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사면초가 1
소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면서 한 번쯤은 인기가 많아지는 순간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그게 지금인가 보다."

연예인도 아니면서 왜 인기를 의식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튼 아이들은 자신이 학급에서 인기 있는 편인지, 보통인지, 아예 왕따에 가까운지 무척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공부 잘하거나 장차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갈 능력을 기르는 것보다 이게 더 중요한 듯하고, 왕따를 당하거나 부적응자임이 드러나면 인간적 가치를 모두 부정 당한 듯 괴로워합니다. 사실 그 나이에는 모든 체험과 감정적 반응이 버겁고 아프고 힘겹게 마련이겠으나, 이때 한번 큰 상처를 입거나 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좀처럼 회복이 힘들게도 보입니다.

이 웹툰(도서판)의 주인공은 여성 틴에이저이며, 이름은 "이여주"입니다. 그러니 여주가 "여주"인 셈이며, 고등학생으로 보낼 앞으로의 몇 년 동안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던 그녀는 잘생긴 네 남자가 한꺼번에 자신을 좋아하는 뜻밖의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 네 아이가 쌍둥이 형제들이란 건데, 그래서 저 제목에 나오듯 "말그대로 사면초가"입니다. "즐거운 비명" 같은 게 아니냐며 마뜩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겠으나, 좋은 건 좋은 것대로 결정(장애)의 순간이 괴로운 법이며, 누구에게는 환희를 안기겠으나 다른 이들(적어도 세 명)에게는 아픔을 주게 될 자신의 처지가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아직 순수한 영혼이라서 그렇겠으며, 어디서 세파에 찌들고 못된 것만 가려 배운 썩은 영혼에게는 당치도 않은 고민이나 갈등이겠습니다.

쌍둥이라지만 우리도 봐서 알듯 생김새도 다르고(만약 같다면 여주 등을 걱정하기보다, 밖에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엄청 곤란을 겪을 우리 독자들이 문제겠습니다) 어쩜 그렇게 성격들이 차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괜찮은 아이들이라 누굴 선택해도 행복할 것 같지만, 여주는 이 선택의 과정이 사실은 나(여주) 자신을 발견해 가는 과정임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됩니다. 누구와 함께 지내야 지금이나 먼 장래에나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겠으며, 그 와중에서 무엇을 얻게 되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네 아이 중 각자가 여주에게 잘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도저히 안 되는 게 있겠으니 말입니다) 꼼꼼히 따지는 게 보통 어려운 대목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행복, 만족, 즐거움, 보람을 위해서 삽니다. 여주(혹은 누구라고 해도)가 제 마음에 가장 드는 아이, 혹은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은 아이를 고르는 건 하나도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은 바로 이 미션을 어떻게 만족시키느냐로 그 성패가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설령 돈을 많이 벌고 출세 가도를 달려도 이 부분에서 실패한 사람은, 겉보기나 평판이 어떠하든 스스로 불행한 인생임을 자신부터가 부인 못 합니다. 그런데 어찌어찌해서 가장 내 마음에 드는 배우자를 만나고, 또 그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해도, 과연 그걸로 다일까요? 이 1권에서는 여주뿐 아니라 나비 등 여러 주변 인물들을 통해 "영리하게 사랑을 차지하는 것"의 가치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기적인 사람으로만 남지 않는 과제"까지 동시에 지적, 부각하고 있습니다.

p270을 보면 나비네 집에 "여장(!)"을 하고 들어간 사남이가 나비와 나누는 대화가 있습니다.
"넌 일남과 여주가 서로 사귄다고 했을 때 괜찮았어?"
"응, 난 착하니까."
이 말을 듣고 사남은 눈물을 쏟습니다.
"왜 울어?"
"난... 나빠서....."

세상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만큼 착한 사람, 때가 덜 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마지막으로 절망했던 때가 언제일까요? 돈이 없어서, 경쟁에서 패배해서, 비전이 없어서, 머리가 나빠서 자신이 미워질 때야 늙어 죽기까지 수시로 맞습니다만, "착한 사람이 아니라 나빠서, 못돼서" 내가 너무 싫어지고, 슬퍼졌던 때가 과연 얼마나 아득한 망각 속의 과거였는지. 우리가 진정 눈물을 뿜어야 할 때는, 세속적인 무엇인가를 놓치고 분해하던 그 순간이 아니라, "그 좋았던 내가 대체 어디로 가고 없지?"를 깨닫는 부끄러움의 시간이라야 할 겁니다.

나쁘다는 건, 특히 여기서는 "이기적인 것"을 뜻하더군요. 못난 인간은 때를 가리지 못하고 무작정 이기적으로 굴고, 이기적으로 구는 자신이 수준이 향상되었다거나 각성을 한 결과라고 엄청난 착각을 합니다. 사실 이런 인간은 구제불능이며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순정의 세계에 등장하는 많은 캐릭터들은, 그러지 말아야 할 때, 혹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을 때에 이기적으로 굴거나 그러기 직전인 자신에 대해 몹시도 부끄러워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정직하지 말자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마땅히 챙겨야 할 건 챙겨 가면서, 한편으로는 더티하거나 치사해지지 않고 언제나 근사함, 쿨함을 유지하는 것, 이게 그들이 원하는 경지입니다.

웹툰 연재 당시에 이 작품이 큰 인기를 끈 비결은 이처럼 뭔가 마음이 싸해지는 청순한 주제의 강조 말고도 깨알같은 위트가 있겠는데, 예를 들면 p272에서 가발(여장의 일부)이 훌러덩 벗겨진 사남이 나비의 엄마와 바로 마주쳐 (두 사람 다) 엄청 놀라는 장면입니다. 우리의 예상을 비껴가며 나비의 모친께선 "숏컷도 예쁘네?" 라는 말과 함께 어색한 상황을 마무리짓습니다(배려라기보다, 캡션의 해명대로 "정말 눈치를 못 채신 듯"). 이런 모든 "에피소드"를 일일이 네 컷 안에 장악해 넣은 솜씨도 정말 놀랍습니다.

