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스 텝스 리딩 (TEPS Reading) - 텝스 문법 어휘 독해 기본에서 실전까지! / 텝스 실전모의고사 2회분 제공 / 본교재 동영상강의 무료 / TEPS 유형 분석 반영 (학습자료 무료 다운로드+단어암기 MP3 무료 다운로드)
David Cho 지음 / 해커스어학연구소(Hackers)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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텝스가 새로이 개편되었으니 실전 문제집이나 고급형 대비서뿐 아니라 기본서도 새 책이 필요합니다. 신 텝스는 제한 시간과 문항 수가 줄어든 대신 유형이 보다 다양해져서 아무래도 당분간은 수험생들이 적응 기간을 거쳐야 할 텐데, 기본서부터가 수험 적합도 높게 깔끔하게 편집되었다면 수험생 입장에서 뭔가 마음부터가 든든해지는 것 같습니다.

2018 뉴텝스 에디션으로 이름 붙은 이 기본서는 리스닝편, 리딩편 두 권으로 나왔으며, 그 중 리딩 파트(문법, 어휘, 협의의 리딩을 모두 포함)를 집중적으로 대비시키는 게 이 책입니다. 지금까지 해커스 시리즈가 다 그래왔듯 본문과 해설편으로 깔끔히 분책 가능합니다.

실제 시험 순서에 따라 문법 파트가 먼저인데, "고수로 가는 첫걸음"이란 표제 하에 기본 사항 설명이 나옵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기억력이나 이해도가 탁월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심지어 쉽고 당연한 것도 시간이 지나면 까먹게 되어 있습니다. 해커스 책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 각 영어 시험의 특성에 따라 (모든 시험 공통인 문법조차도) 그 시험에 가장 자주 출제(빈출)되는 항목만 용케도 잘 정리해서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p123 분사(participle) 파트를 보면, 일단 "분사는 형용사이므로 형용사처럼 명사의 앞 또는 뒤에서 명사를 수식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초보자들은 그저 ~ing 현재분사라고 하면 현재진행형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네 개의 선택지 중 블랭크에 들어기기에 가장 알맞은 구(phrase)를 고르려면, 과거분사와 현재분사의 정확한 성격, 용법을 알아야만 할 때가 많죠. 실제로 문법 파트에서 이걸 묻는 문항이 역대 매우 자주 출제되었기에, 설명과 예제부터 착실히 익히고 정독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실전 문제 해설(해설편 분책 p38)을 보면 2번에서 "주어, 동사, 목적어 등이 완전히 갖춰진 문장이므로 블랭크 안에 들어가야 할 건 거품  수식어이다" 라고 합니다. 명사(figures) 뒤의 수식어이므로 분사구가 오기 좋고, feature와 이 명사의 관계가 수동이므로 답은 (c) 밖에 될 게 없습니다. 바로 위에 보면 "분사 자리에 동사는 올 수 없다"고 하는데, 당연한 소리 같아도 (d)가 왜 답이 못 되는지를 이 사항으로 설명 가능하죠. 이처럼 해커스 시리즈는 해설이 매우 자세하고, 오답이 왜 오답인지까지 알 수 있어 좋습니다.

p225를 보면 많은 수험생들이 혼동할 만한 문제들이 나옵니다. 아마 3번 같은 경우 고3 수능영어에서도 자주 다루는 사항이므로 거의 틀릴 학생이 없겠으나, 4번, 5번 등은 did it so, try to do 등도 맞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4번에서 so 역시 대용어구로 볼 수 있고, 5번의 to do도 대동사로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so는 생략할 수 있다고 했으니 남는 것은 did it인데, it 자체도 대명사이긴 하나 이렇게 쓰면 did에 어떤 다른 뜻이 있는지 오해할 수 있고, 또 do 자체가 대동사이니 구태여 뒤에 별 이유 없이 목적어를 형식상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둘 다 가능하면 더 간략한 게 답이죠. 5번은 반복어구를 몽땅 생략할 수 있다고 했으니(본문 p222), 굳이 to do  등을 뒤에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문법적으로 틀렸다는 게 아니라, 다른 깔끔한 대안이 있으면 그걸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저는 6번에서 accepted 이하의 구(句)를 문장의 동사로 착각할 수험생들이 많을 듯했습니다. 이거야말로 저 위 문단에서 다룬, 과거분사가 형용사 노릇 하는 경우이죠.

7번 보시면 I think not so가 틀린 줄은, 영화만 자주 봐도 I don't think so 라든가 I think not (이거는 <본 아이덴티티>에서 제이슨 본이 안내 직원에게 뭘 물어볼 때 아주 딱딱하고 불친절하게 대답하는 대사로 기억에 오래 남죠 ㅎㅎ) 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let me skateboard 에서 skateboard가 틀린 거 아니냐고 하던데, 이게 자동사로 쓰일 때가 있으니 5형식 사역동사의 목적보어로서 동사원형이 온 셈이므로 맞습니다.

8번 보시면 at no time은 never과 같습니다. 만약 이 문제가 Never이라고 되어 있었으면 수험생 누구라도 아 부정어구가 앞에 오면 문장이 도치되는 그걸 묻는구나 하고 다 눈치챌 겁니다. 이처럼 보통은 부정어구로서 문두(文頭)에 오지 않을 듯한 부사구가 맨앞에 와도 이걸 never의 경우에 준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하죠. 이거하고 헷갈리기 쉬운 게 in no time인데 이건 "즉시"라는 뜻입니다. 이 어구는 "부정"의 의미가 아니므로 맨앞에 와도 주어 동사가 도치되지 않습니다.

9번은 able to 까지는 써 줘야 대부정사 어구 기능을 하죠. 이처럼 너무 생략되어도 오답입니다. 다만 대부정사가 아니라 그냥 가능하다는 뜻을 나타낼 때는 "able until"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또 고민될 만한 게 until이냐 by냐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이슈인데, be able to meet는 계속의 의미이므로 until은 큰 문제가 없고, by도 괜찮습니다.

10번은 함정이죠. 두 페이지 앞으로 건너가 보면 작은 글씨로 "부사구가 앞에 나와도 콤마로 끊어져 있으면 도치 안 시킨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imside of 아니냐고 하던데 inside만으로도 전치사 구실을 하므로 큰 상관 없습니다.

p226으로 가서, 1번, 4번, 8번, 10번 등은 "문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가장 짧은 게 정답"임을 확인해 주는 문제들입니다.

