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7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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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역자의 번역을 칭찬하고 싶다. 도스토옙스키의 가장 위대한 점이자, 그를 번역하기 어려운 작가로 만드는 점은 예측할 수 없이 튀는 인간의 심리를 집요하게 추적한다는 점이다. 『백야』에 수록된 작품들의 번역이 대체로 이러한 심리 묘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러시아어 전공자가 아니라서 원문이 어떨지는 알 수 없으나, 나에겐 꽤 깔끔하게 읽혔다.


 이 책에 실린 중·단편은 인간의 불완전한 심리와 그로 인한 비극적 또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싣는 데에 집중한다. 물론 기독교적 휴머니즘에 기반한 작품들도 있지만, 현대의 독자들에게 조금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풍자 소설이나 표제작인 「백야」에 담긴 정신 추적극이리라. 이 작품들에 나타난 치열한 고뇌들이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대작에 반영되는 것을 보면, 도스토옙스키 입문서로 적절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은 단연코 「악어」였다. 이 작품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고전 소설답지 않게 예측할 수 없는 줄거리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이반 마트베이치는 아내인 옐레나 이바노브나와 함께 파사주에서 악어를 구경하다가 산 채로 잡아먹히고 만다. 이로 인해 악어의 배를 갈라 남편을 구해야 한다는 옐레나와 귀하디귀한 악어를 지켜야 하는 악어 주인과의 말다툼이 일어난다. 이 때만 해도, 인간의 생명이 고작 악어보다 못하는 씁쓸한 상황이 펼쳐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이반이 그 안에서 고통 받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진가는 그가 악어 안에서 생존해 있으며, 오히려 그 상황을 이용하려 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그때부터 「악어」의 전개는 일반적인 소설과 달라진다.

 

 작품의 논쟁은 이런 것들이다. 이반을 살리기 위해 악어의 배를 가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악어의 뱃속에 머무는 것이 공직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급휴가를 주어야 하느냐 마느냐로 논쟁하며 이반의 오랜 친구인 서술자는 이반이 악어 뱃속에서 인류의 운명을 바꾼다는 헛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와중에 서술자는 이반의 아내인 옐레나를 흠모하고 있어서 친구의 소식을 전한다는 핑계로 그녀에게 찾아간다. 이러한 대혼란의 한복판에서 소설은 종료된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후의 내용을 상상해야 한다. 어떻게 되었겠는가? 뭐, 이반이 악어 뱃속에서 빠져나온다면 그의 모든 망상과 '나'의 헛된 희망도 사라지겠지만, 정말로 그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인간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수천 번도 넘게 세계를 정복할 수 있으니까.


 도스토옙스키의 무릎을 탁 치는 심리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심이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마치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인간의 마음은 백야와 같아서,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도 맞는다. 밝은 밤이나 어두운 낮처럼, 극단의 모순 속에서 진실을 발견한다." 실제로 불완전한 인간의 심리를 추적하다 보면, 서로 모순된 상태가 공존하며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밝은 면이 승리하지만, 어두운 면이 승리하면 인생이 진행된다. 인생이 고통이고 사랑이 매임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그는 알았던 탓인가? 사상이나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은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어둠을 조명하는 그의 작품들은 늘 잠들었던 정신을 깨우는 힘을 가진다. 나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자기'라는 우상을 파괴할 때, 그의 소설은 꽤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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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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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기분 좋은 익숙함이 나를 반겼다. 문장 부호의 최소화를 이용한 긴 호흡의 서사,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 독특한 기법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욘 포세의 장편소설에서 볼 수 있어서 기뻤다. 문장 부호 전체를 배제하는 주제 사라마구와 달리, 『아침 그리고 저녁』은 적절한 장소에 마침표를 찍는데, 이 문장부호가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찾아내는 것도 큰 재미 있다. 사실 나는 속독으로 읽은 편이라, 마침표가 존재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역자의 친절한 해설이 있어서 짧지만 어려운 이 소설을 조금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 마디로 대답하면, 요한네스라는 노인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요한네스의 영혼이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수용하여, 계속해서 이어지는 서사(또는 삶)를 죽음 이후까지 연장한다. 이러한 시도 역시 욘 포세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죽어서 눈을 감은 이후의 순간까지 삶이라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이들에게도 준비할 시간을 주고, 죽은 자에게도 그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기회를 준다. 삶과 죽음을 단절과 이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마침표마저 생략하여 영혼의 마지막 장면을 포착하는 이 작품의 시도는 가히 새로운 충격을 준다. 


