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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의 시간 속으로 - 지구의 숨겨진 시간을 찾아가는 한 지질학자의 사색과 기록
윌리엄 글래슬리 지음, 이지민 옮김, 좌용주 감수 / 더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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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글래슬리의 ‘근원의 시간 속으로’는 서정(抒情)과 서사(敍事) 또는 감흥과 객관의 절묘한 결합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의 지질학자이자 덴마크 오르후스 대학교의 명예 연구가다. 대륙의 기원과 진화, 그것들을 활성화시키는 과정 등을 연구한다. 저자 윌리엄 글래슬리, 구조지질학자 카이 쇠렌센, 구조지질학자로 지구화학과 광물학에도 조예가 깊은 존 코르스트고르가 한 팀을 이루었다. 무대는 그린란드다.

 

이곳은 지의류가 넘쳐난다.(99 페이지).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야생 중 하나인 그린란드는 국토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덮인 곳이기도 하다.(25 페이지) 세 사람의 탐사는 카이와 존이 암석을 읽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논문이 발단이 되었다. 그들은 탐사를 통해 논란 또는 분란을 잠재울 자료를 수집하고자 했다. 과학은 골치 아픈 분야라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는 현실을 단순화한 것으로 결점이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74 페이지)는 설명을 덧붙인다.

 

저자에 의하면 그렇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부단한 수정이 필요하다. 출간된 논문 또한 완벽할 수 없다. 모든 과학자는 다른 이들이 자신의 논문을 보완할 거라고 기대한다. 문제는 발전을 위한 지적 정도가 아닌 의도적 묵살(默殺)이다. 자신들의 논문에 대한 비난에 가까운 논문을 접한 세 사람은 격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암석에 대해 정말 잘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전문 용어들에 실어 자신들의 생각을 표했다.

 

책은 흥미진진하다. 기반암이 무엇인지 같은 기본적인 사안은 물론 지질학 자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정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반암이란 토양이나 굳지 않은 퇴적물 아래에 자리한 단단한 암반이다. 저자가 풍경의 뼈대나 다름없다고 보는 기반암은 그곳에 대한 인상을 형성하고 바람에게 길을 안내한다. 저자는 기반암의 골조라는 말도 한다.(109 페이지) 조류(潮流)의 흐름은 기반암에 의해 제약을 받고 빙하는 기반암 위에 얹혀 있다. 기반암 결정 구조 안에 들어 있는 물은 기반암이 해저의 진흙에 불과했을 때부터 그곳에 있었다.(148 페이지)

 

그러면 지질학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지질학을 드라마가 가득한 분야가 아니라고 정의한다. 암석은 무심하게 답사를 기다릴 뿐이며 꼼꼼히 들여다봐야만 점진적인 변화가 담긴, 지루할 정도로 더딘 단서를 천천히 제공한다. 하지만 관점이 뒤바뀌고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며 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68, 69 페이지)

 

이 말은 지질공원해설의 위상을 숙고하도록 이끈다. 참으로 더딘 지질의 변화를 어떻게 감지해야 할까? 지질공원 해설이란 지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고고학과 생태학, 역사를 포괄하여 지질공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그럼 저자는 더딘 지질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는 대지의 중추에 담긴, 멈춘 적은 없지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느리게 작동하는 역동성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41 페이지)

 

과학에 바탕한 말이지만 시적으로도 들릴 만큼 인상적인 말을 하나 보자. 그것은 “지구의 대기는 지구가 호흡한 산물이며 해양과 강의 구성요소는 생명이 신진대사 활동을 벌인 결과”(18 페이지)란 말이다. 이 말은 “우리는 순전히 학문 연구로서 과학적 흥미를 품고 있지만 우리가 겪은 경험은 신비에 가깝다.”란 말과도 어울린다. 저자는 우리가 야생을 잃으면 우주에서 정신의 중요성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을 잃을 것이라 말한다.

 

‘근원의 시간 속으로’에는 저자의 다섯 차례에 걸친 그린란드 탐사 경험이 담겼다. 저자는 모든 것은 침식에 결국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고 말한다.(65 페이지) 책에는 생소한 용어들도 많다. 봉합대(suture zone), 감람암(橄欖巖) 등이다. 봉합대는 충돌한 두 개의 대륙이 외과 수술에서 꿰매어진 것처럼 만난 지대를 말한다. 감람암은 현무암질의 용암을 만드는 근원암(89 페이지)으로 보통 퇴적물과 함께 산출되지 않는다.(95 페이지) 퇴적물에서는 석류석이 풍부한 암석이 생기기 마련으로 감람암과 석회석이 가까이 자리하려면 구조적으로 강렬한 힘이 필요하다. 이 암석들은 사라진 바다 가설을 지지할 증거다.

 

베개 현무암이란 말도 그렇다. 베개 용암이라는 말만을 들어온 입장에서는 흥미롭게 들린다. 전단대(剪斷帶; shear zone)도 그렇다. 지구 역사의 대부분을 지배한 것은 적막(寂寞)이라 정의하는(61 페이지) 저자는 자갈투성이 해변을 걷는 동안에는 첨벙거리는 파도 소리나 자신의 부츠가 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 시간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야생의 고독 속을 홀로 걷는 시간이라 고백한다.(93 페이지)

 

원자와 분자는 한번 방출되면 무언가 새로운 것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98 페이지) 저자는 이끼에 대해 해박하지 않다. 정착 가능한 자리를 찾아 스스로를 그 안에 밀어넣는(53 페이지) 이끼를 이야기하며 저자는 다양한 형태의 지의류가 존재하지만 광물과 암석에만 단련된 자신의 눈은 몇 종류의 지의류만 식별할 수 있을 뿐이라 말한다.(99 페이지) 지의류는 1년에 0.85mm 정도 자라면 빨리 자라는 편에 속한다.(101 페이지) 1년에 0.025mm 정도 자라는 지의류도 있다.

 

저자는 전체의 다른 부분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전체는 처음부터 우주의 모든 것이었다고 설명한다.(103 페이지) “기억에 저장된 과거가 풍부할수록 지금 이 순간과의 일치성이 더 강해지며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115, 11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물은 암석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분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끊임없는 재구성의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117 페이지) 맞는 말이다. 그러니 이는 앞에서 인용한 “모든 것은 침식에 결국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65 페이지)는 말과 어긋나는 듯 보인다.

 

저자가 바라보는 식물은 암석의 균열 부위와 틈에서 끈질기게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존재다.(122 페이지) 지구 내부에 깊숙이 묻힌 채 수백 도로 달궈진 결과 재결정화가 이루어진 석회암은 대리암이 되었고 진흙과 모래는 녹색 편마암과 편암이 되었다.

 

저자가 지질학을 전공한 것은 우연이었다.(126 페이지) 서핑에 미쳐 해양학을 공부하게 된 저자는 생물학, 화학, 지질학, 물리학 중 하나를 전공한 뒤 집중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서 지질학을 선택했지만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우리가 서 있는 곳은 6,500만년전 지하 15km에 위치했던 마그마의 방입니다.”란 교수의 말에 매료되어 지질학에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127, 128 페이지) 저자는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는 흥분이 앞서지만 그보다 더 선명한 감각은 우리가 그곳에 있다는 경이로움이라 말한다.(173 페이지)

 

대륙은 처음 형성될 때 맨틀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마그마로부터 진화한다. 일부 마그마는 지각을 관통하여 성장하고 있던 대륙 표면 위로 용암의 형태로 분출하지만 아래로부터 올라와 대륙의 바닥을 만나게 되는 어떤 마그마들은 너무 점성이 높거나 무거워서 지각을 뚫지 못한다.(187, 188 페이지) 저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윤곽의 희미한 형체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190 페이지)

 

“새로운 지점을 살펴볼 때마다 또 다른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그것은 지질학적인 이야기에 살을 덧붙여줄 작은 통찰력을 제공한다.”(193 페이지) 이 문장의 핵심 어휘는 '지질학적인 이야기에 살을 덧붙여줄 작은 통찰력'이란 말이다. 나 또한 지질학적 이야기로부터 작은 통찰력을 길어올릴 수 있기를 바라며 책을 읽는다. 책 곳곳에 지구 역사를 헤아리게 하는 글, 그리하여 지질학자의 남다른 안목을 보여주기에 족한 글이 등장한다.

