동보다 말로 하는 선전을 좋아하는 위선자들에게 인기가 없을 수밖에요.


이 책의 소개글에 보면, "한때 Marx보다 더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고, 톨스토이로 하여금 생의 후반을 georgist로 살게 했던" 이란 수식어가, 헨리 조지 그의 이름 앞에 붙어 있습니다. 지금 감각으로는 "뭘 그렇게까지나?"하는 회의적 반응이나 불러일으킬 것 같지만, 그런 막연한, 그리고 잘못된 선입견은 이 책을 읽으면서 깨어지리라 기대합니다. 그가 제시한 토지단일세제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근본의 불의를 제거하는 발본색원의 처방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물론, 이를 단시간에 전면적으로 도입할 수는 없습니다. 꼭 심술쟁이 빌프레도 파레토 할아버지의 강력한 훼방에 발목이 잡혀서가 아니라, 그를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무리한 독재적 조치들이 선행되어야 하겠습니까.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고,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고의 선과 가치라 해도 정의라는 낮은 단계의 관문을 거치지 않았다면 없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세제 대원칙, 즉 "발생하는 소득과 부가가치를 우선적으로 과세 대상으로 삼는다." 는 명제는, 이 책에서 헨리 조지가 통렬히 비판하고 있듯, "열심히 흘린 땀과 창의력"을 모욕하고, 억제하며, 감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어느 인디언의 말처럼, "신이 인간과 동식물에게 내린 무상의 축복인 대지에, 어떻게 사람이 인위적으로 금을 그어 배타적인 소유의 대상으로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런 백인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같은 생각은, 대지에 두 발을 디디고 오로지 지구의 중력에만 복종할 의무를 지닌 채, 사슬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난 우리 인간이 당연히 그 머리와 영혼으로부터 떠올릴 수 있는 공감의 대상입니다. 대 체 어느 공동체가, 노동과 창의적 사고를 장려하고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그에다 벌칙을 부과할 수 있습니까? 공공의 서비스 기능을 가동하기 위한 재원인 조세의 징수는, 육체적, 정신적인 그 어떤 노동이나 기여도 하지 않는 블로소득, 자산으로부터 우선적으로 이뤄저야 함이 당연합니다. 이는 (헨리 조지의 말처럼) 자연의 정의인 것입니다.


Marx 는 말하기를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습니다. 현실의 문제에 대해 그 원인과 구조를 직시하지 않고, 도피적 환상에서 그 탈출구를 찾는 일체의 행태를 두고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비유이자 경구라서, 딱히 종교를 모욕했다는 식으로 편협하게 받아들일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헨리 조지는, 이 책 도처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우리들 중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하고 지상에 내려온 구세주의 가르침을, 그가 본디 말했던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왜곡 없이 실천에 옮기자."는 취 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본디 무력과 폭력, 기만과 착취, 억압과 모멸로부터 헤방되고자 했던 민중의 의존처였는데, 이것이 어찌하다 가진자, 지배층의 편한 도구로 타락하여 지상에서 정반대의 기능을 하고 있으니, 헨리 조지, 그리고 그와 뜻을 같이했던 수많은 행동가, 그리고 베링 해, 시베리아를 사이에 두고 다른 대륙으로부터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던 톨스토이 같은 대문호의 개탄 대상이 되지 않았겠습니까(톨스토이는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구두수선공이 만난 예수> 같은 감동적안 동화를 창작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의 저 구절이 모티브죠). 이에서 알 수 있는 바처럼, 헨리 조지는 사회 모순의 지적과 그 근본적 해소를 주장하는 점에서 Marx와 공통적이나, 그 방법론에 있어 보편적 휴머니티에 더 깊은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Marx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진보와 빈곤>은 현재 한국어판으로도 여러 책이 나와 있고, 헨리 조지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우리의 뇌리에 새겨진 터라 모르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습니다만, 한국에서 헨리 조지의 삶과 사상에 가장 정통한 전문가이자, 실천적 조지스트로 꼽힐 만한 전강수 교수님의 번역으로 이번에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전강수 교수님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김수행 교수님의 제자 중 한 분이시기도 하고, 김수행 교수님이 언제나 견지했던 글쓰기 원칙 중 하나인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문장"의 구현에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내놓아 오신 저술가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최고 장점은, 말 그대로 소설처럼 잘 읽힌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첫째, 헨리 조지 자신이 워낙 막강한, 감동적이고 호소력 짙은 문장을 구사하는 필자이기도 했고, 둘째, 이 전강수 역자가 헨리 조지의 사상에 정통한 전문가라는 사실, 마지막으로, 전강수 교수님 본인이 빼어난 문장가이자 박식한 저술가라는 사실에 크게 힘입습니다. 소설처럼 잘 읽히는 문장에, 풍부한 역주까지 달려 있기 때문에, 고전을 읽는다는 부담이 전혀 없이 마치 진보언론의 칼럼이나 독파하듯 책장이 잘 넘어갑니다. 잘 넘어가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매 페이지마다 사회 모순과 인간성 본연의 문제에 대한 각성을 쉼 없이 떠올리게 합니다.