11번은 only 같은 제한어구 역시 부정에 준해서 취급하므로 도치가 이뤄져야 합니다. 사실 (b)가 did she start라고 과거로 되었다고 쳐도 (a)에 비하면 여전히 오답입니다. 그러나 시비를 아예 없애기 위해 does라고 현재 시제로 고쳐 준 점이 돋보입니다. 해설이 자세한 점이 해커스의 가장 큰 장점이란 걸 여기서도 확인 가능하죠.

12번에서 만약 and가 없었다면 (a)도 답이 될 수 있습니다. 혹시 (d)가 as well as 대신 그냥 as well이었다면 이 역시 정답입니다.

16번을 보면, 역시 오답이 왜 오답인지 알려 주는 해커스의 장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유도부사 there이 오는 경우에도 도치는 일어나야 하며, 따라서 만약 (d)가 Never has there been 이면 맞다는 뜻입니다.

18번은 앞 페이지(p225)의 9번과 같은 걸 묻는 내용입니다.

20번 해설을 보면 "...was가 가짜 주어 there 뒤에 있으면 틀린다"고 했는데, 물론 진짜 주어라고 해도 결과는 같습니다. 유도부사이긴 하나 가짜 주어이기도 하므로 도치 문제에서는 주어 취급을 하라는 뜻입니다. 또, 어떤 분은 (b)에서 one such를 지적하던데 이건 괜찮습니다. 여기서 such는 central determiner가 아니라 그냥 형용사이므로 후위 한정사인 one 뒤에 올 수 있는 겁니다.

p354 독해 파트 8번을 보면 disposable과 single-use가 동의어인 줄만 알면 쉽게 답을 고를 수 있습니다. 15번은 (c)를 고르시는 분도 있으나, 만약 (c)가 답이면 지문 처음에 "광합성"에 대한 언급이 왜 나왔는지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독해에서 지문의 처음과 끝, 단위가 그렇게 제시된 건, 허투루 버리는 부분 없이 모든 요소를 힌트로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해커스 텝스 시리즈는 내용이 뭔가 한쪽에 치우지지 않고 빈출 포인가 고루 다뤄지며, 그러면서도 "선택과 집중"의 묘를 잘 발휘하여 실전에 잘 나올 법한 사항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믿고 고를 수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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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 가깝지만 정말 가까워져야 하는 나라, 일본! 일본 연구 시리즈 3
신규식 지음 / 산마루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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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어쩌다 저리 되었을까? 이는, 현재의 일본인들 처지가 예전 같지 않다거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혀를 끌끌 찰 만큼 비정상적이고 강박적인 성품이 다분하다는 뜻처럼 들리는 문장입니다(최소한 저는 그렇게 받아들인...).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 보니 꼭 그런 내용은 아니더군요. 세계인들이 보기에도 좀 유별난 구석이 있을 뿐 아니라, 특히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 한국 사람 눈에" 왜 저처럼 특이한지, 혹은 (안 그러던 사람들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그 기원을 밝혀 가는 내용입니다.

이런 "특이함"에는 장점과 단점이 다 포함됩니다. 책의 전반부에는 주로 단점, 그 중에서도 끔찍할 만큼 섬뜩할 만큼 부자연스럽고 왜곡된 본성, 기질 등이 분석되며, 후반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한국인들은 예외로 치더라도)이 본받고 싶어할 만한 모범적인 품성, 행적, 업적, 그리고 위인(정치인 등 거물들도 있고, 평범한 시민들도 있습니다) 등에 대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상식으로 익히 알던 내용들도 있고, 오 이런 걸 몰랐었네 싶은 이야깃거리도 많으며, 다뤄진 모든 내용에는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관점과 통찰이 스며 있습니다.

일단 책 서두에는 끔찍한 자연 재해를 겪고도 질서를 지키며 타인을 배려하는, 거의 기적 같은 시민 정신을 보여 준 일본인들의 사례가 나옵니다. 고베 대지진(1995)도 그랬었고, 2013년에 일어난 동일본 대진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인들은 놀라면서 "지구 종말이 꼭 이런 모습이기만 하다면 (견딜 만도 하겠다)"고 소회를 피력했습니다. "이 바보들아! 폭동도 일으키고 불평불만도 쏟아내라고 좀!" 글쎄요. 멀쩡히 잘 하는 사람들더러 이런 주문을 하면, 그게 안타까움의 발로일지, 아니면 다른 어떤 배경을 찾아야 할지, 뭔가 생각할 거리가 생기긴 합니다.

저자는 그들의 지난 역사에서 민족성 형성의 기원을 찾습니다. 주로 책에서는 오다 노부나가 집정 이후 혹독한 방식으로 국민들을 다스린 일본 정치 체제의 특징을 두루 살펴 봅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통치기에 벌어진 잇코잇키(一向一揆)는 불교 종파 중 하나인 일향종이 일으킨 대대적인 봉기였는데, 이는 노부나가뿐 아니라 유력 다이묘들의 압제와 종교 탄압이라든가, 여태 없던 무리한 중앙집권화 시책에 대한 반발 같은 게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죠. 여튼 이 과정에서 무자비한 진압이 이뤄지고, 한국 역사 같은 데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오로지 힘에 의한 질서의 강요가 대대적으로 전개됩니다.

