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주가 월요일(6월 6일) 오후 12시 30분경 무지개 다리를 건넜습니다.

공주는 2002년 충남 공주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채로 발견되어 서울에 있는 한 동물병원으로 옮겨졌고, 그후 제가 입양을 했습니다. 공주에서 발견되어서 이름을 공주라고 붙였죠. 공주는 올해 19살로 저와는 9년을 함께 했습니다. 

마지막엔 진통제조차 듣지 않아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던 공주의 모습이 잊히지가 않습니다. 안락사만큼은 피하고 싶어 통증치료만 했는데, 그게 잘한 것인지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6월 5일 낮에 응급으로 동물병원에 다녀왔지만, 역시 진통제처방만 받았습니다. 그 약이라도 잘 들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게 너무나도 아팠고, 지금도 그게 제일 맘에 걸립니다.

어제 시골에 가서 가을이 옆에 공주를 묻어주고 왔습니다. 가을이에겐 공주 마중 좀 나와달라고 부탁했는데.... 가을이랑 공주랑 잘 만났겠죠?

지금 제가 이런 상태라서 5월말부터 블로그고 뭐고 할 기분도 안드는 상태로 지내왔습니다. 당연히 책읽기나 리뷰쓰기는 손에 잡히지도 않구요. 오늘이 벌써 수요일이지만 여전히 의욕이 없습니다. 하지만 힘을 내야겠지요. 아직 제 곁에는 나라, 꼬맹, 보람, 돌돌이, 이렇게 네 녀석이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우리 공주.
가을이랑 만났어? 언니가 가을이한테 우리 공주 마중 좀 나와달라고 부탁했는데..
공주가 무지개 다리를 건넌지 딱 사흘째인데, 언니는 아직도 실감이 안나.
집에 들어올 때마다 공주가 있을 것만 같은데...


 

우리 공주는 언니랑 함께 지낸 9년이 행복했을까?
언니는 공주 덕분에 이런저런 추억이 많이 쌓였는데... 고마워, 공주.

하지만 언니는 공주한테 미안한 게 더 많아.
좀 더 잘해줄걸. 좀더 예빠해줄걸.
그런 언니가 원망스럽지는 않았을까. 미안해, 공주야. 
언니가 공주가 많이 힘든 거 잘 몰라줘서, 정말 미안해.

무지개 다리 너머에 있는 그곳에서 공주는 더이상 아프지 않겠지?
가을이랑 잘 지내고 있으렴.

사랑하는 공주는 언제까지나 언니의 강아지.
언니는 언제까지나 공주의 언니야. 
다음 생에도 내게 와주렴, 사랑하는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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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0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메일 확인하다가 스즈야님 방명록에 남기신거 보고 달려왔어요. 가슴이 덜컹하는게, 요즘 뜸하던게 역시 무슨 일이 있으셨구나라는 생각에 얼른 알라딘 로그인하고 정주행 하던 웹툰도 때려치고 왔답니다. 아아, 정말 뭐라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말 힘드셨을 텐데...그런데도 방명록에 남겨주시고ㅠ 진짜 힘드실거같아요. 어뜩하죠.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저, 이러면 진짜 오지랖 넓은 것 같지만(아 원래 저도 이런 성격 아닌데...;) 그냥 말하고 싶은 상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스즈야 2011-06-12 00:10   좋아요 0 | URL
음.. 마음의 준비를 계속하고 있었다 해도 역시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더라구요. 그래도 가을이 보낼 떄와는 달리 편히 떠나란 말을 해줄수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해요. 마지막이 너무 고통으로 점철된 게 아닌가 하는 게 마음에 제일 많이 걸려요...
걱정과 위로의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힘이 많이 났어요.

2011-06-10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리뷰 쓰신 거 보니까, 조금 기운 차리신건 아닌가하고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상투적인 말 쓰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힘내셨으면 좋겠어요. 아자아자!

스즈야 2011-06-12 00:11   좋아요 0 | URL
힘들어도 언제까지나 슬퍼할 수만은 없어서 일어났습니다. 제가 풀죽어 있으니 남은 아이들이 제 눈치만 보더라구요. 안그래도 그동안 계속 공주에게만 매달려 있어서 애들이 제 손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예요. 얼마나 애교를 부리던지... 그런 모습 보면서 힘내기로 했답니다.
 
