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정치 - 이정희 교수의 정치평론
이정희 지음 / 인간사랑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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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희 교수님은 한국 학계의 존경 받는 원로 중 한 분입니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교단에 서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은 스승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훈육했고, 다른 면에서는 신문, 잡지, 기타 종교 매체를 통해 기고, 파급하는 글을 통해, 정치인을 향해 그 다심하면서도 준엄한 충언을 보내었고, 시민들을 향해서는 순간의 격정과 분노, 혹은 좌절과 체념을 삭이고 지양하여 진정한 통합과 화해의 공동체 형성에 창발적 동참의 손길과 노고를 보탤 것을 주장해 온 지식인입니다.


이 정희 교수님의 강단 외 활동, 강연하시는 모습을 한 번도 못 접하신 분이라고 해도, 그분의 칼럼이나 시사 평론을 일간지에서 읽으신 분은 제법 많을 줄 압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정희 교수님이 동아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의 중앙지에 기고를 시작하신 시점이 무려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의 일입니다. 교수님은 이 시기부터 무게 있는 기고 활동을 시작하셔서, (이 책에 실린 아티클 기준으로) 2011년 가을까지 집필을 이어가시고 있습니다. 2011년 가을이면, 오세훈 시장의 급작스러운 사퇴로 이른바 시민후보 박원순씨의 부상, 그리고 그 전부터 서서히 수면 위로 역량을 노출하던 안철수 원장의 대두가 가시화하던 무렵입니다. 과연 가장 최근의 칼럼을 보면, 다음 연도에 전개될 정치적 대격변의 파란을 예견이라도 하듯, 신중한 자세로 도도한 민심의 흐름을 정치인들이 직시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럼마다 당시의 시대 배경을 분명히 엿볼수 있어요.

이 킬럼은 2002월드컵과 지방선거를 화제로 삼고 있네요.


잠 시, 책에 실린 칼럼의 시간적 범위를 살펴 보죠. 노태우 정부 중엽부터, 김영삼, 김대중 두 분의 정부를 거쳐, (시쳇말로, 한국에 노씨가 몇 명이나 된다고 벌써 두번째의 노씨 대통령이 나오냐는 말까지 들었던) 참여 정부 노무현의 시대, 그리고 후반에 어지간한 레임덕에 시달렸던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장장 5인의 대통령들을 다 지켜 보고 쓴소리와 충언을 아끼지 않은 기록입니다. 지식인의 고뇌와 사색, 충심어린 걱정이 녹아 있는 대 다큐멘터리입니다. 그 커버하는 세월의 범위가 무려 25년입니다. 25년이면 갓난아기가 장성하여 자기 핏줄을 생산하고 어엿한 경제 활동 인구로 탈바꿈하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그 세월 동안 이 학발동안(사실 머리도 여전히 검으신 편이지만요)의 노스승은 준엄히, 그러나 따뜻한 시선으로, 권력과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의 그 걸어가는 여정을 지켜 봐 왔습니다. 


이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랑의 정치>입니다. 정치 칼럼이므로 제목에 "정치"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정치라고요? (갑자기 어느 화제의 대형 교회 이름이 떠오르기도 합니다만) 수식어와 피수식어가 왠지 안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우리 나라처럼, 정치가 그 최소한의 생산 기능을 하기는커녕 정쟁과 이권 다툼만을 일삼고, 나아가 국민들을 사분오열시키는 정치의 예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죠. 그런데도 이 교수님은 그 온화한 표정과 인상에 걸맞게, 천연스레 "사랑의 정치"를 논하십니다.


이 교수님이 주장하시는 " 사랑의 정치" 컨셉이란 알고 보면 단순한 구조입니다. 상대르 인정하는 시선에서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나의 생각이 소중하고 가치 있듯, 한 발만 물러서서 남의 입장을 바라보자는 겁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되는 가치는 대화와 타협입니다. 그런데, 기계적이고 마지못해 보이는 소통이 아니라, 진정을 담아서 행하는 한 발짝씩의 양보야말로, 이런 살벌한 시국(저 25년 동안 우리는 단 하루도 전쟁하듯 대치하는 여야의 대결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습니다)에서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는 의미에요. 간단하지 않습니까? 사랑이 그처럼이나 간단하고, 또 현실에서 그만큼 구체적인 성과도 도출할 수 있다니, 들어서 마음만 편한 게 아니라, 우리가 부대끼며 그 안에서 자아를 실현하는 사회 전체를 살갑고 따뜻하게 만들어주기까지 합니다.


이 렇게 사랑을 자연스레 정치와 변증법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배경에는, 이 교수님 개인이 지닌 신앙의 배경이 작용하는 바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는 평화신문 등 가톨릭 계열의 매체에 기고하신 글들의 분량이 제법 됩니다. 이 교수님은 그 다정하고 온화한 인상에서도 엿볼 수 있듯, 상생과 공존의 이념을 정신과 영혼 속에 가득 담은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런 실천의 경력에서, 이처럼 현실적이면서도 정의롭고 온건한 말들이 나올 수 있겠죠,


