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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약속
루스 퀴벨 지음, 손성화 옮김 / 올댓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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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물과 사람의 관계는 자본주의가 역사의 전면에 대두하면서 새삼 철학의 핵심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습니다. 인간 생활 곳곳에 물적 요소가 존재 규정의 본질로 침투하면서, 정신과의 주종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런 추세는 좀처럼 다른 방향을 틀 기미가 보이지 않다가, 환경 오염과 인구 폭증이 종전과는 차원이 달리하는 양상으로 일상까지를 위협하면서 전면 재고의 계기를 맞았습니다. 아마도 "변곡점"이라 할 만한 징후를 분명히 느끼게 해 준 트렌드는 미니멀리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니멀리즘은 물론 우리 동아시아인들에게는 문명사의 매 단계에서 깊은 공감을 유발하며 대두한 사조입니다만, 서양인들은 물질 문명의 폐해가 극단에 도달하고서야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달게 된 면마저 없지 않은 듯합니다. 책은 이런 복잡다단한 관계를, 저자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단초를 마련하여, 쉽고도 웅숭깊은 문장 속에 술술 풀어 놓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렇지 하며 책장을 술술 넘기는 순간, 사르트르, 카뮈, 릴케의 책들에서 훨씬 어려운 표현으로 접한 사상들이 나도 모르게 머리 속에, 가슴으로 가장 말랑말랑한 이해가 가능해짐을 느끼는 기묘한 체험이었습니다.

그랜트 매크래컨은 인류학자이자 이 책 저자 루스 퀴벨처럼 우리 시대 대중에게 널리 환영받는 작가입니다. 이 책 중에서 재인용된 그의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대체된 의미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한 물건들을 모두 구입한 후에도 이상(理想)이 여전히 실현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게 된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그 순간, 인생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아무리 뭘 사 제껴도, 역시 다음 순간의 구매로 무엇이 이어지지 않는 한 불행과 불만족과 아쉬움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뜻입니다. 무엇으로 이 공허를 채우겠습니까? p136 이하에는 마치 미니멀리즘 경전의 집성이나 시도하듯, 이 시대 명작가들의 인용구들이 역시 꼬리를 물듯 이어지는군요.

제임스 레이버는 이른바 "레이버의 법칙"으로, 인생의 특정 단계에서 어떤어떤 감정의 정리와 인격의 평정이 찾아져야 하는지를 두고, 마치 공자가 지천명, 이순, 종심소욕불유구 하듯이 재치 있게 정리한 말로 유명한 작가입니다(공자처럼 심각하지는 않지만). 이분의 경우 이 책에서 인용되는 맥락으로는, 누군가가 무엇을 사 모으는 건 느닷 죽음을 맞이하고 그 육신은 차디찬 관 속에 넣어져 머지않아 분해자의 과업으로 제공될 때,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남겨진 "물건"들로 자신이 타인들에게 기억될 걸 대비한 활동, 선택, 결단이라고 합니다.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예전에 작가 윤흥길 선생은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단편으로, 우리는 어느날 무엇으로 규정되고 기억될지 날카로운 포착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이 쉬운 책, 그러면서도 의미의 각인이 매우 진하게 이어지는 책을 통해, 내 주변에 잔뜩 깔린 물건과 물건의 성(城)은 과연 무엇을 위함이었는지 한번 진득히 곱씹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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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전의 기원, 불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리처드 곰브리치 지음, 김현구 외 옮김 / CIR(씨아이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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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 문자의 가르침을 중시할 것인지, 아니면 가르침을 심사 숙고한 후 본인의 수양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것인지를 놓고 교종과 선종으로 입장을 나누는 게 보통입니다. 허나 아무리 수양과 깨달음을 중시한다 해도, 부처님의 말씀을 일단 접하고 해독한 후에야 개인의 각성이 가능한 법입니다. 기독교 경전의 번역에서도, 직역이냐 아니면 내용적 동등성 추구냐가 문제가 되듯, 불교 경전 역시 직역주의 이슈가 논쟁의 큰 핵심으로 부상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1장에서 팔리본이라 하면, 부처님(고타마 싯다르타)의 생존(인간으로서) 당시 구어와 기록 언어로 널리 쓰였던 "팔리 어"로 된 경전을 가리킵니다. 이 팔리 어는 산스크리트어보다는 훨씬 단순화한 발음, 어법, 문법을 가졌고, 까다로운 고대어가 느슨한 대중의 입말로 바뀌는 과도기적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한문 불경 해독을 떠나 "부처님이 발화하신 원어"를 추구하는 학자, 일반 신도들의 열정적인 움직임이 부쩍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허나 p16에서 저자는, 비록 자신이 한자를 모르나, "한역본(漢譯本)"에 의지하는 게 때로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강조하고 싶다고 그 입장을 피력합니다.

