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수 없는 일이야 현대지성 클래식 16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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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 없는 일이야." 허나 세계사의 모든 재앙은 선량한 시민들이 방심하는 새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1258년의 바그다드 대학살, 1527년의 Sack of Rome 같은 참사 역시 당대인들은 아무도 그 가능성을 점치지 않던 벼락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저때로부터 다시 수백 년 전 훈 족의 유럽 침공 역시 그들(서유럽인들)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재난이었겠는데요. 당시 성직자들은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며 당대인들의 참회를 유도했다고도 합니다. 넉넉히 세속화한 현대에 들어서는 성직자들의 저런 소명은 재능 뛰어난 문필가나 예술가들의 몫이 되었으며 그 유력한 "증거" 하나가 바로 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쓰여진 시기는 1935년입니다. 이때면 FDR이 당선되고 뉴딜 등을 의욕 가득히 밀어붙일 시점이죠. FDR은 나중에 4선에까지 성공합니다만 이때는 아직 다음 재선에 성공할지조차 마냥 낙관은 못 할 무렵이었습니다. 많은 사회학 서적에도 나오듯 공화당 지지층과 초상류 계급은 FDR 공포증에 떨며 사석에서 대화를 나눌 때 "그 사람"이라고만 지칭했다고도 하죠. 이때 공화당 진영에서 내세운 게 "독재는 곤란하다"였는데, 다수 국민의 일시적 지지를 바탕으로 법치와 원칙이 무시된 채 포퓰리즘 정책이 마구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민주당 진영에서는 상대당의 반격에 대해 "공포 신드롬"이 일지 않았을까요? 그들 입장에서는 FDR의 피치 못할 경기 부양 정책 드라이브에조차 신경증적으로 반응하며 좌절시키려 드는 공화당, 보수 측의 움직임에 마찬가지의 두려움을 충분히 느꼈을 겁니다.

정파들은 여론의 지지가 상대 진영에 쏠린다 싶으면 서로 "포퓰리즘"이라며 비난의 날을 세웁니다. 내 편이 우세하면 국민의 엄중한 뜻을 업은 것이며, 상대가 우세하면 대중 선동, 포퓰리즘이라며 저속한 여론몰이에 기댄 비겁함을 마구 비난합니다. 우리는 저 시기 역사의 승자가 FDR의 민주당이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승자 측(즉 민주당 지지자나 리버럴)의 공포감이나 신경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버트 랭커스터 주연의 <엘머 갠트리> 원작자라든가, 예전 세계문학 전집에 반드시 포함되던 <메인 스트리트>의 저자로 우리가 잘 아는 싱클레어 루이스가 이 재미난 풍자 문학의 author인데요. 과연 재기발랄한 그 답게 가상의 정치상황을 들어 미국 정치 시스템의 모순과 단점을 신랄하게 풍자합니다.

1935년이면 아직 나치가 유럽에서 그 위험성을 심각하게 드러내기 전입니다. 라인란트 재무장, 안슐루스(오스트리아 병합), 심지어 베를린 올림픽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잊고 있지만 히틀러 치하의 독일은 아직 빵 하나에 몇 억 마르크를 호가하던 무서운 인플레이션이 유발한 경제 난국에서 아직 회복이 안 되었을 시절입니다. 사실, 회복될 조짐이 끝까지 안 보이자 히틀러가 무리한 도발을 일으키기도 한 건데요. 경제적으로 비실거리는 독일이 그런 무리수를 둘 줄은 당시 (반대 진영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 미처 몰랐다고 해야겠습니다. 싱클레어 루이스 같은 문인들이 마치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위험의 예조를 알고 이런 문학 작품을 창작해 낸 셈입니다.

전쟁이 발발한 후면 상대 진영의 주요 인사나 지도자에 대해 사정없는 폄하와 모욕이 가해지지만 이때만 해도 그 호칭이 조심스럽습니다. 이를테면 나치 독일 선전상 괴벨스에 대해 여전히 "박사"라는 경칭을 작품 중에서도 꼬박꼬박 달고 있으니 말입니다. 허나 싱클레어 루이스는 자국 내에 불고 있는 심상찮은 "우익 독재의 역풍" 조짐에 적잖이 노심초사했던 듯합니다. "만약 우리 미국에서도 애국주의, 보수주의를 내세워 히틀러 같은 극우 독재자가 부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때는 바야흐로 영화, 라디오 등 대중에 동시에 접근할 수 있는 매체가 발달해 갈 무렵인데, 이 작품 중에도 등장하는 윈드립 대통령(물론 가상 인물입니다)은 대중의 감성 격동에 필요한 모든 자질을 다 갖춘, 참으로 위험한 정치인입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감정" 속으로 들어가 마음껏 파묻힐 수 있고, 그 감정을 적절한 제스처 속에 담아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수천만 독일 민중을 홀리고 사로잡은 비결이 아니었겠습니까?

(이 소설 속에서) 루스벨트는 재선에 실패하지만 여전히 여유 있고 인지한 미소를 머금으며 평정심을 잃지 않는데 이런 모습이야말로 당대 미국인들에게 다가온 그의 평균적 이미지였습니다. 의도적으로 작출된 이미지라기보단 그의 본모습에 가까웠다고 봐야 타당하겠는데요. 무솔리니나 히틀러, 혹은 지금의 트럼프 처럼 의도된, 연출된 분노를 가득 담은 표정과는 정말 대조되죠. 역사에 진짜 승자로 남은 지도자들은 이처럼 그 인간적 본모습을 들여다봐도 품격과 여유가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반동분자"라고 하면 보통 집권에 성공한 공산 정부가 반대파를 색출, 검거, 숙청할 때 씌워붙이는 오명입니다. 헌데 이 작품 중에서는 우습게도 윈드립 정부(당연히 우파)가 반대파를 지목하고 탄압할 때 즐겨 부르는 누명으로 자주 쓰입니다. 소련에서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하자 이에 대항수라도 놓듯 이탈리아에서 불과 몇 년 후에 극우파 독재가 시작되었는데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한 건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지나서였습니다. 전체주의 정권의 불건전한 속성이란 좌우를 막론하고 공통되는 점이 많다는 걸 그는 날카롭게 비꼬는 셈입니다.