 

“수천 년 전 하늘에서 내려온 빗물이었던 빙벽은 동쪽으로 몇 백 킬로미터 이어져 있었다. 이 빙벽은 깊숙이 묻힌 상태에서 압축을 받은 뒤 재결정화 과정을 거쳤고 빙상의 거의 바닥까지 가라앉은 다음 기반암에서 암석의 파편을 떼어내 이들을 고운 가루로 분쇄했을 것이다. 그 후 1년에 몇 센티미터의 속도로 아주 천천히 융기해 이제 내 앞에 놓은 절벽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201 페이지)

 

그러고 보니 그린란드는 지구에서 가장 광활하고 끝없이 펼쳐진 야생 중 하나로 국토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덮여 있다는 부분(25 페이지)을 전해야겠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을 보자. ”빙하는 크레바스와 길게 갈라진 틈으로 부서지면서 다시 흘러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글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한 ‘마지못한 듯 떨어지는 물‘과 공자가 말한 ‘용감한 물‘을 연상하게 한다. 단순한 의인적 표현이라기보다 대조되는 담론 또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2미터 높이의 노두(露頭)의 기단에 주름져 있는 암녹색과 황갈색의 두터운 이끼 덤불을 보며 저자는 자신이 진균학자였다면 천국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겠지만 지질학자인 자신은 어리둥절해하며 그곳을 지나갈 뿐이라 말한다.(212 페이지) 물고기 사냥에 뇌가 연결되어 있다는 바다표범처럼 우리도 풍경이나 깨끗한 물, 하늘을 바라보는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고 말하는 저자에 의하면 이는 생존과 관련된 진화론적인 지식에 기인한 방식으로 우리는 이처럼 내재된 지식과 교훈의 총체다.(215 페이지)

 

과학, 아니 사는 것의 패턴이라 할 내용이 ’야생의 대지와의 작별‘이란 장에 나온다. 이 지역 역사에 대한 상충된 해석은 해결되었지만 오랜 역사의 단서를 고려한 결과 새로운 복잡함이 드러난다는 말이다.(217 페이지) 자연의 과정을 분석적으로만 기술하는 것은 부적절한 방법이라는 말(222 페이지)을 기억하자. 우리의 생각과 꿈은 우리가 알고 보는 것들의 표면에서 반사된 것들이란 말(225 페이지)은 참 인상적이고 시적이다. 미래는 계속해서 뼈의 표면에서 탄생하고 있었다는 표현(162 페이지)과 함께 볼 부분이다.

 

”툰드라 표면에는 새의 뼈와 북극 여우의 두개골, 순록의 뿔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진화론적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이 증거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새하얀 땅 위를 어두운 음영으로 장식하고 있었다.”(162 페이지) 야생을 잃으면 우주에서 정신의 중요성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을 잃을 것이라 말한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어떤 생각을 더할까? 야생은 추론하고 시를 짓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자유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문턱이다.(226 페이지)

 

“석류석 덩이가 손가락 끝에 단단하게 부딪히는 감촉을 느끼며 내 손길이 신성모독인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92 페이지)는 저자는 자신이 서 있는 곳,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과 결정이 따뜻한 태양빛을 받고 있는 이곳의 풍경은 너무도 광활해 또 다시 누군가의 손길이 닿거나 누군가 발견하게 될 확률이 극히 낮았다고 생각하며 그런 생각만으로도 이 헐벗은 암석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지 정말 기이했다고 말한다.(92 페이지)

 

저자는 현미경을 통해 암석의 얇은 조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어떤 인간도 상상하지 못한 맨눈으로 본 적 없는 색상과 형태의 환상적인 기하학에 빠져들어 자기 인식은 사라지게 된다고 말한다.(228 페이지) 물론 단순히 연속적인 사건들을 표로 만든다고 역사가 재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광물이 언제 형성되고 조직이 언제 생기는지 그 연대를 알아내는 방법이 필요하다.(229 페이지) 그에 부합하는 광물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저어콘이다. 복원력이 뛰어나고 지각의 중간층이나 깊은 층에 있는 암석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온도와 압력에서 안정적이고 단단한 저어콘은 지질학적 시계다.(230 페이지) 저어콘에는 우라늄이 들어 있다. 우라늄은 일정 속도의 방사성 붕괴를 통해 납, 토륨, 헬륨으로 분해된다.

 

저자는 그을린 머리카락 냄새, 사막의 모래 냄새를 풍기는 (깨진) 암석에 대해 이야기한다.(97, 235 페이지) 이 암석은 적어도 지표 60km 아래에 묻혔던 존재다. 이 암석은 저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야생의 진면모를 느끼게 하는 진객(珍客)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전문 영역의 책이지만 술술 읽힌다. 저자의 인문적 지향성과 뛰어난 글솜씨 덕이리라. 현장을 돌아본 살아 있는 여정이 가장 중요한 몫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저자가 섭섭해할까? 어떤 경우든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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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같은 걱정 한입씩 먹어치우자 - 인생의 단계마다 찾아오는 불안한 마음 분석과 감정 치유법
장신웨 지음, 고보혜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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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라는 저자. 심리치료사가 쓴 ‘코끼리 같은 걱정 한입씩 먹어치우자’는 불안에 대해 논한 책, 나아가 그 해결책으로 글쓰기에 대해 논한 책이다. 저자는 불안보다 더 무서운 것은 미래에 대한 끔찍한 상상이라 말한다. 불확실성이 불안을 가져오지만 불안을 부풀리는 진짜 주범은 미래에 대한 부정적 예측이다.

 

인간은 부정적 소식에 민감하다. 이는 진화적 원인을 갖는 문제다. 인간은 진화를 거치면서 강력한 위험 감지 능력으로 적자생존을 터득했다. 부정적 마음은 편협한 사고를 낳는다. 저자는 글쓰기를 처방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분노, 눈물, 상심, 무기력 등으로부터 평정심을 되찾을 때까지 글을 썼다고 한다. 수많은 노력 뒤에 불안감이 자리한다.

 

노력이 진정한 효과를 얻으려면 자신을 잃지 않았는지, 노력이 자의적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을 전한다. 이는 한 심리연구가의 말이다. SNS의 부정적 영향력은 어떤가? 매체는 파편화된 글을 쏟아낸다. 저자에 의하면 파편화된 정보는 감각을 흐트러지게 한다. 자극 후 상당한 공허감이 밀려오고 결국 불안과 자기 역량 결핍을 낳는다.

 

자아 역량이 부족해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면 불안감에 휩싸이고 경솔한 생각에 빠진다. 그 결과 자아가 견고하게 세워지지 못하고 파편적인 인지로 기울어진 자아가 세워진다. 악순환 또는 늪에 빠지는 것이다. 저자는 존재감은 고독함 속에서 완성되는 자아 훈련이라 말한다. 가장 좋아하는 일, 가장 끌리고 가장 잘하는 일을 선택해 독립적으로 행함으로써 존재감을 높일 수 있다. 손으로 만드는 것, 창작 작품을 쓰거나 책을 낭독해 인터넷에 올리는 일로도 가능하다.

