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 - 사론(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엮음, 김문식 감수 / 한국고전번역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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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의 ‘사필(史筆)’은 사론으로 본 조선왕조실록이란 부제를 가진 책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재상은 수십 년 동안 어떤 사람을 성공하게 할 수도 있고 몰락하게 할 수도 있지만 사관은 어떤 사람의 이름이 천백년 뒤까지 남게 할 수도 있고 없어지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사관과 재상이 생전과 사후의 권한을 나누어 가진 것(본문 311 페이지)이라는 말을 했다. 사관의 역할을 잘 나타낸 말이다. 


사관은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을 남겨야 했다. 사관은 임금이 공식적으로 거둥하는 행사나 신하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밤낮없이 배석하여 기록을 남겼다. 또한 수없이 많은 보고 사안을 검토하여 공식 사초인 시정기로 정리해야 했다.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자신의 시각으로 평가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관은 한 치의 치우침도 없어야 했기에 늘 직필을 견지하고 곡필을 경계했을 것이다. 


사관은 화(禍)를 입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다.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하는 재앙이었다. 이 사화는 1498년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던 김일손(金馹孫) 등 영남 사림들이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서얼(庶孼)이 차별을 받은 데에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이 서얼 출신이었다는 점이 작용했다. 당시 사관은 간신의 전형으로 유자광을 지목했다. 


사초(史草)로 인해 화를 입기도 했던 조선의 사관들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대로 기록하기가 어려웠을 것임에도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하고 평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사관은 개인적으로 사초의 초고나 부본을 집 안에 보관하기도 했다. 이를 가장사초(家藏史草)라 한다. 무오사화 이후인 연산군 12년에 가장사초를 만들지 말라는 전교가 내려져 원칙적으로 가장사초를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사관은 때로 임금의 명령을 수행하는 관원으로서의 역할을 맡아 국정 운영에 한 몫을 했다. 사관은 상참(常參), 경연(經筵), 차대(次對), 윤대(輪對) 등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는 자리에 늘 함께 했다. 승정원 우사당 뒤편 북쪽에 곽방(槨防)이라는 작은 방이 있었다. 사초를 간직하는 장소로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다. 공식 사초인 시정기는 정본 외에 부본인 비초(飛草)를 만들어 두었다. 비초는 초서로 날리듯 흘려 쓴 기록을 의미하기도 한다. 


매일 매일 쏟아지는 문서를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사론으로 기록하여 시정기로 작성해 두는 일은 사관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사고에 보관한 서적을 햇빛에 말리는 포쇄(暴?)와 실록에서 필요한 내용을 찾아오는 고출(考出)도 한림이 맡았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실록은 사관의 투철한 소명 의식과 꼼꼼한 기록 정신에 성실한 근무 태도가 더해져 탄생한 것이다. 좌사(左史)는 말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일을 기록했다. 사관은 귀에 붓을 꽂은 자<이필자; 珥筆者>라 불렸다. 


사관의 입시(入侍) 문제와 제반 규정 등은 임금과 신하들의 오랜 논의 과정 끝에 정비되었다. 사관과 관련한 제반 규례의 성립 과정은 조선 관료 사회 구성원들의 역사 의식이 성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림이 되기 위해서 재주<재; 才>, 학문<학; 學>, 식견<식; 識>을 겸비해야 했다. 새로 한림에 임명되어 나온 뒤 연회를 베푸는 것을 허참례(許參禮)라 했고 50일이 지나서 또 연회를 베푸는 것을 면신례(免新禮)라 했다. 그 중간이 연회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했다. 


시정기의 작성을 전담했던 하번(下番) 검열에게는 더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었다. 하번 검열은 상번 검열의 허락 없이는 궐내의 근무지를 비울 수 없었고 평소 예문관에 입직(入直)하는 상번 한림이 혹 하번 한림이 임직하고 있는 승정원 우사당에 오면 하번은 재빨리 몸을 피해 옆에 붙은 작은 협방(夾房)으로 피해야 했다. 하번은 그곳에서 감히 목소리를 내서도 안 되었고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될 정도였다. 


실록 편찬은 선왕의 재위 기간 동안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일뿐 아니라 새 임금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 네 곳의 사고에 각각 실록을 나누어 보관하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서울의 춘추관, 무주 적상산, 강화 정족산, 봉화 태백산, 평창 오대산의 다섯 곳에 사고를 두고 실록을 나누어 보관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완성된 실록은 사고에 보관하였다. 하지만 그곳이 궁궐 안의 춘추관 실록각이든 태백산 사고든 임금은 실록을 볼 수 없었다. 


태종 때 태조실록이 완성된 이후 임금들은 끊임없이 이미 출간된 실록을 열람하기를 원했으나 신하들은 결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실록 편찬을 위해 작성한 사초도 열람할 수 없었다. 연산군은 문제의 사초에서 발췌해서 올린 일부 내용만을 보았다. 실록에서 사실대로 기록한 당대의 중요한 일들은 그 자체로 국정 보고서, 행정 지침서, 행사 보고서의 역할도 하였다. 임금이 마음대로 실록을 볼 수 없었지만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살펴볼 수 있었다.


