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스카이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김보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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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

 아기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

 해처럼 밝은 얼굴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동요는 개사될 운명이다. 아이들이 보는 하늘은 이상 파랗지 않다. 아기염소는 뜯어 먹을 풀이 없어 굶어 죽는다. 태양은 미세먼지에 가려져 뿌옇다. 미래 세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요? 우리가 선조들이 일으킨 기후 위기에 책임을 져야 하나요?” 어른들은 묵묵부답이다. 그들이 있는 것이라고는 남몰래 버린 쓰레기와 낭비한 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 강을 파괴하고, 종들을 절멸시키고, 빙하를 녹이는지 모른다. 대신, 절망적인 소식이 닥쳐오면 누군가를 탓하거나 체념하는 것에 익숙하다. 기후 위기가 현실이 지금, 인류의 구성원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화이트 스카이』의 저자 엘리자베스 콜버트는 사명감을 가지고 세계 곳곳을 직접 누빈다. 나는 생태학 저서를 읽을 , 압도적인 통계 자료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에 대해 걱정한다. 그러한 서술들은 현실감 없는 불안을 주기 때문이다. 작가는 나의 우려와 달리, 자신이 방문한 현장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녀는 아시아 잉어를 전기로 차단하는 운하 위에서, 멸종 직전인 물고기를 보호하려는 사막에서, 산호지대를 살리려는 연구실에서, 그린란드의 버려진 얼음 기지 안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후 위기를 막으려는 이들을 조명한다. 그곳에서 독자는 여러 세대에 걸친 인간의 시행착오와 그것을 복구하려는 노력을 발견한다.


 사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표지에 적힌인류는 이상 푸른 하늘을 없을지도 모른다 불길한 예언이 아니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라도 눈앞의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추천의 글에 적혀 있듯이뭐라도 해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작가 역시 탄소를 암석으로 전환하기 위해 아이슬란드에 위치한 본사를 찾아가 클라임웍스라는 회사의 취지와 원리를 소개한다. 혹자는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간이 환경을 파괴하는 속도는 이미 걷잡을 없어요. 재앙은 예정되어 있습니다라며, 그들의 노력을 폄하할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적대적인 물음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정말 그렇습니까? 지구를 구하려는, 아니 도와주려는 인간의 노력은 정말 부질없습니까?” 그녀는 생태계를 보호하려는 제도적 장치뿐만 아니라, 생물을 지키려는 개인의 사소한 노력도 귀중하다고 대답한다.


 기후 위기에 직면한 세태를 표현한 문장이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뭔가를 하는 것보다 낫다. 때로는 반대다.”(187) 절멸하려는 종을 살리려는 노력은 분명 가상하다. 그러나 수수두꺼비를 살리기 위해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은 과연 유기체를 위한 일일까? 탄소 배출을 막기 위해 대기에 탄산칼슘과 다이아몬드 입자를 뿌린다는 지구공학은 이론상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의 잠재적인 여파를 감히 예측할 있을까? 경우에는뭐라도 해봐야지 상당히 위험한 접근이다.


 그러므로 작금의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다. 어떤 것이 지구를 위한 최선의 선택인지는 지구가 알고 있다. 그린란드의 빙하에는 고대의 눈부터 근대에 쌓인 얼음층, 그리고 현재에도 축적되는 입자들이 섞여 있다. 이를 통해 연구자들은 과거의 추운 기후로 인해 문명이 오랫동안 발전하지 못했음을 추론했다. 지혜란 그토록 자명하고 정직하다. 어떤 기발한 천재 명의 아이디어로도, 눈앞의 이익을 바라보는 집단이 합의한 지성도, 인간의 행복에 관심이 없는 인공지능의 제안으로도 얻어지지 않는다. 인류와 지구의 공생은 양쪽의 입장을 모두 헤아리며, 미래 세대의 안위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의 지혜로만 가능하다.