거인을 바라보다 -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
엘린 켈지 지음, 황근하 옮김 / 양철북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 바다 그림을 그릴 때를 생각해보면, 다들 쨍쨍 내리쪼이는 태양, 푸른색이 넘실대는 바닷물을 배경으로 그리고 큰 물고기, 작은 물고기, 수초, 바위, 불가사리, 문어를 바닷속에 그려놓고, 수평선에는 늘 고래를 그려넣었을 것이다. 고래의 경우 2/3쯤은 물에 잠겨 머리위로 분수를 뿜어내는 모습이 정형화된 고래 그림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바다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대개 이런 식으로 바다 그림을 그렸다. 물고기나 문어, 불가사리같은 경우는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어 그렇게 그렸다고 생각해도, 고래가 그렇게 물을 뿜는 장면을 한번도 보지도 않았는데 늘 그렇게 그렸다. 물론 상상의 모습은 아니다. 동물 도감이나 티비에서 방영되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늘 고래가 머리위로 분수처럼 물을 뿜어 올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렇듯 티비에서 본 모습이나 동물 도감에서 본 모습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좀더 추가하자면 동물원에서 쇼를 하는 돌고래나 영화에 등장해 사람과의 교감을 보여주는 범고래의 모습이 전부이다.
 
내가 고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육지와 바다 모두 합쳐 가장 큰 포유류란 것, 꼬리가 수직으로 뻗어나온 상어와는 달리 고래의 꼬리는 수평으로 뻗어 있다는 것, 포경산업으로 인해 수많은 고래가 학살당했지만, 지금은 보존차원에서 많은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 전설처럼 들리는 고래의 노래나 고래의 무덤 같은 것 정도다. 즉, 우리가 아는 고래란 바다 그림을 그릴 때 1/3 정도만 나오는 고래의 몸과 그때 고래가 분기공에서 뿜어내는 분수같은 물줄기 정도 밖에 없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래에 대해 마치 많은 것을 아는 듯이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엘린 켈지의『거인을 바라보다』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고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으로 고래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고래 보호 정책은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래의 생태와 습성은 어떠한지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풀어쓴 책이라 할 수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환경운동가, 생물학자인 저자가 바라보는 고래의 삶과 각각의 연구분야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이 바라보는 고래의 삶과 해양생태계 전반에 대한 문제에 대한 고찰은 우리가 얼마나 고래에 대해 무지했는지, 해양생태계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알려준다. 

