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하나님 믿음의 글들 276
안재경 지음 / 홍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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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직접 선물 받은 책은 『고흐의 하나님』이 처음일 거야. 미술에 조예가 없는 나는 고흐의 이름만 들었지, 그의 작품에 담긴 정서와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어. 고흐가 신학교까지 갔다가 쫓겨났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어. 하나님을 사랑했고, 가난한 자들을 품었기에 그들처럼 살고자 했지. 세상 모든 것을 사랑했기에 거듭되는 발작 속에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리 아름답지 못한 작별임에도 기꺼이 받아들였나 봐. 혹자는 그의 인생을 실패했다고 여길지 몰라도, 그의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이 동행했다면, 결과만으로 빈센트의 인생을 평가하기에는 무리야.


 이 책은 고흐의 작품을 테마별로 전시하고, 친절하게 해설해 주는 큐레이터 같아. 전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림들의 의미가 선명하게 박혀. <감자 먹는 사람들>에 성찬 공동체가 담겨 있다는 사실, <별이 빛나는 밤>에 주님과의 합일을 꿈꾸는 소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아. 빈센트의 삶과 그의 작품을 별개로 놓을 수 없어. 언어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익숙한 나는 여전히 그림을 해석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지만, 어쩌면 미술이야말로 AI가 흉내낼 수 없는 인류 최후의 보루라는 생각도 들어. 화법이나 기풍은 흉내낼지 몰라도 그 안에 영혼이 없달까? 인생이 없는 존재이기에 어떤 그림에도 자신을 투영할 수 없겠지. 새삼스럽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야.


 빈센트의 삶을 들여보고 있노라면,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의 가사가 떠올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난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그래서 그는 유럽 전역을 걸으며 마주한 세상을 영혼에 담았어. 일본의 자연 친화적인 사상과 불교에 매료되기도 해. 거리를 방황하는 과부를 거두어 그녀와 그의 아이를 책임지려 하기도 해. 하지만 그의 삶은 결점투성이였어. 동생 떼오의 집에 머무르며 손님들에게 화를 퍼부었어.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래서 평생 혼자였지.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빈센트에게 엄청난 절망이었을 거야. 눈앞의 사람도 사랑할 수 없는 무력함 속에 놓였겠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통과해야 하는 믿음의 여정도 고흐와 같을지 몰라. 주님께 내 삶을 드린다고 결단하고, 그분의 사랑을 닮고 싶다고 간구하지만, 전혀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좌절하지. 종교 공동체는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사람들은 나를 피하기도 해. 믿음이 충만해졌다가도 삶의 폭풍 속에 꺾이기도 하고,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의심이 들기도 하지. 그럴 때 나는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막연하게 기도하고, 기다리라는 말을 해야 할까?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싶은 말은, 나의 것을 정말 모두 내려놓았는지 묻고 싶어.


 고흐에게는 그림이 자신의 정체성이었겠지. 이것을 포기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거야. "주님,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화가로서의 삶도 포기하겠습니다"라는 결단을 내리는 일은 어려웠을 거야.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로 그때부터 하나님은 고흐를 사용하기 시작했어. 더 이상 자신의 힘과 의지로 꿈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은사를 쓰기 시작한 거야. 주님께 내 삶을 드리는 것은 모든 소유와 욕망을 포기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라는 의미가 아니야. 그런 삶도 참 귀하지만, 자신의 구원밖에 이루지 못하지. 고흐는 다시 세상에 보내졌어. 외로움과 궁핍함이 함께 했지만, 그렇기에 낮은 자들과 위태로운 자들의 마음을 이해했을 거야. 그리고 비로소 그의 붓은 자신의 뜻이 아닌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지. 누군가는 렘브란트처럼 기독교적 소재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흐의 작품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할 거야. 그 말이 맞아. 하지만 다르게도 볼 수 있지. 그것이 예술의 특징이야. 정답을 강요하는 이 세상의 원리 속에서 정해진 답은 없다고 외치는, 시대의 흐름에 정통으로 거스르는 것이 문화의 옷을 입은 예술이 쓰임 받는 방식이겠지.


