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한가운데 - 윈스턴 처칠 수상록
윈스턴 처칠 지음, 조원영 옮김 / 아침이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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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통에도 책은 읽어야 한다. 아니, 전쟁이 한창일수록 책을 읽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지혜는 거기서부터 비롯된다. 안타깝지만, 그 지혜는 단기간에 얻어지는 것도 아니요, 좋은 책만 읽는다고 얻어지지도 않는다. 많은 좋은 책과 소수의 나쁜 책을 읽음으로써 비판적인 사고를 확보해야 하며, 어떤 현상에 공감하는 동시에 거리를 두고 분석하는 힘을 얻는다. 그 끝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관으로 주변 사물과 사람을 이해하는 어떤 '정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예술은 일종의 프로파간다다"라는 조지 오웰의 말은 꽤 일리가 있다. 윈스턴 처칠의 수상록을 보고 있자면, 그의 글은 상당히 정치적인 의도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다만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처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끔, 그리하여 독자들이 자신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설득하고 있다.


 처칠은 실패도 많이 겪었고, 실수도 많았다. 대신, 그만큼 역사에 기록될 업적과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그의 개인사가 이토록 굴곡진데, 세계대전을 통과하면서 얼마나 많은 위기를 겪었을까? 하지만 그의 정신은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고취되었다. 역경과 갈등을 겪을수록 그는 무엇이 더욱 중요한지 선명하게 보았다.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힘을 가졌다. 현재 사람들의 동향과 지향점에 대해 유독 민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십년 후의 세계'라는 장에서 처칠의 통찰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물질적이 풍요도 인류의 이성이 눈뜬 이래로 품어온 단순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풀어주지 못한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p.404~405)

 

 기술과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인생의 모든 문제의 정답이 될 수는 없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문제에 직면하고 부딪혀야 한다. 처칠은 정치가였기에 그의 모든 도전들이 역사에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패에 아파하긴 했으나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 적도 있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를 20세기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고, 혹자는 그를 영웅으로 여기지만, 그는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님을 알았다. 

 영웅이 역사를 만들어내는가, 아니면 그들은 단지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거대한 집단의 선두에 서 있을 뿐인가? 인류의 발전은 개개인의 불굴의 의지와 그들이 이룬 업적의 결과인가, 아니면 이러한 의지와 업적 자체도 시대와 환경이 만들어낸 작품에 불과한 것인가? 역사란 걸출한 남녀의 연대기인가, 아니면 단지 시대의 흐름과 성향, 기회 등에 부응해온 그들 삶의 기록인가? 세상을 밝혀주는 이상과 지혜를 몇몇 탁월한 개인의 작품으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말없는 다수의 삶이 농축된 모습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p.367)