출판, 인쇄의 자유도 탄압 받습니다. 도리머스 사장이 들고 온 비분강개한 내용 가득한 원고를 보고서 식자(공)실장 댄 윌거스는 강력히 항의합니다. "전 이녹 아든이 아니에요!(사장님에 대해 마냥 충성스러울 수 없다는 뜻을 서투른 은유로 표현한 말)" 미니트맨에게 끌려가서 총살 당하기 싫다는 건데, 여기서 미니트맨은 나치 독일의 SS와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를 체포, 감금하는 concentration camp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재현됩니다. 사실 소수파에 대한 탄압과 마녀사냥은 미국 역사에서 그리 드물게 보던 바도 아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니, 근거 없는 소립니다. 무엇인가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야, 현실의 기정 사실화, fait accompli, 혹은 옐리네크적 의미에서 "사실의 규범력" 같은 것은 모두를 지배하는 지상 권력으로 군림합니다.

사실 FDR이 대중의 지지를 확고히 얻던 무렵에 이런 소설이 나왔다는 건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란 유럽에서 이민 온 "실향민"들이 세운 근본 없고 위태로운 공동체였으며, 혹여 유럽 본토 전역이 나치와 파시스트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이의 영향을 북미에서 어떤 방식으로 받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판이었습니다. 1932년 소위 보너스 아미의 시위를 군대가 무차별 진압한 것도 어쩌면 파시즘 대두의 전조가 될 수 있는 사건이었는데(적어도 진보 성향의 지식인들은 충분히 그렇게 받아들일 만했죠), 더군다나 미국에는 본디 독일 출신의 이민자가 무시못할 상당수를 점하는 인구 분포가 뚜렷했죠.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을 보면 개전 후 독일계 미국 시민이 이웃들로부터 린치에 가까운 폭행을 당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소설은 딱히 특정 인종을 편들거나 적대시하는 게 아니라 "다수에 의한 횡포"가 빚는 불의, 공포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게 본 의도인 듯합니다.

이 소설은 1980년대에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미니시리즈 <V>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졌죠. 막상 이 소설을 읽은 분들은 대체 외계인 다이애나가 벗겨진 가면 아래 파충류의 퍼런 피부를 드러내며 쥐 한 마리를 맛있게 먹어치우던 그 드라마와 이 정치 풍자 소설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할 수도 있습니다. <V>를 블루레이 디스크 등으로 다시 보시면, 서두에 다소 의아한 장면들이 펼쳐지는 걸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백히 반 우익 풍자라는 걸 이제는 모두가 알 수 있죠. 원래 제작진은 소설의 내용에 충실하게 드라마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방송사에서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막았다고 하죠. 제작진은 아마도 당시 배우 출신 레이건 대통령이 너스레를 떨어가며 강경 우익 드라이브를 펼치는 모습이, 반 세기 전 싱클레어 루이스가 예언한 디스토피아와 꽤 닮아간다는 느낌을 받고 이 기획을 밀었을 겁니다. 이 걸작을 2018년에 한국에 번역해 준 출판사의 의도에 대해서도 살짝 흐뭇해지는 면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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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묘보설림 2
루네이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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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에는 사랑하는 마음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 큰 개념이라고 일각에서는 주장합니다만 역시 사람마다 생각이 다 갈릴 수 있는 부분이겠습니다^^ 헌데 이 소설은 어느 특정 종교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내용도 아니면서 제목이 저리 "자비"라고 붙었습니다. 작가의 깊은 뜻은 이 작품을 직접 읽으면서 독자 개개인이 깊이 새겨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제 생각은 이 서평 말미에 써 보기로 하고요.

주인공 천쉬성은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에서 그 삼촌에게 양육되어 간신히 공업고등학교를 마친, 세상에 의지할 데 없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그렇다고 소설 속 전형적 주인공들처럼 각별한 노력으로 현실의 장애를 헤쳐나가는 인물도 아니고, 이런 사람이 이런 악조건에서 어떻게 생존이 가능할까 싶기만 한, 지극히 평범한 가난뱅이 노동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인성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예컨대 루신의 <아Q정전>에서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자신을 특권층으로 세팅하거나, 세상 이치를 혼자 다 깨닫고 오히려 주변을 측은히 여기거나 경멸하는 (자신만 빼고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코미디를 연출한다거나, 뭐 이런 쪽으로 풍자의 매개 기능을 맡을 수도 있겠죠. 허나 천쉬성은 심지어 그런 쪽으로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겪는 비극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와 체제에 대한 비판, 풍자 쪽으로 자연히 독자의 눈길을 돌립니다. 무언가는 잘못되었기에 현실에서 이런 부조리가 빚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설은 청년 천쉬성의 매우 미숙한 대응이 빚은 자잘한 사고, 천쉬성 주변에서 더 미숙하고 한심하기까지 한 태도로 자신의 처지를 지옥에 빠뜨린 다른 인물들(멍건성 등)의 웃지 못할 사연, 그 와중에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펴 주는 여인(위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과정. 아이가 일찍 안 생기자 친척에게서 언청이 갓난아이 하나를 입양하는 곡절 등을 온정 어린 시선으로 다룹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비분강개한 어조로 독자에게 각성을 요구하거나, 반대로 졸라 풍의 자연주의 프레임에 사건을 고정시키고 담담한 관찰을 일단 청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작가 입장에서는요. 제가 보기엔 둘 중 어느 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을 이런 악조건에 가둬 놓고, 도덕적으로 타락시킬 수까지 있단 말인가!" 예를 들면 한국의 1970년대가 낳은 걸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든가,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등이 이런 태도에 가깝겠죠. 김동인의 <감자>는 일단 냉정한 내러티브를 유지하긴 해도 결국 급작스럽고 충격적인 결말에 이르러선 독자들에 주는 정서적 효과 면에서 저 작품들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대지>는 어떨까요? 전 소장 작가 루네이(路內. 로내)의 이 장편이 (길이는 훨씬 짧아도) 저 펄 벅 여사의 대작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잘난 사람, 악한 사람, 선한 사람도 없고, 환경과 출생이 부여한 우연 요소에 의해 운명의 격랑이 좌우되는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주인공 천쉬성은 노년에 이르러서조차 그 불리한 출발점에서 크게 나아진 모습도 아닙니다만, 용케도 그 질곡의 시대를 그 나름 요령으로 버티고 살아남은 사람답게 "다소의 진보"를 손에 거머쥔 사람처럼 인상이 남는군요.