 삶의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있니? 사실 정답은 나와 있어. 사랑하기 위해서야. 그러나 막상 세상에 발을 들이면 말로는 너무 쉬웠던 사랑이 삶으로 옮기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걸 알게 돼.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 때로는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니까. 언제나 정답을 알고 난 후에 실천에 옮기는 것이 지혜롭고, 그렇지 않은 자를 미련하다고 말하는 추세야. 먼저 사랑을 받아야만 그에 대해 반응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세대야. 그러나 항상 사랑은 먼저 마음을 여는 자에게 허락되더라. 사랑이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사랑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납득하려면, 결국 주님의 시선을 갖출 수밖에 없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한 유일한 존재니까. 전부를 이해하지 못해도 일단 순종하는 자에게 사랑의 실마리가 주어지더라. 기꺼이 실패하고, 기꺼이 상처 받고, 기꺼이 낮아지고, 기꺼이 손해 보는 네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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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의 생각수업 -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세계 최고 인재들의 생각법 1
후쿠하라 마사히로 지음, 김정환 옮김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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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상했던 내용이 아니긴 했지만, 신선한 전환점을 주었다는 점에서 독서의 의의는 충분했다. 테스트 결과 나는 전체론에 조금 가깝다. 경제 발전과 환경 보호의 딜레마, 예술에 대한 토론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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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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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모순으로 가득함을, 인간은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인과 관계를 설정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덧붙여서 만사를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실로 삶이란 설명하려 할수록 그럴 수 없음이 드러난다. 어떤 사람을 사랑했던 그 이유가 미움의 계기가 되고, 누가 봐도 보필인 사람을 멀리하며,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보다 행복에 가깝다. 무엇보다 각자의 인생에게 반대편 상황에 대한 동경이 있다. 부족한 아비를 둔 자식은 그 아비를 외면하려고 하나, 끝내 그를 포기할 수 없고 그를 닮아간다. 가난에 진절머리가 난 자들은 부자를 부러워하지만, 부자는 걱정 없이 살고 싶어 한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결핍이 있고, 그것을 몸소 체험하고 나서야 이해한다.


 『모순』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구한, 정상적인 인물로 보이나 속은 모순으로 찬 안진진의 일대기를 그린다. 그 삶의 편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나치게 솔직한 것에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지치기도 하지만, 끝내 그녀가 통과하는 비극에 참여하게 된다. 마치 그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인 듯이 말이다.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재회도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그 상황에서 진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바보 같은 선택을 반복할 뿐이다. 누구한테 들려주어도 어리석었다고 말할 짓만 벌인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라는 다짐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쩌면 이 오래된 소설은 안진진의 작은 다짐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무미건조했던 그녀는 담담하게 가난에 저항했고, 마음이 여유로워 보였던 이모를 따른다. 자유로운 아비를 끝내 사랑하는 어머니, 용서를 넘어서 불구나 다름 없는 남편을 돌보는 어머니를 거부한다. 나영규는 철저히 계획 속에서 자신을 사랑했고, 김장우는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을 사랑했다. 안진진은 어떤 것은 선택으로, 어떤 것은 받음으로 엇갈린 운명을 맛본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께 돌아가고, 이모부와 다름 없는 나영규를 선택한다. 행복에 잠겨 있는 줄 알았던 이모는 불행과 불안 속에서 침식되고 있었다. 진상이 밝혀졌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렇게 상실을 겪음으로 안진진은 인생이 모순투성이임을 이해한다.


 아마 인간이 맞닥뜨리는 가장 큰 모순은 이것이 아닐까. 죽음을 받아내는 것은 산 자의 몫이다.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과 아픔을 견디는 일은 오직 생존자의 영역이다. 죽은 자가 통과한 영역을 끝내 남겨진 자는 알 수 없음이 결코 해결되지 않는 모순이리라. 세상살이에 놓인 우리는 종종 이러한 논의를 잊고, 외면한다. 마치 죽음이 나와 전혀 무관한 일인 것처럼, 타인의 고통과 몰락이 그들 자신의 모순으로 인한 것이라고 여긴다. 산 자들끼리 죽음에 대해 나누지 않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모순이다. 아마도, 죽음이란 겪고 나서야 이해되는 인생의 모토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유일한 관념이기 때문이리라. 


