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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워할 줄 알고, 울 줄 알고, 즐길 줄 알고, 기뻐할 줄 알고, 신족(神族)을 존경하지 않아야 거인(巨人)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괴테.. 신을 죽이고 인간을 살리려는 의지로 충만한 전생애를 살았던 니체... 베르그손, 스피노자와 함께 “기쁨의 철학자”로 분류(프레데릭 르누아르)된 니체에게 경탄할 만한 철학으로 다가온 스피노자의 철학. 신족(神族)과 거인족(巨人族)의 싸움. 우리편은 니체, 괴테, 베르그손 등의 거인족...

 

스피노자는 나에게는 모호(模糊)...결정론자로 보이지만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고, 인간이 인간 현존의 자연적, 역사적 조건 안에서 최대의 자유에 도달하기를 바”란(에리히 프롬의 표현) 스피노자. 니체에게 자기보존을 바라는 삶(코나투스)이 퇴폐의 징후로 읽힌 스피노자... 폐결핵이라는 몰락의 징후로 인해 자기보존을 주장한 것은 징후적(徵候的)이라는 이유에서.. 그래서 더 사랑하고 읽게 되는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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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일주일만)에 서점에 들렀습니다. ‘자존감 없는 사랑에 대하여’(비벌리 엔젤), ‘나는 왜 이 사랑을 하는가’(데이비드 리코) 등 탐나는 사랑(심리학) 책이 눈에 띄었지만 철학 책들을 놓아두고 사기는 어려워 한번 훑어보고 말았습니다. 앞의 책은 자존감 없이 사랑에 휘둘리는 여자들에 대해 조언을 한 여성 심리 치유사의 책이고, 뒤의 책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성숙한 사랑을 위한 팁을 제시한 심리학자("융 심리학과 신화학에 해박")의 책입니다.

 


여성들에 대해 조언하는 책이어서가 아니라 ‘자존감 없는 사랑에 대하여’에 더 마음이 갑니다.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프리다 칼로가 어느 날 이런 일기를 썼다고 합니다. “결코 내 것이었던 적 없고 앞으로도 내 것일 수 없는 사람. 그는 그저 자신일 뿐..”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떠올리며 쓴 일기입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강하고 담대했던 프리다도 디에고에 대해서만은 자존감 낮은 사랑을 했습니다.

 


프리다는 남편 디에고가 자신의 여동생과 불륜 사이인 것을 알고도 환상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보호와 적절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소아마비로 마음이 약해진 것이 그런 사랑을 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가슴 아픕니다. ‘자존감 없는 사랑에 대하여’가 수긍할 만한 것은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융 심리학 이야기를 했지만 몇 년 전 존 샌포드의 ‘우울한 남자의 아니마, 화내는 여자의 아니무스’란 책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에밀리 브론테의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을 악마처럼 대하는 히스클리프는 여자의 개성화를 유도하는 아니무스를 상징한다는...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냥 폭풍처럼 몰아친 파괴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었을까요?

 


신경정신의학자이자 비교행동학자인 보리스 시륄니크는 ‘사랑과 애착의 자연사(自然史) - 관계’에서 애착은 매우 값진 것이지만 애착의 부재는 더욱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파괴적으로 애착(이라기보다 집착이라 해야 옳을 것 같지만)했던 ‘워더링 하이츠’의 히스클리프를 두고 이런 인용을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 않습니까? 신에 대한 사랑에도 에로티시즘적 요소가 있다는 시륄니크의 말을 들으며 그러니 필요한 것은 수행(修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토 케른버그는 ‘남녀관계의 사랑과 공격성’에서 자기애적 정신병리를 가진 커플이 널리 퍼져 있다고 말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무심한 채 그녀를 자기중심적으로 착취하는 경우는 자기애적 정신병리가 있는 남편에게 아내가 희생당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상호작용을 탐색해 보면 아내가 자신의 가학적(加虐的) 초자아를 무의식적으로 유발해 남편에게 투사(投射)하는 경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벌리 엔젤은 이런 가능성을 이야기하지 않고 오토 케른버그는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각각 심리치유사와 정신분석가이기 때문일까요?

 


케른버그는 자기애성 성격은 사랑받기보다 감탄받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파트너의 감탄은 거대자기의 자기 이상화를 지탱하고 재확인시켜줍니다. 에리히 프롬 역시 자기애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객관적으로 볼 능력이 없어 필연적으로 잘못된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프롬은 문제를 풀 수 없는 곳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은 시지프스의 신화와 같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절망시키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정신분석과 듣기 예술’ 120 페이지)

 


프롬은 분석을 하는 것은 유치한 외상적 기억이나 어떤 다른 원시적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여는 것, 내 안의 온갖 비이성적인 면을 향해 끊임없이 나를 열어보여서 마침내 나의 환자를 이해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프롬은 정신분석이란 하나의 비판적 사고 방식이며, 비판적으로 사고하려는 의도로서 개인의 이익과 갈등을 빚는 사실상 매우 어려운 일이라 말합니다.(‘정신분석과 듣기 예술’ 135 페이지) 이 말을 들으며 생각하는 것은 샌포드의 분석 사례입니다.