천쉬성은 지극히 평범한 가난뱅이 노동자였지만, 우리 독자들이 잘 살펴 보면 원가 근성이랄까 깡다구 같은 게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가 공장에서 여론을 몰아나가니(타고난 선동가 같은 축에도 못 끼는데) 위에서 함부로 못 대하게 되는 품을 봐도 그런데, 잘난 것 하나 없어도 남자는 누구를 배필로 맞느냐에 따라 밖에서 기가 살고 안으로 자기 적성, 운명을 찾아 나가는 힘이 길러질 수 있다고 봅니다. 아내 위성이 그에게 베풀어 준 도움은 그래서 작다고 못할 정도고요. 다음으로는 (참 비유가 기묘한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국민당 여자 스파이"처럼 보이는 바이쿵췌(백공작)이 왕더파의 희롱에 정면으로 반발하여 얼굴에 큰 상처를 낸 사건도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스파이는커녕 이 공장(최악의 일자리입니다)에서 가장 험한 일에 배정된 것만 봐도 그녀의 처지가 짐작되고도 남지만 말입니다.

천쉬성이 처음으로 잡은 일자리인 페놀 공장 직공의 처지가 어떠한지는 두 에피소드로 잘 요약됩니다.

"장화를 신지 마. 장화가 문드러지거든."
"하지만 발이 문드러지는 것보단 낫잖아?"
"둘 다 싫어."

사회주의 국가지만 국민과 노동자의 생활을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는 게 아니며, 노동자 개개인의 과실을 들어 장비나 의복은 얼마 안 되는 급여에서 본인 부담으로 해결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직장에서 과실을 저질렀을 때에도 (그저 목숨만 연명하도록) 급여에서 천천히 벌과금을 삭감하는 식인데,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라면서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방법치곤 참 졸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페놀에는 물론 독성이 있지. 헌데 공장에 다니다 보면 면역이 생겨 그럭저럭 버티게 돼. 그러다 공장을 그만두면 그때부터 암이 생기는 거야."

참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집니다. 사람이 이런 억지스러운 자기 기만을 의식 속에 불어넣어야 현실을 버틸 수 있다면, 그걸 과연 사는 중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을지. 하긴 후진 사회주의 국가의 극한 상황이 아니라도 매 순간을 (아무도 안 속는) 거짓과 망상 속에서 보내는 광인도 있지만 말입니다.

소설 속에는 관제 데모도 몇 번 등장하는데 시위나 집회가 시민 개개인의 자연스러운 분노 결집이 아니라 이처럼 윗선에서 조장하는 흐름에 따라 "출세와 충성심 과시"를 위해 이뤄진다는 게 참 이상했습니다.
예를 들면 "4인방 타도" 같은 게 그것인데, 물론 4인방이야 1970년대 중국을 이런 거대한 거지 사육장으로 만든 일등 원흉이긴 해도, 그의 타도를 위한 집단 움직임까지 상부의 조종에 기댄다는 게 참 답이 없는 미개한 모습으로 보였네요.

밑바닥에서도 생존을 위한 간특한 꾀와 사술이 난무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를테면 가난, 무능, 질병, "비혼(!)" 등의 별의별 희한한 사유를 들어 당국에서 보조금을 타먹는 행태인데, 쉬성이 처음에 동료들의 신망(...)을 얻은 게 이런 잔재주를 통해서였습니다. 사이비 지상 낙원을 공언하고 다닌 사회주의가 인민을 기만하고 착취했다면, 밑바닥 노동자들은 이런 식으로 상층부와 체제를 농락하는 거죠. 모두가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저열한 콘 게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설령 불리한 환경에 처했다 해도 이를 자신의 힘으로 딛고 일어나야 스스로와 타인에게 떳떳한 의식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수중에 돈이 많아도 패자로 남을 수 있고, 돈도 없고 의식도 썩은 철저한 루저도 얼마든지 보는 세태입니다. 가공 인물 천쉬성은 희한한 방식으로 못난 시대, 사회로부터 살아남아 이런 기이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지만, 보는 우리들은 마치 이 지상의 사연이 아닌 듯 꼬이고 비틀린 개인과 시스템의 좌충우돌을 보며 감동, 격분, 죄의식, 안도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차분한 관조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람의 가치관과 성향과 운명은 대체 어느 선까지 환경과 "체제(소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예외적 구조)"의 영향을 받는 건지, 오늘 내가 누리는 편의와 행복은 어디까지 나 개인의 능력과 정당한 대가에 기댄 건지, 생각해 보면 그리 간단한 답이 안 나오는 문제임에 나의 사유가 이르러 다시 생에 대해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역시 인위적인 시스템의 가동만으로는 각종 병폐가 해소될 수 없다. 융통성과 연대 의식만이 정답이다." 가혹한 법치를 앞세운 진(秦)이 멸망하고 한(漢)이 창업된 후 그 지도층이 새삼 깨달은 진리였습니다. "생산 시설보다는 사람이 먼저다!" 이 당연한 사항이 유물론적 세계관 속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특히 정당 수뇌부에게 금세 안 떠올랐나 봅니다. 사람, 인간애가 거세된 앙상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란, 무자비하게 노동을 착취한다던 자본주의보다 현실의 국면에서 더 나은 성과를 못 거둘 뿐 아니라, 부가가치 창출도 인간애의 달성도 모두 실패했을 뿐입니다. "자비"란 그래서, 다소 엉뚱하지만 통렬한 방식으로 "실패한 체제"의 은폐된 좌절을 따스이 응시하는(동시에 개선을 촉구하는) 대안에의 몸부림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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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올림픽 백과 - 궁금해요! 동계 올림픽의 모든 것
정인수 지음 / 기린미디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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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만국기 도안을 보여 굉장히 흥미로워합니다. 지구상에 그토록 많은 나라가 대륙 혹은 섬 각 지점에 오밀조밀 배치된 것도 신기한데, 온갖 도형과 색채를 조합하여 "우리 나라는 이런 모양새로 상징될 수 있어!"라고 뽐내듯 나열된 그 조형의 성찬이라니. 헌데 이런 국기를 앞세우며 그 나라를 대표할 만한 빼어난 신체 능력을 지니고 또 발휘하는, 한창 나이의 청년들이 서로 기량을 겨루는 "운동회(실제로 중국에서는 이 번역어를 씁니다)"라니 얼마나 더 가슴이 설렐까요. 어른이 되고서는 그저 심드렁할 수 있지만(특히 그 이면에 숨은 타락한 정치 행태가 보도되거나 하면), 아이들 때는 이런 국제 행사, 매년도 아닌 4년마다 귀하게 열리는 대회가, 특히 설레는 마음으로 주시하게 되는 구경거리입니다.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구경거리의 참맛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규칙과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후라야 합니다. 대충 보고 알 만하다 싶어도 더 철저히 따지고 들어가면 그간 놓쳤던 숨은 묘미를 더 속속들이 음미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고가의 장비와 수트를 마련하여 겨울 스포츠를 따로 즐기는 분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많은 이들은 아직도 무슨 종목이 있는지, 어디에 포인트를 두고 즐겨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남의 집 경사 대하듯 데면데면해할 뿐입니다. 올림픽의 국내 개최가 몇 주 남지도 않았는데(이 기회를 놓치면 생전 다시 맞이나 할 수 있을지 싶은) 아직도 열기가 뜸한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경기나 정치적 의기소침 같은 이유가 아니라, 동계 스포츠 자체에 대해 낯선 느낌이 먼저 들어서이죠.

