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치메이커스 - 4차 산업혁명 시대, 플랫폼 전쟁의 승리자들
데이비드 S. 에반스 & 리처드 슈말렌지 지음, 이진원 옮김 / 더퀘스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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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매몰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피상적인 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 너머의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면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훨씬 많은 노력이 소요된다. 『매치메이커스』는 그 '별거 아닌 것'을 고안하고, 실행하고, 확장하여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다면 플랫폼은 핵심적인 사업들 중 하나로 부상했고, 당장 예시를 들라고만 해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 넷플릭스와 같은 비디오 플랫폼, 또는 우버나 에어비앤비와 같이 실생활에 연결되는 플랫폼 등 그 종류와 형태도 다양하다. 물론 이들 중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이 책은 그들이 성공해온 비결을 주목한다. 당연히 그 명암에 가려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플랫폼도 소개한다. 


 그렇다고 『매치메이커스』가 다면 플랫폼을 새로 만들어서 번창하라는 내용을 주창하는 자기계발서는 아니다. 이 책은 4차 산업혁명, 즉 모든 분야가 서로 연결되고 통합되는 시대에서 그 흐름을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는 매치메이커스들의 전략을 주목한다. 그들이 시작한 사업이 어떻게 성장했고, 효율적으로 유지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세상의 흐름이 두 저자가 밝히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출간된 지 약 7년이 지난 이 책을 지금 읽어도, 다면 플랫폼의 중요성이 훨씬 더 강조된 오늘날에도 독서의 의의는 남아 있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엄청난 성장을 예견한 그들의 안목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그때만 해도 코로나19의 발생을 예상하지는 못했겠지만. 


 내가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매치메이커스』의 마지막, 저자가 정리한 다섯 가지 메시지들이었다. 매치메이커들은 지난 1000년 동안 존재해왔고, 그들 중 일부는 지난 수년 동안 '공유경제'의 일부였다. 다시 말해, 플랫폼을 만들어서 연결시키는 작업은 인류 역사상 늘 있어왔고, 매치메이커스들은 현대의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이용하여 그것을 사업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들의 중요성과 다면 플랫폼의 역할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질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치 세상을 하나로 연결시켜 발전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매치메이커들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이다. 전통시장과 대형마트의 끝없는 분쟁이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전통시장도, 대형마트도 다면 플랫폼의 일종이지만, 매치메이커들이 관리하는 방식의 차이로 인해 경제력이든 전략이든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양상의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것도 앞으로의 시대가 떠맡아야 할 숙제이다. 


 혁신적인 플랫폼은 언제든 세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 우버와 에어비앤비가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저마다 잘 살아갔다. 피상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다면, 현재에 안주하게 된다. 어떠한 현상이나 트렌드가 발생하면, 반드시 그 이면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연결되길 원하는가? 인류 역사상 이렇게 간절히 모든 것을 하나로 이으려 하는 시도가 있었을까? 단순히 편리함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기술과 돈이 투자되고 있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필요한 심리학이 아닌, 신뢰할 수 있는 과학이다. 나는 다면 플랫폼의 공간적인 활용을 기대해 본다. 전통시장이 그러했듯, 아고라 광장이 그러했듯, 우리의 삶과 생각이 한 장소에서 공유될 수 있다면! 아직은 먼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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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파리 - 정지돈의 20세기 파리 다시 쓰기 FoP Classic
쥘 베른 지음, 김남주 옮김 / 알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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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자신의 묘비명을 남기지 않는다. 『20세기 파리』의 마지막 장면인, 수많은 현재의 죽음을 기리는 부분에서 작가는 쥘 베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 부분이 나에게 꽤나 흥미로웠다. 실존 인물들을 애써 기억하려고 이름을 나열하지만, 정작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는 것이 말이다. 물론 이 작품이 쥘 베른이 과학 소설을 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창기의 것이라고 해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사뭇 자조적이다. 물론, 시가 멸종한 시대에 시를 쓰려고 하며 사라진 시대의 문인과 음악가들을 찬미하는 주인공 미셸이야말로 베른 자신의 초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열정의 소유자도 추위 속에 사그라지는 운명이 서글프다.