 


만일 샌포드가 말했듯 ‘워더링 하이츠‘와 비슷한 사례를 겪는 커플을 보며 여자를 악마처럼 대하는 남자는 여자의 개성화를 유도하는 아니무스를 상징한다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일어나는 것은 갈등 이상이겠지만 그냥 갈등이라고만 하지요. 물론 이런 갈등은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해서라기보다 무리하게 해석을 한 까닭에 빚어지는 갈등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현장에서 건져올린 사례들을 분석해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니마 - 아니무스라는 이론을 무리하게(연역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는 의미입니다.

 


프롬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약화된 형태일망정 무력감을 느낀다는 가정이 옳다면 정신분석 의사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170 페이지) 이 경우 의사는 직업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낙관론을 보이지만 근저에는 깊은 불신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샌포드를 공격하는 것이 주지(主旨)는 아니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의 무리한 연역적 시각과 무기력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분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아니무스를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무의식‘을 덮으려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사랑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프롬의 책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들보다 앞선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를 결정론자로 볼 수 있겠다는 글입니다.

 


하지만 프롬에 의하면 이들은 동시에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했고 인간이 인간 현존의 자연적, 역사적 조건 안에서 최대의 자유에 도달하기를 바랐습니다.(‘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59 페이지) 여기서 자유를 사랑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단 ‘최대의‘를 ’최선의‘로 함께 바꾸면서 말입니다.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니체, 베르그손과 함께 기쁨의 철학자로 부른 스피노자.(’철학, 기쁨을 길들이다‘) 그렇게 기쁨의 철학자이지만 사랑의 철학자라 해도 좋을 스피노자... 이 가을 스피노자를 읽으러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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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쇼펜하우어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유명하지요.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접했을 때 귀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철학자는 대립적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가상(假想)을 버리고 본질을 볼 것을 주문했고, 니체는 꿈과 환상을 중요한 것 특히 시창작에서 중요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제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쓴웃음이 나옵니다.


백상현 교수의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라깡의 루브르’, ‘고독의 매뉴얼’, 캐롤 던컨의 ‘미술관이라는 환상’, 셀린 들라보의 ‘착각을 부르는 미술관’, 마이클 텔보트의 ‘홀로그램 우주’, 오태호 교수의 ‘환상통을 앓다’ 등의 책들을 읽으며 환상과 가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는데 저는 환상을 긍정하는지 하지 않는지 모르겠는 것입니다. 재정비해야겠지요?(같은 사람인데 라깡, 라캉 등으로 다르게 표기한 것은 출판사; 편집인이 다르기 때문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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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여래명호품에 희망을 뽑아버리려고란 말이 나와 고심 끝에 무엇을 바라지 않고 그냥 할 뿐이라 해석을 한 스님의 글을 읽었다. 이 글을 읽고 김정아 작가의 나의 부처님 공부란 책을 펴보았다. 작가는 온종일 백지 공책에 금강경을 베껴 쓸 수 밖에 없던 때, 온종일 백팔배, 천팔십배를 할 수 밖에 없던 때, 온종일 벽을 바라볼 수 밖에 없던 때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신기하게도 원망이나 기원, 황홀경 같이 밖으로 향하는 기운을 안으로 돌이켜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덤벼들던 고통의 발톱을 껴안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고 말한다.

작가 한강의 희망 없이 세상 긍정하기, 평론가 테리 이글턴의 낙관하지 않는 희망(hope without optimism) 등의 말을 생각할 수 있겠다. 두 명제는 무엇이 없이 다른 무엇을 하는 것이기에 희망을 뽑아버리는것과 맥락이 같지만 전자는 희망이 없고 후자는 낙관이 없다는 차이가 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조화롭게 보아야 할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관건은 불경 번역(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의)에는 오류가 없다는 스님의 말씀이다. 불경 번역에 오류가 없다는 말씀은 불경 번역에도 오류가 있다는 내 말에 답하신 스님의 말씀이다. 나는 인터넷과 책을 통한 뒤 다시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자료를 찾아 읽고 내 생각이 맞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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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래 전(20년 이상 된) 사진을 볼 때 느껴지는 묘하게 설레이는 듯 한 슬픈 감정이 내가 아는 분의 오래 전 사진을 볼 때도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15년 정도는 전의 것일 아는 분의 사진을 오늘 우연히 보게 되었다.

세월의 흔적이랄까 차이랄까 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펼쳐진 그 분의 사진이 말해주는 것은 그 분의 삶이야말로 성실과 열정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그 분이라고 어디 어려움과 고초가 없었겠는가.

15년의 세월만큼 더 젊고 건강한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나는 오히려 그 푸름과 패기가 복병처럼 숨어 있는 고난과 아픈 시련들을 모르는 것으로 보여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래도 아니 그렇기에 나는 그 분의 현재의 정열과 헌신적 삶, 스스로 만족할 만큼 오르신 자리가 자랑스러워 보이고 내 일인 듯 기쁘다.

남의 슬픔을 함께 슬퍼해 주기는 쉬워도 성공을 내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주기는 어렵다고 하지만 나는 적어도 그 분의 성공에 대해서 만큼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사한 분께 거안제미擧案齊眉라도 할 수 있으리란 심정이 내 진솔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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