저 는 개인적으로 이 칼럼집을 역사책처럼 읽었습니다. 이 책에는 칼럼의 배경이 되는 갖가지 역사적 이벤트들이 빼곡히도 나열되고 있습니다. 제 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둘러싼 잡음, 노태우의 민자당 탈당, 김현철 사태, 한보 비리, 대통령 자식들의 스캔들, 고건 대행의 등장, 김석수 총리 지명 등등 칼럼을 읽으면 이 시대에 이런 일들이 다 있었나 하는 생각에 현대사 책 한 권 읽은 듯 노곤함이 밀려 옵니다. 그 갖가지 파란과 이벤트가 긍정적 성격보다는, 현대사의 치부와 모순을 노출하는 성격이라서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 노지식인이 내놓으시는 처방은 한결 같습니다. "사랑의 정치!" 이 다섯 글자입니다. 간단한데도 간단하지만은 않은, 이 시대의 화두가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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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마티스, 걱정 마 - 류마티스를 만나고 더 행복해진 젊은 주부 이야기
와타나베 치하루 지음, 한고운 옮김, 유창길 감수 / 큐리어스(Qrious)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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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병은 내비치고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병을 숨기면 병이 안으로 더 곪고 몸을 망친다고 하죠. 저는 리뷰를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실 몸이 한 군데도 아픈 데가 없어서, 건강의 소중함을 차라리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막상 몸이 아프고 신체의 기관이 물리적으로 손상된 분들은,  그 "정상적임"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통감합니다. 특히 이 책의 주제인 류마티스처럼, 사람의 동작에 있어 필수적으로 작동시켜야 하는 부분, 관절의 아픔을, 움직일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지속적으로 느껴야 하는 분들의 고통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이라고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노화의 자연스러운 증상인가 보다 하고 체념이라도 한다지만, 젊은 나이에 끔찍한 통증을 숙명처럼 동반해야 한다면, 그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도 없다고 추측합니다. 모든 일은 결국 물리력의 동원보다는 멘탈의 싸움인데, "아 나는 아직 나이도 아닌데 왜 이런 병이 왔을까?"하는 자괴감이 벌써 앞선다면, 어떻게 병마와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약물 투여건 어떤 요법의 실시도, 이런 정신의 위축과 퇴조로 벌써 질병에 그 사람이 기선을 제압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책은 류마티스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위한 내용입니다. 병은 전문가가 아는 게 아니라, 그 병으로 죽을 고통을 겪고 어찌해서건 그 모면의 방법을 고민한 분들이 더 잘 알더군요. 제가 아는 분 중에도 어린 아기가 혈우병에 걸려 모진 고통과 절박한 위험을 겪어야 하는 분이 계십니다(세상에 과연 하늘의 도리와 법칙이 있는지 참 기가 막힌 것이, 하필 왜 이런 착한 분들한테 몹쓸 게 들러붙어 괴롭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놀고 먹으며 타인에 민폐나 끼치는 악성 분자들은 그 남아돌아가는 시간을 주체 못 해 끝도 없는 망상에 빠져 자연과 사회를 모독하는 중인데, 이런 병은 그런 인간들한테나 좀 가 줘야 공평한 거 아닐까요?). 그런데, 이분 가족들도 해당 질병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유형적, 그리고 정신적인 도움을 크게 입는다고 합니다. 정보화 사회의 폐단이 엉뚱하게 작용하여 쓸모없는 글이나 남발하여 백수들의 스트레스 배설 창구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런 유익하고 고마운 채널로도 작용하는 걸 보면 빛과 어둠이란 언제나 쌍으로 같은 길을 가게 마련이다 싶네요.


이 책은, 어느 일본 여성이, 자신이 어떻게 해서 난치병 류마티스로부터 낫게 되었는지, 그 다양한 투병 과정과 극복의 여정을 담은 내용입니다. 병을 치유하는 예수를 두고 당대의 그 지방 사람들이 기적을 칭송했다고 하지만, 기적이라는 게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저자, 와타나베 치하루 같은 분이야말로 미라클 메이커입니다. 이 분은 처음에. 당치도않는 병마가 자신의 육체에 똬리를 틀었음을 알고 너무도 큰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꾼 것이, "나는 내 몸의 주인이고, 내 몸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느끼는 내 몸에 대한 책임감은,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과도 통한다. 나에 대한 사랑은 세계에 대한 애착이자 책임이며, 나를 소홀히하는 마음가짐은 곧 인격의 불성실로 지탄받아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나는 류마티스에 대한 선전을 포고한다."였죠.


이런 고백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병법에서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불태."라고 했습니다. 백전 백승이 아니고, 백번 불패도 아닙니다. 그저 불태, "위태롭지 않음"에 그칠 뿐입니다. 병 역시 마찬가지죠, 만약 어떤 병에 걸려서 완치가 된다면, 그건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해야 할 기적입니다. 한번 손상된 육체는 기껏해야 더 이상의 악화를 막고 상처가 아물 뿐이지, 그 흔적까지 말끔히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건 열역학 제2법칙에 반하는 결과죠. 병은 걸리지 않기를 바라야 할 뿐, 일단 걸린 후에 예전에의 건강을 온전히 회복하길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순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순리를 받아들인다 함은, 이 병이 내 몸 속에서 그 최소한의 상흔만 남기고 빠져 나가길 유도하는 겁니다. 약물 치료로 통증을 죽이고, 그 통증을 죽이면서 몸도 함께 죽이는 식으로는 도저히 병이 낫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결론은 뭘까요? 자연 치유 요법이죠. 병과 함께 내 몸도 못살게구는 방법이 아니라, 병도 다스리고 내 몸도 고이 만져주는 그런 방법이라야, 난치병 류마티스가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저자분이 하는 말이 그겁니다. "나는 류마티스를 사랑한다." 이 사랑은, 뜻하지 않게 내 몸에 들어와 그 일부가 된 병을 어르고달래야, 그 병이 자연스레 제 갈 길로 소멸한다는 그런 의미의 사랑입니다. 내 몸을 함부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그 몸을 그저 화학 반응의 대상으로 삼는 무식한 약물에 함부로 맡길 수가 없습니다.