"사실 내가 준 건데" 이는 마치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애서 주인공이 왕자를 구해 주고도 크레딧을 남에게 빼앗긴 채 말도 못하고 상황을 바라만 봐야 했던 대목과도 비슷합니다. 삼남은 생각만 가득할 뿐 전혀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연애 포함 모든 것을 책에서만 배운 타입입니다. 책으로만 배웠다는 건, 달리 말하면 제대로 배운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나 같습니다.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면 구태여 귀찮게 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존재까지 모르는 건 너무 서운한" 게 이 삼남의 안타까운 마음인데, 네, 참 그렇네요.

여주는 중반쯤에 마침내 여튼 "종합 점수가 높은(p206에 다른 누구의 입을 통해 이 표현이 나오죠)" 일남을 선택하는데, 말이 쌍둥이지 일남은 왜 자신만 생일이 다른지 내내 알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진실과 마주합니다. "앞으로 누가 너에게 상처를 주려 하거든...." 우산을 건네며 그녀가 해 주는 충고, 혹은 위안입니다. "공포를 잊는 데에는 과연 남 이야기가 최고인지" 수련회에서 낙오한 둘은 수다 끝에 지쳐 나란히 잠듭니다. p215의 이 장면은 마치 알퐁스 도데의 <별>의 결말을 보는 듯합니다.

챕터마다 이 순정만화의 분위기와는 전혀 안 어울릴 듯한 고사성어, 사자성구, 혹은 속담 등이 인용되어 제목을 장식하는 스타일도 재미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문예도, 가볍게 소화하는 장르에서 이런 반어적 장식을 갖다 쓰며 묘한 미학적 대비효과를 내게 하는 기법을 보곤 하는데, 한국 웹툰의 스타일링이 (그런 것들로부터 딱히 영향을 받았을 법하지도 않은데) 자체 진화를 거쳐 이 정도에까지 이른 사실에 다시 놀라게도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마트시티, 더 나은 도시를 만들다 - 4차 산업혁명이 만드는 새로운 도시의 미래
앤서니 타운센드 지음, 도시이론연구모임 옮김 / Mid(엠아이디)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게 만든다" 중세 시절부터 도시는 자유와 창의, 해방의 공간으로 기능했지만, 익명의 관계 속에 안면 모르는 다중이 한꺼번에 몰려 사는 만큼 부작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산업 혁명 이후로는 슬럼가의 증가, 범죄의 빈발, 환경 오염 등 심각한 부정적 요소들이 전면에 대두했죠. 이런 각종 어려움은 현대에 들어서도 근원적으로 개선되지는 않았으며, 노자나 루소의 가르침처럼 "자연으로 (결국) 돌아가"는 게 해답이 아니냐는 체념적 분위기까지 한때 널리 퍼졌습니다.

현대 도시 공학자들이 하나 둘 내놓기 시작한 해답은 사뭇 다릅니다. 오히려 도시는 시골보다 더 청결하고 더 쾌적한 생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며, 멀지 않은 장래에 이런 현대적 도시의 이점을 교외, 시골에까지 확장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비전입니다. 물론 경제적 편의와 문화적 체험을 두루 누릴 수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도시 생활의 변함 없는 장점이었습니다만, 맑은 대기와 깨끗한 물, 심지어 이동의 편의(교통 체증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까지 거론되는 건 선뜻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당연하다는 듯 이런 꿈 같은 비전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아 주장하며, 스모그나 범죄, 지옥 같은 출퇴근 시간 등은 머지 않아 극복될 수 있는 일시적 불편이라는 데에 거의 의견을 일치시켜 갑니다. 이런 희망적, 낙관적 전망이 가능한 건 다름 아닌 "도시의 스마트화"를 통해서입니다.

예로부터 문명은 큰 강 주변에 집중적으로 발달했으며, 번영하는 도시 역시 강가의 입지가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규칙적으로 자신의 현상을 관리, 유지하지는 않으며, 특히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하천에 올바로 대응하는 과제는 정치인이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한 필수 미션이었습니다. 첨단 과학을 총동원해도 가장 까다로운 최후의 난제로 남은 게 기상의 예측이었는데, 해마다 변덕스런 하천 수위 때문에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기도 한 리우에서는 IBM의 엔지니어 팀을 불러 들여 "강우를 예측하고 홍수 대응을 관리하는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시스템을 응용하여 묵은 난제를 해결하는 데에 야심적인 젊은 행정가들은 많은 정력을 쏟고, 이런 분야를 통칭하여 "스마트 프로젝트"로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책에서는 과연 모든 도시들이 저 휘황찬란한 도심에 몸을 숨기고 고답적으로 뽑아내는 해법에 과연 전적으로 몸을 맡겨도 좋은지에 대해 일말의 회의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IBM 등 영혼 없는(?) 다국적 기업이 뽑아내는 상업적 솔류션에는, 이 도시에 수십 년 거주해 온 이들만이 지닌 도시에 대한 애정이 전혀 포함되지 않으리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우려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측정하면, 그 측정하는 행위 자체가 대상을 변화시킬 우려가 있다." 물론 뉴턴 역학이 무리 없이 서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물리계에서는 지나친 호들갑이자 기우이겠습니다. 저자가 이 하이델베르크의 오랜 법칙을 새삼 거론하는 건, 도시에 대해 어떤 국지적 특효 처방을 적용해도, 이 처방이 장기적으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떤 부작용을 낳지나 않을지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도시 문제를 지나치게 기계적, 공학적으로 접근하는 건, 엄연히 삶과 생명의 공간에 대해 무정물에 대한 차디찬 메스를 들고 이리저리 냉혹히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이유에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도시(와 행정가, 유권자, 거주자들)의 고객인 기업들이, 융통성도 심장도 없이 판에 박힌 이기적 처방만을 고집하는 건 또 아닙니다. "모델은 모델일 뿐 일종의 계시 같은 건 아닙니다." 도시의 고질적 문제를 극복하는 데 만병통치약이나 처방 받는 양 순진하고 막연한 기대를 품는 시장님들에게, IBM에서는 오히려 자사 모델의 한계까지 명확히 설명하는 "책임 있는" 태도를 보입니다. 기업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거주자들과 함께 문제를 고민하는 이런 태도에서, 우리는 공학의 한계를 걱정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성과 소통, 공감, 희망의 싹을 새로이 발견합니다.