 19세기의 격변하는 시대에 쥘 베른은 100년 후의 미래를 상상했다. 그리고 작품이 쓰인 지 1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의 예측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몇 가지 구절은 섬뜩할 정도이다. "사람들의 바쁜 듯한 태도, 서두르는 몸짓, 미국인들 같은 성급함을 보면, '자본의 악마'가 휴식도 감사도 허락하지 않고, 그들을 끊임없이 앞으로 떠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는 구절은 실로 정확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의 안식은 커녕 빠른 속도에 자신을 내맡긴다. 뛰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버스와 지하철, 자동차와 비행기에 몸을 던지지 않으면 뒤처지는 존재가 된다. 보험과 저축 제도가 어느 때보다 발달했지만,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불안은 어느 때보다 크다. 그렇기에 마음은 점점 '실용적'으로 변한다. 효율과 이익이 발생하지 않으면, 그것의 가치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마치 미셸을 비난하는 탁월한 실용주의 가족처럼, 모든 것의 쓸모를 따진다. 


 빅토르 위고, 뒤마 등의 대문호들이 한 세기만에 잊혀지고, 실용적인 제목의 책들과 시들이 유행하는 것은 꽤 유쾌하다.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도 든다. 이제 사람들은 책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베른은 자신이 예견한 미래의 암울한 면이 확대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통탄해 할까? 마침내 인간조차 실용적인 면으로 분석되어, 제 몫을 다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오늘날에는 여러 분야에서 기계가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있었다"는 구절에서 우리는 절망을 느낀다. 일평생을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끝에는 극복할 수 없는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있다. 신체적 역량과 기술적 탁월함에서 기계에게 밀린다면, 무엇이 나의 인간됨을 보장할까? 쥘 베른은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을 암시하지만, 뤼시와의 사랑 역시 이루어지지 못한다. 젊은이의 열정은 강추위 속에 그대로 매장된다. 


 많은 것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아마 21세기가 끝날 즈음에는, 기존의 가치관과 사상은 완전히 옛 것이 되리라. 어쩌면 나는 지금의 세상조차 '사라진 시대'로 분류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돌아볼 필요도 없는, 차라리 잊어버리는 것이 나은 세상 말이다. 그렇게 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아니, 달려가는 것은 속도에 뒤처진다. 유례 없는 진보로 솟구쳐 오르는 로켓 또는 다시 떠오를 수 없는 잠수함에 탑승한 상태다. 이 시대에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단한 능력보다는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이 세상을 견뎌내야 하는지는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어떠한 지식도, 다른 누군가의 조언도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설령 모두에게 구식이라고 비난을 받는다 해도, 미셸과 위그냉은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사라진 시대의 독자들이여, 다가올 미래를 떠올려 보자. 그 끝에서 당신은 어떤 표정으로 서 있을까?

"자신의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거야!"
"그건 왜죠, 삼촌?"
"그건 말이다, 얘야, 책을 읽다 보면 이 위대한 작가들을 본받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되거든."
"그게 왜 나쁜가요?" 청년이 분개해서 소리쳤다.
"길을 잃게 되거든." - P173

과학은 벼락을 다스리고 거리를 뛰어넘고 시간과 공간을 여유 있게 넘나들고 신비한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 우주를 지배하는 듯했지만 추위라는 무적의 강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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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찮은 기회로 『청소년을 위한 고전산문 다독다독』을 읽었다. 이 책의 구성은 총 4부로 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고전 산문 중 잘 쓰인 것을 선별하여 수록했다. 그리고 각 장의 끝마다 엮은이의 해설이 첨부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저자에 대한 상세한 소개도 부록으로 추가된다. 이러한 구성은 예상 독자인 청소년들이 옛글에 좀 더 접근하기 쉽도록 이루어져 있어서, 누구라도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각 장의 분량도 3~4장 가까이 되어, 틈틈이 읽기 수월하다. 확실히 고전 산문에 대해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친절한 안내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한계도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나라의 옛글에 입문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 쉽게 풀어쓴 고전들의 파편은 독자를 끌어당길 힘을 잃게 된다. 해설의 분량이 더 많은 경우에는, 역자가 하고 싶은 말을 고전 산문을 이용해 전달하는 듯한 인상도 받는다. 차라리 원문의 분량을 늘리고 해설을 최소화하는 구성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청소년들은 충분히 선조들의 글을 음미하고 즐길 수 있다. 다만 엮은이가 해설을 통해 칭찬만 하지 않고 적절한 비판이나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에, 원문을 이용한 토론 활동에는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어디에서 태어나 자랐는가‘라는 환경도 중요하다. 외지고 적막한 곳에서 나고 자라 자연이나 인물, 이웃, 여행 등의 경험이 부족하여 높고 웅장하고 그윽하고 특별하고 괴상하고 호탕한 일들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다면, 마음이 세련되거나 넉넉해지지 못한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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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 위의 집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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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야생 붓꽃』이라는 시집이 인상 깊어 다른 작품을 찾아보았다. 과연, 자연물을 이용한 심상 묘사에 탁월하다. 영어시를 번역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이 세상을 바꾸는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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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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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시대마다 대표적인 교양 서적이 있는 것 같다. 2000년대 초반에는 재레드 다이아몬드『총, 균, 쇠』가 있었고, 최근에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그렇다. 아마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기준이 되는 도서도 바뀌겠지만, 2018년 당시 『사피엔스』를 처음 읽었을 때 받은 신선한 충격과 좋은 인상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아, 2010년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들 중 하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만하다. 그리고 불현듯 나는 그 이전에 필수 교양이었던 『코스모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 방대한 분량의 서적을 펼치는 순간, 생각 이상으로 놀라운 여정이 날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원래 이 책은 방송 원고에 기반하여 작성되었고, 그 덕분인지 풍부한 시각 자료들이 이해를 도왔다. 그래서 나는 한결 편하게 칼 세이건이 이끄는 코스모스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왜 공간으로서의 우주(space)도, 세계로서의 우주(universe)도 아닌 코스모스(cosmos)인가? 그것은 이 우주를 이끄는 원리가 균형과 조화이며, 여전히 우주는 거대한 질서 아래에서 운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분명 『코스모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어쩌면 우주 공간에 남아 있는 지적 생명체는 인간이 유일할 수도 있기에, 우주적 관점에서 지구는 지극히 작고 연약한 행성이지만, 그곳의 거주민들은 특별한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사피엔스가 있기 전부터 코스모스는 존재했다. 그리고 인류의 시대가 지난 후에도 그것은 존속할 것이다. 코스모스 이전의 모습, 코스모스 이후의 세계는 이 책에서 다룰 주제가 아니다. 지금 펼쳐진 무한에 가까운 우주 공간, 그리고 바로 옆(이라고 표현했지만, 수천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에 있는 행성들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인류에게는 커다란 숙제이기 때문이다. 