외교, 국방과 같은 중대한 나랏일을 비롯하여 관직 제도의 조정이나 지방 행정 구역의 설치나 혁파, 형정(刑政), 도량형의 통일 등 국내의 정사 전반에 관한 선례가 필요할 때면 실록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보았다. 이를 고출이라 한다. 선대 임금의 훌륭한 통치 선례를 실록에서 뽑아 통치의 참고서로 활용하기도 했고 세자의 교육을 위한 교재를 편찬하면서 실록에서 모범적인 사례를 찾기도 했다. 국왕의 즉위, 국장(國葬), 복제(服制), 제향(祭享) 등 중요 국가 의례와 관련하여 선례를 확인해야 할 경우에도 반드시 실록을 고출하였다. 


사필은 역사를 기록하는 붓이라는 의미로 기록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과 운명을 같이 했다. 1910년 이후 일제는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을 서울로 옮겼다.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은 경성제국대학으로, 적상산본은 창경궁의 이왕직 도서관으로, 오대산본은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겼다. 오대산본은 1923년 동경 대지진으로 소실되어 74책만 겨우 남게 되었다. 


일제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편찬했다. 이에 두 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던 실록을 영인(影印)하여 처음 공개한 것도 일제다. 이 책에서 만나는 단어들의 목록을 보면 참으로 귀한 정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루원(待漏院), 시정기(時政記), 견감(蠲減), 반원와철(攀轅臥轍), 승전색(承傳色), 주묵사(朱墨史), 해괴제(解怪祭), 축수재(祝壽齋), 사옹원(司饔院), 배지(陪持), 변장(邊將), 응사(鷹師), 피전(避殿), 철악(撤樂), 지제교(知製敎), 늠료, 한림(翰林), 세초(歲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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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북녘 탐방 : 강원도, 함경남북도, 라선특별시 편 - 북녘의 산하와 역사 그리고 사람들
김이경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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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의 ‘구석구석 북녘 탐방‘(2022년 10월 출간)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통일연대 사무처장으로 북한을 드나든 저자가 쓴 북한 탐방기이다. 강원도, 함경남북도, 라선특별시를 담았다. 저자는 내년(2023년)쯤에는 백두산, 자강도, 평안남북도까지 쓸 것이라는 말을 했으나 2024년 4월 현재 나오지 않았다. 강원도편에서 우리는 북으로 가는 길이 파주를 지나 개성으로 가는 길, 고성을 지나 금강산으로 가는 길 외에 연천을 통해 원산으로 가는 길 등 세 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천에는 급수탑이 있다. 증기기관차가 물을 채우는 사이에 승객들은 기차 밖으로 나와 가락국수도 사 먹었고 원산에서 가져온 건어물을 사고 파는 시장이 생기기도 했다. 


연천에서 평강을 논하는 것은 그곳이 한탄강 용암대지를 이룬 용암의 시발점이 있는 오리산을 포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시대에는 어기내, 후기 신라시대에는 광평이었다가 고려 이후 평강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오리산과 함께 거론되는 검불랑(劍不浪)은 칼이 나빠 왕건에게 졌다고 생각한 궁예가 칼을 강에 버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세포군 끝에 752미터의 추가령 고개가 있다. 고개 기슭에 흐르는 물은 안변군 남대천이 되어 동해로 흐르고 남쪽 기슭에서 흐르는 고미탄천은 임진강 상류가 된다. 추가령 고개를 지나면 25km의 삼방협곡이다. 삼방이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 골짜기에 세 개의 초소를 설치하고 삼방관으로 부른 데서 유래한다. 삼방협곡 골짜기 아래쪽은 폭이 좁고 좌우측은 급경사면을 이룬다. 이 통로를 따라 옛 경원선 철도와 도로가 지난다. 


철령은 한 사람이 만 사람을 막을 수 있는 무쇠대문이라는 의미의 철관(鐵關)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다. 중부와 관북을 연결하는 교통, 군사상의 중요한 고개였지만 추가령 구조곡을 통해 경원선이 들어선 후 교통로의 가치가 감소했다. 안변은 남북 공동 연어 방류지역이다. 안변군에는 북이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 초까지 혹독한 경제난을 겪으면서 건설한 안변 청년발전소가 있다. 1990년대 중반, 북의 최악의 경제난은 안변 청년발전소에서 보여준 혁명적 군인정신을 온 인민이 본받으며 극복의 실마리가 풀려나갔다. 통천군은 금강산 바로 위에 있다.


시중호 주변 소나무 숲을 따라 남쪽으로 7km 정도 내려가면 동해의 명승 총석정(叢石亭)이 나온다. 1,000미터 구간에 늘어선 6각, 8각의 좌총(坐叢), 입총(立叢), 와총(臥叢)을 빠짐없이 보려면 총석정 정각에 오르는 것도 좋지만 배를 타고 돌아보아야 제맛이 난다. 강원도와 경기도는 남에도 속하고 북에도 속했는데(분단되었는데) 북에서 경기도를 황해남도와 황해북도에 포함시켜 현재 강원도만 남과 북에 유일하게 있다. 일례로 한국전쟁 전 개성은 남한 경기도에 속해 있었으나 전쟁 후 북한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북한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인 원산은 천혜의 항구 도시다. 원산이란 으뜸 가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다는 의미다. 원상 앞바다는 푸에블로호 사건이 일어난 지역이다. 


1968년 1월 23일 해상 순찰 임무를 수행하던 조선해군 함정이 원산 려도 근처에서 1,000여톤급 미국 함대를 나포하고 선원 82명을 체포한 사건이다. 푸에블로호는 소련, 중국, 북한 등의 해양에 접근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수집선이었다. 함경남도 금야군(金野郡)은 고려시대 천리장성의 끝지점에 속하는 곳이다. 1258년 몽골에 점령당해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다. 공민왕 때 수복해 화령부라고 불렀다. 영흥본궁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곳이다. 이성계가 조선의 국호를 이곳의 이름을 따 화령으로 하는 것을 감안했다. 이성계는 화령에서 태어나 조선을 건국할 때까지 함흥에서 살았다.