자 연 치유 요법이라고 하면 무조건 사이비로 모는 일부 몰지각한 의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해야 할, 가장 원초적인 의무와 소명을 배신하는 악한들입니다. 도움이 되는 수단이 있다면, 지적 호기심에서라도 그 분석의 눈을 들이대어야 올바른 일인데, 그저 무작정 눈을 감고 배척하기에 바쁩니다. 이런 자들 중에 종교를 믿는 이들도 있는데, 2000년 전에 가장 낮은 이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온 그분의 정신이 뭐였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종교와 직분을 이중으로 배반하는 이런 부도덕한 이들을 저자가 만나지 않은 덕에, 그나마 그 병이 일찍 나았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참으로 신기한 사례가 많이 나옵니다. 양의이지만 침구학을 스스로 터득한 덕에(한방식 혈로를 따르지 않고, 서양 의학에서 가르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 자기가 고안한 방식이라고 합니다), 잠시의 촉진만으로도 내방한 환자의 병증이 뭔지 훤히 알아맞히는 명의 중 명의입니다. 의사의 본분이 무엇일까요? 서투른 지식으로 권위만 내세울 게 아니라, 찾아 온 환자의 바로 지금 그 고통을 낫게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 저자의 곁에는 좋은 들이 많이 있어 주었기에, 그런 기적도 이처럼 확연하게 그 발현을 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은 저자 뿐 아니라, 한국인 역자도 똑 같은 류머티스 환자로서, 그 글자 하나하나를 옮기면서 쏟은 정성이 매 구절마다 느껴지는 놀라운 책입니다. 제이슨 윈터스 티가 과연 그리도 효험이 있나 해서 알아봤다는 역주에서는 절로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습니다. 지은 사람이나 엮고 파는 입장이나 조금의 거짓, 상술 없이 오로지 진실과 건강의 보급에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빚은 책을 보면서, 환자 아니라도 책을 읽는 보람, 나아가 세상을 사는 맛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하는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올해 초에 <하나와 미소시루>라는 책도 읽어 보았는데요, 그 책과는 달리 이 책은 해피엔딩이라 더 반갑고 통쾌했습니다. 류머티스 환자가 아니라도, 우리 사는 세상이 과연 어떤 방법으로 힐링되어야 하는지 깨달음을 얻고 싶은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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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지갑을 열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 적게 써도 행복해지는 소비의 비밀
엘리자베스 던, 마이클 노튼 지음, 방영호 옮김 / 알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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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열기 전에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과연 잔고가 얼마나 있는 상황에서 내가 이 물건을 사려 하는 건지, 더 긴급한 다른 용처가 내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혹시 그 긴요한 지출처를 내가 잊고나 있었던 건 아닌지, 그 전에, 내가 지금 지갑을 주머니 안에 넣어 두기나 한 건지? 이런 항목들도 머리 속에서 체크해야 할 것들입니다만, 그런 일들은 일상적 의미의 "빈틈없음"에 불과합니다. 어찌 보면 요즘 같은 팍팍한 세상에, 그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행위만큼 기본적입니다. 지갑이 내 생명줄을 쥐고 있는 판에, 그런 기초마저 챙기지 않다간 생존 자체가 힘들 수도 있겠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HAPPY MONEY입니다. 돈이야 당연히 그 소지자(所持者), 소비자(消費者)에게 행복감을 안겨 주는 법인데 뭔 새삼스러운 소리인가, 하실 분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잠 시 샛길로 빠지자면, 이 책 p62를 보세요. 지폐 사진을 보여주고 초콜릿을 제시받은 학생들은, 초콜릿 귀한[?] 줄을 모르고 한 입에 소비해 버렸다는 실험결과가 나오죠. 돈을 보여주니, 도리어 행복감을 지레 상실하는 우리들! 이로 보아, "돈 = 행복"이란 등식이 꼭 성립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그저 말장난이구요. 리뷰의 본론에서 상세히 논하겠습니다). 같은 돈이라도, 이를 어떻게 소비하느냐("무엇에" 소비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에 따라, 그 결과와 만족도가 천차만별로 갈린다는 게 이 책의 핵심논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의 내용은 "How Can We Make Money Happier?"를 가르쳐 준다고도 하겠습니다.


예전에 인촌 김성수의 부친(호남, 아니 전국에서 일등가는 지주였죠)은 자제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돈을 벌어들이는 일에 귀재였으나, 너는 그 돈을 참으로 멋지게 쓸 줄 아는 재능이 있구나!" 돈은 물론 뜻깊게 쓸 줄도 알아야만 합니다만, 순전히 이기적인 관점에서도, 같은 액수를 가지고서 최대한의 쾌감이 느껴지게 소비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죠? 돈은 그저 부지런만 떤다고 들인 노력과 시간에 비례해서 벌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어찌 보면 사람마다 돈 버는 고유의 능력은 한계가 미리 정해져 있으니(씁쓸한 말이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부단히 자기계발에 힘써야 하지만, 어떤 근본의 벽을 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고정된 수입으로, 가장 행복해지고 쾌감이 극대로 치솟는 소비를 할 필요, 아니 의무가 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행복해지기"야말로 모두의 지상(至上) 미션이니까요.