하계 올림픽에 대해선 그 개최지나 연도까지 정확히 외우는 분들도 많습니다. 의식적으로 뭘 외운다기보다는 다큐나 홍보를 통해 워낙 많은 정보가 유통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머리에 남아서이죠. 그러나 동계 올림픽이라면 비교적 근래에 개최된 대회들이나 장소(국가, 도시)도 꽤 낯섭니다. 하지만 정보가 질서 있고 알기 쉽게 잘 정돈된 책을 집중해서 읽고 나면, 왠지 나도 동계 올림픽 박사님이나 되어 있을 듯한 뿌듯함이 느껴집니다. "아이들 책인데..." 하시는 분은, 성인인 저도 이 책 무척 집중해서 읽었고, "아 그랬었지." "그게 그런 거였나?" 해 가며 무척 몰입되는 독서였다는 점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책이라면 아이들 책이 (어른에게조차) 훨씬 유익하다는 점 새삼 강조하게도 되고요.

하계 올림픽이나 FIFA 월드컵도 그렇지만 남한보다는 북한 선수(단)이 먼저 두각을 나타내고 성과도 올렸습니다. p47에 보면 무려 1964년 인스부르크 대회에서 스피드스케이팅 3000m 여성 종목에서 북한의 한필화가 은메달을 따 내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빙속이나 육상의 트랙 종목이나 동양인이 메달권에 입상하기가 무척 어려운데 극동의 이름도 없는 나라 출신이 당당히 시상대에 올랐으니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사실 자체보다 한 선수의 오빠 되는 한필성씨 관련 상봉 사연이 더 널리 화제가 되었지요. 이 대회가 북한으로서는 최초 참가였는데 이 대회를 통틀어 "아시아인 유일 메달 획득"이라고 합니다.

"중립국"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1948년 대회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처음으로 열린 행사이기도 합니다. 보통 OX 퀴즈에서 우리나라가 최초로 참여한 올림픽이 런던 대회 아니냐고 묻는데, 이 행사가 몇 개월 전에 열렸기 때문에 틀린 겁니다. 1948. 1이면 아직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이었으나 "KOREA"라는 이름으로 IOC에 가입했던 상태였고, 위에 쓴 대로 북한은 1964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쿼밸리 올림픽에 대해서, 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걸 몰랐던 게 아니라 아예 이름 자체를 처음 들었습니다. 이 "스쿼밸리"는 책에 잘 나와 있는 대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소재 스키 리조트의 이름입니다. 관례대로 도시 이름을 딴 게 아니라 상업 시설의 간판을 전면에 내건 유일한 경우이죠. 놀라운 건 동계 올림픽을 대표하는 종목 중 하나인 봅슬레이는, 경기장이 아예 건설되지 않아 열리지 못했는데, 책에는 "참가국이 9개밖에 되지 않은" 이유도 들고 있습니다만 월트 디즈니 같은 장삿속을 앞세운 "회사"가 사실상 주도했던 것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이런 걸 보면 지금이야 번듯한 구색이고 화려한 외관이라 해도, 그 출발과 성장은 참 어색한 면이 많았던 초보스러운 행사였던 게 동계 올림픽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프랑스는 지형의 영향으로 기후대가 다양한 편이라 동계 올림픽도 세 번이나 열었는데 이건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개최 횟수입니다. 1968년인데 비공식이긴 하나 처음으로 대회 마스코트가 등장했으며, "광고가 새겨진 옷은 입지 맙시다!" 같은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답니다. 올림픽은 물론 온갖 스포츠 경기 중에 선수인지 샌드위치맨인지 모를 만큼 브랜드가 주렁주렁 빈틈없이 부착된 유니폼이 난무하는 요즘에 참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신선한 외침입니다.

프랑스는 1968년에 이어 1992년에도 동계 올림픽을 개최했는데 우리들도 이름이 익은 알베르빌에서였습니다. 이 대회는 놀랍게도 남성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김윤만이 처음으로 은메달을 따 전 국민들을 놀라게 했는데 어째 나라의 국세가 뻗어나가는 모습을 상징이라도 하듯 전 개인적으로 이 무렵이 한국이 가장 살 만한 시기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성 종목은 지금도 이상화 선수가 정상권에 머물러 있지만 근육량과 체격의 차이가 현저한 남성 종목에서는 동아시아인이 메달 따기가 정말 힘든데, 김윤만의 성과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합니다. 그 외에, "쇼트트랙"이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승격되고, 이미 이 분야에서 한국이 절대 강자라는 정평이 나 있었기에 관계자들은 성적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걱정을 접었더랬죠. 우리 국민들도 미디어를 통해 이 점을 잘 알고 기대치를 한껏 높여 놓은 상태였었고 말입니다.