고래는 그 큰 덩치만큼이나 활동하는 영역이 넓기 때문에, 그리고 물밖에 나오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생태학자나 생물학자들이 연구하기 어려운 대상 중의 하나이다. 실제로 고래가 어떤 식으로 교미를 하고 언제 어디에서 새끼를 낳는지조차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또한 어디에서 섭식활동을 하는지, 일년에 얼마나 이동을 하는지, 수명은 얼마나 되는지 등의 기본 연구도 거의 진전이 없다. 이는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수면 근처로 올라오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개 깊은 바닷속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향유고래같은 경우에는 심해에서 먹이 활동을 하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이 따라들어가서 그들을 연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육지 동물같은 경우에는 일정한 영역이 있기에 이동경로, 섭식활동, 평균수명, 교미와 출산 등 기본적인 연구가 쉬운 편이지만 바다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에 더욱 힘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고래 연구는 아직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수준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고 해서 고래의 생태가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략 80여종의 고래의 생태는 한 종의 고래조차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밝혀진 건 아니지만 이제까지 드러난 사실만 해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점이 많다. 예를 들자면 똑같은 범고래 종류라도 사는 곳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어떤 개체군은 이주성, 어떤 개체군은 상주성 등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갈라파고스 군도에 사는 다양한 핀치들 같다고나 할까. 핀치가 섭식활동에 의해 서로 다른 핀치로 진화해 갔듯이 고래 역시 다른 영역에서 살아가면서 그 환경에 따라 진화하고 있으며, 각 개체군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가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고래의 무리는 코끼리의 무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코끼리는 암컷 우두머리 코끼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계사회이다. 할머니 코끼리 - 엄마 코끼리 - 이모 코끼리 - 아기 코끼리 등으로 구성된 무리는 암컷 우두머리의 지혜와 경험이 생존의 관건이 된다. 고래의 경우에도 이런 습성을 볼 수 있었는데, 엄마 고래가 먹이활동을 하러 잠수를 하면 할머니 고래가 아기 고래를 돌봐주기도 한다. 동물들은 대개 자신의 새끼가 아닐 경우 거두지 않는다고 하지만 고래의 경우 무리간의 유대관계가 끈끈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대관계는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인간이 상아를 얻기 위해 경험많고 지혜로운 어른 코끼리를 죽이는 것처럼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한 포경산업으로 인해 거대한 고래들이 학살당해왔다. 지금은 포경 산업이 제한적으로만 허용되고 있지만, 해저 송유관, 해저 석유 굴착 사업, 수중음파를 이용한 군사 훈련, 어선과 관광선 등으로 인해 다치거나 죽임을 당하는 고래가 여전히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참치를 잡기 위한 선박은 쇠돌고래를 몰아 참치를 잡는데, 이 참치잡이때문에 희생되는 쇠돌고래도 많다. 어선에 쫓기다가 어미와 떨어진 아기 쇠돌고래는 혼자서 살아남지 못한다. 수유중인 어미가 희생된다는 것은 종족보존을 할 수 있는 가임기의 암컷들이 죽는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단순히 지금 어미와 아기 쇠돌고래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쇠돌고래들 역시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런 문제로 인해 돌고래 보호 참치 마크가 그려진 참치가 등장했으나, 실제로 참치몰이를 하면서 쇠돌고래가 얼마나 희생되는지를 어선에서 보고하지 않으면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절대 알 수 없는 것도 문제이다. 그건 쇠돌고래 보호를 위한 정책이 발효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쇠돌고래의 수가 증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참치잡이에 희생되는 쇠돌고래 문제외에도 또다른 돌고래 학살이 이루어지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우리와 가까운 나라 일본으로 일본 역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고래 고기를 먹는 나라이기 때문에 불법포경이 끊이지 않는 문제가 되고 있다. 예전에 티비에서 일본의 불법포경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의 대학살이었다. 죽임을 당하는 건 대부분이 돌고래였으며, 그 돌고래의 피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피바다라는 표현이 그냥 떠오를 수 밖에 없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일본의 또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일본은 수산물 소비가 많은 나라로 유명하다. 특히 참치나 고래 고기에 대해서는 속된 말로 환장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다랑어와 고래가 희생되고 있다. 그 결과 예전에 포획된 다랑어는 500kg에 달했지만, 지금은 100kg이 겨우 넘는 것이 대부분이다. 즉, 더이상 큰 개체들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큰 개체들을 차례차례 멸종시켜왔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다랑어만 그런 것은 아니다. 샥스핀때문에 상어 개체수는 급감했고, 제대로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낚시란 이유로 새치들이 거의 멸종단계에 와있다. 고래 역시 포경산업으로 인해 거의 멸종위기에 이르렀으며 그후 보호를 받아 조금씩 늘고 있지만, 어떤 고래 종류는 겨우 123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다. 야생상태에서는 적어도 5,000마리 이상은 되어야 미래가 보장된다고 가정한다면, 겨우 100여마리밖에 남지 않은 고래종류는 언제 멸종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해양생태계는 무한한 자원이 잠들어 있는 곳이 아니다. 인간이 필요 이상의 포획을 해왔기 때문에 향후 2~30년내에는 모든 어족자원이 준멸종상태에 들어간다고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까. 솔직히 두렵다. 인간은 지구의 주인도 아니요, 지구를 대표하는 유일한 생명체도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신이 마치 지구의 지배자인양 지구를 학살해왔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종들이 자연스러운 멸종 과정을 밟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인간의 개입은 자연스러운 멸종이 아닌 인위적인 멸종상태를 야기했다. 고래도 인간이 인위적으로 멸종시켜가는 생명 중의 하나이다. 포경산업이 있기 전에 이 넓은 바다에 몇 종의 고래가 얼마나 존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포경산업이 금지되고 고래가 보호를 받기 시작한 이후 고래가 조금 늘었다고 해서 멸종의 위험을 벗어났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거인을 바라보다』는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비밀스러운 삶과 고래와 관련한 해양생태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인간의 개입으로 인해 해양생태계가 얼마나 큰 위협을 받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지금처럼 공존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개발에만 집중하면서 생겨나는 제문제들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인간의 과도한 욕심이 계속된다면 앞으로는 고래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해양생물을 더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에 멸종된 수많은 생물들이 있음을. 그리고 그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인간의 욕심과 오만과 자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는 하나의 종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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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사랑 - 뉴 루비코믹스 920
시마지 글 그림 / 현대지능개발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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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고선 혹시 시대물이 아닌가 했는데, 시대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 교토이고, 그곳의 유서 깊은 화과자 가게란 설정이 마음에 쏙 들었다. 유서 깊은 가게, 란 것도 내가 아주 좋아하는 설정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3대를 넘어가는 가게가 거의 없지만, 일본은 꽤 많은 편인데다가 그 종류도 다양해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듯 하다. 

