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관리실에 앉아 무너진 박물관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그랬다. 보기 싫은 것도 끝까지 보는 편이 낫다고, 의미 없는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기보다는 말이다. 그러면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게 된다 한들.
눈을 감았다. 지금은 싫어하는 것들을 피해 시선을 돌리고 돌리다 눈둘 곳 없는 세상을 살고 있었다.
- P254

나를 인계받은 늙은 경찰을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앞서 걷는경찰의 등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을 보며 어쩌면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딱딱한 놈들은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고, 불필요한 것들을 걸고넘어지기 일쑤니까. 그게 걱정이 됐다. 녀석을 따라 서 안을 가로지를 때였다.
근처에 앉아 있던 젊은 경찰 하나가 옆에 있는 녀석에게 귀엣말을 했다. 귀엣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그 말을들은 옆자리 녀석이 흠칫 놀랐다 앞에서 걷던 늙은 경찰도 그 소리를 들은 듯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 P345

그를 담당하고 있던 경찰이 말했다. "네가 찾는 범인이 도넛 가게에서 해고를 당하고, 정신병원 이력이 있는 여자아이일 거라고 생각지는 않아?‘ 하고 말이다. 그는 ‘술 깨면 계집아이에게도 질 인간이 번번이......‘ 하고 덧붙였다. 앞니의 눈에 조용한 불이 지나갔다. 경찰은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 P347

누군가를 죽이고 은폐하고 도망치는 짓을 반복하다 보면 배우지 않을 수 없다. 가면을 쓰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섞여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섞여 있는 와중에도 섞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 P347

"이 차는 어디서 난 거야?"
"훔쳤어."
"어떻게?"
"훔치고자 하면 훔칠 수 있어."
- P369

사람들은 자연과 시간을 향해서는 어째서 살인마라 칭하지 않을까. 그들의 살인이 너무 당연하기 때문일까. 지나치게 은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일까. - P409

작가의 말 ㅡ 말이 과하게 많아질 때 자신이어떤 상태인지, 재고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내 경우는 그렇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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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문명 떠받치던 4개의 구조

1. 산업의 지구화
생산의 산업 과정, 이른바 가치사슬이라고 하는데 이 산업과정이 전 지구적으로 연결된 지는 40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비근한 예로 얼마 전에 미국 사람들이 휴지가 없어서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고통을 당한 적이 있는데요. 사람들이화장지 회사에 언제 생산이 되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재료가 와야 하는데 그걸 알 수가없기 때문이에요. 이런 지구화라고 하는 것이 지난 40년 동안 벌어진 겁니다.
- P107

2.생활의 도시화

단순히 도시가 커졌다는 게 아니고요. 지구적으로 거대 도시 몇 개가 나타난 다음에 이 거대 도시들끼리 아주 긴밀한네트워크를 맺습니다.
그런 점에서 홍콩은 뉴욕과 더 가깝지 중국 농촌과 더 가깝지는 않습니다.
멋있는 표현이네요. 거리상으로는 중국 농촌과 가깝지만사실은 뉴욕과 가깝다.
시간도 훨씬 덜 걸리죠. 도시들이 거대해지고 네트워크가강해져서 지금 체계 인구의 절반이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도시에 살지 않는사람들도 도시와 관계를 맺어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지방에 계신 분들도 큰 병에 걸리면 큰 도시에 와서병원을 가는 게 도시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108

3.‘가치의 금화‘

아주 복잡한 개념입니다. 핵심만 말씀드리면 산업활동과 사회를 조직하는 기본 원리가 만사 만물을 다 금융자산으로 바꾸고, 그 금자산의 가격을계산해서 조정합니다. 그 가격을 산정하는 기능을 금융시장,자본시장에 맡기는 게 바로 현대자본주의의 조직 원리에요.
도시화와 금융화가 지구화랑 맞물려 있는데요. 코라19가 전 세계로 퍼진 이유가 이 세가지와 관계가 있습니다.
- P109

