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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시즌이 돌아왔다. 정확하게 말해 수상 개시일이 며칠 남은 지금 문학상 수상 유력 후보에 대한 말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문학 부문에서는 일본의 하루키가 1순위에 오른 듯 하다.하지만 내 관심은 물리학상을 향하고 있다.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물리학자들을 알지 못하지만 여성 과학자가 그 상을 수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다.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여성은 두 명(세 차례)이다. 1903년 마리 퀴리가 물리학상을 남편 및 앙리 베크렐과 공동 수상했고, 1911년 역시 마리 퀴리가 화학상을 수상했다. 1935년 그의 딸 아일린 졸리오 퀴리가 화학상을 수상했다. 내가 이름을 들어 알고 있는 여성 과학자는 두 명 정도이다. 리사 랜들과 내터 배철 등이다. 내가 읽은 그들의 책은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이것이 힉스다' (이상 리사 랜들) 정도이다.

 

천국과 신 등의 비과학적(?) 말들이 들어 있는 책들이지만 상당히 엄격한 책들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의 우주를 가속팽창을 막는데 필요한 체중이 미달하는 곳으로 표현한 배철은 시적이기까지 하다. 사르트르는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며 노벨상 수상 이력이 자신의 순수한 문학적 능력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말을 한 바 있다. 작품 자체만을 진중히 검토하고 구매하기에 현대인들은 너무 바빠 작가의 지명도, 목차, 표지 등을 주된 선택 요인들로 삼는다. 그래서 이름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 제목이 좋은 작품, 표지가 예쁘거나 인상적인 책들이 선택되는경우가 많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씁쓸하다. 문학 작품에 비해 그럴 가능성이 낮은 과학 책들을 많이 읽어야겠다. 왠만한 문학작품들보다 유려하고, 상투적인 문제의식에 사로잡힌 종교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철학적인 과학 책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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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16-10-01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의 번역자인 이강영 교수께서 “노벨 과학상 여성 수상자는 그보다 많습니다. 물리 2명 (다른 한사람은 마리아 괴펠트 메이어) 화학 4명 (마리 퀴리는 중복) 의학생리학상 10명입니다. 2009년에는 2명이 같이 생리학상을 받았습니다.”란 댓글을 달아주셨다. 지적에 따라 글을 고쳐야 하지만 글의 요지가 여성 과학자가 노벨 물리, 화학 등의 상을 수상하기를 바란다는 것이기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이 교수의 지적을 그대로 반영하더라도 여성 과학자가 노벨상을 수상한 비율은 10%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기복 불교에 부정적이었던 제가 약간 마음을 고친 계기가 된 것은 불교가 인도를 벗어나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될 때 가장 주된 후원 역할을 한 상인(商人)들이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이유에서 불상, 염주, 불경 등을 몸에 지녔다는 글을 읽고서입니다. 상인의 중요함은 동아시아 언어 학자인 루이스 랭커스터(Lewis Lancaster: 1932 - )가 세속(世俗)을, 특정한 부류의 상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불교평론’ 32호)고 말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세속이란 삶을 향유하면서도 깨달음을 추구하는 재가 보살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 중 하나로 중국 감숙성(甘肅省: 간쑤성) 주천(酒泉: 주취안) 시의 오아시스 도시인 돈황(敦煌)을 들 수 있습니다. 사막의 대화랑(畵廊)이라 할 돈황 석굴(막고굴)에서 법화경 사본을 비롯한 5만 점의 고문서와 함께 법화경을 모티브로 한 벽화가 발견됩니다.(1900년 6월) 묘법연화경이 정식 명칭인 법화경은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경전입니다. 인도 경전인 법화경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공헌한 사람들 중 하나로 법화경을 번역한 구마라즙을 들 수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니치렌(日蓮; 1222 - 1282)이 법화경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법화경과 니치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본 창가(創價)학회가 주관하는 ‘법화경 - 평화와 공생의 메시지전’이 9월 21일 시작되어 12월 21일까지 계속됩니다.(서울 구로 공원로 이케다 홀 특별전시장. 무료. www.thelotussutra.org) 하필 일본인가, 하시겠지만 그 이전에 법화경이라는 인도발(發) 대승경전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라 생각됩니다. 이케다는 국제창가학회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를 말합니다. 창가학회는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국가신도(国家神道) 체제로 돌입하게 된 시점에서 대다수의 종교계와 달리 신찰(천황숭배)을 거부해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빛납니다.


