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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적절한 말, 정확한 지적을 둘러싸고 모순이 풀려 질서를 찾게 되고 무질서가 멈춰 버린다." 카뮈가 스승 그르니에에 대해 한 말을 음미하는 아침. 카뮈에게 "섬세한 스승"이었던 그르니에 같은 분이 그리운 시간. 아침 한 일간지에 이원 시인이 조용미 시인의 '침묵지대'를 설명한 기사가 실렸다. 시인은 침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침묵을 위대하다고 말하면 수다가 되어 버린다/ 침묵을 고요하다 말해 버리면/ 즉시 언어의 이중구조 안에 갇혀 버린다".. "침묵 예찬, 침묵의 소리, 위대한 침묵, 침묵의 세계/ 모두 다 침묵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 "침묵을 그냥 침묵이게 놔두자".. 침묵을 비유로 말하지 말자는 의미이니 이 부분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수잔 손탁의 '은유로서의 질병'이란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시인이 같은 '나의 다른 이름들'이란 시집에 '침묵 장전'이란 시를 썼다는 사실이다.


침묵을 "용암 같은" 것, "얼음 같은" 것 등으로 표현한 시이다. 침묵을 장전했다는 표현 자체가 비유이고, 침묵을 용암 같은 것, 얼음 같은 것으로 표현한 것 역시 비유이다. 손탁은 사람들은 은유 없이 사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제하고 피하려 애써야 할 은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모든 사유가 해석이라 해서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언제나 옳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한다. 맞는 말이지만 시에서 은유는 풍성해야 한다. 때로 모순으로 보일지라도. 침묵을 그냥 침묵이게 놔두자는 것도 수사(修辭)이고, 용암/ 얼음 같은 침묵이 장전되어 있다는 표현도 수사이다. 시인은 침묵을 용암처럼 뜨거운 것으로도, 얼음처럼 차가운 것으로도 표현한다.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사유들이 결국 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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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免疫) 요법에 대한 책을 읽다가 한 일본인 연구원의 책으로 잠시 이사를 왔다. 면역학의 기초 연구는 현재의 지식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가설을 세워 실험 검증 과정을 거치는데 놀랍게도 실험 결과의 99퍼센트는 가설을 비켜간다는 글이 눈에 띈다. 저자의 주장은 면역학은 수많은 면역학자들의 세렌디피티 덕분에 꽃을 피운 학문이라는 것이다. 세렌디피티는 우연히 발견하는 능력, 뜻밖의 행운 등을 의미하는데 행운만은 아닌 것은 해당 현상에 직면한 것은 우연이고 행운이지만 끝까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꼭 붙들고 있었던 사람만이 미지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은 세렌디피티라는 말을 사람을 만난 경우에도 쓸 수 있는가, 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난 9월 초 내가 어느 약사 선생님께 쓴 말은 대단한 결례인 셈이다. 반성하고 사과할 준비 모두 되어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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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을 몇년 하고 나니 내게 한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몇 가지 패턴이 눈에 들어온다. 페친 신청은 꾸준한데 비해 좋아요는 별로이고 페친 신청 전에 좋아요를 클릭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페친 수락을 받고 나서 밀린 빨래라도 하듯 좋아요를 클릭하고는 방문은 하는지 안하는지 흐지부지인 경우가 많고 페친 수락 인사를 남기는 경우도 거의 없다. 페친 수락 이후 인사 받은 비율은 1% 정도에 불과하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과 페북인들이 생각하는 좋은 글이 꽤 많이 어긋난다는 점도 그렇다. 대개 전공에 한정된 글을 올리는 페북인은 자신의 관심권 안의 글에 대해서만 좋아요를 클릭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할 여지도 물론 있다. 페친 신청을 받은 사람이 신청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점이다. 동남아 불교 승려들은 자신들이 시주를 받음으로써 시주하는 사람들이 덕을 쌓는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페친 관계도 그런 것일까? 무심코 좋아요를 클릭하는 경우도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최근 페친 대량 삭제 사건(?)을 통해 짐작하게 된 이야기여서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지 장담하기는 어렵다.