이 책의 제 1장은 "체험을 구매하라" 입니다. 뭔 말인가 하실 겁니다. 이 명제를 분명히 정리하면, "물건을 사지 말고, 그 돈으로 (효용이 더 오래 가는) 체험을 사라."는 말입니다. 물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즐거움과 기쁨이 서서히 감소하여, 나중에는 남은 효용이 0에 가까워집니다. 이거 무조건 동의해야 하는 진리 아닐까요? 당장 저만 해도, 책 지르고 나서 그 쾌감, 그리고 택배 배송이 이뤄지기 직전의 그 설렘, 개봉시의 그 행복감은 어디 비길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고 구석에서 먼지를 머리에 얺어가는 녀석들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언제 쟤들에게 그토록 설레었던가? 이럴 게 아니라, 커뮤니티에서 책나눔이나 벌여 인기나 모으면 차라리 기분이 좋아질듯? 하는 심리가 자연스럽게 일어날 겁니다. 아무 실속 없을 것만 같은 책나눔이 카페에서 그리 자주 일어나는 게 다 이런 배경이 작용합니다. 책나눔을 하는 분은, "이미 효용이 다한 책들"을 (무상)처분하면서, 대신 공짜로 이웃의 뿌듯한 정을 얻는 겁니다. 이게 바로 "물건이 아니라 체험을 사라"는 저자의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p47 에 나오는 구글의 예를 보십시오, 상여금 지급의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은 듯해서 코스타리카 여행의 인센티브를 실시했더니, 애사심 단결무드도 더 확고해지고 직원 개인의 만족도도 더 높더라는 겁니다(역시 구글은 이런 점, 즉 인사관리의 세세한 부분에서도 앞서가는 구나 싶었어요). p50 을 보면, 같은 티켓으로 총쏘기 체험이나 물건 뽑기냐를 선택할 수 있는 아이들의 예가 나옵니다. 전자를 고른 애들은, 같은 시간 동안 즐겨도 그 기쁨이 오래 가고 강렬해서, 같은 돈을 써도 더 큰 행복을 맛봅니다. 하지만 후자를 고른 애들은, 마약 중독자처럼(이 책에 나오는 스트로애스너 심리학 박사의 표현) 지속적으로 같은 구매를 행하지만, 도무지 만족할 줄을 모르고 그저 돈만 갖다 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건 우리의 개인적 체험에 비추어도 맞는 말입니다. 같은 돈이면 상품이 아니라, 추억을 사야 합니다! 왜 우리는 대학 재학 중 동료, 선배들과의 MT 에 그토록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 애썼을까요? 공부하기도 바빴던 중고딩 시절 똑같이 철없는 친구들과 어울려 "추억만들기" 놀이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가 뭘까요? 추억은 "재활용"이 가능합니다. 머리 속에 넣었다 아무리 자주 빼서 돌려도, 그 효용이 덜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라, 실상보다 몇 배는 부풀려 그 기억을 행복한 것으로 조작하기까지 합니다(이른바 무드셀라 증후군). 백 원을 내고, 십만 원으로, 아니 가격 책정이 불가한 희소품으로 만드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이런 건 남한테 해를 끼치지도 않습니다. 반면 내가 오늘 당장 페라리를 샀다고 해도, 15년 지난 후에 과연 그 녀석이 어떤 쾌감과 긍지를 나에게 안겨 줄까요? 예전 어느 교수님이 하 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1년 끌어봐, 뭐라도 그냥 구루마야." 제아무리 영품이라도 감각상각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추억은 이와 달라서, 15년의 세월이면 거꾸로 최고 우대의 복리 이자를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아니, 익스포넨셜 함수로는 그 표현이 불가할 것입니다. 에 리히 프롬의 "소유나 삶이냐"는 유명한 명제(그리고 책 제목)도 생각이 나네요. 소유는 그저 일시적인 쾌감을 불러 올 뿐, 그것이 준 기만적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 장의 제목은, "물건이 아닌 생, 존재를 구매하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2장의 제목은 "특별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사 실 조금 추상적이라는 느낌도 듭니다만, 핵심은 그겁니다. 자주 소비하지 말고, 드물게 소비하여 매번 그 음미, 향유의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라는 의미입니다. 이 내용은 앞 1장의 내용과도 한 줄기 맥락이 닿습니다. 인간은 결국 기억의 동물이라서, 기억의 조작(좀 삭막한 말입니다만)을 통해, 똑같은 조건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게 대전제였는데요. 저자(들)은 이른바 cheerometer, 활기 온도계라는 개념을 써서, 자연계의 수은 같은 물질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우리 인간만의 특수 기제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주문을 합니다. 바깥의 추운 날씨에 호되게 시달리다 온 수은주는, 실내로 들어오면 그저 25를 가리킬 뿐입니다. 수은이라는 애가, "아, 난 지금 이 기온에 감사하고 있어." 같은 느낌을 가질 리가 없습니다. 그냥 리셋과 적응을 반복하다, 수명이 다하면 폐기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다릅니다. 추위에 시달리며 바깥을 헤매다 맛본 25℃ 는, 예전 그 안온한 시절의 당연한 소비 대상이었던 그 흔한 여건이 아닙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축복이고, 우리는 그로부터 무한의 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바로 "기억'이라는 회로를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물리량이나 자극에 대해서도 정반대의 기쁨, 혹은 불쾌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장은 특히나 재미있는 예가 많이 나옵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주인공 찰리는 가난한 탓에 10센트짜리 초콜릿을 두고 한 달을 재어 먹습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매 bite는, 투르크의 술탄이 베어먹는 진미의 효용을 몇 배는 초과하는 지복의 순간일 것입니다. 좋은 걸 마구 써버리지 말고, 아껴서 소비하라는 겁니다. 능수능란한 안마사는 서비스의 도중에 약간의 term을 두어서, 마사지의 효용이 극대에 달하게 만듭니다. 맥 도널드의 맥립 간헐 판매 전략, TV 쇼의 중간 광고, 이 모든 게 다 마찬가지 기법입니다. 영화도 정상적인 극 전개를 인위적으로 끊고,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전환하는 수법이 다 이런 미학효과를 노린 거죠. 이어서 써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아껴 쓰면 매번이 특별해진다는 뜻입니다.


2장 말미에는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권을 구입하게 하는데, 상품을 "200달러짜리 근사한 식사"로 내걸었더니, 그렇지 않고 "그냥 현금 200달러"가 걸려 있을 때보다 더 구매자가 증가하더랍니다. 이건 경제학의 기본 상식에 반하는 내용입니다. 현금 200달러와 식사 200달러는, 전자가 후자를 확실히 "지배(dominate)"하는 선택안입니다. 전자로는 후자가 커버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의 소비까지 가능하니까요. 그런데도 왜 이런 상식에 반하는 결과가 나왔을까요? 해답은 일단 저자들의 해석으로는, 물건이 아닌 체험의 가치를 우선시하는(이 책 1장의 결론) 선택 심리가 작용했고, 다음으로 프로테스탄트 문화권 특유의 분위기로, 200달러 식사를 행운의 유도가 아닌 금전 지출로 시도하는 건 이유 없는 사치라는 죄의식이 작용한다는 겁니다.(그래서, 복권의 매개가 아닌 그냥 선택의 경우라면 결과가 달랐을 거라는 게 저자들의 함의로도 읽힙니다) 마지막으로, 어차피 200달러라면 별반 그럴싸한 상품을 살 수도 없을 거라는 지레 포기하는 심리가 작용하기도 한다는 거죠. 이 결과는 상당히 논란을 유발할 패러독스가 가득한 소재인데, 책의 주제에서는 약간 이탈한 감이 있으나 여튼 흥미로운 읽을거리였습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했다면 아마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겁니다. 


3장은 더 신선한 내용을 제시합니다. 좀 논지의 구체화가 더 이루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돈 중심 물건 중심이 아닌, 시간 중심으로 사고를 바꾸라는 겁니다. 바쁘면 행복하고, 그로 인해 통장잔고가 늘어나면 비례적 행복이 체감되어야 마땅하겠으나, 그렇지가 않고 오히려 전보다 더 행복감이 줄어든다는 게 공통적인 현대인의 고민입니다. 환승 코스의 항공편이 가져다 주는 금전적 이익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 몇 푼을 아끼겠다고 공항 대기석에서 어리석게 시간을 내버리는 당신! 당신이 불행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돈 몇 푼을 더 쥐어주고서라도 직항로를 골라서,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십시오. 정 할 일이 없으면 개라도 끌고 나가 산책을 시키세요. 생각지도 않던 잘 통하는 이웃을 만나 즐거운 교제를 할 수도 있습니다. 돈이 아니라 시간을 사서, 그 시간으로 돈이 가져다 줄 수 없는 행복을 사라는 게 저자의 충고입니다. 맞는 말 아니겠습니까? 