모델은 과거에도 도시 공학자들의 주된 연구 과제이자, 효율성과 주관적 효용을 동시에 추구할 채널이었습니다. 그러던 게 "미러 월드" 개념의 등장으로, 엔지니어들과 행정가, 정치가, 혹은 시민사회 운동가들은 보다 너른 규모에서 협업하고 최적의 아이디어를 수렴할 통로를 찾았습니다. 본시 "모델" 자체가 현실의 모사이며 추적이었습니다만, 이제는 이 한없이 정교해진 미러 월드가 오히려 현실을 능가하며, 현실이 오히려 미러 월드를 열심히 따라하는 지경까지 상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런 도구의 진화가, 도시의 스마트화를 담보하는 결정적 발판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시뮬레이션과 물리계가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의 진화에 촉매제 구실을 하는 구조는 도시 공학뿐 아니라 여타의 분야에서도 두드러지게 발전된 바 있습니다.

사실 "케이블 기술"은 광대한 영토에 고루 문화적 체험과 편의를 제공할 필요가 절실했던 미국에서 선도적으로 발전했으며, 벌써 1940년대와 1970년대에 지상파가 두루 닿지 않던 지역에까지 망을 확장함으로써 기술적 도약을 단계적으로 이뤄냈습니다. 이 역시 마냥 공익이나 공공재의 관점에서만 볼 건 아니고,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PPV 방식을 통해 현지인(미국인들)로부터 이윤의 한 푼까지 남김없이 거둬가는 철저한 상업적 행태를 보여 왔습니다. 경제학에서 이른바 가격차별화 기법을 통해 생산자 잉여를 극대화하는 방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자들이 치밀히 논증하여 그 구조가 밝혀졌습니다.

앞서 말했듯 망(網)과 소통 방식의 진화는, 기존에 전혀 다른 입장에 놓여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여러 전문가, 민간인, 대중 간의 이해를 큰 폭으로 촉진시켰습니다. 이제 전문가나 엔지니어들도 평범한 일반 시민의 욕구와 정당한 권익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그들이 도출하는 대안도 비인간적인 효용함수의 극대치가 아닌, 만인의 행복과 안녕과 배려라는 변수가 크게 작용하는, 보다 따스한 것들입니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어느 하나의 목표가 달성되면 그에 상응하는 비용,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으며, 설령 나선형 구조로 모든 목표가 천천히 상향 달성되는 경로를 밟는다 해도 모든 선(善)이 일거에 달성되기는 힘들다(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란 요행에 가깝다)는 쪽이었습니다. 미러월드 기법의 진화는 이런 통념을 보기 좋게 깨뜨립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만족이 가능하면, 효율적 지표는 하향할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전망은 그야말로 선입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중의 지혜가 모이고 모이니 참여의 쾌감과 보람이 높아질 뿐 아니라 오히려 양적 지표까지도 획기적으로 개선됩니다. 질과 양이 한 방향으로 동시에 발전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어디 있겠습니까? 스마트한 도시는 스마트하기에 더 쾌적하고 더 행복하고 더 높은 소득까지를 보장하는 유토피아와도 같은 공간으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옵니다.

세상은 우리가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기존의 장점을 훼손,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매력과 편의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역지사지의 마음가짐, 공존공생에의 합의, 전문가와 일반인이 서로 경계를 나누지 않고 좋은 아이디어를 함께 발전시키는 개방적 연대의식 등이 이런 스마트 유토피아의 미래상을 폭발적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종래 이런 책들이 아득히 멀리 남은 미래 시점에,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한 기술의 덕분으로 다분히 추상적인 설계도만을 제시했다면, 이 책은 이미 우리의 지척에서 벌어지고 성취되고 있는 모범 사례에 바탕했다는 점에서 확신과 영감을 줍니다. 나아가, 결국 사람 사는 누리를 발전시킬 근간은 기술보다는 열린 마음과 공감대, 인간적 가치의 지속적 추구라는 점을 독자에게 끊임 없이 환기시키는 점도 건설적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킬링 마케팅 - 그들은 어떻게 비용을 수익으로 바꾸었나?
조 풀리지.로버트 로즈 지음, 박상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엇을 누구에게 팔아서 지속적인 수익원을 구축할 것인가. 이 과제는 어느 직종 어떤 규모를 막론하고 기업의 절박한 존재 기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태까지 고객과 접촉하는 많은 채널과 방식, 효과적인 소통 수단들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이들 중 어떤 것은 불변의 진리로까지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가치 부여, 판단, 효능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했고, 어떻게 해야 매출을 증진시킬지 그 답도 (우리 눈에 보이지만 않는다뿐) 정해진 듯한데, 어떤 기업(혹은 개인)은 몹시도 잘나가고, 그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는 방법을 찾지 못해 무척이나 고전합니다.