"우는 아이와 지토에겐 당해낼 수가 없다(泣く子と地頭には勝てぬ)" 희화적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암울한 뉘앙스도 풍기는 일본 속담이죠. 저자는 단칼에, "힘 있는 자에게는 그저 굴복하고 들어가는 게 상책이다"로 새깁니다. 일본처럼 신분의 위계가 엄격한 사회에서 그야말로 빈손으로 시작해 최고의 출세를 이뤘다며 현대에 들어서도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좋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지만, 병(兵)과 농(農)의 엄격한 분리를 강제하여 영원히 신분의 장벽을 쌓은 시책은 그가 비로소 도입한 것입니다(물론 그 이전에도 신분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으나 전국시대 들어 실력주의 풍조가 우세하면서 다소 누그러진 거지만). 이후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일반 민중에 대한 지독한 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유명한 참근교대(参勤交代)제의 도입을 통해 영주들에게도 숨 막힐 듯한 압제를 행사했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일가, 삼족이 몰살될 뿐 아니라, 그 목숨을 앗는 수단 또한 끔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징징거림이 통하지 않는 완전한 짓누름." 책에서 상세히 다루는 게 그리스도교, 주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측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에 대한 지독한 박해입니다. 어느 나라, 지역에서건 이교의 신앙에 대한 견제, 혐오, 백안시는 있어 왔고, 한국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지금은 국교로까지 떠받들어도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아주 뿌리를 뽑으려 들었던 역사가 어디에라도 있습니다. 허나 일본에서는 기어이 기독교가 착근하지 못하고 말살되다시피 했는데, 다만 수백 년 간의 박해를 무릅쓰고 지하에서 신봉해 오다 19세기 중반 개항 이후 쁘띠장 신부를 찾아온 이들의 실화는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신도를 죽이는 것도 그 방식이 매우 잔혹했습니다. 이런 혹형은 비단 기독교인들에게만 적용된 게 아니라, 봉건 질서에 도전하는 모든 반항 분자에게 고루, 예외 없이, 그 촉수가 겨누어져, 설령 건의한 시책이 가납된다 해도 그 대표자만큼은 예외 없이 책형 등 잔인한 방식으로 목숨을 앗았습니다. 이런 이들을 두고 의민(義民)으로 일컫는다고 하는데, 이 설명은 한국식의 "의병(義兵)"을 다룬 대목 바로 뒤에 이어집니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한번 정해진 승자에 대해 굴종하는 게 지저분하지도 않고 현명한 처신이지, 의병 따위가 다 무엇이냐?"는 게 일본식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사고는 여러 문헌에도 자주 드러나는데, 임진란 당시에도 왕이 몽진하고 지방 행정 제도가 완전히 붕괴되었을 시 관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계속 의병이 일어나자 왜군이 꽤 당혹해했다고 합니다. 자기들 같으면 일반 백성들이야 바로 승자 쪽에 붙어 순종할 텐데, 아니 농부들이 뭐라고 무기를 잡고서 반항을 하느냐는 거죠.

임란 후 열도의 패권을 놓고 도요토미 잔존 세력과 덕천 측이 동서(서동)로 갈라져 세키가하라에서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사실은 유명한데, 이때 일반 백성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 도시락을 까먹으며 승패의 향방을 구경만 했다고 전합니다. 이게 일본식 사고방식이며, 책에도 나오듯 미군이 이기면 가이진(外人) 쇼군(將軍)이라도 새로 모시고 숨을 죽이는 게 온당한 처신이라 믿는 겁니다. 한국인 같으면 대변에 이런 행태를 두고 면상에 침이라도 뱉고 싶을 텐데, 일인들은 이에 대해 전혀 마음의 갈등이 없고, 오히려 윤리적 처신으로까지 간주합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예컨대 막부가 완전히 망하고도 그 대의를 계승하려 든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이 홋카이도에서 끝까지 항전한 건, 그 나름의 기개를 증명한 사건이며, 정해진 승자에 대해 무조건 부화뇌동하는 비굴한 근성이 일본 민족성의 전부는 아님을 떨쳐 보인 예라고 여깁니다. 중국에서도 이미 진(秦)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했지만 육국의 유신(遺臣)들이 자객을 보내어 제 주군의 명예를 도모하려 드는 등, 현실 정치에서 이미 대세가 기울었는데도 아랑곳않고 절의를 지키려는 멋진 패턴은 동아시아사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박은식 선생의 국성(國性)론도 물론 경청해야 하지만 이런 "의병"은 비단 한국만의 고유 유산, 전통은 아니겠죠. "의병" 자체야 고유명사라 쳐도 말입니다.

저자는 일본 불교 역시 석가 본연의 가르침에서 크게 일탈한, 바로 자라지 못하고 모습이 일그러진 흉한 기형의 나무에다 비유합니다. 대처(帶妻)가 예외도 아니고 일반적인 행태인 건 오직 불교밖에 없죠.  근데 저는 이 점은 각국의 사정에 맞춘 개성의 발현으로 봐 줄 여지가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다만, 세상에 가미(神)가 우선이고 부처가 뒤라는 식의 궤변 같은 신불습합론을 들먹거리는 건 일본밖에 없긴 합니다. 여기서도 종파에 따라 다른 입장이겠으나, 여튼 사회의 지배적 분위기가 불교 원형을 크게 훼손하려 들었던 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일본 불교"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일본 불교를 바로 자라지 못하게 한 그 분위기"가 나쁘다는 겁니다.

후반부에서는 일본이 세계에 자랑스레 내놓을 만한 위인들의 퍼레이드가 열립니다. 일본의 에디슨이라 불리는 다나카 히사시게,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만든 공을 인정 받아야 한다는 니노미야 주하치, 티벳 인들을 탄압하는 중국에는 투포환을 공급 않겠다는 츠지다니 장인, 맥주의 달인 에비하라 씨, 싱가포르 수상도 존경했다는 어느 구두닦이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듯하면서도 세상 누구를 향해서도 의기와 신조를 굽히지 않는 일류들의 통쾌한 사연이 이어집니다. 어느 사회나 민족, 국가에도 빛과 어둠 양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책을 읽고 그들의 양면성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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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로 빼돌린 검은 돈 이야기 역외탈세
장보원 지음 / 삼일인포마인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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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외(域外) 탈세란, 해외의 조세회피처(tax heaven)을 이용해서 세금 납부를 회피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과거에는 "조세피난처"란 말을 즐겨 썼는데, 국민(혹은 거주자)의 당연한 의무 수행 행위가, 무슨 긴급히 피해야 할 "난(難)"이 될 수는 없으므로 요즘은 이처럼 바로잡아 쓰고 있습니다.

이 책 p1에서는 먼저 "조세회피처"란 바른 용어부터 제시하고, "해외로 소득 등을 유출시켜 탈세하는 행위"로 이른바 역탈을 정의합니다. 역외탈세가 간단히 "역탈"로 줄어 통용되는 현상(p14)만 봐도, 이런 행태가 의외로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한지 짐작이 가능합니다. 책에서는 2016년에 이은 2017년의 국제 탐사보도 언론인협회의 폭로를 잠시 언급하는데, 아마 한국인들에게 가장 충격을 준 건 지난 2013년 뉴스타파(역시 ICIJ와 긴밀한 연계를 맺은)의 폭로였을 겁니다. 당시 모 금융기관 K 사장, 유명 연예인 Y씨, 대기업 이사 L모씨, 교육자 C씨 등 다수의 (이른바)사회 지도층이 혐의를 받았었죠.