 

저자는 스스로 하는 글쓰기를 예로 들며 문자의 축적으로 자기 감각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덧붙인다. 물론 글쓰기에 몰입하기는 쉽지 않다. 저자는 누구나 잘 쓰고 싶어 하지만 글쓰기 연습에는 ‘잘 썼다‘라는 기준은 없다고 말한다. 머리를 쥐어짜 무엇을 쓸지 계획할 필요가 없고 일단 펜을 들고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삶을 멀리 보고 오늘을 살아야 욕망을 다스리는 자기 통제력이 실행될 수 있다. 불안 극복의 단초를 말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글쓰기에 대해 몇 가지 ’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 1. 글쓰기를 행동의 대안으로 생각하지 말라. 2. 자기애를 글로 만족시키지 말라. 3. 글쓰기에 지나치게 분출하지 말라. 4. 글쓰기를 유일한 친구로 삼지 말라. 5. 글쓰기를 지나친 반성문으로 삼지 말라 등이다.

 

몸을 황폐하게 만든 결과 얻는 것은 끝없는 공허감과 허망함, 불안 등이다. 삶은 그로 인해 생동감을 잃는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남보다 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두뇌에 자신을 둘러싼 감각적 에너지를 받아들이자. 자아도취가 아닌 자아발견에 도전하자. SNS는 나르시시즘을 조장한다. 저자는 최첨단 과학, 느슨한 대출정책 등이 부추기는 전능감에 대해 비판한다.

 

나르시시즘에 바진 이들의 자존감은 외부 조건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자기애가 높아지고 외부 조건이 좋을 때는 자기애에 상처를 입는다. 자신의 우월감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 검증을 차단한다. 진실한 모습이 밝혀지는 것에 공포와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에게 꽃과 박수를 안겨주는 세계에만 머물고 싶어 한다.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은 수없는 좌절에서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것이다.

 

배우겠다는 자세로 차곡차곡 쌓은 노력만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삶에 대한 경외심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방패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타인의 희망이 되고 기대를 한 몸에 받다가 정작 성공을 거둔 뒤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을 예로 든다. 성공의 출발 자체가 자신이 간절히 원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글쓰기 연습의 집단 형식이다. 치료 목적의 글쓰기 모임과 비치료 목적의 모임이 있다. 치료 목적의 모임에는 전문성이 요구된다. 내면의 세계를 깊이 탐구하려는 욕구가 있고 심리적 상처를 치료하고 싶은 사람에게 적합하다. 우리는 어린 시절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 알 수 있다. 관건은 어린 시절은 이미 지나온 시절이므로 자신이 상처 입은 아이라고 한탄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뇌과학자들은 출생 후 첫 기억이 편도체에 남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구체화되지 않는 비언어적 기억이 새겨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가 격렬히 싸우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면 그 긴장된 분위기와 초조함이 기본 정서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심각한 충돌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사람은 당시의 상처를 평생 잊지 못한다. 이런 정서와 신체의 직감은 모두 암묵 기억이 되어 대뇌의 편도체에 저장된다.

 

암묵 기억 중 불안과 공포는 어느 순간 은밀하게 드러난다. 상대와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과장되게 당황하게 되거나 친밀한 관계를 대할 때 감정이 제어되지 않고 사소한 일로 배우자와 싸우게 되는 일 등이다. 그 원인은 마음 깊은 속에 싸우는 소리가 떠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애착이 중요하다. 안정 애착, 회피적 애착, 양가적 애착 등이 있다.

 

개인의 독특한 경험 구조를 스키마라 한다. 이는 세상이 뒤바뀔 정도의 영향력이 아니면 바뀌지 않는다. 저자는 상처 받은 어린 자신에게 글을 쓸 것을 권한다. 어린 시절 아름다웠던 추억을 써라. 자신에게 쌓인 원망을 어떻게 처리하고 표현하는지가 중요하다. 위기의 순간에 가정은 중요한 정서적 가치를 제공하지만 현대 가정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결혼에 앞서 자신의 기회비용을 따진다. 결혼에 상응하는 항목으로 자기 계발, 커리어 손실, 자유를 꼽는다. 기회비용이란 하나의 재화를 선택했을 때 그로 인해 포기한 것들 중 가장 큰 것의 가치를 말한다. 결혼 대가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 결혼 문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미성숙한 방어기제 중 가장 흔한 것이 투사(投射)다.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원시적 방어기제를 쓴다. 분열, 부정, 폄하 등 본능적이며 낮은 수준의 반응 상태를 보인다. 트라우마는 올가미가 아니다. 아들러는 트라우마의 관점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트라우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트라우마를 겪은 후 이전과 똑같이 선택할 수 있고 새로운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

 

상황에 대한 통제력 상실은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핵심 요소다. 위험은 지나갔지만 뇌리에 박힌 장면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그 일이 반복해서 상기된다. 비슷한 일에서도 그때를 떠올리며 두려워 한다. 그의 시간은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멈춰 있다. 그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강렬한 감정만 재현된다.

 

엄청난 재난과 위험에서 평온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간과되기 쉬운 피해자다. 그들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하다. 공포, 분노,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충격이 너무 강렬하면 마음을 설명할 수 없고 강렬한 감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져 언어 기능을 상실하게 만든다. 이런 피해자는 시간 감각을 잃고 해리 상태가 되거나 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트라우마는 사람을 과거의 거센 물결에 좌초시키고 그의 정신 세계를 연옥으로 떨어뜨린다. 트라우마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망가뜨려 우리를 생명의 폐허에 가두지만 사랑과 상상력은 이 폐허 위에서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도록 돕는다. 아동기의 트라우마는 무의식에 깊게 뿌리내려 심리적 강박으로 좌절을 불러오고 발달을 후퇴시킨다.

 

현실에서는 어린 시절과 유사한 고통과 콤플렉스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는 다른 각도에서 보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는 본능적 노력이다. 왜 심각하고 강렬한 경험을 만드는 사람과 만나고 비슷한 상황에 매료되어 자신도 모르게 애증의 관계를 맺는 것일까? 트라우마의 기억이 즐거움이나 고통의 깊은 감정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옛 원한을 달래고 보상을 얻어 통제감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실패는 또 한 번 자신을 자극하고 계속 반복하도록 채근한다.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을 가진 소녀는 아버지는 원래 착한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술주정과 폭력에 의존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좀 더 잘했다면, 아버지를 더 사랑했다면 아버지는 분명 좋아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의식에서 아버지를 구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그 감정이 아버지와 아주 닮은 남자 친구에게 이입되었다.

 

저자는 글쓰기는 안전한 자아 표현 방식으로 치유의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말한다. 감정을 글로 쓴다고 당장 정서적 이완이나 쾌락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심리적 불안정 문제로 건강센터를 찾는 비율이 낮아졌다. 저자는 글쓰기 과정에서 감정 상태를 조절하기 어렵다면 멈추라고 조언한다. 준비가 덜 되었다면 억지로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 심각한 트라우마 사건을 겪었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트라우마를 보는 것은 생며에 대한 자각이고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무거운 수용이다. 트라우마를 남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위대한 자비다. 트라우마에서 자신을 구하는 것이 불안감을 해소하는 근본적 해결책이다. 저자는 친밀한 관계, 신뢰 관계, 사회적 관계를 논한다. 친밀한 관계는 사적으로 연결된 밀접 관계다. 신뢰 관계는 안정에 기반을 둔 관계로 서로 지지하고 협력해서 목표를 달성한다.