이 책은 헨리 조지의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 줄 만큼, 빼어난 창작 문장과 명구의 인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루이 블랑의 유명한 경구 "능력에 따라 생산하며,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를 제가 영어 원서에서 찾아 보니 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ies; to each according to his wants,라고 되어 있더군요(루이 블랑은 물론 불어로 저 말을 했겠지만). 영어로 읽으나 한국어로 읽으나 입에 착착 감기는 참 아름다운 레토릭입니다. p121 중간 쯤에 보면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가 있죠? 이는 구약 신명기 25장 4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밟아 떤"다는 건 탈곡 작업을 말합니다.


이 책은 역사서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습니다. 책에는 당시 폭력적이고 파렴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이른바 robber baron들의 이야기가 가득 나옵니다. 벤더빌트 제이 굴드, jp 모건... 그런가 하면 극심한 기근이 덮친 고향을 떠나  대거 신세계로 들어 와서 사회 최하층부를 구성했던 아 일랜드 이민들의 가슴 아픈 사연도 실려 있죠. 헨리 조지는 이들을 가리켜, "인간 쓰레기"라며 다분히 역설적인 호칭을 부여합니다. 물론 그 동기에는 정의로운 분노가 깔려 있죠. "어떻게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동족을 이처럼이나 비참한 지경에 방치할 수 있는가?"


130여년 전의 책이 현 사회에 무슨 개선에의 시사점을 던져 줄까? 같은 회의가 드는 분은 이 대목을 읽어 보십시오.


p32:9
소규모 가게주인과 소상인들은 대기업의 영업사원이나 직원으로 변모하고 있다.


우석훈이나 김용민, 김어준 책에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130년 전에 저술된 바로 이 책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고전은 무엇을 고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바로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도 퇴색하지 않고 유효하게 적실한 진단과 처방을 제시하는 책 아니겠습니까.


이 책의 원제는 social problems입니다. 그렇죠. 그저 <(제반)사회 문제>입니다. 대단히 겸손하고(?) 온건한 제목입니다. 한국에서 헨리 조지에 가장 정통한(이론과 실천 모든 면에서) 전 교수님이 옮긴 이 한국어 번역본은, 보시다시피 <사회문제의 경제학>입니다. 진보 경제사상가의 고전은 거개가 사 회적 문제 논의에 초점이 맞춰진 성격이므로, "경제학'이라는 말은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진보 성향 경제학자들에게는 "사회학 = 경제학"의 등식이 성립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예컨대 "두 분야의 만남" 같은 규정은 그 인식의 깊이 없음을 드러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 책은 사회적 문제를 논급하며, 기초적 수준의 시장 원리 지식을 분석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번역판의 저 제목은 자칫 소활해 보이는 첫인상을 만회하기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거듭되는 말이지만, 전강수 교수님의 문장이 참 좋습니다. 예를 들어,  p197:9의 긴박(緊縛) 같은 단어를 보십시오, 토지에 예속된 농노 등의 처지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인데, 저는 이 단어를 몰라 국어사전을 찾아 보기까지 했습니다. 사전의 정의로는 "[명사] 꽉 졸라 얽어맴"이라고 나옵니다. "와, 어제 준플레이오프 긴박감 쩔?便?여? " 할 때 그 긴박迫은 아닙니다. 이처럼 교수님의 문장은, 잘 읽히면서도 적확한 어휘를 구사하시고 있다는 점이, 독자로 하여금 고마움과 즐거움을 느끼게까지 하는 부분입니다.