 당연하게도 개인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개인이 역사의 주체이기도 하다. 기록되지 못하고 소리 없이 사그라진 이들의 삶과 행적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인간의 미약한 지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 처칠의 사소한 선택 또는 중대한 선택의 결과가 우리가 보는 세계사이며, 거기서 조금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당장은 티가 나지 않을지 몰라도 반드시 어긋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선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거에 살았던 모든 조상들의 선택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니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과거를 모두 껴안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까닭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갈수록 "나는 중요하다"라고 외치는 것이 많아지는 시대이다. 일시적 명예에 만족하지 못한 시대는 구독을 요구한다. 자본의 충성이야말로 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어서 마치 그것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것들이 불편하고 거북하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정말로 옳은 길이 맞을까?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서로를 위로하며 낭떠러지로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너무 늦지 않으려면, 돌이킬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야말로 중요한 것을 발견할 최적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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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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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보면 물리학에 관련된 책처럼 보이지만, 제레미 리프킨은 아니나 다를까 인류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열역학 제1법칙(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며, 따라서 창조될 수도 없다"와 제2법칙(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한다)을 이용해 세상의 법칙을 설명하려는 그의 시도는 어찌 보면 대담하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복잡성이 가속화되는 21세기에도 그는 불변의 법칙을 정립하여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무질서를 없애기 위해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무질서를 더할 뿐이라는, 허무주의적인 접근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재의 삶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이 무용지물이라니,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니, 얼마나 절망적인가?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 맞으면 좋겠다. 20세기 말미에 나온 이 책의 예측이 틀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리프킨의 예측이 점점 맞아 떨어지는 것은 왜일까? 엔트로피 법칙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세계가 걷잡을 수 없는 잘못된 것은 아닌가?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세상은 안녕한가? 인류의 지식이 이토록 축적된 적이 없는데, 이제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알 것 같아서 두려워 한다. 무질서를 불러일으킬 요소는 더욱 많아진다. 팬데믹, 세계대전, 자원 고갈, 태양 폭풍, 인공지능....... 디스토피아를 초래할 수 있는 변수는 예측할 수 없이 늘어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류학자가 지적하는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자원 고갈이다. 그는 전 인류가 쓸 수 있는 자원이 50년도 채 남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앞으로의 인구 증가를 감안하면 석유나 석탄뿐만 아니라 식량도 부족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낙관주의자들은 재생가능한 에너지나 친환경 에너지를 내세우지만, 앞으로의 인류가 소모할 자원을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지구에 쌓인 엔트로피가 절정에 달할 때, 그로 인해 발생할 무질서를 무엇이 막을 수 있을까? 정말로 인류는 다가올 재앙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일어나지 않기를 어렴풋이 바랄 뿐일까? 각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은 없을까?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이제 남아 있지 않을까?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저자는 미래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를 쓰고 있기 때문에 모든 잠재적 변수를 담아 놓았다. 정답이 하나도 없을 수도 있지만,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교육'과 '노동'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어떤 가능성을 엿본다. 쓸모없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필요하다. 시험 기간에 엔트로피를 최대로 축적했다가 끝나고 나면 모두 비워내는 과정은 그 자체로 소모적이다. 그러한 교육이 반복되면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필요한 정보만 취하려고 하는 선별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그들은 다가오는 모든 정보에 회의적으로 변한다. "그게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는데?" 다시 말해, 정보에게 자신의 쓸모를 따지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은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않는다. 결국 학생들은 모든 것을 취사 선택하려는 어른으로 자란다. 하지만 누가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할까? 다른 어른들 역시 "너의 성공"이 중요하다고 주입 당하면서 자라온 것을. 누군가의 성공에는 다른 이의 실패가 전제되어 있고, 누군가의 휴식은 또 다른 사람의 노동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애써 외면해 온 것을. 수십 년간, 아니 수천 년간 인류를 지탱해 온 그 잘난 이기심의 법칙이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을 뿐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이타심이라는, 와 닿지도 않는 교훈을 내세우지 않겠다. 대신 '엔트로피의 순환'이라는 가치를 믿고 싶다. 정말로 물질과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만 간다면, 나의 엔트로피를 필요 이상으로 축적할 때 어딘가에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물질의 총량이 지나치게 축적되었다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 방식은 쇼핑, 기부, 콘서트 가기, 도서 구매, 후배에게 밥 사주기 등 다양한 방식이 될 것이다. 지식의 총량이 필요 이상으로 있다면, 그것을 나누어야 한다. 글쓰기나 강의, 아니면 대화와 경청이 좋은 방법이 되리라. 행복의 총량이 나에게 넘친다면, 기꺼이 흘러 보내야 한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자. 그리고 누군가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보자. 나를 떠난 엔트로피가 어떤 식으로 역사를 작동시킬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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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리커버 개정판) - 국내 최초 수메르어·악카드어 원전 통합 번역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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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라는 단어는 인간의 호기심을 극도로 자극한다. 우리는 무엇이든 간에 처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 새로운 학기나 직장의 첫 번째 날, 첫 사랑, 아니면 최초의 음악과 문학 등등에. 아마 그것은 처음의 그 기대와 설렘 또는 순수함이 지속되길 바라는 열망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처음의 감정은 결코 유지될 수 없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처음이란 것도 사실 삶의 수많은 조각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때로 그것은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효과가 과장되기도 한다.