 

사회적 관계는 상호 우호적, 호혜적이어야 한다. 척도가 필요하다. 경계가 너무 경직되면 간격이 벌어지고 모호하면 독립된 공간을 잃고 서로 침해하고 피해를 주게 된다. 스스로 하는 글쓰기 연습은 1) 프리라이팅, 2) 자아 관심, 3) 자체 창작 등의 단계를 갖는다.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람은 에너지가 넘친다. 자연을 숭상하며 자율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한다. 어떤 이들은 하루 하루 퇴화한다. 의존적이면서 독립된 인격 없이 정신세계가 공허하면 삶이 불안해진다. 타인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조금씩 관계의 울타리를 좁혀가며 삶이 허투루 소모되지 않도록 불필요한 관계는 정리해야 한다. 세상이 정한 행복 모델은 내 삶의 의미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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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묻고 지리가 답하다 - 지리 선생님들이 들려주는 우리 땅, 우리 역사 이야기 묻고 답하다 3
마경묵.박선희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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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윤관의 강동 6주 이야기를 할 때 나오는 이야기가 세종에 대한 이야기다.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우리나라 자연 경계가 확정된 시기가 세종 때다. 세종은 4군 6진(4郡6鎭)을 개척했다. 군은 행정구역이고 진은 군사 방어 주둔지다. 일반적으로 국가간 경계는 강이나 높은 산맥 같은 자연적 경계를 따라 형성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방어를 위해서 국경을 따라 높은 성벽을 쌓아야 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비용과 수고가 많이 든다.

 

4군이 설치된 지역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 거리가 워낙 멀다. 여진족과 같은 이민족이 우리의 북쪽 경계를 넘기도 했지만 생활이 어려워진 우리의 주민들도 두만강 넘어 만주 지역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연이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지형, 지세를 잘 파악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전쟁 당시 선조가 임진강을 건넌 것에 사연이 있다. 백성들이 자기 집 대문을 뜯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마을 이름이 널빤지 판자를 써서 판문리라 불리게 되었다. 문제는 판문(板門)이란 이름이 선조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점이다. 판문점은 휴전 당사자인 중국을 위해 한자로 이름을 표기하는 과정에서 널문리 가게를 판문점이라 하게 된 데서 유래했다.

 

지피지기에서 지기는 자기 군대의 군사적 능력이나 정보력 외에도 자신의 지형을 읽는 능력을 포함한다. 신도시들은 계획 도시다. 국가 주도의 계획적 신도시 건설은 왕조가 교체되면서 새 수도를 세울 때 볼 수 있다. 새로운 국가 건설에 따른 수도 이전이 아님에도 대규모 신도시 건설을 한 사례가 있다. 정조의 수원 화성이다.

 

화성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孝; ’이장; 移葬‘)로부터 비롯되었다. 화성이 북의 개성, 동의 광주(光州), 서의 강화에 이어 남의 거점 도시로 선정된 것도 중요하다. 방어의 기능이 중요했던 조선 초기와 달리 상업이 발달했던 조선 후기에는 물자 교류의 편리성이 도시의 중요 기능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구수원읍에 베해 새롭게 조성된 팔달산 아래의 화성(華城)은 삼면이 넓게 개방되어 있으며 지형도 평탄하여 서울에서 남으로 가는 큰 길을 만들기에 훨씬 유리했다. 신도시 화성의 이미지는 상업 활동이 활발하던 18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도시의 지형적 조건을 잘 갖춘 곳이었다.

 

신도시로서의 화성의 이런 장점을 먼저 알아본 사람이 반계 유형원이다. 반계(磻溪)는 방어를 고려한 전통적인 분지 지형보다 외부와의 교류가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개방적인 곳, 넓은 논과 들이 펼쳐져 있어 경제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곳을 좋은 공간으로 보았다. 그런 곳의 대표가 바로 화성이었다.

 

정조는 100년전에 쓴 반계의 글에 큰 감명을 받고 새로운 신도시를 화성으로 정했다.(유형원의 호 반계는 강태공이 낚시를 했다는 강이다. 산시성의 동남쪽에서 위수로 흘러든다.) 많은 축성 전문가가 있었음에도 젊은 정약용이 부름받은 것은 정조가 기존의 읍성과는 다른 성곽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했기 때문이다. 화성의 성곽에는 오성지(五星池)와 공심돈(空心墩) 등 새롭게 갖춰진 시설이 있다.

 

오성지는 적군이 성문에 불을 지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문 위에 벽돌로 다섯 개의 구멍을 내고 그 뒤에 물을 저장한 큰 통인 누조(漏槽)를 설치하여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킨 3층의 망루로 열 곳에 총구를 설치했다.

 

화성에는 총 네 개의 성문이 있다. 네 개의 성문 모두에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옹성은 성문 밖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 옹성 문은 보통 성벽 구석에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남문인 팔달문, 북문인 장안문의 옹성은 성문이 중앙에 있다.

 

유사시 방어와 함께 물자 유통도 고려한 포석이다. 신도시는 많은 사람의 이주가 이루어져야 하고 자족 기능이 있어야 한다. 화성은 자족 기능을 갖춘 도시였다. 아버지에게 효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화성 신도시를 건설했지만 이면에는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고 개혁정치를 완성할 새 공간을 만들려는 정조의 의도가 있었다.

 

강화도에는 단군이 제사를 지냈던 천제단이 있어 우리 역사가 처음 열린 곳이자 국가가 어려운 시기에 처했을 때 왕이나 왕자가 피난한 주요 장소였다. 폐위된 국왕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또한 외국 군대의 침입로였다. 빠른 조류와 더불어 넓은 갯벌 또한 몽골군이 강화로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우리나라 연안 섬들은 대개 과거 빙하가 녹으면서 상승한 해수면에 의해 저지대가 침수되어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연안섬에서는 한반도의 서남부와 같은 넓은 평야가 형성되기 어렵다.('연안; 沿岸'은 바다와 육지가 맞닿아 서로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강화도의 평야가 넓은 이유는 지속적 간척 사업 덕이다. 강화도 전체 면적의 1/ 3이 간척으로 만들어졌다.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 개성과 가까우면서도 방어에 유리한 강화도로 천도가 이루어지면서 강화도 인구가 급증했다.

 

산지 개간은 과할 경우 산사태, 토양 유실 등의 문제를 유발한다. 고려가 근본적으로 세운 대책이 간척 사업이다. 조선 초 비교적 안정기에는 간척 사업은 진행되지 않았다. 조선 중기 이후 양란을 거치며 도성의 외곽 방어가 중요해지며 강화도의 간척 사업은 재개되었다. 강화도는 한강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오는 물자와 세금으로 걷은 쌀 등을 수송하는 물길의 중요 길목에 위치한다.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을 식민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물러났지만 일본은 달랐다. 강화(江華)라는 지명은 강이 꽃처럼 피어 있는 듯 하다는 의미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모두 강화를 통해 서해로 빠져 나간다. 강화도를 통해 한강을 따라가면 수도 한양으로, 임진강을 따라가면 파주와 문산으로, 예성강을 거슬러 가면 개성으로 진출입이 가능하다.

 

천수답에 의존해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기후의 영향을 크게 받는 이앙법은 위험 요소를 안고 있는 농사법이어서 처음 국가에서 금지했다.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은 그 해부터 7년간 극심한 가뭄을 겪었고 그 후에도 홍수나 태풍 등의 자연재해를 계속해서 겪어야 했다. 자염(煮鹽)보다 염화나트륨 함량이 높은 천일염은 화학 공업과 무기 산업의 원료가 되었기에 군사대국을 지향한 일본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다.

 

우리나라와 달리 대규모 갯벌이 없는 일본은 천일염을 생산하기에 적당하지 않아서 우리나라를 점령하는 동안 우리나라 소금 생산 방식을 대부분 천일염으로 바꾸었다.(갯벌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얕은 바다에서만 발달한다. 염전이 가능하려면 지형적 조건 이외에 기후까지 알맞아야 한다. 물을 증발시킬 수 있도록 기온이 어느 정도 높아야 하고 비가 오는 날이 적고 바람이 적당해야 한다.