고 전을 읽다 보면, 특히 그것이 경제문제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면, 아무래도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을 하고 있기가 쉽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손쉽고 경박한 비판을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재해석과 재발견의 자세로 독서에 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고전에서 허점을 찾아 내는 일은, 마치 청출어람의 분위기처럼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의 뿌듯함을 실감할 수 있어 지식 쌓는 보람을 느끼게도 해 줍니다.


p160 이하의 12장 "과잉생산" 챕터를 보십시오. 헨리 조지는 이 장에서, 어느 한 섹터의 생산이 증가하면, 그 재화의 가격은 하락하며, 이 내려간 재화를 구입하게 된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소득이 증가하게 되어(쌀값이 만원에서 9천원으로 내려갔다면, 개인은 [가처분]소득이 1000원만큼 증가한 셈이겠죠?), 다른 재화를 구입할 여력이 늘어납니다. 이는 다른 재화의 소비까지 촉진하게 되고, ... 이 선순환은 끊임 없이 이어져, 사회는 공황이라는 것을 모르게 된다는 주장입니다(헨리 조지의 시대에도 대규모 불경기는 주기적으로 사회를 엄습했습니다). 어떠신지요? 네. 느끼신 대로, 이 주장은 지나치게 나이브하고, 다양한 내외생변수의 개입을 무시한 단순화입니다. 이 당시에는 (정치하게 이론화된 상태로)알려져 있지는 않았겠으나, 재화의 가격 하락은 대체효과와 소득효과를 동시에 부릅니다. 이것이 당해 개별 재화의 가격에 미치는 영향도 정확히는 알 수 없고(대부분은 수요 증가로 나타나겠지만), 하물며 타 생산 부문에 미치는 영향을 올바로 계측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헨리 조지는 놀랍게도, "그 재화를 사용하는 다른 생산분야의 원가 하락"마저 유발하여, 이 지복(至福)의 파장이 그칠 줄 모르고 확대된다고까지 하나, 이는 그야말로 과격한 일반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재화가 현실에서 존재하는 예라면, 아마 석유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티셔츠, 피자, 운동화, 영화관람료처럼 대중적인 소비 섹터에서도, 그런 "일타삼피"의 꽃놀이패를 찾는 일이란 극히 어려울 뿐입니다. 현대의 네트웍이나 산업 연관 관계의 복잡성은, 그런 단순한 처방을 거부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세분화한 개인의 개성 발달도 이에 한몫합니다. 오늘 당장 토니모리의 50%세일이 개시된다고 해서, 바로 인접한 못된고양이 매장의 매상고가 과연 조금이라도 증가할지의 여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런 주장은 마치 "정직이 최상의 책략이다." 같은 속담의 타당성만큼이나 현실에서의 힘이 약합니다. 우리는 정말 타인의 검은 속셈을 아무런 의식도 하지 않은 채 신사협정을 맺고 혼자 준수할 수 있을까요? 나 혼자 깨끗하다고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최악의 사기꾼에게 좋은 일만 시켜 주는 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자기 합리화의 대가에게 그 좋은 점을 칭찬해 줘 봐야, 상대는 좋은 과실만 챙기고 입을 씻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면 이 사람은 이미 선행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나 같습니다. 악에 어리석은 방법으로 공헌한 자도, 똑같은 악행의 실천에 공범으로 가담한 것이기 때문이죠. 헨리 조지의 저 아이디어(12장에서 논한)가 문자 그대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동시간대에 모든 인류가 휴머니즘으로 제 영혼을 정화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체의 경제적, 사회적, 개인적 부조리와 악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악과 이기심이 일소되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복귀했다는 전제 아래 저 처방은 타당합니다.