1950년 10월 장진호 전투에서 패한 미군의 흥남 철수가 시작된 흥남은 유명하다. 함흥에 도착했지만 중국군이 이미 원산을 장악하고 있었다. 탈출로는 바다 밖에 없었다. 오판으로 패해 철수하게 된 맥아더는 원폭 투하를 계획했다. 당시 원폭 투하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주민들은 앉아서 죽으나 가다가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최선은 미군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다. 1945년 일제가 물러나자 중국에서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 사이에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장제스 군대는 만만치 않았다. 북도 건국 과정에 있었기에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컸다. 


하지만 김일성은 북의 우수한 지휘관들을 중국 동북지방으로 파견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김일성의 지침에 따라 중국 전장으로 떠난 조선인 병력은 25만여명에 달했다. 당시 북이 보유하던 식량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오성홍기에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피가 스며 있다고 말했다. 함흥을 도시로 키운 젖줄이 성천강이다. 성천강을 따라 함흥 중심가로 올라가면 함흥본궁이 나온다. 이성계가 청년 시절 살던 집이다. 함흥본궁은 지금은 함흥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북청은 발해 5경 중 하나인 남경 지역으로 한반도에서 발해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한반도 중북부의 만주에서 당나라를 몰아내고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를 회복한 발해는 고구려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이는 나라다.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추세가 늘고 있지만 여전히 공식 견해는 통일신라시대다. 단천은 세계적인 지하자원의 보고(寶庫)다. 한반도에 분포된 거의 모든 지층이 모여 있고 지각운동의 결과 서로 다른 지질시대의 여러 가지 조성을 가진 관입암들과 분출암들이 많은 광상을 이루어 놓은 덕분이다. 길주군은 고려 예종 때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쌓은 9성 중 하나이고 세조 13년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킨 곳이다. 


길주군 풍계리에 있던 핵실험장은 2018년 5월 2일 외국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갱도 폭파 방식으로 폐기되었다. 2000년 함경북도 화대군 석성리에서 세계 최초로 화산 용암 속에 완전히 묻힌 인류화석을 발굴되었다. 어머니가 두 자식과 함께 흐르는 용암 속에 묻히는 재난을 당한 화석으로 30만년전 것으로 추정된다. 함경북도 명천군 칠보산은 화산에 의한 단층 활동으로 생겨난 산이다. 옆으로 김책에서 어랑까지 110km에 이르는 길주 ? 명천 지구대가 있다. 함경북도 경성군의 가장 서쪽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관모봉(2, 541m)이 있다. (한라산은 59번째로 높은 산이다.) 


관모봉(冠帽峰)은 6월에야 눈이 녹고 8월이 넘으면 다시 눈으로 덮여 마치 하얀 관을 쓴 것 같아서 붙은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빙하침식곡을 볼 수 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관모봉을 장백산으로 표기했다. 함경북도 온성군은 한반도의 최북단 지역이다. 평양에서 온성까지 직선 거리로 대략 560km다. 온성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땅으로 여진족이 함께 살던 지역이다. 온성이라는 지명은 성을 축조하여 외적을 막는 평온한 땅이 되었다는 의미다. 


회령시는 함경북도의 서북쪽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길림성 용정시 삼합진과 마주보는 국경도시다. 라선특별시는 중국 훈춘, 러시아 핫산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교통과 물류의 요충지일뿐 아니라 부동항인 라진항이 있는 경제무역도시다. 북은 2018년 람사르 협약에 가입하면서 평안남도 청천강, 대령강 하류구의 문덕철새보호구와 라선철새보호구를 람사르 습지에 등록했다. 


두만강역에서 서번포호수를 끼고 두만강 하구 쪽으로 가면 언덕배기 산이 나오는데 이 언덕이 조산(造山)이다. 이 언덕에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기리는 승전대비와 승전대 건물이 있다. 남쪽 바다에서 활약한 이순신 장군 기념비가 북쪽 최북단에 있는 것이 의아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전인 1583년 10월 38세의 이순신은 함경북도 경원에서 남쪽으로 16km쯤 떨어진 건원보의 권관으로 부임했다. 여진족이 백성을 해치고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났는데 이순신은 우두머리인 울지내를 유인하는 계책으로 여진족을 토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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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물질 - 물질이 만든 문명, 문명이 발견한 물질
스티븐 L. 사스 지음, 배상규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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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는 무엇일까? 무정형 고체, 비결정질 고체 등으로 말할 수 있다. 스티븐 사스는 얼어붙은 액체에 가깝다고 말한다. 사스는 흑요석은 검은 색을 내는 먼지와 다른 원자들이 섞여 있(어서 검)다는 말을 한다. 차탈회위크는 주변에 활화산이 있어서 흑요석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기원전 6000년대에 이르러 차탈회위크는 기술혁신의 중심지 자리를 잃었고 그 자리는 대도시 문명을 일으킨 메소포타미아로 넘어갔다. 점토(粘土)는 인간이 열을 가해 물성을 바꾼 최초의 물질이다. 돌, 나무, 뼈 등의 재료로 도구나 무기를 만드는 것은 재료의 형태를 바꾸는 일이지만 점토를 구워 그릇을 만드는 것은 재료의 특성을 바꾸는 일이었다.


