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 그는 과연 광기와 고독의 독재자인가?
고미 요지 지음, 배성인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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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북한 체제를 보며 언제나 느끼는 의아함은, 경제적 풍요를 정권 차원에서 달성해 낸 것도아니면서 어쩌면 체제가 저리 오래갈까 하는 점입니다.

심지어 천년 전 중국의 5대 10국 시절에도 권력의 3대 세습이란 매우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개인 재산은 피붙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손 쳐도, 공직이나 권력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국가에서 아무래도 명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또 난다긴다 하는 실력자들 사이의 알력을 피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그 세습이 (단지 부도덕하고 파렴치할 뿐 아니라) 매우 어렵습니다. 씁쓸한 현실이지만 안 한다기보다는 못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북한 김씨 가문의 3대 독재 지속이 일각에서 경탄(...)의 시선으로 주목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긴 합니다. 이번에 싱가폴에서 외무 장관, 전직 교육 장관이 김정은을 그처럼 극진히 대우한 것도, 싱가폴 역시 이현룡(리셴룽) 총리가 선대(리콴유)에 이어 2대째 전권을 맡는 중이라는 상황을 고려할 때 의미심장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권력의 장기 세습과 국민에 대한 폭압 정치를 경계, 지탄해야 하는 "당위(Sollen)"와는 별개로, 저러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같은 당연한 의문, 호기심을 자극하는 "현실(Sein)"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앞에서는 분개하는 듯, 신랄히 비판하는 듯해도, 권력 앞에 비굴한 게 자연스러운 생리인 법이라 막상 이런 이들을 마주하면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가 봅니다. 심지어 트럼프조차도 그리 험한 말을 늘어놓더니 정작 당사자를 만나자 그 볼품 없는 독재자 앞에서 다정한 척, 친근한 척, 악의 없는 척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제스처를 늘어놓는 걸 보면서 우리들은 혀를 끌끌 차게도 되었습니다. 여튼 이 자그마한 독재자에게, 우리가 보지 못한 뭔가가 있긴 있으니 저렇게 제 의사를 관철해 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잘 정리되고 중립적 시선에서 집필된 책을 읽고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은 그래서 필요합니다.

이 책은 1부에서 김정은 일가의 일탈적인 행태를 먼저 집중 조명합니다. 알다시피 북한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경제 제재, 단조로운 산업 구조가 그 부작용을 더 크게 야기한 흉년 등 자연 재해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으나, 어찌어찌 고비를 넘겨 가며 근년에는 핵무기, ICBM까지 개발하여 태평양 건너 세계 최강대국을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선대 김정일 치세에 없던 일이 벌어지니, 그간 정신이 불안정하다며 서방 언론(이 책의 저자가 속한 일본 미디어도 마찬가지)의 경계 어린 시선을 받아 왔던 김정은이지만 새삼 다른 시선으로 평가하게도 되었지요. 그러던 게 이번 남북 판문점 회담, 미북정상회담 등의 이벤트를 통해 "국제 정치 무대"에의 데뷔까지 이루면서 세간의 인식은 결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책은 그런 이미지 선전 정책에 너무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듯, 아직도 많은 수의 주민이 굶주리는 국가의 지도자 일가가, 그 유흥을 즐기는 용도로 얼마나 많은 금액이 지출되는지에 주목합니다. 정상적인 나라라고 해도 지도자가 향락에 국가 자원을 너무 많이 지출해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국제 원조를 받는 처지에서 마치 보란 듯이 지도자의 헛된 위신을 과시하는 데 그처럼이나 많은 예산이 쓰인다는 건 확실히 문제입니다. 이번 정상회담에도 그의 전용기 "참매호"가 노후와 성능 부실로 결국 중국 측의 도움을 받았으니 참 문제가 많습니다.

책에서는 김정은 특유의 "롤러 코스터" 인사를 비판합니다. 우리도 이번 정상회담 등을 통해 그의 실상이 본격적으로 공개되기 전에는, 제한적으로,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정보를 통해 누구누구가 어느 서열 어느 공직에 올랐다가 숙청되었다, 장기간 안 보이다가 다시 컴백했다 등등 아주 혼란스러운 모습을 봐 왔습니다. 다만 이런 인사 조치상의 변덕과 무원칙은 자유진영의 지도자라는 도널드 트럼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해임된 코미 전 FBI 국장은 아직도 투쟁 중이며, 틸러슨 전 국무 장관 역시 석연찮은 이유로 느닷 퇴장했죠.