4장은 돈을 먼저 내고 나중에 소비하라는 주장입니다. 지를 때의 그 쾌감은 누가 대신 설명해 줄 수 없을 만큼 짜릿하지만, 그 즐거움이란 고지서의 공포로 곧 상쇄됩니다. 이는 어쩌면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는 말로 바꿔 쓸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quid pro quo, 무엇을 얻으면 하나를 내놓아야 합니다. 거저 재화를 획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싫고 꺼려지는 체험을 앞에다 밀어넣어, 나중에 찾아올 긍정적인 요소로 그 불쾌를 잊는 선택, 전략이 현명합니다. 판매자들은 다양한 전술을 고안하여, 소비자가 과연 지출을 했는지, 그의 소중한 예산 일부가 빠져 나갔는지조차 감을 못 잡게 하는 초스피드결제 시스테을 개발했습니다. 그게 바로 이 책 p159에 나오는 "페이위드스퀘어"입니다. 너무도 빠른 순간에 결제가 이뤄져서, 사람들은 물건을 도둑질이라도 한 듯 착각하며, 결국 돈 나갔다는 상실감이 없어서 같은 물건을 또 사게 된다는 겁니다. 무서운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인터넷 구매의 장점도 있음을 지적합니다만, 배송 기간이 오래 걸리는 사실은, 오히려 충동구매를 막아준다는 거죠. 매장의 화려한 유혹은 별 필요도 없는 물건을 금세 사게 만드는 점에서, 인터넷 쇼핑보다 위험하다는 겁니다. 돈을 먼저 내고 나중에 소비하라! 명심해야 할 철칙이 아닐 수 없네요.


5장의 시사점은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 동양권이야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연대의 이데올로기가 일찍부터 발달해 왔지만, 서양은 어디까지나 개인에서 시작해서 개인으로 끝납니다. 타인에게 피 같은 내 돈을 기부하라? 도덕 차원이 아닌, 경제학 관점에서야 애초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지만, 인간은 사회 속에서만 존재의 가치가 확인되는 동물입니다. 개인의 고립된 효용함수나 성취감의 산물이 아닌, 네트워크 속에서 확장된 자아의 존중을 받는 데서 오는 뿌듯함과 행복은 다른 걸로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주 관적이고 모호한 "행복"의 영역에서는, 논의의 초점이 shift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관적 긍지나 자족에 빠질 수 없는, 회사라는 집단을 단위로 두어도 결론이 같을까? 저자들은 이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결론을 제시합니다. 이긴 팀에게 개인별 상여들 지급한 경우와, 다른 팀원 동료들을 위한 지출이 의무로 붙은 상여를 지급(대신, 팀원은 형식적 배려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선물을 동료에게 해야 합니다)한 두 경우를 비교했더니, 전자가 훨씬 승률이 낮아졌다는 거죠.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서, 자신을 위해 자기가 소비하는 뻔한 인과의 사슬에서는 정해진 쾌감밖에 못 느낍니다. 대신 남에게 선물을 받으면, 설사 비슷한 비용을 지출하여 답례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서로간에 남아 있는 순효용은 그저 개별 구입, 지출을 했을 때보다 더 크다는 말이죠. 한중일에서 부조 문화가 그리발달한 것도 다 이런 앞선 지혜를 미리 터득한 이유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게 좀 심해서 잔머리를 굴리다보니 더 불쾌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여튼 서구의 과학이 이 점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 대목이었습니다.


만사는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같은 씀씀이라도 쓰는 방법과 절차를 바꾸어서, 몇 배의 기쁨을 누리는 게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결론을 이 책으로부터 받는다면, 그런 우리가 현명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방영호 선생의 번역이 참으로 매끄러웠다는 점 첨언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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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노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9
미셸 오스트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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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공쿠르상 수상작입니다. 과연 듣던 대로 미셸 오스트의 개성과 깊이가 물씬 묻어나는, 페이지를 쉬이 넘기기가 삼가지는, 축축하면서도 속이 꽉 찬 내러티브네요. 이름만 보고 착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던데, 이분은 이 작품을 쓸 때 44세였고, 지금은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할아버지입니다. 최근에는 작품 활동이 뜸해진 걸로 압니다.


내용은 다들 아시는 대로입니다. 주인공은 자신도 여러 차례 강조하듯, 유한 계급 출신의 사실상 기생 생활자입니다. 스 스로에 대해 확신이 결여되었고, 가족과 친지들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합니다. 비전도 희망도 먼 과거에 버려둔지 오래이며, 다만 자신이 보유한 다양한 종류의 결핍에 대한 모호한 보상심리, 혹은 모친과의 껄끄러운 관계에 대한 일종의 타협안으로, 폴라라는 여인(시를 쓴다고는 하나 재능도 충분치 않고 대외적으로 확고히 인정 받은 직업이 못 됩니다)과 교제하는 게 유일한 타인과의 소통 창구입니다. 거리의 지나가는 여인들을 두고, 마치 자신의 의지가 작용이라도 해서 거리가 멀어지는 양 자발적 착각을 통해 모종의 쾌감을 느낄 만큼, 염세적이고 퇴행적인 자아의 소유자죠.


주인공은 유년기의 교육, 정서의 건전한 발달, 성취감정, 자아통합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장애성 결핍에 시달리는 유형이지만, 이에는 중요한 세 가지 원인이 작용한 바 있습니다. 1) 부친 상실(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처음엔요) 2) 모친으로부터의 애정 거부 경험 3) 별 가치 없는 불장난으로서 맞이한 첫사랑의 (그나마) 좌절, 이 세 가지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듯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말투만 들어서 청소년이나 미숙한 청년 정도인가 했으나, 어느 자리에서건 경칭을 들을 만한 장년의 나이입니다. 외부에서 보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며, 다행인 것은 그 자신도 이걸 잘 안다는 점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소식을 알고, 상봉을 원한 건 딱히 현실 타개의 의욕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듯, 모든 문제가 거기서부터 잘못되었겠거니 하는 막연한 치유 욕구에서이죠. 주인공의 자아는 그만큼 병든 상태이며, 우리 독자는 이런 매력 없는 캐릭터로부터 멀찌감치 거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동정할 건 없습니다. 그도 그걸 원할 테니까요. 아무튼 이 점에서, 저는 역자의 이른바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그리고 미궁에의 유비"에는 격하게 반대하는 편입니다(역자 후기 참조). 테세우스는 이 필립과 정반대의 스탠스라고 봐야죠. 신화에서의 그 demigod는, 고귀한 출생이었으나 나면서부터 그 모든 세속의 혜택을 상실했고, 모든 것을 회복하는 그 순간 죽음으로부터의 도전장을 받았으며,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가망없는 모험에 모든 것을 건 말 그대로의 영웅이었습니다. 반면 필립은 뭡니까.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테세우스의 사항별 대척형이라고 봐도 되죠. 그가 아버지를 찾아 떠난 건 자아의 환골 탈태나 주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게 아니라, 그저 찌질하게 응석을 부리고 싶은 이유밖에 없었습니다. 부친을 찾아 떠나는 여행도 그 가망이 없었던 게, 이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원초적 장애가 있는 유형이니까요. 대상이 친부라고 해서 결과가 크게 다르지도 않았을 테며 그 결말도 과연, 끝까지 읽은 우리가 아는 대로입니다.


