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ko.nametests.com의 아이템들이 흥미 있어 자주 이용한다. 반신반의하게도 하고 흥미를 끄는 요소도 있는 가운데 종종 기막히게 하는 면도 있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반적인 성격 특성을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바넘 효과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볼 수 없는 것들도 꽤 있다. 오늘 마주친 아이템은 “당신을 성경의 인물에 비유하면 누구와 같을까요?“이다. 역시 흥미 만점의 것이어서 그냥 갈 수 없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 속 누구를 좋아하거나 이상시 또는 동일시하기나 하고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뒤로 하고 답을 구한 결과 남자인 내게 뜻 밖에도 살로메라는 여자가 나왔다. 결과 아래에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똑똑한 여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성경에는 두 명의 살로메가 나온다.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 살로메, 세례 요한을 처형하는 데 직접적 원인이 된 살로메가 그들이다.


이복형과 이혼한 헤로디아와 결혼해 세례 요한의 비난을 받았지만 민심이 두려워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감옥에 가두어 둔 헤롯은 연회에서 의붓딸인 살로메가 춤을 추자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은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 쟁반에 받쳐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고 헤롯이 이를 수용한다.


살로메는 주로 예술작품에서 애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묘사된다. 헤롯은 로마제국이 유대를 간접 지배하기 위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한 자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헤롯은 잔인하고 음흉한 광기어린 군주였지만 도시를 건설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유대의 경제적 기반 확충에 힘쓴 선견적인 통치자였다. 헤롯이 구세주 예수를 죽이기 위해 유아들을 학살했다는 성경의 이야기는 근거가 불확실하다.


어떻든 그림에는 예수의 무덤이 아닌 헤롯, 헤로디아 등으로 보이는 인물과 살로메가 있는 장면이 연출되어 있으니 살로메는 헤로디아의 사주(使嗾)를 받아 세례 요한을 죽이게 한 그 살로메가 분명하다. 물론 성경은 살로메란 이름을 기록한 대신 헤로디아의 딸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서, 헤롯과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왕이 소녀에게 말하였다.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내가 들어주마.’(마가복음 6:22)처럼.


살로메는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감으로 작용했다. 쥴 마스네의 오페라 ‘헤로디아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헤로디아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처럼. 그림으로는 앙리 르뇨(Henri Regnault: 1843 - 1871)의 ‘살로메의 춤’,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 1490 - 1576)의 ‘세례 요한의 머리와 살로메’, 로비스 코린트의 ‘살로메’ 등이다.


이 가운데 티치아노의 ‘세례 요한의 머리와 살로메’가 눈길을 끈다. 살로메의 미모가 출중(出衆)하고 로마의 도리아 팜필리 궁전(Plazzo Doria Pamphilj)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로메를 이상적인 미(美)의 전형으로 생각한 타치아노는 몇몇 다른 그림들에 그녀를 등장시켰다. ‘거울과 함께 하는 여인‘, ’허영‘, ’성(聖)과 속(俗)의 사랑‘ 등...


도리아 팜필리란 이름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비로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인 QVL(Quella Vecchia Locanda)의 ’빌라 도리아 팜필리(Villa Doria Pamphili)'란 곡에서 만날 수 있다.(참고로 Quella Vecchia Locanda의 뜻은 저 낡은 여인숙이다.) 빌라 도리아 팜필리는 현재 이탈리아 총리의 전용 영빈관(迎賓館)으로 쓰이고 있다. 정리하면 플라초 도리아 팜필리는 미술관, 빌라 도리아 팜필리는 영빈관이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 - 1610)도 살로메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는 살로메’이다.(이 그림을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 어머니인 성모의 무릎에 놓인 예수를 그린 ‘피에타’와 대조적인 그림으로 보았다. 전자가 세속적이라면 후자는 성聖스럽다.) 귀도 레니(Guido Reni: 1575 - 1642)도 살로메 그림을 그렸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움켜쥔 살로메'이다.