다만 헨리 조지의 아이디어는 중요한 시사점을 안겨다 줍니다. 우선 그보다 앞선 시대의 경제학자인 세이가 주장한 (이른바) 법칙의 내용을 보십시오, 터무니없게도, 이분은 "모든 상품은 결국 시장에서 청산되게 운명지어져 있으며, 일반적 과잉생산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폈죠. 겉으로 봐서 후대의 헨리 조지가 한 말과 표현이 똑같습니다. 다만 세이가 한 말은, 시장의 전지전능성을 강조한 극단적 보수파의 입장이고, 헨리 조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독점자본가의 탐욕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아주 선명한 대척을 이룹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유와 배경이 전혀 다르나, 결과적으로 동일한 명제를 논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물론 현실은 이러한 순진한, "숭고한"기대를 정면으로 배반합니다.


다 음으로 다른 시사점도 있습니다. 헨리 조지보다 한참 뒤의 사람인, 케인즈를 떠올려 봅시다. 이 사람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뭡니까? "경기가 나쁘면 돈을 찍어내 뿌려서라도 경기 부양에 나서야(아베도 요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죠)지, 시장만 믿다가는 다 죽는다."죠. 근데 이 이야기도, 저 위에 제가 적은 대로(당연히 이 책에 나온 대로), 헨리 조지의 주장과 통합니다. 이것은 개별 명제의 우연적 일치가 아니라, 아예 기조와 본의까지 일치하는 것입니다. 다만 케인즈의 생각은 "가난한 다수를 구할 수 없는 사회는 부유한 소수도 구할 수 없다."는, 소수 귀족 엘리트의 체제 수호 본능과 우수한 지성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죠.


번 역에서 몇 가지만 지적했으면 합니다. p33 중간 쯤에 보시면 아서 대통령의 언급이 나옵니다. 체스터 a 아서는 미국의 21대 대통령인데, 영화 <다이하드 3> 중에서 "퀴즈"의 소재로 잠시 언급되기도 했습니다(폭발물이 설치된 학교 이름). 첵에는 역자의 보충 설명을 통해, "낙선한 아서가 낚시를 하러 가자 철도회사들이 가차없이 잘라버렸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입니다.


체 스터 a 아서는 일종의 정치 청부업자 같은 유형으로 수완이 좋아 대통령까지 된 사람인데요(영화 <다이하드 3>에서는 새뮤얼 잭슨의 입을 빌려 "세무공무원이 대통령까지 출세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국세청장직은 엽관행위로 따 낸 자리였습니다), 이 사람은 자본가들의 후원을 받아 부통령 지명을 따 내고, 가필드 대통령의 암살 후에 그 직을 승계했으나, 대통령이 된 후에는 대중추수노선을 걷습니다. 유명한 조치로, "기차에서 흑인들도 차별 없이 좌석에 앉을 권리"를 법제화한 일이 있죠(이게 현실이 되려면 이후 백 년이 더 지나야 했지만요). 이 조치로 특히 철도회사에서 치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업무가 산적한 현직 대통령이 플로리다로 낚시를 떠난다고 하자(당시에는 워싱턴에서 플로리다까지 가려면 대단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들 철도회사들이 보복 차원에서 직무 태만을 걸고 언론을 통해 그를 집중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체스터 a 아서는 정치적으로 재기불능이 됩니다. 원문의 deadhead는 이 사실을 지적한 것이고, 역자의 설명은 틀린 것입니다.


p119의 아래 8째 줄을 보십시오. 잘 이해가 되십니까? 이 문장은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re are those who constantly talk and write as though whoever finds fault with the present distribution of wealth were demanding that....


이 문장을 본 뜻이 살아나게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의 부(富) 분배 시스템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마치 예외 없이 ....... 를  일치되게 주장하기라도 하는 양,

덮어놓고 매도하는 필자와 논자들이 있다.