이 책은 저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사회에 은연중 만연한 어떤 범죄행태를 고발하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런 파렴치한 행태에 대해 우리들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인식이 퍼지면 뻔뻔스럽게 탈세를 저지를 엄두를 (그들이) 덜 내겠지만, 그보다는 재미있는 소설 형식으로 된 책을 읽어가며, (꼭 역탈 같은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도) 세무 전반에 대한 상식이 크게 느는 보람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이강재라는 핸썸하고 전도 유망한 사업가가 차린 사업체가 본의 아니게(?) 국세청으로부터 "역탈" 혐의를 쓰고 궁지에 몰리는데, 이를 우리의 주인공 장태란 세무사가 도와 주며 겪게 되는 다양한 사건(아주 전형적이라 할 세무 관계 트러블들이라서,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을 재미난 이야기처럼 엮은 내용입니다. 뭐 주인공 중 하나인 이강재 대표님이 결국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등 아주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미모의 장 세무사님과 묘한 러브라인이 형성되는 등 소설적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장태란 세무사님은 벌써 서른 후반이지만 일만 하고 살아온 베테랑이라서 여태 연애 같은 연애 한 번 못 해 본 불쌍한, 그러나 주변에서 한 미모한다는 소리도 자주 듣는 화려한 싱글입니다. 이 정도면 "화려한"이란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게, 평범한 세무사도 아니고 국세청, 검찰청, 관세청 등에 외부조력인으로 출입한 바 있고, 여러 알짜 기업을 고객으로 상대하며 그간 수입도 꽤 높이 올린 것으로 짐작되는 유능한 전문직이기 때문입니다. 경력이 이 정도면 세무사 중의 세무사라고 봐야겠죠.

이 약력을, 한 번도 아니고, 책 서문은 물론 본문에서도 두 번이나 강조하는 걸로 보아 작가님(일부 페르소나를 장태란에게 분명 투영한, 현직 베테랑 세무사이고 나이도 비슷하지만 남성이십니다...)이 그 세팅에 아주 공을 많이 들이신 듯합니다. 14년 경력 기준을 잡는 시점이 2016년이니 집필(혹은 구상)에서 출간까지 2년 가까이 소요된 것 아니겠습니까.

after all these years 같은 감상 지긋한 어구가 서두부터 대뜸 나오는 통에, 와 과연 역탈이 소재인 만큼 작가님이 영어 표현에도 참 능하시구나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고 아델의 노래 가사라고 나오더군요(...). (이 구절은 p130에 한 번 더 반복되고, 저 뒤 p122, p184에는 다른 노래 가사가 또 소개됩니다 ㅎㅎ)아무튼 시작은 장태란(이하, 직함은 생략하겠습니다... 만 캐릭터에 애정이 가서 계속 호칭을 높여 드리고 싶어요)의 회상으로 열립니다. 결말에 가서, 이강재 전 대표가 더 세련된 모습으로 (집행유예로 일단 미국에 갔다가) 장태란과 멋지게 해후하는 장면(발단과 동일 시간대)도 나오기 때문에, 뭐랄까 구성상의 묘도 빼놓지 않고 갖춘 셈입니다.

홍학익 회장은 대뜸 소리를 지릅니다. "뭐 그런 엉터리 규정이 다 있노?" 이 소설에는 유독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분들이 많이 나오는데, 저 중반쯤에 가서 우리 이강재 대표님 회사에 검은 양복 입고 조사 나오신 황도엽 팀장님도 그렇죠. 홍회장이야 감자(減資. p29에 자세히 나오죠)를 먹는 감자(potato)로 아는 무식한 분이고, 반쯤은 이런 무식, 반쯤은 정말 범죄 행위(상습횡령이라고 뒤에 나옵니다) 때문에 감옥에 가도 별 동정이 안 갑니다. 헌데 낭만도 있고 머리도 좋고 뻔뻔한 기질도 왠지 밉지 않은 이강재 같은 사업가가 젊은 나이에 "빵"에 들어가는 건 좀 안돼 보이긴 합니다. 제 주변에 누구는 "3년이나 살았다면서 집행유예는 또 뭐냐?"고 하던데 일단 불구속 기소로 시작은 했으나 1심에서 바로 실형이 선고되고(소위 법정구속) 항소심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면 이럴 수가 있죠.

아무리 잘나가는 세무사라고 해도 통 연락 없던 누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갑자기 전화를 걸어 올 때, 이렇게 쓸모가 생길 때에만 연이 이어지는구나 같은 무상감을 느낄 수 있겠죠. 이런 use(사용)에 대한 좀 쓸쓸한 소회가 이 소설 속에서 두어 번 나오는데, 사실 세무사 같은 전문직(자유직종)은 고용(雇用) 혹은 사용(使用)이 아니라 위임(委任)이라고 하죠. 물론 로마법(혹은 독일 민법)에서 위임은 어디까지나 무상위임이 원칙이었으나(따라서 자유재량이 허용됩니다), 한국처럼 변호사건 세무사건 fee를 받고 일하는 게 대다수인 이상 일반 피용인과 다를 바도 없다는 게 현실이긴 합니다.

p43에 "간주배당"이 나오는데 위에서 홍회장이 버럭 화를 낸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반면 주식 소각, 잉여금 전입 등의 경우에 적용되는 건 세법상의 "의제배당"이며, 지금 이건 "국제조세조정에 관한 법률" 규정에 의한 것이죠. 용어가 서로 비슷하므로 일반인들이 헷갈리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배당이 아닌데 배당 취급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았습니다. p37에 보면 주식이나 부동산 명의신탁이 어떻게 민형사상 제재를 받는지 자세히 설명되고도 있습니다. 다들 홍회장 같은분이 싫어하실 만한 제도들입니다.