티치아노, 카라바조, 레니 모두 팜필리 미술관의 주요 화가이다. 세 화가가 그린 살로메는 조금 또는 많이 다르다. 티치아노의 살로메가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이 세 화가들 중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인물은 카라바조이다. 물리학자 레오나르도 콜레티는 카라바조가 그린 ’바울의 회심(回心)’을 예로 들어 막스 플랑크가 단행한 개종(改宗)에 비유될 행동을 설명한 바 있다.


콜레티는 이렇게 말한다. “물리학의 역사를 보면 모든 물리학자들이 실제로 개종을 할 수 있는 능력 그러니까 바로 플랑크처럼 자신의 이론을 포기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든 것은 아니“라고.(‘명화로 보는 32 가지 물리 이야기’ 68 페이지) 흑체(黑體) 복사(輻射)와 관해 플랑크는 복사가 연속적인 값이 아닌 특정 값을 갖는다고 봄으로써 즉 자신의 기존 이론을 포기함으로써 에너지는 근소 범위에서 변화하고 그 범위도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양자론(量子論)의 기초를 세웠다.


카라바조는 한편 백상현 교수의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에서는 매너리즘의 신비주의에 대립하는 상당히 직접적인 그림을 그림으로써 매너리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화가로 설명되었다. 성스러운 인물도 범속하게 그린 화가가 카라바조이다. 레오나르도 콜레티가 그림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백상현 교수는 그림의 기법에 초점을 둔 것이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물리학자와 예술학을 전공한 정신분석학자의 차이인가?


이제 카라바조가 매너리즘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다는 설명을 듣고 살로메를 그린 그림을 비교하면 티치아노와 카라바조의 그림에 나타난 살로메의 미(美)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티치아노의 살로메는 아름답고 요염한 반면, 카라바조의 살로메는 범속하고 남성적이기까지 하다. 사실적 재현의 전통에 반기를 들고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에 따라 예술작품을 구현한 예술 사조를 말하는 매너리즘은 만질 수 있고 인식 가능함을 의미하는 '양식(manner)'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maniera'에서 나왔다.


흥미로은 것은 박우진 학예연구사의 ‘미술, 과학을 탐하다’에 나오는 카라바조에 대한 설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성(聖) 도마’를 설명하며 17세기 로마의 시민들이 너무나 사실적인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며 깜짝 놀랐다고 덧붙인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실제 손으로 만진 것 같은 촉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카라바조의 어떤 면이 매너리즘에 대립한 그림을 그리게 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카라바조 개인의 독특함이 그런 점을 이끌었지만 시대적 성숙도도 한 몫 했으리라 본다면 너무 도식적일까? 아니 카라바조를 잘못 평가하는 것일까? 카라바조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주요 화가이다. 일그러진 진주라는 말에서 온 바로크는 카라바조를 잘 설명하는 듯 하다. 카라바조의 그림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르시소스‘이다. 리처드 체식(Richard D Chessick)의 ’자기 심리학과 나르시시즘의 치료‘의 표지를 장식한 인상적인 그림이다. 이 그림은 탄식하는 나르시소스의 면모를 절묘하게 표현해냈다.


나르시소스는 물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사랑하는 이룰 수 없는 소망으로 좌절해 죽은 신화 속 인물이다. 우리는 카라바조에 대해 잘 모른다. 틸만 뢰리히의 ’카라바조의 비밀‘(소설), 김상근 교수의 ’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 질 랑베르의 ’카라바조‘, 로돌포 파파의 ’카라바조: 극적이며 매혹적인 바로크의 선구자‘, 윤익영 교수의 ’카라바조‘, 로사 조르지의 '카라바조 : 빛과 어둠의 대가’, 프란체스카 마리니, 레나토 구투소의 ‘카라바조’ 등 출간된 많은 관련서들 가운데 골라 읽어야겠다.


살로메가 내게 제시된 것은 의외이지만 놀랍지 않고 어느 면 만족스럽기까지 하다. 그녀의 똑똑함이 마음에 들고 미모도 그렇다. 당연히 나는 카라바조의 남성적이면서 범속한 살로메보다 티치아노의 아름다운 살로메가 마음에 든다. 가끔이지만 wanna be와 fall in love 사이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나는 살로메가 내게 제시된 것이 만족스럽다. 오버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성의 내면에 자리한 이브와 다른 릴리스가 생각난다.