이렇게 쓰면 전혀 오해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책의 그 번역은, 전 교수님이 올바로 이해하신 바를, 독자로 하여금 다른 방향으로 오도할 모호성을 띠고 있습니다.


p116의 "미드 나이트 미션"은, 한국어나 영어나 아무 이유 없이, '미드-나이트'로 띄어쓰기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여기서 띄어쓰기를 하면 다른 뜻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고유명사이니만큼 그 중요성은 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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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 구본형의 자기경영 1954-2013
구본형 지음 / 김영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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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 줄 것만 같았던 소중한 존재의 상실, 떠나감은, 떠나간 대상의 그것보다 더 크고 깊은 차원의 슬픔을, 남겨진 우리 자신에게 안기고 떠나간다는 게 문제입니다. 언제나, 남겨진 사람의 상처와 몫으로 남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고인이 스스로 작명하여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뜻으로 그를 향해 불러 주곤 했던 애칭 그대로, "변화경영사상가"로서 그리 길지도 않으셨던 삶을 산 구본형 선생, 하지만 그가 남긴 글과 말은 제법 두툼한 두께의 유산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적지만도 않은 추억에 우리가 그러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더 많은 소출을 기대할 수 있었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우리의 소홀함으로 인해 아까이 떠나 보내고 말았던 그 자책에 기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뼈어난 글과, 더 빼어난 안목, 실천의 자취로 우리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긴 "스승"은, 방대한 양의 전집으로, 떠나간 그를 애상하는 일도 의미 깊으며, 반대로 간이하나 압축적인 한 권의 집결로 보다 편하게 우리 곁에 두는 일도 적지 않은 위안과 효용을 가져다 줍니다. 이 책은, 故人이 생전에 남긴 에세이 중 가장 정수다 싶은 명편을 뽑아, 예쁜 디자인으로 엮어 낸 한 권의 대표 선집입니다.


그 는 거창한 말로 존재를 과시하는 유형도 아니었고, 감동적이면서 폐부를 찌르는 생활형, 실천형 전도사였기에, 또 생전의 그가 누누이 강조했듯, 삶과 그 열정의 일부와 작용으로 글쓰기에 전념했던 분이었기에, 사실 어떤 글을 읽어도 선집 통독, 탐독의 효과가 남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아니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우리 독자와 "제자"들이 무엇을 랜덤으로 가려 뽑아 읽어도 의미 있는 추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남겨진 이들 중에도 더 각별하고 농도 진한 인연으로 생전에 그를 보필했던 분들의 솜씨와 땀이 배어 추린 글들이라면, 그 의미는 더 확충될 수 있겠죠. 이 책은 바로 그런 책입니다.


이 책은, 어쩌면 그들의 스승의 부활, 불멸을 기도하는 제자들의 애타는 바람일지 모릅니다. 그 증좌는, 책의 편제가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 다시 봄"의 꼴로 짜여지고, 이 5개의 장 안에 그 성격에 걸맞는 에세이들이 알뜰히 열을 지어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이죠. 계절은 그 소생과 성숙, 결실과 동면, 그리고 다시 소생하는 감동의 사이클로, 우리 인간이라는 종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느낌으로 반복되어 왔습니다. 유한한 생명을 불꽃처럼 태우다 스러진 위대한 스승도, 그 가르침과 영향만은 불멸의 그것으로 남아서 우리 곁에, 그리고 우리의 종이 지속되는 한 그 후손들의 곁에 영원히 살아서, 나고 자라며 피고 지다, 다시 거듭남의 주기를 무한히 반복하리라는 그 간절한 희망 말입니다.


글로 영원한 생명을, 살아서 그 치열한 실천과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지속적 존경을 얻은 스승의 언명들은, 이 책에서 보듯 여전히 그만의 개성과 향취로 한 클러스터를 이루어 부지런한 생산의 굴뚝에서 피어 오르는 중입니다. 그 스승은, 이 책의 어느 한 편(p188)에 잘 나와 있듯, 학부 시절에 걸출하고 온화하며 인지한 한 분의 스승을 통해 그 인품과 영혼이 길러진 그런 분이기도 했습니다. 길현모라는 대석학이 바로 그분이죠. 학문의 기계적 정밀성 면에서보다, 한 인간으로서 밀도 높은 진정성으로 제자들을 감복하는 전인 교육의 대가였던 선생은, 다시 그 제자들 중 한 명을 이처럼 구루로 키워 내었고, 우리 역시 자기 계발의 알찬 생산과 피드백 과정 이면에 인문의 뒷받침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걸 열렬히 지지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산 스승이 다시 스승을 낳았습니다. 무한한 선순환과 재생의 소통은, 이 작고 예쁜 한 권의 책으로 그 촉매와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점 다시 절감하는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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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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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의 미발표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2000년 이후 그가 머물며, 노년의 웅숭깊은 사색의 산물로 글을 풀어 내고 빚어 온 바로 그 거처를 선생과 그 주변에서 노란 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노란집에서 나온, 언제나 활력에 가득 차 뜨락을 자기 영역으로 누비고 다니는 병아리들이 우리에게 끝없는 영감을 제공하듯, 물리적 노년에 접어드셔서도 젊은이를 압도하는 에너지, 긍정의 아우라, 그리고 재치를 곁들여 특유의 현실 비판이나 깊은 통찰을 보여 주신 선생님, 그 최후의 흔적과 가르침이 전혀 못 보던 모습으로 우리에게 이처럼 출현함은, 신의 선물, 혹은 저 멀리 계신 당신의 반갑기 그지 없는 마지막 인사라고 해도 좋습니다.


