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이야기 비룡소 걸작선 29
미하엘 엔데 지음, 로즈비타 콰드플리크 그림, 허수경 옮김 / 비룡소 / 200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끝없는 이야기』에 존재하는 가장 큰 적은 사나운 괴물이나 미지의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도 아우린의 부적 앞에서 순종하며, 환상 세계의 인물인 아트레유와 현실 세계의 아이인 바스티안 사이의 갈등도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독자들이 미하엘 엔데가 펼쳐놓은 환상 속 이야기들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망각하는 사실은 무(無)가 그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스티안이 끝없는 이야기 안에 들어온 순간, 이야기는 시작되기 때문에 '무'가 끼어들 틈은 없다.


 이 작품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지닌다. 상대방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음은 상대의 지난날을 이해하고, 현재를 공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름은 이야기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야 책방 주인인 코레안더 역시 환상 세계를 경험한 인물임이 드러나지만, 그에게는 환상 세계의 주인이자 어린 여왕의 이름이 '달 아이'가 아니었다. 즉, 그가 겪은 환상 세계는 바스티안이 상상한 세계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각 세계마다 원칙이 있고, 새로운 세계가 있다. 엔데는 모든 사람에게 본인만의 환상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것이야말로 끝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각 사람의 상상력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정말 흥미롭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읽고 싶어 했다. 어린 시절에는 두꺼운 책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반드시 저 책을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책방에 꽂혀 있던 이 매혹적인 제목의 책을 마음속에 오랫동안 담아두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약 15년 뒤에야 이루어졌다. 어른이 되어 읽는『끝없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과 비교해 보았을 때,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요 소재인 '우로보로스'(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뱀)도 그렇고, 환상 세계 속의 소재들이 여러 신화에서 차용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환상 세계가 분명 매력적이고, 바스티안의 모험도 흥미진진하지만, 나는 그 세계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인식했다. 나는 더 이상 책 속 세상으로 도피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물론 한 번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은 적은 없다. 이야기를 탐험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바스티안처럼, 누군가에게 이야기는 훌륭한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야기의 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야기에 대한 갈망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책들을 읽었고,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지만,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다. '무'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기를 바랐고, 무지로 인한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타인의 이야기를 읽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가상의 이야기인 소설과 실제의 삶 중에 나는 더 재미 있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환상 세계에서 수많은 여정을 겪었지만, 바스티안은 단 하루만큼 성장했을 뿐이다. 현실에서 그의 변화를 증명하려면,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환상 세계의 나머지 부분은 아트레유가 채워줄 것이다. 만약 끝없는 이야기를 완성하고도, 현실 속의 '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의 여정은 헛된 것이다. 그의 삶에 남아 있는 관계의 공허함, 소통의 부재는 그 스스로 채워야 한다. 아버지와 소중한 하루를 보내고, 코레안더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나면, 바스티안에은 자신을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 물론 그 방식은 환상 세계와 다를 것이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라는 이유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판단했지만, 현실에서는 그 역시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인식, 때로는 내가 기꺼이 생명의 물을 가져다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또 다른 주인공을 위한 초석을 마련해야 함을 인정하는 순간이 성장이 시작되는 때이다. 만약 당신이 세상의 중심에 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해 달라. 그 자리에 '무'가 자리잡지 않도록, 그 안에 누군가가 들어올 여지가 있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이.