아무래도 우리가 여전히 김정은에 대해 의구심을 풀지 않는 이유라면, 그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고사포를 동원한 극단적 수단으로 처형한 그 사건의 충격 때문일 겁니다. 손위 항렬의 인척을 그처럼 잔인하게 목숨을 앗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게다가 장성택은 개혁 개방을 주장하고 우리나 서방 측에 유연하게 나가야 한다는 성향이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우군(?) 하나를 잃었을 뿐 아니라 향후 저 체제가 어떤 진로를 틀지 장기 비전에 대해서도 큰 우려가 일기도 했죠. 그런데, 과거 덩샤오핑도 자오쯔양, 후야오방 등을 숙청했으나 결국 바른 길을 가긴 갔고 경제 개방도 이뤄 냈기 때문에 이 점에 한해서는 좀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김정은의 수완과 진정성이 덩샤오핑의 그것과 비교될 수 있을지는 별개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 전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이라면 말레이시아에서의 김정남 암살 사건이 있습니다. 저 장성택 처형과는 달리, 이 사건은 여튼 공식적으로는 누가 배후에서 일을 주도했는지, 배후가 과연 있기는 했는지가 아직 명확하게 판명난 건 아닙니다(범인이 누구인지는 우리 모두가 심증이 굳은 편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책은 왜 김정은이 배다른 형 김정남을 죽여야 했는지, 성장 과정에서부터 품게 된 적대감과 경계심의 동기, 근원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핍니다. 이미 매체를 통해 널리 보도도 되었으나, 생전의 김정일은 특히 이 아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품었다고 하는군요. 그가 외국으로 유학 갈 때 김정일은 마치 딸을 시집이나 보내듯 눈물을 하염없이 떨궜다고도 하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슬하에 둔 여러 아들들 중에서도) 김정남을 향한 정이 매우 깊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자신을 가장 여러 모로 빼닮은 아들이어서겠죠?). 헌데, 이런 이복 형을 지켜보는 김정은의 심기가 어떠했을지도 우리는 짐작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sibling rivalry란 정상적인 가정에서도 종종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특히나 재산가, 권력자의 소생들 사이에서는 피 튀기는 투쟁이 예나 지금이나 다반사로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의 구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들들, 이삭의 아들들, 야곱의 아들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게 옳다거나 자연스럽다거나 하는 결론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이 책 쓰신 분이, 몇 년 전 크게 화제가 된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를 쓴 바로 그 일본 기자분입니다.

"기쁨조"란 말은 우리 남한에서도 워낙 널리 알려져 마치 오래 전부터 한국어 어휘 속에 들어 있었던 듯 착각도 됩니다만 이 책은 그 시초를 1996년 북한 무용수의 망명 후 회견 중 발언에서 잡습니다. 그 전에는 이 말을 우리가 알지도 못했고 쓰지도 않았다는 뜻인데, 그런 지적을 듣고 보니 과연 그랬던가 싶기도 합니다. 어지간히 큰 (문화) 충격도 주었으니 그리 널리 퍼진 건데, 책을 보면 김정일 개인을 위한 인적 조직이라기보다 고위 당 간부들의 접대와 위안(...)에 널리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일부는 너무 유흥에 몰두하다 만취한 상태로 운전 귀가 중 사고를 내 크게 다치기도 했다는데 유독 북한 고위층 사망 원인 중 "교통사고"가 많은 이유(차가 얼마나 다닌다고)도 이것과 무관치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자인 제 개인 생각으로는 교통사고를 빙자한 처형, 암살도 그 중에 꽤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김정은의 부친 김정일에 대한 여러 비화, 혹은 일반에도 잘 알려진 에피소드들을 이 책은 잘 정리해 놓았더군요. 김정일은 우선 아버지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와도 일차(?) 권력 투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헌데 김영주는 이른바 주체사상에 대해 평소 큰 의문을 품었으며, 혹여 자신이 집권하면 이를 정통파 맑시즘으로 복귀할 의향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감지한 김정일이 제 부친에게 꼰질러서 결국 그는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는데, 1973년만 해도 김영주는 특히 대남 관계의 굵직한 국면에서 책임자로 전면에 나서는 등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김정일은 또한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도 일전을 겪었는데, 우리 한국인들도 잘 알지만 이 김평일이야말로 제 부친의 잘생긴 용모를 물려받은, 훤칠한 인상의 지도자감이었습니다.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의 소생인데, 여튼 이 위협적인 경쟁자를 김정일이 내내 살려두었다는 게 어찌보면 신기하기도 합니다. 우리 쪽에서는 "비교적 합리적 성향으로 보이는" 그가 대신 정권을 잡기라도 했으면... 하는 희망섞인 관측을 갖기도 했지만, 그 실상은 사실 형에게 꽉 쥐여 꼼짝 못하는 무기력한 왕족에 가까웠나 봅니다.

겉으로 보아 철벽 같기만 했던 김씨 체제이지만 사실은 이처럼 내부에서의 우여곡절이 많기도 했던 것입니다. 책에는 한때 퍼스트레이디로서 많은 외부 활동을 벌였던 김성애가 언제부터 2선으로 후퇴했는지, 그 배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언제 조용히 최후를 마쳤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한 정보가 실렸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역시 치열한 암투를 거쳐 권좌의 정점에 올랐고, 김정은 역시 제 목숨을 건 결단과 의지를 통해 현재의 자리를 거머쥔 것입니다.

김정남은 한때 미국이나 한국측으로부터 해외 망명 정부 구상의 중심에까지 거론되었고 그를 따르는 북측 인사들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허나 한국에서는 이후 "통일 후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적극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푸~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설레발도 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싶습니다. 아무튼 그 역시 "내가 권력을 잡는다쳐도 역시 권력 세습이다"라며 이런 "추대" 시도를 고사했다는 건데, 그 말을 문면대로 믿기보다는 왠지 패배자의 핑계나 현실 호도 같이 들립니다. 아무튼 생김새는 추해도 사람됨은 참 진실해 보였던 그가 혹여 권좌를 물려받았다면(가능성은 어차피 적지만), 훨씬 남북 관계가 쉽게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 봅니다.