 삶과 죽음은 분명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 어떤 사람의 일생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려면, 그 사람의 일생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타인의 삶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특성상, 어떠한 작가도 삶을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다만, 이 대담한 작가는 삶과 죽음의 원형 또는 순환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침묵 속에 언어를 담는다. 실로 그것이 해답일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언제나 침묵보다 적은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 


 한편으로, 『아침 그리고 저녁』의 배경이 되는 피오르의 느긋한 자연은 지켜보는 것만으로 치유가 된다. 한평생을 어부로 살아온 요한네스가 수영을 배우지 않는 것에는,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자신이 속한 세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한 노인의 생애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언제나 무엇인가를 정복하고 개발해야 그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한가로운 삶이 반복되는 피오르의 생활은 달가운 일일까, 따분한 일일까? 우리는 심심풀이가 없는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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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를로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4
프리드리히 실러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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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한 전개와 분량에 당황한다면, 해설을 먼저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이 이야기는 운문으로 쓰였고,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돈 카를로스도, 펠리페 왕도 아닌 포사 후작이라는 것을. 권력에 대한 자유의 노래는 현대에도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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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 비룡소 걸작선 29
미하엘 엔데 지음, 로즈비타 콰드플리크 그림, 허수경 옮김 / 비룡소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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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는 이야기』에 존재하는 가장 큰 적은 사나운 괴물이나 미지의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도 아우린의 부적 앞에서 순종하며, 환상 세계의 인물인 아트레유와 현실 세계의 아이인 바스티안 사이의 갈등도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독자들이 미하엘 엔데가 펼쳐놓은 환상 속 이야기들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망각하는 사실은 무(無)가 그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스티안이 끝없는 이야기 안에 들어온 순간, 이야기는 시작되기 때문에 '무'가 끼어들 틈은 없다.