 

천일염은 가슴 아픈 일제 식민지 정책 속에서 탄생했지만 한국적 천일염으로 거듭나면서 주목받는 음식 자산이 되었다. 한양은 커다란 분지(盆地) 지형을 하고 있어서 성을 쌓아서 외적 침입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정조의 골머리를 썩였던 안흥은 현재의 태안반도 앞바다다. 태안 앞바다인 안흥량은 전라, 충청, 경상 지방의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할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바다쪽으로 돌출되어 있어서 파도가 강하고 태안반도의 구릉성 신지가 반도의 끝을 쳐서 해수면 바닥으로 이어져 있어서 크고 작은 섬들과 암초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고려 인종 때부터 조선 현종 때까지 무려 500년이 넘도록 수천 명의 일꾼을 동원하여 시도한 운하 공사는 모두 실패했다. 실패의 주요 원인은 단단한 지반과 큰 조수 간만의 차 때문이다. 태안반도 전역의 암반은 지질 구조상 화강암이다.

 

장돌뱅이의 다른 말이 보부상(褓負商)이다. 모든 소상인들의 물주 역할을 한 사람들이 객주다. 객주들은 은행 업무, 숙박업, 매매 중개업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 임방(任房)은 보부상의 총 본부다. 채장은 보부상들의 신분증인 동시에 상행위 허가증이다. “망언하지 말고 패악한 행위를 하지 말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라.” 채장 뒷면에 쓰인 말이다.

 

역사적으로 활동이 미미했던 보부상들이 조선 왕실을 도와 본격 활동을 한 것은 구한말 외세의 침략을 겪고부터다. 흥선대원군은 보부상들의 조직력과 충성심에 주목했다. 이들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실제 전투에 참여해 농민군과 싸웠으며 정찰대, 보급대 역할을 하며 정부군을 도왔다. 농민군이 어느 정도 제압되자 정부는 보부상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무리를 모으는 일을 금지시켰고 이들은 각자의 본거지로 돌아가 자신의 본업인 장사에 전념했다. 갑오개혁으로 해체되었던 보부상을 비롯한 전국적인 상업 조직이 부활했다. 정부의 보호 아래 설립되었고 활동했던 황국협회는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독립협회와 대립했다.

 

시장이 매일 열리지 않고 일정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열린 이유는 구매력을 갖춘 인구 규모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지도로 인정받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조선 태종 대에 만든 지도)는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훔쳐 갔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세계 모든(혼일) 지역(강리; 疆理)의 역대 국가 수도를 그린 지도라는 의미다. 모든 지도에는 세계관이 담겨 있다.

 

봉금(封禁) 정책이란 청나라가 자기 민족의 발상지라고 여기는 만주 동북 지역 산해관 일대를 봉쇄해 한인(漢人)들의 만주 이주를 금지한 정책이다. 19세기 말 청나라의 봉금 정책이 풀리고 함경도,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기아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간도, 연해주 등지로 터전을 옮겼다.

 

1866년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도 함경북도에서 간도로 이사했다. 간도는 만주의 동남부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백두산 서쪽이 서간도, 백두산 북쪽이 북간도다. 최근에는 북간도 지역만을 간도라 칭하기도 한다. 섬은 아니지만 두만강, 송화강, 흑룡강(아무르강) 등에 둘러싸인 섬 같다고 하여 간도(間島)라 한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두만강 이북으로 이주해 살면서 개간한 땅이라 하여 간토(墾土)라 하던 것이 간도로 바뀌었다는 말도 있다.(아무르는 큰 강이란 의미다.)

 

우리나라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인 간도는 926년 발해가 망한 뒤 여진족(만주족)이 들어와 산 땅이다. 백두산 정계비에 나오는 토문강에 대해 우리나라는 두만강과 다른 강이라 생각하고 중국은 두만강이라 생각했다. 국경을 확정짓는 양국의 담판에서 우리측 대표 이중하 등의 노력으로 토문강이 두만강과 다른 송화강의 지류임이 밝혀졌다.

 

을유감계(乙酉勘界) 담판(1885년) 당시 그린 지도에 의하면 백두산 정계비로부터 국경을 표시했던 토퇴(土堆)와 석퇴(石堆.. 堆; 언덕, 쌓을 퇴)가 두만강이 흐르는 방향이 아니라 백두산 북쪽의 송화강 쪽으로 연결되어 있어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른 강임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이 청나라와 협상에 나섰다. 처음에는 간도를 우리 영토로 간주했으나 1909년 만주의 철도 부설권과 탄광 채굴권 등을 얻는 만주협약을 체결하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기는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간도는 우리 영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간도협약 체결 이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간도 이주는 계속되었다. 이후 간도는 독립군의 항일 무장 투쟁 중심지가 되었다. 명동촌 건설, 신흥무관학교 설립 및 활약, 청산리대첩 등은 간도 지방에서 이뤄낸 성과다.

 

간도협약은 국제법적으로 무효다. 1965년 한일 양국은 한일기본조약 제 2조에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확인했다. 을사늑약을 근거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이 체결한 간도협약은 원천 무효다. 더구나 1952년 중일평화조약에서도 1941년 이전 일본이 체결한 모든 협약을 무효화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이 맺은 만주협약이 무효화한 것과 달리 그 대가로 체결한 간도협약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다.

 

북한은 1962년 중국과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하고 이후 백두산을 중국과 분할하기까지 했다. 중국 또한 동북공정으로 간도에서 펼쳐졌던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왜곡, 편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소련은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 점령을 시도하자 조선인들을 중앙 아시아(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이 연해주(러시아 동쪽 연안) 지방의 한인들을 일본의 첩자로 이용해 소련 침략에 활용할 것이라 판단한 결과였다. 늘어나는 한인과 러시아인 사이의 충돌을 차단하고 한인 공동체를 분산시켜 자치 요구 세력의 형성을 저지하려는 의도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임시 정부의 근거지였던 상하이는 어떤 곳인가? 중국 양쯔강 하구에 있는 상업 및 산업 도시로 지형이 평평하며 내륙 수로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다. 한반도 이야기에서 상하이까지 ’역사가 묻고 지리가 답하다‘는 지리, 지형, 지세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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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 한국사 상식 44가지의 오류, 그 원인을 파헤친다!
박은봉 지음 / 책과함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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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正史) 또는 실록(實錄)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는 주목할 책이다. 이런 책은 역사 전공자만이 아니라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야 할 책이다. 역사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무지한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책은 다섯 부로 이루어져 있다. 어원 관련 부분(1부), 인물 관련 부분(2부), 유물. 유적 관련 부분(3부), 책/문헌, 사진 관련 부분(4부), 정치/ 사회/ 생활 관련 부분(5부) 등이다.

 

우리는 조선(朝鮮)에 대해 오해한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 3 조선에 대해서 그렇다. 단군조선 무시 내지 왜곡은 조선의 성리학 중심주의(사대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17세기 호란 후 주자학적 정통론이 등장하면서 기자조선을 정통의 시발로 삼고 우리 역사를 기자조선, 마한, 신라, 고려, 조선으로 체계화하는 사고 방식을 정초(定礎)했다. 대한(大韓)이란 이름 자체가 기자조선 - 마한을 정통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왕건은 성(姓)이 없었다. 왕건이 이름이었다. 후에 왕을 성으로 삼고 건을 이름으로 삼았다. 왕건 아버지는 용건, 할아버지는 작제건이었다. 백성은 100 가지 성을 가진 집단으로 고려시대에 백성은 지배집단을 일컬었다. 고려 초에 이름과 본관이 등장했다. 왕건은 이름과 본관을 만들어 주었다. 능산을 신숭겸으로, 사괴를 복지겸으로, 홍술을 홍유로, 백옥삼을 배현경으로 삼은 것이다.