"흥하거나 통하는 마케팅"의 해법은 예전보다 그 수도 늘어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라 저게 필요하다 등등 노하우도 사방에서 제시됩니다. 그러나 따라해 보면 기대만큼, 혹은 소문의 요란함 만큼 효과가 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분명 놓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홍성태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술은 흔해도 전략은 실종되었다. 지금껏 디지털 마케팅이라 부르던 것들은 구시대의 낡은 방법을 그저 온라인에만 슬쩍 얹은 데에 불과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 한다. 시대의 패러다임이 이미 바뀌었다." 아마도 홍 교수가 비판하는 것은, 책 혹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서 "어떻게 하면 클릭 수를 늘릴 수 있나" 같은 제목 하에 노하우랍시고 돌아다니는 여러 복잡한(그러나 매출로까지 유효하게 이어지지 않는) 노하우들이겠으며, 이는 우리도 의도하든 아니든 자주 만나는 잡다한 팁들입니다. 복잡하기만 할 뿐 정작 매출에 도움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비웃어 주고 넘어갈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처럼 장기간에 걸쳐 머리를 짜낸 결과가 왜 그것밖에 안 되었는지 진지하게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놓치고 있는 "본질"이, 이 인터넷 시대를 어느 지점에서 분명 관통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른바 TV, 신문 등 전통적인 대 매체에 의존하는 방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매스컴(일본식 용어죠), 매스 미디어 등으로 부를 때 "미디어(매체)"란 말이 괜히 쓰인 게 아닙니다. 채널이 그런 것들밖에 없고, 많은 대중("오디언스")을 끌어모으고, 혹은 장악하고 있으니 이들 채널에 목을 매는 게 당연했습니다. 인터넷의 대중화는 이 모든 환경을 바꿔 놓았는데, 많은 이들이 기존의 매체, 채널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을 저격해 주는 다양한 미디어로 관심이 이동하니, 거대한 미디어 기업은 영향력을 잃는 데다 광고 매출까지 줄어들어 휘청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려면 신문 몇은 구독해야 하고, 신문도 먹고살려면 광고를 실어야 하니 이런 것도 봐 줘야 한다는 상식 같은 건 이제 아주 낡은 통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케터 입장이 아니라 해도, 이런 낡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대상부터를 머리에서 지워야, 완전히 바뀐 시대에 적응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곳곳에서 주어 "우리"로 시작하는 문장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아마존에서 대시 버튼 하나로 종전에 주문했던 브랜드를 거의 그대로 재주문하고 있다(책 p79)" 같은 것들입니다. 과거에는 매체가 새로이 제시하는 다양한 브랜드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지금은 "가입 서비스"가 그 모든 번거롭고 소소한 갈등을 부르는 순간을 모두 대체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래도 개인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무엇인가를 주체적으로 결정하던 그때가 좋았다" 같은 향수의 자극은, 설령 그것이 논리적, 공리적으로 타당하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현실은 이미 송두리째 바뀌어 있으며 대세로 굳어졌고, 저자들은 그런 현실의 엄정함을 "보편적 우리" 같은 주어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들부터가 그런 현실에 엄격히 길들어 있는데, 과거의 고립된 지표와 기준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겁니다.

"우리는 오디언스를 설득하는 데 필요한 메시지를 극대화하면서, 그에 따른 빈도(수고)나 비용은 극소화해야 한다(책 p59)." 지난시대에 거대 미디어 기업에다 집행, 지불하는 광고비용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효과도 컸지만(컸다기보다는 다른 수단이 없으므로), 가격- 성능 비율을 따지면 과연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고개가 갸웃해질 때가 많았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미디어 기업도 쇠퇴하고, 효과적인 전달 수단을 디자인, 연출, 창조해 주는 대행기업(광고사 등)도 엄청 고전하는 중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전통적 방식을 고집하는 기업도 많고, 이럴 때일수록 저 상단의 원칙(무엇을 극대화하고 무엇은 반대로 극소화해야 할지의 원칙)은 여전히 또 강조됩니다. 시대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낡고 잘못된 강박은 버리고, 본연의 원칙은 그것대로 준수할 수 있습니다.

낡은 생각을 분명히 버려야 생존이 가능한데, 저자들은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은 원칙이 관통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고도 합니다. "새로운 미디어 비즈니스 모델과, 새로운 마케팅 비즈니스 모델은 완전히 일치한다." 즉, 미디어 회사(낡은 시대의 공룡이 아닌,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 그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기업)는, 1) 전통적인 미디어 상품도 제공하고, 2) 동시에 제품과 서비스까지 함께 오디언스에 권유, 판매함으로써, 한 방향이 아니라 양쪽에서 수익을 올리는 것입니다. 무슨 소린고 하니 광고나 구독은 그것대로 오디언스에 제공하면서 수입원으로 유지하고, 동시에 독자적인 서비스와 상품도 충성스러운(관심을 보이는) 고객에게 판매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쌍방향의 소비자, 구매층을 염두에 두고 관리하는 방식은 예컨대 구글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에서 이미 비즈니스 모델의 기본형으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네이버는 기업 상대로 꾸준히 광고도 유치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이트를 방문하는 일반 소비자들에게 열심히, 유무형의 서비스를 판매하려고 애씁니다. 이 책 저자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미디어와 마케팅을 일치시키자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점이 중요한데, 이런 비즈니스 모델에서는 이미 "마케팅"의 개념조차 경계가 허물어지는 겁니다. 소통 자체가 영업이고, 고안, 제조된 상품을 딱히 어필시켜야 한다는 종전의 강박이 해소되는 지점이죠.

대표적인 예로는 디즈니를 들고 있습니다. 디즈니는 미디어 회사일까요, 아니면 서비스나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일까요? 인터넷이 세상의 소통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기 훨씬 이전부터 디즈니는 이 양자의 영업을 병행해 왔습니다. 전혀 별개의 영역이었던 두 방식은 디즈니 사 안에서는 서로 수렴해 왔는데, 이것이 여타의 영화사나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흥망, 부침을 거듭하는 와중에서 유독 이 회사만 기복 없이 성공 가도를 질주한 비결입니다. 한때 잘나가던 UA 같은 곳은 영화 한 편을 잘못 발주하여 부도를 맞았고, 타임워너-CNN도 십 수년 전에 비해 사세가 위축되었으며, 루퍼트 머독의 폭스 등도 매각을 고려할 만큼 부진하다고 전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잘나가는 회사는 과연 디즈니밖에 없는데, 이는 1) 수익원을 두 방향의 오디언스에서 얻는 데다, 2) 효과는 극대화, 비용은 최소화라는 원칙을 매우 충실히 지켜온 덕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케팅이라는 별개 부서, 활동에서 낭비 요인이 없으니 이게 가능한 거죠.

"비슷하게 해서는 경쟁을 무너뜨릴 수 없다. 비슷한 것은 더 많은 비슷한 것을 만들 뿐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회사의 시간과, 그나마 아직 남아있는 오디언스의 시간을 모두 무너뜨릴 뿐이다." (p214)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어떻게 해야 두 방향의 활동을 수렴시키고 마케팅(이 자체가 이미 낡은 개념이지만)의 효율을 극대화(비용은 최소화)할 것인지를 논하며, 후반부에서는 "독창성"의 미덕을 강조합니다.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소통과 전달(수용까지도)은 독창적인 방식이라야 한다는 거죠.

"지금이 바로 콘텐트의 틈새, 그 틈새에서의 편집 미션, 그 차별화 여부 등을 진지하게 분석해 볼 때다. 이것이 대부분의 회사와 비슷하다면, 우리는 차별화에 실패한 것이다."

