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1
드니 디드로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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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자크와 그의 주인>은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각색한 희곡이라고 했습니다. 무대에 올리기 위한 대본이었기 때문에 내용이 함축되어 있어, 아무래도 원전을 읽어봐야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자크와 그의 주인 그리고 여인숙의 여주인이 전하는 포므레 부인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교차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쿤데라의 희곡이 세 사람의 전도된 사랑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반하여 디드로의 소설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자크와 그의 주인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들이 단절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야기의 전개가 난삽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디드로의 작품에서는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부수적인 느낌이고 자크와 그의 주인 사이의 관계설정이 아주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분명 자크가 하인인 듯하나, 어떤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친구인 듯, 심지어는 주종의 관계가 역전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사실 자크와 그의 주인은 분명 여행하는 과정에서 심심풀이로 자크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로 하였습니다만, 그들이 어떻게 만났고, 어디에서 어디로 여행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자크의 전 주인인 대위가 여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좋고 나쁜 일은 저기 높은 곳에 씌어있다.”고 한 말을 자크가 신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자크는 운명론자가 된 셈입니다.


실제로 자크가 하는 행동은 상황에 따라서는 적절하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지만, 상황이 전개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 자크에게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긍정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 것 같습니다. ,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벨라벨이라는 분은 자크가 결정론자가 아닌 운명론자다라고 했다는데 결정론과 운명론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호한 느낌입니다. 옮긴이는 운명론과 결정론은 그것이 다만 신이야 물질이냐 하는 차이를 떠나, 운명론이란 일체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나, 결정론이란 만약 우리가 원인의 유희에 개입할 수만 있다면 그에 따라 결과를 수정할 수 있다(456)”라고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자크가 운명론자라기보다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긍정론자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디드로의 작품에서 보는 특징은 작가가 나서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혹은 등장인물의 처지를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코러스와 같은 역할을 작가가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쿤데라 역시 사회자를 두어 관객들의 이해를 도울만한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두 사람의 여행이 모호한 점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들이 고도를 기다리며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던 자크의 사랑이야기가 마지막 부분에서 급물살을 타면서, 반전을 이루어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입니다. 하지만 쿤데라는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에 방점을 찍은 탓인지 열린 상태로 결말을 짓는 차이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짚어보자면, 코러스의 역할을 하는 작가가 독자의 눈치를 보아 이야기를 끌고 가는 듯한 암시를 준다는 점입니다. 자크의 사랑이야기가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잠시 기다리면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라고 독자를 달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작가에 따르면 우연한 일들이 일어나 자크의 사랑이야기를 끊어놓지만, 그의 주인은 끈질지게 자크의 사랑이야기를 요구하고, 끊어진 부분을 이어줍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작품해설에서 이야기하는 우리가 운명을 이끌고 간다고 믿지만, 실은 운명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이다.(437)”라는 명제를 증명해가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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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2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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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작품은 적지 않게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잘못된 만찬>을 읽어본 인연과 년전에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피라미드를 구경했던 인연으로 <피라미드>를 읽게 되었습니다.


<피라미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26세기 무렵 파라오로 등극한 쿠푸의 피라미드가 건설되는 과정, 세월이 흘러 쿠푸를 비롯한 파라오들의 무덤이 도굴되는 과정에서 파라오 디두프리가 목졸려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집트 사회에 충격을 던지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14세기 중앙이시아를 지배하게 된 티무르 왕조가 오트라르에 해골을 쌓아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는 사실로 건너뛰면서 작가의 고국 알바니아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 폭압으로 눌린 국가들이 여전히 있다고 고발하는 셈입니다.