사실 아무리 경전이라 해도 고대로부터 이어온 불완전한 형태의 전승이 지닌 필연적인 약점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성경만 해도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필사본들이, 그나마 기록자들의 부주의, 오류로 인해 얼마나 큰 혼란을 야기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이 경우 "교정", 혹은 "비판적 지성의 개입"이 필수인데, 양적으로 기독교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방대한 경전을 지닌 불교의 경우야 새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욱간티탄뉴ugghatitaññu", 즉 설법을 듣자마자 바로 깨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요즘은 팔리어(빠알리어) 원전을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귀에 어느 정도는 익은 말이겠습니다. 보통 사람이 바로 사물의 진성, 실체에 접근할 수야 없겠으나, 진리를 향해 부단히 정진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 마침내 완성에 이르려는 노력 정도는 누구나의 처지에서도 가능한 일입니다. 이 책은 우리 독자들에게 그런 마음씀의 자세를 힘써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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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의 산
파올로 코녜티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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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강, 거침없이 달리는 평원, 자연을 맴도며 자신만의 생명력을 발산하는 숱한 생명체들 속에서 자라야 큰 인물이 나온다고 어른들이 종종 말씀하시곤 합니다. 꼭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역대 한국 역사를 바꿔 놓은 굵직굵직한 인물들을 보면 과히 틀린 말도 아닌 듯싶습니다. 설령 속세의 풍진 묻은 대소사를 개척한 인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사와 우주의 깊은 비의를 속된 인간들에게 깨우쳐 주는 대문호들 또한 그런 이들이 많았습니다.

피에트로는 본디 산이 싫은 도회의 아이였습니다. 많은 아들들이 그런 길을 걷습니다만, 대개는 자신의 부친과 일부러 다른 길을 걷고 싶고, 그래서 엄연히 맞는 말을 깨우쳐 주시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발버둥칩니다. 안전한 전철을 밟는 게 본인에게도 유리한데, 왜 이처럼 어린, 젊은 아들들이 오기를 부리는지는 여전히 잘 알 수 없습니다. 멀고 가까운 역사나 혹은 평범한 가정의 많은 비극들은 부친과 아들 들 사이의 갈등에서 작은 단초가 싹텄습니다. 그리고 그 싹은 차마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비극과 불행을 홍수처럼 밀고 들어오는, 인간의 감정과 지혜가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볼륨으로 연약한 영혼을 덮칩니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언제나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이런 불화하는 부(父)와 자(子) 사이의 대결 아닌 대결은, 그윽한 산 속에서 절정을 맞거나 아니면 극적인 화해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아들이 장년의 초입에 채 들어설 무렵 맞게 되는 아버지의 죽음은 그래서 대개 더 가슴 아픈 체험인데, 피에트로는 아버지의 유산 하나가 바로 그 산 안에 머무르고 남겨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유산이 경제적으로 가치가 커서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마지막 화해를 위한 계기가 거기 같이 있음을 알고 산을 찾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다시 만난 산"은, 알고보니 존재의 의문을 해결하고 공허를 메워 줄 모든 것을 가진, 운명의 둥지와도 같았습니다. 보다 빨리 이뤄졌더라면 더 좋았을 화해를, 때늦게나마 이 산이 마련해 준 겁니다.

산이 거기 있어 산을 오른다는 어느 유명한 산악인의 말도 있었지만, 실제로 산은 거기 머무르지만은 않습니다. 산을 이해 못 하는 인간이 꾸준히 산을 침노하고,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이 산에 상처를 남깁니다. 산에게 이유 없는 생채기를 낸 인간들은, 도회로 복귀하여 다시 자신들끼리 부단한 투쟁에 돌입합니다. 산의 입장에서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패배한 인간이든 승리한 인간이든 산을 다시 찾고, 비뚤어진 자아를 투영하며 다시 탐욕의 기세를 돋웁니다.

