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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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이미지에 비례하는 현실에 대한 고발은 강렬하다. 오스카의 정체성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시점 등은 20세기의 독일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필연적인 부패를 드러낸다. 귀에 거슬리는 양철북 소리가 역사 속에서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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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 2017 신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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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설거지는 재밌고 유익한 일이다. 그래서 "설거지는 가사노동 중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로, 그것은 소비와 부패에 관련되는 일입니다. 설거지에는 아주 작은 비전이나 상상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명예 따위는 관심도 없다. 설거지를 하는 과정 속에는 널브러진 그릇과 식기를 씻는 자신만의 체계가 있고 미리 세운 계획대로 진행될 때, 더러운 것들이 씻겨나갈 때의 기쁨이 서려 있다. 나는 매사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집안일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매번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설거지에 대해 고통의 상징 내지는 절망의 노동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는 없다. 일상은 문학의 소재가 될 뿐, 실현되는 공간이 아니다.


 2. 영어영문학과 전공 수업을 들으면, 반드시 접하게 되는 구절이 있다. "Carpe diem(Seize the day). Memento mori(Remember to die)." 호라티우스의 시구에서 가져온 이 라틴어 구절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사조에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르기에 모든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동일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은 또 천차만별이다. 저자는 신과 죽음에 대해 알지 못했던 여섯 살의 시절부터 이어진 '메멘토 모리'를 한민족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때는 왜 한국인의 특성을 그토록 강조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3. 한참 뒤에야 한국인의 특성을 강조한 이유를 이해했다. 가족주의의 온정과 효를 지선의 가치로 삼아온 한국인들은 가족이 중심이라는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곤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는 구약의 인물들이나 자신의 어머니께 "여자여"라고 하는 예수님의 언행에 반발한다. 하지만 그것은 중립적인 호칭이며, 마리아를 한 사람의 어머니가 아니라 모두의 어머니로 만드는 선언이었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은 물론 소중하지만, 기독교인은 그 이상의 도전이 필요하다. 문득 자기 가족이 아니면 무섭도록 무관심하다는 <인터스텔라>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요지는 "너의 가족만 사랑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의 원수나 약한 사람들까지 품을 수 있느냐는 그 물음에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4. 보들레르의 짧은 시구를 보며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용서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했는데,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기 어려운 상태일까? 사실은 그렇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도로 용서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수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존재로 기억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기에, 내가 그런 존재로 다른 이에게 인식되는 것이 여전히 두렵다. 그렇게 될 때 나 자신을 용서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향해 다가오지만, 매번 우리는 돌이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돌아온다. 기적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기적으로, 가슴이 굳은 자들에게는 사랑으로, 마음만 앞서는 자들에게는 말씀으로. 


 5. 그래서 나는 though보다는 therefore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이어령 씨는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작가가 글을 쓰는 심정도 대개는 다 그럴 것입니다"라는 말로 타인을 쉽게 오해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절망을 기록하거나 저항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 즐거워서, 그 안에 자유롭게 내 생각을 담아내고 싶어서였다. 나의 삶을 고백하기보다 더 큰 상상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다루는 내용이 꽤 달라졌지만, 글쓰는 과정 속에서 내 생각을 털어놓고 마음을 비우는 경험은 다른 어떤 활동보다 유익하고 소중하다. 현재의 목표는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이끌어주었던 소중한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소설에 기록하는 것이다. 어렵지만, 차근차근 해보려고 한다.


 6. 신기하게도 나 역시 '문턱'이라는 소재에 오래 전부터 매료되었다. 이어령 씨는 문지방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하지만 두 개념은 비슷한 듯 다르다. 저자의 표현은 전환점의 또 다른 말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에는 두 가지 선택지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문턱은, 이분법의 갈래가 아닌 또 다른 방안에 대한 은유다. 문턱에 서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거나, 왔던 길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 이때 문턱에 머무르는 것은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논리가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답안을 모색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문턱 위에 서 있다. 이를 테면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분명한 이원론에 대한 솔직한 생각이다. 나는 내가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두려워하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고 싶다. 


 7. 지인의 선물로 받은 책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고 언젠가 읽어 보아야지, 라는 마음을 품었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선물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있지만, 똑같은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어령 씨의 시 쓰는 방식이 나에게 거부감을 준 탓일까? 그의 진솔한 고백이 설거지에 대한 편협한 생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일까? 어쩔 수 없는 생각의 차이가 거리감을 줄이지 못한 이유일까? 뭐가 됐든 몇몇 생각이 맞닿은 것은 반갑다. 하지만 이 책을 다시 꺼내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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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0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arover 2022-05-1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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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았어. 네가 본 산은 처량하게, 나목으로 남아 있었지.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며 꽃이 꺾였고 나무들이 베였어. 전쟁 중에는 군인들의 피와 포탄 자국을 품었고 격전지가 바뀌면서 나무 뿌리까지 캐먹으려는 굶주린 이들이 찾아왔지. 그때마다 그 산은 자기 자신을 스스럼없이 내어주었어. 비가 오면 쌓인 흙이 점점 벗겨지고 누구도 돌보지 않아 계절의 변화에 야위어 갔대. 하지만 그 산은 단지 그곳에 우뚝 서 있었어. 여전히 생명을 품은 채 말이야.