오히려 김정은 7년 재위(?)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이 한국보다 높았다는 보도가 다 있을 만큼, 이 책에서는 "생각 외로 강했던" 북한 경제에 대해서도 집중 분석합니다. 허나 결론은 역시 "핵과 경제의 병진(竝進)은 불가능"이란 쪽인데 뭐 상식에도 부합합니다. 이 사람도 그런 현실을 알고 극한 곡예(brinkmanship)를 통해 판을 끝까지 키우고 패를 던져 보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아주 잘 풀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나 북한 정권의 실세들이나, 혹은 우리 모두나, 향후의 정국을 면밀히 주시할 필요가 있죠. 평화나 목숨을 걸고 도박을 벌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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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희정 그림, 서민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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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읽을 때마다 새롭다는 느낌입니다. 읽을 때마다 새롭고 아니고는 개인 차로 돌릴 수도 있겠으나, 이 작품을 즐겨찾는 이들은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역시 읽을 때마다 그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갈 겁니다. 이는 이른바 "나쁜 남자의 매력"과는 또 다른 류라 생각하는데, 어딘가 불쌍하다는 동정 비슷한 게 바로 그 이상한 끌림의 주된 원인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도리언은 사교계 데뷔 당시 그리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생김새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자기 확신이 부족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는 해도 그 이유를 스스로도 잘 모르는, 타인을 위한 관상용으로 고안된 전시품 같은 소외감에서 벗어날 줄 몰랐던 위태한 멘탈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머리가 비었고, 출신이 한미(p74 이하에 나오듯 귀천상혼 출신)했기 때문에, "인기, 선망"과 "자존(매우 유리한 조건이었건만)"을 일치시킬 수 없었지요.

"그만! 그만하세요. 너무나 당혹스럽군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뭔가 대꾸할 말을 찾고 싶은데.... (중략) 아니,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 (p44)

사실 여기서뿐 아니라 도리언은 아무 생각이 없을 때가 가장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 소년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도리언은 이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별안간 삶이,(쉼표는 제가 넣었습니다) 타는 듯 강렬하게 보였다. 자신이 불길 속을 걸어온 것처럼 보였다. 왜 진작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p46)

마치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뱀의 꾐에 넘어가 결국 부끄러움을 알게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었으면 도리언은 아마 미모를 급속히 잃게 되었을 텐데(음?? 누구 맘대로)....

"그레이군, 자네의 외모는 놀랍도록 아름답네. 찡그리지 말게. 사실이 그러니까(아름다움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말에 도리언이 반응한 듯). 그리고 미모는 천재성의 한 형태일세(헉!). 아름다움은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위대한 요소 중 하나야. ..... (중략)... 시간은 자네를 시기한 나머지 백합 같고 장미 같은 미소에 전쟁을 선포할 걸세... (하략)"

화가 홀워드는 이런 열렬한 확신의 표백을 그저 말에 그치지 않고, 신이 자기에게 따로 부여한 천재성을 발휘하여 화폭에 실천으로 옮깁니다. 말은 그러나 예컨대 도리언의 (아래) 표현처럼, 생각보다 위력이 강한 것이었습니다.

"... 음악이 우리 내면에서 창조한 것은 오히려 혼란이었다. 하지만 말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얼마나 명백하고 잔인하며 생생한 것인지! 세상의 그 누가 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얼마나 미묘한(앞에서 명백하다고 한 것과 대조하여) 마법이 들어 있는가!"

여튼 화가 바질 홀워드의 손에 내려진 (신의)축복과, 유일한 자존의 근거가 사람들이 선망하는 화사한(resplendent) 미모에 있게 됨을 비로소 깨달은 도리언의 간절한 희구(p58에 나옵니다)의 위력을 함께 받아서이기라도 한지, 홀워드 필생의 역작인 초상화는 그 주인공 도리언을 대신하여 나이를 먹습니다.

여기서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전 이 작품을 아동용 버전으로 초3때 처음 읽었는데, 그 서문에 보니 "... 어린이 여러분이 이해 못 할 만한 대목이 많이 나오므로 본서(어려운 표현인데)에서는 몇 군데를 고쳐서 소개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초상화가 나이를 먹고 사람은 그대로란 설정이 왠지 아이들 동화에나 나오는 설정같이 느껴졌으므로 아마 "고친 곳"이라면 여기이겠으며, 원작에는 "아이들이 이해 못 할" 훨씬 복잡하게 꼬인 "변신 스토리"가 나오거나, 아예 초현실적 요소가 제거된 진행이겠거니 짐작했더랬습니다.

근데 일 년 후 삼성세계문학 중 이 중편이 끼어든 권이 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하고 열심이 읽었더랬는데(故 이가형 譯 - 해문 추리소설 번역 참여로 유명한 그분이죠), 뭐 거의 그대로라는 걸 알고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지금 관점과 판단으로도 장담할 수 있는데, 제가 당시 읽었던 그 아동판은 성인 버전(이란 게 따로 없지만)이나 완역본과 별 차이가 없었고, 아마도 당시 역자들은 원작에 스며든 동성애 팩터를 우려하여 몇 대목(낯간지러워지는 대사 중 몇 구절)을 쳐낸 걸 두고 그리 말했던 듯합니다. 아니면 후반부에 등장하는 화학자 앨런 캠벨과 그가 사실은 그렇고그런 관계였다든지...