교토에서 만드는 전통 화과자인 쿄가시를 만들어 파는 가게 츠루마루야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가게이다. 선대였던 치히로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치히로와 치히로의 어머니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점장을 맡고 있는 카츠미는 치히로의 소꿉친구로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서 함께 살고 있다.  

치히로는 화과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몸도 약하고, 응석도 많다. 그런 치히로를 대신해서 가게가 잘 운영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카츠미이다. 늘 무뚝뚝한 인상이지만 일 하나는 똑부러지게 하는 면이 있어 치히로 역시 카츠미에게 응석을 부리고 마는 것 같다. 치히로의 응석은 사실 카츠미에 대한 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카츠미에게 있어 치히로의 응석은 자칫 부담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워낙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데다가, 선대의 유지도 있고 해서 그런지 늘 툴툴거리면서도 치히로의 응석을 모두 받아준다. 그런 카츠미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지도 못한채 끙끙 앓고 있는 치히로에게 큰 거래처 손님인 모리가 접근한다. 하지만 치히로는 카츠미를 대하는 것과는 달리 유연하게 그 자리를 넘기고 만다. 그러나 모리의 치근거림이 계속되고, 거래를 빙자해서 식사자리에까지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기고 마는데...

이 화과자 가게란 것이 옛날에는 어땠을지는 몰라도 확실히 요즘 세상에는 잘 맞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화과자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보기엔 엄청 예뻐도 맛이 너무 달아서 싫달까. 녹차같은 거랑 같이 먹으면 맛이 괜찮긴 하지만 여기, 내겐 무리~~) 주 고객들도 어느 정도 연령대가 있고, 이렇다 보니 8대를 내려온 츠루마루야 역시 이런저런 곤란한 점이 생기는 건 당연한 듯 하다. 게다가 모리가 꽤나 큰 거래처이다 보니 그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도 없고, 카츠미를 생각하면 그 요구를 물리치는 게 맞지만 그럴 수 없는 입장인 치하루의 고민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했다. 만약 그때 카츠미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보여줬더라면 아예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카츠미가 완전히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은지라 어쩔수 없어 하며 나가는 게 눈에 선했다.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카츠미에 대한 연심.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치하루의 선택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후계자이기 때문에 대를 이어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주변인들이 보기에 오랜 전통을 가진 가게의 대를 잇는다는 건 멋져 보이는 일일수도 있겠지만, 치하루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보니 어쩔 수 없이 얽매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렇다면 선대의 유지를 받아 점장으로 일하고 있는 카츠미의 경우는 어떨까. 치히로에 대해 거리감을 두고 있는 카츠미지만, 묘한 것은 카츠미가 만약 선대의 유지만을 따랐다면 이렇게 헌신적이지는 못할 것이란 거다. 이 두사람을 보면 너무나도 애틋하다. 특히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면...

본편의 이야기도 좋지만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를 담은 번외편도 좋았고, 고양이 야치요가 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설정도 참 좋았다. 특히 야치요가 이들의 사랑을 바라보며 애틋하게 여기는 부분이 정말 좋았다. <고양이의 사랑>은 한마디로 말하라면 너무나도 애틋해서 눈물이 한방울 톡 떨어질 것만 같은 그런 사랑 이야기였다. 

뒷편에 수록된 단편인 <에버 씬>은 <고양이의 사랑>에 등장해서 치히로에게 치근거리던 모리 아저씨의 이야기이다. 이 아저씬 그냥그런 에로 아저씨인줄로만 알았더니 빈틈투성이의 아저씨였다. 이거 완전 반전! 푸하핫, 이런 귀여운 아저씨였구나. 이 작품은 조카와 삼촌사이기는 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닌 모리 아저씨와 조카 료이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단계를 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료이치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 내고 있는 모리 아저씨의 딸 히요리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물론 모리 아저씨와 료이치땜에 히요리가 아파하는 건 아니고, 부모의 이혼때문에 아파하지만 어찌 되었든 어른들의 잘못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는 건 히요리 쪽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도 무겁지 않게 잘 섞어서 담아내는 게 참 좋았던 작품.

