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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초로 책 갈피에 독자 앙케트 엽서를 삽입, 막스 베버가 존경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두려워 했던 카리스마적인 출판 편집인, 일본의 한 철학자가 표현주의적인 편집자라고까지 말한 사람, 헤르만 헤세의 데뷔에도 관여했던 사람, 교회를 비판해 러시아정교회에서 파문당하고 쫓겨난 톨스토이 전집을 간행, 새로운 플라톤 해석을 보급하는데도 앞장섰던 나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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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완고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는 서로 통한다..”란 구절을 보고 용원화(溶原化)라는 생물 용어를 생각했다면 시인에게, 그리고 글을 올리신 ***님께 실례일까요? 용원화는 바이러스의 DNA의 양끝이 숙주의 끊어진 DNA와 결합해 하나의 DNA가 되는 것을 말하지요. 저는 다시 과학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시간을 만들 생각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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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이 신의 선물이라면 마지막 문장은 무엇일까?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자크 모노의 자연과학서 ‘우연과 필연’과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들 수 있다. “인간은 마침내 그가 우주의 광대한 무관심 속에 홀로 내버려져 있음을, 그가 이 우주 속에서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우주의 그 어디에도 그의 운명이나 의무는 쓰여 있지 않다. 왕국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 모노. 

 

”...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와 나는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내게 남은 유일한 소원은 나의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라 말하는 카뮈. 광대한 무관심이란 단어와 부드러운 무관심이란 단어가 대비되어 울린다. 당연히 부드러운 무관심이 좋으리라. 그 세계는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기고 ”아프게 사라”(이상 최윤 작가의 ‘회색 눈사람’에서 인용)지는 사람들에게 눈물이라도 뿌려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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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 선생의 책을 뒤져 기어이(?) 편지에 관한 글을 찾아냈다. 참 오래 전 읽은 기억을 되살려 그의 에세이집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찾은 글은 이렇다. “방안에 들어가 서신함을 보고 편지가 없으면 전쟁 통에 오래 소식이 두절된 것 같다.” 내가 이 구절의 대략을 기억하는 것은 이 글이 워낙 임팩트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1964년 6월 그러니까 자살하기 몇 개월 전의 일기로 이 글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그의 천재성과 광기에 찬 지식욕, 가을과 봄, 겨울을 보는 낭만성, 편집적이라 할 수도 있을 만큼의 생에 대한 사랑과 낯선 것에 대한 동경(憧憬) 등을 확인했다. 전혜린 선생의 일기는 짧고 강렬하다. 어쩌면 그에게 흰 종이에 단지 “죽었니?”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는 어느 지인의 영향도 작용했으리라. 전혜린 선생이 페북 시대를 살고 있다면 그에게 어떤 풍경이 빚어질까?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좋아요의 부재를 전쟁 통에 편지가 두절된 것 만큼 느끼는 사람들이 만드는 페북 시대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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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0-02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런 글들을 보면 저 난리통 ( 전쟁의 와중) 속에 그 느린 서신이란 교통의 방법에 , 그게 유일한 통신이란 걸 알면서 놀랍고 신기합니다 . 하긴 , 펜팔을 해봐서 하루하루 편지를 주고받던 날들의 기다림에대해 알지만 ..( 잊고 있었는데)그럼에도 그게 환경의 특수성을 말하면 늘 놀라운 일 ... 간절한 일이라 가능한 건지 싶다는 ...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2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뜨거웠던 여름의 흔적을 그리다 사라진 젊은 화가에게서 불현듯 전사통지서가 날아오고....˝란 시가 생각납니다.
 

 

최근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를 낸 철학자 김상환 교수님의 열린 연단 '욕망과 기율' 강의를 들었다. 내게는 열 여덢 권의 책을 가지고 있는 이정우 교수님에 미치지 못하지만 김 교수님도 내가 철학적 사유를 형성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은 분이다. 읽은 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김 교수님의 첫 책인 '해체론 시대의 철학'은 이 교수님의 첫 책인 '가로지르기'보다 약 1년 정도 이른 1996년 7월에 출간된 책이다. 두 분은 나로 하여금 처음 철학을 사랑하게 한 분들이다.

 