  문장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여겨서는 된다. 지혜란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것을 체득한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와 세계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파란 하늘을 지키는 일이 똑똑한 과학자나 정치가에 달려 있다고 단정 짓지 말자. 자라날 아이들에게 아기염소들과 함께 태양처럼 웃을 앞날을 기대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미래 세대가 지켜야 가치에 대해 명확히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후 위기를 통과하고 있다. 이상 막연하고 막막한 앞날에 대해 우려하는 일은 관두자.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어떤 것도 바꿀 없음을 알면서도, 지구를 위해 인생을 사람들을 책에서 증언한다. 현재의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좌절과 체념이 아닌 희망과 자신감이다. 지구는 당신 덕분에 나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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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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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 잘 알려진 책이고 제목도 독특해서 언젠가 읽어 보아야지 하다가 마침내 빠른 속도로 독파했다. 논픽션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딱딱하지 않고 잘 읽힌다. 그러면서도 환자들이 모두 실제로 그 일을 겪었고, 통과하는 중임을 알았을 때 신비로움을 느낀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고 그 삶이 하나하나 다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24가지 사례에 다소 편차가 있지만, 저자는 애정을 가지고 이 환자들을 대하고 치료하려 한다. 뒷이야기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독자도 그 치유(또는 동반)의 여정을 목격할 수 있게 한다.


 인상 깊은 사례 세 가지만 꼽으라고 하면, 폭음으로 방금 전의 일을 모조리 기억하지 못하는 지미, 고유 감각을 잃어버린 크리스티너, 자폐증을 가진 예술가 호세이다. 지미는 1945년 이후의 기억을 모두 상실했는데, 여기서 올리버 색스는 "연속성을 잃어버린 존재를 과연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내가 이러한 상태에 놓이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생각했다. 과거에만 갇혀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할까? 확실한 건 음주가 건강에 정말 해롭다는 사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해로운 물질은 입에 대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이었다.


 제육감, 즉 자신의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지하는 감각이 없다면, 실로 내 몸이 사라진 기분이리라. 물론 나는 그것이 어떤 감각인지 헤아릴 수 없다. 예컨대, 키보드를 입력하는 나의 손의 감각이 없다면 눈앞에서 무엇인가를 두드리는 괴상한 물체에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애초에 타자를 치라는 명령이 입력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으리라. 걷는 것도 의식하지 못해서 자신이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고 생각할까? 발칙한 상상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이것을 어느 날 갑자기 겪은 크리스티너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러나 그것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참 대단하다.


 보통의 정신분열증 환자는 외부의 자극에 극도로 예민하지만, 자폐증 환자는 정반대이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의 섬처럼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다. 오직 자신의 세계 안에 놓여 있다. 자폐증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비교적 익숙하지만, 그것의 실상은 처음 본다. 호세에게 뛰어난 예술적 감각이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일이 참으로 놀랍다. 저자가 가지고 있던 편견, 즉 자폐증 환자에게 예술성이 없으리라는 선입견을 나 역시 보유했고, 호세를 통해 어느 정도 완화된 듯하다.


 올리버 색스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자랑하려고, 또는 신경학적 질병을 앓는 이들을 나열하려고 이 책을 쓰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다양한 환자들을 접하고 그들이 세상과 공존하는 법을, 조금 다를지라도 포용하는 법을 독자에게 보이기 위함이다. 그의 노력이 어떤 성취를 거두었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책 한 권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지만, 같은 책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기도 하니까. 나에게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상대적으로 가볍게 읽혔다. 그러나 언젠가 실제로 아픈 자들을 마주했을 때, 이 책이 생각나지 않을까? 관찰자가 아니라 동반자로, 치료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대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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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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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부대』를 비롯해 시사를 폭로하는 작품을 볼 때마다 나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는 에베소서 말씀을 떠올린다. 물론 이 세상의 악함은 인간이 선택한 것이고, 그 안에 나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세상의 악에 대해 항상 관망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하지만 나는 세태에 휩쓸리기보다는 진리를 따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그것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회적 증거를 따르고 싶어 한다. 즉,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또는 손익이 되는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다른 사람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채택하는 의견을 수용한다. 이렇게 되면 설령 내가 선택한 것이 잘못되었다 해도 책임이 분산되어 큰 부담이 없다. "나도 속았다"고 변명하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인간의 원죄가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 깨닫는다.