과연 이 소설에서 폴라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영웅 테세우스의 자아 완결, 세상의 구원 오디세이에 동참한 순교자였습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폴라가 맡은 역할은, 유혹적이지도 않으면서 안온한 중독으로 사람을 꾀어서는, 결국 극한의 회의와 환멸을 부르는 현실 절충적 키르케에 가깝다고 봅니다. 아니, 필립에게는 오뒷세우스를 억류했던 바로 그 고혹적 마녀로 다가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키하나 노인의 눈에 푸줏간 딸 둘시네아가 공주처럼 보였듯이요. 가망 없는 난관을 타개하게 도와주는 마돈나는커녕, 그나마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던 낙오자의 삶에 최종의 관 뚜껑을 덮어 못질해 주는 악질의 마녀라고나 해야 합당하겠습니다.


아무런 생기도 존재 이유도 없는 잉여의 인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소설의 주인공 필립은 과연 뭘 상징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2차 대전 이후 자존감의 근원, 재생의 활기, 하다못해 유구한 역사의 상속자로서의 긍지, 이 모든 걸 상실한 프랑스 자체라고 봅니다. 이런 소설에 왜 그토록 자주, "게르만"에 대한 적대감이 등장하며, 또 "유태인"이라는 민감한 코드와 "배경"이 자주 제시되어야 했던 걸까요? 제가 생각하는 답은, 2차 대전 이후 외부의 도움을 받아 침략자의 점령으로부터 벗어나긴 했으나, "위대한 조국"의 이상상에 걸맞는 정체감을 여전히 회복 못 하고 표류하는, 프랑스 자체를 표상하는 캐릭터가 바로 이 필립이라고 봅니다. 소설에서 우울한 나르시즘의 보조관념으로 자주 쓰이는 여성화된 도시 파리의 무게가 바로 그 예증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Grand Nation의 심장 노릇을 했던 그 고색창연한 수도, 그 사소한 풍경이나 개성 하나도 거주자, 시민, 국민인 그(필립보다는 차라리 작가 오스트라고 하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분명 "나", 즉 필립이지만, 그 자학적이고 음울한 말투는 제 3의 전지적 존재로부터 일종의 필터링을 거치는 듯만 합니다)의 눈에 허투루 지나칠 수 없습니다. 파리가 당하는 굴욕은 프랑스의 굴욕이고, 그녀의 조신하지 못한 거동은 곧 육각형 조국이 내비치는 부정함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짙은 우수와 비관으로 묘사되는 파리의 정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바로 그 점 역시 작품의 전 설정이 프랑스 역사의 대유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부분이기도 하죠. 본디 프랑스어에서 valet은, "노예"같은 강한 뜻이 아닙니다(호텔 등에서의 "발렛 파킹"이 뭐라고 생각하세요?).그저 "시종"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서는, 말 그대로 "노예"의 의미가 실감납니다. "밤la nuit"이란 무엇인가. 치욕과 모멸을 원인으로 한 자폐의 대유겠죠.


현실이 못마땅하고, 먹고 살 만한 여유는 있으나 왠지 수치심이 느껴집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없고, 바로 응보의 파멸이 자신의 운명을 방문할 것만 같은 불안을 못 떨칩니다. 내가 지금은 이처럼 초라한 존재지만, 나의 부친은 멋지고 존경 받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을까? 못난 후손은 과거의 (가상적) 영광에 기대며 힘들고 지친 자아을 지탱합니다. 그냥 그대로 덮어도 좋은데, 현실이 못 견딜 만큼 괴로운지라 막판에 몰린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 안 보느니만도 못한 환멸입니다. 나의 근원, 나의 과거 역시, 현재의 자아와 하나 다를 바 없이 초라하고 추악했습니다. 폴라의 부친은 파티 석상에서, 서로 속이고 불신하는 모세와 아브라함의 농담을 들려 주죠. 폴라의 부친이 필립에게 들려 주는 그 자랑스러운 (부친의)무용담에는, 이미 사기와 과장의 복선이 깔려 있었던 겁니다. 그는 말 중에 이런 의미심장한 한 자락을 깔아 둡니다. "저항도 좋지만,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지나 정확히 알고 살았어야 했는데,..." 레지스탕스의 신화는, 샤를 에바리스테라는 거창한 이름(수학자 갈로아의 이름에서 땄다고 하죠?)을 단 아버지의 그 처참한 몰골에서 역력히 붕괴하고 맙니다. 레지스탕스는 무슨. 처음부터 우세한 전력과 부(富)를 두고 마지노선에서 패퇴하질 말았어야죠. 이 엉큼한 유태인 족속들은, 그 모든 사정을 알고도 더 참담한 침잠을 유발하느라고, 가증스런 극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던 거죠. 물론 유태인을 그리 노골적으로 악하게 묘사하면 "법"에 걸리므로, 그 정도로 돌리고 또 돌려 말합니다.


