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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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을 읽고 있는 사피엔스는 모두 잠재적 혁명가이다. 혹시 자신이 호모 에렉투스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필수 교과목이 된 한국사의 첫 장만 펼치면 예전의 인종은 모두 멸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당신, 호모 사피엔스는 언제든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 혁명을 과거에 있었던 프랑스 대혁명이나 미국의 독립 전쟁처럼 피 튀기는 과격한 전투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소리없는, 그러나 폭발적인 지식의 혁명이다.


 역사는 초점을 누구에게 맞추느냐에 따라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 마치 인간의 몸을 전체적으로 볼 때와 눈 밑의 세포를 현미경으로 볼 때가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한 인간의 역사 또는 한 국가의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굴곡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공동체마다 성공하는 시기와 실패하는 시기가 다르다. 하지만 확대경을 저 멀리 치우고, 사피엔스 전체의 역사를 정리하면, 눈부신 진화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속도는 잠시 늦춰질지언정 진보를 향한 발걸음은 멈춘 적이 없었다. 사피엔스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였다. 여기서 혁명이라는 말의 정의를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미래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움직임'이다.


 즉 혁명을 정의하려면 미래의 어떤 호모 사피엔스에게 판결권을 줘야 한다. 반대로 미래의 인간은 자신의 입장을 과거의 개인에게 대입하면 안 된다. 그저 그들의 행동이 지금의 우리에게 미친 결과만 확인하면 된다.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봤을 때, 우리 조상이 했던 일들이 모두 옳았을까? 당연히 고개를 저을 것이다. 현대 이전까지의 '혁명'은 반드시 희생을 동반했다. 희생이 나쁜 의미는 아니다. 모든 인간은 타인의 희생으로 인해 살아가니까. 그러나 희생의 대상이 우리가 속한 종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혁명은 미래의 세대를 위한 일이었지만, 그 동기는 언제나 현재를 사는 이들의 욕망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존을 위해 다른 인종과 대형 생물들을 멸종시켰고, 농업 혁명 이후 체제 유지를 위해 피지배층을 착취했고, 과학 혁명 이후 기술의 발전을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생태계를 교란시켰다. 그 이유가 어떻든 인간은 추악한 만행을 저지른 뒤 얻은 보석을 자랑스럽게 후손에게 넘겼다. 보석은 곡물이 되었다가 왕관이 되었다가, 거대한 증기관으로 변하더니 곧 손톱만 한 크기의 마이크로칩이 되어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제 우리는 어떤 희생을 통해 이 보석을 변형시켜야 할까? 아니면 모두가 공존하는 기적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할까?

 

 시간이 그렇듯, 역사는 끊임없이 돌아갈 수 없는 길로 달려간다. 이미 이루어진 업적과 세워진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농업 혁명은 1만 2천년 전에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대부분의 인류는 농경 사회의 식단을 따른다. 그 식단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가는 것이다. "한국인은 밥심이지"라고 자랑스럽게 외치는 사람들에게 이 구절은 다소 충격적으로 들린다.

 농부는 매우 제한된 종류의 식품을 먹으며 불균형한 식사를 한다. 특히 현대 이전에 농업 인구를 먹여 살린 칼로리의 대부분은 밀이나 감자, 쌀 등 단일 작물에서 왔다. 여기에는 일부 비타민, 미네랄을 비롯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여타 영양소가 부족하다. 중국 전통 사회의 전형적 농부는 아침, 점심, 저녁에 쌀밥을 먹었다. 운이 좋으면 다음 날도 그렇게 먹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고대의 수렵채집인은 수십 가지의 다양한 식품을 규칙적으로 먹었다(p.85~86).