선생의 유작 모음이, 산뚯한 저 그림들(이철원 선생의 솜씨들입니다)과 곁들여져, "노란(갓 피어난 생명의 활기와 유쾌함을 상징하는 색깔)집"이라는 타이틀로 엮여져 나옴은, 앞서서 말한 대로 물리적 죽음의 유산임을 어쨌든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역설적입니다. 그러나 생전의 선생은, 언제나 활력과 위트를 뼈 있는 가르침과 폭 넓은 각성에서 빼 두신 적이 없다는 점, 그리고 거창한 의미 부여에 자신과 독자를 매몰시키려 드신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서,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러 주셨으면 하는 우리의 기대에 의외로 잘 부응하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노란집에서 그가 쓰시고 이렇게 남긴 글들, "노란집"이란 제목을 달고 예쁘게 나온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유작의 느낌보다는, 언제나 선생이 발랄하고 거침 없이 발화하던 그 어조 그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매번 보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선생은 데뷔작 나목에서부터, "그 많던 싱아...", "아주 오래된 농담"에 이르기까지, 참 한결 같으신 모습이었습니다. 선생은 이 유작, 미발표 원고 모음에서도, 전혀 변하시지 않고 그대로인 모습,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두고 쓰신 글들에서도 생전 당신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인격과 작풍의 일관성이 그대로 배어 있기에, 우리는 반가우면서도 가슴이 아픕니다. 정직하고 고지식하게 자란 어린 시절의 일화("사탕가게의 깨어진 유리창"), 장년의 뒷부분에 들어 겪은 한 지인의 아드님 결혼식 참여 회상("소탈한 결혼식과 서툰 주례사의 스승"), 몸에 배지 않은 어색한 존칭과 격식 그 이면에 자리한 가식과 불성실에 대한 풍자("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어느 것 하나 생전의 그 위트와 풍자, 일침과 다정한 미소의 묘한 공존에서 벗어나는 게 없습니다. 그는 노란집 아니라 생전 그 어느 시점, 사후의 한 길목에서도, 놀라운 일관성으로 그의 언어를 전달합니다. 그 말에는 한 사람이 짓고 가꾸었다 여기기 좀 힘들 만큼 다양한 숨결이 녹아 있습니다만, 그 색채와 일관성이 워낙 설득력 있게 배어나는 터라, 읽는 이들은 언제나 그 곁에 머물러 줄 것만 같았던 바로 그분의 체취를, 어려움 고마움 없이 흡입하는 공기처럼 그저 소비할 뿐입니다. 이래서 더 아쉽고, 이래서 더 슬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선생의 지난 글들이 언제나 그랬듯, 읽고 또 읽어도 물리질 않습니다. 그래서 신기합니다. 가뜩이나 반복 반추가 가능한 웅숭깊은 글들을 남기고 가신 분인데, 또 이렇게 예쁘고 선생 당신 다운 책이 나왔으니, 서글프게도 또 당분간 당신의 부재를 잊을 수 있습니다. 생전에 그리 한결 같은 모습을 보이던 당신이, 사후에조차 또 이런 유산을 예비해 두셨으니, 우리는 진정 당분간은 아쉬운 줄 배고픈 줄 잊고 살 것입니다. 끝없이 희망과 공염을 산출하는 그 아늑한 "노란집의 노란집" 덕택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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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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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그 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다니기만 하는 분인데, 보면 언제나 근엄하고 무게 있다는 인상을 주려 애쓰고 있습니다. 업무 능력은 빼어나나, 그런 퍼스낼리티가 호감을 주지 못 하기 때문에, 결국 높은 직위에의 승진은 힘들 것이라고 점치는 동료들이 많죠. 그런데, 이 분이 언젠가 회식 자리에서 거나하게 술이 취한 채 문을 나섰고, 나오는 골목길에서 저와 어깨가 맞부딪혔죠. "이제 골치깨나 아픈 시비나 신경전이 벌어지겠군. "싶었는데, 예상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사실 저보다 나이도 더 연상이시거든요. 참 의외였습니다.