사실 쿠푸는 등극한 직후에 자신만은 피라미드를 건설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신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사장을 비롯한 신하들은 파라오를 설득하기 위하여 피라미드 건설의 당위성을 찾아냈습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 사회가 처한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하여 건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이집트 사회의 위기는 풍요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안락한 생활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독립심과 훨씬 자유로운 정신을 갖게 되고 일반적인 권위는 물론 심지어는 파라오의 권위에까지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심 끝에 내놓은 방안이 이집트 사회가 누리던 부의 일부를 고갈시킬 수단을 찾게 되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벌이는 대규모 수로공사가 본보기감이 되었습니다. 땅 속에 있는 지옥의 방향으로 끝없이 구멍을 파들어 간다거나, 이집트 전체를 에워싸는 성벽을 쌓거나, 인공폭포를 만들거나 하는 안이 검토되었지만 언젠가는 공사가 끝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되풀이될만한 일거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채택되지 않았고, 결국은 파라오의 거대한 무덤을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는 파라오와 죽음. 더 정확하게는 파라오의 신성(神性)이라는. 그런가 하면 피라미드는 가시적이었고, 아주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피라미드 건설이 유한성과 무한성을 모두 지녔다는 점이었습니다. 파라오마다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게 되면, 피라미드를 건설한 파라오가 죽으면 새로 등극한 파라오가 자신의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피라미드가 건설되는 과정도 상세하게 설명이 됩니다. 이집트 각처에 산재해있는 채석장에서 피라미드에 사용될 바위덩이를 캐어 나르는데, 작업지시에 따라 각각의 채석장마다 미리 정해진 위치에 맞게 바위를 잘라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잘라낸 바윗덩이를 나일강 수로를 따라 피라미드 건설현장으로 옮겨져 경사로를 따라 차곡차곡 제자리에 놓아 쌓아올렸던 것입니다.


풍설에 따르면 피라미드는 하늘과 땅 사이의 균형을 상징했다고 합니다. 피라미드가 하늘의 빛과 땅의 암흑을 빨아들이면 동굴 안에서처럼 그 둘 사이에 내통과 교합이-심지어는 근친상간이-안에서 은밀하게 성사된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피라미드는 천상의 종자나 빛을 빨아들인다기보다 이집트를 통째로 먹어치우는 무엇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그들이 겪은 속박과 축적된 고통을 떨치고 새로운 이집트, 수정처럼 맑게 빛나는 이집트가 탄생했다고 믿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합니다. 쿠푸 역시 피라미드에 대하여 끌림과 증오심의 양면적인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피라미드의 도굴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된 다음에는 피라미드가 노화되는 과정에 대하여도 설명합니다. “흰빛이 급속히 윤기를 잃어 이제 분홍빛이 감돌게 된 것을 제외하면 사람들의 눈으로는 변화를 감지할 수 없었다. 팔백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주름살이 하나둘 드러나 보였다.북쪽 면의 돌 하나가 12월 어느날 오후 맨 먼저 갈라졌다. 그전에 이미 주춧돌 여섯 개가 부서진 바 있었다. () 천오십년이 지나자 마모의 흔적이 멀리서도 분간되기 시작했다.(152)” 아무리 돌로 지었다고는 하나 피라미드 역시 세월에 따른 변화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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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와 그의 주인 - 드니 디드로에게 바치는 3막짜리 오마주 밀란 쿤데라 전집 1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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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밀란 쿤데라의 전작 읽기에 도전한 적이 있습니다. 전작 읽기를 마친 뒤에 소개된 작품들 가운데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으니 전작 읽기가 완성된 것은 아닌 셈입니다. <자크와 그의 주인>은 희곡입니다. 이 작품이 탄생한데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희곡으로 각색해보라는 제안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쿤데라의 조국이 소련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이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극단적인 행위와 어두운 깊이, 공격적인 감정들로 이루어진 그 세계가 혐오스러웠다라고 했습니다.


대신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의 각색을 제안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러시아의 무거운 비합리성이 내 나라를 짓눌렀을 때 나는 서양 근대의 정신을 강하게 들이마시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를 느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정신은 지성과 유머의 환상의 향연인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이 아닌 다른 어디에도 그만큼 진하게 농축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라고 들었습니다.


작가는 희곡 <자크와 그의 주인>의 서두에 적은 변주서설을 통하여 이 작품을 쓰게 된 사연을 길게 적었습니다. 그리고는 <자크와 그의 주인>이 각색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으로 디드로에 대한 변주이자 디드로에게 바치는 나의 오마주라고 했습니다.


