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 출판사의 『현대영미희곡선 3』에 수록된 네 편의 작품, 즉 Mary, Mary by Jean Kerr, Rain by William Somerset Maugham, Verdict by Agatha Christie, 그리고 The Disposal by William Inge을 감상했다. 원어로 표기한 이유는 번역된 제목이 원제의 분위기와 맞지 않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네 작품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딘선가 본 것들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이후의 현대극에 상당한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Rain은 『타이스』라는 소설이 절로 떠올랐다. 정신적으로 타락한 여자와 그녀를 구원하기 위한 성직자가 등장한다. 세상은 여자를 추방하려고 하고 극한의 상황 속에서 여자는 회심한다. 그러나 성직자는 그녀와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낯익은 서사를 희곡의 형식 속에 녹여내니 꽤 새로운 체험이 되었다. 


 Mary, Mary는 네 작품들 중 가장 현대적인 감성에 가깝다. 가장 반대편에 위치한 것이 Agatha Christie의 희곡으로, 소설과 다름없는 추리극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그 과정을 풀어내는 방식이 20세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와 배우, 출판업자 등 뉴욕과 할리우드의 문화계에서 흔히 보이는 사람들이 극을 펼쳐낸다.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든 그들의 대사가 상당히 세련되었다고 느꼈다.


 The Disposal은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극이었다. 제스, 아키, 룩크는 남아 있는 삶의 기간을 세어야 하는 사형수이고, 그들의 대화는 당연히 가시가 돋혀 있다. 그 속에서 죽음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 본연의 불안이 보인다. 제스의 아버지가 찾아오는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극은 특별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다. 제스는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그를 적극적으로 반기지만, 아버지는 그와 같은 마음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다. 제스는 마지막까지 목사의 말에 설득되지 않고, 남들과 똑같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행적을 평가하기도 전에 또 다른 사형수 조가 죽음의 행렬에 동참한다. 나는 원제를 '처분'이라고 번역하고 싶다. 인간을 마치 물건을 폐기하듯이 다루는 사형장의 분위기를 전달해 주는 듯 하다. 물론, '마지막 포옹'도 훌륭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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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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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간 여행은 언제나 관찰된다. 시간 여행은 언제나 특정한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떤 지점, 즉 현재에서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과거로 향하거나 미래로 나아갈 뿐이다. 그렇기에 현재에 얽매인 인간은 시간이 주는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시간 여행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이율배반을 허용한다. 과거의 변화가 곧 미래의 변화로 직결되며, 그때마다 등장인물의 운명이 뒤바뀌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홉 번이나 시간 여행을 한 엘리엇은 독백한다. 그 시절이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고.


 나에게 가장 아이러니하게 다가온 순간은 일리나가 골든 게이트에서 몸을 던졌을 때였다. 엘리엇은 운명이 어떻게든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고 좌절하지만, 모든 것을 관조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시간 여행자가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그리고 젊은 의사가 연인에게 진실한 태도를 보였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처럼 보인다. 어찌 됐든 두 주인공은 생사를 뛰어넘어 재회한다. 원래 2007년 1월 이후로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어야 했지만, 열 차례의 시간 여행 끝에 그들은 다른 미래를 겪게 된다. 작가는 이미 엘리엇의 독백을 통해 '다중 세계'를 암시했다. 어떤 세계에서 일리나는 1976년에 죽지 않았고, 어떤 세계에서 엘리엇은 1976년에 죽었으리라. 그 모든 세계를 다 보여줄 필요는 없다. 선택된 세계의 장면들만 적절히 배치하면 된다.


 한 명의 관찰자로서 평하자면, 시간 여행은 이른바 운명이라 불리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경험이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선고를 뛰어넘어 생명이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리하여 모든 시간 여행자는 특별하다. 미래의 자신과 만났으며, 이것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시간 여행자가 여행 이전에 죽는 일은 시간의 모순에 의해 불가능하니까. 어쩌면 그것은 참으로 즐거운 상상이거나 끔찍한 저주이리라. 


 나는 글을 쓸 때, 시간 여행을 차용하지 않는 편이다. 공간의 이동은 종종 일어나지만, 과거로 어떤 물질이 역행하는 것은 세계의 질서를 통째로 뒤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주는 일은 익숙하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든 커다란 힘은 그에게 고통을 선사한다. 결국 주인공은 그 능력을 기꺼이 포기하거나 자신이 선택한 길을 기어코 걷는다. 그러니 '운명'이라는 세계의 규칙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운명이 인격체였다면, 캄보디아 노인이 준 알약을 이용해 자신을 열 차례나 농락하는 시간 여행자들에게 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았으리라. 