 기자 출신인 작가는 연예인들의 실명과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언급하며 허구와 실제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순진한 독자들은 실제로 작가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댓글부대』가 가진 설득력과 흡입력은 강렬하다. 잘 만든 소설도 이 정도인데, 영상 매체나 미디어는 얼마나 더 강한 파급력이 있을까? 극중에서도 결국 댓글뿐만 아니라,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지 않은가? 잘못된 정보가 한 번 퍼지게 되면, 그 영향력은 종잡을 수 없다. 매일 새로운 질병이 발견되는 것처럼, 어떤 디지털 테러가 우리의 정신을 좀먹을지 모른다. 소설의 종국에는 소위 메타적인 위협이 대중을 잠식한다. "너의 의견도 댓글부대(가짜)가 작성한 것이지?"라는 공격은 반박할 수 없게 된다. 메신저가 거짓임을 밝히면, 메시지는 그것이 어떤 내용을 담든 거짓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너 댓글부대지?"라는 질문에 한 번 걸려들면, 아무리 발을 빼려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나의 정체성과 생각이 거짓이라고 판별된 순간, 온라인에서 그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기를 쓰고 자신의 진실됨을 증명하려고 발악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류에 지나치게 휩쓸리지 않아야겠지. 어떤 정보가 퍼질 때는 상호 검토를 필수적으로 거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나의 의견이 어떤지 정립해야 하겠지. 저 댓글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기보다, 나의 진실된 마음이 무엇인지 검토해야겠다. 또한, 비난을 받는 대상이 내가 될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언제나 의심 받고, 비난 받고, 핍박을 받았다. 뉴스나 매체에서 타락한 목사나 이단과 사이비에 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양면적인 감정이 들었다. 거짓이 밝혀지고 올바른 믿음이 세워지기도 하지만, "예수쟁이들이 다 그렇지"라는 말을 들을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비판과 의심을 이해한다. 어떤 모욕과 사상도(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이나 종교는 자아의 지나친 팽창이라는 니체의 철학 등)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전혀 손상시킬 수 없으니까. 복음이라는 부드러운 힘은 어떤 인간이든 반드시 굴복시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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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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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의 추천으로 알게 되어 읽게 된 책이다. 자클린 고모의 영향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던 작가가 훗날 회의에 직면하여 불가지론자(신에 대해 인간은 절대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로 돌아서고, 그러한 시선으로 기독교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내용이다. 실제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 그리고 작가의 상념과 추측이 자유롭게 혼재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의 분별력이 요구된다. 성경을 잘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것은 모두 헛소리야!"라고 치부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이야. 신약 성경의 내용은 그럴듯한 허구에 불과해"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사실 엠마뉘엘 카레르는 기독교를 전면으로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구약 성경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고, 하나님의 존재를 모독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맥락 속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울, 누가, 베드로 등의 행적을 평가하고 마침내 예수께 질문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분명히 선언한다. 자신은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자신이 가진 의심은 더 큰 믿음을 가지기 위한 발판보다는, 불가지론에 확신을 더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즉, 그는 작중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설득하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나는 그를 어떠한 태도로 대해야 할까?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은, '당신이 겪었던 모든 의심을 나도 통과했다'는 것이다. 의심 많은 제자였던 도마와 같은 나는 눈에 보여야만, 또는 분명히 증명되어야만 그것을 믿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창세기에 적힌 말씀들이 매번 나에게 도전이었다. 또한, 오늘날의 가치관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구절들을 발견할 때마다 괴리감을 느꼈고, 이해되지 않는 구절들에 대해 좌절했다. 그러나 믿음은 논리와 이성을 초월한 것이다. 믿음은 언제나 나의 이해를 앞서 간다. 그러므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 따지기보다, 주어진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우선하기로 했다.