2016년 당시 사정을 잘 반영하듯 해운업계의 구조적 특성(경기를 심하게 탐)에 대해 여러번 설명이 나옵니다. 본디 이 바닥은 심한 호경기와 불경기가 교차하게 마련인데, 이 책에서는 8년 전 글로벌 위기의 여파로 해운사들이 더욱 심한 곤경을 겪는다는 분석(설정?)을 덧붙입니다. 톤세 제도에 대해서도 장 세무사 등의 소상한 설명을 통해 독자들이 많이 배울 수 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유독 저 2008년에는 우리 정부 당국이 딴에는 선의로 도입, 권장한다고 한 게 기업들에게 치명타를 안긴 패착이 많았습니다. 키코(Knock-In Knock-Out)도 그랬고요.

이강재 대표는 p63에서 부당행위계산부인에 대해, "왜 상대회사는 액수 그대로 매출을 인정하고 과세하면서, 당사자에게는 경비 인정을 안 해 주느냐"고 묻는데, 이건 생각해 보면 당연합니다. 매출액이야 납세자가 그리 신고를 헸으니 과소(過少)가 아닌 이상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고, 경비 인정 범위 문제는 본래가 정책적 고려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사업수완이 탁월했던 아버지(p87, p201)에게서도 이런 건 안 배우셨나 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역탈 이슈 하나만 다루는 게 아니라, 사업 하면서 마주칠 수 있는 각양각색의 세무 난관이 자세한 사이드 설명과 함께 재미있게 다뤄지기 때문에, 읽으면서 상식도 많이 늘고 공부도 됩니다. 소설류에서 대화 부분은 대개 따옴표 안에 발화자의 구분도 없이 독자가 알아서 추론해 가야만 하는 비능률적 형식으로 처리되지만, 이 책은 각종 세무, 법무 서적 출판을 통해 보기 좋은 편집에는 이력이 난 삼일인포마인의 솜씨라서, 지금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방백)인지 대화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독자 입장에서 아주 편합니다. "게임 안에 또 게임이 있다."던 이강재의 대사도 명언이고, 지전무(나중에 대표이사가 되지만 결국 물을 먹죠) 같은 캐릭터가 사회에는 꼭 있고, 이런 실감 나는 인물 묘사 덕분에 소설이 유익하고도 재미있었습니다(이강재의 영웅본색과 해피엔딩- 세상 참 좁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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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서 숲을 보다 - 리처드 포티의 생태 관찰 기록
리처드 포티 지음, 조은영 옮김 / 소소의책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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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서 숲을 보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자신만의 좁은 한계에서 벗어나길 싫어하며, 그저 익숙한 뉴런의 경로 속에서 생각이 굳어가는 줄은 모르고 편견과 선입견이 주는 (그릇된) 쾌감 속에서 점점 자기만족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인은 개인대로 자신의 편협한 견문 안에서 매사를 판단하다 일을 그르치며, 인간이라는 종족 역시 인간 중심적 사고에 매몰된 끝에 자신을 낳아 준 자연을 경시하고 심지어는 파괴하기 일쑤입니다. 푸른 색채를 가득 머금은 식물, 나무가 뿜어내는 산소가 없다면, 이 연약한 종이 어디 단 한 순간인들 생존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해서, 우리들은 숲은커녕 나무에조차 참된 응시, 진정성 있는 시선을 못 주는 어리석은 존재일 뿐입니다.

이 책 저자 리처드 포티는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도 꽤 이름이 눈에 익은 분입니다. 삼엽충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 담긴 책으로 독자들에게 이미 열띤 호응을 얻었으며, 고생물학자로서의 업적이 경력의 본체이신 분이지요. 요즘은 "빅 히스토리"로 역사의 더 큰 얼개를 파악하려는 노력도 분주하고, 그 훨씬 이전부터 자연만의 독립된 역사(이른바 자연사[自然史])를 기초 놓은 후 인간사와의 너른 관점에서의 통합적 관점을 구축하려는 노력도 제법 멀리 거슬러 올라갑니다(특히 같은 저자의 책 <런던 자연사 박물관>도 읽어 보실 만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 저자분처럼, 자연과 생물 일반의 아득한 기원을 더 오래 관조해 오신 전문가, 지성인이라야, 오히려 인간 문명사에도 더 적확하고 공정한, 또 유익한 통찰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자연이 부과하는 험난한 시련을 이겨내고 이처럼 정교하며 풍성한 문명을 건설한 건 정말 대단한 일이긴 하나, 그 부작용이 너무도 심각하여 이제 거의 종족 운명 종착점에 다다르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엄습하는 요즘이기 때문입니다.

영국 역사만 놓고 보면, "대왕(~the great)"라는 칭호를 받은 이가 단 한 사람밖에 없는데 바로 그가 알프레드 대왕(849~899)이라고 합니다. "물푸레나무의 수피(樹皮)는 성장하면서 기괴하게 주름진 파충류의 피부와 유독 닮는다.(p153)" 가지가 죽은 후에도 수피를 떨구지 않아 골프공 크기의 검은 콩버섯이 박혀 있다고 하는데, 이를 "알프레드 왕의 케이크"라고 부른다고 하는군요. 이 재미있는 이름의 기원을 정확히 알려면, 본문(의 역주)에도 소개된 "알프레드 왕이 케이크를 태운 일화"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 바로 앞 페이지에는 애설레드 2세가 옥스퍼드에서 모든 데인인을 태워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내용이 나오죠. 제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리처드 포티 박사님의 책은 인문역사와 자연사가 그야말로 혼연일체가 된 서술로 가득하다는 것, 옛날 이야기를 전해 듣는 듯 구수하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 어느덧 인문과 도의, 책임감 등까지 함께 전해진다는 점이 독보적입니다.


이렇게 유명하시고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은 분이라고 해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속담이 무색하게, 정말 뜻깊은 프로젝트 하나를 출범시켜 보려 해도 이를 감당할 재원(財源)이 언제나 적시에 마련되는 게 결코 아닙니다. 단, 2011년 운 좋게도(포티 박사님 말고도, 이처럼 우리 독자들에게 역시), 다큐멘터리 방영으로부터 나온 수익금에 기대어 박사님 부부(그 부인 되시는 재클린 포티(Jacqueline Fortey) 여사 역시, 전작들에 자주 성함이 등장하기에 우리가 잘 압니다)는 칠턴힐스에 숲을 사들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위 문단에서 옥스포드를 언급한 대목을 구태여 인용한 건, 바로 이 칠턴힐스(Chiltern Hills)가 옥스포드셔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2012 April부터 월 단위로 이어지는 사적(私的, 혹은 史的?) 일지이기도 합니다.

