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평전 - 스스로 빛났던 예술가
유정은 지음 / 리베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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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은 교수의 '스스로 빛났던 예술가 사임당 평전'은 예술가로서의 사임당을 조명한 책이다. 이 점은 물론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현모양처가 아닌 여성 군자적 면모에 초점을 두고 사임당(1504 - 1551)을 조명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잘 알다시피 현모양처란 개념은 18세기 무렵 서 유럽의 자본주의 체제하의 근대 가족이 생기면서 비롯되었다. 더욱 우리나라의 경우 이 개념은 일제에 의해 여성은 참전할 군인을 공급하는 존재로 왜곡, 선전되었다. 조선의 현모양처 어머니들이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



저자는 시, 서, 화에 두루 능했다는 말로 사임당을 설명하는 세태에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더한다. 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는 성리학적 사회질서가 확실히 정착되지 않은 시기였다. 여성들이 남성들과 대등한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 '주자가례'와 '소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지배이념화로 여성들은 열악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사임당이 살아간 시대는 네 번의 사화(士禍)가 일어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역사를 배우는 근본 의미들 중 하나를 생각해보자. 가령 조선 전기와 중기, 후기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여성이 처한 환경의 변화, 성리학적이고 가부장적인 편협한 질서의 고착화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변천은 생각하지 않고 조선 그것도 17 세기 이후에 여성에게 강요되었던 지배 이념 외의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임당(師任堂)은 당호이다. 인선(仁善)이란 이름을 가졌다는 기록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옛 중국의 문왕이라는 훌륭한 임금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이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태임을 본받는다는 의미이다.


율곡이 말한 것처럼 사임당은 포도와 풀벌레를 그리는 데 절묘한 솜씨룰 보였다. 조선이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아니었지만 가부장적인 시대였던 것은 사실이다. 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여성이었다. 아내의 생각과 재능까지 모두 존중한 이원수도 존경할 만하다. 송시열을 필두로 한 노론계의 학자들은 사임당을 상찬했는데 그것은 율곡을 성현으로 만들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상당히 의도적이고 불순한 동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장지연의 '여자독본'은 달랐다. 사임당을 구한말 여성들이 본받아야 할 어머니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물론 사임당은 조선의 군국의 어머니상으로 선전되기도 했다. 사임당은 육영수 여사에 투영되어 전 국민의 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임당을 가장 적확하게 규정하는 말은 스승 같은 어머니, 간언하는 아내, 여자 군자, 시, 서, 화에 두루 능한 예술가란 말이리라.


사임당은 수기치인(修己治人: 자신을 수양한 다음 남을 가르침을 이르는 말)과 법성현(法聖賢: 성현을 본받아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성장했을 것이며 스스로 솔선해 자녀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또한 아들, 딸을 차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임당에게는 율곡 말고도 작은 사임당으로 불린 매창(梅窓: 1529 - 1592)이란 딸도 있었다.(매창은 16세기 유희경의 정인이었던 매창과 동명 이인이다. 사임당은 7남매를 두었다.)


셋째 아들 율곡은 퇴계와 쌍벽을 이룬 조선 최고의 학자이다. 넷째 아들 우(瑀)는 거문고, 글씨, 시, 그림 등 네 가지에 뛰어나 사절(四節)로 불렸다. 사임당은 시로써 지극한 효성을 드러냈다. 시는 꾸며낼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저자는 공자가 말한 유교 미의식을 설명한다. 회사후소(繪事後素)가 그것이다. 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만든 뒤에 한다는 의미이다.


사람도 아름다운 자질을 갖춘 후에야 꾸밈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미적 형식보다 내면의 인격적 충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가 사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의 강조점 중 하나로 외양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미가 서로 잘 어울림을 뜻하는 문질빈빈(文質彬彬)과 함께 생각해 볼 부분이다. 사임당은 세심하고 정감 어린 정서, 사랑의 인품을 바탕으로 한 보기 드문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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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저녁 비가 내린 뒤 어제는 가을 등산에 어울릴 차림으로 외출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오늘 새벽엔 나도 모르게 이불을 덮고 있는 나를 보았다. 이런 중간 계절에는 적응이 중요하다. 기분을 업 시켜주는 빠른 음악들을 우울할 때 들으면 이상하듯 이제는 선풍기 바람이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진다. 한여름 약냉방 전철에서도 긴 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몸이 찬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가을 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상 기후에 적응하느라 지친 몸이 내는 호소(呼訴)에 귀기울이고, 너무 쉽게 밖을 향하곤 하던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고, 시(詩)를 찾아 읽고, 하루 30분 걷기로 생각과 몸을 함께 최적화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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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의 선택 (양장) - 우리 시대 인문학 최고의 마에스트로 박이문 인문학 전집 1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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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문학자이자 철학자, 시인인 박이문(1930 - ) 교수를 알게 된 것은 ‘다시 찾은 빠리 수첩’을 통해서이다. 나는 이 책에 들어 있는 ‘빠리여, 안녕!’이라는 글을 시간 날 때마다 펼쳐본다. 이 글을 그렇게 펼쳐보는 것은 “늙은 열등생”이라고 자신을 표현하는 저자에게서 강한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동경에서의 모 대학생활 중 학병을 피해 다니던 큰 형이 가져다 놓은 문학서적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입문했고 서른이 넘은 늦은 나이에 프랑스 유학을 결행한 뒤 난해하기에 말라르메를 전공한 사연, 그리고 철학을 전공하게 된 동기 등 ‘하나만의 선택’을 통해 접하는 내용들은 말 그대로 지적 거인이 걸은 큰 발자취이다.