현재도 그렇고 그저 업계 평균만 하면, 남 하는 대로만 딱히 안 뒤처지고 따라하면 성공이라는 관점은 여전히 팽배해 있습니다. "중간은 가는" 미덕이 아직도 통념상 얼마나 높게 평가되는지 모릅니다. 저자들은 이런 생각 자체가 자사의 역량을 좀먹을 뿐 아니라, 고객의 소중한 시간까지 낭비시키는 엄청난 민폐라고 지적합니다.

"어떤 식으로건 관계를 맺는 건 도움이 되지만, 모든 구독자가 동일한 수준의 가치를 주는 건 아니다." (p223)

저자들은, 나의 메시지를 구독하는 계층에 따라 그 중요도를 달리 매기면서 어떤 구독자에 가장 큰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지 차별화 전략을 권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내가 가장 큰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오디언스는 이메일 구독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인쇄물(전통 수단)인데, 통제력 팩터는 높으나 발송비, 인쇄비 등이 발생하므로(이 책에서 내내 강조하는, 마케팅 비용 측면[배보다 배꼽이 더 큼]을 결코 간과하지 말라는 주문과 통합니다), 우선순위가 낮아집니다. 그 외, 1) 핀터레스트에서는 최종 소유권을 행사 못 하고, 2) 링크드인은 특정 피드만 업데이트 노출되며, 3) 유튜브에서는 "구독자 번(subscriber burn)"이라는 함정이 있고, 페북, 인스타 등은 계속 알고리즘을 바꾸기 때문에 우리(회사)에서 통제할 수 없다는 게 큰 약점입니다. 다만 여기서도 중요한 게, 아주 독창성이 높은 컨텐트는 이들 매체에서도 결국 높은 순위에 노출된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이런 크리에이터는 여기서도 통제권을 갖는 셈입니다.

마켓 3.0은 진화한다. 첫 단계는 거래 중심, 판매 성사가 목적이었으며 둘째 단계에서는 (고객과의) 관계 지속, 증진이 중요했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소비자를 "초청"해, 제품 개발과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p284)

이는 필립 코틀러의 말입니다. 맥락은 크게 봐서 서로 통하지만, 확실히 이 (과격할 만큼 참신한)책을 읽고 나서 저 유명한 언급을 다시 보니 뭔가 좀 낡았다는 느낌도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뭔가 동기부여가 확 되는 기분 부인 못 하지만, 당장 내일부터 실천해 보려 하니 주저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자들 말 대로, "시도한다고 손해 볼 게 무엇이겠는가?"가 또 맞습니다. 저자들은 이런 말로 책을 마무리짓습니다. "비즈니스의 미래에 진입한 것을 환영한다. 모든 것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미래에 먼저 한 발 들이지를 못하면 미래에 아예 합류할 수 없고, 종전처럼 남들 따라가는 방식으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채널이나 기법은 이미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정은 - 그는 과연 광기와 고독의 독재자인가?
고미 요지 지음, 배성인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북한 체제를 보며 언제나 느끼는 의아함은, 경제적 풍요를 정권 차원에서 달성해 낸 것도아니면서 어쩌면 체제가 저리 오래갈까 하는 점입니다.

심지어 천년 전 중국의 5대 10국 시절에도 권력의 3대 세습이란 매우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개인 재산은 피붙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손 쳐도, 공직이나 권력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국가에서 아무래도 명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또 난다긴다 하는 실력자들 사이의 알력을 피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그 세습이 (단지 부도덕하고 파렴치할 뿐 아니라) 매우 어렵습니다. 씁쓸한 현실이지만 안 한다기보다는 못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북한 김씨 가문의 3대 독재 지속이 일각에서 경탄(...)의 시선으로 주목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긴 합니다. 이번에 싱가폴에서 외무 장관, 전직 교육 장관이 김정은을 그처럼 극진히 대우한 것도, 싱가폴 역시 이현룡(리셴룽) 총리가 선대(리콴유)에 이어 2대째 전권을 맡는 중이라는 상황을 고려할 때 의미심장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권력의 장기 세습과 국민에 대한 폭압 정치를 경계, 지탄해야 하는 "당위(Sollen)"와는 별개로, 저러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같은 당연한 의문, 호기심을 자극하는 "현실(Sein)"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앞에서는 분개하는 듯, 신랄히 비판하는 듯해도, 권력 앞에 비굴한 게 자연스러운 생리인 법이라 막상 이런 이들을 마주하면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가 봅니다. 심지어 트럼프조차도 그리 험한 말을 늘어놓더니 정작 당사자를 만나자 그 볼품 없는 독재자 앞에서 다정한 척, 친근한 척, 악의 없는 척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제스처를 늘어놓는 걸 보면서 우리들은 혀를 끌끌 차게도 되었습니다. 여튼 이 자그마한 독재자에게, 우리가 보지 못한 뭔가가 있긴 있으니 저렇게 제 의사를 관철해 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잘 정리되고 중립적 시선에서 집필된 책을 읽고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은 그래서 필요합니다.

이 책은 1부에서 김정은 일가의 일탈적인 행태를 먼저 집중 조명합니다. 알다시피 북한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경제 제재, 단조로운 산업 구조가 그 부작용을 더 크게 야기한 흉년 등 자연 재해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으나, 어찌어찌 고비를 넘겨 가며 근년에는 핵무기, ICBM까지 개발하여 태평양 건너 세계 최강대국을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선대 김정일 치세에 없던 일이 벌어지니, 그간 정신이 불안정하다며 서방 언론(이 책의 저자가 속한 일본 미디어도 마찬가지)의 경계 어린 시선을 받아 왔던 김정은이지만 새삼 다른 시선으로 평가하게도 되었지요. 그러던 게 이번 남북 판문점 회담, 미북정상회담 등의 이벤트를 통해 "국제 정치 무대"에의 데뷔까지 이루면서 세간의 인식은 결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책은 그런 이미지 선전 정책에 너무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듯, 아직도 많은 수의 주민이 굶주리는 국가의 지도자 일가가, 그 유흥을 즐기는 용도로 얼마나 많은 금액이 지출되는지에 주목합니다. 정상적인 나라라고 해도 지도자가 향락에 국가 자원을 너무 많이 지출해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국제 원조를 받는 처지에서 마치 보란 듯이 지도자의 헛된 위신을 과시하는 데 그처럼이나 많은 예산이 쓰인다는 건 확실히 문제입니다. 이번 정상회담에도 그의 전용기 "참매호"가 노후와 성능 부실로 결국 중국 측의 도움을 받았으니 참 문제가 많습니다.