"우리 숲은 여느 숲처럼 교회에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된다." 원 저는 이 문장이 현재시제로 되어 있어 무슨 소린가 했습니다(포티 박사님 특유의 유머인 듯. 아니 "여느 숲과 달리"도 아니고 뭐하러 당연한 소리를...). 동아시아에서도 일정 시기까지는 토지 중 사원(절)에 조세를 바치게 한 곳도 있고, 잉글랜드 역시 명색이 에피스코팔이 영국 국교회(하긴 지금도 이름은 여전합니다만)이던 시절엔 경작자의 신교(信敎) 여부에 무관하게 이런 의무를 지곤 했었죠. ("소유권과 책무가 묘한 형태로 짜깁기되었다." - p26)

인접한 램브리지우드에서 포티 박사님은 인적으로 얽히고설킨 별의별 인연들을 일일이 확인합니다(또 되풀이되지만, 이 책이야말로 자연사와 인문사의 아름다운 혼재, 조합이란 거죠). 준남작(baronet) 토머스 에라스무스 경과의 교분, 그리고 무려 찰스 다윈의 손녀 노라 다윈과의 만남 등이 이 숲을 고리로 이어질 때는, 거참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아니면 이 탁월한 지성과 자상한 마음가짐을 지닌 분에게만은 그러하지(좁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개인적으로 들기도 했습니다. 에라스무스라는 이름(물론 그 중세 철학자 말고)은 찰스 다윈의 먼 선조 중에도 있고, 우리는 박사님의 전작 중에서 새라 다윈이란 분(또다른 직계 후손)을 만난 적도 있죠.

개인 일지 성격도 겸하다 보니 이 책에는 친근하게 Andrew라는 퍼스트네임만으로 불리는 인물도 둘 나옵니다. 한 분은 p78의, 부인 클레어와 함께 나오는 패드모어 씨이며, 다른 한 분은 p331에서 포티 박사님에게 숯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준 앤드류 호킨스 씨입니다. 자연 친화의 삶을 펴 나가는 중 저자는 따로 문명(다분히 환경파괴적인)의 도움을 입지 않고 이것저것 자체 역량으로(마치 우리가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구경하듯) 헤쳐나가야만 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무, 숲, 또한 그 속에 둥지 틀고 사는 무수히 많은 생물, 무생물들과 함께 교감합니다. 이 과정이 다 생생한, "너희가 자연을 아느냐?" 처럼 독자들에게 던지는 가르침입니다.

"물푸레나무를 위그드라실처럼 불멸의 나무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 왜림작업이다. 물푸레나무의 줄기를 통째로 베어내면 잘라낸 밑동에서 움이 트고 새로 나무줄기가 자라기 때문에 무한히 재생시킬 수 있다." 그 바로 앞페이지에는 17세기 작가(이자, 이 책처럼 알찬 개인 기록으로 영국 문학계에 큰 기여를 남긴) 존 에블린의 <실바>를 인용하여 물푸레나무의 가치를 다시 환기합니다("실바(silva)"는 라틴어로 "숲"이란 의미이죠). 여기서 말하는 왜림(矮林) 작업이란 "맹아갱신"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불멸의 나무". 참 말만 들어도 인간이란 종의 왜소함을 실감케 한다고나 할까요. 근데 그 나무를 불멸로 만드는 데에는 우리 인간의 손길이 끼어든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그드라실은 실존의 수종(樹種)이 아니라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소재입니다. "우주(宇宙)나무"라고도 하죠.

도심의 가로수에다 겨울철에 짚으로 감싸주는 광경을 흔히 보셨을 겁니다. 이걸 운치 있는 분들은 "뜨개옷"이라고도 부르는데, 널리 알려진 상식이지만 동절기에는 온갖 병충해의 근원이 (지네들도 추우니까) 알아서 이리로 들어가 겨울을 납니다. 이걸 봄철에 풀어낸 후 싹 태워버리면 나무나 사람이나 근심 큰 부분을 더는 거죠. p239에 보면 마치 이런 지혜의 관습을 연상시키듯, 썩은 통나무 등걸에 온갖 (징그럽기도 할) 생물들이 기생한 과정이 묘사됩니다. 포티 박사님은 돋보기를 들이밀며 미세한 크림색 벽으로 만들어진(좀구멍버섯 등 각종 진귀한 균류에 의해) 이 밑둥을 살핍니다. 표현이 기가 막힌데, "분해 과정이 끝나면 작은 나뭇가지는 거의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 과거 자신에 대한 유령, 그것도, 모든 자존심 있는 망자의 혼처럼 흰색 유령이 된다"는 게 박사님의 해석입니다. 허옇게 곰팡이가 슨 잔해를 봐도, 앞으로는 생각을 달리 먹어야 할 듯합니다.