헌데 오스카 와일드의 실제 생이 어떠했건 간에, 이 작품에는 외견상 이른바 퀴어 요소가 (그 숨은 주제를 제외하곤) 거의 없으며, 도리언 그레이는 작중에서 잘 드러나듯 의심의 여지 없는 이성애자입니다(오히려 정도가 지나침ㅋ). 혹 서두에서 화가 홀워드와 헨리 경이 이 젊은이를 농락하고 버린 일에 한이 맺혀, 여성을 상대로 한 엽색 행각에 빠져들었다는 대목이라도 들어갔다면 모르겠습니다만(아주 제가 창작을 하는군요).

이 역본에도 잘 드러나듯 당대의 정치 현실에 대해 언급한 몇 대목은 있습니다. 이를테면 p69에 올버니의 파머 경을 두고 그 성향을 설명하면서 "... 정치적으로는 토리 당을 지지했는데 정작 토리 당이 집권할 무렵에는 '급진주의자들의 무리'라며 호되게 비판을 가했다" 같은 말을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따지면 "자유한국당 그것들 영 못 쓰겠더구만! 웬 종복 좌파들이 그렇게 많아?"라고 하는 식인데, 어느 정도 보수 성향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이무렵 젊은이들[출신 계층 불문하고]에게 토리 당이 인기 없었던 건 잘 알려진 사실)"... 이처럼 그는 영국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었지만, 정작 그는 영국이 망해가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 거 참. 이 책은 예언서(?)를 겸한 것이, 실제로 영국은 이 파며 경이 우려(!)했던 대로 완전히 망할 뻔했다가 1980년대 들어서야 기사회생을 했다는...

헨리 경도 그 피가 어디 안 간다고 보수적인 건 매한가지라서, p87 같은 데를 보면 "날씨를 제외하면 전 영국에서 어떤 것도 개선되길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물론 농담조로 한 말이지만). "요즘 영국 남자들은 기껏해야 돼지고기 가공업이나 벌이던 가문의 미국 여자들과 결혼하는 게 유행인데...." 같은 대목도 나오는데, 대표적인 게 윈스턴 처칠 경의 양친이었죠. 유행을 잘 따라서인지 그런 트렌드의 소생 중에 이런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으니(이 양반도 초년에는 휘그당에 몸을 두었다가 나중에 보수당으로 옮겼지요) 유행이 마냥 해롭거나 가볍거나 속물적이라고 비난할 건 아닙니다. 흠.

도리언이 일생을 두고 타락하게 된 게, 불쌍한 여배우 시빌 베인을 버리고 자살하게 만든 후부터인데, 이 책에도 나오지만 그녀 역시 귀천 상혼 소생(부모 스탠스가 바뀌긴 했습니다만)이었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이 대목에서 도리언이 제 스스로를 부정하고 파멸시킨 터닝 포인트로 상징을 삼았을지 모릅니다. 아직 열여섯 살이었던 남동생 짐(제임스 베인)은 도리언의 마음 한구석에 남은 마지막 정의감의 잔해이고 말입니다.

"오, 내 철부지 동생아, 그분은 신사이고 왕자님이셔. 너도 보면 그분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완벽한 분이라는 걸..." 정작 너무도 철이 없었던 건 물론 그녀였지만 말입니다. 어째서 여자들이란 한번 눈에 콩깍지가 씌면 이처럼 분별을 잃게 되는 건지. 이런 천하에 쓰레기 같은 놈팽이를 두고 말입니다. 시빌 베인이 말한 "이상형의 왕자님"이란 구절은 물론 원 텍스트의 "프린스 차밍"입니다. 제가 어려서 읽은 아동판에는 오히려 처음에 역주 한 번만 넣어 주고 이 "프린스 차밍"이 번역도 없이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덕분에 영어 공부도 했다는...) 프랑스어처럼 수식어가 피수식어를 뒤에서 꾸미는 구조로도 볼 수 있고, "차밍"이 그 프린스의 이름이라고도 새길 수 있죠.

"하지만 당신은 언젠가 책 한 권으로 나를 타락시켰어요. 전 그 일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해리, 누구에게도 그 책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책 한 권이 문제가 아니라 이 헨리 경 같은 놈하고 엮이게 된 자신의 운수, 아니 자신 속에 싹트고 있던 못된 씨알머리를 먼저 탓해야 옳겠습니다만 우리는 도리언 같은 새xxx한테 애초에 뭘 기대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압니다. 요즘 같이 책이 대량으로 인쇄, 보급되는 시절이라면, 설령 진짜 마력을 지닌 책이 있다손 쳐도 아마 대중의 "입" 앞에서 그 에너지가 15도로 희석되지 않을까요? 우리 전승 문학 <구지가>를 봐도, 여러 사람의 입이란 쇠도 녹일 정도라고 하니 ㅋ

마지막은 사람들이 "아주 초라하게 늙은 사내의 손에 끼어진 반지를 보고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인데, 제가 읽었던 아동판에서는 이처럼 원문에는 전혀 없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이 모시던 분인가요?"
"아뇨". 햐녀는 대답했습니다.
"우리 주인님은 저 초상화에 그려진 분처럼 젊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어떻게 된 게, 저는 그 아동판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더 듭니다. 아마도 그 각색하신 분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너무도 몰입을 한 나머지 아예 자기식으로 창작까지 한 듯한데(ㅎㅎ), 이게 오히려 더 원작의 유미주의 분위기를 잘 살려서 그럴싸해지는 결말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영원한 경의와 애모의 메시지도 잘 살고 말이죠. 또, 죽고나서 신원이 밝혀지면 가뜩이나 생전에 평판이 안 좋았던 그레이가 말 그대로 "유취만년" 신세로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이런 변형된 결말은 그 아름다움을 봐서 행해지는 마지막 "사면(pardon)"으로 볼 수도 있고 말입니다.

