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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 그는 과연 광기와 고독의 독재자인가?
고미 요지 지음, 배성인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북한 체제를 보며 언제나 느끼는 의아함은, 경제적 풍요를 정권 차원에서 달성해 낸 것도아니면서 어쩌면 체제가 저리 오래갈까 하는 점입니다.
심지어
천년 전 중국의 5대 10국 시절에도 권력의 3대 세습이란 매우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개인 재산은 피붙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손
쳐도, 공직이나 권력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국가에서 아무래도 명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또 난다긴다 하는 실력자들 사이의
알력을 피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그 세습이 (단지 부도덕하고 파렴치할 뿐 아니라) 매우 어렵습니다. 씁쓸한 현실이지만 안
한다기보다는 못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북한 김씨 가문의 3대 독재 지속이 일각에서 경탄(...)의 시선으로
주목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긴 합니다. 이번에 싱가폴에서 외무 장관, 전직 교육 장관이 김정은을 그처럼 극진히 대우한 것도,
싱가폴 역시 이현룡(리셴룽) 총리가 선대(리콴유)에 이어 2대째 전권을 맡는 중이라는 상황을 고려할 때 의미심장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권력의 장기 세습과 국민에
대한 폭압 정치를 경계, 지탄해야 하는 "당위(Sollen)"와는 별개로, 저러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같은 당연한 의문, 호기심을
자극하는 "현실(Sein)"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앞에서는 분개하는 듯, 신랄히 비판하는 듯해도,
권력 앞에 비굴한 게 자연스러운 생리인 법이라 막상 이런 이들을 마주하면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가 봅니다. 심지어 트럼프조차도
그리 험한 말을 늘어놓더니 정작 당사자를 만나자 그 볼품 없는 독재자 앞에서 다정한 척, 친근한 척, 악의 없는 척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제스처를 늘어놓는 걸 보면서 우리들은 혀를 끌끌 차게도 되었습니다. 여튼 이 자그마한 독재자에게, 우리가 보지 못한
뭔가가 있긴 있으니 저렇게 제 의사를 관철해 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잘 정리되고 중립적 시선에서 집필된 책을 읽고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은 그래서 필요합니다.
이
책은 1부에서 김정은 일가의 일탈적인 행태를 먼저 집중 조명합니다. 알다시피 북한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경제 제재, 단조로운
산업 구조가 그 부작용을 더 크게 야기한 흉년 등 자연 재해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으나, 어찌어찌 고비를 넘겨 가며 근년에는
핵무기, ICBM까지 개발하여 태평양 건너 세계 최강대국을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선대 김정일 치세에 없던 일이 벌어지니, 그간
정신이 불안정하다며 서방 언론(이 책의 저자가 속한 일본 미디어도 마찬가지)의 경계 어린 시선을 받아 왔던 김정은이지만 새삼
다른 시선으로 평가하게도 되었지요. 그러던 게 이번 남북 판문점 회담, 미북정상회담 등의 이벤트를 통해 "국제 정치 무대"에의
데뷔까지 이루면서 세간의 인식은 결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책은
그런 이미지 선전 정책에 너무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듯, 아직도 많은 수의 주민이 굶주리는 국가의 지도자 일가가, 그 유흥을
즐기는 용도로 얼마나 많은 금액이 지출되는지에 주목합니다. 정상적인 나라라고 해도 지도자가 향락에 국가 자원을 너무 많이
지출해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국제 원조를 받는 처지에서 마치 보란 듯이 지도자의 헛된 위신을 과시하는 데 그처럼이나 많은 예산이
쓰인다는 건 확실히 문제입니다. 이번 정상회담에도 그의 전용기 "참매호"가 노후와 성능 부실로 결국 중국 측의 도움을 받았으니 참
문제가 많습니다.
책에서는 김정은
특유의 "롤러 코스터" 인사를 비판합니다. 우리도 이번 정상회담 등을 통해 그의 실상이 본격적으로 공개되기 전에는, 제한적으로,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정보를 통해 누구누구가 어느 서열 어느 공직에 올랐다가 숙청되었다, 장기간 안 보이다가 다시 컴백했다 등등
아주 혼란스러운 모습을 봐 왔습니다. 다만 이런 인사 조치상의 변덕과 무원칙은 자유진영의 지도자라는 도널드 트럼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해임된 코미 전 FBI 국장은 아직도 투쟁 중이며, 틸러슨 전 국무 장관 역시 석연찮은 이유로 느닷 퇴장했죠.