p266에는 또다른 준남작 한 분이 등장합니다. 이분은 18세기 중반 사람인데, 준남작 제도야 이미 제임스 1세 시절에 도입되었으니(우리네의 공명첩이나 선무군관과 비슷합니다 ㅎㅎ) 이리 자주 눈에 띄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나무와 숲 이야기를 하며 왜 이리 자주, 그것도 별반 모범적인 삶을 살지도 못한 "인간"이 자주 등장하는가 하면, 과거에 이뤄진 조림(앞에서 말한 "왜림"도 이의 일종입니다) 사업과 현재 잉글랜드 지역 일대의 숲 생태가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직업 역사학자 뺨치게 아날(annales) 분석에 능한 포티 박사님의 명석한 두뇌와 소양을 엿보게 되죠. 이런 대목들에서는 유독 내셔널 트러스트가 자주 언급되는데, 한국에도 지부가 있습니다만 확실히 선진국 영국의 앞서간 면모를 증명하는 탁월한 NGO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호기심은 확신의 적이며, 인간 본성의 가장 의미있는 요소이다." 무슨 뜻일까요? 인간은 살아가며 끊임 없이 낯선 것과 대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대면이 "대적(對敵)"이 될지, 아니면 친교가 될지는, 오로지 그 사람의 심성에 호기심과 확신 중 어떤 것이 먼저 발동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확신이 먼저 기지개를 틀면, 세상에는 다툼과 증오, 나아가서는 전쟁이 모두를 휘감고 지배합니다. 반대로 호기심이 먼저 눈을 뜨면, 세상은 열린 마음과 이성이 이끄는 과학이 활기찬 기지개를 폅니다. 노과학자가 한 땀 한 땀 수 놓은 이 아름다운 저널, 크로니클, 혹은 다이어리 속에는, 어떻게 해야 인간이 종족 내 다른 개체와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지, 혹은 그를 낳고 키워 준 환경과 지혜로운 공존을 이어갈지, 직설이나 훈계가 아닌 "몸으로 손수 보여 주는 모범의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숲은커녕 나무만 제대로 보려 들어도, 우리는 마음의 더러운 때를 힘들게 걷어내어야만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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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읽는다 지리와 지명의 세계사 도감 2 지도로 읽는다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노은주 옮김 / 이다미디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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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리뷰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이 책은 "지명"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매 항목마다 언급, 설명이 되는 게 단연 장점입니다. 우리는 여행책이나 역사서를 읽을 때 처음 접하는 지명에 대해선 당연히 궁금함이 생깁니다. 하지만 찾아볼 곳도 마땅찮고 인터넷에서 알아보자니 왠지 믿음도 안 가는 게 보통이죠. 그럴 때, 2권으로 나뉜 이 책을 넘겨가며 듬직한 상식을 챙길 수 있어 참 좋습니다.

p58에 "바다의 여왕" 찰스턴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본래는 "찰스타운"이었으나 독립전쟁 이후 저리 개명이 되었다는 설명인데 그 사정 말고도 세월이 흐르며 음가가 변한 까닭도 있지 않겠나 생각했으나 그게 전혀 아니었습니다. 찰스 1세가 아닌 2세의 이름을 땄으므로 대략 백 년 정도 후(명예혁명이 1688이므로)인 1783년에 정식으로(주 와 연방 정부 차원에서) 이렇게 철자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링컨의 연설(1863)로 잘 아는 "게티스버그"의 경우 1780년에 해당 도시를 설계한 제임스 게티스의 이름을 땄다는 친절한 설명도 책에 역시 나옵니다. 찰스턴이 또 중요한 이유는 남북 전쟁이, 바로 남군 측의 찰스턴 포격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발발했기 때문이죠.


"미국은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세계를 지배하는 패권국이지만 그 앞 시기에는 신대륙 변방의 작은 신생국에 불과했다." 당연한 소리지만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강력한 지배력으로 지구인의 사소한 일상에까지 (소프트파워를 통해) 영향을 끼치는 미국의 힘을 그저 당연하게만 받아들일 어린 학생들에게는 꼭 필요한 설명이 아닐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 p53에 보면 지도가 나오는데, 저희가 중등 교육 과정에서 배울 때도 미국 영토의 확장 과정을 묘사한 이런 지도가 꼭 제시되었더랬습니다(교과서는 아니고 사회과 부도라든가 참고서에). 단지, 당시에는 "구입" 같은 어색한 용어가 쓰인 게 달랐죠. "구입" 자체가 어색하다는 게 아니라, 사무용품 구입도 아니고 특정 필지의 땅을 국가 사이에 매매할 때 그런 용어를 쓰는 게 어색했다는 소리인데, 아마도 일본식 용어의 잔재였을 겁니다. 이 책은 하물며 일본 저자가 쓰신 책인데도 "(프랑스 나폴레옹 1세로부터의) 루이지애나 매입", "멕시코로부터 매입" 등 한국인의 감각에 맞는 더 자연스러운 말로 번역이 이뤄진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단, 1853년에 이뤄진 "개즈던 구입(이것도 물론 이 책처럼 '매입'이 좋겠습니다만)"이 명확히 구별 안 된 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아마 학교 다닐 때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이 그 정도는 일러 줘서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역시 이 책은 취지가 취지이다보니, 왜 버지니아 주의 이름이 "버진"에서 유래했는지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이 이뤄져서 매우 좋았습니다. 저희 선생님 같은 경우는 마돈나의 히트곡 "라이크 어 버진"에서와 같은 뜻이라며 (도에 지나친) 자세한 설명까지 하던 기억도 나는군요 ㅎㅎ "뉴욕"의 이름도 그 "요크 공"이 누구인지에까지 설명이 이르는데 물론 오라녜 공(중에서도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겸직한 그 직위. 물론 이후에 등극한 사위 윌리엄 3세가 아니죠)을 뜻합니다.


p42에도 흥미로운 지도가 나옵니다. 저는 예전에 케네스 C 데이비스의 대중서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미국의 역사>란 책을 읽었는데(당시에는 성인용 포맷이었고 지금은 없어진 고려원에서 출간했었으나, 지금 나온 책은 타 출판사에서 어린이용으로 다시 쓰여진 것이네요), 여기 보면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프랑스인들과 인디언이 서로 싸운 게 아니다"라는 재미있는 서술이 등장합니다. 이 책의 p42에는 전쟁의 전과 후 미국의 영토 획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다 명확하게 도시(圖示)가 이뤄졌습니다. 거대한 프랑스 식민지가 영토의 좌안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면 미국이란 나라의 형세가 얼마나 옹색했을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브라질의 이름은 왜 대체 브라질인지 궁금해한 적 없을까요? 새삼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다른 나라의 경우 웬만큼 지식이 쌓이다 보면 어원이 대충 짐작이 갈 수 있으나 브라질의 경우 도통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적색 염료의 원료인 브라질나무 홍목(그러니 고유명사인 셈입니다)에서 유래했다고 명확히 그 기원을 밝혀 줍니다. 같은 페이지 바로 아래 "리우 데 자네이루"의 경우, 대강은 무슨 뜻일지 형태만으로도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태평양은 지구를 모두 삼켜 버릴 정도로 거대한 바다이다." (p90) 역시 같은 동양인 저자답게 미야자키 선생님은 이 대목에서 곤여만국전도를 언급합니다. 물론 마테오 리치의 번역 "태평양"에 대한 서술인데, 하긴 이 정도 중요한 항목이면 서양 저자라고 해서 그냥 넘길 수도 없겠습니다. 다음 페이지에 보면 이 미크로네시아니, 폴리네시아니 하는 이름들이 (그 뜻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누구에 의해 붙여진 것인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이어집니다. 이 책도 역사책이다 보니 사관의 스탠스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길 만한데, 제가 읽어 보기로는 대체로 진보 사관에 조금은 기울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좌파로까지 규정될 정도는 아니고, "식민지, 제국주의, 패권" 등의 용어례에서 다소는 비판적인 색채가 감지된다는 정도입니다.