토머스 핀천 지음, 설순봉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어는 진리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언어를 통해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믿음은 두 차례의 전쟁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끝없는 질문과 방황하는 생존자들이다.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의 데뷔작인 『브이.』(V.)를 보면서 나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를 떠올렸다. 고도(Godot)가 무엇인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듯이, '브이.'의 실체도 언어로 한정되지 않는다. 두 작품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베케트의 희곡 속의 등장인물들이 고도를 무작정 기다리는 데에 반해, 핀천의 소설 속에서는 '브이.'를 찾으려는 일말의 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여전히 '브이.'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작품의 중간에 언급되었듯이, '브이.'는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집단 또는 추상적인 개념을 대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암호를 해독하는 자들이 정답을 찾지 못한 이유는 '브이.'의 대상을 한정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브이.'의 실체를 발견하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소설에 언급되는 암호문을 예로 들자. 그들이 해독해야 하는 내용의 정체는 암호문에 적힌 글자가 아니라, 암호문이 적힌 종이 전체이다. 다시 말해, 숲 속에 있는 사람들이 숲에 대해 이해할 수 없듯이, 정답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찾는 것이 아니라 숲 전체를 파악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이 그 정답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모두는 각자의 뿌리를 벗어날 수 없다. 각자에 걸린 제약은 끝내 이해를 가로막으며, '브이.'를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민족성, 성적 취향, 성별, 성격, 그러한 것들은 어쩔 수 없이 개인을 구속하고 타인과의 거리를 가로막는다. 그리고 핀천은 그러한 상황을 일방적으로 전쟁 탓으로 돌리지는 않는다. 전쟁을 겪고 난 이들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고, 세계 대전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통째로 뒤흔들었지만, 여전히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는 서로를 잘 이해했는가? 인간은 어떻게든 타인에게서 차이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넓혀가기에 바쁘다. 사람마다 '브이.'를 다르게 해석하는 모습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핀천은 그 무수히 갈라지는 '브이.'(브이를 문자 그대로 보면 두 갈래로 나뉘는 길처럼 보인다)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정의되지 않는 사랑이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밝힘으로써 그것의 힘을 축소하기보다, 우리 안의 편견과 제약을 능히 해소하는 것이 곧 사랑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비록 작가는 세상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기조차 질색하는 사람이었지만, 첫 번째 작품인 『브이.』에서 드러내는 지식의 집약성과 방대함은 그가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그는 "꼭 그렇게 사람 간의 사이를 구분하고, '브이.'가 무엇인지 찾아야만 속이 후련하냐?"고 묻는다. 언제나 그렇게 편하게, 자기 중심대로 살아가야만 하느냐고 따진다. 사랑은 분명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다른 길을 걷게 만든다. 만약 그 말에 동의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언어로 설명하기보다 직접 사랑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것이 페이지에 적힌 언어 너머로 내가 발견한 핀천의 마음이었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특히 몰타 섬에서의 에피소드들)이나 암호들이 있었지만, 지금 나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브이.』의 마지막 구절이다. 