참하고 순종적인 이브적 본능과, 모성애를 거부하며 쾌락적, 적극적인 릴리스적 본능....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졌다면 릴리스는 아담과 대등하게 흙으로 빚어졌다. 릴리스(Lilith)는 유태 신화에 나오는 여성으로 기원 전 3 - 5세기에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 주요 인물로 형상화되었다. 릴리스는 여성 데몬이다. 존 콜리어(John Collier: 1850- 1934)가 그린 릴리스를 한 번 볼 것.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 야성(野性)과 여성성(女性性)의 행복한 결합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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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크라의 힘 - 내 안에 잠든 근원적 에너지를 깨우는 명상법
스와미 사라다난다 지음, 김재민 옮김 / 판미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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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는 가깝고도 낯설다. 내가 관심을 두는 불교와 관련짓는다면 가깝지만, 어렵고 힘든 호흡법, 기이한 자세 등을 감안하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붓다가 요가 수행자(요기)였고, 불교의 철인들이 요가(yoga: 유가瑜伽))라고 불리는 원초적인 선정(禪定)의 수행에 전념했다는 일지 스님의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중 한 구절(180 페이지)을 참고하면 요가가 불교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지 스님은 위파사나는 요가 실천법의 하나라 말씀하신다. 요가를 정신과 육체의 결합 정도로 알고 있는 나에게 상당한 관심거리로 다가오는 말이다. 불충분했을망정 나도 위파사나를 했었기에 넓은 의미의 요가 수행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번 읽은 김혜나 작가의 ‘나를 숨쉬게 하는 것들’에 나와 있듯 관건은 호흡법이다. 호흡법의 중요성은 ‘차크라의 힘’을 쓴 스와미 사라다난다의 ‘호흡의 힘’을 통해 알 수 있다. ‘차크라의 힘’은 차크라를 중심으로 요가를 쉽고 상세히 설명한 책이다.


차크라는 에너지적 신체인 미세 신체 내에 에너지 통로들이 교차하는 곳에 존재하는, 생기 에너지로 이뤄진 강력한 소용돌이이다. 우리 몸에는 일곱 개의 차크라가 존재한다. 차크라들은 불균형한 상태가 되기 쉬운데 이로부터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중요한 것은 차크라들은 감정과 생각이 물질적 신체에 영향을 주고, 물질적 신체도 감정과 생각에 영향을 주는 메커니즘이라는 점이다. 전화 교환국처럼 기능하는 차크라들은 뇌의 뉴런들이 신호를 주고받음으로써 활발하게 소통하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인도에 차크라가 있다면 중국에는 단전(丹田)을 비롯한 혈(穴)이 있다. 그런데 최근 읽은 바에 의하면 붉은 밭인 단전은 자궁이기에 남자에게는 해당하지 않지만 자궁이 있는 부위를 어림잡아 남자에게도 단전이 있는 것으로 친다고 한다.(2015년 3월 16일 한국일보 허담 한의사 글) 그 단전에 해당하는 차크라는 어떤 차크라일까? 스와디스타나 즉 천골(薦骨) 차크라일 것이다.


저자는 차크라 명상을 시작하기에 앞서 에너지 센터들을 관념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직접 느껴볼 것을 주문한다. 차크라에 의식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 흥미로운 것은 차크라에 따라 명상으로 발달되는 것들이 다르다는 점이다. 물라다라(뿌리) 차크라는 마음의 안정, 스와디스타나(천골) 차크라는 창조의 충동과 흐름을 따르는 능력, 마니푸라(태양신경총) 차크라는 적응하고 변화하는 능력, 아나하타(심장) 차크라는 연민과 자비, 사랑하는 능력, 비슛다(인후) 차크라는 창조성, 소통 기술,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는 능력, 아즈나(미간) 차크라는 지성과 직관, 사하스라라(정수리) 차크라는 영적 통찰력과 깨달음 등이다.