 나는 길가메쉬 서사시의 내용이 궁금했다. 기록상으로는 인류 최초의 신화이자 문학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고대어를 해독하고 문헌과 자료를 낱낱이 뒤진 인류학자들의 노고에 감탄하며, 과연 처음 이야기가 무엇을 다루는지 참으로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다지 많지 않은 텍스트를 모두 보고 난 뒤의 느낌은 "뭐야, 별 거 없네?"였다. 물론 기원전 4000년 전이라는 까마득한 시대에 이 정도의 상상력을 발휘한 고대인의 역량은 감탄할 만하지만, 시대를 아우르는 통찰력은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이야기가 나에게 얼마나 유효한가?"를 따져보면, 그렇게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 어렵다. 물론 이 질문이 고전 문학에게 향하는 주요한 공격임을 안다. 고전이 현대가 요구하는 문제에 답해줄 수 없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기 마련이다. 내가 편견에 차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최초의 신화라는 이름만으로는 길가메쉬 서사의 가치가 다른 신화, 예컨대 중국 신화나 그리스 신화보다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양한 고전을 읽으며 느낀 것은, 그것은 각 시대에 있어서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시대에 동시에 여러 고전을 배치하면 상대적인 우월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치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스포츠팀이 국제 무대에서 힘을 못 쓰는 것과 비슷하다. 길가메쉬 서사시가 소위 말해 제일 '잘 나갔던' 시절은 오래 전에 끝났다. 가장 보편적인 주제인 죽음에 대한 투쟁과 굴복 역시 수많은 신화와 전설에서 다루어진 지 오래이다. 설령 최초의 문학이 이후의 모든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그 작품이 이후의 작품보다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19세기와 20세기에 탄생한 문학이 오늘날에 있어서 훨씬 중요하다는 내 의견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길가메쉬 서사시를 지나치게 무시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여러 수식어를 제거하고 하나의 이야기로 본다면, 충분히 탁월한 이야기이다. 길가메쉬가 자신의 조상인 우트나피쉬팀을 조우한 뒤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장면은 서사시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사랑했던 저의 친구는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언젠가 저도 그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누워, 다시는 결코 일어나지 못하지 않겠느냔 말입니다!"에서 느껴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 나아가 자신의 존재가 영원히 소멸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페이지 너머로 느껴진다. 길가메쉬는 이 세상에 이루어놓은 것이 너무 많았기에, 오히려 그가 너무 뛰어났기에 두려움이 더욱 컸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삶에 대한 집착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역자와 연구자들의 상세한 설명과 참고 자료가 작품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의 수고가 아니었다면, 이제는 평범하게 느껴지는 길가메쉬 서사시가 더욱 멋없게 느껴졌으리라. 고대인의 삶과 가치관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고 문명이 발전했어도 묘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별 거 없다는 것, 대단한 모험이나 뛰어난 업적은 개개인의 삶에 그렇게 특출나지는 않다는 것이 그렇다. 일상의 튼튼함이 보장되어야 우리는 성장한다. 누구나 길가메쉬처럼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아니며, 신의 뜻에 따라 창조된 피조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겸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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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11-08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가메쉬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근동 신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홍수설화는 구약의 노아의 홍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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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초엽 작가에 대해서는 학술대회에서 처음 접했으나, 『지구 끝의 온실』은 SF를 사랑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순진한 호기심으로 읽기로 다짐한 책이었다. 인류세 논의, 한국 SF의 전망 등의 거창한 이야기는 제쳐두고, 멸망에 맞서는 인간들의 사투를 그린다는 점에서 참 반가웠다.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디스토피아 문학에서 놓치는 것이 멸망의 과정인데, 『지구 끝의 온실』은 더스트 폭풍 이후로 찾아온 무수한 혼란과 그에 투쟁하는 인간들의 사투를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문명 재건 이후의 시점에서 바라본 과거의 치열한 사투가 결코 현재와 무관하지 않기에 참으로 작가가 치밀하게 소설을 구상했구나 싶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수와 레이첼의 불분명한 성이다. 이름상으로는 지수가 남자고 레이첼이 여자 같지만, 레이첼에 대해 '그'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렇고 지수의 성이 어딘가 불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내가 초반을 주의깊게 읽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작가는 상당히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성별을 감추어 놓는다. 아마도 남성, 여성이라는 구분을 하기에는 레이첼이 반은 인간이고 반은 기계이기 때문에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인간의 기준으로 모든 존재를 해석하는 대신, 인간 역시 하나의 종으로 분류하려는 그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작가의 말이 꽤 인상 깊었다. 오직 식물만이 내 소설을 구원해줄 생물이라는 것. 그녀 역시 자신이 만든 세계가 존재할 법함을 믿고 있었다. 인간의 기술력이나 서로에 대한 신뢰라는 얄팍한 가치로는 소설 속 세상을 구할 수 없었다. 오직 식물의 번식력, 자생력, 그리고 단결이 끝없이 증식하는 재앙을 막을 수 있었다. 모스바나는 처음에 인간에게 해로워 보였으나, 아니 어쩌면 인간에게 적대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구상에 퍼져나가며 더스트를 흡수했고, 자신의 본분을 다한 뒤에는 저절로 사라졌다. 그 모스바나를 간직한 레이첼은 지수를 제외한 어떤 인간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지만, 지구 끝의 온실을 끝내 간직했고 그것을 불태움으로써 도리어 모스바나를 전 세계로 퍼뜨리는 데에 기여했다.

 

 뇌가 기계로 되어 있는 레이첼은 어떤 것도 의도하지 않았다. 사랑이라거나, 인류의 구원자가 되겠다는 바람은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레이첼은 한 명의 개체로, 종의 일부로 살아가고 싶었다. 나오미와 아마라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위협들에 맞서 프림 빌리지에 도달했으나, 그곳에서의 희망과 인간성은 외부 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지구의 주인이라고 착각했던 인간들은 그 지위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욕을 멈추지 않는다. 돔 시티에 사는 사람들은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들 중 자신들만이 같은 종을 학대하고, 또 학살하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인간이 과연 무슨 자격으로 종들의 지배자를 자처한단 말인가? 더스트 시대가 남겨준 교훈은 이것이었다.


 아영이 살아가는 22세기는 안녕한가? 멸종의 위기를 넘긴 자들은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기술에 의존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어리석은 시절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숙제가 있다. 잃어버린 종의 역사를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 다시 인류가 번성했을 때, 어떻게 겸손함의 가치를 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종의 일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류세 논의의 모순(인류가 모두 멸종한 다음의 시대를 논의하는 것이 인류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다른 종들, 그러니까 동물, 곤충, 식물과 동등한 지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고 구원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방향이 늘 바람직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희망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왜 작가들은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을 기어이 만들어내는가?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살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이어가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문학이 왜 존재해야 하느냐고,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에서 소설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작가들은 바보처럼 "읽어보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말보다는 글이 편하니까.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바보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권한다. 어떻게든, 문학을 읽어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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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 (Paperback, New ed)
제임스 패커 / Inter-Varsity Press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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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 전도의 근본적인 이유를 알려준다. 우리는 원래 스스로도 구원할 수 없는 존재였으나, 주의 주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전도 역시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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