원자구조가 변하면 물성도 변한다. 현대 도시는 콘크리트, 유리, 세라믹, 금속과 같은 다양한 재료의 놀라운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기념비나 다름없다. 금속은 여러 면에서 돌이나 점토와는 전혀 다르다. 금속은 돌이나 점토보다 전기와 열을 훨씬 잘 흘려보낸다. 금과 은은 도구나 무기를 만들기에는 강도가 너무 약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인간의 탐욕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었다. 금과 은에 무심한 사람이 보기에는 그다지 쓸모도 없는 금속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음모를 꾸미고 전쟁을 치르고 목숨을 내놓았다는 사실이 기이하기만 할 것이다.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금과 은이 인류 역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점이라고는 화폐의 역할을 해줬다는 점뿐이다. 하지만 몇 세기가 지나고 전기와 사진 장치가 발달하면서 이 아름답고 희귀한 물질은 새로운 역할을 하였다. 철은 지각에 많이 함유되어 있기는 하지만 순수한 형태로 발견하기가 아주 어려워 한때는 금보다 값진 금속으로 대접받았다. 철은 석탄과 더불어 근대 세계를 산업화로 접어들게 한 원동력이었다. 


산업혁명을 촉발한 발명품은 단연코 증기기관이었다. 증기기관은 처음에는 황동으로 만들어졌지만 철로 주조할 수 있게 된 이후 대량 생산되었다. 고대의 대장장이들은 철을 장시간 가열하는 동안 탄소가 철에 흡수 되는 것이 철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이 철에서 불순물을 제거한다고 생각했다. 탄소가 철의 강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맡는 역할은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쯤에 밝혀졌다. 유리는 판유리 상태로는 강도가 약하지만 머리카락 만큼 가느다란 상태에서는 강철 만큼 강하다. 


이와 달리 금속은 굵기가 긁든 얇든 항복 강도와 파괴 강도가 똑같이 유지된다. 순금속은 산산조각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의문이 들 법하다. 유리는 왜 크기에 따라 이토록 다른 특성을 보이는 걸까? 그리고 왜 그렇게 약할까? 사실 유리는 물과 비슷한데 물보다 점성이 훨씬 높은 액체가 과냉각 즉 얼어붙어 있는 상태다. 실제로 유리는 결정이 아닌 비결정성 구조를 이루고 있다. 유리를 이루는 재료는 실리카(이산화규소)다. 실리카의 구조는 산소 원자 네 개가 실리콘 원자 하나를 감싸는 형태의 규산사면체다. 


흑요석은 실리카가 땅속 깊은 곳에서 녹아 있다가 화산 활동으로 지표로 올라온 뒤 냉각, 경화된 것으로 자연적으로 생성된 반투명의 검은 유리다. 유리의 장점은 투명하다는 것이지만 초창기 유리는 불투명했다. 유리 속에 들어간 기포나 조그만 입자가 빛을 강하게 산란시켰기 때문이다. 유리는 철과 같은 불순물이 섞여 들어가면 색상을 띤다. 석탄이 없었다면 기계화된 산업으로 다양한 제품군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산업혁명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산업화의 발전 과정에서 영국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주요 이유는 영국에 석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200년간 세계 최대의 석탄 공급국이었으며 19세기 말에는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산업혁명 이전 시대에 석탄을 대량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럿 있었다. 석탄 채취가 용이한 광맥에서 석탄이 바닥남에 따라 더 아래로 파고 내려가야 했다. 홍수가 곤란한 문제로 떠올랐다. 


탄광 소유주는 양수(揚水) 작업에 사용할 새로운 동력원을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증기가 내뿜는 에너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증기기관은 산업혁명 이후에 수력을 대신하여 주요 동력원으로 사용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연결된 기술 혁신은 대개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 등장했다. 스페인과 같은 가톨릭 국가에서는 오랜 동안 탐구 행위를 억압했다. 가톨릭 교회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있을 때 프로테스탄트 종파는 탐구 활동을 장려했다. 


대장장이들은 기원전 수백년 젼에 강철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탄소를 철 속에 녹여 넣기가 어려운 문제 등의 이유로 강철로는 검, 단검과 같이 얇은 도구밖에 만들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산업혁명의 상징인 증기기관, 기관차, 기관차 선로, 선박, 교량은 모두 강철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한 연철이나 주철로 제작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를 때까지도 대장장이들은 철에 탄소를 넣어야 강철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이아몬드는 최상급이란 수식어가 들어맞는 광물이다. 연마 작업에 사용되는 산업용 다이아몬드 가격은 보석용 다이아몬드 가격의 1/100이다. 숯은 유리처럼 비결정성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연필 심인 흑연은 육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는 입방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사면체의 꼭짓점에 놓인 탄소 원자 네 개가 중앙에 있는 탄소 원자 하나를 감싸고 있고 이러한 구조가 3차원으로 쌓여서 탄탄한 결정을 이룬다. 