차크라를 알기 위해서는 하타 요가를 알아야 한다. 고대 이래로 차크라 명상은 하타 요가의 일부였다. 정신의 완성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신체의 수련을 강조하는 하타요가는 정화방법, 호흡조절, 아사나(체위) 등을 강조한다. 세 종류의 신체가 있다. 물질적 신체, 아스트랄(미세) 신체, 종자로 된 원인적 신체 등이다. 원인적 신체에 과거 행위의 결과들인 카르마와 과거의 삶들로부터 전해진 모든 미세한 인상들이 축적된다.


미세 신체의 통로들이 나디이다. 7만 2천개의 나디 중에서 오직 세 개만이 차크라 명상에 연관된다. 척주(脊柱)의 왼쪽으로 흐르는 이다(Ida), 오른쪽으로 흐르는 핑갈라(Pingala), 척주로 추정되는 중앙 통로로 흐르는 수슘나(Sushumna) 등이다. 이다(Ida)가 달과 여신 삭티로 상징되고 여성, 차가움, 능동적 음(陰), 침착, 내향적, 통합적, 감정적, 주관적, 비언어적, 공간적, 직관적인 특징을 지닌다면 핑갈라(Pingala)는 태양과 남신 쉬바로 상징되고 남성, 따뜻함, 수동적, 양(陽), 흥분, 외향적, 분석적, 이성적, 객관적, 언어적, 수리적, 논리적인 특징들을 지닌다.


호흡이 양쪽 콧구멍으로 고르게 드나드는 유일한 때는 명상을 하는 동안 곧 호흡이 중앙 에너지 통로인 수슘나로 들어갈 때다. 쿤달리니는 어머어마한 잠재적 에너지의 원천이다.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면 신비로운 체험이 가능하다. 먹기 명상이 있는 것도 특이하고 여러 어려운 아사나들도 흥미롭다. 한의학에서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則不痛 不通則痛)이란 말을 한다.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말이다.


차크라 명상은 통즉불통 불통즉통의 담론이 더 구체화되고 전문화된 것 같다. 본문에 소개된 여러 아사나들은 우선 기이하게 여겨진다. 물론 기이함이 목적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 그렇게 기이하게 보이는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다. 얀트라 명상이 있다. 설명(용어풀이)에 의하면 얀트라는 신비한 도형 또는 기하학적 상징이자 우주와 그것의 축소판으로서 인간의 신체 층위와 에너지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도상(圖上)이다.


본문에는 각 차크라에 해당하는 아사나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틈나는대로 펴보며 따라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이든 눈으로만 익히거나 머리로만 익히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몸으로 익히는 것이 최선이다. 옴 명상도 있다. 진동과 관련 있는 이 명상은 잠재적인 심령적, 정신적 힘이 깨어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슛다 에너지를 위한 요가 아사나편에 내 눈길을 끄는 것이 나온다.


어깨로 서기 자세인 사르방가사나, 쟁기자세인 할라사나 등이다. 평소 하는 것들이다. 아즈나 에너지를 위한 요가 아나사에 반물구나무서기 자세가 있다. 우주적인 잠인 요가 니드라(잠)는 편안한 자세로 눕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시르샤사나 즉 물구나무서기 자세가 나온다. 하타 요가의 정수(精髓)라고 한다. 통찰력과 직관력의 명료성을 높여준다, 이 자세는 내가 가끔 취하는 자세인데 머리가 아프거나 어지러울 때 어떤 효과를 보이는지 알고 싶다. ‘차크라의 힘’은 요가를 상세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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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약 집을 짓는다면 - 후암동 골목 그 집 이야기
권희라.김종대 지음 / 리더스북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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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華川)에 한옥 학교가 있다. 내 형편을 생각하면 가입을 망설이게 되는 목수 양성 학교이다.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목수(木手)의 길은 목수(木修)의 길이며 숲길을 걸어들어가 홀로 깊어지는 것”이라는 문구가 생각을 유도한다. 내 서재에는 ‘한옥 짓는 법’이란 책이 있다. 구입한 지 5년이 되어 부분 부분 탈색이 된 책이 내 꿈의 퇴색을 알려주는 듯 하다. 물론 아직 퇴색은 아니고 유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건축, 공간, 서재, 마당 등을 키워드로 한 책들을 꽤 읽었다. 요즘 우리나라의 집 사정은 상당한 격랑과 침체가 공존하는 듯 하다. 1인 가구가 많은 현실에서 회재(晦齋) 이언적의 독락당(獨樂堂)이 얼핏 대비되어 생각된다. 홀로, 고독함을 즐기는 집이지만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1인 가구와 독락은 너무 다르다. 우리는 어느덧 집 크기를 행복, 재산 등과 등치시켜 생각하곤 한다.