이 작품의 구성은 자크와 그의 주인이 여행하는 가운데 들른 그랑세르 여인숙이 무대가 됩니다. 자크와 그의 주인 그리고 여인숙의 주인이 전하는 포므레 부인의 사랑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무대는 앞 부분이 낮고 뒷부분이 높은 연단 형태로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앞부분은 현재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뒷부분은 과거에 자크와 그의 주인 그리고 여인숙의 여주인의 사랑과 관련된 과거의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이 등장하는 공간입니다.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개입되어 있는 가운데 뒤틀린 관계가 성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크의 사랑은 친구의 연인에게 동정을 빼앗긴 사연을, 주인의 사랑은 사랑하는 여인을 친구에게 빼앗긴 사연을, 여인숙의 여주인 포므레 부인은 후작의 배신을 처절하게 복수한 사연을 펼쳐냅니다.

이원화 되어 있는 무대를 활용하는 까닭에 그랑세르 여인숙의 여주인이 어느새 포므레 부인 역할을 하고, 자크가 아르시 후작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이중적 역할은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사랑이 서로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지다보니 자크와 그 주인이 왜 그리고 어디로 여행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한 대목도 나오지 않습니다. 작크와 그의 주인도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고, 그저 저 높은 곳에 씌어 있는 대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미 운명에 정해진 대로 따라간다는 운명론자의 입장인 셈입니다.


작가의 3막의 진행속도도 지정하고 있습니다. 1막은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 명랑하게) 2막은 비바체(Vivace, 화려하게 빠르게) 그리고 3막은 렌토(Lento, 길게 끌어 느리게)로 하라는 것입니다. 극의 진행을 협주곡을 연주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작가는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변주의 개념에 대하여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음악의 서사시라 할 교향곡이 외부 세계의 무한을 가로지르는 여행이라면, 변주는 다른 공간에 대한 탐험으로, 내면세계의 무한한 다양성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하였습니다.

희곡은 등장인물들의 대사로 작가의 의중이 전해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함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등장인물의 의중을 작가가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읽어봐야 쿤데라의 <자크와 그의 주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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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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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심리학자이면서 화가이자 작가인 김정운님의 슈필라움에 관한 수필집입니다. 독일어 슈필라움(Spielraum)은 놀이(Spiel)와 공간(Raum)이 결합된 단어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 의미를 정확하게 담아낼 적당한 우리말은 없고, 그저 여유 공간정도로 옮길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즈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인용하는 글을 꽤나 만나게 됩니다. 제 경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수련을 마친 다음에는 대부분의 직장에서 나만의 공간을 배정받아 일해 왔습니다. 물론 공개된 장소에서 일한 직장도 있었고, 두 사람이 방을 공유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슈필라움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바닷가 작업실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뒤늦게 미술을 공부하고 여수에 정착한 저자가 바닷가에 화실을 겸한 슈릴라움을 건설하는 과정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상을 통하여 겪는 다양한 경험을 적어내기도 합니다. 몇 대목을 소개하면, “뭍에서 보는 석양과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타고 보는 석양은 완전히 다르다. 벌겋게 흔들리는 가을 바다는 임마누엘 칸트가 이야기한 장엄의 미학(Ästhetik des Erhabenen)’의 완성이다. 서술할만한 미사여구가 없다. 그저 압도당할 뿐이다.(39)” 사실 페루의 와카치나 사막에서 지켜본 해넘이도 꽤나 장엄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해넘이는 본 기억도 있습니다만, 압도당했던 기억은 분명치 않습니다.