러시아의 우주비행사 알렉산드르 세레브로프와의 대담집인 ‘우주와 지구와 인간’에서 “여러 차례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생각할수록 항상 나에게 새로운, 아니 더해지는 감탄과 외경심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률이 바로 그것”(234 페이지)이라는 칸트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 다이사쿠 회장. 지녀서 읽고 외우며 바르게 기억하며 그 도리를 이해하고 익히며 서사하는 자는 마땅히 곧 석가모니불을 보게 되리라 말(미즈노 고겐 지음 ‘경전의 성립과 전개’ 74 페이지)해지는 법화경. 종교를 떠나 인류 문화 유산을 배우는 차원으로 보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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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은 작가의 소설집 '11;59 PM 밤의 시간'(2026년 9월 12일 출간)에 수록된 '파르마코스 - 희생양의 조건'은 심상치 않은 작품이다. 파르마코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제물로 바쳐진 인간 희생양들이었다.독일어 gift가 약과 독을 함께 의미하듯 파르마코스는 약과 독을 함께 의미하는 파르마콘과 관계 있는 말. 희생양, 인간 제물 등의 역사는 길고 잔혹하다. 오늘날 그런 폭력적이고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희생양 및 희생제물화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수 있지만 한 두 사람을 희생양(비유적 의미에서)으로 만들어 조직을 보전하는 행태는 계속되고 있다. '11;59 PM 밤의 시간'에서 만날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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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에티카’ 해설서를 쓴 한 국문학 박사는 대학 2학년 시절 스피노자의 ‘에티카’ 번역본을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강영계 선생의 번역으로 나온 서광사판 ‘에티카’를 집에 사들고 와서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펼쳐보았을 때의 참담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첫 문장부터 스피노자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에티카’에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자유로운 인간들만이 진정으로 서로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4부 정리 71) 같은 구절은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만약 인간에게 침묵할 수 있는 역량이 말할 수 있는 역량과 동등하다면 분명히 인간의 삶은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다.”(3부, 정리 2의 주석) 같은 말은 또 어떤가요? 철학자 시인 서동욱 교수는 ‘스피노자’란 시의 마지막 연에서 “글을 쓴다는 것/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기대 없이,/ 하도록 돼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란 말을 합니다.


스피노자는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기쁨에서 생겨나는 욕망이 슬픔에서 생겨나는 욕망보다 강하다”는 말을 했습니다.(‘에티카’ 4부, 정리 18) 스피노자의 말 가운데 "눈물 흘리지 마라. 화내지 마라. 이해하라.“란 말을 페북 타임라인 전면에 게시한 분이 있습니다. 이를 보며 이런 글을 올리는 경우는 두 가지이리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잘 실행하고 있어서 게시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잘 안 되기에 마음을 다잡기 위해 게시하는 경우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글을 게시하지 않았지만 게시한다면 분명 후자입니다. 오늘 스승의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페북에 남기려다가 카톡 글로 대신했습니다. 슬픔 때문입니다. 이것만 봐도 제가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잘 따르지 못하는 스피노자주의자 즉 사이비 스피노자주의자란 사실이 드러납니다. 다시 ‘스피노자’를 읽고 슬픔이 아닌 기쁨으로 세상을 긍정하는 법을 가다듬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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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9-26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만 강영계 선생님 번역은 정말 어렵고 스피노자를 두렵게 만들어요ㅠ 전 지성개선론 두 부를 펴 놓고 한 3페이지 대조해 보고는 황태연 선생님 번역을 골랐습니다.

원문과의 싱크로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읽혀야 읽을 텐데요ㅠ 아쉬워요. 스티븐 내들러 책에 가끔 등장하는 스피노자 원문 구절의 번역은 좀 잘 읽히던데.....

벤투의스케치북 2016-09-26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 분의 번역은 저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국문학 박사가 강 교수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려고 그런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령 있는 번역이었다 해도 준비 없이 에티카를 읽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말씀 하신 스티븐 내들러의 책 저도 즐겨 읽지요. 황태연 선생의 번역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평이 나온다 생각합니다. 서동욱 교수처럼 시를 쓰는 철학자가 또는 서동욱 교수가 번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적절한 말, 정확한 지적을 둘러싸고 모순이 풀려 질서를 찾게 되고 무질서가 멈춰 버린다." 카뮈가 스승 그르니에에 대해 한 말을 음미하는 아침. 카뮈에게 "섬세한 스승"이었던 그르니에 같은 분이 그리운 시간. 아침 한 일간지에 이원 시인이 조용미 시인의 '침묵지대'를 설명한 기사가 실렸다. 시인은 침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침묵을 위대하다고 말하면 수다가 되어 버린다/ 침묵을 고요하다 말해 버리면/ 즉시 언어의 이중구조 안에 갇혀 버린다".. "침묵 예찬, 침묵의 소리, 위대한 침묵, 침묵의 세계/ 모두 다 침묵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 "침묵을 그냥 침묵이게 놔두자".. 침묵을 비유로 말하지 말자는 의미이니 이 부분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수잔 손탁의 '은유로서의 질병'이란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시인이 같은 '나의 다른 이름들'이란 시집에 '침묵 장전'이란 시를 썼다는 사실이다.


침묵을 "용암 같은" 것, "얼음 같은" 것 등으로 표현한 시이다. 침묵을 장전했다는 표현 자체가 비유이고, 침묵을 용암 같은 것, 얼음 같은 것으로 표현한 것 역시 비유이다. 손탁은 사람들은 은유 없이 사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제하고 피하려 애써야 할 은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모든 사유가 해석이라 해서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언제나 옳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한다. 맞는 말이지만 시에서 은유는 풍성해야 한다. 때로 모순으로 보일지라도. 침묵을 그냥 침묵이게 놔두자는 것도 수사(修辭)이고, 용암/ 얼음 같은 침묵이 장전되어 있다는 표현도 수사이다. 시인은 침묵을 용암처럼 뜨거운 것으로도, 얼음처럼 차가운 것으로도 표현한다.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사유들이 결국 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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