 마침내 일리나와 엘리엇, 엘리엇과 매트는 엇갈린 절반의 생애를 지나 다시 만난다. 세 사람 모두 똑같은 공간, 똑같은 시간에 만나 평행선을 걸어 왔지만 마침내 종착점에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는 알 도리가 없다. 관찰자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나는 그저 이런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을 불사하고 만나려고 했던 여인보다, 하룻밤 보낸 여인 사이에서 난 딸이 더 소중하다는 진실. 인간이 의도한 것은 언제나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각 장 앞머리에 달린 인용문이 정신을 맑게 해 준다. 작가의 역량에 감사드린다.

 

당신 앞에 여러 갈래 길이 펼쳐지는데, 어떤 길을 선택할지 모를 때, 무턱대고 아무 길이나 택하지 마라. 차분히 앉아라. 그리고 기다려라.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꼼짝하지 마라. 입을 다물고 가슴의 소리를 들어라. 그러다가 가슴이 당신에게 말할 때, 그때 일어나 가슴이 이끄는 길로 가라. -수잔나 타마로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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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제 - 이지훈 희곡집
이지훈 지음 / 평민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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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극의 또 다른 지평을 열었다. 그녀의 실험적인 형식과 선구적인 내용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다만 기대했던 「조카스타」와 「마태」의 서사적 힘이 떨어지는 것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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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탄생 - 의정부에서 도화서까지 관청으로 읽는 오백년 조선사 서울장소인문학 총서 1
서울학연구소 엮음 / 글항아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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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기관들을 통해 살펴본 조선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엿보이는 사고관들을 알 수 있다. 풍부한 그림 자료가 이해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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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 전집 1 러브크래프트 전집 1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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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크래프트의 책을 구매한 계기는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다양한 매체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들었고, 크툴루 신화에 관련된 보드게임도 하고 나니, 도대체 이 작가가 어떤 작품을 썼길래 사망한 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영향력이 지대한지 궁금했다. 그가 소설에서 정면으로 내세운 '미지'의 공포는 설명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현실과의 연결성이 끊어지고 말기에 전집을 읽기 전까지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6권에 달하는 그의 전집 중 단 한 권만 읽었지만, 러브크래프트가 구축한 세계가 얼마나 방대하고 깊은지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그의 세계에 심취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쓴 것들은 대부분('모조리'가 아니다) 허구지만, 단편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한결같다. 단편들에서 얻어낸 조각들로만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대단한 능력이다. 우리의 세계와 비슷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다른, 뉴잉글랜드의 어딘가에 위치할 것 같지만 절대 존재하지 않는 '사일런트 힐(Silent Hill)' 같은 아컴과 인스머스는 이미 독자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가 묘사한 마을의 상세한 모습과 분위기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러브크래프트는 어떤 설명이 읽는이의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최근에 본 공포영화에서 깨달은 사실이 그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는, 호기심이 위험하다는 것.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은 여행자 혹은 주변인의 운명을 파멸로 이끈다. 두 번째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공포를 만나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러브크래프트의 개인적인 삶으로부터 광기의 묘사를 이끌어내는 평론가들도 있지만, 공포라는 것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전달될 수 없는 감정이다. 공포는 때로는 감정의 경계를 넘어서 인간의 정신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크툴루, 아자토스, 요그소토스와 같은 존재들은 지성의 영역 저편에 있기에, 그것의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조차 묘사할 수 없다. 마치 그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듯이.


 작가가 단편들 속에 숨겨놓은 단서들은 이제 찾을 수 없다. 작가는 진실을 알고 있는 인물들을 모두 미치게 하거나 잔혹하게 살해했다. 심지어 자신조차 죽어버렸으니, 그가 만든 미지로 가득한 공포의 세상은 후대의 인물들에게 탐구의 대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허버트 웨스트가 살린 리빙 데드(living dead)의 행방, 네크로노미콘의 내용, 인스머스의 해변 등은 영원한 호기심으로 남으리라. 설령 확인한다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이는 살해당하거나 미칠 것이다. 그러니 모르는 게 약일지도 모른다. 

 

 나를 가장 무섭게 한 단편은 단연 현관 앞에 있는 것」이었다. 작품을 내내 관통하는 음산한 기운은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극대화된다. 두 인간의 영혼을 바꾸려는 상상을 넘어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영혼을 잡아먹는 상상은 보는 이들에게 공포를 준다. '명석한 두뇌에 의지는 허약한' 인간을 노리는 악마의 이야기와 절친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서술자의 이야기가 공존하며 묘한 씁쓸함을 남긴다. 러브크래프트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이, 완벽한 평화란 없다. 현상 유지이거나 도피일 뿐이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 악몽이 반복될 것이라는 불안은 페이지를 뚫고 미래로 흘러간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이 아직까지 재생산되고, 해석되는 이유이리라. 


 나는 미지의 세계로의 초대를 기꺼이 환영한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세계는 그와는 조금 다르지만, 충분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나는 범위가 닿는 곳까지만 갈 것이며, 그 이상은 시도하지 않겠다. 호기심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달았기에, 공포가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리는지 목격했기에. 나는 다시 한 번 책의 말미에 수록된 크툴루의 눈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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