예를 들어 중국 우한에서 2019년 12월 어느 날 환자가 생겼는데 다음해 4월에 이탈리아가 쑥대밭이 되지 않습니까? 옛날 같았으면 우한 근처에서 돌다가 끝났을 거예요.
- P109

4. 생태적 환경

지구화, 도시화, 금융화, 이 세 가지는 모두 생태적 환경에 대한 무한적인 착취를 전제로 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그 결과 지금 우리가 전대미문의 생태적 위기를 겪고 있고요. 하지만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삼아 더 이상은 지난 40년간 해왔던 것처럼 무작정 자연을 활용하고 이용하고 착취하는 행태는 안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규제와 제한이 훨씬더 강해질 겁니다.
- P112

과학자들이나 관련 전문가들이 이 사태가 가라앉으려면 1년에서 3년 정도 걸릴 거라고 말하죠. 치료제나 백신이나오거나 아니면 인류의 60퍼센트가 걸려야 한다고요. 그리고 그 이전 세계는 잊어버리는 게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고요.
- P114

옛날 영문법 시간에 배웠던 의지미래,단순미래 기억나세요? 이처럼 하나는 단순히 예측해야 하는 미래가 있고 또 하나는 우리가 마음을 굳게 먹고 만들어나가야 하는 미래가 있습니다.
앞으로 단순미래는 불가능합니다.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아까 말씀드렸지만 대부분의 구조가 멀쩡히 있는 상태에서 몇 가지가 바뀔 때는, 우리가 예측할 수가 있어요.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전제를 놓고 모델을 만들어서미래에 투사해볼 수가 있는 거죠. 하지만 구조 자체가 바뀔때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 P116

제가 개인적으로 굳게 믿는 원칙을 한 예로 들자면 누구도다른 누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게 혼란스러울 때 마지막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단순 명료한 가치입니다. 
- P117

아주 근본적인, 문명의 기본적인 문제입니다만, 인간 역사에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무한히 긍정한 문명은 현대문명밖에 없어요.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꼭 해외여행을 가야 한다고생각하는문명도 이 문명밖에 없습니다.
- P120

이런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는 원칙이 계속되는 한생태 위기가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코로나19 위기도 누그러지지 않을 거고요. 현대문명의 가장 근간이 되는 이 원칙에대해서 반성을 해야 됩니다. 

우리의 욕망에 우리 스스로 질서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인가. 무한한 욕망을 계속 무한하게궁정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사회자:
어떤 분은 좀 심한 표현으로 "현대경제, 자본주의경제는 곧쓰레기가 될 물건을 계속 생산해온 경제다."라는 말을 하기도했어요.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키라고 부추기면서 과잉 생산, 과잉 소비, 과잉 쓰레기를 만들어왔던 게 아닐까요.. 생태 파괴도 그렇고요.

그렇습니다. 에너지 위기도 있고, 기후 위기도 있잖아요.. 사람들이 이걸 대체에너지로 해결하려고 하죠. 하지만 아무리훌륭한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더라도 에너지를 줄여야 한다고생각하지 않는 한, 계속 더 쓸 겁니다.
- P121

지금 경제가 어떤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 상황을잘 활용해서 새로운 담론과 운동을 강하게 일으켜야 합니다.
무한한 경제 성장이 아닌 인간과 자연과 사회 모두가 좋은삶, 이러한 방향으로 경제를 전환하자는 거지요.
- P122

김누리ㅡ

사실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제3세계 수준의 삶을 산다는것, 게다가 생존과 생명 문제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지켜줄 공공의료시스템이 없다는 걸 지금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 한국인들이 가진 미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너무나 좋은 계기라고 생각하고요. 왜 그런가하면 한국은 사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미국화가 심한 나라거든요.
- P136