 프로페인은 어제 처음 만난 브렌다와 손에 손을 잡고 거리를 달려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히 그리고 침묵 속에 발레타의 모든 조명(주택들의 전등, 가로등 등)이 꺼졌다. 프로페인과 브렌다는 갑자기 완전한 밤으로 변한 거리를 계속 달렸다. 지금 몰타의 변두리를 그들로 하여금 달리게 하고 있는 건 타성뿐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그들을 저 너머 지중해까지도 끌고 갈 것이었다. (734쪽)

 단 하루 만에, 프로페인과 브렌다의 운명은 변했다. 필연적으로 두 갈래 길(V)로 갈라질 프로페인과 브렌다는 이제 하나된 몸(I)으로 길을 내려간다. 소설 곳곳에 배치되었던 두 인물의 하나되는 모습은 그저 상상으로 여겨졌으나, 이 장면에서 나는 가능성을 엿본다. '브이'(V)가 '아이'(I),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나'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로페인과 브렌다(V)가 만나 아이(I)가 되는 그 지점에 질문(Y.)이 있다. 그렇기에 이 방대한 서사시가 단순한 질문으로 끝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산책할까?"


 혹시 당신 마음 속의 '브이.'를 찾지 못해 낙심해 있는가? 자신이 걷는 길의 끝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라. 책은 무수히 많은 실패자들의 기록이며, 절대 똑같을 수 없는 인물들의 여정 끝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신비한 물체니까. 소설 속에서 정답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간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람과 같다. 정답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질문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도 '브이.'를 헛되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물어야 한다. "다시 떠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데르센 동화전집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1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한스 테그너 그림,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림형제 동화전집』과 『안데르센 동화전집』을 한 번에 사서 각각 비교하며 읽는 체험은 분명 특별했다. 전자가 동화치고 훨씬 잔인하고, 후자가 따뜻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으나, 넓게 보면 독일의 동화와 덴마크의 동화는 그 대담함이나 상상력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림형제와 안데르센은 당대의 통념을 깬 이야기를 제시했으며, 그 방식이 다양했을 뿐이다. 가상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자신에게 인상을 남긴 이야기를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살 수 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에 이어서 성냥팔이 소녀와 인어공주의 사연을 들은 이들은 동화라는 이름 속에 숨어 있는 안데르센의 따뜻한 마음을 발견한다. 


 당연하게도, 내가 기억하는 동화들은 이미 익히 알려진 우화들은 아니다. 얼마 전에 안데르센의 생애에 대한 연극을 관람하기도 해서, 그가 쓴 이야기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찾아내는 대신, 그가 생각하는 세상에 대한 관점을 조금 더 주목하고 싶었다. 두 번째 이야기인 「장다리 클라우스와 꺼꾸리 클라우스」가 거짓말쟁이와 어리석은 인물에 대한 웃픈 동화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또 유명한 「눈의 여왕」이 여러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첫 번째 이야기에서 악마의 거울 파편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저 바깥 세상에는 아직도 작은 거울 파편들이 공기 속에 떠다니고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 거울 파편들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들릴 것이다"(267쪽)이라는 구절은 세상에 편견으로 가득한 인물이 많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안데르센의 동화들 중에는 아이들을 위해 쓰인 것들도 있지만, 상상의 파편들을 엮어놓은 동화들이 적잖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160번째 이야기인 「ABC 책」이다. 여기에는 언어의 힘에 대한 안데르센의 생각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알파벳이 갖는 힘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모든 것이 알파벳이 나열되는 순서에 의존한다. 알파벳은 생명을 주거나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기쁨을 주거나 슬픔을 줄 수 있는 힘도 있다"(1153쪽)는 구절에 이어서 A부터 Z까지 각 철자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나열하는 장면은 흥미로우면서도 날카롭다. 확실히 그의 이야기들에는 당대 시대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풍자적인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안데르센 동화에 대한 나의 감상은 여전히 "따뜻하다"는 것이다. 