꾸준히 "자연인..." 같은 프로그램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건, 도회가 아닌 산이야말로 우리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 줄 수 있으리라는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기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사악한 이, 상처를 씻을 자격이나 준비가 안 된 이의 사정은 산도 어찌해 줄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은 이탈리아 경제 위기가 배경인데, 이탈리아는 바로 얼마 전만 해도 그곳에서 발원한 위기가 세계 전체를 위태롭게 하리라는 어두운 전망이 일어났던 적 있습니다.

피에트로는 산 속에서 방랑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와 돌아가신 아버지와 다시 화해하려 들지만, 사실 우리 독자들은 그의 문제가 말끔히 해결 안 된 채 도피구처럼 산을 찾았음도 눈치 챕니다. 자신이 책임 져야 할 가족들과 불화하는 피에트로를 보며, 어쩌면 그가 그의 부친이 디딘 궤도를 나쁜 쪽으로만 답습하는 게 아닌지 불안감도 느낍니다. 그러나 피에트로에게 마냥 따가운 시선만 보낼 수도 없는 게, 저 피에트로가 안고 있는 고뇌란 기실 우리 독자 모두의 그것과 빛깔을 같이함을 어느새 책을 읽으며 절감, 동의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잔잔하면서도 현실의 문제를 툭툭 던지듯 잔뜩 돌려 이야기하듯 깨우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인간 존재의 본연이 도회와 자연 중 어느 편에 더 깊은 발을 담그었을 지 다시 숙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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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본 살인사건 스코틀랜드 책방
페이지 셸턴 지음, 이수영 옮김 / 나무옆의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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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건 전철 객차 안에서건 책에 푹 파묻혀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여성은 아름답고 호기심을 끕니다. 무슨 책을 읽기에 저리도 몰두할까? 책 속 말고 다른 세계에는 저처럼 빠져들어 본 적 있는 분일까? 헌데 알고 보니 집안 내력, 개인적 취미 등 모든 면에서 "책벌레 그 이상"의 사연을 지닌 분이라면 더 큰 흥미가 생기는 게 당연합니다.

에든버러는 브리튼 섬의 북부 스코틀랜드 문화 최정수의 깊은 역사를 한 몸에 다 품은 유서 깊은 고장이지요. 책방에는 여태 이 도시가 찍어낸 모든 문제의 책들, 문화의 압축판이 다 소장되어 있을 듯하고, 주인공 딜레이니는 철가루가 자석에 이끌리듯 고서점의 굽이진 서가 속으로 향합니다. 이 고서점과 그 오랜 세월의 풍파를 내내 함께했을 듯한 주인 에드윈의 주름살 역시 역사의 비밀을 굽이굽이 간직했을 것만 같습니다.

책 속의 인물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환각인지 아니면 대서양 너머 이방의 고서점에서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인지, 혹은 미국에서 내내 희구했던 모험과의 운명적 조우인지, 믿을 수 없는 체험과 살인사건이 부르는 공포와 좌절, 그러면서도 스릴과 흥분을 동시에 느끼는 딜레이니를 보며, 우리는 오즈 한복판에 느닷 떨어진 도로시를 만나는 듯도 합니다.

고서가 부르는 마법이란 흔한 마녀의 장난질이 일으키는 파문과는 깊이와 격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하필 그녀가 잠시 열띤 눈길을 준 청년의 이름은 "햄릿"이기까지 합니다. 이처럼이나 유서 깊은 고서점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박물관이기도 한데, 고서점이 간직한 희귀한 판본 하나를 두고 끔찍한 범죄가 벌어질 만한 소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금전적 가치도 가치이거니와, 마치 기독교의 성배 전설처럼, 상징은 많은 이들에게 상징 이상의 효능과 마력을 지닙니다.