한국의 거의 모든 제도가 미국식이에요. 교육제도, 대학제도, 엘리트 대학시스템, 그리고 대학의 경쟁과 높은 대학등록금, 지금 미국 대학의 등록금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데요. 1인당 국민소득 대비 가장 높은 등록금을 내고 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련의 것들이 유럽에는 없어요. 유럽에는 엘리트 대학도 없고 대학 입시도 없고 학비도없고요. 정치도 같습니다.
- P137

예를 들어 헬무트슈미트 독일 총리는 "미국은 사회적으로 보면 지옥이다." 이런말까지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의 사회시스템, 의료복지 시스템 같은 것들이 너무나 미비하다는 거죠.

의료는 우리가 더 낫죠. 의료는 왜 우리가 더 나은가? 이것도 사실 이유가 있어요.. 우리 사회가 지닌 독특한점 때문인데요.. 1960년대에 의료보험법이 처음 제정될 당시는 북한과 경쟁이 굉장히 심한 상태였습니다. 북한이 상당히진전된 의료시스템을 가진 상황에서 우리도 그런 의료시스템을 기획하게 된 거죠.
때문에 우리가 의료 부분만 미국과 다른 겁니다.
- P138

자본주의는 그냥 풀어놓으면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사실

독일에서는 소위 ‘야수자본주의‘라고 불러요. 야수가 된다는거죠. 그게 지금 한국사회의 현실이에요.
한국사회는 야수자본주의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활개 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자들, 소위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한다는 자들이 너무나 과잉 대표되어 있는 게 한국의회고요. 그래서 실업과 불평등이 이렇게 심한 겁니다.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실업, 불평등, 자살률, 노동시간, 산업재해율을 보이는 건, 바로 자본주의의 야수성이 한국사회에서 관철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 P143

생태적 붕괴 때문에 22세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또는 지금 지구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 인류가 될 것이다. 이런 담론들이 많아요. 최근 출간된 <2050 거주불능지구>라는 책을 보면, 앞으로 30년 내에 지구에 인간이 거주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단 얘기가 나와요.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그런 비관주의가 공식적인 영역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지요.
- P145

김경일ㅡ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도 나오죠. 인간은 기본적으로동물처럼 반응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나의 이기심이 잘 충족될 수 있다는, 아주 차원 높은 문화를 만들어냈다고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어두운밤길에 턱 하고 나타나면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반응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죠. 그런데 그 반응에 오래집착하거나, 그 반응을 어떤 정책이라든가 사회적 가치로 둔갑시킨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는 거죠.
- P164

사실과 진실은 어떻게 다른가사실과 진실이 다르다는 게 어떤 뜻일까요?
사실事實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는 식의표현을 쓰지요. 진실은 좀 다릅니다. 진실眞實은 ‘거짓이 없는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진실은 감춘다‘ 혹은 ‘밝힌다‘ 같이 보다 더 드러냄을 의미하는 동사적 표현과 결부시켜 사용합니다. - P166

거리에서 한 노숙인이 굉장히 초췌한 얼굴로 동냥을,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구걸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사실‘은 한 푼을 달라고 하는 행위죠. 그런데 우리가 가정한 ‘진실은 그 노숙인이 최소한 3일 동안 굶었겠구나, 하는 겁니다. 그런 진실에 기반해서 동냥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실상 그 노숙인은 굉장히 좋은 승용차를 타고 윤택한 생활을 하다가 옷을갈아입고 나타나요. "이 자리가 대박 자리네." 하면서요. 이게진짜 ‘진실‘인 거고요. 실제로 해외에는 그렇게 기업형으로 동냥을 하는 분들이 있죠..
배도 안 고프면서 고픈 척했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동냥하는 행위, 즉 사실을 본 우리는 그것이 진실과다르기 때문에 분노할 수 있겠고, 그러니까 사실이란 건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정확한 면이 있는 겁니다.
- P166

심리학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불안은 사실을 알려달라는 감정이고, 분노는 진실을 말하라는 감정이다. - P167