안데르센은 가난과 모욕, 외로움과 오해 속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동화 속에는 좌절과 절망을 담지 않았다. 혹자는 인어공주와 성냥팔이 소녀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아이들이 슬픈 이야기를 좋아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어른들의 생각이야말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아닐까? 안데르센은 아이들에게 또 다른 세상을 선물하고 싶었다. 도피처 같은 환상의 세계나 하품부터 나오는 교훈 대신, 냉철하고 아름다운 시선으로 눈앞의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 마음이 조금은 느껴지기에,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상의 조각도 기꺼이 수용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는 원자폭탄을 남기고 떠났다. 그의 삶은 위대한 업적에 대한 과시나 찬란한 미래를 향한 기대보다는 과거에서 밀려오는 후회로 점철되어 있다. 트루먼 대통령과 만났을 때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핵무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회담을 제안했을 때, "그것은 트리니티 바로 다음 날 했어야 했다"는 말 역시 그렇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 순간, 인류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American Prometheus)는 이 물리학자의 업적보다는 비운에 더욱 주목한다. 핵분열은 순간적이지만, 그 연쇄반응은 한없이 길고 고통스럽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공을 세웠지만, 누가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고, 존경받는 롤 모델로 생각할까?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는 끝없이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지만, 누구도 그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과학은 분명 사고의 지평을 폭발적으로 넓힌다.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창조한 가공의 인물인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각각 생물학과 물리학에서 대담한 시도를 했고, 그것을 성공시켰다.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생명을 만들었고, 오펜하이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의 분열과 융합이 가시 세계 전체를 소멸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들의 창조물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미약했으나, 발명가들은 인류에게 그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사실만으로 '프로메테우스'라는 별명을 얻기에 충분했다. 이 평전의 저자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행동의 결과를 담담하게 제시한다. 그 서사시 앞에서 독자는 절로 숙연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남아 있는 자들이다. 어떻게든 교훈을 얻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핵전쟁의 공포와 위협은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그러니 거대한 서사는 역사에 맡겨놓기로 하자. 원자폭탄이나 미시물리학이 주는 위압감이 강해질수록, 오펜하이머의 삶이 주는 여운은 약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기억하고 싶다. 평전의 특성상, 어떤 인물의 좋은 점과 업적만 드러낼 수 없다. 우리는 이 책에서 오펜하이머의 결함을 더 많이 발견한다. 그의 정신적, 육체적 나약함, 광기와 일탈, 편협함과 무책임(특히 가장으로서의)은 원자폭탄을 떼어놓았을 때, 오펜하이머를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 나는 자신의 부족한 면모를 독특한 방식으로 극복해 가는 정신을 발견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기 전, 오펜하이머는 저명한 물리학 교수였다. 그가 처음부터 강의를 잘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강의는 마치 기도문을 읊는 것처럼 단조로웠으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한편의 "공연"을 열었다. 드디어 음조의 변화가 생겼다. 중요한 부분일 때 목소리가 더욱 낮아지는 것이 흠이었지만. 강의록이 없이 말하다 보니 꽤 더듬기도 했지만, 항상 유명한 과학자나 시인의 말을 인용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는 "청중의 얼굴을 보고 어떤 부분에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파악하고는 즉석에서 설명 방법을 완전히 바꾸기도 했다. 한번은 단 한 명의 학생의 관심을 자극하기 위해 강의 시간 전체를 특정한 문제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기도 했다."(273쪽) 오펜하이머는 나름대로의 강의 방식을 고안했고, 이것은 그의 천재성과 결합하여 많은 제자들을 물리학의 길로 인도하며 자신의 조력자로 만든다. 저자들이 뚜렷하게 강조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페이지 너머에 실존하는 그의 카리스마와 통찰력을 엿본다. 