 또한 엠마뉘엘 카레르, 당신의 적대와 의심은 결코 기독교에 있어서 중대한 위기가 아니다. 중세 시대나 기독교 문화권에서 이 소설을, 또 당신을 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당신의 생각을 용납한다. 니체를 비롯한, 신을 부정하는 철학자들의 의견도 존중한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는 그러한 적대와 의심이 아니라, 거짓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럴 듯한 진리로 포장하여 우리의 마음을 미혹하는 자들이 나는 더 무섭다. 시대를 지배하는 개인주의와 비관론, 그리고 이단이야말로 우리가 맞서야 할 적이다. 기독교를 논리로, 이성으로 격파하려는 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무너뜨릴 수 있었다면야, 기독교는 얼마든지 꺾였을 것이다. 어떤 잔혹한 수법으로 억압해도,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의 사고가 복잡해져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가 아닐까? 그럴 때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비판 덕분에 예수의 진리가 선포되는 것 같아서 기쁘다.


 혹시라도 당신이 가진 의심 때문에 주님께 돌아가기 두려운가? 괜찮다. 당신이 품고 있는 모든 의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믿음을 가지길 원한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붙잡히시던 날, 세 번이나 그를 부인하고 저주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시고 그를 만났을 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는다. 즉, 베드로가 열 번 부인했으면 주는 열 번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부인하고 외면해도, 그는 하염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끈질긴 사랑에 굴복하지 않을 자가 없다.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그분을 비난하고 모욕해도, 그분이 가지신 존귀함과 거룩함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예수를 못박았습니다. 나는 그분께 돌아갈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탕자의 마음가짐을 품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기를. 그분은 당신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니까. 당신이 찰나에 맛보았던 그 왕국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고 계시니까. 당신의 겨자씨 같은 믿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니까.


 나 역시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본다. 어렸을 적부터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읽었고,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의 존재를 인정했다. 왜냐하면 진리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던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납득할 수 있는 가치였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나의 마음은 의심으로 가득했고,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한편으로는 "나의 이 열심과 믿음이 언제라도 의심에 의해 뒤집힐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되었을 때, 나는 예전과 같이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정말 실낱 같은 파편임에도 말이다. 그분이 가진 사랑의 총량을 내가 헤아릴 수 없고, 언어로도 표현할 수도 없으나, 주님께서는 실로 내 인생의 궤적에 관여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구원의 확신과 주의 임재에 잠겨 있는 지금, 이들이 지닌 의심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 대신, 나는 그 생각을 용납한다. 언젠가 그 의심들이 걷히고, 순수한 빛이신 예수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 예수가 내 안에 들어올 때, 모든 비난과 상처와 적대는 포용될 수 있다. 그러니 얼마든지 욕해도 좋다. 의심해도 좋다. 그럴수록 그리스도는 당신을 끈질기게 붙잡을 테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밖에도 많이 있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매일 하고 계시는 일들이다. 이 일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증언하고, 나의 참된 증언을 기록하는 것, 이게 바로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주여, 앞으로 내게 함정들과 침체된 날들과 어쩔 수 없이 당신에게서 멀어지는 날들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이 소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주옵소서. 이 열여덟 권짜리 노트들의 마지막에 이르러 당신께 간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 충실함입니다. - P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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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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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힌 책은 가볍게 쓴다. 죽은 인간을 수집하는 살인마에 나를 이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영어로 읽을 때 진수가 드러나는 작품일 것이다. 한국어의 껍데기를 쓰고 나니, 그리 특별하지 않은, 어쩌면 불쾌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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