쇼트트랙이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을 때 고 사마란치 당시 IOC 위원장 같은 이는 "스포츠맨 정신에 어긋난다" 같은 지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확고한 자기 자리를 굳힌 종목이라 한때 저런 말을 들었다는 게 실감이 안 될 정도이고, 이후에 성장기를 보낸 한국인들이라면 우리 나라가 동계 올림픽에서 당연히 10위권에는 들어 주는 강국으로 이미지를 형성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88년 캘거리 올림픽에서만 해도 우리 나라는 모두 28명의 선수가 출전하여, 단 하나의 메달도 못 따내는, 그야말로 참가에 의의를 두는 정도였습니다.

책에는 이 대회를 두고 "냉전 시대 마지막으로 열린 올림픽"이라 합니다만, 이때만 해도 냉전이 그처럼 갑작스럽게 끝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대회 최고의 스타 중 하나는 "동독 국적"의 여성 피겨 스케이터 카타리나 비트였는데, 우리에게는 "김연아를 아낌없이 격려해준 레전드"로나 기억될지 모르지만 당시 저는 이분을 보며 대체 사람이기나 한 건지, 하늘에서 강림한 엘프나 아니었는지 그저 황홀할 뿐이었습니다. 인터넷에 찾아 보면 대회 끝나고 열리는 갈라쇼에서 이분이 마이클 잭슨의 <배드>에 맞춰 연기하는 동영상이 있는데, 전 그것보다 <빌리진>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문워크를 시연하던 그녀의 동작이 잊혀지질 않네요.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2010년 밴쿠버 대회도 캐나다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김연아가 피겨퀸으로 전세계인들 앞에 위상을 확고히한 기념비적인 행사였죠. 김연아는 주니어 시절부터 이미 세계 최강자였으나 성인이 된 후에도 그 기량을 유지할지, 올림픽처럼 시청률과 집중도가 높은 장(場)에서도 과연 침착하게 본연의 실력을 발휘할지 그 부담감을 어떻게 이겨 내느냐가 관전 포인트였는데, 사실 그녀는 기량도 기량이지만 멘탈이 차라리 더 쎈(!) 편입니다. 아니 기술적 완성도도 사실 역대 최강이었지만(제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카타리나 비트에게 꽂혀 있어도, 전성기 기술만 놓고 대조했을 때 김연아가 몇 수 위처럼 보이더군요), 냉정하고 침착한 심리를 유지하는 바로 그 능력이야말로 진정 존경스럽기까지 한 자질입니다.

스키는 선수 키의 146% 이내의 길이여야 하는데(p204), 책 저 앞으로 돌아가 보면 p56에 왜 이런 규정이 도입되었는지 그 내력이 나와 있습니다. 1972년 대회는 일본의 삿포로에서 열렸는데(우표 수집하는 분들은 잘 알 겁니다. 국내에 유독 이 기념우표가 많이 찍혔지요), 일본 선수들이 요령껏 길이를 늘려 체공시간을 연장하는 바람에 금은동을 싹쓸이하는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삿포로는 이 대회를 계기로 국제적인 동계 스포츠 리조트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는데, 부디 이번 평창 대회도 그런 성공적인 사례로 역사에 남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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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종 인간
팻 시프먼 지음, 조은영 옮김, 진주현 감수 / 푸른숲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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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 나아가 "침략"과, "진출"의 구별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당한 몫이라 할 고유의 영역이 있고, 남의 영역을 함부로 넘나드는 건 때로 범죄로까지 다뤄집니다. 허나, 심지어 중등 교육 과정에서조차, 체제와 제도는 사회의 신규 진입 성원들에게, "현실에 안주하려는 이들을 위한 미래는 없다"며 개척과 도전 정신을 가르칩니다. 진출과 도전은 어느 지점부터 합리화의 근거를 마련하며, 혹 자신의 행위가 "침입"이라고 규정된다면 양심의 가책과 회개는 어느 지점까지 마련되어야 할까요?

이 책은 그간 진화론 주제로 여러 논쟁적인 결론을 제시하여 일반 독자들에게도 널리 지명도와 지지를 얻은 팻 시프먼의 최근작입니다. 감수자 진주현 교수의 추천 서문까지도 흥미로운 이 책은, 해당 감수 소회에서도 드러나듯, 저자는 "내용도 표현도 좋은" 대중적인 과학서를 그간 여럿 저술했으며, 과학적 진실에 인문적, 감성적 색채를 입히고 미래의 비전까지 (눈 밝은 독자에게) 제시해 온 위대한 지성입니다. 제목은 "침입종 인간"이라 붙었습니다만, 이 뜻은 "침입종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본성을 "침입하려 드는 것"으로 파악했다는 쪽이겠습니다. 인간의 종명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 것처럼, "호모 인바덴스(invadens. 즉 invado의 현재분사)" 같은 새로운 명명을 도입할 필요도 있다는 취지로도 저는 해석했습니다.

대개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오랜 세월 농경 문화 공동체 안에서 정착 생활 패턴을 이루고 살아 왔습니다. 남의 생활권에 "침입"하는 건 고사하고,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패턴으로 수천 년을 이어갔다고나 할 수 있습니다. 저들 서유럽인처럼 남의 대륙을 "발견"하고, 무시로 전쟁을 벌여 경계를 재확정하는 "스포츠"를 즐기는 생리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개성으로나 여겨 왔죠. 허나 미국인들, 서유럽인들에게는 그들의 조상들이 역사 속에서 벌여 온 여러 "침입"의 행태들이 일종의 원죄의식까지를 심어 준 게 사실인지, 소설이나 영화, 심지어 학술 연구의 패러다임조차 이런 쪽으로 상정하고 논의(혹은 상상)를 전개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어찌 보면 "남들의 회개"에 대해(그것이 설령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라 해도) (죄를 짓지도 않은 우리가) 지나치게 감정이입, 동조하며 서술을 따라가지나 않는지, 억지 춘향격 고해성사를 흉내내는 건 아닌지 회의가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여튼 진주현 교수님 말씀마따나 "워낙 책이 재미가 나서" 그런 사소한 불만은 책의 1장 반절까지만 읽어도 까맣게 잊혀지더군요. 하긴 남 이야기만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책 p60에 보면, 미토콘드리아 DNA는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이 겹치는 곳이 없으나, 핵 DNA는 1~4%가 공통이라는 (역시 독자들이 꽤 친숙한) 결론이 나오는데, 유럽인 혹은 "동.아.시.아.인"만이 그러하다는 (잠시 잊고 있던) 사항을 거론함으로써 경솔한 독자를 무색하게 만들더군요.