표제작인 <고양이의 사랑>은 소꿉친구의 사랑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서 그런지 성인이 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와도 소년들의 사랑처럼 느껴졌다면, 뒤에 수록된 <에버 씬>은 어른들의 사랑이란 느낌이 강했다. <고양이의 사랑>은 풋풋하면서도 애틋했다면, <에버 씬>은 격정적이면서도 애틋했달까. 두 작품 모두 매력적이라, 이 작가에 완전히 꽂혀버렸다. 다른 작품도 얼른 봐야지~~

아, 잊어버릴뻔 했다. 치히로가 입고 나오는 기모노가 참 예쁘긴 했지만, 밤에 유카타를 입고 있는 모습도 참 좋았다. 음. 역시 남자들의 기모노는... 섹시해. 모에롭기도 하지~~(푸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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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알파 8 - 신장판
아시나노 히토시 글.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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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벅적 화려했던 축제의 시간이 지나 먼훗날 저녁뜸의 시대라 불릴 시대를 살아가는 로봇과 사람들의 이야기,『카페알파 신장판』8권.

변화란 천천히 찾아오기도 하고, 갑작스레 찾아오기도 하는 법. 로봇인 알파의 삶은 느긋하게 큰 변화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도 작고 작은 변화들이 모여 그녀의 하루하루를 새기고 있다. 지난 여름 태풍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져버린 카페알파는 알파의 손을 통해 천천히 보수를 끝마치고 이제 신장개점을 앞두고 있다. 신장개점날, 카페알파를 찾은 코코네와 마루코. 마루코는 이상하게도 알파에게 조금은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전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또! 생글생글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인 알파는 이번엔 좀 참기 힘들었나 보다. 하고 싶은 말을 똑 부러지게 하고야 마는데.. 호오, 알파씨. 알파씨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군요. 하긴, 자신이 늘 로봇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면 할 수록 다른 이들과 거리감이 생길 뿐이니까. 그리고 알파가 아무리 느긋해 보여도 아무런 생각없이 살고 있는 건 아니다. 그녀는 변해가는 풍경과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매순간 기억 속에 새겨 넣고 있는 중이니까.

꼬치고기를 데리고 돌아다니는 아야세가 다시 이곳을 찾았다. 그새 많이 큰 마키에게 아야세는 제안을 하나 한다. 아직은 어리지만, 언젠가 마키도 이곳을 떠날 날이 오겠지. 마키가 부메랑을 던지는 연습도 그걸 위한 것일테니까. 아야세의 꼬치고기가 낳은 새끼 꼬치고기를 보면서 만든 마키의 작은 부메랑이 마음 속으로 성큼 다가온다.

타카히로는 점점 더 어른스러워지고 있다. 꼬맹인줄로만 알았는데, 이젠 운전도 능숙하게 하고 좀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한동안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알파는 타카히로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지. 타카히로 역시 자신을 기다려줄 누군가가 있는 이 마을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려준다는 건, 그 사실만으로도 돌아올 가치가 있다는 것이니까.

알파가 물을 찾으면서 돌아다니다 만나는 식물도 그렇고 아야세가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것들도 그렇고, 웬지 이 식물들은 인간의 문명이 번성했던 시대의 기억을 품고 있는 듯 하다. 건물 모양의 식물, 가로등 모양의 식물, 사람 모양의 식물. 사람들은 변화한 모습에 쉬이 옛것을 잊겠지만, 길은, 자연은 잊지 않나 보다.