저자를 형성한 여러 책들 중 가장 근원적인 것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 담긴 실존주의를 해설한 일본어 번역서이다. 이 책은 지적 혼돈과 정서적 허무주의에서 헤매던 저자에게 빛이자 구원으로 다가왔다. 데리다와의 특별한 인연(데리다는 저자보다 생일이 몇 달 늦은 동갑이지만 저자의 학문적 길에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이었다.)은 상당한 관심을 끈다. 저자는 스승을 존경하지만 스승의 언어철학을 비판하는 논문을 쓴 자신의 행보에 대해 진리에 관한 문제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라는 이유를 달았다.


시인이자 불문학자이자 철학자인 저자가 시에 대해 한 말이 특별히 내 주의를 끈다. “아무리 서정적 시라도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그러할 때에 비로소 논리를 초월한 시적 가치를 체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글이다. 저자는 자크 네세르라는 한 교수의 강의를 통해 엉성하기만 하고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난해한 시작품까지도 황홀할 만큼 투명하고 시원스러운 설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55 페이지) 그는 빈말 하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시인, 그리고 한 시를 분석하고 설명해주곤 했다고 한다.(189 페이지)


저자는 어떤 철학자도 그대로 추종하지 않으며 수많은 철학자들로부터 무한한 지적 통찰력과 지혜를 배우며, 특정 종교를 믿지 않지만 자신을 누구 못지않은 종교적인 사람으로 여긴다. 저자는 양이 얼마 안 되는 정독(精讀)의 중요함을 강조한다.(130 페이지) 저자는 감수성과 지성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는 아무리 서정적인 시라도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저자의 앞선 견해와 공명한다. 저자는 시에 심취하고 문학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믿고 예술에 깊이 끌린 이유는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심미적인 것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도덕적인 차원의 이유 때문이라 말한다.(175 페이지)


저자가 사르트르에게 깊은 영향을 받고 매력을 느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한편 저자는 그가 부러운 존재에서 미움의 대상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오직 한가하고 피와 고통을 느껴보지 않은 머리 좋은 학자들의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싶었다는 것이다.(178 페이지) 저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점, 생각하는 방식과 글 쓰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 계획적이어야 하고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


저자는 가설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직관으로 얻은 비전이 뚜렷할 때 그 가설을 입증하는 것은 노력과 시간, 인내심과 끈기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런 입증의 논지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잘 구성하며, 어떻게 쉽게 쓰느냐이다.(206 페이지) 저자의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저자의 지적 이력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지적 세계가 너무 좁고 어두웠었다는 그의 표현은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누구나 어느 정도씩은 경험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저자는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허약한 상태였으니 어려움이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철학자에게서 종교가, 예술가, 사상가, 시인을 기대하던 저자는 개념과 논리의 세공 기술자로만 보인 분석철학에 회의를 품었다. 물론 에이어의 ‘언어 논리 진리’를 읽고 분석철학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분석철학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281 페이지) 시 분석에 분석철학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는 중학교 시절부터 시인이 되려 한 분이다.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긴 여정을 거친 지적 거인의 면모가 총체적으로 담긴 책이 ‘하나만의 선택’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앞서 발표한 책들을 모아놓은 것이어서 긴장감이 떨어진다. 저자의 여러 책들 중 ‘현상학과 분석철학’을 다시 읽고 싶다. ‘언어철학, 그리고 시와 과학’이란 부제를 가진 ‘인식과 실존’(인문학 전집 5권)을 정독할 필요를 느낀다. 아울러 시 전집인 ‘울림의 공백’(인문학 전집 10권)에 특별히 관심이 간다. 건필을 바라는 마음을 저자께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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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인문학 강사를 만났다. 두 시간의 대화를 끝내며 그녀는 나를 전투적이지 않은 사람이라 표현했다. “전투도 못 하고 몇 수레의 책들과 함께”(소설가 강규의 표현) 떠나보낸 내 청춘을 돌아보게 만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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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명 시인의 ‘비 그치고, 사이’는 명상을 하던 때 마음에 두던 시이다. “내 마음이 나도 몰래 수시로 뛰쳐나가는구나/ 이 들판 저 들판 휘돌다 비칠대며 돌아오는구나/ 아주 떠나지도 못하고 봉우리 몇 개 넘어 넘어 되/ 돌아/ 오는구나 매일이 되풀이구나 이 모진 뿌리 매몰차게/ 끊어버릴 수는 없는지...” ‘일찍 피는 꽃들’이란 시를 통해 해마다 산당화가 피는 계절이면 영화의원 앞 신호등을 제때 건너지 못한다고 한, 꽃망울 터뜨리는 그 나무를 보고 있으면 어떤 기운에 취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린 듯하다고 말한 조은 시인이 생각나는 순간. 내 블로그 이름인 ‘산당화 그늘’은 바로 조은 시인의 ‘일찍 피는 꽃들’이란 시에 나오는 산당화에서 얻어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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