 이 작품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지닌다. 상대방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음은 상대의 지난날을 이해하고, 현재를 공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름은 이야기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야 책방 주인인 코레안더 역시 환상 세계를 경험한 인물임이 드러나지만, 그에게는 환상 세계의 주인이자 어린 여왕의 이름이 '달 아이'가 아니었다. 즉, 그가 겪은 환상 세계는 바스티안이 상상한 세계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각 세계마다 원칙이 있고, 새로운 세계가 있다. 엔데는 모든 사람에게 본인만의 환상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것이야말로 끝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각 사람의 상상력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정말 흥미롭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읽고 싶어 했다. 어린 시절에는 두꺼운 책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반드시 저 책을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책방에 꽂혀 있던 이 매혹적인 제목의 책을 마음속에 오랫동안 담아두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약 15년 뒤에야 이루어졌다. 어른이 되어 읽는『끝없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과 비교해 보았을 때,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요 소재인 '우로보로스'(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뱀)도 그렇고, 환상 세계 속의 소재들이 여러 신화에서 차용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환상 세계가 분명 매력적이고, 바스티안의 모험도 흥미진진하지만, 나는 그 세계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인식했다. 나는 더 이상 책 속 세상으로 도피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물론 한 번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은 적은 없다. 이야기를 탐험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바스티안처럼, 누군가에게 이야기는 훌륭한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야기의 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야기에 대한 갈망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책들을 읽었고,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지만,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다. '무'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기를 바랐고, 무지로 인한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타인의 이야기를 읽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가상의 이야기인 소설과 실제의 삶 중에 나는 더 재미 있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환상 세계에서 수많은 여정을 겪었지만, 바스티안은 단 하루만큼 성장했을 뿐이다. 현실에서 그의 변화를 증명하려면,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환상 세계의 나머지 부분은 아트레유가 채워줄 것이다. 만약 끝없는 이야기를 완성하고도, 현실 속의 '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의 여정은 헛된 것이다. 그의 삶에 남아 있는 관계의 공허함, 소통의 부재는 그 스스로 채워야 한다. 아버지와 소중한 하루를 보내고, 코레안더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나면, 바스티안에은 자신을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 물론 그 방식은 환상 세계와 다를 것이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라는 이유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판단했지만, 현실에서는 그 역시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인식, 때로는 내가 기꺼이 생명의 물을 가져다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또 다른 주인공을 위한 초석을 마련해야 함을 인정하는 순간이 성장이 시작되는 때이다. 만약 당신이 세상의 중심에 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해 달라. 그 자리에 '무'가 자리잡지 않도록, 그 안에 누군가가 들어올 여지가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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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토머스 핀천 지음, 설순봉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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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는 진리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언어를 통해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믿음은 두 차례의 전쟁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끝없는 질문과 방황하는 생존자들이다.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의 데뷔작인 『브이.』(V.)를 보면서 나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를 떠올렸다. 고도(Godot)가 무엇인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듯이, '브이.'의 실체도 언어로 한정되지 않는다. 두 작품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베케트의 희곡 속의 등장인물들이 고도를 무작정 기다리는 데에 반해, 핀천의 소설 속에서는 '브이.'를 찾으려는 일말의 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여전히 '브이.'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작품의 중간에 언급되었듯이, '브이.'는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집단 또는 추상적인 개념을 대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암호를 해독하는 자들이 정답을 찾지 못한 이유는 '브이.'의 대상을 한정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브이.'의 실체를 발견하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소설에 언급되는 암호문을 예로 들자. 그들이 해독해야 하는 내용의 정체는 암호문에 적힌 글자가 아니라, 암호문이 적힌 종이 전체이다. 다시 말해, 숲 속에 있는 사람들이 숲에 대해 이해할 수 없듯이, 정답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찾는 것이 아니라 숲 전체를 파악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이 그 정답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모두는 각자의 뿌리를 벗어날 수 없다. 각자에 걸린 제약은 끝내 이해를 가로막으며, '브이.'를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민족성, 성적 취향, 성별, 성격, 그러한 것들은 어쩔 수 없이 개인을 구속하고 타인과의 거리를 가로막는다. 그리고 핀천은 그러한 상황을 일방적으로 전쟁 탓으로 돌리지는 않는다. 전쟁을 겪고 난 이들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고, 세계 대전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통째로 뒤흔들었지만, 여전히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는 서로를 잘 이해했는가? 인간은 어떻게든 타인에게서 차이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넓혀가기에 바쁘다. 사람마다 '브이.'를 다르게 해석하는 모습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핀천은 그 무수히 갈라지는 '브이.'(브이를 문자 그대로 보면 두 갈래로 나뉘는 길처럼 보인다)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정의되지 않는 사랑이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밝힘으로써 그것의 힘을 축소하기보다, 우리 안의 편견과 제약을 능히 해소하는 것이 곧 사랑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비록 작가는 세상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기조차 질색하는 사람이었지만, 첫 번째 작품인 『브이.』에서 드러내는 지식의 집약성과 방대함은 그가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그는 "꼭 그렇게 사람 간의 사이를 구분하고, '브이.'가 무엇인지 찾아야만 속이 후련하냐?"고 묻는다. 언제나 그렇게 편하게, 자기 중심대로 살아가야만 하느냐고 따진다. 사랑은 분명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다른 길을 걷게 만든다. 만약 그 말에 동의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언어로 설명하기보다 직접 사랑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것이 페이지에 적힌 언어 너머로 내가 발견한 핀천의 마음이었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특히 몰타 섬에서의 에피소드들)이나 암호들이 있었지만, 지금 나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브이.』의 마지막 구절이다. 

 프로페인은 어제 처음 만난 브렌다와 손에 손을 잡고 거리를 달려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히 그리고 침묵 속에 발레타의 모든 조명(주택들의 전등, 가로등 등)이 꺼졌다. 프로페인과 브렌다는 갑자기 완전한 밤으로 변한 거리를 계속 달렸다. 지금 몰타의 변두리를 그들로 하여금 달리게 하고 있는 건 타성뿐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그들을 저 너머 지중해까지도 끌고 갈 것이었다. (734쪽)

 단 하루 만에, 프로페인과 브렌다의 운명은 변했다. 필연적으로 두 갈래 길(V)로 갈라질 프로페인과 브렌다는 이제 하나된 몸(I)으로 길을 내려간다. 소설 곳곳에 배치되었던 두 인물의 하나되는 모습은 그저 상상으로 여겨졌으나, 이 장면에서 나는 가능성을 엿본다. '브이'(V)가 '아이'(I),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나'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로페인과 브렌다(V)가 만나 아이(I)가 되는 그 지점에 질문(Y.)이 있다. 그렇기에 이 방대한 서사시가 단순한 질문으로 끝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산책할까?"


 혹시 당신 마음 속의 '브이.'를 찾지 못해 낙심해 있는가? 자신이 걷는 길의 끝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라. 책은 무수히 많은 실패자들의 기록이며, 절대 똑같을 수 없는 인물들의 여정 끝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신비한 물체니까. 소설 속에서 정답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간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람과 같다. 정답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질문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도 '브이.'를 헛되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물어야 한다. "다시 떠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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