 

본관을 주었다는 의미는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주었다는 의미다. 본관은 국가가 민에게 역(役)을 부과하려는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노비에게는 해당 무(無)였던 것이다. 왕건은 지명도 부여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936년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나선 왕건이 이천의 복하천에서 큰 홍수를 만나 곤란에 처하자 서희의 선대조 서목(徐穆)이 도와 무사히 내를 건너 천하를 도모하게 하였다. 후일 왕건이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미의 주역의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이와 천을 가져와 이천이라는 지명을 하사했다.

 

고려 시대의 백정은 도살업 종사자가 아니라 일반 농민이었다. 백의민족의 백의가 흰옷이 아니라 염색하지 않은 옷이라는 의미이듯 백정(白丁)은 정(丁; 향리, 군인)이 아니라는 의미다. 고려 때는 도살업자를 양수척(楊水尺), 화척(禾尺) 등으로 불렀다. 양수척은 후삼국시대부터 고려 초 무렵에 들어와 정착한 말갈 또는 거란인의 후예로 시간이 지나면서 화척, 재인 등으로 불렸다.

 

그러던 백정이 조선 세종 당시 양인 확보 정책으로 도살업자가 되었다. ”재인과 화척은 본시 양인이지만 업이 천하고 칭호가 특수하여 백성들이 모두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고 그와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니 불쌍하고 민망합니다. 칭호를 백정이라 고쳐서 평민과 서로 혼인하고 섞여 살게 하며 그 호구를 적(籍)에 올리고 경작하지 않는 밭과 묵은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의 밭을 나눠주어서 농사를 본업으로 삼게 하소서.“

 

양수척 또는 화척은 신량역천(身良役賤)이었다. 국가 파악권 밖의 사람들이었다. 재인과 화척들이 백정이란 칭호를 얻자(백정으로 승격하자) 진짜 백정인 농민들은 불만스러워 하며 새로 백정이 된 자들을 신백정이라 칭했다. 세종 실록에 의하면 관리와 백정들이 신백정을 사냥 등 여러 일에 동원해 부렸다. 농민들은 백정이라는 호칭 자체를 기피하며 그들을 천시했다.

 

일반 농민들은 백정 칭호 대신 평민, 양민, 촌민, 백성 등으로 불렸고 백정은 도살업자를 지칭하는 말로 격하되었다. 조선 명종 당시 임꺽정은 유기를 만드는 고리백정이었다. 조정은 백정을 농민과 동화시키려던 정책을 포기하고 철저히 차별하여 통제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바꿨다.

 

저자는 두문동에서 두문불출이란 말이 나온 것이 아니라 두문불출이란 말에서 두문동이 나왔다고 말한다.(두문동 이전에 두문불출이란 말이 있었다.) 함흥차사로 간 사람들 중 죽은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고 그것도 조사의(趙思義)가 이끄는 반란군에게 죽은 것이다.

 

조선 시대의 이상적 여성은 현모양처가 아니라 열녀효부였다. 바보 온달은 평강공주와 결혼한 덕분에 출세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무공을 세워 왕의 눈에 띈 덕분에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다. ’고려사‘에 최영이 아니라 최영 아버지가 황금 보기를 돌 같이하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영은 유언대로 청렴하게 살았다. 물론 왜구를 물리치고 나라에서 받은 토지, 노비 등이 상당했다.(최영 딸은 우왕의 妃다.)

 

강감찬은 귀주대첩에서 강물을 막아 대승을 거둔 것이 아니다.(귀주대첩은 들판에서 벌어진 전투다.) 강물을 막아 대승을 거둔 전투는 흥화진(의주) 전투다. 귀주대첩, 흥화진 전투 모두 거란의 3차 침입 때 일어난 전투다. 거란은 세 차례(993년, 1010년, 1018년) 고려를 침입했다.

 

1차 침입은 서희의 담판으로 끝이 났고, 거란 왕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온 2차 침입은 고려 왕 현종이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 가는 위기에 몰린 끝에 직접 거란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는 친조(親朝; 제후가 친히 조정에 나아가 천자를 찾아 뵘)를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막을 내렸다. 3차 침입은 친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침공한 것이다.

 

당시 강감찬은 71세의 고령이었다. 참고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도 강 상류에 둑을 쌓아 물을 막아놓았다가 일시에 터뜨려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된 바가 없다. 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강남 지방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한 뒤 귀국길에 목화씨를 몰래 붓두껍에 넣어가지고 왔다고 한다. 하지만 목화씨는 국외반출 금지 품목이 아니었다. 문익점은 목화씨를 몰래 붓두껍에 숨겨 들여오지 않았다.

 

강남에서 귀양살이를 하지도 않았다. ’고려사’나 ‘태조실록’에 얻어 가지고 왔다,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익점은 30세에 과거에 급제해 공민왕 12년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당시 원나라는 공민왕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특히 원 순제의 제2 황후인 기황후는 공민왕을 몰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공민왕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기황후는 부원배 최유,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 등과 손잡고 원 순제를 부추겨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 문익점은 원나라가 택한 덕흥군 편에 섰다. 덕흥군의 군사 1만은 최영,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과 압록강 이남의 수주(隨州; 지금의 평북 정주)에서 맞붙어 패했다. 이에 원나라는 덕흥군 옹립 계획을 철회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익점은 목화씨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돌아온 문익점은 덕흥군에 의부(依附)한 죄과 때문에 파직당했다. 문제는 문익점이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슬그머니 공민왕을 지지한 것으로 또는 본의 아니게 덕흥군 편으로 오해를 받은 것으로 뒤바뀌었다는 점이다. 공민왕에게 끝까지 충성하다가 머나먼 강남으로 귀양살이를 갔다는 이야기, 목화씨는 반출 금지 품목이라는 이야기, 붓두껍에 몰래 숨겨 들어왔다는 이야기 등이 덧붙었다.

 

문익점이 가지고 온 목화씨는 중국 강남에서 나는 다년생 목면이 아니라 화북 지방에서 나는 1년생 초면(草綿)이었다. 물론 문익점 이전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누구도 목화씨를 가져와 백성들을 따뜻하게 해줄 옷을 입힐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문익점은 귀국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잊지 않고 목화씨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

 

이이의 십만 양병설은 시무 6조(이이가 병조판서 즉 지금의 국방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선조에게 올린 글)에도 없고 이이의 문집에도 없다. 선조실록이 아닌 선조수정실록에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서인 세력이 다시 편찬한 것이다. 이유는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이 완성도가 떨어지고 특정 당파에 유리하게 쓰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율곡 사후 그의 제자인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을 토대로 한 것이다. 십만양병설은 서인들이 반대파를 깎아 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인인 유성룡이 서인인 이이의 탁월한 선견지명을 몰라보고 양병(養兵)은 곧 양화(養禍)라는 명분에 따라 반대한 것은 어리석고 옹졸한 짓임을 강조하기 위한 허구였다. 사실 이순신을 등용한 것도 남인인 유성룡이었다. 이이는 군정 개혁을 역설했다. 그것은 양병은 양민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나마 구체적 계획 없이 한 것이었다.

 

저자는 고인돌을 북방식, 남방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를 잃은 지 오래라고 말한다. 고인돌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북방식이라고 했던 탁자 모양의 고인돌이 한강 남쪽인 전라도에서 발견되고, 남방식이라 했던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이 한강 북쪽 북한에서 발견되었는가 하면 남방식과 북방식이 같은 지역에서 발견되기도 하여 설득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역과 무관하게 모양에 따라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받침돌 없이 무덤방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 등으로 분류한다.

 

북방식, 남방식은 식민사학이 낳은 분류법이다. 이 분류법을 처음 정립한 사람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다. 류조는 한반도를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 남부는 순수한 한민족의 영역이지만 북부는 대륙에서 들어온 다른 민족의 영역이며 한민족은 예부터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고 언제나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에 의해 발전했다는 논리를 깔고 논의를 전개했다. 우리나라는 2006년판에 이르러서 비로소 고등학교 교과서의 관련 내용을 탁자식, 바둑판식 등으로 고쳤다.