이렇게 불안할 때는 제대로 사실을 공개하는 게 가장 좋은 겁니다. 한국정부나 한국시스템이 잘한 게 그거고요. 사실을 알게 되니까 ‘아, 감염 위험은 높겠구나. 그런데 치명률은 이 정도겠구나.‘라고 하면서 자기 에너지와 사회, 혹은집단 에너지를 좋은 곳에 쓰는 거죠. 그런데 이처럼 사실이더 중요한 시점에 "진실은 말이야." 하면서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 P170

진실은 과학자들이 밝히는 겁니다. 과학자이신 최재천 교수님이 말씀하셨죠. 우리가 자연을 너무 파헤치는 바람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라고요. 그게 진실인 거죠. 우한의 어느 연구소에서 바이러스가 흘러나왔다. 사실상 이런 게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 P171

정말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회적으로 원하는 걸 계속 추구하다 보면 훨씬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훨씬 더 많이 빼앗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걸 알아가면서 그에 대한 역량을 발전시켜가는 사회나 문화에서는 더 적은 걸 가지고 공존하면서도 다 함께 행복하게살 수 있겠죠.
- P176

지위고하와 상관없이, 성공 여부를 막론하고 사람은 죽을때 이런 후회를 합니다. "그 친구한테 더 잘할걸." "그 사람한테 더 잘해줄걸."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보람이라는 건 내가아닌 다른 사람과 잘 지내온 흔적, 다른 사람과 공존한 삶의흔적이란 얘기입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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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자취는 지금도 지베르니에 고스란히남아 있다. 아이리스와 작약, 튤립, 양귀비를 흩어 심지 않고 종류별로 모아 화단에 심었던 모네의 방식이 많은 이들이 따라 할 만큼 인기를 끌었고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정원은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며 서서히 변하고 있다. 계절마다 정원의 식물들을 끊임없이 보살피며 조금씩 더 나은 모습을 이루어가는 정원사들은 모네의 신념대로 겹꽃없이, 풀 없이, 커다란 변화 없이 살짝 다른 느낌의 ‘붓터치‘를 만들어 간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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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모두에게 너무도 예기치 못했던 어떤 일이, 수도원 사회와 도시 사람들이 받은 느낌을 보건대 너무도 이상하고 불안하고 납득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을 미리 덧붙이겠는데,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으면 수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도시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불안을 안겨 준 이날에 대한 추억을 아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을 정도이다....... - P99

오후 3시가 지나기도 전에 내가 이 책의 앞선 편의 말미에서 언급한 어떤 일이 일어났으니, 이 어떤 일은 우리 중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기대에 너무나 위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복하건대, 이 사건에 대한 상세하고 번잡스러운 이야기는 심지어 지금까지도 우리 도시와 도시 근교 곳곳에서 굉장히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 P107

결국에는 그야말로 포만을 모르는 악의로 똘똘 뭉친 심연을 낳는 것이었다. - P111

지금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예를들어, 자기 자리에서 음탕하게 눈을 굴리고 있는 라키친이 기대하거나 상상할 수 있을 법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영혼의 거대한 슬픔이 그의 마음속에서 생겨날 수 있을 법한 모든감각을 삼켜 버렸으며, 만약 그가 이 순간 스스로에게 완전히 해명할 수 있었다면 지금 자신이 온갖 유혹과 시험에 맞설 수있을 만큼 몹시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음을 스스로 알아챘을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혼 상태가 아주 흐릿하고 모호하며 슬품이 줄곧 그를 짓누르고 있건만, 그럼에도 그는 어쨌거나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생겨난 하나의 새롭고 이상한 감각에 놀라고 있었다.  - P147

나는 아직도 이 마음과 싸우고 있는 거야. 나는말이야, 알료샤, 지난 오 년간의 내 눈물을 무서울 정도로 사랑해 버린 거야……. 어쩌면 내가 사랑한 건 오직 나의 모욕일뿐, 그 사람은 전혀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 P163