요즈음 중국에서는 시진핑 주석의 연임과 관련하여 술렁거리는 모양입니다. 그런 사정을 예견이라고 하듯, 시진핑주석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시주석이 작가의 심리적 기피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화 상대에 대한 존중의 단서가 없는 표정과 자세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존귀와 위엄을 지키느라 그 어떤 정서적 단서도 드러내지 않는 인간이 바로 시주석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대목도 있습니다. 독일의 공영방송 체데에프(ZDF)가 북한 관련 기록영화를 방영했는데, 낭송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과 북 모두 같은 민족이라며 통일하겠다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없다라고 마무리하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이룬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남한과 북한이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민족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이라고 합니다. 메이지시대 구미 각국을 여행한 구메 구니타게(久來邦武)1878년 발표한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에서 처음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민족이라는 단어보다는 핏줄이라는 우리말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한반도와 요동벌에 걸쳐 살던 우리네 조상들은 이질적인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천 년 내려오면서 피가 섞이고 어울려 함께 살아온 터라 결국은 한 핏줄이 된 셈입니다. 남과 북이 분단되어 왕래가 끊긴 것은 수천 년의 세월과 비교되지 않는 불과 80년도 안 되는 세월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통일이 되면 서로 어울려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자기만의 방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여자들도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는데, 불과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남자들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돌이켜보니 남녀가 유별했던 조선시대에는 왠만하면 남자들은 사랑에 거처하였고 여자들은 안채에 거처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남자의 공간은 사라지고 거실이라는 공용의 공간만이 남아있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슈필라움이라 할 만한 공간을 가질 수 없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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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해!! 볼링 시작해!! 시리즈 2
서동휘 외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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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서 꾸준하게 하는 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운동이 있습니다만,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는 제약이 있어서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종목을 찾게 됩니다. 걷기, 달리기, 수영과 같은 운동이 있습니다. 간편하기로는 걷기가 좋아서 주말에는 꽤 멀기 걷기도 합니다. 재수생 시절에 우연히 볼링을 칠 기회가 있었는데, 의과대학에 들어와서는 볼링을 즐기는 친구들이 없어서 점차 잊게 되었습니다.


40대 무렵 남원에서 근무할 때 볼링을 다시 시작했고, 대전으로 직장을 옮겼을 때는 혼자서 하는 운동으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식약청에서 일할 때는 볼링동호회를 창설해서 격주로 운동을 하고 부처대항전에도 나가기도 했습니다. 식약청을 그만두고는 꽤 오래 접고 지내다가 심평원이 원주로 이전하면서 근처에 있는 볼링장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우한폐렴의 사태로 인하여 문을 닫는 볼링장이 많아지면서 마땅한 볼링장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군포에서 일을 시작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완화되면서 금년 봄부터 다시 볼링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빠르게 경기력이 회복되면서 전성기의 실력을 뛰어넘기도 했습니다만, 이내 난조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그저 체력과 신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그저 꾸준하게 운동을 이어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만난 책이 <시작해 볼링>입니다. 브레인스토어 출판사가 나만의 운동을 가져보라는 취지로 기획된 시작해연작의 하나라고 합니다. 사실 볼링을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볼링공을 굴리면서 쌓아온 실력이라서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던 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독학으로 뭔가를 배우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책에 나오는 대목을 실전에 옮겨보았지만, 오히려 회복되던 경기력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그동안 해오던 것처럼 나름의 방식으로 경기를 운영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무엇이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볼링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크게 도움이 될 책이라는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볼링경기장에 대하여, 준비물이나 예절 등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으로부터 볼링공을 투구하는 방법, 초구에서 남은 핀을 처리하는 방법 등 실전에서 아쉬운 부분을 잘 정리해놓았다는 생각입니다. 공을 잡는 방법, 던지는 방법에 따라 공이 굴러가는 경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실전에 응용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표지에 써있는 대로 곁에 두고 그냥 읽자는 대목이 이해되었습니다.


많은 사진을 곁들이고 있어서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동영상이 있다면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즉 동영상을 부록으로 첨부했더라면....그렇지만 투구방향이나 공의 궤적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쉽게 이해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볼링은 공이 손을 떠나는 순간의 심리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상황에서 매번 같이 공을 던지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당연히 결과도 크게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결국 똑같이 던지는 법을 몸에 익히는 것이 좋은 성적을 올리는 비결인 셈입니다.


개인적으로 나이가 들어서 볼링을 하는 좋은 점은 몸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운동이라는 점입니다. 볼링이 운동이 되겠느냐고 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제 경우는 서너번의 경기를 하게 되면 온몸이 땀에 적을 정도로 피곤함을 느끼는 것을 보면 분명 운동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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