다이아몬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이며 모든 물질 중에서 가장 높은 탄성계수를 자랑한다.(그 어느 물질보다 거의 두 배 이상 높다.) 다이아몬드는 열 전도성은 아주 높고 전기 전도성은 아주 낮다. 대개의 금속은 열 전도성과 전기 전도성이 모두 높다. 열역학은 탄소가 흑연으로 존재할 때 상온, 대기압 조전에서 가장 안정적인 구조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다이아몬드는 땅속 깊은 곳에서 탄소에 고온, 고압을 가해야만 생성된다. 전문가들은 다이아몬드가 흑연으로 돌아가려면 수십 억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열역학은 땅속 160km 아래에서 다이아몬드가 형성되는 조건대로 흑연에 대기압의 5만배에 달하는 압력과 2,000도의 열을 가하면 다이아몬드가 형된다고 설명하지만 이제껏 다이아몬드를 얻으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문명과 물질은 돌부터 실리콘까지 세상을 바꾼 차가운 것들의 역사라는 부제처럼 다양한 물질에 대해 설명한 책이다. 본문에 이런 글이 있다. “사실 강철이 대량 생산되는 과정은 내가 이 책에서 언급한 내용보다 더 복잡하다.”(251 페이지)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잘 설명했으나 한계 때문이겠지만 전체적으로 책이 어렵다. 저자가 가진 관점 또는 관심사가 독자인 나의 기대와 다른 부분이 있을 것이다. 다른 책을 찾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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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단 - 주나라를 세우고 중국 전통문화를 발전시키다
김학주 지음 / 연암서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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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는 기원전 1000년경을 전후한 무렵 중국 땅 전역을 최초로 지배한 나라다. 김학주의 ‘주공(周公) 단(旦)’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일반적으로 미개한 주 민족이 큰 나라를 건설하여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주공 단 덕분이다. 주공 단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할 만한 인물이다. 주(周)는 서주와 동주로 나뉘고 동주는 춘추와 전국 시대로 나뉜다. 주공 단의 성은 희(姬)씨다. 주(周)는 미개한 나라였고 은(殷)은 상당히 문화가 발전한 나라였다. 


주공이 은을 정벌하면서 은의 발전한 여러 정치, 사회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주를 건설하고 다스렸다. 주공은 중국이 이룩되어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주공은 어린 조카인 성왕을 대신하여 7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후 성왕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왕위를 성왕에게 물려주었다. 주공은 그 이후에도 일정 기간 정치를 돌보았다. 주공은 은(殷)이 쓰던 갑골문자를 받아들여 크게 개량하여 한자로 발전시켜 상용하게 했다.


갑골이란 은나라 사람들이 점을 칠 때 쓰던 거북 껍데기와 짐승 뼈를 말한다.(123 페이지) 이후 주공에 의해 역경, 시경, 서경, 예기 등의 전적(典籍)이 이루어졌다. 공자는 주나라는 하(夏)와 은(殷) 두 나라를 본떴으므로 문물제도가 빛나고 있으니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했다. 또한 자신을 등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은 그 나라를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겠다고도 했다. 공자는 자신을 주나라 문화의 계승자로 자처했다. 공자는 꿈에서도 주공을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할 만큼 주공을 존경했다. 문왕의 어머니이자 계력(季歷)의 아내가 태임(太任)이다. 사임당은 태임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의미다. 


주공은 한 번 머리를 감는 동안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찾아온 손님을 마중하기 위하여 일어서고 한 끼 밥을 먹는 동안 세 번이나 먹던 음식을 뱉어 놓고 일어서서 찾아온 선비들을 맞이해 대접하면서도 천하의 현명한 사람들을 놓칠까 두려워 하였다고 했다. 태공 망은 일찍이 문왕(무왕과 주공의 아버지)이 사냥을 나가다가 위수(渭水) 가에서 발견한 인물이다. 강태공이라고 하는 태공(太公) 망(望)은 태공(문왕의 아버지)이 바라시던 분이란 의미다. 


사기(史記) 권4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은 은나라를 치기에 앞서 이버지 문왕에게 제사를 지내고 문왕의 영혼을 모신 목주(木主)를 자기 수레에 싣고 가면서 문왕을 받들어 그 자들을 정벌하는 것이라 말했다.(73 페이지) 무왕이 은나라를 치러 맹진으로 나갈 적에 아직 문왕의 상을 왕전히 치르지 못하여 문왕의 신주를 수레에 모시고 나간 것이다.(87 페이지) 주나라가 쳐부순 중원의 은나라는 탕임금이 세운 상이라는 나라였으나 후에 하남성 안양(安陽) 지역인 은(殷)이란 곳으로 옮겨 나라 이름이 은이 된 것이다. 은상(殷商)이라고도 한다.(商은 헤아린다는 의미도 갖는다.)


주나라 민족은 원래 땅굴을 파고 그 속에서 살던 야만민족이었다. 주나라는 고공단보 - 계력 - 문왕 - 무왕(과 성왕) - 성왕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가졌다.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은나라 형제다. 무왕, 무공은 잔인한 오랑캐였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그들이 특히 주공이 문화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주공은 봉건제도의 창시자이기도 하다.(88 페이지) 봉건제도란 천자(황제)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하여 땅을 여러 나라로 나눈 뒤에 그것에 유능한 사람을 뽑아 보내어 그 나라를 임금처럼 다스리도록 한 제도다.(100 페이지) 그런 작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을 제후(諸侯)라 한다.