20년이란 시간이 한 순간인 듯 느껴진다. '해체론 시대의 철학'의 첫 두 문장이 김수영 시인의 '비'의 일부를 인용한 뒤 붙인 "김수영은 시를 사랑의 기술이라 했다.그것은 구하던 것보다 피하려던 것을 먼저 만날 때 생기는 기술, 소모 속에서 생의 본능을 키워가는 언어적 행위"라는 구절임을 감안하면 최근 나온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 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예견 가능한 출간이라 할 수 있다. 올 들어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와 신정근 교수의 '공자의 인생강의', 이한우 기자의 '슬픈 공자' 등을 읽은 내게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는 제대로 김수영 시인의 시에 흥미를 붙일 좋은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한명희 교수의 '현대시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도 만날 수 있는 김수영 시인은 박인환, 김종삼 등의 시인과 함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분석하기에 충분한 이야기거리가 있는 시인으로 나온다.'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등 김 교수님의 다른 책들도 함께 읽을 계획이기에 이 가을은 아무래도 철학과 (인)문학으로 물드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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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0-02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건지 당연한 건지 한국 대다수 남성 시인의 시집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을 수 있습니다. 독선적인 가부장, 사회적으로 강요된 남성성, 자본주의의 첨병 뭐 그런 역할을 한국 아버지들이 두루 갖춰? 보여줘서 그런 걸까요? 아버지 계승보다 아버지를 죽여야 독립이 더 확고하기도 할 테니...
말은 거칠게 해도 엘렉트라 컴플렉스를 보여주는 여성 시인도 많고.
둘러싸임과 벗어남의 미묘한 결합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2 10:53   좋아요 1 | URL
김화영 교수는 ‘프랑스 문학 산책’에 수록된 ‘아버지’의 신화 - 파스칼 자르뎅의 ‘노란 꼽추’란 글에서 이런 작가들은 거론합니다. 샤를르 페기,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지드, 몽테를랑, 앙드레 말로, 루이 아라공, 사르트르, 카뮈... 이들은 프랑스 문학사 속에서 어린 시절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거나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자란 작가들입니다. 김 교수의 결론은 이들이 아버지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자랐다면 운명(삶, 작품)은 달라졌을 것이란 점입니다. 김 교수는 카뮈의 삶(저 말없는 어머니라는 우회를 통하여 부재하는 아버지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도정)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문학의 예외로 마르셀 파놀의 ‘내 아버지의 영광’을 듭니다. 이 작품은 “온통 정다운 아버지의 포근한 웃음 속에 묻힌 천재의 걸작“으로 작가는 이를 의식했음인지 이후 세 권의 소설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청산하려는 듯 빠르고 따뜻하고 때로 잔혹하게 ‘아버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카뮈의) 어머니를 이야기했지만 제게 큰 격려를 해주신 박지영 시인/ (정신분석) 평론가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욕망의 꼬리는 길다’에서 저자는 이성복 시인의 몇몇 시에서 시인이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지 않았는가 즉 자신을 심리적으로 여성으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을 합니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애를 낳으면 좋겠어“란 구절이 있는 ‘口話’가 대표적입니다. 개인사를 들추고 싶지 않고 또 그럴 수 있어 시인의 삶을 잘 알 수 있다 해도 그런 앎이 환원주의적으로 시 분석에 유용한 의미를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삶을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갈등 관계를 여하히 극복하는가의 문제로 봅니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가부장, 자본주의적 관계가 굳이 아니라 해도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구성하는 주 내용이 아버지에 대한 것인지 사회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에 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러 시인들이 언급하는 그 콤플렉스는 어느 정도는 삶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진정성이 있고 또 어느 정도는 그것이 고급스런 내용물이라는 점에서 (‘책으로 사랑을 배웠어요“란 어느 코미디의 대사처럼) 자신의 진정한 것이 아니기에 의도적인 위악(僞惡) 또는 과장(誇張)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만일 시인들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로이트와 그가 말한 콤플렉스에 대한 앎을 갖지 못한 채 시를 썼다면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페북의 한 여성 시인 친구는 차(茶)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그렇다고 합니다.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관계라 해도 들뢰즈가 말한 가족 관계에 주목하거나 스피노자의 기쁨에 영향을 받았다면 시는 많이 달라질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AgalmA 2016-10-02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프카도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런 작품이 안 나왔을 수 있겠죠.
기형도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그런 시를 쓸만큼 우울한 가계가 아니었다고 말하죠. 그 시절 고만고만한 가난이었고 그는 유쾌한 사람에 더 가까웠다고. 즉 현실보다 시인 스스로가 시 속에서 구축하며 바라보는 시점이 가장 큰 원형이겠죠.
이성복 시인 <아, 입이 없는 것들>은 온통 임신 얘기죠. 아무래도 이성복 시인의 여성성은 예술가들의 창작 배출의 심리와 맞닿지 않을까 싶어요. 잉태와 힘든 출산을 하는 과정은 창작의 그것이죠. 이성복 시인을 비롯 제가 아는 시인들은 프로이트를 엄청 읽더라는. 스스로에 대한 치유가 갈급한 사람들이니 오죽하겠습니까.
글을 쓰기 위해 고난을 자처하던 예전 방식에서 좀 벗어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茶 공부도 좋네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나가고 나니 언니와 차남들의 세계도 왔잖습니까. 유령 가족을 꾸리는 시인들도 있고. 시 세계에서의 가족 관계란 여러모로 모색해 볼 여지가 있죠.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2 11:31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참고의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카프카와 기형도 시인의 예는 흥미롭고 의미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기 치유의 차원을 넘어 즉 프로이트 탐독에서 더 나아가 다른 창의적인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고착되면 문제라 생각합니다. 자기 치유를 위해 프로이트를 엄청 읽는 시인을 말씀 하셨지만 부작용으로 병리적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김승희 시인이 ‘객석에 앉은 여자’에서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늘 여기 저기가 아프다고 말하는 여자를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에드가 모랭이 말했듯 인간은 환상과 공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무질서를 만들어내는 광기의 존재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病)에 정듭니다...“란 허수경 시인의 시구처럼 병리(病理)적인 것에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