협소주택(狹小住宅)이란 개념을 생각해 보자. 집을 지을 수 없을 만큼 좁은 땅에 최상의 기술력과 디자인을 동원해 공간 활용도를 높인 주택을 말한다. 공사비가 저렴하지 않다. 끊고 버리고 떠나라는 의미의 단사리(斷捨離) 운동이 집은 그대로 둔 채 소비 또는 소유를 줄이는 것이라면 협소주택은 집 자체를 작게 하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물론 공간 활용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만약 집을 짓는다면’은 이렇게 협소 공간이란 개념을 주요하게 인지시키는 책, 획일적인 아파트에서 아이를 구출하려는 계획에 따라 골목으로 이루어진 동네에 집을 짓게 된 부부의 책이다. 아내는 실내 건축 디자이너이고, 남편은 영화 프로듀서이다. 부부는 불필요한 기름기를 뺀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보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자신들의 집짓기 프로젝트는 이제부터 시작이라 말한다.


그들이 지은 집의 이름은 디자인 하우스이다. ‘우리가 만약 집을 짓는다면’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구성을 취했다.(본문에는 희노애락이라 나오지만 정확한 것은 희로애락이다.) 부부는 쾌적하고 편리할 줄만 알아 살기 시작한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서의 생활이 골칫덩어리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부는 아파트의 획일성과 무작정의 학원 교육을 불편해 하는 의식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쾌적한 환경을 찾아 힘든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집은 사는 것이 아닌 사는 곳이라는 말이 해당되는 사례이다. 부부는 자신들이 지은 집을 크래프트 홈으로 만들어 갔다. 집을 사람과 문화와 음악으로 채워간 것이다. 이런 집은 당연히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니라 정체성이 반영된 공간이 될 수 밖에 없다. 책을 읽으며 고(故) 김현 평론가의 ‘두꺼운 삶과 얇은 삶‘이란 글을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아파트에서의 삶은 인위적이고 표면적인 것만을 중시하는 얇은 삶이고, 땅집에서의 삶은 자연적이고 정신적인 것의 가치를 중시하는 두꺼운 삶이다.


사실 집, 하면 투기, 아파트 공화국, 폭력적 재개발, 젠트리피케이션 등의 부정적인 개념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부부가 정착하기로 마음 먹은 곳은 후암동이다. 몇 년 전 언론인인 서화숙 님의 ’마당의 순례자‘란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선택한 곳은 부암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후암동을 부암동으로 착각했다. 부암동은 서울의 이색 공간이라 할 만큼 문화나 정서 면에서 빛나는 곳이다.


그런데 후암동은? 부부는 왜 구도심의 낙후된 동네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성장과 개발 이전의 사람이 중요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에 닿았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선 여정이 희(喜)에 담겨 있다면 로(怒)에는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 없이 출렁이는 땅값이라든가 전문가는 없고 훈수꾼만 넘치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부부는 젊다. 걷기를 즐기고 세류에 편승하지 않는 자신들만의 안목과 취향도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에는 안 해보고 후회하지 말고 경험을 통해 뭐라도 배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 발품을 팔고 공을 들여 집을 짓다 보면 과정 자체를 더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상량식(上梁式)이 인상적이다. “’논어‘와 ’맹자‘를 탐독 중인 아버지가 문구를 정하고 취미로 캘리그라프에 한창 빠져 있는 어머니가 붓글씨를 쓰고 가구 만들기가 취미인 우리가 나무를 켜서 판을 만들고 전체적인 디자인을 맡기로 했다.”