 

어떤 페북인의 말도 안되는 글에 좋아요를 클릭한 사람들 중 자신의 친구들을 페친 삭제한 시인에게 무심코 좋아요를 클릭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댓글이 달렸다. 친구 신청보다 팔로우를 하는 분들의 심리도 궁금하다.(나는 팔로우되는 것이 좋다.) 한 가지 실험을 해보고 싶다. 페친 신청을 하면 팔로우도 함께 되는데 만일 거절도 아니고 수락도 아닌 유보 상태로 두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알려는 것이다. 페친이 좋은데 수락받지 못하면 팔로우도 철회하는지 아니면 팔로우는 유지하는지 말이다. (페친 신청과 함께 팔로우도 되는 것은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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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3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상대방이 북플 친구 신청을 하면 수락하고나서 그 사람이 쓴 글을 봅니다. 인사말은 남기지 않아도 `좋아요` 누르고, 댓글을 남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해집니다.

하지만 제가 먼저 반응을 주는데도, 답글 하나라도 남기지 않는 회원도 있어요. 그러면 친구 관계를 해제해요. 너무 단순하지만, 저 사람은 내가 쓴 글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북플에서도 페북에서 봤던 회원들의 사용 패턴이 보여요. 북플 활동이 많은 분들이 `좋아요`와 댓글 수가 많은 편입니다. 그분들과 친구를 맺으면 매일 그분들이 쓴 글만 봅니다. 저도 그런 패턴에 익숙해진 상태인데요, 가끔은 잘 모르는 분들의 글도 보려고 합니다.
 

 

개인 회고록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책 서애(西厓)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국보 132호) 우리의 숱한 역사적 유물, 기록물 등의 이름이 중국의 경서나 서책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듯 ‘징비록’ 역시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에서 이름을 취한 것. 관건은 단순한 대비(對備)가 아니라 징비(懲毖) 즉 지난 잘못을 징계하는 것. 우리가 잘 하지 못해왔고 지금도 그런 부분. 언제 벌 받아야 할 사람들이 제대로 벌을 받는 세상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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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이 없던 시절 나는 블로그를 출판사 열화당(悅話堂)에 영감을 준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구절인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란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친척들의 정겨운 말을 들으며 즐거워 한다는 의미인데 지금의 SNS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페북은 부처님이 하신 "와서 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사실 블로그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다툼, 갈등 등이 없을 수 없다.) 내 친구들은 대체로 진지한 분들이기에 크게 관련이 없지만 페북은 블로그에 비해 기동력 있는 짧은 글들이 주류를 이룬다. "와서 보라"는 말은 자신감의 표현인데 이는 사방팔방으로 트인 페북 공간에 잘 맞는 말 같다.


그런데 자신감이 과도해 영악하기까지 한 현대적 마인드를 과거로 투사해 이완용의 매국을 국력 키우기의 일환으로 보는 사람도 눈에 띈다. '우리'는 고려하지 않고 강국의 패권적 힘을 우리 것으로 착각하는 미망(迷妄)이 아닐 수 없다.(물론 사학자 김윤희 박사의 말처럼 대한제국의 정치 구조 속에 배태되어 있던 문제들을 이완용 개인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이완용을 제외한 다른 책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 내 페친 중에 그의 비상식적인 글에 '좋아요'를 클릭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 다행이다. 최광임 시인의 경우처럼 "제법 친한" 분을 페삭하는 안타까움을 겪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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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0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북은 누구나 글과 사진을 올리면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을 수 있고, 그런 분위기에 취해 자만심을 가지게 되는 무서운 공간입니다. 쌍방향 의사소통이 원활한 공간이라고 해도 자신의 귀에 듣기 싫은 의견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09-20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페북이 치열한 인정투쟁의 장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인품도 갖추어야 할 사람들이 꽤 있지요. 감사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