 

 젊은 남자들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을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또 다른 방식의 전쟁을 치러야 했어. 어린 나이의 너는 그 모든 현장에 목격자가 아닌 생존자로서 참여했지. 오빠는 다리에 총을 맞고 돌아와 존경했던 모습을 상실했고 너는 올케와 함께 가족을 부양하는 처지에 놓였어. 북한군이 점령한 버려진 서울의 광경은 실로 암울했어. 너와 올케는 담을 넘어 빈 집에서 양식과 팔 것을 훔쳤고 공산당의 앞잡이에게 굽신거리며 버텼지. 네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 이것이냐 혹은 저것이냐로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구려 예술에 기꺼이 박수를 치고 불편한 사람들과 살을 맞대며 사는 것쯤이야 감당할 수 있었지.


 오빠가 죽고 나서 너희 가족이 겪었던 아픔을 기억해. 오빠가 무덤 틈으로 다시 기어나오는 악몽은 올케와 엄마의 갈등으로 현실이 되었어. 문득 내가 올케였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하곤 해. 사랑하는 이가 죽어가는 동안 그를 보살폈지만, 그이는 속절없이 세상을 등졌어. 생계를 위해 올케는 양놈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준 뒤, 그 역겨움을 이기지 못해 입을 게워내야 했지.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너의 눈에는 동정심이 없었어. 올케 역시 험난한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인물이라는 그 평정심이 오히려 나에게 위로가 되었어. 그래서 올케와 엄마가 그 문제로 싸운 뒤, 홀로 걸으며 네가 품었던 생각이 더욱 와 닿는다.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을까? 엄마는 건강하여 손자들을 잘 돌보고, 올케는 사나흘에 한 번씩 주머니마다 돈을 하나 가득 벌어 오고, 아이들은 살지고 기름이 흐르고, 나는 한 달에 사십만 원이나 되는 수입이 보장돼 있고, 집 안에는 구메구메 양키 물건이고, 오빠가 살아 있어도, 전쟁이 안 났어도 이보다 잘 살기를 바라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은 점점 추비하고 남루해지는 걸까. 도둑질해서 먹고 살 떄도 이렇지는 않았다. 온 식구가 양키한테 붙어먹고 사는 거야말로 남루와 비참의 극한이구나 싶었다. (p.279~280)


 그때 나는 네가 본 산이 무엇인지 알았어. 네가 왜 과거를 돌아보는 기록들 사이에서 선명하게 기억날 이름을 담지 않았는지도. 일제강점기, 해방, 6˙25 전쟁을 거치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남았고, 몸과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헤맸어. 하지만 자신들을 보호할 줄 알았던 산은 나목 투성이였고, 이미 줄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지. 도시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미군에게 빌어먹으며 불법을 일삼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다시 빌어먹는 양아치들과 부랑자들로 가득 차 있었어. 그속에서도 악착같이 희망을 보려 하는 너의 집요하게 객관적인 시선이 기억 난다. 백목련, 교하, 박수근, 지섭, 그이까지,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병든 사람들 틈에서 너는 그 시들지 않는 향기를 담아냈어.


 왜 너의 고백은 이토록 생생할까? 누구에게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들이 있지. 변한 시대의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문득, 사라진 사람들의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이를 테면, 숙모가 쑨 시뻘겋고 걸쭉한 팥죽을 아귀아귀 먹기 위해 달라붙은 식구들의 체취나 출근할 때마다 살색 스펀지를 달고 캐넌 중사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는 티나 김의 목소리, 그런 것들. 세상을 잘 몰랐던 시절에 체험했던 과격한 기억들이 그동안 얼마나 깊이 너의 영혼에 새겨져 있었을까? 나는 글의 힘을 믿는다. 어떤 글을 통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치유되는 존재는 바로 작가 자신이야. 이제 네가 본 산의 모습을 모두 담아내어 너를 괴롭혔던 기억들을 털어놓으렴. 세상의 파도에 마모되고 싶지 않았던, 최소한의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너를 위해서. 


 -비로소 산을 찾은, 누구보다 험난했지만 아름다웠던 20대를 보낸 이를 기억하며.

이렇게 그이는 멋이라고는 없는 남자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지섭이와 그이를 비교하다가 뭣 하러 비교를 하는지 자신을 의심스러워하곤 했다. 아무리 비교해 봤댔자, 그이가 지섭이보다 나은 점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나은 점이라기보다는 명확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그이하고 있을 때는 내가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전혀 부담이 안 된다는 거였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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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
정영욱 지음 / 부크럼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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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틀그라운드를 같이 플레이하는 학교 후배가 생일이라고 이 책을 선물해줬다. 생일 이틀 전, 우리는 경쟁전에서 치킨을 먹었기 때문에 (1등을 했다는 뜻이다) "엊그제 치킨 먹은 우리에게 어울린다"는 말과 함께 받은 이 책의 의미는 더욱 선명해졌다. 우리는 배틀그라운드를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라니, 이것보다 든든한 격려가 어디 있을까? 4인으로 경쟁전에 들어가면 순위 방어까지 하지만, 대부분 작은 실수 또는 결정적인 실수로 팀원이 죽거나 전멸하여 치킨을 놓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서로에게 철저하게 피드백을 해 가며 운영과 실력을 보완해 왔다. 그리하여 후배가 선물한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는 배틀그라운드를 할 때마다 되뇌이는 주문이 되었다. 