"그만 좀 해, 라키친" 영혼 깊이 고통을 느끼며 알료샤가 일
침을 가했다. "지금 그러니까 아까 25루블 때문에 나를 경멸하는 거지?
참된 친구를 팔았다. 이런 거겠지. 하지만 너도 그리스도가 아니고 나도 유다가 아니야."
- P168

‘착한‘ (‘반드시, 반드시 착해야 한다.‘) 삶을, 그는 매 시각 미친 듯 흥분하여 꿈꾸었다. 그 부활과 갱생을 갈구했던 것이다. 자기가 좋아서 빠져들었던 혐오스러운 시궁창이 너무나 괴로워졌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 처한 아주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무엇보다도 장소의 교체를 믿고 있었다이 사람들만 아니라면, 이 상황 아니라면, 이 저주받은 장소에서 떠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날 것이며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믿었던 것이며 그를 애달프게 했던 것이다
- P182

이상한 노릇이다. 이런 결정을 내림에 있어 그에게는 절망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완전 알거지나 다름없는 그가 어디서 갑자기 그 돈을 구하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그 무렵 이 3000을 구할 것이라고, 돈이란놈이 어떻게든 제가 알아서 하늘에서라도 뚝딱 떨어질 것이라고 끝까지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일들이 드미트리 표도로비치처럼 유산을 받아 공짜로 손에 넣은 돈을 평생 동안 오로지 써 대고 뿌릴 줄만 아는 사람, 돈을 어떻게 버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일어나곤 한다.  - P185

오.. 정말이지 저는 제법 노련한 정신과 의사거든요,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부인, 만약 부인이 노련한 의사라면, 대신 저는 노련한 환자겠지요." 미챠는 억지로 상냥하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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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조 씨가 방에 들어섰을 때 처음 본 것은 오기였다. 그는 한창매트리스를 찢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난폭한 소년으로서의 변태과정을 겪고 있던 중이었다. - P31

나는 그것이 위험한 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오기와 내 조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누구 하나 상황을 진정시키거나 멈춰 세우는 법이없었다. 우리는 달릴 줄만 아는 수레바퀴였고, 그 질주는 꼭 바퀴가 망가지거나 수레가 똥더미에 처박혀야 끝이 났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태져 똥더미를 향해가는 그런 사이. 하지만 마음만은 기가막히게 잘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오기도 그렇겠지만 나 역시, 범인을 내 손으로 잡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상황을 바라만 봐야 하는 건 엿 같았다.
- P98

잔잔한 바다를 보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 P100

평소 내가 차에 태우는 사람들은, 좀 더 경계심이 없고 막돼먹은얼간이들이었다. 이를테면 마을을 떠나고 싶어 하는 분별없는 어린 애들이나, 잘못을 저지르고 달아나는 도망자들, 편도체와 전전두엽이 망가져서 겁을 상실한 미친 놈들, 즉흥적으로 길을 나선 술꾼들 말이다. 마을 밖으로 나갈 생각이면서 버스 한 대 없는 밤에손을 들어 지나가는 차를 세우는 자들이야 뻔한 법이니까. 조금 웃긴 것은 정작 내가 차를 세우면 그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훑어본다는 사실이었다. 차를 세우래서 세웠더니 이놈이 대체 왜 이러지? 뭘 잘못 처먹은 놈인가 하고 도리어 나를 의심하는 식이었다. 그런 자들의 허들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차를 세우고,
‘목적지가 어디요? 거기까지 가는 건 곤란한데.‘
‘밤이 너무 늦었는데 마을로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겠소?" 장모님 댁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 중이라서 그건 좀…‘
하고 몸을 사리면 그들은 도리어 안심하며 내가 지녔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시한 채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그러면 나는 그들을 차에 태웠고, 그들에게 약이든 음료를 권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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