박혜정 작가님의 일러스트는 평소에 우리가 잘 알듯 날카로움과 퇴폐적 아름다움이 동시에 구현된 참으로 미묘한 그녀만의 스타일 덕분에, 혹시 이런 기획이 나온다면(아니면 팬 서비스 차원에서 혹시 그녀만의 각색판이 그려진다면) 최적의 작가겠다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이런 책이 나와서 놀랐습니다. 단, 일러스트가 좀 더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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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영혼을 꿈꾸다
임창석 지음 / 아시아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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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살아 있다." 사상가나 철학자들뿐이 아니라 자연과학자들 상당수마저, 표면에 기생하는 하잘것없는 생명체들을 거대한 힘과 호흡으로 굽어보는 지구의 "영혼"을 두고 가이아 이론으로 체계화한 바 있습니다. 이는 그 실체나 논거가 구비되어 있느냐 여부와는 무관하게, 양식 있는 지구인들로부터 옹호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지구 온난화 이론 같은 것도 사소한 논거 흠결을 빌미삼아 반대진영으로부터 트집을 잡히기도 합니다만, 우리 대부분은 탄소 원료 저감 등의 실천을 통해 이 추세가 반드시 가로막아져야 한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생존의 절박한 문제 앞에서 논거를 따지고든다는 건 참 한가한 짓입니다. 말 안 듣는 못된 아이들은 엄마한테 호되게 엉덩이를 맞는다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진리 아니겠습니까.

임창석 저자는 (지난번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현직 정형외과 전문의이자, 이 책의 유려한 문장에서도 잘 드러나듯 등단 시인이며, (아마도 우리 독자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사진을 참 잘 찍으시는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수상록(잠언서?)마저 읽고 나서 든 느낌은, "은근한 예언자"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단지 무슨 구약성서 등에 나오는, 눈빛 심상치 않고 거동 살벌한 그런 예언자풍이 아니라, 잔잔히 지혜를 일깨우고 좋은 말로 엄마처럼 타이르는 단정(端正)한 현인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과연, 우리들은 선지식처럼 어머니 지구에 영혼이 있음을 알았지만, 세파와 이기심에 부대끼면서 우리 자신에게 영혼이 있는줄조차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 이 책, 즉 "지구의 영혼"에 대해 자근자근 싱기시키는 가르침이란, 먼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궁극의 진리를 다시 상기시킵니다. "너 자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서로와 연결된 하나이며, 인간들 역시 자연과 일체가 된 존재이다." 그러니 개인만 살겠다며 스스로의 몸을 해쳐 대는 짓거리란 얼마나 우습고도 어리석습니까.

이 책은 겉으로 보아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실제 소설로 읽어도 됩니다. 아주 두드러진 사건이 없어도, 등장인물들이 담담히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의 자신을 짚어가는 포멧은 역시 익히 확립되었던 전통 중 하나입니다. 마치 저자 본인의 페르소나라고 봐도 될 듯한 "의대생(레지던트) 제임스"의 회고 액자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제임스는 장래가 창창한 예비 의사이고 역량과 솜씨도 좋지만 알지 못할 한 가닥 회의를 마음 속에서 지우지 못합니다. 온갖 인종이 모여드는 뉴욕 허드슨 강가에서 각종의 정물, 혹은 역동적 풍경을 스케치하는 그의 모습 역시 저자 자신의 상(像)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듯합니다. 해부, 해부,... 제임스는 마치 전역 후 얼마 안 된 군인이 다시 내무반 생활로 돌아간 악몽에서 깨어나듯,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 반복되는 루틴과, 칼을 쥐고 낯선 노인의 시든 육체를 가르는 역겨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무엇일지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이런 그에게 느닷 다가온 건 어느 소녀의 일기장이었습니다. 소녀의 이름은 "마티"인데, 마티는 들으면 꼭 남자 애 이름 같지만 Matrha의 애칭으로도 볼 수 있으므로 여자애한테도 흔히 씁니다. 남자는 Marty라고 살짝 철자가 다르다고도 하는데 뭐 꼭 그렇지만고도 않습니다. 여튼 이 소설에선 일부러 Marti라고, 소녀 이름의 정확한 철자까지 제시됩니다.(성씨는 "하비". 마치 해부학의 아버지 윌리엄 하비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마티는 엄마가 없습니다. 어느날 생전의 엄마와 함께 놀던 뉴욕 바닷가를 떠올리며, 새로 이사 온 오하이오 주 이리 호수 근처에서 뛰어다니다 구덩이에 빠져 크게 다칠뻔하고 기절까지 합니다. 뉴욕은 바다에 면해 있지만 이곳 이리(Eerie) 호수도 바다처럼 넓기에 소녀에게 기시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여튼, 정신을 차려 보니 큰 몸집의 갈매기가 자신의 아래에 깔려 죽어 있느데, 따스하기도 했고 푹신하기도 하다가 이제는 싸늘해진 무엇이 바로 지금 갈매기의 사체인 걸 알고 소녀는 놀랍니다. 이 사실을 아빠에게 말해주자 하비 씨는 차분히 딸의 머리를 어루만집니다.