 『사피엔스』와 잠깐 비교해 보자면, 아무래도 시대의 관심사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칼 세이건이 염려한 것은 자기 파멸의 가능성이었다. 핵무기의 가공할 파괴력과 우주 탐사선의 원동력은 동일하다. 인간의 의지가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여정은 종말을 고할 수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유발 하라리도 비슷한 측면에서 접근하지만, 그 소재는 사뭇 다르다. 그는 인공지능이 낳게 될 새로운 인류에 대해 탐구했다. 어쩌면 세상을 떠난 물리학자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인류보다 뛰어난 지성'은 이미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어떤 공간도 아닌, 작은 컴퓨터 속에서 말이다. 사피엔스도, 코스모스도 시간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것에게 현재, 과거, 미래의 기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피엔스는 단지 진화할 뿐이며, 코스모스는 계속 흘러갈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질서가 파괴되고, 또 새로 세워진다. 이 놀라운 신비를 잊고 살기에는 이 우주가 너무나 아름답다.


 <인터스텔라>라는 영화에서 우주 연구에 대한 지원이 멈춘 까닭이 '지구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과학자들이 세운 계획 두 개(지구를 포기하는 대신 대안이 될 수 있는 행성으로 이주하거나 정거장을 세우는 일)가 동시에 실현되는 결말을 통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중력 방정식을 풀게 해준 장본인이 곧 미래의 인류라고 암시함으로써 끊임없이 그 희망을 다음 세대에 넘겨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지금의 세상에 희망이 남아 있지 않는 것 같아도, 칼 세이건이 예측했듯이, 코스모스는 계속될 것이다. 불확실한 시간과 공간에 대해 무작정 낙관하거나 비관기보다 정확한 분석과 기술로 그 질서의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의 작은 말과 행동 하나하나도 우주의 균형의 일부이니까.


 거대한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 남겨놓아야 한다. 나는 우리가 쓰레기를 길거리에 버리는 행위나, 반대로 물을 아껴쓰는 습관이 세상을 결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소중함은 그 자리에 머무를 때 가치를 지닌다. 인간은 코스모스를 조율할 만큼 현명하지도, 강력하지도 않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다스릴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다음의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여전히 우주는 팽창하고 있고, 빛의 한계를 넘어서기에 우리는 너무나 느려 보인다. 하지만 사피엔스는 코스모스와 비례하는 존재이다. 코스모스의 시간과 공간이 확장되는 속도에 사피엔스는 맞추어 간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이 보잘 것 없고 스러질 육신이 담고 있는 정신은 모든 우주를 품을 만큼 거대하다. 작음 속에 위대함이 숨어 있고, 위대함 속에 작음이 담겨 있다. 이것이 코스모스가 보여준 신비한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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