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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토머스 핀천 지음, 설순봉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평점 :
언어는 진리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언어를 통해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믿음은 두 차례의 전쟁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끝없는 질문과 방황하는 생존자들이다.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의 데뷔작인 『브이.』(V.)를 보면서 나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를 떠올렸다. 고도(Godot)가 무엇인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듯이, '브이.'의 실체도 언어로 한정되지 않는다. 두 작품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베케트의 희곡 속의 등장인물들이 고도를 무작정 기다리는 데에 반해, 핀천의 소설 속에서는 '브이.'를 찾으려는 일말의 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여전히 '브이.'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작품의 중간에 언급되었듯이, '브이.'는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집단 또는 추상적인 개념을 대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암호를 해독하는 자들이 정답을 찾지 못한 이유는 '브이.'의 대상을 한정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브이.'의 실체를 발견하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소설에 언급되는 암호문을 예로 들자. 그들이 해독해야 하는 내용의 정체는 암호문에 적힌 글자가 아니라, 암호문이 적힌 종이 전체이다. 다시 말해, 숲 속에 있는 사람들이 숲에 대해 이해할 수 없듯이, 정답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찾는 것이 아니라 숲 전체를 파악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이 그 정답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모두는 각자의 뿌리를 벗어날 수 없다. 각자에 걸린 제약은 끝내 이해를 가로막으며, '브이.'를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민족성, 성적 취향, 성별, 성격, 그러한 것들은 어쩔 수 없이 개인을 구속하고 타인과의 거리를 가로막는다. 그리고 핀천은 그러한 상황을 일방적으로 전쟁 탓으로 돌리지는 않는다. 전쟁을 겪고 난 이들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고, 세계 대전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통째로 뒤흔들었지만, 여전히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는 서로를 잘 이해했는가? 인간은 어떻게든 타인에게서 차이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넓혀가기에 바쁘다. 사람마다 '브이.'를 다르게 해석하는 모습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핀천은 그 무수히 갈라지는 '브이.'(브이를 문자 그대로 보면 두 갈래로 나뉘는 길처럼 보인다)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정의되지 않는 사랑이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밝힘으로써 그것의 힘을 축소하기보다, 우리 안의 편견과 제약을 능히 해소하는 것이 곧 사랑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비록 작가는 세상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기조차 질색하는 사람이었지만, 첫 번째 작품인 『브이.』에서 드러내는 지식의 집약성과 방대함은 그가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그는 "꼭 그렇게 사람 간의 사이를 구분하고, '브이.'가 무엇인지 찾아야만 속이 후련하냐?"고 묻는다. 언제나 그렇게 편하게, 자기 중심대로 살아가야만 하느냐고 따진다. 사랑은 분명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다른 길을 걷게 만든다. 만약 그 말에 동의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언어로 설명하기보다 직접 사랑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것이 페이지에 적힌 언어 너머로 내가 발견한 핀천의 마음이었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특히 몰타 섬에서의 에피소드들)이나 암호들이 있었지만, 지금 나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브이.』의 마지막 구절이다.
프로페인은 어제 처음 만난 브렌다와 손에 손을 잡고 거리를 달려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히 그리고 침묵 속에 발레타의 모든 조명(주택들의 전등, 가로등 등)이 꺼졌다. 프로페인과 브렌다는 갑자기 완전한 밤으로 변한 거리를 계속 달렸다. 지금 몰타의 변두리를 그들로 하여금 달리게 하고 있는 건 타성뿐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그들을 저 너머 지중해까지도 끌고 갈 것이었다. (734쪽)
단 하루 만에, 프로페인과 브렌다의 운명은 변했다. 필연적으로 두 갈래 길(V)로 갈라질 프로페인과 브렌다는 이제 하나된 몸(I)으로 길을 내려간다. 소설 곳곳에 배치되었던 두 인물의 하나되는 모습은 그저 상상으로 여겨졌으나, 이 장면에서 나는 가능성을 엿본다. '브이'(V)가 '아이'(I),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나'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로페인과 브렌다(V)가 만나 아이(I)가 되는 그 지점에 질문(Y.)이 있다. 그렇기에 이 방대한 서사시가 단순한 질문으로 끝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산책할까?"
혹시 당신 마음 속의 '브이.'를 찾지 못해 낙심해 있는가? 자신이 걷는 길의 끝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라. 책은 무수히 많은 실패자들의 기록이며, 절대 똑같을 수 없는 인물들의 여정 끝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신비한 물체니까. 소설 속에서 정답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간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람과 같다. 정답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질문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도 '브이.'를 헛되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물어야 한다. "다시 떠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