오스트의 문장은 파리 최고의 멋쟁이가 부리는 세련의 극치요, 동시에 데카당스의 퇴폐 그 극한입니다. p192의 "주름살이 여자를 절단하듯 물결은 도시의 동체를 절단한다." 같은 걸 보세요. 대단히 감각적인 표현이죠. 일단 저 문장의 전단에서, 여자를 "절단"하는 게 주름살이란 언사에 정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자의 경우,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신분의 남자의 얼굴에 설득력있게 이리 저리 획을 그은 주름살이란 정말 멋져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주름살은, 가장 화사한 미소를 지을 때 눈가, 입가에 살짝 생기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에게 연민과 비애(최소한 그렇다는 겁니다. 대부분은 불쾌감과 역겨움을 자아낼 때도 있습니다)를 유발합니다. 그 타당성은 그렇다치고, 후단의 "도시 동체 절단" 운운은 뭘까요? 원문을 찾아 보지는 않았으나, 여기서의 물결이란 도시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강줄기가 아니라, 마치 채만식의 맥락에서 그 "탁류" 같은 걸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바로 그 뒤에 작가의 의도가 더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심상 간의 비례식이 확실히 완성되죠.

이처럼 문장이란, 단지 기계적 의미를 전달함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무수한 심상의 연속이요, 나아가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도구이며, 어쩌면 문학의 본체적 요소일지도 모릅니다. 어리석고 둔한 머리에서 생산되는 그 생각이 짧으면 말도 덩달아 짧을수밖에 없고, 말이 짧다고 해서 허위와 군더더기가 없는 정신의 건강성을 보증하는 건 전혀 아니라고 봐야 겠죠. 이를 간결한 표현으로 절제된 의지와 정갈한 상념을 전달하는 양 호도, 위장하는 것은 오히려 (예컨대 헤밍웨이 같은) 간결체를 즐겨 구사한 대문호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미셸 오스트의 예에서, 산문이 시가 되고, 화사한 문장이 깊이 있는 사색으로 전화하는 좋은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어요. 어리석고 열등감에 가득찬 낙오의 인생은, 극히 제한된 자신만의 오타쿠적 미니어처 밀실에서 세상이 시작하고 끝나는 줄 알지만, 아니 우기는 중이지만, 그런 자에게도 잔혹한 각성의 순간은 찾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펜을 향하고 펜을 통하여 우주를 제한된 수단으로 포착하려는 문필에의 꿈을 그 하찮은 정신으로도 꿈꾼 적이야 있겠으나, 이에 성공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냉연한 현실에서 문득문득 마무치는 자신의 모습이란,  밀가루푸대마냥 밋밋하고 초점 없이 흔해빠진 그 얼굴만큼이나 가망 없이 역력한 시궁창임을 확인할 뿐이겠죠. 풋.

p238 핑크 플로이드의 "디 아더 사이드 오브 더 문" 언급은 시대상의 반영이고, 동시에 청각 매체를 동원할 수 없는 소설의 한계상 우리가 최대한 협조하며 떠올려야 할 미장센입니다. 소설의 분위기가 잘 감이 안 잡히는 분은, 이 곡을 듣고 책을 다시 읽어 보세요. 오스트와 바로 페친 먹고 싶으실 겁니다(이 할아버지는 아마 SNS를 안 하시겠습니다만).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리고요? 차라리 "병태와 영자"라고 하시는 게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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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을 사로잡는 Why 마케팅 - 감성시대에 요구되는 마케팅 트렌드
조기선 지음 / 타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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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마케팅에 주제가 한정된 것 같지만, 내용을 통독해 보니 이 급변하는 세상이 어떤 방향과 패턴으로 그 구조를 형성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안목을 길러 주는 책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다양한 소창업자(자영업), 중소 기업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어서 비즈니스 현장의 실감을 얻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례를 책 한 권에 담을 수 있었던 건, 저자 조기선 씨가 실제로 비즈니스 스큘, 혹은 소규모 모임을 운영하고 있으므로, 자신이 관리하는 회원들의 모범 케이스를 고스란히 소개할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죠. 두껍지도 않은 책에서 생생한 정보를 이만큼이나 많이 얻을 수 있는 점은 우리 독자로선 고마울 뿐이구요.


일단 주제부터 좀 짚어 보겠습니다. WHY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저개발의 질곡에 신음하는 나라라면 몰라도, 한국처럼 산업과 환경이 고루 잘 발달한 나라라면, 어떤 생산자나 판매자가 독점적 위치(과점이라면 모르겠지만)를 갖고 시장 지배적 위치를 제 홀로 누릴 수는 없다는 겁니다. 내가 만드는 건(특허, 실용신안 등의 법제적 제약, 혹은 권리가 따르지 않는 한) 남도 만들 수가 있고, 결국 commodity로 떨어져서 레드 오션이 되기 쉽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고, 또 익히 알려진 상식입니다. 내 제품은 이런저런 점이 좋다? 남도 얼마 후면 그 좋은 점을 다 따라합니다. 그러면 결국 개성과 장점이 사라지게 되죠. 또, 내 제품은 이 인근에서 가장 가격이 싸다? 이거 아무 소용 없습니다. 요즘처럼 정보가 흔하고 생존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가격 인하 요인은 결국 경쟁자도 다 배우고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제품과 서비스가 최고의 질, 혹은 양(가격)을 자랑합니다!" 이게 바로 구시대의 마케팅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파는 그 무엇(what)을 내세우는 마케팅이 아니라, "여기도 저기도 당신의 상품, 서비스에 못지 않은 우수한 것들이 널려 있는데, 왜(why) 그 경쟁자들을 젖혀 두고 당신에게서 그것을 구매해야 하는가? "를 소비자, 고객에게 납득시키는 쪽으로 발상부터가 전환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저자가 말하는 why 마케팅입니다.