부부는 축소인봉(築巢引鳳: 둥지를 만들어 봉황을 끌어들인다)이란 문구 양쪽에 예쁜 발자국과 손자국을 찍어 가족만의 상량판을 완성했다. 애(哀)는 건축 과정에서 벌어진 실망스런 사연들, 힘겨운 사연들이 담긴 장이다. 부부는 말한다. 자신들에게 집은 인생 역전이나 큰돈 버는 수단이 아니었다고. 다채로운 삶의 레시피를 모색하고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던 것 뿐이었다고.


이 장에는 편하게 아파트에 입주하는 사람들과 달리 맞춤식 집을 지을 때 발생하는 시공업자들과의 트러블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예상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고 실제로 우리가 직접 그런 경우에 처할 수도 있기에 충분한 참고거리가 된다. “상황에 따라 업체에 맡길지 직접 시공할지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돈은 돈대로 쓰고 어이없는 결과만 떠안게 될 수도 있다.”


부부가 원한 공간은 변화무쌍한 공간이다. 요리를 하면 집 전체가 부엌이 되고, 책을 읽으면 서재가 되고, 잠을 자면 침실이 되고, 아이와 놀고 있으면 놀이방이 되고, 손님이 오면 응접실이 되는 공간을 말한다. 시공업체로서는 생소한 주문 사항 때문에 힘들었을 것이다. 부부가 원한 것은 작아도 넓고 깊어 보이는 집이었다. 관건은 부부가 말했듯 15평 집에서 넓고 깊이 있는 공간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다시 김현 평론가의 두꺼운 삶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집 짓기는 그야말로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우리가 사는 데 필요한 것은 그만큼 많다. 부부가 원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가족의 웃음소리와 행복한 추억으로 넘쳐나는 공간이다. 마지막 장은 락(樂)이다. 참 행복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치른 노고와 생각 등을 생각하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님을 헤아려야 한다.


부부의 집은 부부와 아이만이 아니라 부모까지 함께 층을 달리해 사는 가족의 공간이다. 덧붙여 사무실까지 갖춘 더할 나위 없는 여건을 갖추었으니 참 부럽기까지 하다. 부부는 작은 집이 더 마음 편하다고 말한다. 드디어 후암동 주민이 된 부부는 남산 도서관과 용산 도서관 이야기를 한다. “북촌에 정독도서관이 없었어도 이사를 왔을까? 아마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한 영화 평론가의 말과 달리 도서관을 보고 거처를 택한 것은 아니지만 듣기 좋은 이야기이다.


집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주거 형태에 따라, 거주자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는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부는 거창한 집짓기가 아니어도 본인에게 행복을 주는 공간을 만드는 방법은 많다고 말한다. ’우리가 만약 집을 짓는다면‘은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책이다.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알찬 책이다. 얼마 전 경복궁 답사를 통해 집 정확하게는 궁궐의 유서(由緖)와 의미를 배운 나에게는 흥미있게 다가온 책이다.(강의를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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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판미동 출판사 입니다.

신간 도서 『차크라의 힘』의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세계적인 요가 지도자가 알려 주는 일상 속 간단한 차크라 명상법


건강과 자기 확신, 깨달음을 얻으려면
차크라 에너지를 깨워라
 
명상 초보자부터 숙련된 요가 수행자까지
삶의 균형을 잡아 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방법

몸과 마음의 이분법에 빠지지 않고

건강과 깨달음을 향해 가는 에너지 명상법

 