앞에 적은 말들은 제가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든 단상이었습니다만, 책은 마치 그런 독자의 반응을 예상이나 했다는 듯 다음과 같은 개념규정부터 깔끔히 시도합니다(p36).

"한 종이 지리적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것과 침입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저자는 "시간과 거리, 영향력"이라는 다소 무미건조한, 그러나 이런 과학적 논의에서 그 본질을 정한다 할 객관적 지표를 들고 있습니다. ".... 침입종 혹은 비(非)토착종을 규정하는 작업이, 이론적으로는 어렵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라고는 하시나 후속 논증을 보면 연구의 어느 단계에서건 결코 쉽게 처리될 성격이 아니더군요. 500년이냐 (예컨대 저자의 시론처럼) 1만년이냐의 문제인데, 길어야 백 년을 사는 인간이 애초에 편의적 가치 준별까지 적잖이 개입시켜 가며 진화생물학 같은 아찔하고 아득한 영역에 지성의 일단을 바쳐 진리를 규명하는 자체가 애초에 무망한 도전입니다. 무슨 결론이 도출되건 어느 관점에서의 비판이 가능하고 설명이 안 되는 맹점이 여전히 남으니 말입니다.

언제 인류는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나? 여기에 대해 저자(와 이 섹터 한정으로 저자와 의견을 같이하는 여러 선구적인 학자들)는 그저 우연히 한 가족이 뗏목에 실려 떠내려온 게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갖고 뛰어난 항해술을 활용한 채(p43)" 이곳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뿐 아니라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등에 정착한 여러 종족들 역시, 오늘날의 인류에게는 완전히 잊혀진 특별한 기술을 고안하여 저 낙원과도 같은 고도에 도착했다는 결론에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합니다. 성공적인 침입과 그 후속 번성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인간의 생존과 문명 발전을 향한 의지에는 반드시 "침입하려는 의도"와 "그 적절한 수단에 대한 고민"이 개재된다는 뜻도 됩니다.

유럽에 더 오래 전부터 터잡고 살았으며 불쌍하게도 우리 직접 조상들에 의해 멸종했고, 그 와중에도 우리들에게 약간의 DNA를 물려주기까지 했기에 더욱 안타까운 네안데르탈인들에 대해, 저자는 왜 그들(어느 시점에서는 역시 침입종이었을 수 있는)이 경쟁에서 밀려 생태계에서 퇴출되었는지 그간의 다양한 연구 성과들을 짚어 나갑니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생존 방식이 있었"으며,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침입해 오기 전까지는 꽤 괜찮은 방식이었다는 데에 대개 의견이 일치함은 우리 독자들도 여러 대중서를 봐 왔기에 아는 내용입니다. 익숙한 개념 분류인 K-선택종/r-선택종에 의하면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사피엔스나 다 같이 전자에 분류되며, 따라서 그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들이 무엇을 먹었느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시프먼만의 노련한 논점 전환입니다.

책에서 재인용되는 조지프 그리넬은 "식성이 비슷한 두 종이 같은 지역에서 오랜 동안 비슷한 수를 유지하며 균형을 이루는 일은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p127). 두 호미닌은 심지어 메뉴조차도 비슷했으나, 먹이를 얻을 수 있는 환경 여건이 악화되었을 때 저품질의 대체재로도 만족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고 종전의 육류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성향이냐 같은 기준에서 크게 갈라진다고 하는군요. "융통성이 부족한" 식성을 지닌 종은 결국 무리하게 사냥에 나서다 해를 입을 수 있으며(p135:4, p139:12), (앞에 나왔듯) 같은 K-선택종이어서 어린 자녀에게 정성껏 안정적인 영양분을 공급해야만 했기에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으리라고 저자는 치밀하게, 또 조심스럽게 자신의 결론으로 독자들을 몰고 갑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과학 대중서 역시, 저자에 따라 어떤 구조와 논리로 독자를 설득하는지 그 스타일에서도 인적 개성을 발견하는 재미로 읽는 편입니다.

믹 재거는 비틀스와 대조되는 악동 이미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롤링 스톤스의 리더이자 보컬이었죠. 책에도 나오지만 키스 리처즈도 함께 쓴 가사인데 그의 이름만 크레딧되는 건 좀 부당하지만, 여튼 히트곡 중 하나인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이 꽤 인상적인 노랫말을 담았는지 외르시 서트마리 같은 학자(팻 십먼보다 십여 년 후배인 진화생물학자입니다. 한국에는 이상하게 이분 책이 번역이 안 되네요. 하긴 십먼 저서도 이 책이 첫 소개이긴 하지만)가 이렇게까지 장난스러운 명명으로 그 주옥 같은 원리를 설명하는군요.

이상의 논의에서도 눈치챌 수 있지만 저자는 학계와 대중 사이에서 그간 더 큰 인기를 누린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퇴출된 네안데르탈인" 시나리오를 우회,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가설을 내놓으려는 겁니다. "어쩌면 그들은 현생 인류가 "도착(침입)하기 전부터 이미 멸종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저자는 독자들이 다른 책들에서 만나 온 주장, 예컨대 F 라미레스 로치(이분은 아직 대중서는 안 쓰더군요) 등의 학설이라든가, 처칠 팀의 연구 같은 것들(그 반대 과정을 강력히 암시하는)도 공정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튼 안정적인 "길드"가 붕괴된 후, 네안데르탈인이 기아에 대응한 방법은 카니발리즘 등 굉장히 졸렬한 것들이었습니다. 반면 현생 인류는 MIS 3기가 안긴 시련을 꽤 슬기롭고(이름값을 하는군요) 세련된 방식으로 돌파했습니다.