깊은 사연을 간직한 가문에서 벌어지는 동기간의 갈등은 사실 일반인의 시선으로는 이해가 안 될 만큼 격렬한 양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마치 1년 전 방영되었던 영국 드라마 <셜록>을 연상시키는, 알고보니 남들이 함부로 짐작 못할 골치 아픈 알력으로 점철된 에드윈 씨네 집안 사연이 이 딜레이니의 머리를 더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막다른 골목에 이를 때 언제나 장애물로 앞길을 막는 건, 책, 책, 책이었습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도 주인공 도로시가 어떤 특별한 자질이 있어 그 숱한 곤경과 마법의 질곡을 헤쳐 온 게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도로시가 믿었던 건 자신의 착한 마음, 불의와 모순은 반드시 해결되고 바로잡아져야 한다는 정의감, 그리고 친구와의 연대감 등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고판본 하나가 빚은 끔찍한 살인이, 천재적 능력 아닌 선의지와 정의감으로 그 진상을 드러내는 과정은 통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세상을 지키는 건 평범한 우리들의 의지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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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그리고 사람들 - 영화의 첫인상을 만드는 스튜디오 이야기
이원희 지음 / 지콜론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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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포스터는 영화 전체의 압축판입니다. 스토리와 컨셉과 주제와 매력(관객을 상영관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단 한 컷에 모두 녹아 있습니다. 상업적 계산 때문에도 이를 허술히 제작할 수 없고, 작품이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이 지나도 그 영화의 개성 전체를 상징하는 증명사진으로 남습니다. 제작 측의 입장에서도 그러할 뿐더러, 우리 팬들 쪽에서도 성장기, 혹은 각별한 추억이 아로새겨진 시점에서 누군가와 함께 관람한 영화는 대개 그 포스터가 내게(우리에게) 남긴 인상과 영원히 함께 남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래서 포스터나 팸플릿 등을 작정하고 수집하기도 하는데 모으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각별한 추억의 세공 작업(컬렉션)이라 그 결과물을 누구와도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짧을수록, 함축적일수록 이상적입니다." 이는 포스터 제작자의 특권이자 동시에 무거운 책무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단편물 연출에 특화된 이가 아닌 이상 가능하면 섬세하고 성의 있게 자신의 사연을 풀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포스터의 기능은 이처럼이나 바라는 방향이 다릅니다. 피그말리온은 물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괴이한 외모와 취향의 조각가입니다만, 이 책에서는 우리 동시대 한국의 포스터 제작 집단인 '피그말리온'을 가리킵니다. 어떻게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잘 아는 대로 GB 쇼의 유명한 희곡과 오드리 헵번 주연의 그 영화와는 어떤 사연의 지점을 공유하는지, 대담자들은 포스터 제작의 고충과 보람을 논하면서 쫄깃한 뒷담화를 늘어놓습니다.

요즘은 아예 다양성 영화라고 해서, 상업적 메인스트림으로부터 거리를 둔 주제와 분위기를 마음껏 표현하는 멋진 영화들이 표현의 장을 따로 마련하기도 합니다만 아직 인지도도 낮고 최근에는 또 그 나름의 변형된 상업성을 추구하는 경향마저 있죠. 여튼, 믿고 보는 토드 헤인즈의 작품 <캐롤>의 국내판 포스터 제작에 얽힌 재미난 사연들이 독자의 바쁜 시선을 잠시 멈추게 했습니다. 주연배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두 여인의 익숙하고도 깊이 있는 표정, 눈빛이 대두되었습니다만 손에 쥔 "담배"가 사라졌다는 게 팬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렀다는군요. 희한하게도 국내 TV 방영 릴에서는 일일이 흡연 씬이 흐릿하게 처리되는데 어색하기도 하고 과연 국제 추세에 부응하는 규제인지도 고개가 갸웃해질 때가 많습니다. 이 역시 남성 중심의 흡연 문화, 타인 비배려, 사회의 보편적인 건강권 강조 등의 추세와 맞물려 한때 진보적인 발걸음으로 평가되었습니다만 지금 이렇게 예술 섹터의 제작자들은 "불편함"을 운위합니다. 뭐가 맞을까요. 혹은 어디서 타협점을 찾아야 할지요.

영화 감독과 그래픽 디자이너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작업하나요? 이처럼 "질문"이란 우리 독자들의 공통된 의문을 대표로 나서 시원하게 긁어주는 시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애 대한 답은 다소 에두르는 식이나, 김광철씨의 대답은 두 가지 점에서 아주 명쾌합니다. "영화를 보지 않고 포스터를 만들 수 없다. 영화 해석의 자유는 우리 디자이너 들에게 주어져야만 한다." 마치 얼마 전 발매된 음반 디자인 그룹 힙노시스의 고백, 혹은 마니페스토와도 비슷하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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