인도철학에 바탕을 둔 차크라 명상은 몸과 마음을 따로 다스리려고 하지 않고 통합적인 에너지 명상법을 제시한다. 차크라 에너지는 감정, 지성, 생기 에너지와 관련되므로 이를 강화하면 두려움, 죄책감, 분노나 왜곡된 사고,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 등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 또한 차크라 에너지가 원활히 흐르면 각 차크라들이 관장하는 힘, 창조성, 집중, 사랑, 소통, 지혜, 참자아를 발견하고 나의 근원적 에너지를 일깨울 수 있다. 지금 나 자신에게 필요한 차크라 에너지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고양할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것은 지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긍정적인 인생을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이를 통해 몸과 마음, 감정과 이성을 고루 조화시키면 자연스럽게 건강과 내면의 평화, 부족함 없는 대인관계와 이루고자 하는 꿈을 이루는 데 성공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요가와 명상을 수련해오던 사람들은 물론, 삶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정비하고 싶은 사람, 감정을 잘 다스리거나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고 싶은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있게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똑똑하고 신비로운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이벤트 참여방법>

 

1. 이벤트 기간  : 7월 7일 ~ 7 월 13일

   당첨자 발표  :  순착순 (기간내에 모집인원이 달성되면 자동종료)

   발송  :  아래 참여 조건(3.)에 충족한 당첨자 분들에게 발송 해드립니다.

                *본 이벤트 페이지 SNS 홍보 누락시 당첨이 취소 될 수있습니다.

 

2. 모집인원  :  5명 

 

3. 참여방법

- 이벤트 페이지를 스크랩하세요. (필수)

- 스크랩한 이벤트 페이지를 홍보해주세요. (SNS필수)

- 책을 읽고 싶은 이유와 함께 스크랩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4. 당첨되신 분은 꼭 지켜주세요.

- 도서 수령 후, 7일 이내에 '개인블로그'와 '알라딘' 에 도서 리뷰를 꼭 올려주세요.

 

 * (미서평시 서평단 선정에서 제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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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보는 미국사 - 아메리칸 시티, 혁신과 투쟁의 연대기
박진빈 지음 / 책세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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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애틀랜타, 세인트루이스, 앨커트래즈, 워싱턴 DC, 뉴욕 등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다룬 ‘도시로 보는 미국사’는 도시를 혁신과 투쟁의 공간, 인간과 상호 작용을 통해 항상 변화해가는 혁신의 공간으로 본 책이다. 혁신과 투쟁의 공간이라는 말이 제시되었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을 보며 투쟁, 정확하게는 폭력이 문제가 되는 메커니즘을 해명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박진빈 교수의 책은 시의적절하다 하겠다.


저자는 20세기 초 미국 연방정부 임대 주택 정책의 역사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필로그에 소개된 바대로 미국의 주요 도시들은 개발을 위한 개발을 되풀이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중심지가 되었다. 뤼도빅 루블레르가 ‘달라이 라마와 히치하이킹을’에서 중국을 전역에 걸쳐 낙후된 지역을 일사불란하게 철거하고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을 짓는 미친 속도의 나라라 정의한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책을 좋아해 도서관을 자주 찾는 나는 도서관이 문화 컨텐츠의 관점이 아닌 토건(土建)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곳이란 말을 듣고 잠시 혼란스러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딱 적당한 만큼의 초록이라는 의미의 just green enough란 말이 있다. 중도란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첫 도시로 설정된 필라델피아는 상징적이다. 우애의 도시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필라델피아는 그에 걸맞게 이질적인 이민자들로 홍역을 앓는 곳이 되었다. 균형을 잃은 결정이지만 국민 투표로 브렉시트를 감행하게 된 영국의 사례를 생각할 만한 부분이다.


필라델피아는 가장 부패한 자족적인 도시로 불렸다. 책은 필라델피아의 자구책을 보여준다. 저자는 필라델피아가 초기 이민자의 증가와 급속한 도시화로 인한 많은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1876년 100주년 기념 박람회를 통해 주변 도시의 급성장으로 인해 서서히 잃어가던 전국적 관심을 되찾아 역사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새로이 정립한 것에 그친 것을 작은 관심이 부족한 결과로 본다. 대도시의 우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다. 시카고 역시 갈등을 빼놓을 수 없다. 흑백갈등이다.