이 책이 출간시부터 큰 화제를 모은 건 물론 4부 이하부터 폭발적인 페이스(와 설득력)으로 달리는, "(우리가 살아남고 그들이 사라진 건)늑대를 개로 바꿔 동맹자로 데리고 다닌" 현생인류의 놀라운 선택이란 결론 때문이었죠. "최초로 개(늑대)를 길들인 인간"이야말로 종 전체를 위한 프로메테우스적 혁신을 이룬 은인이었으며, 잘 알려진 대로 "개 역시 인간이 필요했기에" 이 놀라운 동맹은 성공적이었고 또 지속적이었습니다. 저자는 A. 셰라트의 1980년대 연구(그간 정설로 여겨진)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현생 인류는 "가축"이 아니라 (인간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새로운 도구로써" 개가 절실히 필요했고, 녹록지 않았을 오랜 시행 착오를 통해 전략의 현실화를 이뤄냈습니다. 코르티코스테로이드 분비 수치가 현저히 낮은 종이 높은 호기심으로 탐색 기간을 길게 잡는 그 본성 덕분에 인간의 시행 착오 과정 역시 의미있게 단축될 수 있었습니다.

초보 군사학 상식에서 자주 하는 말이, 보통 공격에는 수비 측의 두 배 전력이 필요하다는 거죠. 여러 모로 보수적이고 현실 안주형이었던 네안데르탈인들과 달리, 현생 인류는 자신의 약점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부지런히 개선과 대안을 찾았으며, 자신의 종은 물론 다른 종에게서도 "동맹군"을 물색하고 실제로 말쑥한 협업을 이뤄냈습니다. 이랬기에 그들은 "생존을 위해 절실한 과제였던" (낯선 환경에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고, 침입은 곧 적응의 성공과 종의 생육, 번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잠깐 진주현 교수님의 서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흔히 보던 개조차 더 이상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책에서는 잠시 개 식용 풍습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저자에 의하면 개는 물론 늑대의 고기조차 단백질원으로 삼지 않은(최소한, 증거가 안 나온) 사실을 두고 "동맹에게 바치는 특별한 문화심리학적 동기"로 해석합니다. 우리 한국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위화감을 느끼는데, 역시 그래서 "침입종 규정"에 실감을 덜 느끼게 된 걸까요? "침입도 안 하고, 개고기도 먹겠다" 같은... (물론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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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레산드로 다베니아 지음, 이승수 옮김 / 소소의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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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잔잔하고 마냥 착한 듯하나 엄청난 울분과 정의감의 격동을 담은 장편을 지은 알레산드로 다베니아에 대해,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젊은 작가라는 소개가 책날개에 있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현지의 지인한테 잠시 물어 보니 "젊은 독자층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작가"라고도 불려진다고 합니다. 적잖이 다른 규정 같지만 의외로 같은 지점으로 통하는 면이 큰 글들인데, 평이 중요하다기보다 독자들이 책을 직접 읽고 그 맛을 느껴 보는 게 맞지 싶은 그런 장편이더군요. 젊은 작가분이 과연 사랑 받을 만하게 작품을 쓰셨고, 젊은 독자층이 지지와 호응을 보낼 만한 내용과 주제, 그리고 맛갈난 표현과 통찰들이 많았습니다.

다베니아 선생(현직 교사 신분입니다)는 젊은 축에 속하는 게 맞습니다. 이 자전적 소설에서 1인칭 주인공 페데리코의 고백과 술회를 통해 무시로 드러나는 각종 대중문화 코드를 봐도 분명히 증명됩니다. p70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죽 나열하면서 U2의 보노가 나온 포스터를 든다거나, 텔레비전 시리즈물 <맥가이버>, <A-팀> 같은 걸 대뜸 리스트에 끼워 넣습니다. 이런 건 한국에서라면 페데리코가 자라던 시절보다는 좀 이른 시기에 대중의 사랑을 받던 아이템들인데, 한국(남한)과 시칠리아의 갭이 그 정도였는가 보다 하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A-팀'은 아마 번역가 이승수 선생께서는 모르셨나 봅니다. 특정 세대라면 KBS 2TV에서 틀어 주던 '에이 특공대'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요.

현대의 대중 문화 세례를 받고 자라닌 세대라면 당연 저런 코드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만 페데리코는 또래들과는 다른 아이입니다. 어떻게 다르냐. 고전과 인문을 무척 좋아하며 그 질서 정연하고 정돈된 아름다움 속에 폭 빠져 시공을 초월한 꿈을 꿀 줄 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19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페트라르카와 단테를 두고 정말 그 본연의 매력에 흠씬 취할 줄 알기란, 싸구려 대중 문화의 해로운 중독과 "피폭"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만큼이나 딱 어렵습니다. 마땅히 완상하고 탐독할 줄 알 만한 멋진 고전의 담백한 맛을, 감미료와 첨가물에 길들여진 (어린) 혀가 수용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데, 형 여친인 코스탄차 말마따나 페데리코는 천상 시인의 자질을 타고났나 봅니다.

페데리코를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은 그의 "스타일"을 두고 바로크적인 과장이 가득하다고 하지만, 그게 깎아내리는 말투이거나 시정을 요구하는 지적은 아닙니다. 그저 글쓰기 산물들이 (어른이 보는 눈에서) 애답지 않다는 것일뿐 고전 소양의 촉촉한 축복을 받았다는 분명한 인정이기는 하니 말입니다. 이런 애들이 커서 정말 일류 문장가로 성장할 수 있는지는 몇 고비를 더 넘길 필요가 있겠으나, 여튼 어려서 고전 많이 읽고 그 인문적 축복을 받은 애들은 페데리코뿐 아니라 다들 꼭 글을 그런 투로 씁니다.

p79에서 페데리코는 이탈리아어 단어 몇을 갖고 재치문답형 습작을 몇 행 써 나갑니다. 사실 나이에 비해 그리 성숙한 솜씨는 못 되고, 진짜 천재라면 초등생 정도 때 남길 법한 수준이긴 한데 얘는 지금 고등학생이거든요. 한번 보십시오.

가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사(항복. resa)보다
로사(장미, rosa)가
나는 더 좋다.

그 다음은 s 하나가 덧붙은 단어쌍으로 장난을 칩니다.