 제후는 나라 크기와 실력에 따라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졌다. 주공이 천재였으나 혼자 갑골문자를 가져와 한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주공이 갑골문자를 보고 한자를 만드는 데에 은나라 지식인들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은나라 지식인들은 유가(儒家)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유란 은나라의 사(士) 즉 예를 돌보는 사람들로 추정할 수 있다.(127 페이지)


공자는 주공이 정벌한 은나라 왕실 후손이지만 주나라와 주공을 무척 존경했다. 주공은 은나라 세력 및 은나라를 지지하던 동이족과 화이족도 깨끗이 무찔러 버렸다.(137 페이지) 주공이 갑골문자를 한자로 발전시킨 뒤 이룬 두드러진 업적 중 하나는 이전부터 전해오던 여러 가지 중국의 경전을 한자로 정리한 것이다.(151 페이지) 은나라 사람들이 갑골을 이용해 점을 쳤지만 주나라는 역을 가지고 점을 쳤다.(186 페이지) 예(禮)에 관한 세 경전이 주례(周禮), 예기(禮記), 의례(儀禮)다. 주공은 주례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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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전통과 과학 템플턴 동아시아 과학사상 총서 1
김영식 지음 / 예문서원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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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朱熹)는 기(氣)의 구체적 속성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기는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을 구성하고 그 기초가 된다. 기에 도덕적 속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주희가 사람들의 도덕 수준의 차이를 그들의 기의 차이로 돌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희에게 물질과 생명, 물질과 정신 사이의 불연속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희가 물리적, 생리적, 정신적 현상들 사이의 차이를 인식했다 해도 그것은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였을뿐이다. 주희는 생명과 정신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를 초월한 비물질적인 것을 상정(想定)하지 않았다. 


주희에게 기는 세계 모든 사물의 기본적 재료이며 모든 현상의 기초였다. 주희는 세계의 어떤 현상도 기의 범위 바깥에 남겨 두지 않았다. 주희는 마음은 몸을 주관하고 주재한다고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 활동을 주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진실되어야 한다. 주희는 사람은 단지 하나의 마음만을 지니고 있는데 어찌 그것을 나누어 한번에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주희는 심(心)은 허령(虛靈; 잡된 생각이 없어 신령함)하지만 사물이나 욕심에 의해 막히면 어두워지고 완전히 알 수 없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심은 사람의 어둡고 탁한 기운에 의해서도 막힌다. 주희는 사람의 심의 양(量)은 크지만 사욕 때문에 줄어든다고 말했다. 마음을 빈 상태로 안정되게 유지하고 막힘이 없도록 하는 것은 인간의 지적, 도덕적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주희에 의하면 성(性)은 마음의 도리이고 정(情)은 마음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며 마음 자체는 신체를 주재한다. 도심(道心)은 의리로부터 나오고 인심은 몸으로부터 나온다. 주희는 마음이 기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주희는 마음은 기의 정상(精爽: 신령스러운 기운)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희에게 물질과 정신의 엄격한 구별은 없었다. 주희는 단일한 기가 물질, 생명, 정신의 현상과 과정들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주희는 기는 하나여서 마음을 주관하는 것은 지기(志氣)이고 형체를 주관하는 것은 혈기(血氣)라고 보았다. 기는 단지 하나의 기이다. 의리로부터 나온 것은 호연지기이고 피와 육신으로부터 나온 것은 혈기다. 주희는 화를 잘 내는 자신의 성향은 자신의 기의 질(質)이 병들어서라고 설명했다. 물론 기가 마음에 영향을 주듯 마음도 기에 영향을 준다. 이황은 형(形)이 있는 기는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고 형이 없는 리는 항상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황은 주리(主理)적 세계관을 가졌다.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논쟁은 주희의 모호한 이기론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주희는 리(理)가 무엇인지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다. 주희는 리의 서로 다른 측면을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으로 표현했다. 소이연은 이유, 소당연은 규범이라는 개념과 비슷하다. 주희에 의하면 리는 존재하기 위해 기를 필요로 한다. 주희에게 리와 기가 모두 중요했다. 주희에게 리와 기는 실재세계의 두 층을 가리킨다. 


신유학자들의 학문과 수신의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격물(格物), 치지(致知)였다. 격물과 치지의 목적은 개개의 사물과 사건에 내재한 수많은 리에 도달한 뒤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이 유추(類推)였다. 이는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에 관한 지식을 같은 류(類)에 속하는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관한 지식으로 확장시키는(推) 것이다. 주희의 격물 작업의 목적은 리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이일분수(理一分殊)란 리는 하나이지만 그것의 발현은 여러 가지이다란 뜻이다. 이는 정이의 구절이다. 


주희에게 인욕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의 자기수양에서 추구해야 하는 궁극의 목표였다. 이 목표를 성취했을 때 인간의 마음은 천리를 완전히 체현하게 된다. 인간은 격물의 방법을 통해 천리에 도달할 수 있다.(格에는 헤아리다의 의미가 있다.) 격물이란 사물의 탐구를 의미한다. 주희는 인간이 하나의 사물과 사건의 리에 도달한 상태를 일컬어 리를 안다고 하지 않고 리를 본다고 말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격물의 결과 얻게 되는 것은 리에 대한 지식이기보다 리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이라는 의미다. 