 오펜하이머의 가족은 어떨까? 키티는 오펜하이머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뒤, 병으로 사망한다. 아들인 피터는 아버지의 정체를 숨기며 평범하게 살고, 딸인 토니는 연약한 자아에 괴로워하다가 마음의 고향인 세인트존에서 자살한다. 그리고 메카시즘의 광풍 및 오펜하이머에게 닥친 불운의 여파로 학계에서 추방된 동생 프랭크는 대학교에 복직을 한다. 그리고 그는 1969년에 '익스플로러토리움'(Exploratorium)이라는 과학 박물관을 설립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 박물관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두 형제가 예술, 정치에 몰두하며 사는 동안 배운 모든 것들이 익스플로러토리움에 집약되어 있었다. 프랭크는 "익스플로러토리움의 목적은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게 해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면, 사회적, 정치적 세계 역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면 모두 침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892쪽)

 

 이 "모든 사람에게 권력과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세워진 과학 박물관은 현재까지 계속 운영되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남아 있는 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단순히 샌 프란시스코의 작은 만에서서 유지되는 박물관 하나만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세상이 멸망한 위협을 무릅쓰고 원자폭탄을 발명하려고 애썼던 이유가 동생의 염원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순간, 사회적, 정치적 세계를 비롯한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므로 남아 있는 자들은 이해하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의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 꼭 물리학이 아니어도 좋으니,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해를 포기하는 순간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곳에 내장되어 있는 원자폭탄의 연쇄 반응이 시작되는 때일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그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남아 있는 자들은 어떨까? 그들의 시선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스터 캐리』는 서로 다른 꿈을 향해 달려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캐리는 가족을 등지고 도시로 향했고, 허스트우드는 그런 그녀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모두 버리고 대도시로 간다. 하지만 그 선택은 자신을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비정한 세계에서 헛된 꿈을 좇은 자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캐리에게는 능력과 야망이 남아 있었고, 그것을 간직한 채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비평가들은 부도덕한 캐리가 도리어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작품의 도덕관이 잘못 되었다고 비난했지만, 그들은 이후의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드라이저가 제시한 냉혹한 사회에서 젊음과 능력을 모두 잃은 캐리에게 어떤 미래가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그들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노력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에 잇따르는 보상을 얻는다는 허황된 꿈을 믿었을 것이다.


 내가 『시스터 캐리』를 보면서 가장 피부로 와 닿았던 점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비전이 결국은 헛되다는 지점이었다. 캐리가 드루에의 도움을 받기 전, 그녀는 구두 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지만, 열악한 생활 환경과 낮은 임금은 삶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드루에와 허스트우드과 관계를 맺고, 그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캐리의 모습, 마침내 허스트우드의 제안을 따라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옮겨갔을 때 그녀가 느낀 가난의 압박들은 어떤 스릴러보다 숨이 막힌다. 벌이는 없는데 잔고는 줄어들고, 일자리를 구한다고 장담하던 허스트우드가 빈 말만 반복했을 때, 캐리는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투쟁해야 했다. 이 도시에서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녀가 배우로 성장하는 과정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뒷줄 어딘가에 배치되었다가, 동료들을 제치고 앞줄에 서게 되고, 마침내 조명을 받는 주연 배우로 성장하는 데에는 열정을 넘어서는 무언가의 요소가 존재했다. 노력하는 자는 '누구나' 성공한다는 환상은 사실 선택받은 계층의 특권을 지키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이 작품에서 드라이저는 캐리의 내면에 대해 치밀한 묘사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상을 적극적으로 서사에 반영한다. 대표적인 것이 전차 파업과 허스트우드였다. 한때 호텔의 매니저였던 그는 생전 다루어보지도 않은 전차 운전을 급하게 배워서 현장에 투입된다. 그러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배신자로 간주하여 그를 비난하고, 급기야 그를 끌어내어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군중들이었다. 이로 인해 간신히 직장을 구하나 했던 허스트우드는 더 곤궁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작가는 중산층인 허스트우드가 빈곤층으로 몰락하는 과정 속에 혼란스러운 미국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어 등장인물들이 시대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캐리와 드루에, 허스트우드는 모두 제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하지만, 어느 누구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캐리는 배 위에 타서 목숨을 건지지만, 흔들의자에 앉아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 자신이 추구했던 목표가 헛됨을 인식한다. 드루에는 예전처럼 부도덕하게 살아가고, 허스트우드는 그 물살에 휩쓸려 익사한다. 그외에도 그들의 주변 인물로 언급되었던 이들은 유령처럼 소모된다.


 확실히 나는 자연주의 소설들이 품고 있는 냉철한 시각에 매료되었다. 신의 은총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 오직 개인의 힘으로 생존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조차 자연의 힘에 의해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다는 인식, 그렇기에 미래나 과거에 대한 감상에 젖지 않고 지금의 상황에 충실하는 모습 등은 나에게 몇 가지 영감을 준다. 그래서 내가 작가들이 취하는 입장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약자에게 한없이 냉혹한 것은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복지의 체계화로 설명할 수 없는, 가난하고 약한 자를 외면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모습에 힘을 얻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살 필요는 없다. 가끔은 기꺼이 손해 보고, 기꺼이 실패해도 괜찮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를 위해 손을 뻗어주는 누군가가 있다고 믿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나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손을 뻗어야겠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이들은 시스터 캐리와 마찬가지로 공허한 결말을 맞이할 테니 말이다. 어쩌면 허스트우드보다 더 비극적인 운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