북적임에도 불구하고
레사(ressa, 군중)보다
로사(rossa. 빨간)가
나는 더 좋다.

어째 ressa와 rossa가 순서가 바뀌어야 뜻이 더 통할 듯합니다만 뭐 페데리코 지 생각이 그런가보다 하고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 수사의 정석에 대해 한 마디 해 줄 수도 없고, 괜찮은 학교를 다니는 녀석이니 그 담당 교사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가르치겠죠. 제가 하나 지적하고 싶은 건, 이탈리아어라서 이런 말장난이 2연에 걸쳐 이어지는 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스페인어라면 자음의 geminate가 매우 드물어서 저런 s, ss 자음 교체로 의미의 차별화가 이뤄지질 않습니다. 요런 장난으로 혼자만의 기쁨을 누리는 페데리코는 시칠리아에 태어나길 아주 잘한 것 같네요.

시칠리아는 유럽에서도 큰 편에 속하는 섬이며 이탈리아의 국가적 통일이 그만큼이나 늦은 역사를 감안하면 반 독립국이었다고 봐도 됩니다. 통치하는 왕조가 여러 번 바뀌었고 나폴리와 한데 묶였다가 상속과 협약에 의해 다시 다른 손에 양도되었다가 뭐 운명도 복잡했습니다만 주민들은 언제나 저항과 딴청피우기 기질을 손에서 마음에서 놓은 적이 없습니다. 자연, 공적 통치 기구가 제 구실을 못 했고 치안 유지와 정의 구현은 토호, 마피아들의 손에 맡겨졌는데 물론 이들이 그런 일을 제대로 해 낼 리가 없습니다. 버젓한 서유럽 문명 국가에서 깡패들이 사실상 공포 통치를 이어가는 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페데리코는 그래도 운이 좋은 아이입니다. 팔레르모의 유복한 집안에서 부모님의 따스한 훈육을 받고 자랐으니 말입니다. p42에 보면 "펠레르모"의 어원이 pan ormus, 즉 "모두가 항구"라고 나옵니다. 한참 뒤로 넘어가 p309에 보면 앞의 어원 설명이 잠시 반복되다가, 그리스- 로마 인들의 지배가 끝나고 아랍인들이 진출했던 시절 "발라름"이라고 불렀다는 "후일담"이 이어집니다. "항구"라는 정의(definition)을 버리지 않으면서 이 고장 특유의 짙은 향내 또한 반영하는 명칭이 바로 저것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2부가 다 끝나가는, 소설 전체의 결말에서) 하는 걸까요? 지중해 건너편 피붓빛 검은 이웃들의 사정에도 눈 감지 말자는 뜻입니다. 이 소설의 배경 시점은 아니지만 북아프리카 난민의 참상은 소설 창작 시점에서 현재 진행형 아니었겠습니까.

부촌에서 자라난 문학소년, 시인인 페데리코는, 존경하는 신부님(진정 존경을 받아 마땅한, 성자와도 같은 분입니다) 돈 피노와 세대를 초월해 친해지면서 팔레르모와 바로 이웃한 브란카치오의 암울한 풍경에 대해 처음으로 시선을 주게 됩니다. 아주 어린 꼬마인데도 세파에 찌들어 온갖 못된 짓에 물든 프란체스코(저는 처음에 얘가 주인공인 줄 알았어요)도 다독거리고, 근심 모르고 살아온 "시인" 페데리코에게는 세상의 반대편 지독한 그늘, 아니 지옥을 잠시 구경도 시켜 주고, 깨어 있는 양심과 영혼이 결코 눈 감지 말아야 할 진실에 대해 오버하지 않고 위선 떨지 않고 거부감 안 느껴지게 차분히 깨우칩니다.

페데리코에게는 형이 있는데 형제가 다 총명하긴 하나 형은 좀 세속적이고 현실적으로 약아서 공부에 전념하는 그런 스타일입니다. 남들이 다 선망할 만한 엘리트로서의 삶을 꿈꾸는, 약간은 속물인데 여튼 자신의 기질과는 매우 상반되는 몽상가인 동생을 무척 좋아하며, 나중에 페데리코가 좋은 일 좀 하다가 팔자에 없던 주먹다짐에 엮여 얻어터지고 돌아오자 "난 네가 부럽고 자랑스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라는 말도 할 줄 아는 멋진 형입니다. 페데리코 같은 애는 영락없는 문과 기질이라 수학에 서투르지만 형은 못 하는 과목이 없습니다. 이런 애가 좋아하는 영화의 한 대목을 <언터처블>에서 알 카포네가 정찬 자리에서 야구 배트로 누구 머리 깨는 장면이라고 했을 때는 왠지 안심도 되더군요. 괜한 동질감이 느껴져서 말입니다(개인적으로 참 창피했었는데ㅋ).

이 대목까지만 해도 똑똑한 형제들의 고담준론(예를 들어 p89, p221의 옥시모론이 어쩌구 하는 모순어법 토론 등)이 이어져서 이렇게 중산층 젊은이들의 따스한 성장담이 이어지는가 보다 했는데 기어이 2부 이하에선 졸라풍의 지독한 자연주의 비극이 페이스를 냅다 높이며 독자까지 함께 지옥으로 몰고 가더군요. 1부에도 물론 돈 피노 신부가 위험한 일(마피아에 맞서 지역 주민들을 위한 참된 복지, 계몽, 교육 사업을 벌임) 할 때부터, 또 그 비행청소년과 아슬아슬 엮일 때부터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2부부터는 안전막이 싹 걷히고 저 <언터처블>에서처럼 무지막지한 깡패들이 바로 본색을 드러내며 "순교자"를 만듭니다. 보면서 독자가 참 격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열 받으니까 서평에는 자세한 줄거리는 생략하겠습니다. p267에 보면 영화 <대부>에서뿐이 아니라 실제 코를레오네 패밀리(아마 짝퉁이겠죠?)가 등장해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양아리짓을 저지르고 다닙니다. 역자 후기를 보면 실제 인물은 나중에 크게 뉘우치고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데 책 중간쯤에 나오는 "십자가 옆에 못 박힌 도적" 이야기가 과연 여기도 적용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돈 피노 신부 같은 성자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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