(사례 2)

대 학 때 저의 선배였는데, 역시 별 사교성 없고 성미 까다롭고 사소한 일에 신경질 잘 부리는 사람이었어요. 안경도 껴서 참 인상까지 비호감을 더했습니다(안경이 유난히 안 어울리는 타입이었습니다. 안경 일반에 대한 매도는 아니구요. 안경은 저도 꼈으니까요). 이 사람이 MT 가서, 술도 안 한 채 그냥 자기 자리 가서 자는 겁니다. 우리는 그 김에 뒷담화깨나 해 댔구요.

다음 날 아침, 이 선배가 전날 지시해 둔 이것저것을, 우리도 같이 늦게 일어난 탓에 하나도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잔소리깨나 듣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선배한테 다가가니, 막 부시시한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 중이더군요.

"저기요 형...."

"어, 그래? 됐다."

안경을 벗은 그의 표정은 참 맑고 착해 보였습니다. 잠시 후 안경을 끼고 나서도, 잠에서 막 깬 그는 정말 선량하고, 말이 통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죠.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분명히 같은 사람인데.


(사례 3)

아 마 한 7년 전쯤 읽은 천계영의 만화 한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과, 대단한 재력을 갖춘 출신의 (요즘 말로) 차도녀와의 옥신각신이 그려진 대목이었는데요. 서로 잘 맞지 않아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던 터에, 우연히 술 한 잔 걸치고 이 차도녀가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한 후, 정말 흉금을 트고 대화하는 일이 생깁니다. 알딸딸한 기분에 차도녀는 평소 안 하던 말이나 신세타령을 늘어 놓는데요.

주인공은 그 말은 흘려 들으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놓치지 않고 주시합니다.

"표정이 풀리니 제법 귀여운 얼굴이었구나."



아마 제 생각에, 전형적인, 에고에 사로잡힌 인간과, 그 에고를 잠시 잊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인간, 그 둘의 차이를 잘 드러내 주는 게 위의 세 가지 에피소드가 아닐까 합니다(제 경험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요). 둘은 분명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 차이를 느끼건 그렇지 못 하건 간에, 타인에게는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달라질 수 있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격한 편차를 드러내는 걸 우리는 흔히 겪습니다.