도시는 갈등과 투쟁, 문제해결의 반복으로 점철된 공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차 대전 특수(特需) 속에서 급성장한 애틀랜타도 문제의 도시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애틀랜타는 인종 통합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막을 수 없었던 백인들이 대도시 외곽에 대대적인 주거지 개발이라는 교외화(郊外化)로 맞섰다. 세인트루이스는 애틀랜타와 반대로 문제를 안았다. 팽창 도시로서 애틀랜타가 홍역을 치루었다면 세인트루이스는 공장이 버려지고 주택이 새 주인을 찾지 못하는 현상 등으로 낙후(落後) 일로를 걸었다.


모든 도시가 팽창할 수 없음을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사실이다. 공동화(空洞化)가 현안(懸案)이 된 것이다. 물론 공동화의 대안은 재개발이다. 1970, 80대년 당시 세인트루이스는 전체 인구는 감소하는 가운데 흑인 인구는 증가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나쁜 것은 흑인 인구가 증가했음에도 흑인 분리가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그 지역에서 흑인이 얼마나 빠져나가야 정상적인 인구 분포 수준이 되는가, 란 지수가 설정된 결과이다.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미국 도시들에서 확인되는 인종 분리의 정도는 인종 분리가 완화되고 인종간 평등화가 진행되었을 것이란 세간의 믿음을 배반한다고.


“여전히 흑인 게토가 있고 백인들의 교외가 있으며 도심지 슬럼은 빈민 혹은 최하위 계층의 전유물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분리가 단지 인종과 인종을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영구화하는 일종의 사회 구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181 페이지) 미국의 역사는 정복(을 위한 학살)과 무단점거의 역사이다. 이는 이와사부로 코소의 관점으로 누구나 공감할 주지의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이와사부로의 주장이다. 그는 도시를 거리의 꿈틀거림, 웅성거림, 시끌벅적함을 통해 춤을 추는, 움직이는 신체 즉 유체(流體)로 본다.


‘도시로 보는 미국사’는 용산 참사를 보며, 파괴적 결과라는 점에서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도시의 무분별한 상업화를 보며 죽어가는 도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나라에도 시사적인 책이다. 1964년 독일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루스 글라스가 런던 시내에서 노동자 계급의 거주지에 중산층이 유입되면서 기존 거주자들인 노동자들이 밀려나는 현상을 보고 붙인 젠트리피케이션은 역사가 꽤 긴 이름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결국 도시 공간이 계급적으로 독점되는 현상을 지칭한다.


인류학자이자 지리학자인 닐 스미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젠트리피케이션을 주도하는 도시 정부의 특성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도시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주도하는데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하는 세력에 대한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공권력 행사를 포함한 철저한 불관용 정책이다.


저자는 어디서든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떠밀려 다니다가 결국 도시의 언저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저자가 진단했듯 상황은 대단히 어렵다. 인상적인 것은 마이클 카츠(Michael B. Katz)의 주장이다. ‘왜 미국 도시들은 불타지 않는가?’란 책에서 그는 그렇게 차별받고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20세기 내내 인종 분리가 진행된 결과 흑인들이 분노를 쏟아 부을 백인이 존재하지 않아 흑인들 서로 분노의 총구를 겨눈다는 것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주의가 맹신되는 탓에 사회 구조의 변화를 위한 투쟁에의 의지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카츠의 주장 중 하나이다. 군대화한 경찰이 마약과의 전쟁을 구실로 사소한 마약 관련 범죄에 연루된 흑인을 대규모로 투옥하는 등의 이유로 불을 지를 만큼의 정치화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지적도 빼놓을 수 없다.


마이클 카츠는 혹시 우리가 그동안 도시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데 너무 애쓴 것은 아닌지, 실패 담론에 가려진 성공한 공공 임대주택의 예들이나 연방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사적 재원을 구축해 도시 주택 문제에 접근한 예들을 언급한다. 저자의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있던) 신자유주의의 뿌리나 현재를 다룬 책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희망의 증거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 이후 최신 흐름을 반영한 ‘도시로 보는 미국사’는 그 만큼 의미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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