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다도해 사무소를 자원해서 완도까지 온 가장 큰 이유는 적은 비용으로 시댁이 있는 제주도에 자주 갈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시아버지께서 아프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가보지 못하는 아들의 마음을 알기에 다도해 사무소로 지원하고 싶다고 했을 때 흔쾌히 그러라고 할 수 있었다. 서울 본부에 있을 때는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명절 때밖에는 못 갔다.
우리 네 식구가 비행기 타고 아무리 최소 비용으로 간다고 해도 100만원 이상 드니 그 이상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요즘은 더 올라서 비행기표 값만 100만원 이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니 남들은 제주도가 시댁이라서 좋겠다고 하지만 난 제주도 한 번 갈 때마다 마음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바빴다.
완도에서 배를 타면 한 사람 비행기 타는 비용으로 네 명이 제주도에 갈 수 있다. 배삯이 어른 2만원, 어린이 만원 정도 한다. 처음엔 돈 든다고 미안해하던 시어머니께서 연휴가 되니 한 번 오라는 말씀을 서슴없이 하셨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는데 제주도에 다녀왔다. 우리는 이렇게 마음 땡기는 대로 사느라 모은 돈도 없다. 오늘이 행복하면 매일 매일이 행복하다는 남편의 지론도 한몫 했고.
완도로 온 후 일 년 반 동안 제주도에 다섯 번이나 다녀왔다. 부러운 사람이 많겠지만 가기만 하면 숙식이 해결되는 시댁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난 친정이 아니고 시댁인지라 마음 한구석은 조금씩 불편하다. 시어른들이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며느리 자격으로 가기 때문인 것 같다.
이번 여행은 시어머니 시아버지와 함께 한라산에 다녀왔기에 나름 뿌듯했다. 젊은 시절부터 몸이 허약했던 시아버지께서는 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으신다. 같이 사는 형님네도 늘 그러려니 싶어 나들이를 권한 적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작은며느리인 내가 자꾸 가자고 하니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시는 게 아닌가! 형님도 한 번씩 권해 보지... 나도 제주도 며느리 된 지 12년 만에 한라산은 처음 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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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에 올라가는 여러 코스 중 가장 짧은 코스를 선택해서 영실 휴게소까지 차를 타고 갔다. 일이 있어서 못 간 아이들 큰엄마만 빼고 열 식구가 어린이집 봉고차(아이들 큰엄마가 어린이집을 한다)를 타고 나섰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다섯이 모였으니 잠시도 조용할 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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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엄마 손을 잡고 끝까지 산행을 한 여섯 살 조카가 너무 대단하다. 사내 아이들 셋은 어디쯤 올라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데 중간쯤부터 선우는 힘들어 죽겠다고 한라산에다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산이 노하면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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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나한의 전설이 서려 있는 한라산 영실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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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살면서도 25년 만에 한라산에 오르셨다는 칠순의 시아버지. 힘드셨을 텐데 그런 말 한마디 없이 좋다고만 하셨다. 내가 부추겨서 나선 길이었기에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사실 신경이 좀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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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쨍쨍한 오르막길을 걷다 갑자기 나타난 고산 평원에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더구나 붉은 철쭉이 한 가득이었다. 산꼭대기에 이렇게 넓은 평원이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다. 이 풍경을 보려고 사람들이 한라산을 오르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에 땀이 식자 그동안 잔뜩 골이 난 채 산을 오르던 선우의 표정이 확 펴지더니 한라산이 좋다며 싱글벙글이 되었다. 배경의 높은 봉우리가 백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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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앞서 가서 뒷모습도 볼 수 없었던 사내 아이들을 여기서 만났다. 셋이 뭉쳐서 노는 게 좋아 힘든 줄도 모르던 아홉 살, 열 살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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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노루들이 자주 나타난다고 해서 노루샘이란 이름이 붙은 약수터다. 가지고 올라갔던 물도 다 떨어진 참이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물맛이 정말 끝내주게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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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던 지우가 갑자기 "노루다!" 하고 소리쳐서 보니 정말 노루 한 마리가 사람들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왼쪽 중간 위쯤에 있는 게 노루다. 두 마리의 노루를 더 보았는데 지우는 노루를 본 게 행운이라며 내내 좋아했다. 일기에도 노루 이야기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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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세오름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다. 키 큰 나무가 없는 고지라서 햇빛 아래 도시락을 펼쳤다. 아침에 도시락 걱정을 하는 어머니께 그냥 밥 하고 쌈만 싸가도 맛있다며 간단하게 가져왔는데, 휴게소에서 컵라면을 사와 함께 먹으니 세상에서 이보다 맛있는 밥이 또 있을까 싶었다. 늘 소식을 하는 아버님도 정말 달게 드셔서 바라보는 며느리 속으로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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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진을 찍자는 말에 아이들이 장난 치느라 난리가 났다.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백록담인데 갈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가능했는데 훼손이 많이 되어 지금은 출입 금지란다. 지금은 백록담까지 가려면 어리목으로 가야 한단다. 여기만 해도 해발 1700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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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힘들어서 죽을 뻔했다며 다시는 한라산에 가지 않겠다고 하던 아이들.
"선우야, 지우야, 할아버지 할머니랑 이렇게 산에 오를 기회가 또 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