책에서는 김정은 특유의 "롤러 코스터" 인사를 비판합니다. 우리도 이번 정상회담 등을 통해 그의 실상이 본격적으로 공개되기 전에는, 제한적으로,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정보를 통해 누구누구가 어느 서열 어느 공직에 올랐다가 숙청되었다, 장기간 안 보이다가 다시 컴백했다 등등 아주 혼란스러운 모습을 봐 왔습니다. 다만 이런 인사 조치상의 변덕과 무원칙은 자유진영의 지도자라는 도널드 트럼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해임된 코미 전 FBI 국장은 아직도 투쟁 중이며, 틸러슨 전 국무 장관 역시 석연찮은 이유로 느닷 퇴장했죠.

아무래도 우리가 여전히 김정은에 대해 의구심을 풀지 않는 이유라면, 그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고사포를 동원한 극단적 수단으로 처형한 그 사건의 충격 때문일 겁니다. 손위 항렬의 인척을 그처럼 잔인하게 목숨을 앗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게다가 장성택은 개혁 개방을 주장하고 우리나 서방 측에 유연하게 나가야 한다는 성향이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우군(?) 하나를 잃었을 뿐 아니라 향후 저 체제가 어떤 진로를 틀지 장기 비전에 대해서도 큰 우려가 일기도 했죠. 그런데, 과거 덩샤오핑도 자오쯔양, 후야오방 등을 숙청했으나 결국 바른 길을 가긴 갔고 경제 개방도 이뤄 냈기 때문에 이 점에 한해서는 좀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김정은의 수완과 진정성이 덩샤오핑의 그것과 비교될 수 있을지는 별개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 전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이라면 말레이시아에서의 김정남 암살 사건이 있습니다. 저 장성택 처형과는 달리, 이 사건은 여튼 공식적으로는 누가 배후에서 일을 주도했는지, 배후가 과연 있기는 했는지가 아직 명확하게 판명난 건 아닙니다(범인이 누구인지는 우리 모두가 심증이 굳은 편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책은 왜 김정은이 배다른 형 김정남을 죽여야 했는지, 성장 과정에서부터 품게 된 적대감과 경계심의 동기, 근원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핍니다. 이미 매체를 통해 널리 보도도 되었으나, 생전의 김정일은 특히 이 아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품었다고 하는군요. 그가 외국으로 유학 갈 때 김정일은 마치 딸을 시집이나 보내듯 눈물을 하염없이 떨궜다고도 하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슬하에 둔 여러 아들들 중에서도) 김정남을 향한 정이 매우 깊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자신을 가장 여러 모로 빼닮은 아들이어서겠죠?). 헌데, 이런 이복 형을 지켜보는 김정은의 심기가 어떠했을지도 우리는 짐작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sibling rivalry란 정상적인 가정에서도 종종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특히나 재산가, 권력자의 소생들 사이에서는 피 튀기는 투쟁이 예나 지금이나 다반사로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의 구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들들, 이삭의 아들들, 야곱의 아들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게 옳다거나 자연스럽다거나 하는 결론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이 책 쓰신 분이, 몇 년 전 크게 화제가 된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를 쓴 바로 그 일본 기자분입니다.

"기쁨조"란 말은 우리 남한에서도 워낙 널리 알려져 마치 오래 전부터 한국어 어휘 속에 들어 있었던 듯 착각도 됩니다만 이 책은 그 시초를 1996년 북한 무용수의 망명 후 회견 중 발언에서 잡습니다. 그 전에는 이 말을 우리가 알지도 못했고 쓰지도 않았다는 뜻인데, 그런 지적을 듣고 보니 과연 그랬던가 싶기도 합니다. 어지간히 큰 (문화) 충격도 주었으니 그리 널리 퍼진 건데, 책을 보면 김정일 개인을 위한 인적 조직이라기보다 고위 당 간부들의 접대와 위안(...)에 널리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일부는 너무 유흥에 몰두하다 만취한 상태로 운전 귀가 중 사고를 내 크게 다치기도 했다는데 유독 북한 고위층 사망 원인 중 "교통사고"가 많은 이유(차가 얼마나 다닌다고)도 이것과 무관치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자인 제 개인 생각으로는 교통사고를 빙자한 처형, 암살도 그 중에 꽤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김정은의 부친 김정일에 대한 여러 비화, 혹은 일반에도 잘 알려진 에피소드들을 이 책은 잘 정리해 놓았더군요. 김정일은 우선 아버지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와도 일차(?) 권력 투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헌데 김영주는 이른바 주체사상에 대해 평소 큰 의문을 품었으며, 혹여 자신이 집권하면 이를 정통파 맑시즘으로 복귀할 의향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감지한 김정일이 제 부친에게 꼰질러서 결국 그는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는데, 1973년만 해도 김영주는 특히 대남 관계의 굵직한 국면에서 책임자로 전면에 나서는 등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김정일은 또한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도 일전을 겪었는데, 우리 한국인들도 잘 알지만 이 김평일이야말로 제 부친의 잘생긴 용모를 물려받은, 훤칠한 인상의 지도자감이었습니다.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의 소생인데, 여튼 이 위협적인 경쟁자를 김정일이 내내 살려두었다는 게 어찌보면 신기하기도 합니다. 우리 쪽에서는 "비교적 합리적 성향으로 보이는" 그가 대신 정권을 잡기라도 했으면... 하는 희망섞인 관측을 갖기도 했지만, 그 실상은 사실 형에게 꽉 쥐여 꼼짝 못하는 무기력한 왕족에 가까웠나 봅니다.

겉으로 보아 철벽 같기만 했던 김씨 체제이지만 사실은 이처럼 내부에서의 우여곡절이 많기도 했던 것입니다. 책에는 한때 퍼스트레이디로서 많은 외부 활동을 벌였던 김성애가 언제부터 2선으로 후퇴했는지, 그 배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언제 조용히 최후를 마쳤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한 정보가 실렸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역시 치열한 암투를 거쳐 권좌의 정점에 올랐고, 김정은 역시 제 목숨을 건 결단과 의지를 통해 현재의 자리를 거머쥔 것입니다.

