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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 ㅣ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1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2년 3월
평점 :
누군가의 욕망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연민하기는 어렵다. 연민은 그 욕망의 못남,혹은 찌질함이 내 것이기도 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아주 쉽게 회피의 언어로 욕망을 비난할 때, 이렌 네미롭스키는 직설의 언어로 욕망을 연민한다. 여기에 실린 소설들은 가식과 허세로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엄마나 이웃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비아냥이면서 동시에, 그들에 대한 안쓰러움이기도 하다. 세상도 삶도 믿지 않는 자가 쓴, 그리하여 세상도 삶도 이해하게 하는 역설이 네 편의 소설에 담겨 있다. ㅡ소설가 한지혜
4편의 단편이 모두 다 좋았다. 참 잘 쓴 글이다. 읽으면서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더라. 읽다가 눈물도 나고 그래서 정화된 기분을 느꼈고 그런 느낌은 늘 삶이 살만한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엄마와의 갈등, 전쟁이라는 배경에서 일어나는 일들, 사랑, 아픔, 우정. 이런 것들이 담겨있다. 작가가 우크라이나 출신이라는데 요즘 다락방님을 따라 읽고 있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접점이 보인다. 그 책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도 우크라이나 출신이고 전쟁에서의 증언을 책으로 엮어냈는데 그 책이 다큐형식이라면 이 책은 창작이라는 점이 다르긴해도 추구하는 것은 어쩐지 비슷한것 같다. 무도회를 쓴 이렌 네미롭스키는 39살의 짧은 생을 살았고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녀는 상당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그 중 '스윗 프랑세즈'는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등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데 책과 영화 모두 꼭 보고싶다.
무도회
졸부가 된 부모가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무도회를 준비한다. 200명에게 초대장을 쓰는데 14살인 외동딸 앙투아네트가 자신도 무도회에 잠시라도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자 엄마는 어림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상처주는 말을 쏟는다. '이것아, 나는 이제야 겨우 살기 시작했어, 알아들어?' 분노한 앙투아네트에게 하필 초대장이 맡겨지고 그녀는 그걸 우체국에 가져가지 않고 갈기갈기 찢어 강물에 던져 버린다. 이어지는 일들이 흥미롭게 펼쳐지는데... 읽으면서 어린시절 엄마와의 갈등이 떠올랐다. 아마도 엄마에게 힘든 시기였으리라 짐작한다. 한번은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을때 엄마가 내 물건을 함부로 버려 화가 많이 난 적이 있었는데 너무 분노했던 나는 엄마의 블라우스를 몰래 가져다 버렸다. 워낙 옷이 많아서 티가 나지 않았는지 그 일은 그대로 잊혀졌는데 그때 얼마나 통쾌하던지. 지금도 엄마에게 그 일은 비밀이다. 앙투아네트에게는 철부지였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있다. 복수는 언제나 달콤씁쓸하다.
"넌 착한 아이야, 앙투아네트... "
바로 그 순간,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찰나의 순간, 한 사람은 올라갔고, 또 한 사람은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그렇게 ‘삶의 길 위에서‘ 엇갈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앙투아네트가 부드럽게 되뇌었다. "내 가엾은 엄마.…." - P75
그날 밤
25년간의 결혼생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바람나 집을 나간 아빠. 남겨진 엄마는 어린 딸(화자)을 데리고 혼자사는 동생의 집으로 간다. 여성들끼리 여럿이 모여 오랜 그리움을 달래고 눈물 가득한 배신의 상처를 위로하며 난롯가에 있었다. 동생 알베르트는 독신으로 살고 있고 어엿한 자신의 집이 있으며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선생님이다. 그녀는 언니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로인해 자신은 독신으로 살기로 작정한 것이라며 앞으로는 자기가 언니를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건 사랑의 문제가 아니야. 나에게는 목소리의 뉘앙스, 발소리, 목에 와 닿는 손의 감각, 격렬한 몸싸움과 키스가 필요했어. 빵이나 물, 소금이 필요한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엄마의 말들은 빈약하고 서툴렀으며, 목소리도 고르고 단조로워서 정열적이지 않았다. 그랬다. 엄마에게는 열정의 흔적이 더는 남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경험자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음악가, 예술가, 천재적인 창조자가 망설이며, 틀려가며, 고쳐가며 <월광소나타>를 연주하는 소녀들에게 말하듯 그 노처녀들에게 말하고 있었다.(중략) "아까는 내가 불행했다고 했지." 엄마가 끼어들었다. "사실이야. 난 네가 부러워. 너희의 평화로운 생활이 부러워. 하지만... 난 풍요로웠고, 가득 채워졌었어. 그런데 너희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지." 그러자 나의 이모 알베르트가 뜨개질감을 떨어뜨리고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P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