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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 2017 신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7년 9월
평점 :
1. 설거지는 재밌고 유익한 일이다. 그래서 "설거지는 가사노동 중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로, 그것은 소비와 부패에 관련되는 일입니다. 설거지에는 아주 작은 비전이나 상상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명예 따위는 관심도 없다. 설거지를 하는 과정 속에는 널브러진 그릇과 식기를 씻는 자신만의 체계가 있고 미리 세운 계획대로 진행될 때, 더러운 것들이 씻겨나갈 때의 기쁨이 서려 있다. 나는 매사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집안일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매번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설거지에 대해 고통의 상징 내지는 절망의 노동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는 없다. 일상은 문학의 소재가 될 뿐, 실현되는 공간이 아니다.
2. 영어영문학과 전공 수업을 들으면, 반드시 접하게 되는 구절이 있다. "Carpe diem(Seize the day). Memento mori(Remember to die)." 호라티우스의 시구에서 가져온 이 라틴어 구절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사조에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르기에 모든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동일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은 또 천차만별이다. 저자는 신과 죽음에 대해 알지 못했던 여섯 살의 시절부터 이어진 '메멘토 모리'를 한민족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때는 왜 한국인의 특성을 그토록 강조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3. 한참 뒤에야 한국인의 특성을 강조한 이유를 이해했다. 가족주의의 온정과 효를 지선의 가치로 삼아온 한국인들은 가족이 중심이라는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곤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는 구약의 인물들이나 자신의 어머니께 "여자여"라고 하는 예수님의 언행에 반발한다. 하지만 그것은 중립적인 호칭이며, 마리아를 한 사람의 어머니가 아니라 모두의 어머니로 만드는 선언이었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은 물론 소중하지만, 기독교인은 그 이상의 도전이 필요하다. 문득 자기 가족이 아니면 무섭도록 무관심하다는 <인터스텔라>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요지는 "너의 가족만 사랑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의 원수나 약한 사람들까지 품을 수 있느냐는 그 물음에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4. 보들레르의 짧은 시구를 보며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용서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했는데,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기 어려운 상태일까? 사실은 그렇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도로 용서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수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존재로 기억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기에, 내가 그런 존재로 다른 이에게 인식되는 것이 여전히 두렵다. 그렇게 될 때 나 자신을 용서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향해 다가오지만, 매번 우리는 돌이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돌아온다. 기적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기적으로, 가슴이 굳은 자들에게는 사랑으로, 마음만 앞서는 자들에게는 말씀으로.
5. 그래서 나는 though보다는 therefore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이어령 씨는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작가가 글을 쓰는 심정도 대개는 다 그럴 것입니다"라는 말로 타인을 쉽게 오해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절망을 기록하거나 저항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 즐거워서, 그 안에 자유롭게 내 생각을 담아내고 싶어서였다. 나의 삶을 고백하기보다 더 큰 상상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다루는 내용이 꽤 달라졌지만, 글쓰는 과정 속에서 내 생각을 털어놓고 마음을 비우는 경험은 다른 어떤 활동보다 유익하고 소중하다. 현재의 목표는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이끌어주었던 소중한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소설에 기록하는 것이다. 어렵지만, 차근차근 해보려고 한다.
6. 신기하게도 나 역시 '문턱'이라는 소재에 오래 전부터 매료되었다. 이어령 씨는 문지방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하지만 두 개념은 비슷한 듯 다르다. 저자의 표현은 전환점의 또 다른 말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에는 두 가지 선택지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문턱은, 이분법의 갈래가 아닌 또 다른 방안에 대한 은유다. 문턱에 서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거나, 왔던 길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 이때 문턱에 머무르는 것은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논리가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답안을 모색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문턱 위에 서 있다. 이를 테면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분명한 이원론에 대한 솔직한 생각이다. 나는 내가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두려워하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고 싶다.
7. 지인의 선물로 받은 책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고 언젠가 읽어 보아야지, 라는 마음을 품었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선물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있지만, 똑같은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어령 씨의 시 쓰는 방식이 나에게 거부감을 준 탓일까? 그의 진솔한 고백이 설거지에 대한 편협한 생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일까? 어쩔 수 없는 생각의 차이가 거리감을 줄이지 못한 이유일까? 뭐가 됐든 몇몇 생각이 맞닿은 것은 반갑다. 하지만 이 책을 다시 꺼내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