김정남은 한때 미국이나 한국측으로부터 해외 망명 정부 구상의 중심에까지 거론되었고 그를 따르는 북측 인사들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허나 한국에서는 이후 "통일 후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적극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푸~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설레발도 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싶습니다. 아무튼 그 역시 "내가 권력을 잡는다쳐도 역시 권력 세습이다"라며 이런 "추대" 시도를 고사했다는 건데, 그 말을 문면대로 믿기보다는 왠지 패배자의 핑계나 현실 호도 같이 들립니다. 아무튼 생김새는 추해도 사람됨은 참 진실해 보였던 그가 혹여 권좌를 물려받았다면(가능성은 어차피 적지만), 훨씬 남북 관계가 쉽게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 봅니다.

오히려 김정은 7년 재위(?)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이 한국보다 높았다는 보도가 다 있을 만큼, 이 책에서는 "생각 외로 강했던" 북한 경제에 대해서도 집중 분석합니다. 허나 결론은 역시 "핵과 경제의 병진(竝進)은 불가능"이란 쪽인데 뭐 상식에도 부합합니다. 이 사람도 그런 현실을 알고 극한 곡예(brinkmanship)를 통해 판을 끝까지 키우고 패를 던져 보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아주 잘 풀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나 북한 정권의 실세들이나, 혹은 우리 모두나, 향후의 정국을 면밀히 주시할 필요가 있죠. 평화나 목숨을 걸고 도박을 벌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희정 그림, 서민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읽을 때마다 새롭다는 느낌입니다. 읽을 때마다 새롭고 아니고는 개인 차로 돌릴 수도 있겠으나, 이 작품을 즐겨찾는 이들은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역시 읽을 때마다 그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갈 겁니다. 이는 이른바 "나쁜 남자의 매력"과는 또 다른 류라 생각하는데, 어딘가 불쌍하다는 동정 비슷한 게 바로 그 이상한 끌림의 주된 원인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도리언은 사교계 데뷔 당시 그리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생김새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자기 확신이 부족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는 해도 그 이유를 스스로도 잘 모르는, 타인을 위한 관상용으로 고안된 전시품 같은 소외감에서 벗어날 줄 몰랐던 위태한 멘탈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머리가 비었고, 출신이 한미(p74 이하에 나오듯 귀천상혼 출신)했기 때문에, "인기, 선망"과 "자존(매우 유리한 조건이었건만)"을 일치시킬 수 없었지요.

"그만! 그만하세요. 너무나 당혹스럽군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뭔가 대꾸할 말을 찾고 싶은데.... (중략) 아니,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 (p44)

사실 여기서뿐 아니라 도리언은 아무 생각이 없을 때가 가장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 소년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도리언은 이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별안간 삶이,(쉼표는 제가 넣었습니다) 타는 듯 강렬하게 보였다. 자신이 불길 속을 걸어온 것처럼 보였다. 왜 진작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p46)

마치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뱀의 꾐에 넘어가 결국 부끄러움을 알게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었으면 도리언은 아마 미모를 급속히 잃게 되었을 텐데(음?? 누구 맘대로)....

"그레이군, 자네의 외모는 놀랍도록 아름답네. 찡그리지 말게. 사실이 그러니까(아름다움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말에 도리언이 반응한 듯). 그리고 미모는 천재성의 한 형태일세(헉!). 아름다움은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위대한 요소 중 하나야. ..... (중략)... 시간은 자네를 시기한 나머지 백합 같고 장미 같은 미소에 전쟁을 선포할 걸세... (하략)"

화가 홀워드는 이런 열렬한 확신의 표백을 그저 말에 그치지 않고, 신이 자기에게 따로 부여한 천재성을 발휘하여 화폭에 실천으로 옮깁니다. 말은 그러나 예컨대 도리언의 (아래) 표현처럼, 생각보다 위력이 강한 것이었습니다.

"... 음악이 우리 내면에서 창조한 것은 오히려 혼란이었다. 하지만 말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얼마나 명백하고 잔인하며 생생한 것인지! 세상의 그 누가 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얼마나 미묘한(앞에서 명백하다고 한 것과 대조하여) 마법이 들어 있는가!"

여튼 화가 바질 홀워드의 손에 내려진 (신의)축복과, 유일한 자존의 근거가 사람들이 선망하는 화사한(resplendent) 미모에 있게 됨을 비로소 깨달은 도리언의 간절한 희구(p58에 나옵니다)의 위력을 함께 받아서이기라도 한지, 홀워드 필생의 역작인 초상화는 그 주인공 도리언을 대신하여 나이를 먹습니다.

여기서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전 이 작품을 아동용 버전으로 초3때 처음 읽었는데, 그 서문에 보니 "... 어린이 여러분이 이해 못 할 만한 대목이 많이 나오므로 본서(어려운 표현인데)에서는 몇 군데를 고쳐서 소개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초상화가 나이를 먹고 사람은 그대로란 설정이 왠지 아이들 동화에나 나오는 설정같이 느껴졌으므로 아마 "고친 곳"이라면 여기이겠으며, 원작에는 "아이들이 이해 못 할" 훨씬 복잡하게 꼬인 "변신 스토리"가 나오거나, 아예 초현실적 요소가 제거된 진행이겠거니 짐작했더랬습니다.

근데 일 년 후 삼성세계문학 중 이 중편이 끼어든 권이 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하고 열심이 읽었더랬는데(故 이가형 譯 - 해문 추리소설 번역 참여로 유명한 그분이죠), 뭐 거의 그대로라는 걸 알고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지금 관점과 판단으로도 장담할 수 있는데, 제가 당시 읽었던 그 아동판은 성인 버전(이란 게 따로 없지만)이나 완역본과 별 차이가 없었고, 아마도 당시 역자들은 원작에 스며든 동성애 팩터를 우려하여 몇 대목(낯간지러워지는 대사 중 몇 구절)을 쳐낸 걸 두고 그리 말했던 듯합니다. 아니면 후반부에 등장하는 화학자 앨런 캠벨과 그가 사실은 그렇고그런 관계였다든지...