"엄마가 너를 지켜 줬나 보다...."
"네에....?"

한편, 장면이 바뀌어 소녀 마티와 리처드는 그전부터 자주 만났지만(?), 이번에 제대로 인사를 나누며 통성명까지 거칩니다. 무슨 소린가 하니, 리처드는 본래가 오하이오 출신이고 거기서 학부까지 마쳤지만 의대(콜롬비아대) 공부 때문에 뉴욕까지 온 거고, 아까 말했듯 마티는 뉴욕에서 나고 자랐으나 어머니를 잃은 후 이곳 오하이오로 아빠 따라 이사 온 겁니다. 그러니 둘은 고향과 거주지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교환(?)한 셈입니다. 리처드가 오하이오 체류 시절 호숫가에서 뛰놀던 마티를 먼발치에서 본 건데, 그때는 리처드 본인도 개인 마티를 의식한 건 아니었고 그저 풍경의 일부로 받아들인 듯합니다.

앞에서 마티가 엄마를 잃은 소녀라고 했는데, 리처드 역시 비슷한 상실의 아픔을 안고 자랐습니다. 형 에릭이 전쟁터에서 죽었는데, 주변에서는 영웅의 죽음으로 떠받들지만 어린 리처드에게는 영문 모를 큰 시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소년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현인 아첵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문까지 닫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작가님의 다른 책 <자신의 영혼에 꽃을 주는 100가지 이야기>의 한 대목을 들춰 보게 됩니다. 사람은 정신과 육체 외에 "영혼"이라는 구성 요소를 갖는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문화권에서, 양심이나 행동 원칙의 일관성 같은 게 결여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을 두고 "영혼을 악마에게 판 자"라는 비난을 하곤 했죠. 겉치레로 반듯한 예의를 지키고 치밀한 계산 하에 행동하기는 하나 결국 이웃을 해칠 궁리만 하는 사람에게 영혼이란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치가 어찌 기독교 문화권에만 통하겠습니까? 바른 마음을 지니고 공동체에 속하며, 이웃과 가족에게 뜻있는 결과를 남기려 애 쓰는 인간 문명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치이겠습니다.

 

저런 나쁜 유형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영혼을 잃기로 작정하고 이기심만을 키우는 사이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영혼에 꽃을 주는" 행위와 마음가짐이 때로는 의식적으로 필요합니다. 척박한 황무지에 절로 꽃이 필 수 없습니다. 딴에는 정성스레 가꾸는 화분에 꽃 한 송이가 피기까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실제로 꽃을 다뤄 본 사람이라야 실감합니다. 하물며, 악이 언제나 방문객으로 깃들기 쉬운 우리 인간의 경우야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저자는 말합니다. "인간이란, 우주에 플러스 효과를 일으키는 존재입니다.(p31)" 무슨 뜻일까요? 영혼의 안식이 깃들 여유가 없는 척박한 물리계에서 1+1은 언제나 2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따뜻한 마음, 풍부한 상상력,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여유 등은, 1+1의 결과를 때로 3으로 만듭니다. 자연 법칙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1=3이야말로 인간에게 맞는 산술법"이라고 합니다. 1+1=3을 때로 만들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인간으로서 어쩌면 결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사람이라면 기계적 산술 법칙을 때로 초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원주민들은 죽은 이의 슬픔보다도,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 속에 남겨진 죽음을 더 비극으로 생각한단다.(p60)." 그렇습니다. 물론 돌아가신 분, 더 이상 우리와 살을 맞대고 조곤조곤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분의 죽음이란 그 자체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극이고 아픔입니다. 그러나 먼 천국에서 여전히 우리를 내려다보며 그리워하실 망자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더 찢어질 듯 아픈 건 살아남아 여전히 이승에서 삶을 부대끼는 우리들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또 어디 내 마음만 잘 추스른다고 그게 다이겠습니까. 다른 유가족들, 친구들, 협업자들, 추종자들의 설움도 달래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구란 행성은 아직도 불완전한 단계란다... 이 넓은 시공간에 질서를 유지하고 착한 주파수를 쏘아대는 뇌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들처럼 진화된 집단 생명체의 조화된 뇌세포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단다.(p96)." 가슴이 뭉클해지는 말씀입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우주는 너무도 광대하며 인간은 티끌보다도 작다. 그러나 거대한 공간인 우주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반면 그 작은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티끌보다 작은 인간이 우주 전체보다도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생명체가 스스로를 복제하고 거의 끊임없이 대를 이어가며 심지어 우주 전체의 작동 원리까지 궁구해 낼 단계까지 이르렀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런 존엄한 생명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타 생명체와 교감하며 희로애락을 느끼고.. 이것이 그저 한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런 순간에도 우주를 향해 주파수를 뿜어내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가 모이고 모여 감히 저 거대한 우주에 영향을 끼치며 마침내 어떤 운명조차도 바꿀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하찮은 개체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씀이나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의해서 벌써 우주에다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벌써 하나의 우주입니다. 함부로 살아서 될 일이겠습니까. 책임이란 걸 의식해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보다 성숙해지면 종교 간의 갈등도 사라질 것이고 지구의 영혼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인류 전체의 마음이 싹트게 될 것이다.(p115)" 인류의 마음입니다. 철수와 영희의 마음이 아니라, 70억 인구가 하나되어 뿜어내는 "하나의 거대한 마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마음은 저 차갑고 외로운 우주 검은 구석조차 온기로 데울 수 있습니다. 어떤 거창한 레이더나 인공 발열 장치를 통해서? 아닙니다. 그런 걸 만들려면 환경을 해치고 탄소를 다량 발생시켜야 합니다. 그건 자연과 우주와의 교감, 화해가 아니라 또하나의 전쟁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착한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이웃과 공유하고 우주로 향해 뿜어낼 수 있다면 그순간 우주는 환히 밝혀지고 암울한 팽창을 멈춥니다. 우리는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침내 죽음도 넘어설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다 우리 개인개인이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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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분적분과 벡터해석
박종안 외 지음 / 북스힐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대체로 대학 교과서들은 지나친 수식적 엄밀함을 동원하여 설명을 해 나가므로 초심자, 혹은 갓 대학 학부 수준 수학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한편으로 학부 수준 수학이라 해도 이미 고교 시절부터 상당한 소양을 쌓았거나 특출한 적성을 보유한 이들이 이 과목을 수강하는 게 보통이므로, 다른 과목과 달리 수학은 초보자의 사정을 봐 주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내용 전개가 이뤄지는 게 사실입니다. 타 분야에서는 "힘들지? 호~호~" 하며 어린이 돌보듯 배려하는 대중서도 많으나, 수학은 그런 책이 좀처럼 쓰여지지도 않습니다. (구태여 찾자면 예전 김용운 교수님 형제분이 쓰신 학생용 책들이 있긴 합니다)