주희의 진짜 목표는 개별 사물들과 사건들의 수많은 리들을 하나하나 전부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희가 격물을 하는 데 있어 설정한 궁극의 목표는 하나의 보편적 리(인간 마음의 본연의 상태)에 내재된 도덕적 덕목들을 보장해 줄 천리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별 리들의 이해로부터 보편적 리의 이해로 어떻게 나아가는가가 문제였다. 정이는 수많은 항목을 축적하고 수많은 사안에 익숙해진 후 홀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관통할 것이라는 지극히 모호한 입장을 내놓았다. 주희는 정이가 한 가지 사물을 탐구하기만 하면 곧바로 관통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았고 천하 만물의 리를 남김없이 규명해야만 비로소 관통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주희는 정이를 따라 오랜 기간 많은 사물을 보고 경험하고 공부한 후에야 관통이 저절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오게 된다고 강조했다. 주희는 한 가지 일에 접해 곧장 그 일에 대해 그 리를 끝까지 탐구하고 얼마 뒤에 그렇게 탐구한 것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관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희는 되도록 많은 사물들을 탐구할 것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주희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만 가지 리가 하나의 리일뿐이지만 학자는 또한 만 가지 리 속에 있는 수천 수백 가지 온갖 복잡한 실마리들에 대해 이해해 나가야 한다. 만 가지 리가 사방으로부터 한데 모여들게 되면 저절로 그것들이 하나의 리임을 볼 수 있다. 


그 만 가지 리에 대해 계속 이해해 나가지 않고 겨우 어느 한 가지만을 이해하는 데 전념한다면 그것은 단지 공허한 상상일뿐이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탐구하고 세상의 리를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가지를 검토하고 연이어 다른 것을 검토하는 과정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세상 모든 사물과 현상을 다 다룰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이미 획득한 것을 확장시켜야 한다. 주희는 지식을 확장하고 충만케 한다(擴而充)는 맹자의 구절을 바로 그러한 의미로 해석했다. 관건은 과정 어딘가에서 개별 사물과 현상의 리를 이해하는 것과 관통을 가져다 줄 하나의 리를 이해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는 것이다. 


주희는 류(類)와 추(推) 가운데서 추를 더 중요시했다. 유추의 방법이란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알지 못하는 것으로 확장시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희에게 격물이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희는 이미 가지고 있고 확장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지식을 시작(단; 端), 단서(端緖)라고 지칭했다. 그리고 인(因; ~에 바탕해서), 거(據; 근거해서), 종(從; ~으로부터) 등의 표현을 사용해 그 역할을 나타냈다. 주희는 치지(致知)의 치를 추(推)의 의미로 이해했다. 확장한다는 것은 극한까지 추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물을 철저하게 탐구해서 그 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사물을 항상 철두철미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주희는 한 가지 일에 대해 철저히 탐구할 수 없으면 또 다른 일을 탐구해 보라는 저이의 말을 인정한다. 물론 주희는 지극히 어려운 일을 다루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그런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갑자기,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 사실 지극히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다. 주희는 학문에는 오히려 점진적인 나아감만이 있을뿐 서두르고 재촉해서 될 수 있는 리는 없다고 말했다. 


주희는 독서에는 반드시 순서가 있고 글을 읽는 데는 서두르고 다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나씩 하나씩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머지않아 이해하는 것이 많아질 것이며 점차로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에 대한 이해가 모여서 하나가 되고 머지않아 또 일고여덟 가지에 대한 이해가 모여서 하나가 된다. 그러면 곧 일제히 꿰뚫어 통하게 될 것이다. 주희에 의하면 수신(修身)에서 제가(齊家), 치국(治國)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유추에 의한 것이다. 주희에게 과학이라는 독자적 범주가 존재하지 않았다. 주희에게는 자연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리해주는 경계가 없었다. 


주희의 세계에서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자연세계와 도덕의 지배를 받는 인간세계 사이의 마찰 같은 것은 없었다. 주희의 세계에서 천지라 불리는 자연세계 자체에 도덕적 속성들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세계에 도덕적 질서가 존재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성에 근거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 고대 이래 널리 퍼진 생각이었다. 주희의 세계에서는 아무 것도 제외되지 않았다. 자연현상들 자체가 주희의 진짜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나는 일찍이 높은 산 위에서 소라와 방합 조개껍질들을 본 적이 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바위 속에 있었다. 


이 바위들은 바로 옛날의 흙이고 소리와 방합은 물속의 것들이다. 아래에 있던 것이 변해서 높은 곳에 있게 되었고 부드러운 것이 변해서 단단하게 된 것이다." 서양 과학자의 말이 아니라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의 말이다. 조셉 니덤은 위의 말을 주희가 화석의 의미에 대해 이해하고 쓴 글이라 평했다. 김영식 교수는 주희의 저 말은 회남자(淮南子)의 우주생성론과 음양순환의 이론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야기한 것이라 말한다. 어떤 현상이 일단 기의 어떤 성질과 움직임들로 인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면 그 현상은 충분히 설명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현상에 대한 외적 원인이나 감춰진 메커니즘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주희를 통해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의 리는 그 현상이나 사물을 총체적으로 가리킬뿐 그것을 설명해주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주희는 형이하에 속하는 것을 당연하고 명백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자연현상을 그냥 받아들였을뿐 표면적 실재를 넘어서는 더 깊은 탐구로 나아가지 못했다. 유가는 세계의 실재성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그 같은 실재성을 부정하는 도가나 불가와 자신들을 구분지어 준다고 생각했다. 주희는 천문역법, 화성학, 지리, 의술 등 자연현상과 관련된 여러 전문지식의 분야들에 깊은 흥미를 보였다. 격물을 통해 얻게 된 것은 사물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통찰이었다. 