『카페 알파』시리즈의 특징은 느긋함이란 것에 있어 이제까지의 변화는 느긋하기만 했지만, 8권에 들어서면서 변화의 바람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든다. 타카히로는 벌써 떠나버렸고, 마키 역시 언젠가 떠날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니까. 선생님과 주유소 할아버지의 모습은 변함이 없건만, 꼬맹이었던 마키는 어느새 소녀가 되었고, 소년이었던 타카히로는 한사람 몫을 하는 어른이 되었다.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나간다. 알파는 늘 그곳에서 떠난 사람을 배웅하고, 떠난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겠지. 변함없는 모습으로, 변함없는 미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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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속 고양이
카리 스마코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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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차이란 건, 나이대에 따라서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어린아이 때에는 한두달 사이에도 엄청난 차이가 보이지만, 조금씩 나이를 먹어갈 수록 그 갭이 적어지게 된다. 그 갭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건 역시 틴에이지 시절. 초등학생과 중학생,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차이는 엄청나다. 물론 고등학생과 대학생도 그 갭이 엄청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역시 초중고 시기의 1년만큼 크지는 않다. 나도 예전에 나이 차이가 꽤 많은 사람을 만난적이 있는데, 그때는 내 나이가 20대라 그런지 30대의 그 사람과 별로 나이차를 못느꼈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초등학교에 다닐때 난 젖먹이였단 결론을 내면...이거 장난 아닌 걸, 이런 생각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상자 속 고양이』표지에 보이는 고교생과 초등학생은 6살 차이가 난다. 어른인 내가 보기에는 고작 6살이지만, 초등학생과 고교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6살은 60광년정도쯤이나 차이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소심한 고교생 마츠이 카즈오는 등교길에 새끼 고양이가 들어 있는 박스를 발견한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카즈오는 옆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초등학생 키타하라의 간섭에 깜짝 놀란다. 무뚝뚝한 키타하라의 포스는 소심한 카즈오의 기를 눌러 버릴 정도였던 것이다. 고양이에 대해 마음을 쓰면서도 학교에 가야했던 카즈오는 하교길에 고양이가 버려진 장소로 다시 향한다. 그곳에 있던 건 삐뚤빼뚤 초등학생의 손글씨 편지. 그 편지의 내용에 따라 공원으로 간 카즈오는 다시한번 키타하라와 만나게 된다. 동물은 못키운다는 키타하라. 하지만 카즈오는 어린 시절 에츠코와 헤어졌던 기억이 떠올라 쉽게 남겨진 고양이를 데려 오지 못한다.

울적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카즈오는 부모님께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 말하고, 다시 공원으로 향하지만 이미 고양이가 들어 있는 박스는 비어있다. 사람들이 모두 데려간 것일까. 하지만 그 순간 다시 나타난 키타하라는 자신의 란도셀 안에 숨겨 놓은 고양이를 카즈오에게 건네주고 도망을 가버린다. 이렇게 아기 고양이를 입양하게 된 카즈오였다.

그후로 카즈오는 자꾸만 키타하라가 궁금해진다.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어 보이는 아이. 고양이를 보러 오라는 편지를 남겨두지만 어째 한 번도 안오는 것 같더라니... 어느 날, 카즈오는 자신이 학교에 있는 시간에 늘 고양이를 보러온 키타하라와 딱 마주친다. 처음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더니, 언제부터인가 키타하라가 자꾸만 보고 싶어지고, 키타하라의 행동에 두근거림까지!? 그애는 초등학생이라구! 게다가 그애랑 나랑은 6살이나 차이가 난다구! 카즈오는 자신의 마음에 혼란을 느낀다. 한편 학교 선배의 대시를 받고 있는 카즈오는 선배의 태도에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혹시 난 그쪽!? 이란 고민을 하는 것이겠지.

이 작품은 카즈오와 키타하라, 카즈오와 선배의 이야기로 나뉘어 진행된다. 초등학생에게 두근거리는 카즈오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불편한 내용이 될 여지가 많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아마도 카즈오가 좀 답답한 성격이라 그렇겠지. 맥빠질 정도로 답답한 녀석이랄까. 게다가 소심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그렇게 위화감이 들지는 않는다. 한편 선배와 카즈오의 이야기는 고교생 사이의 이야기라 그런지 좀더 매끄러운데, 선배와의 관계에서 카즈오는 답답할 정도로의 쑥맥에 눈치없는 녀석이다. 선배의 행동은 분명 흑심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데 눈치를 채지 못한달까. 아니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키타하라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으니... 선배와의 관계가 묘하게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카즈오는 키타하라에 대해 죄책감을 더욱더 많이 느끼게 된다. 그도 그렇겠지. 선배가 자신을 보는 눈으로, 자신이 키타하라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땅속으로 숨어 들고싶기라도 하겠지. 이렇게 되다 보니 카즈오는 키타하라에게서 스스로를 멀리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키타하라는 전학을 가고 마는데...

이렇게 끝날 수는 없지. 6년만에 키타하라가 돌아왔다. 멋진 고교생으로! 카즈오는 23살, 키타하라는 17살. 키타하라의 나이는 카즈오가 키타하라를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다. 어느새 카즈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버린 키타하라, 그리고 더 남자다워지고 더 멋져진 키타하라. 키타하라의 고백은 '두근' 거릴만큼 멋졌다. 와우. 어린 꼬마가 어느새 남자가 되었구나. 6년이나 되는 나이차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고작 여섯살 차이이다. 좀더 성장하면 그 차이도 희미해지겠지. 두 사람의 마음만 변하지 않는다면...

번외편인 <그 사이의 6년간>은 없는 게 더 나았을지도. 갑자기 카즈오가 변태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 좋았는데, 이건 아니잖아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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