헌데 오스카 와일드의 실제 생이 어떠했건 간에, 이 작품에는 외견상 이른바 퀴어 요소가 (그 숨은 주제를 제외하곤) 거의 없으며, 도리언 그레이는 작중에서 잘 드러나듯 의심의 여지 없는 이성애자입니다(오히려 정도가 지나침ㅋ). 혹 서두에서 화가 홀워드와 헨리 경이 이 젊은이를 농락하고 버린 일에 한이 맺혀, 여성을 상대로 한 엽색 행각에 빠져들었다는 대목이라도 들어갔다면 모르겠습니다만(아주 제가 창작을 하는군요).

이 역본에도 잘 드러나듯 당대의 정치 현실에 대해 언급한 몇 대목은 있습니다. 이를테면 p69에 올버니의 파머 경을 두고 그 성향을 설명하면서 "... 정치적으로는 토리 당을 지지했는데 정작 토리 당이 집권할 무렵에는 '급진주의자들의 무리'라며 호되게 비판을 가했다" 같은 말을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따지면 "자유한국당 그것들 영 못 쓰겠더구만! 웬 종복 좌파들이 그렇게 많아?"라고 하는 식인데, 어느 정도 보수 성향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이무렵 젊은이들[출신 계층 불문하고]에게 토리 당이 인기 없었던 건 잘 알려진 사실)"... 이처럼 그는 영국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었지만, 정작 그는 영국이 망해가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 거 참. 이 책은 예언서(?)를 겸한 것이, 실제로 영국은 이 파며 경이 우려(!)했던 대로 완전히 망할 뻔했다가 1980년대 들어서야 기사회생을 했다는...

헨리 경도 그 피가 어디 안 간다고 보수적인 건 매한가지라서, p87 같은 데를 보면 "날씨를 제외하면 전 영국에서 어떤 것도 개선되길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물론 농담조로 한 말이지만). "요즘 영국 남자들은 기껏해야 돼지고기 가공업이나 벌이던 가문의 미국 여자들과 결혼하는 게 유행인데...." 같은 대목도 나오는데, 대표적인 게 윈스턴 처칠 경의 양친이었죠. 유행을 잘 따라서인지 그런 트렌드의 소생 중에 이런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으니(이 양반도 초년에는 휘그당에 몸을 두었다가 나중에 보수당으로 옮겼지요) 유행이 마냥 해롭거나 가볍거나 속물적이라고 비난할 건 아닙니다. 흠.

도리언이 일생을 두고 타락하게 된 게, 불쌍한 여배우 시빌 베인을 버리고 자살하게 만든 후부터인데, 이 책에도 나오지만 그녀 역시 귀천 상혼 소생(부모 스탠스가 바뀌긴 했습니다만)이었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이 대목에서 도리언이 제 스스로를 부정하고 파멸시킨 터닝 포인트로 상징을 삼았을지 모릅니다. 아직 열여섯 살이었던 남동생 짐(제임스 베인)은 도리언의 마음 한구석에 남은 마지막 정의감의 잔해이고 말입니다.

"오, 내 철부지 동생아, 그분은 신사이고 왕자님이셔. 너도 보면 그분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완벽한 분이라는 걸..." 정작 너무도 철이 없었던 건 물론 그녀였지만 말입니다. 어째서 여자들이란 한번 눈에 콩깍지가 씌면 이처럼 분별을 잃게 되는 건지. 이런 천하에 쓰레기 같은 놈팽이를 두고 말입니다. 시빌 베인이 말한 "이상형의 왕자님"이란 구절은 물론 원 텍스트의 "프린스 차밍"입니다. 제가 어려서 읽은 아동판에는 오히려 처음에 역주 한 번만 넣어 주고 이 "프린스 차밍"이 번역도 없이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덕분에 영어 공부도 했다는...) 프랑스어처럼 수식어가 피수식어를 뒤에서 꾸미는 구조로도 볼 수 있고, "차밍"이 그 프린스의 이름이라고도 새길 수 있죠.

"하지만 당신은 언젠가 책 한 권으로 나를 타락시켰어요. 전 그 일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해리, 누구에게도 그 책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책 한 권이 문제가 아니라 이 헨리 경 같은 놈하고 엮이게 된 자신의 운수, 아니 자신 속에 싹트고 있던 못된 씨알머리를 먼저 탓해야 옳겠습니다만 우리는 도리언 같은 새xxx한테 애초에 뭘 기대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압니다. 요즘 같이 책이 대량으로 인쇄, 보급되는 시절이라면, 설령 진짜 마력을 지닌 책이 있다손 쳐도 아마 대중의 "입" 앞에서 그 에너지가 15도로 희석되지 않을까요? 우리 전승 문학 <구지가>를 봐도, 여러 사람의 입이란 쇠도 녹일 정도라고 하니 ㅋ

마지막은 사람들이 "아주 초라하게 늙은 사내의 손에 끼어진 반지를 보고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인데, 제가 읽었던 아동판에서는 이처럼 원문에는 전혀 없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이 모시던 분인가요?"
"아뇨". 햐녀는 대답했습니다.
"우리 주인님은 저 초상화에 그려진 분처럼 젊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어떻게 된 게, 저는 그 아동판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더 듭니다. 아마도 그 각색하신 분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너무도 몰입을 한 나머지 아예 자기식으로 창작까지 한 듯한데(ㅎㅎ), 이게 오히려 더 원작의 유미주의 분위기를 잘 살려서 그럴싸해지는 결말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영원한 경의와 애모의 메시지도 잘 살고 말이죠. 또, 죽고나서 신원이 밝혀지면 가뜩이나 생전에 평판이 안 좋았던 그레이가 말 그대로 "유취만년" 신세로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이런 변형된 결말은 그 아름다움을 봐서 행해지는 마지막 "사면(pardon)"으로 볼 수도 있고 말입니다.

박혜정 작가님의 일러스트는 평소에 우리가 잘 알듯 날카로움과 퇴폐적 아름다움이 동시에 구현된 참으로 미묘한 그녀만의 스타일 덕분에, 혹시 이런 기획이 나온다면(아니면 팬 서비스 차원에서 혹시 그녀만의 각색판이 그려진다면) 최적의 작가겠다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이런 책이 나와서 놀랐습니다. 단, 일러스트가 좀 더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