해석학(철학의 그 해석학이 아닙니다) 역시 차분히 한 걸음씩 떼어가며 자신만의 자질을 닦아 나가려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좌절을 안기기 일쑤이니, 몇 페이지 넘겨 보고 "어 재밌군?" 같은 느낌이 바로 와 닿지 않으면 아예 시도도 않는 편이 낫습니다. 어떤 분들은 학창 시절에 수학을 소홀히했던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지 사회인이 된지 오래인데도 늦게나마 도전해 보고 싶어하기도 하는데, 그 의기는 멋지지만 성과가 잘 나지 않으므로 시도 후 괜히 마음에 상처만 더 커지는(?) 데다, 애써 머리에 몇 가지 지식을 넣는다 해도 어디 마땅히 쓸 데도 없습니다.

그래도 공학도들, 혹은 여러 이유로 수학과에 적(籍)을 두게 된 이라면. 수학이라는 기초 위에 지식의 체계를 쌓아 나가야만 하며 이 길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가능하면 친절하게 이 분야 입문을 도와 주는 책이 필요한데, 초심자에게 도무지 친절하려야 할 수가 없는 구조적, 숙명적 난점을 그나마 최대한 완화해 주는 교재가 이만큼 성의를 보이기도 드물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학부 초보 수준에서, 이 책 p43 이하에 본격적으로논의되는 "음함수의 미분법" 만큼 활용도가 높은 정리가 또 없겠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컨대 치환적분 같은 것도, 치환적분(이 책 p118 이하에서 다룹니다)의 기본 테크닉에 너무 의존 않고도, 음함수의 미분 기초 원리만 갖고서도 어찌어찌 풀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방법을 자기 힘만으로 생각해 낼 정도면 영재 소리를 들어 마땅한데, 그렇다 쳐도 이후 과정을 보며 아 이 방법이 훨씬 편리하구나 싶으면 다시는 그런 원시적인 수단에 의존 않게도 되죠.


한국에서는 선행학습이다 뭐다 해서 너무 문제 풀이 위주로 진도 빼기 경쟁을 하다보니, 웬만큼 잘하는 학생들(수학 영재가 아닌 공부 잘 하는 공대생 정도 레벨)도 그냥 죽지 못해 진도에 끌려 가는 고역을 겪곤 합니다. 수학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가며 자신만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쾌감이 다른 영역에서는 도무지 맛볼 수 없는 성격인데, 너무도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우등생들도 이 상쾌한 지점을 종종 잊습니다. 그래서, 수식(數式)을 너무 강조하지 않고 이처럼 최대한 말과 직관으로 풀어주는 책이 더 필요하기도 합니다.