 나에게 배틀그라운드란, 쉽게 말해서 '인생 게임'이다. 2017년에 출시되었을 때는 군 복무 중이라 즐길 기회가 없었다. 2018년에 휴가를 나와서 친구들과 함께 처음 배틀그라운드를 접했을 때의 신선함과 즐거움이란! 그때는 운영도, 조준 실력도 형편없었지만, 그래서 내가 왜 죽는지도 모르고 상황 판단이 매우 느렸지만, 가상의 세계 속에 동료들과 소통하고 교전에서 승리할 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나는 실력을 쌓기 위해 솔로 모드를 돌렸고 수많은 실패 속에서 스스로를 보완했다. 특히, 사람이 얼마 남지 않는 후반전에서 느끼는 긴장감과 집중력에서 오는 감정은 다른 어떤 게임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솔로 모드에서도 치킨을 먹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치킨을 먹으면서 배틀그라운드에 대한 이해도는 계속 높아졌다. 


 시간이 흘러 2022년, 여전히 실력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게임을 보는 눈은 어느 정도 생겼다. 적어도 남의 도움에 의존하는 운영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플레이를 만드려고 한다. 물론 그것이 욕심이 되어 팀 전체를 전멸시킬 때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과감한 결단이 좋은 결과를 낳은 적이 더 많았다. 고작 30분 남짓의 시간 동안 실시간으로 전략을 수정한다는 점에서, 이 게임은 FPS보다는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RTS와 비슷하다는(배틀그라운드 이전의 인생 게임이 바로 스타크래프트였다) 생각을 종종 한다. 2018년에 느꼈던 소중한 기억들, 예컨대 길리 슈트를 입은 적을 찾지 못해 유리한 상황에서 치킨을 놓쳤다거나 구급상자 먹는 법을 몰라서 경밖사(자기장에 불타 죽는다)하는, 서투르지만 그것조차 즐거웠던 추억들은 이제 재현될 수 없음을 안다. 그리고 게임도 늙어서 고인물(오래된 유저)과 핵(불법 프로그램)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유저들의 수도 초창기 같지 않다. 무엇보다 주변에서 배틀그라운드를 즐기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치킨에 대한 갈망은 남아 있다. 이 게임은 생존이 목적이다. 적을 많이 죽인다고, 좋은 아이템을 보유한다고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점수를 많이 획득하거나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다. 때로는 적을 죽이지 않아도 승리를 획득하기도 한다. 스쿼드 모드에서는 전투 능력이 탁월한 팀원을 보조하기만 해도 1인분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전장에 투입되는 100명의 인원은 모두 한 가지의 목표로 참여한다. 바로 '치킨'이다. 한 명, 또는 한 팀이 우승하기 위해 다른 모든 이들은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치킨을 먹지 못하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아예 초반에 교전을 하다가 죽으면 미련없이 다음 판으로 가겠지만, TOP10(생존자 10명) 이하에서는 작은 실수나 판단 오류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에 자책을 하기 쉽다.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제목을 주문처럼 되새겨야 한다. 너는 배틀그라운드를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 치킨을 먹지 못하더라도, 과거에 느꼈던 감정들을 기억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하며 팀원과 함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서평은 안 하고 왜 게임 이야기만 하냐고? 이 책은 말하자면, 랜덤 스쿼드와 같은 것이다. 우연히 만난 유익한 동료다. 하지만 매치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든, 아무렴 관심이 없다. 만나게 된 이상 치킨을 향해 정진하고 실패하든 성공하든 헤어질 인연이다. 그러니 나는 무미건조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랜덤 스쿼드의 본질이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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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읽은 두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공교롭게도 이 두 책을 쓴 작가가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두 사람에 의해 쓰였으며, 사랑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헛소동』은 원어로 도전했는데 셰익스피어 특유의 말장난이나 어휘 구사력을 이해하는 것이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Dogberry가 일부러 단어를 틀리는 것은 주석이 없으면 도무지 그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극작가가 구사하는 pun 역시 난해했고 신화나 당대 문화에 기반한 비유적 표현들도 주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희극이 비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나 인지도가 낮은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즐거움이나 말장난의 영역은 문화와 언어를 넘어가는 순간, 그 의도가 완화되는 경향이 있다.


 『노생거 사원』은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나 역시 오스틴의 소설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만큼이나 작가의 목소리가 강력하게 개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작가의 의견이 직접 삽입되는 것이 메시지 전달에는 효율적이지는 몰라도 작품에 몰입하는 데에는 유용하지 않다. 어쩌면 그녀는 이것을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뭐랄까, 캐서린과 틸니의 연애와 결혼은 지나치게 평범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당대의 풍속이나 결혼관을 비판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고전문학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특이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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