이 책을 읽은 분이면 누구나 흥미롭게 보셨겠습니다만, p75에 보면 와인 POP가 나와 있습니다(위사진 오른쪽). 와인의 품질과 가격을 어필하는 문구가 아닙니다. 그 숱한 명품 와인, 혹은 이름 있는 사업자를 다 마다하고, 왜 우리(그들)에게서 이 와인을 구매해야 하는지를 잘 소개해주는 좋은 예입니다(국내에서는 저 브랜드가 상당히 명품인 걸로 인식들 합니다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저사진 보시면 "방싱 질탕"이라는 이상한 표기가 있습니다. 밑에 나온 대로 뱅상 지르라댕이 정확합니다). 저자는 여기서, what이 아닌 why를 파는 아주 전형적인 마케팅의 사례를 보여줍니다. 이 사례가 실린 제 2장의 제목은 what이 아닌 why를 팔다인데요, 책 제목과도 거의 문구 일치를 보이는 이 챕터는, 이 책 내용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2장만 읽어도 내용의 핵심을 알 수 있습니다. 10회 주문하면 서비스 1회를 제공하는 치킨집, 이거 너무 식상합니다(이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 업소는 없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업소는, 단골 고객에게 부정기적으로(꼭 10회, 20회 등의 순번이 아니라도) 꽃과 카드를 제공한다거나, 친절한 배달 서비스로 "치킨 외의" 감동을 선사하는 시도를 합니다. "왜 당신네 가게에서 닭을 사먹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주문하는 나를 "차별화"하여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나도 그 가게의 서비스를 "특별히 알아 주면서" 애용하게 되죠. <어린 왕자>의 그 유명한 문장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 장에는 이 사례 말고도, 요즘처럼 일반 빵가게 죽어나는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홍수 시대에, 안산 신도시에서 꿋꿋하게 지방 최고의 명소로 자리잡은 제과점의 이야기도 소개됩니다. 이 제과점의 "고객 우선, 감성 전달"의 마케팅은 그것만으로도 주목할 만하지만, 더 놀라운 건 제과점 내에서 직원을 교육하고 다루는 방식, 나아가 "기업(규모가 작아도 기업은 기업입니다)"을 경영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일반 자영업자들이 크게 반성하고 참조할 점을 시사하고 있었다는 건데요. 이 사항은 리뷰의 좀 뒷부분에서 논급하겠습니다.


사실 책의 주제와는 좀 무관한 부분이긴 합니다만, 안산 제과점의 경우는 마케팅 개념의 혁신에만 장점이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주제와는 다소 상반되는 느낌마저 듭니다만, 이 제과점의 경우 WHY에만 초점을 둔 게 아니라, WHAT에도 분명히 방점을 찍고 있는 셈입니다. 그 증거로 1)빵은 아침에만 굽는다는 고정 관념을 깨고, 현실적으로 한국 직장인들이 빵을 사가는 오후에 맞춰 구워 낸다(빵이 일용식인 서양에서나 맞는 관습이었죠. 저도 이 생각은 언제나 들었습니다) 2) 쿠폰제를 적극 활용하여 재방문을 유도한다(이는 WHY 마케팅 요소와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기존 고객의 중시라는 대원칙에도 부합하고요) 3) 입자가 더 고운 빵가루를 사용하여, 결과적으로 더 우수한 품질의 빵을 제조해 낸다(전형적인 WHAT요소입니다). 다 시 말씀 드리지만, 책의 컨셉과는 안 맞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책의 구조미를 따지는 일이 아니죠, 죽느냐 사느냐 하는 비즈니스판에서, 같은 책에서라도 뭐 하나 유용한 정보를 더 건지면 그게 남는 장사입니다. 좋은 정보가 많아서 독자는 그저 고맙네요.


요즘 어쩌다 전철을 이용하면, "이런 사람들도 이처럼 대규모 광고를 론칭하나 싶게, 창의적이고 재기발랄한 자영업자들의 PR 실례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구체적 거명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런데 이 책에서도, 그런 광고의 컨셉과 거의 일치하는 좋은 예를, p94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정서와 감성에 호소하는 새로운 트렌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올해 초에 필립 코틀러의 신작을 읽고, SCR(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그의 주장에 깊이 공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SCR이라는 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왜 우리 기업에서 물건과 서비스를 사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납득시켜 주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이게 꼭 사회학이나 윤리학의 이슈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신네 기업은, 내가 지속적으로 상품을 구매해야 할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 기업의 고객인 이유이다. 이게 바로 이 책 저자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SCR의 존재기반이 참 여러 차원에서 마련되는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의 본체적 컨텐츠는 1장과 2장에 있습니다. 1장은 사회의 거대한 트렌드에 대한 개관입니다. 마케팅에 아무 관심이 없더라도, 이 1장은 일독의 가치가 있습니다. 경영이라기보다는 인문의 비전을 던져 주는 바 있습니다. 혹시, 여기저기서 들어 본 이야기의 반복이다 같은 반응을 보이는 분에게라면, "세상을 좀 긍정의 시선으로 보라."는 한 마디를 던지고 싶네요. 저는 아주 유익하게 읽었거든요. 2장은 다양한 사례(어떤 건 일본의 익잼플이 아닐까 싶지만, 대체로 저자가 직접 보고 겪은 국내의 사례들입니다)가 실려 있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갑니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특이한 점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좀 다른 주제까지 다루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3장의 제목은 One&Only 회사를 만들다. 4장의 제목은 비즈니스가 요구하는 능력입니다. 이 내용들은 딱히 마케팅 관련도 아니고, 책의 핵심 컨셉과도 직접 연결사항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자가 직접 체험하고 통감한 현장의 감이 듬뿍 담겨 있어서, 어느 구석을 읽어도 도움이 된다는 점입니다. 3장의 내용은 주로 중소 규모 기업의 경영자가 참고할 내용인데요, 그 핵심은 회사의 정체성 자체를, 대체불가능한 소통의 대상으로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라는 게 핵심입니다. 그렇게만 놓고 보면 결국 마케팅론 아닌가 생각하시겠지만, 조직 구조 리빌딩 작업(인적 자원 관리)에 대한 많은 시사가 주된 내용이므로, 굳이 마케팅 개념으로 보자면 그 최광의적 확장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원 앤온리의 개념은 많이들 들어 보셨을 테므로 반복하지 않습니다만, 이 책에는 가장 최근의 실제 사례가 실려 있어 역시 부담 없이 읽어 나갈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읽기는 편하게 읽어도, 머리는 긴장을 시켜야 독서의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4장은 결국 이 책의 총정리 파트입니다. 앞에서 말한 WHY 컨셉과 원앤온리 아이덴티티 형성이, 얄팍한 눈가림이나 상술이 아니라, 경영자 인격 자체의 변혁과 탈바꿈이 근본 추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사람이 바뀌어야 스토리도 진정성 있게 생기고, 그 스토리를 체화한 직원들도 CEO의 스피릿을 잘 소화하여 손발이 척척 맞는 유기체로 재탄생이 가능하다는 요지입니다. 이 모든 주장이, 일관되게 "실제사례"라는 강력한 물증의 뒷받침이 이뤄져 있기에, 이 책은 원앤온리의 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보이네요.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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