부분적분은 꽤나 기교적입니다. 하나의 법칙이라기보다는 계산 과정에서의 테크닉에 가깝죠. 미분을 배울 때 처음 다루는 게 곱미분입니다. 두 식의 곱으로 이뤄진 함수는, 하나씩 미분하고 다른 하나는 원 상태를 유지한 후, 도출되는 둘을 합으로 표현한 게 그 도함수라는 원리 말입니다. 그건 또 어떻게 해서 그런 게 나오냐고 묻는다면, 뉴턴이 처음 제시한 "극한을 통해 도함수를 유도하는 방법"을 아주 교과서적으로 차분히 되짚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여튼 이 곱미분의 원리를 이용하여, 까다로운 모습을 띤 함수를 (미분의 반대 과정으로) 적분해 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쉽사리 적분 못 하는 함수도 부지기수이나, 여튼 비교적 손쉽게 적분할 수 있게 애초에 세팅이 된 함수라면 괜히 뺑뺑 돌아가지 않고 이 "부분적분법"으로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원리는, 로그함수, 다항함수, 삼각함수, 지수함수의 우선 순위를 둔 후, 이들 모양에 최대한 가까운 걸 f(x)로, 다른 남은 하나를 g'(x)로 놓고(기호는 저것들 아닌 다른 뭐로 삼아도 무방합니다), 곱미분 원리의 역(逆)에서 나온 대로 정해진 공식에 그저 대입하는 것입니다. g'(x)는 나중에 원함수인 g(x)로 돌려야 하므로, 가능하면 적분이 가장 편하게 이뤄질 만한 식과 매칭시켜야 이후 계산에 힘이 덜 든다는 점에 착안했죠. 앞에서도 말했듯 어떤 법칙이라기보다 계산상의 요령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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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부가가치세 실무
황종대.강인.신정기 지음 / 삼일인포마인 / 201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부가(附加)가치(價値)세는 1970년대 후반에 한국에 도입된 대표적인 간접세입니다. 현재는 국가 재정의 중요 부분을 지탱할 만큼 비중이 커졌습니다만 도입 초창기만 해도 조세 저항이 너무도 컸었죠. 어떤 사람들은 이 세제의 도입 시기가 행여 조금만 늦었어도 과연 한국에 안착할 수 있었겠냐며, 중소 상인들에게까지 큰 부담을 안기는 제도 자체의 특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미국에는 아직까지도 부가가치세가 시행되지 않고 있으며 주(州)마다 영업세(sales tax)가 부가되기는 하나 이는 통일적이지 않습니다. 영국은 용케도 1970년대 전반에 이 세제를 도입했으며,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늦은 1989년이 그 시초입니다.

부가가치세 도입이 늦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의 담세자인 상인들에게 너무도 큰 불편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영수증의 교부는 요즘이야 당연한 일상이 되었지만 부가세를 시행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거래시(매입, 매출)마다 이를 작성한다는 게 꿈 같은 일입니다. 물론 부가세를 시행 안 해도 거의 어느 나라나 소득세(사업소득) 납부 의무는 있으므로 거래 증빙 자료는 갖춰야만 합니다. 한편, 요즘처럼 신용 카드 거래가 보편화하고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현금 영수증"교부가 필요해진 시스템인데, 차라리 1970년대 후반이 아니라 1990년대 후반쯤에 이 제도가 전면 시행되었다면, 다른 건 몰라도 "조세 저항" 부분에서는 훨씬 무난한 분위기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게 전력 시스템 변경에서 110V → 220V 승압 조치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고도 여깁니다. ㅎㅎ

여튼 부가가치세 과세 대상 재화를 어느 업체가 사 들였을 경우, 업체는 판매자로부터 매입 대금의 10%를 추가로 내야 합니다. 비록 납세자와 담세자가 일치하지 않는 간접세라고 하나,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도입 초기에서 모든 상인들이 대단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거죠. 내가 판매자에게 지불한 10% 금액은 그의 것이 아니라, 나중에 과세 당국에 그가 납부해야 할 것을 임시로 보관할 뿐입니다. 이후, 이 물건에 나만의 가공을 더하든지, 혹은 그대로 팔든지 간에, 나는 내가 물건 혹은 서비스를 파는 이로부터 다시 부가가치세 명목으로 10%를 더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 10%는 그대로 과세 당국에 다 납부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전에 부담한 부분만큼은 빼고 내는 것입니다(이를 매입 세액 공제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나는 나만의 마진을 더 붙이고 팔았겠으므로, 내가 내어야 할 금액은 (매입 세액 공제를 감안하더라도)다만 얼마라도 더 남아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이처럼 상인들에게 심각한 부담을 안기는 것 같이 보이지 않아도(매입 세액 공제까지 받는 데다, 내가 물건을 판 상대로부터 금액을 징수하는 것일 뿐이므로) 실제로는 영수증 작성 의무라든가, 10% 가격 상승 부분 때문에 매출이 감소하는 등(어떤 이유로든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어드는 건 시장 경제의 철칙입니다), 이 제도는 이만저만 큰 원성을 사는 게 아닙니다. 차마 폐지까지는 거론 못 해도 세율을 현행 10%에서 8% 정도로 낮추자는 주장은 꾸준히 있었습니다. 간접세이므로 사실상 소득 분포 역진성이 구현된다는 면에서도 점수를 깎아먹으나, 이 제도가 궁극적으로 세원 확보에 큰 기여를 하고, 경기 활성화에도 장기적으로 긍정적이란 점을 많은 학자들이 지적합니다. 여튼 세제의 이런 이면에 대한 이해가 이뤄지면, 마트 같은 데서 영수증 받을 때 VAT 인쇄 파트가 좀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책값이 상당히 비싼데 개인보다는 업체 등에서 한 권 비치하고 두고두고 참조하는 용도가 메인이죠. (아니면 조세 관련 전문 직종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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