격물의 결과 얻어지는 사물의 리에 대한 이해는 그 사물의 리와 사람의 마음의 리 사이의 일종의 공명관계였다. 공명이 일어나려면 마음이 텅 비고 맑고 고요해야 한다. 여러 개별 리들과 하나의 리인 천리의 연결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주희는 천지라는 중요한 개념과 관련이 있는 풍수, 지리 등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예(禮)의 일부인 음악도 중시했다. 주희는 의례, 음악, 제도, 천문, 지리, 병법, 행정, 법률 같은 것들도 모두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니 그것들이 없이 지내는 것은 불가능한 고로 그것들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주희는 기는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구성하고 일으킨다고 보았다. 기는 생명의 근원이자 사람의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다. 주희에게 마음이란 단지 기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의 정상(精爽)한 부분, 영(靈)스러운 부분이다. 기는 정신적 속성들도 지니고 있으며 마음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 마음과 기의 상호작용은 자신의 마음과 기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외부세계의 기, 자신의 기와 다른 사람의 기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과학적, 기술적인 주제들을 포함시킴으로써 주희는 유가의 학문을 더 폭넓고 과학적으로 만들었다. 물론 이후의 유가 학문체계에서 이런 넓은 범위가 그대로 지속되지는 않았다. 후학들의 관심이 좁혀진 것이다. 


주희는 귀신과 같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입장과 반대 방향으로 갔다. 정약용은 주희와 다른 점을 많이 보였다. 상관론적 사고에 대한 비판, 귀신에 대한 해석 등에서 현저하게 다르거나 상반된 입장을 보였지만 술수와 미신에 대한 태도는 크게 보아 주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희는 아무리 이상하게 보이는 현상도 기 개념으로 설명했다. 주희는 주역 점도 그의 체계 내에 받아들였다. 주희는 주역이란 원래 점복에 사용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생각했다. 주희는 주역의 의리(義理)에만 집중하고 점복적 측면을 무시한 당시의 학자들을 비판했다. 


정약용이 오행 이론을 거부한 것은 근본적으로는 상관 사고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약용은 여러 가지 사물들이나 관념들을 오행과 연관짓는 임의성을 비판했다. 가령 정약용은 수(水)와 적시고 아래로 향함, 목(木)과 굽고 곧음, 금(金)과 따르고 변화시킴을 대응하는 대신 수는 습하고 차가움, 목은 부드럽고 올라감, 금은 단단하고 내려감의 속성들과 연관짓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음양이론에 대해서도 정약용은 여러 가지 것들을 음양이라는 두 가지에 연관짓는 일이 지니는 임의성을 비판했다. 현대사회에서 전문 과학기술 지식은 일반 지식인들의 관심과 이해로부터 분명하게, 그리고 때로는 아주 심하게 분리되어 있다.


전통시대 중국에서, 그리고 이러한 분리가 일어나기 전의 유럽에서 일반 지식인들이 과학이나 자연세계에 대한 지식을 그들의 관심 범위에서 배제할 이유는 없었다. 전문가가 되는 것을 경계하는 경전의 근거들의 하나로 주역 계사전에 수록된 형이상은 도(道)이고 형이하는 기(器)라는 구절을 들 수 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론도 빼놓을 수 없다. 진정한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도, 리, 성과 같은 고차원의 개념들을 추구해야 하며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구체적, 실용적, 기술적인 문제와 지식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군자는 단순한 도구적 기능만을 수행하는 좁은 범주에 자신을 한정시켜서는 안 되며 폭넓은 학문과 수양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도 즉 소도(小道)는 살펴볼 만하지만 너무 멀리까지 추구하면 수렁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가르침도 그렇다. 전통시대 중국 역사에서는 전문분야들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을 고무하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었다. 도(道)와 기(器)를 분리하여 도를 기보다 우위에 놓는 경향과 양자를 불가분의 관계로 간주하는 경향이 존재했다. 후자의 입장은 도가 기 안에 존재하며 기 없이는 도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군자불기라는 말도 단순하거나 일방적으로 해석되지 않았다. 폭넓은 학문과 수양을 목표로 삼을 것을 강조했지만 그런 폭넓은 학문과 수양에는 자연세계에 대한 공부가 포함되었고 기술에 관한 지식 - 실행까지는 아니더라도 - 도 제외되지 않았다. 


군자불기라는 말의 실제 효과는 유학자들에게 좁은 주제 - 그것이 과학이건 기술이건 다른 전문분야이건 - 에 갇힌 단순한 전문가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을뿐 학자들이 당연히 추구해야 할 폭넓은 관심과 학문으로부터 과학과 기술의 주제들을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소도라는 말에는 당연히 도라는 말이 들어 있다. 주희는 만물을 공부하고 이해할 것을 역설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때 논어의 박학(博學)이란 개념을 활용했다. 중국 전통사회에서 유학자와 전문 과학기술지식 사이의 수렴은 완전하지 않았다. 유학자들은 보통 과학기술의 전문 주제들에서 지적인 도전이나 자극을 느끼지 않아 그 같은 주제들의 공부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전문 과학기술 주제들에 대한 유학자들의 지식수준은 대개 그리 높지 않았으며 당대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경우는 드물었다. 주희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비록 그가 역러 전문분야들을 공부하고 여러 분야들에서 상당한 지식을 지니기는 했지만 그의 이해는 당대 전문가들의 수준에 미치지는 못했다. 전통 중국에 우리가 과학적이라거나 기술적이라고 부를 만한 여러 전문분야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서로 분리된 독립적 분야들로 개별적으로 존재했고 과학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 사이의 뚜렷한 구분도 없었다. 심지어 전통시대 중국에서 과학이나 기술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존재했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할 수 있다. 전통 중국에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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