 

고인돌은 지배자의 무덤이 아니다. 답사를 다녀보면 고인돌은 대개 한 지역에 몇십 기씩 군(群)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고인돌이 모두 지배자의 무덤일 리 없다. 고인돌은 지배자와 그 가족의 공동묘지 또는 한 집안의 공동묘지다. 고인돌은 지배자의 무덤이 아니라 전사자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덤이 아닌 고인돌도 있다. 제단(무리 짓지 않은 채 홀로 존재) 또는 묘표석(무덤방 없음) 등이다.

 

무덤방으로서의 고인돌은 1인 1무덤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시신을 그대로 묻기도 하고 시신을 가매장 했다가 뼈만 추려 묻기도 한다.(두벌 묻기 또는 세골장; 洗骨葬) 고려 사람들은 고인돌을 성인(聖人)의 화신으로 여겼다. 고인돌은 민간 신앙의 대상이었고 장독대 같은 생활 필수품이기도 했다. 청동기 시대 무덤은 고인돌만이 아니다. 돌무지무덤, 돌널무덤, 돌곽무덤, 나무널무덤, 움무덤, 독무덤 등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저자는 금관은 평소 왕이 머리에 썼던 것이 아니라 부장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금관은 죽은 자를 위한 마스크라고밖에 볼 수 없다. 금관은 머리에 쓰고 다닐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세종은 신라는 포석정에서 패했고 백제는 낙화암에서 멸망했다고 말했다. 포석정은 제사를 지내는 성스러운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다.

 

견훤이 쳐들어온 것은 927년 음력 11월이었다. 한겨울 추위에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놀이를 할 수 없다. 경애왕은 사태의 급박함을 깨닫고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해놓은 상태였다. 포석정 주위에는 유적들이 즐비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했다는 놀이인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제의(祭儀)의 일부였다. 포석정에서 했다는 놀이가 유상곡수가 아니라 불교의식인 팔관회였다는 말도 있다. 그런 포석정을 질펀한 술잔치를 벌인 놀이터로 묘사한 것은 신라 멸망 뒤 고려와 조선의 식자들이 경애왕을 망국의 책임자로 규정하고 폄하하려는 의도에 따른 결과였다.

 

첨성대(瞻星臺)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천문대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천문대라 하더라도 당시의 천문현상은 제사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년에 건국되었다는 내용이 없다. 일연은 ”단군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인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고 썼다. 이를 근거로 계산하면 고조선 건국 연도는 기원전 2284년이다. 기원전 2333년은 조선 성종 때의 유학자 서거정이 쓴 ‘동국통감’에 근거한 연도다.

 

이 책에 의하면 고조선은 요임금 무진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 문제는 요임금 즉위년이 정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대개의 한국사 학자들은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10세기 이후로 본다.

 

도선은 왕건이 아니라 후백제의 견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도선의 출생지와 활동 무대는 견훤의 후백제 지역이다. 전라도 영암 구암리가 그의 출생지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도선에 대한 기록이 없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왕건의 세력 확대와 후삼국 통일에 적극 활용되었다. 왕건과 도선의 끈끈한 인연은 후세에 창작되었다.

 

풍수지리설은 호족의 사상이었다.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 고려 초에 유행했다. 수도 금성(경주)이 아닌 지방의 여러 곳을 명당이라고 지목함으로써 수도 중심, 중앙 귀족 중심에서 지방의 호족 중심으로 사고방식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당시 호족들은 저마다 자신을 지지하는 풍수지리설을 갖고자 했다. 하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풍수지리설은 모두 왕건을 지지하는 것들뿐이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각 지역의 호족들은 왕건 휘하에 들어가거나 제거되었다. 그와 함께 그들을 뒷받침하던 풍수지리설은 왕건을 주인공으로 하는 풍수지리설로 슬쩍 바뀌거나 자취를 감추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민족의식 고취와는 별 관계가 없는 책이다. ‘삼국사기’는 동명왕을 주몽 또는 추모로 표기하나 동명왕은 북부여의 시조로서 고구려 추모왕과는 무관하다. 고구려 추모신화가 북부여 동명신화를 차용한 것이다.(이석연, 정재수 지음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27, 78 페이지)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다. 이는 신라 여성의 지위와 무관한 것으로 성골(聖骨)이라는 특별한 혈족의식이 빚어낸 결과다.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은 여진족(만주족)의 간청으로 돌려준 것이 아니라 지키기 어려워 포기한 것이다. 고려 숙종은 여진을 공격하다 패한 것을 국치(國恥)로 여겨 설욕을 다짐했다. 고려는 적의 기병을 우리 보병으로 대적할 수 없어서 패했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기병을 만들었다. 동북 9성을 쌓기 100년전 고려는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했다.

 

강동 6주 획득으로 고려의 서쪽 국경선은 압록강 일대로 확장되었지만 동북 9성의 실패로 동쪽 국경선은 함흥 일대에 머물렀다. 동쪽 국경선이 두만강 일대까지 확장된 것은 조선 시대의 일이다. 동북 9성의 정확한 위치는 논란거리다. 두만강 일대라고도 하고 식민지 시대 일본 학자들은 그보다 훨씬 남쪽인 함흥평야 일대로 보았다. 최근의 국내학자들은 함흥에서 두만강 유역까지의 해안평야를 따라 9성이 있었다고 본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불태운 것은 백성들이 아니라 왜군이다. 선조실록에는 없는 간민(姦民), 난민(亂民)이란 표현이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한다. 방화는 이들의 소행으로 기록되었다. 선조 다음 임금인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 정권은 광해군대에 편찬한 선조실록을 수정했다. 선조는 떠나기 전까지 "내가 한양을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염려 말라;"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비 쏟아지는 새벽 성문을 빠져나갔다.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행동과 오버랩된다. 1년반 만에 돌아온 선조는 그 사이 왜놈말을 익혀 지껄이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영을 내렸고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시민들을 고립되게 해 놓고 3개월만에 돌아온 이승만은 피난 못 가고 서울에 남았던 시민들을 공산당에 부역하지 않았느냐고 닦달했다.

 

저자는 경복궁이 누구에 의해 불탔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하며 중요한 것은 백성이든 왜군이든 또 다른 누구에 의해서였든 당시 궁궐을 불태운 불길은 지배층의 나태와 무책임을 질타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고 결론지었다.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는 흥미와 의미를 함께 느끼게 하는 책이다. 나는 특히 고려사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관련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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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30억년을 찾아서
고영구 외 지음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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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크게 지질시대와 역사시대로 나뉜다. 별의 시대(cosmic age), 지질시대, 역사시대로 나누기도 한다. 최근에는 지질시대를 지구가 우주공간에서 형성되어 제 모습을 갖춘 시기와 지질학적인 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때를 구분해 전자를 천문학상의 시대라는 의미의 星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역사시대는 대략 1만년전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지질시대가 지구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구의 나이는 46억년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생물 화석은 오스트레일리아 와라우나 층군에서 발견된 약 35억년전의 스트로마톨라이트다. 지구 역사에서 거의 40억년을 차지하는 선캄브리아기는 매우 긴 시기이지만 화석기록은 매우 빈약하게 남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생대 생물의 주인공으로 주저하지 않고 삼엽충을 꼽는다. 중생대는 공룡, 암모나이트, 겉씨식물로 대표되는 시대다. 중생대에는 소철과 은행(銀杏)으로 대표되는 겉씨식물들이 번성하였다.