아무래도
우리가 여전히 김정은에 대해 의구심을 풀지 않는 이유라면, 그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고사포를 동원한 극단적 수단으로 처형한 그
사건의 충격 때문일 겁니다. 손위 항렬의 인척을 그처럼 잔인하게 목숨을 앗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게다가 장성택은
개혁 개방을 주장하고 우리나 서방 측에 유연하게 나가야 한다는 성향이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우군(?) 하나를 잃었을 뿐 아니라
향후 저 체제가 어떤 진로를 틀지 장기 비전에 대해서도 큰 우려가 일기도 했죠. 그런데, 과거 덩샤오핑도 자오쯔양, 후야오방
등을 숙청했으나 결국 바른 길을 가긴 갔고 경제 개방도 이뤄 냈기 때문에 이 점에 한해서는 좀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김정은의 수완과 진정성이 덩샤오핑의 그것과 비교될 수 있을지는 별개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 전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이라면 말레이시아에서의 김정남 암살 사건이 있습니다. 저 장성택 처형과는 달리, 이 사건은 여튼
공식적으로는 누가 배후에서 일을 주도했는지, 배후가 과연 있기는 했는지가 아직 명확하게 판명난 건 아닙니다(범인이 누구인지는 우리
모두가 심증이 굳은 편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책은 왜 김정은이 배다른 형 김정남을 죽여야 했는지, 성장 과정에서부터 품게 된
적대감과 경계심의 동기, 근원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핍니다. 이미 매체를 통해 널리 보도도 되었으나, 생전의 김정일은 특히 이
아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품었다고 하는군요. 그가 외국으로 유학 갈 때 김정일은 마치 딸을 시집이나 보내듯 눈물을 하염없이
떨궜다고도 하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슬하에 둔 여러 아들들 중에서도) 김정남을 향한 정이 매우 깊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자신을
가장 여러 모로 빼닮은 아들이어서겠죠?). 헌데, 이런 이복 형을 지켜보는 김정은의 심기가 어떠했을지도 우리는 짐작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sibling rivalry란 정상적인 가정에서도 종종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특히나 재산가, 권력자의 소생들 사이에서는
피 튀기는 투쟁이 예나 지금이나 다반사로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의 구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들들, 이삭의 아들들, 야곱의
아들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게 옳다거나 자연스럽다거나 하는 결론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이 책 쓰신
분이, 몇 년 전 크게 화제가 된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를 쓴 바로 그 일본 기자분입니다.
"기쁨조"란
말은 우리 남한에서도 워낙 널리 알려져 마치 오래 전부터 한국어 어휘 속에 들어 있었던 듯 착각도 됩니다만 이 책은 그 시초를
1996년 북한 무용수의 망명 후 회견 중 발언에서 잡습니다. 그 전에는 이 말을 우리가 알지도 못했고 쓰지도 않았다는 뜻인데,
그런 지적을 듣고 보니 과연 그랬던가 싶기도 합니다. 어지간히 큰 (문화) 충격도 주었으니 그리 널리 퍼진 건데, 책을 보면
김정일 개인을 위한 인적 조직이라기보다 고위 당 간부들의 접대와 위안(...)에 널리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일부는 너무 유흥에
몰두하다 만취한 상태로 운전 귀가 중 사고를 내 크게 다치기도 했다는데 유독 북한 고위층 사망 원인 중 "교통사고"가 많은
이유(차가 얼마나 다닌다고)도 이것과 무관치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자인 제 개인 생각으로는 교통사고를 빙자한 처형, 암살도 그
중에 꽤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김정은의
부친 김정일에 대한 여러 비화, 혹은 일반에도 잘 알려진 에피소드들을 이 책은 잘 정리해 놓았더군요. 김정일은 우선 아버지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와도 일차(?) 권력 투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헌데 김영주는 이른바 주체사상에 대해 평소 큰 의문을
품었으며, 혹여 자신이 집권하면 이를 정통파 맑시즘으로 복귀할 의향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감지한 김정일이 제 부친에게 꼰질러서
결국 그는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는데, 1973년만 해도 김영주는 특히 대남 관계의 굵직한 국면에서 책임자로 전면에 나서는 등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김정일은 또한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도 일전을 겪었는데, 우리 한국인들도 잘 알지만 이 김평일이야말로 제 부친의 잘생긴 용모를 물려받은, 훤칠한
인상의 지도자감이었습니다.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의 소생인데, 여튼 이 위협적인 경쟁자를 김정일이 내내 살려두었다는 게 어찌보면
신기하기도 합니다. 우리 쪽에서는 "비교적 합리적 성향으로 보이는" 그가 대신 정권을 잡기라도 했으면... 하는 희망섞인 관측을
갖기도 했지만, 그 실상은 사실 형에게 꽉 쥐여 꼼짝 못하는 무기력한 왕족에 가까웠나 봅니다.
겉으로
보아 철벽 같기만 했던 김씨 체제이지만 사실은 이처럼 내부에서의 우여곡절이 많기도 했던 것입니다. 책에는 한때 퍼스트레이디로서
많은 외부 활동을 벌였던 김성애가 언제부터 2선으로 후퇴했는지, 그 배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언제 조용히 최후를 마쳤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한 정보가 실렸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역시 치열한 암투를 거쳐 권좌의 정점에 올랐고, 김정은 역시 제 목숨을 건
결단과 의지를 통해 현재의 자리를 거머쥔 것입니다.
김정남은
한때 미국이나 한국측으로부터 해외 망명 정부 구상의 중심에까지 거론되었고 그를 따르는 북측 인사들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허나
한국에서는 이후 "통일 후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적극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푸~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설레발도 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싶습니다. 아무튼 그 역시 "내가 권력을 잡는다쳐도 역시 권력 세습이다"라며 이런
"추대" 시도를 고사했다는 건데, 그 말을 문면대로 믿기보다는 왠지 패배자의 핑계나 현실 호도 같이 들립니다. 아무튼 생김새는
추해도 사람됨은 참 진실해 보였던 그가 혹여 권좌를 물려받았다면(가능성은 어차피 적지만), 훨씬 남북 관계가 쉽게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 봅니다.
오히려
김정은 7년 재위(?)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이 한국보다 높았다는 보도가 다 있을 만큼, 이 책에서는 "생각 외로 강했던" 북한
경제에 대해서도 집중 분석합니다. 허나 결론은 역시 "핵과 경제의 병진(竝進)은 불가능"이란 쪽인데 뭐 상식에도 부합합니다. 이
사람도 그런 현실을 알고 극한 곡예(brinkmanship)를 통해 판을 끝까지 키우고 패를 던져 보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아주 잘 풀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나 북한 정권의 실세들이나, 혹은 우리 모두나, 향후의 정국을 면밀히 주시할 필요가 있죠.
평화나 목숨을 걸고 도박을 벌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