특히 p102 이하에선 아프리카 근대사가 이어 서술되는데 대항해 시절부터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의 침략이 두드러졌고 이후엔 제국주의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뎠죠. "세네갈"이 강(江)이라는 뜻인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아무래도 여행 준비 과정이 결국은 집필 동기가 되었다고 저자 스스로도 밝히신 적 있고, 그 티가 나는 게 세네갈 수도 다카르를 언급하며 유명한 자동차 경주인 "파리 다카르 랠리"를  거론하는 대목 등에서입니다.

이 책은 지리의 구도를 따라 움직이지만 엄연히 "역사 도감"입니다. 그래서 오스만 투르크로 주제를 옮기면서도 따박따박 시대를 거슬러올라가서는 해당 제국의 굴곡 많은 사연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줍니다. p125에 보면 15세기의 오스만 제국을 구성한 "3대 세계"라는 이름의 지도가 나오는데, 물론 유럽-(소)아시아 - (북)아프리카입니다. 해당 지도에 큰 글자로 "비잔티움 제국"이라 표기된 게, 아니 망한 게언제인데 이 대목에서 나오나 싶을 수 있지만, 오스만 제국의 정체성은 비잔티움의 정복자, 혹은 계승자로서의 위상을 결코 배제하고 탐구할 수가 없습니다. 제국이고 황제이기 때문에 타 대륙, 타 민족, 타 신앙의 관리자, 수호자 노릇까지 (자랑스럽게) 겸해야 하는 거죠. 역시 이 책의 기획 의도가 무색하지 않게, 비잔티움이 이후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뀐 경위에 대해 설명이 또 나옵니다. "에이스 텐 폴린(εἰς τὴν Πόλιν. "텐"은 정관사이고 "폴린'은 우리가 아는 "폴리스"의 변화형입니다)"이 원 말인데, 보시다시피 당연히 그리스어입니다. 이게 음가가 변해 "이스탄불"이 된 건데, "하드리아노플"이 "에디르네"가 된 사정도 비슷합니다.

본래는 아랍 세계에서도 오스만 투르크가 맹주 노릇을 했습니다. 사우드 왕가가 지금은 성지(메카 혹은 마카)의 수호자를 자칭하며 이란과 으르렁대지만 당시만 해도 대 술탄의 위세에 눌려 찍 소리도 못하고 지냈습니다. 오히려 투르크의 술탄이 다스리던 시대에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도 자제되었고(물론 사파비나 카자르 왕조의 권위가 오스만을 견제했던 덕도 있지만), 유대인들은 하물며 무슬림과 대적할 엄두도 못 내었습니다. 이러던 게 지금은 삼면 전쟁 직전까지 왔으니.... (지금 우리는 북한 문제 때문에 관심도 없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중동 정세가 훨씬 심각합니다. 트럼프가 두루 신경을 쓸 여력이 없으니까 북한에 대해 상대적으로 너그럽게 구는 거고, 김정은도 이 점을 알고 지금이 그나마 유리하게 협상을 맺을 찬스다 싶었던 겁니다) 여튼 이 책은, 왜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인지" 실감 나게, 그것도 지도를 통해 독자들에게 납득시켜 주는 점이 좋습니다. (특히 이 책 p158 이하를 주의 깊게 읽어 보세요)

저희 때에도 동남아시아 역사를 (길게는 아니라도) 따로 배웠습니다만 당시만 해도 전문 연구 인력이 부족하여 지명, 인명 표기가 매우 어색했습니다. 이 책은 특히 현지어에 최대한 가깝게 표기하는 점이 두드러지게 돋보이고, 무엇보다 국립국어원에서 권고한 안(案)에 충실합니다. (예: 믈라카 해협, 사일렌드라 왕조 등) 저희 때에도 부남(扶南)이란 말이 교과서에 나왔더랬는데, 이 책에서는 "산(山)'이란 뜻이라고 역시 설명이 친절하네요. 전성기에 얼마나 이슬람 세력이 극성을 이뤘으면 믈라카 왕이 스스로 회교로 개종까지 했을까 싶은데 이 흔적은 지금도 말레이시아 정치, 종교 분포도를 보면 역력합니다. 그뿐 아니라 저 멀리 페르시아에 근거를 마련한 일 칸국 역시 몽골인들이 팔자에 없는 알라신까지 자청해 믿었고(이 사항은 1권의 p163 이하를 참조하십시오), 이 점은 투르크의 술탄들도 다르지 않았죠.



제가 개인적으로 이 책 통틀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제5장입니다. 제목이 뭐냐 하면 "팽창하는 중화 세계, 국가인가 문명인가?"입니다. 몇 년 전 큰 히트를 친 <진격의 거인>이 사실 일본인들의 중국에 대한 집단 공포를 반영했다는 분석도 있었지만, 아베 신조 현 총리대신이 저처럼 오래 집권하는 것도 일본 국민들의 대중(對中) 견제 심리가 크게 발동해서입니다(바꿔 말하면 일본 민주당 정권으로는 중국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역부족이라는 판단). 동양인 저자의 집필 체제치고는 좀 특이하게도 중국사가 맨마지막에 배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 조선에 대한 언급도 있고, 특히 조선의 어원에 대해서는 "아침 햇볕이 선명한 땅"이라고 하시나 ㅎㅎ 글쎄요. 여튼 일본의 건국 주체가 한반도를 거쳐 이주한 이들이란 점은 분명히 밝힙니다.

이 책 마지막 문단을 잠시 인용할까 합니다. ".. 중국은 현재 공산당이 일당 지배를 유지하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해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 사이의 모순(이 용어는 진보 진영 학자들이 쓰는 맥락과 완전히 같아요)이, 공산당이 내세우는 애국주의에 가려져 있어 향후 행방은 불확실하다." 이 문장만으로도 저자의 중립성, 공정성과 깊은 숙고의 내공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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