 오늘날 많은 이들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인생의 격언으로 삼는다. 마치 주어진 현재를 마음껏 즐기라는 선조들의 조언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라틴어 경구가 완성되려면 반드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가 동반되어야 한다.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현재는 너무나 소중해진다. 누구도 지금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꿈꾼 자에게만 진정한 오늘이 주어진다. 그저 눈앞의 즐거움만을 따르며 산다면, 반드시 자기 안의 모순과 직면하게 된다. 그때 좌절하고 아예 무너져버리느니, 우리의 일상을 적당한 무지와 적당한 가난과 적당한 고통으로 채우는 것이 오히려 행복에 가깝다. 완벽하게 안전하고, 완벽하게 건강하고, 완벽하게 편안한 상태를 꿈꾸며 살아간다면, 글쎄, 그 꿈이 당신을 좀먹을 것이다. 인간의 자체적인 모순과 불완전함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더 미련하게 살아가도, 조금은 더 손해 봐도, 조금은 더 따뜻하게 지내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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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돈키호테 (꿈의 책장 에디션)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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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쩐지 긴 글을 읽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두꺼운 책에 설렜다. 그 방대한 이야기가 주는 도전, 모험을 시작할 때의 설렘, 그리고 여정의 끝에 성장하게 될 나에 대해 기대했다. 그러다 나는 긴 글을 쓰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작된 무모한 돌진은 현재진행형이다. 현실이라는 것에 치여 책 읽을 시간도 없다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한가로이 1000페이지가 넘는 소설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고, 아무도 끝까지 읽지 못하는 긴 소설을 써 왔다. 때로는 이 여정의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이 되기도 했다. 이 모든 활동이 소일거리 내지는 자기만족을 위한 무의미한 일인가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야 납득하는 것은, 내가 접했던 모든 책이, 내가 만들었던 모든 이야기가 저마다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돈키호테』를 도서관의 서가에서 고른 이유는 나 역시 『돈 키호테』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나 『성경』처럼 나의 인생을 지대하게 바꾸지는 못했어도, 어린 시절 나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에 상당히 일조했다. 소설에 담긴 모험들을 나 역시 사랑했고, 돈 키호테가 지향하는 가치를 마찬가지로 동경했다. 처음에는 산초의 편에 서서, 엉성하기 짝이 없는 기사의 여정에 코웃음을 쳤지만,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나며 변화하는 그의 모습에 동화되었다. 이야기의 힘은 그런 것이다. 미련한 자조차 현명하게 만들어 버리고, 무모한 자를 용감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인생에는 그러한 힘이 있다. 각자의 삶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그것은 크든 작든, 좋든 싫든 타인의 삶에 영향을 준다. 설령 그 사람과 전혀 무관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나의 돈키호테』는 『돈 키호테』라는, 세르반테스가 탄생시킨 불멸의 고전을 읽어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아주 오래 전에 작품을 읽었기에 선명하지는 않지만, 이 소설이 지향하는 바는 단순히 세르반테스를 '반태수'로, 세비야를 '서울'로 일대일대응시켜 번안하는 작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여정이, 평범하고 때로는 한심하게 보이는 인물들이 그 끝에서 성숙해진다. 그 안에 수많은 인생들이 스쳐 지나가고, 어떤 삶은 인연이 되어 또 다른 생명을 낳기도 한다. 진솔의 도전은 그녀의 기억 속 돈키호테였던 장영수에게 닿아, 마침내 그조차 변화시키게 된다. 그들이 함께 만드는 이야기는 담백하고 소소하지만, 분명한 울림을 준다.


 아마 여정의 중간에서 힘듦을 느끼는 독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진솔의 고민과 그녀가 마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체적인 흐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품기도 했을 것이다. 바로 내가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야기가 완성되고 나서야, 그 서사들이 필요했음을 인정한다. 어떤 이야기던 간에 결말을 무시한 채 판단할 수 없다 했던가, 한 권의 책을 덮기 전까지는 섣불리 평가할 수 없고, 인생이 끝을 맺기 전까지 함부로 잣대를 매길 수 없다. 각 등장인물의 고민을 과소평가했던 나 자신을 반성한다.