 그렇지만 현대인들 중 그 누구도 수렵채집인들처럼 살아갈 수 없다. 아니, 당장 1970~80년대를 살았던 어른들도 그때처럼 생활하기란 불가능하다. 슬프게도, 아니면 다행이게도 인류는 계속 새로운 역사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기존에 풀지 못한 문제점을 해결하기도 전에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무엇이 혁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너무 낙담할 필요 없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호모 사피엔스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변함이 없으니까. 바로 행복을 향한 갈망이다. 자유, 정의, 사랑, 이런 것들은 너무 추상적이다. 혁명은 행복을 위한 개인의, 공동체의, 인류의 투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잠재적 혁명가이다. 잠재적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실제로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현대의 사피엔스가 몇 안 되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라는 사피엔스는 행복 지수를 인용하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다. 사피엔스의 역사와는 다르게 개인의 삶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또 사피엔스의 역사처럼 어디로 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류 전체의 서사시와 열린 결말을 본 뒤 내린 결론은 아주 사소하고 간단하다. 지금처럼 살아라. 나의 행복을 위해 전념하고, 가족과 국가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는 발전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p.553)"고? 그럼 그 망상을 믿으며 살라.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은 네안데르탈인과 다를 게 없다. 그들은 수만 년 전에 이미 멸종했다. 당신은 호모 사피엔스, 혁명의 종족이다. 삶에서 얻은 지식을 행복을 위한 지혜로 바꾸는 습성이 당신 유전자 속에 깊이 새겨져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읽고 잠깐 흠칫, 하고 놀랐다가 다시 예전과 똑같은 일상을 살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혁명은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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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일반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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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그저 작은 감동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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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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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은 톰이 아니라 그저 탈옥수일 뿐이라는 사실. 사람이 사람으로 여겨지지 못한 시기에 순수성을 유지하는 진과 젬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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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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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세와 마차세의 진득한 인생 여정보다 더 또렷이 각인되는 것은 마동수의 삶의 끝자락, 그리고 누니의 삶의 시작이었다. 작가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을 담아내었고, 나는 그속에서 의미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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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의 네트워크
운노 히로시 지음, 이동철 옮김 / 해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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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세계의 음모론과 미스터리>에 대해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영상을 보고, 음모론이 소설이나 인터넷 상에 떠도는 루머에서 대중문화의 일종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한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세계의 미스터리를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음모의 네트워크』는 20세기 역사의 보이지 않는 실마리를 연결해주고 있어서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현대사, 특히 20세기 미국의 이면을 엿보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결사를 알게 된 계기는 김진명의 『천년의 금서』와 댄 브라운의 『로스트 심벌』이었다. 두 소설 모두 프리메이슨의 음모를 파헤치는 것이 주된 플롯이자 결말이라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러 소설에서 꽤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터라 나는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가 실존하고 있다는 어렴풋한 확신을 가졌다. 여기서 음모론의 장점이 드러나는데,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다. 우리의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인간은 호기심을 품고 사는 동물이다. 그래서 음모, 비밀, 거짓 속의 진실이 밝혀지길 원한다. 뒤의 개념들이 다소 추상적이고 개인적이라면 음모는 필연적으로 두 사람 이상이 만들어내는 비밀이다. '음모'를 뜻하는 'Conspiracy'도 '함께 모여 이야기하다'라는 의미라고, 저자는 계속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비밀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수록 그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오늘도 음모론은 진화한다. 음모는 과거형이 되는 순간, 타인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의미를 상실한다. 여전히 우리는 마틴 루터 킹과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배후, 달의 뒷면, 9·11 테러의 진실, 렙틸리언에 대해 무지해야 한다. 때로 진실은 너무나 따분하니까. 온 우주의 유일한 지성이 인간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삶의 목적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의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문가들에 의한 설명도 신용할 수 없다. 그 결과 '진실은 어딘가 저쪽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저쪽이란 우주이고 초고대이며 외계인이다. 이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한 밀레니엄 환상 컬트주의도 그중 하나이다. 인간의 저쪽에서 진실이나 구원을 찾는 것이다. (p594)


 우리가 음모론을 믿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분명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조차 수많은 분파로 나뉘어져 있고, 이단과 사이비가 순진한 젊은이들을 유혹한다. 경제와 정치는 시시각각 변화하고, 개인의 생활에도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그날의 날씨와 교통 상황, 다른 사람의 일정, 나의 건강 상태 등 현대인의 생활은 분명한 사실을 보장받을 수 없는 살얼음판이다. 그러니 오히려 "완전한 진실 혹은 완전한 거짓"인 음모론을 믿는 것이 나아 보일 정도인 것이다. 물론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나의 불확실성은 변함이 없다. 다만 그 속에서 갖는 작은 신념은 변하지 않는다.


 교훈은 언제나 따분하고 획일적이다. 작가들은 언제나 독자들에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 패턴이 지겨워진 사람들에게 음모론은 말한다. "믿고 싶은 대로 믿어라. 누구도 당신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는다." 세상이 음모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음모의 네트워크』를 읽은 나도 따라 외친다. 믿고 싶은 것을 믿어라. 다만 타인에게 말하지는 말라. 그 순간, 당신은 책임져야 하니까. 이런 작은 믿음은 우리 삶에 이정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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