물 론, 사람이 일관성을 유지 못 한 채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건 이것 말고도 더 극단의 예가 있을 겁니다. 천의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기꾼, 공약을 지키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는 정치인, 곡학아세하는 학자가 다 그런 류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순전히 계산에 의해서,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가면을 바꿔 끼운다는 점에서, 이 책의 주제와는 거리가 좀 멉니다. 그런 경우라면, 요즘 인기 있는 범죄심리학 도구인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등으로 분석하면 되겠죠. 이 책에서 "영적 구루" 톨 레가 이야기하는 건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들입니다. 소수의 악당 유형이 아니라, 평범하고 선량하며 서로가 서로를 닮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아무런 악의 없이, 나 외의 또다른 나(톨레는 결론적으로, 그건 독립된 실체가 없으니 우리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는 대상이라고 규정합니다)에 의해, 참다운 나를 배신하고 다른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고, 그 와중에 타인에게 의도하지 않은 피해와 상처를 주고, 결국 나 자신을 (정도의 차는 있겠으나) 정신병으로까지 몰아가는, 나로부터의 소외, 참된 나와 허상(이를 톨레는 "에고"라고 칭합니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자는 게 이 책의 주제입니다. 요즘 많이들 이야기하는 힐링의 이슈도, 이 책의 관점에서는 아주 피상적이고 고식적인 해결에 불과합니다. 마음의 병과 상처는, 참다운 자신과, 거듭되는 환경과 상황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막인 "에고" 사이의 불일치에서 오는 건데, 이를 건드리지 않고 무슨 치유가 가능하겠습니까? 근본의 문제를 고치면, 자잘한 질환이야 그때그때의 항생제 처방 없이도 발본색원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톨레의 말은 그것입니다. "놓아라, 놓아 버려라!" 무엇을요? 너 자신이 아닌데, 네가 너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자아, 에고"를 저 멀리 떠나 보내라는 겁니다. 확실히, 나 아닌 다른 것이 제 의사(意思)를 가지고 나의 내면에 자리 잡고 앉아, 나를 꼭두각시처럼 부리면 그건 무서운 일이고, 이성적, 과학적인 방도로는 해결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영화 <엑소시스트>에서, 악마에게 possess 되어 무섭고도 가련한 모습으로 변하는 소녀 리건 맥닐처럼요. 결국 무당이나 신부님들을 불러 오는 것말곤 해결책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책에서 얘기하는 건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톨레가 파악하는 "자아, 에고"는, 반복된 체험과 생각, 감정의 덩어리일 뿐 자기 의사를 갖고 있는 실체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문제가 심각할 텐데,다행히도 그게 아니라 허깨비에 가까운, 응결된 먼지 덩어리에 가깝다는 게 톨레의 주장입니다. 남은 과제는 무엇인가요? 간단하죠. "Let it go!" 놔 주면 됩니다. 손에 잡지 말고, 놓아 주면 됩니다.


이 책은 일단 프로이트의 심리학 기초를, 과학이 아닌 인문적 수위에서 익힌 교양인(예컨대 이드, 자아, 초자아의 개념 파악이 되신 정도의 분들), 그리고지난 시절 심대한 영향력을 독서인과 대중에 끼쳤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를 읽으신 분이라면, 상당히 두꺼운 편인 분량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게 빠른 속도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읽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톨레가 주장하는 바 "에고"가, 프로이트적 "자아"와 정확히 일치하는 건 아니고(톨레가 이렇게나 의미를 확장하고 있는데 당연히 아니겠죠), 심지어 톨레의 출발점이 반드시 프로이트 개념이라고 보기도 힘들지만, 프로이트식 체계에 익숙한 분이라면 분명 책이 더 빨리 이해될 겁니다. 프롬의 책을 읽은 분이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톨레가 자기 이름을 바꾼 계기와 대상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대해, 프롬의 그 책이 얼마나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까. 이 책은 프롬의 저서에 대해, 그 21세기판 속편으로 불러 줘도 될 만큼입니다.


1980년대에 한국에까지 큰 반향을 몰고 온 크리슈나므르티라는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역자 류시화 시인은 이 톨레를 두고, 제2의 크리슈나므르티라고 칭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크리슈나므르티 뿐 아니라 그 모든 영적 구루들에 대해, 류시화 시인만큼 권위를 가지고 언급할 수 있는 분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톨레와 그 사이에, 최소한 스타일상으로는 적지 않은 차이가 놓여 있었다고밖에 말 못 하겠네요. 톨레는 분명,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뿐이지 우리가 아는 "해탈"을 책 내내 논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는 시종일관, 앞에서 말한 선배 서구학자들의 분석 틀, 최소한 언어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개념보다는 심상으로 제 할 말을 한 크리슈나므르티와는 달라도 많이 다른 느낌이었어요.

"반복된 체험과 생각, 감정의 덩어리"가 과연 자기의 독립된 의사를 지닌 실체인지 아닌지에도 의문이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사랑에 관한 쓸만한 이론>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요, 이 소설이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의 인격이나, 사랑 같은 숭고한 감정도, 단지 반복 패턴의 누적에 불과할 수 있다는 거죠. 이런 시각에 대해 톨레는 어떤 대응을 할지 궁금해집니다. 그의 다른 책들을 찾아 읽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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