 

신생대는 중생대 백악기 이후에 등장한 속씨식물과 포유류로 대변되는 시대다.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중생대 백악기 말의 소행성 충돌로 지구는 큰 재앙을 맞았다. 공룡들의 지배하에서 침묵하던 포유류들은 서서히 공룡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급속도로 차지하면서 신생대를 포유류의 시대로 만들었다. 신생대에 들어서서 속씨식물이 발전하여 외떡잎식물들이 등장하였고 진정한 의미의 초원이 만들어졌다.

 

지구의 나이 46억년은 지구 밖에서 지구로 떨어지는 미행성체의 잔해인 운석의 나이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엽록상 남조류 집적체다. 이것이 지구에 산소를 공급해 동물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소청도에서 우리는 스트로마톨라이트를 만날 수 있다.(조류는 藻類로 쓴다. 조는 마름 조자다. 마름이란 바늘꽃과에 속하는 한해살이의 수초를 말한다.) 소청도의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선캄브리아기의 것이다.

 

태백의 것은 고생대 후기 바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과거 그곳이 수심이 얕은 바다이거나 호숫가였음을 말해준다. 원시 지구의 대기에 우세했던 이산화탄소는 석회암이 되어 바다에 퇴적되었다. 만일 이산화탄소가 엄청난 양의 석회암으로 지구 표피에 저장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진화한 다양한 동물 및 인간이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임진강 상류 일대에는 석회암, 규암, 점판암, 결정편암 등을 중심으로 한 변성암류와 고생대 퇴적암류가 분포한다.

 

추가령 열곡(裂谷)대를 경계로 하여 남과 북이 현저한 차이를 드러낸다. 추가령 열곡대 북쪽에는 선캄브리아기 변성암류와 고생대 지층이 우세하게 분포한다. 이들이 임진강 벨트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최근 이곳이 중국에서 이어져 한반도의 한가운데에서 대륙과 대륙이 충돌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다. 대륙 충돌을 확인해주는 결정적 증거는 다이아몬드나 석영이 고밀도로 뭉친 코어사이트 등 초고압 변성암대의 존재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다이아몬드나 뭉친 코어사이트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고압 변성광물인 각섬석을 포함하는 각섬암과 석류석이 발견된다. 각섬암은 임진강대의 남쪽 경계부에 해당하는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와 포천군 관인면 중리 등 한탄강 부근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이 각섬암을 분석한 결과 형성 당시 10-14kbar의 고압조건 즉 지하 50km에서 만들어져 지표로 올라온 것으로 밝혀졌다.

 

절대연령 측정 결과 이 각섬암의 원암인 반려암이 만들어진 것은 선(先) 캄브리아기 후기인 9억 5천만년전으로 드러났다. 석류석 결정이 만들어진 것은 2억 3천만년전으로 밝혀졌다. 이 2억 3천만년전은 중국을 이루는 두 대륙이 충돌한 시기와 일치하므로 임진강 벨트를 중심으로 충돌대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암석의 주요 부분은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광물의 표본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옛날에 분출한 화산암이나 진흙, 모래 등의 퇴적물이 쌓여서 만들어진 당시의 지구자기의 방향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광물이나 퇴적물 입자가 당시 지구 자기장의 방향에 따라서 배열되는 경우가 많아 그 때의 지구 자가의 방향뿐 아니라 시대까지도 추정하게 하는 것이다. 홍도가 붉은 이유는 규암 내에 얼마간 함유된 철 성분이 풍화, 침식될 때 산화되어 붉은 색을 띄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쇠가 녹슬면 붉은 색을 띄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석영은 무색 내지 흰색을 띠지만 규암이나 사암에 함유된 미량의 철 성분이 산화환경에서 암석이 되어 붉어진다. 홍도는 낮에는 밝은 홍색이 되고 석양 무렵에는 섬 전체가 붉게 물들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석회암동굴은 지표수가 지하로 스며들고 그 물이 낮은 위치의 출구를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통로로 형성된 지형이다. 석회암 동굴의 나이는 대개 부풀려 선전된다.

 

이 때의 연령은 모암(母巖)인 석회암의 것이지 동굴과는 무관하다. 자연은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대의 석회암 지대에서는 땅속에 석회암으로 지하궁궐을 세웠지만 화산쇄설층으로 이루어진 제주도에서는 용암을 힘차게 흘려보내 무섭고 웅장한 용암동굴을 세워놓았다. 제주도에 용암동굴이 발달한 이유는 제주도의 용암이 유동성이 크고 점성이 적은 현무암질 용암이기 때문이다. 용암동굴은 용암 속에 포함되어 있는 탄산가스나 수증기 등 고온의 가스 압력 때문에 천장이 아치모양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미래의 에너지는 석탄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고생대 석탄기와 페름기 초는 따뜻하고 습윤하여 식물이 번성하여 큰 삼림을 이루었다. 이 시대의 식물(인목, 봉인목, 노목 등 양치식물)은 대체로 습지나 얕은 물밑에 뿌리를 내렸으며 죽은 후 쌓여 오랜 시간이 경과되고 대단히 두꺼운 식물의 충적층을 만들게 되었다. 이러한 식물층은 산소 부족으로 쉽게 썩지 않고 보존되어 석탄의 초기에 해당하는 토탄(peat)이 생성된다.

 

이 후 지각의 침강으로 그 위에 퇴적물이 두텁게 쌓여 위에서 가해지는 압력을 받는 동안 식물 구성성분인 수소, 질소, 산소의 대부분이 서서히 달아나버리고 후에는 탄소를 주성분으로 하는 석탄이 생성된다. 화석기록에 의하면 공룡은 트라이아스기 말기인 약 2억5천만년전에 지구상에 처음 나타났다. 퇴적암의 나이를 이야기할 때는 화성암, 변성암과는 다른 개념을 가져야 한다. 화성암은 지질학적으로는 일시에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용암이 분출되어 굳은 시간, 지하 깊은 곳에서 마그마 물질이 식어 암석이 되는 시간이 암석의 나이가 된다. 변성암은 변성작용을 받아 변성 광물이 형성된 시간이 나이가 된다. 퇴적암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나의 나이를 갖기는 어렵다. 100미터 두께의 퇴적암의 경우 하부에서 상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층의 나이가 전부 다르다. 수백 개의 나이를 갖는 것이다.

 

화강암은 석영과 알칼리 장석, 얼마간의 소다사장석과 유색광물로 이루어진 중립 내지 조립질 암석이다. 지하 약 50~60km의 심도 즉 하부지각이나 상부맨틀에 해당하는 깊이에서 만들어진 화강암질 마그마가 지각을 뚫고 올라오다가 천천히 식으면서 굳어 만들어지는 것으로 산성 심성암에 속한다. 추가령 열곡대는 원산 영흥만에서 시작하여 서울에 이르는 좁고 낮은 긴 골짜기다. 서쪽의 마식령 산맥과 동쪽의 광주산맥 사이에서 발달하였다.

 

지질학적 측면에서 토양단면은 통기대, 포화대, 기반암으로 구분된다. 통기대는 지하수면 상부에 위치하며 토양 공극이 공기로 채워져 있으며 지표수가 지하수면으로 이동하는 통로다. 포화대는 토양 공극이 지하수로 채워져 있다. 통기대와 포화대 사이에는 지하수면이 존재한다.

 

저자들은 “우리가 그랜드캐넌을 간다고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어도 그것이 진정한 지질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은 것이라도 하나 하나 깊게 관찰하고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자연사박물관을 통해 약간의 지질여행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자연사박물관이 별로 없다.(이 책의 출간 일자는 2003년 2월이다. 2003년 7월에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지질 또는 지구과학은 갈증을 일으키는 대상이다. 좋은 책을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 수밖에 없다. 지질공원 해설을 하며 내가 부족한 부분, 필요한 부분을 중심으로 책을 읽었다. 통독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발췌식으로 읽을 다른 지질 또는 지구과학 책들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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