 한 권의 여정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다음 여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멈추고 싶어도 삶은 지속되듯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그러므로 배움은 결과가 아닌 과정 속에 있다. 돌아볼 틈도 없이 나는 인생의 또 다른 모험 속으로 휘말린다. 처음에는 그것이 버거웠으나, 이제 그 모험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나의 매 순간이 기쁨으로 가득하다. 찰나에 남아 있던 불안마저 기대로 바꾸게 되었다. 돈 키호테로 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고? 한번이라도 마음을 열고,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떤지. 나이와 상황 때문에 두렵다면, 그것도 존중한다. 가난과 실패보다 우리의 인생이 크다. 어떠한 역경도 여정을 끝낼 만큼 강력하지 않다. 이야기의 한 부분일 뿐, 그것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결말이 우리를 기다리겠지. 우리 모두 세상을 이루는 귀중한 캐릭터이다. 각자의 이야기가 경청되고, 주목되는 세상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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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균류 - 신비한 버섯의 삶
로베르트 호프리히터 지음, 장혜경 옮김 / 생각의집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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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류 및 버섯의 생태에 대해 읽고 있자면, 절로 겸손해진다. 감각의 노예인 인간은 지각되는 것에 너무나 취약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나만 잘 살면 돼"라는 주문에 스스로를 세뇌시켜, 지구상에서 가장 생존에 유리한 '공존'을 실현하는 균류를 하찮게 여긴다. 균류의 세계는 굉장히 미세하고 섬세해서 잘 인지되지 않지만, 그것은 분명히 실재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더 크다. 벽 너머와 바닥 아래의 세상을 전혀 모르는 인간은 햇빛 아래에만 생명이 있다고 착각한다.


 균류는 분명 동물과 식물도 아닌 그 무엇이다. 그것은 죽음을 이용하여 생명을 피운다. 선사시대의 대멸종이 균류에게는 낙원이었다. 방사능과 극지방, 사막이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것은 생존한다. 그들은 물질을 분해하고, 생물을 감염시키기도 하지만, 생태계를 회복시키기도 한다. 한때 인간은 이것을 식물로 오해하기도 했고, 분류를 어려워 했으나, 이제야 실마리를 잡아가고 있다. 버섯은 실로 인간의 오랜 친구였다. 트러플, 목이, 느타리 등 희귀하거나 익숙한 버섯들이 줄줄이 소개된다. 어떤 것은 독성이 있으나, 어떤 것은 인간의 병을 치유한다. 


 균류의 세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자연의 신비는 미처 다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것이 앞으로의 인간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지 기대가 된다. 한편, 그 지식들이 생태계에도 좋은 영향을 끼쳤으면 한다. 각 동식물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어떻게 하면 보존할 수 있는지 알게 되면 환경을 보호하는 데에 조금 더 진심이 되지 않을까? 지식과 기술이 그동안 환경을 파괴하는 데에 이용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지식과 기술이야말로 지금은 자연을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그러나 실재하는 세상이 있고, 각 세대는 그것을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인간은 멸종해도 균류는 살아남을 것이다. 소위 '인류세'를 논의할 때, 동식물이 주인공이 되는 문학 작품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여겨진 세상에서도 어떤 생명은 살아 남았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부터 수많은 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극히 사소해 보인다고 그 생명을 우습게 여기면 안 된다. 우리가 아기와 아이의 죽음에 더욱 슬퍼하는 까닭은 한 우주와 같은 가능성이 소멸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시각은 죽음 너머의 생명을 바라보는 일이다. 균류가 물질을 분해하고, 또 다른 생명을 쌓는 토양이 될 것이다. 균류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의 소중함을 모두가 동의할 때, 또 다른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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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2-18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핵전쟁이후에도 살아나갈 생명체는 균류와 바퀴벌레 뿐이라고 하는데 정말 엄청난 생명력을 자랑한다고 여겨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